고용인은 황급히 남진혁의 사무실에 달려갔다.“남…… 남진혁 선생님, 사모님께서 얼른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고용인의 초조한 기색을 본 남진혁은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남진혁은 솔직히 이렇게 늦은 밤 사고가 터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지라 허겁지겁 옷을 주워 입고 강윤아가 있는 병실로 찾아갔다.고용인이 남진혁을 찾으러 갔을 때 강윤아는 억지로 방금 삼킨 약을 뱉어냈다. 하지만 조금 토해냈다 할지라도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어떡하지…….’수심 가득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더 나쁜 일이 벌어졌다. 강윤아의 배에서 갑자기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한 거다.이에 강윤아는 완전히 무너졌다. 강윤아는 이 일로 아이를 잃을 거라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하지만 경거망동할 수 없는지라 그저 바를 끌어안은 채로 남진혁이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남진혁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강윤아는 이미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남진혁은 눈살을 찌푸린 채 황급히 앞으로 다가가 강윤아를 부축했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왜 갑자기 배가 아프기 시작한 건데요?”강윤아도 알 수 없었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방금 간호사 한 명이 들어와 저한테 억지로 뭔가를 먹였는데 반응을 보아하니 낙태약인 것 같아요.”“뭐라고요?”남진혁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하지만 뭐라 말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고용인이 놀란 듯 소리쳤다.밤새도록 강윤아를 보살핀 건 자기인지라 강윤아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권재민이 책임을 물을 게 당연했기 때문이었다.그 생각만 하면 고용인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혹시 넘겼어요?”그때 남진혁이 물었다. 하지만 솔직히 강윤아의 반응을 보고 이미 어느 정도 답을 얻었다.남진혁의 표정을 보자 강윤아는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순간적으로 당황해하더니 눈을 딱 감은 채로 대답했다.“저…… 그래도 되도록 토해내려 했어요. 하지만 조금은 넘겼어요. 제발…… 제발 우리 아이 좀 살려줘요. 저…… 이 아이 잃고 싶지 않아요!”
병원 측 관계자가 CCTV 자료를 조회하는 사이 강윤아도 겨우 응급실에서 실려 나왔다.하지만 강윤아는 힘들었는지 혼수상태에 빠졌다. 눈을 꼭 감고 있는 강윤아를 보자 권재민은 순간 가슴이 저릿해 났다.그때 강윤아의 뒤를 따라 나오는 남진혁을 보자 권재민은 다급히 물었다.“윤아 씨 상태는 어때?”유달리 심각한 남진혁의 표정에 권재민은 안 좋은 소식이라도 듣게 될까 봐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괜찮아졌어. 다행히 제때 발견해서 고비는 넘겼어.”남진혁의 말에 권재민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그때 남진혁이 권재민의 표정을 보며 말을 보탰다.“음. 그 약은 아주 효과가 강한 약이더라. 다행히 소량만 섭취해서 괜찮았지 아니었다면…… 아이는 아마 구하지 못했을 거야.”“그래, 알았어.”권재민은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그리고 그 순간 이런 일을 꾸민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내 책임을 물을 거라고 속으로 다짐했다.강윤아를 다시 병실로 옮긴 뒤 권재민은 곧바로 CCTV 열람실로 향했다. 그러고는 CCTV 속에서 의심스러운 여성 간호사를 발견했다.강윤아가 아직 깨어나지 않은 상태인지라 권재민은 그 간호사가 누군가에게 매수당해 강윤아를 해쳤을 거라는 결론을 내리고는 곧바로 그 간호사를 잡아 오라고 명령을 내렸다.그 뒤로 수많은 사람이 병원 곳곳에서 그 간호사를 찾기 시작했다.“권 대표님, 그 간호사는 아마 일을 벌인 뒤에 도망친 듯합니다.”“알았어. 그 간호사의 인적사항을 조사하고 계속 찾아.”권재민이 무표정한 얼굴로 명령을 내리자 사람들은 또다시 병원 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 시각 화장실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려화 씨! 왜 여기 쓰러져 있어요?”려화라는 이름의 간호사가 화장실에서 눈을 떴을 때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이 몰려있었다.그리고 사람들의 대화 내용 속에서 려화는 자기가 지금 의심을 받는 상황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엥? 간호사복은 또 어디에 뒀어요?”동료 간호사가 려화의 옷차림을 보더니 놀란 듯 물었다.이에
강수아가 잡혔다는 소식은 곧바로 박민란과 강범석의 귀에 들어갔다.자기 딸애가 감옥에 가는 걸 당연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두 사람은 소식을 접하자마자 바로 강윤아를 찾아갔다.그 시각 강윤아는 병실에 앉아 귤을 먹고 있었다.강수아의 일을 겪고 나니 놀라긴 했지만 다행히 아이가 무사하기에 그나마 이토록 편한 마음으로 앉아 있을 수 있었다.게다가 권재민은 병실 경비에 각별히 더 신경을 써 앞으로 걱정할 필요도 없다.하지만 마침 그때 고용인이 안으로 들어오더니 입을 열었다.“사모님, 밖에 중년 부부가 와서는 사모님의 부모님이라며 만나고 싶다 하십니다.”강윤아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부모?’아버지라면 강범석일 테고 어머니는 아직 병원에 있으니 그 여자는 아마 박마란일 거다.강윤아도 강수아가 경찰에 체포됐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두 사람이 강수아의 일 때문에 찾아왔다는 걸 알았다.게다가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만나야지 하는 생각에 바로 입을 열었다.“들어오게 해요.”고용인은 바로 두 사람을 안으로 들였다.하지만 들어오기 바쁘게 박미란은 강윤아를 향해 버럭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강윤아, 너 악마니? 어떻게 자기 친동생한테 그럴 수 있어? 강수아가 얼마나 고생했는 줄 알아?”강윤아도 박미란이 자기 탓을 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들어오자마자 버럭 소리 지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기세등등함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강범석은 박미란처럼 흥분하지는 않았지만 말투는 좋지 않았다.“강윤아, 아빠가 전에 그렇게 가르쳤어? 한집안 식구끼리 동생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당장 사람 풀어.”강윤아는 두 사람의 반응에 화를 내기는커녕 피식 웃었다.“아버지, 강수아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해요?”“애가 장난 좀 친거 가지고 뭐? 수아가 아직 어려서 철이 없어서 그런 거잖니.”백미란이 불쑥 끼어들면서 딸을 위해 변명했다.그 말에 강윤아는 싸늘하게 콧방귀를 뀌었다.“흥, 장난? 그 장난이 사람을 죽일뻔했다는 건
권은우도 사실은 강윤아를 미워하는 건 아니다. 그저 권재민이 강윤아를 너무 싸고도니까 권재민이 아끼는 사람을 쫓아내면 상대를 괴롭힐 수 있겠다 판단한 것뿐이다.그 생각만 하면 권은우는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게다가 중요한 건 권은우는 전에 계속 은밀하게 관찰해 왔는데 송해나가 이 판을 설계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것만으로도 송해나의 능력을 살 수 있었기에 이렇게 총명한 동료를 하나 얻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판단이 선 거다.권지윤과 강수아는 송해나에 비하면 그저 쓰레기에 불과했다.송해는 겉으로는 아무 표정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그렇게 생각을 해보니 자기가 현재 손을 잡고 있는 동료들이 자꾸만 일을 그르치니 권은우와 손을 잡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결론이 났다. 적의 적은 아우니까. 게다가 권은우도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좋아, 그럼 앞으로 잘해보자고.”송해나가 손을 내밀자 권은우는 그 손을 잡으며 두 사람의 협력은 성사되었다.그 뒤로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누다가 헤어졌다.하지만 송해나는 자기가 곤경에 처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송해나는 차를 비교적 먼 곳에 세워 그곳까지 걸어가다가 모르는 사람들한테 길막을 당했다.“당신들 누구야?”송해나는 뒷걸음질 치며 앞에 나타난 무리를 훑어봤다.맨 앞에 있는 사람은 여자였고 그 뒤에 따라붙은 남자들은 딱 봐도 건달이었다.송해나는 당연히 금품갈취를 당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혹시 돈 필요해서 이러는 거야? 얼마면 되는데? 그냥 줄게.”이윽고 말하면서 바로 자기 백을 열었다.“하하하, 너무 순진한 거 아니야?”맨 앞에 서 있던 여자가 송해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여자의 얼굴이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드러나는 순간 송해나는 그제야 여자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상대는 다름 아닌 권은우의 여자친구였다.하지만 이 여자가 왜 이곳에, 그것도 건달들을 데리고 자기 길을 막고 있는 건지 이해는 되지 않았다.그저 아는 상대를 만나자 모
차에서 내릴 때까지 송해나의 창백한 얼굴은 혈색이 돌아오지 않았다. 혜지가 아까 보였던 모습은 진짜로 송해나를 해칠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 송해나와 권은우는 아무런 관계도 아닌 데다 오해이기에 그나마 그런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거다.그리고 모든 누명을 강윤아한테 씌워 버렸는데 혜지도 그걸 믿었으니 혜지가 앞으로 강윤아를 어떻게 할지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송해나한테는 당연히 혜지가 독하게 나올수록 좋은 거였다.송해나는 손을 들어 가슴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려고 했다.“괜찮아, 괜찮아…….”송해나는 낮은 소리로 자기를 위로했다.지금껏 그런 일을 한 번도 겪어본 적 없었기에 아까 일만 생각하면 송해나는 지금도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자기가 강윤아한테 그런 짓을 했다는 건 까맣게 잊은 듯했다. 오늘 자기는 그저 잠깐 체험만 한 거면서.송해나는 당연히 그런 걸 자각할 성격이 아니다. 그저 자기가 혜지한테 했던 말을 생각하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한참이 지난 뒤 송해나는 싸늘하게 웃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강윤아, 어디 한번 언제까지 잘난체하나 두고 보자고. 언젠간 너를 권재민 씨 곁에서 치워버릴 거야.”한편, 병원에서 오랫동안 몸을 회복한 강윤아는 집으로 돌아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하유, 병원에 너무 오래 있었더니 온몸에 곰팡이가 피어나는 것 같네.”강윤아가 짐을 정리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권재민은 귀엽다는 듯 가방을 빼앗아 들었다.“제가 할게요.”강윤아는 멈칫하더니 권재민이 자기 대신 짐 정리를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가슴 한구석에 따뜻한 물결이 넘실거려 그것에 취해 있느라 상대를 막아서지도 않고 오히려 옆에 기댔다.“오늘 회사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지 않나요? 요즘 여기 들르느라 일이 많이 밀렸을 거 아니에요. 제가 집에 가면 앞으로 저 너무 신경 쓰지 말고 회사 일에 전념해요.”“왜요? 제가 귀찮아요?”권재민은 고개를 돌려 강윤아를 힐끗 바라봤다. 그 순간 강윤아도 권재민이 진담인지 농담인지 분간할 수
“왜 은찬이도 데려왔어요?”강윤아는 놀란 듯 고개를 들어 권재민을 바라봤지만 상대가 뭘 하려는 건지 여전히 알지 못했다.그때 권재민이 입꼬리를 올리며 싱긋 웃더니 은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우리 결혼식인데 당연히 은찬이가 화동을 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옷 좀 보려고 왔죠.”권재민의 설명을 듣자 강윤아의 마음은 사르르 녹아내렸다.‘역시 재민 씨는 사람을 배려할 줄 안다니까.’안 그래도 강윤아는 아이가 생겨나면 권재민이 은찬에게 소홀해질까 봐 걱정했는데 이런 생각까지 할 줄은 몰랐다. 그제야 자기가 너무 쓸데없는 걱정을 많이 했다는 걸 알아차렸다.“엄마, 여기 진짜 너무 예쁘지 않나요?”은찬은 아직 어린지라 궁금증이 많아 그런지 새로운 환경에 도착하니 흥분한 표정으로 주위를 훑어봤다.강윤아는 은찬의 말에 그제야 웨딩숍의 실내 인테리어를 둘러봤다.권재민에게 끌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강윤아는 그저 권재민이 자기를 여기로 데려왔다는 놀라움에 빠져 있어 주위 환경은 신경도 쓰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화려하고 아름다운 환경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사실 이 웨딩숍은 국내에서 아주 잘 알려진 유명한 웨딩숍이다. 더욱이 이 웨딩숍의 드레스는 대충 하나 골라도 파리 혹은 이탈리아 유명 디자이너가 디자인하고 장인이 제작한 것이다.‘여기 드레스…… 엄청 비싸겠지…….’강윤아는 속으로 묵묵히 생각했다.강윤아도 예전에는 강씨 집안 아가씨여서 넉넉하게 살았지만 자기가 이런 곳의 드레스를 입어볼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왜 또 멍해 있어요?”권재민은 강윤아의 모습에 물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강윤아는 권재민을 돌아봤다. 그리고 그와 동시 자기도 이젠 좀 더 깨어 있어야겠다고 결심했다.솔직히 강윤아는 이런 것에 신경 쓰는 성격은 아니다. 어찌 됐든 권재민과 서로 사랑하고 있으니. 게다가 사랑하는 사이에 권재민이 이렇게 강윤아를 대하는 건 당연하다. 이것에 강윤아가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고.“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기대가 돼서요.”
강윤아네 식구가 행복한 모습을 하고 있자 송해나의 표정은 이내 일그러졌다.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감정을 곧이곧대로 내비칠 수 없었기에 송해나는 이내 질투를 숨기고 미소지었다.“어, 이게 누구야? 재민 씨, 재민 씨도 여기 있었네요?”권재민은 그저 무덤덤한 눈빛으로 송해나를 흘겨보더니 권지윤에게 시선을 멈췄다.권지윤이 나타나기만 하면 좋은 일이 있었던 적이 없었던 데다 송해나도 계속 권지윤과 붙어 다니는 사이라 좋은 생각을 하고 있을 리 없었다.아니나 다를까 권지윤은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와 강윤아를 훑어보더니 비아냥거렸다.“난 또 누군가 했더니 이제 보니 강윤아였네. 촌닭이 옷을 화려하게 입는다고 진짜 봉황이라도 될 줄 아나 보네.”말을 마친 뒤 권지윤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권지윤을 본 순간부터 걱정하기 시작한 강윤아는 권지윤이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자기를 이렇게 말하자 낯빛이 이내 어두워졌다.하지만 권지윤이 옆으로 지나가려 할 때 권재민이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사과해요.”권지윤은 권재민을 홱 째려봤다. 지금 아버지가 경성에 있기에 솔직히 권지윤은 무서울 게 없었다.“싫은데.”“사과해요. 세 번 말하게 하지 말고.”권재민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사람을 얼려죽일 것 같은 눈빛을 쏘아댔다.그 눈빛에 송해나와 권지윤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이윽고 송해나가 권지윤을 쿡쿡 찌르며 눈빛을 보냈다.그 뜻은 다름 아니라 그냥 사과하라는 뜻이었다.권지윤은 권재민의 눈빛에 겁을 먹었으면서 자존심을 꺾을 수 없어 송해나의 손을 잡고는 강윤아를 째려보더니 웨딩숍에서 나가버렸다.그러더니 밖으로 나가자마자 뒤를 돌아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저딴 여자가 대체 무슨 매력이 있어 재민이를 저렇게 홀렸는지 모르겠다니까! 예전에는 한 번도 저런적이 없었는데 이제는 고모인 내 체면은 아예 안중에도 없어!”송해나도 자꾸만 웨딩숍 안을 힐끗거렸다. 방금 강윤아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걸 보는 순간 송해나는 부러움과 질투가 한 번에 밀려
권씨 저택에서는 식사 준비가 한창이었다.그리고 그 시각, 김소혜와 권건하는 하인들에게 모임 준비에 관해 이것저것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가장 어르신은 권승호도 있으니까 각별히 신경 써야 했다.예전에 권성호가 없을 때 식구들은 바쁜 일이 있으면 모임을 그냥 넘겨버렸는데 이제 권성호가 돌아왔으니 제대로 준비해야 했다.더욱이 이번 가족 모임은 권성호를 환영하기 위한 모임이기도 하다.“여보, 재민이는 어떻게…….”김소혜도 꽤 오랫동안 아들을 보지 못해보고 싶었다. 게다가 아들이라곤 권재민 하나뿐인데 물론 서로 안 좋은 일이 있었다지만 너무 차갑게 굴 수는 없었다.“부를 거야.”권건하는 김소혜보다는 칼 같았다.“아버지도 오시는데 어린 게 안 오면 어떡해? 그게 어떻게 말이 돼? 전에 그 여자 때문에 식구들과 틀어졌으면서 가족 모임까지 오지 않으면 앞으로 그런 아들은 없는 셈 쳐야지.”권건하는 최근에도 아들에게 불만이 많다. 그도 그럴 게 권재민이 권지윤에게 한 짓 때문에 권성호에게 꾸중을 적잖게 들었기 때문이다.남편이 그렇게 말하자 김소혜는 참지 못하고 말을 보냈다.“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아무리 그래도 당신 아들인데. 걔도 그 여자한테 홀려서 그렇게 된 거지. 그런 여자가 대체 뭐가 좋다고 그러는지.”“이것 봐, 또 편들고 있잖아. 그렇게 편들어 습관 하니 다 커서도 부모 속 썩이는 거 아니야?”권건하는 불만 섞인 말투로 투덜댔다.이에 김소혜는 억울한 듯 중얼거렸다.“그럼 어떡해요? 아들 하나밖에 없는데. 당신도 제대로 관계하지 않았으면서 왜 나한테만 그래요?”권건하는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옆에 있던 권성호가 끼어들었다.“그만들 해.”방금 두 사람의 대화를 권성호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들어버렸다.권건하와 김소혜도 권성호의 목소리에 이내 뒤를 돌아보더니 입을 다물었다.“재민이가 이렇게 된 건 두 사람 잘못도 있어.”권성호는 지팡이를 쾅 내리치더니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그때 권성호를 눈으로 배웅한 김소혜가 또다시
강윤아라는 말에 권재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윤아가 우리 집에 온 이후로 힘든 일을 많이 겪었고 늘 다른 사람의 타깃이 되었어요. 재민이가 너무 다른 사람의 호감을 사 그녀를 연루시킨 거죠.”“재아 씨가 지금 걱정해도 소용없어요, 재아 씨부터 잘 챙겨요.”윌은 재아의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자, 재아 씨 기분 전환하러 갔다가 나중에 우리 집에 가요.”그 말을 들은 권재아는 얼굴이 빨개졌다.“얼굴이 왜 빨개지는 거예요? 내가 옆에 있었으면 재아 씨가 좀 더 편하게 잠들 거예요.”윌은 웃으며 농담했다.재아는 얼굴이 빨갛게 상기 된 채 그를 한 대 때렸지만 거절하지 않았다.날이 저물자 바다는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고 이따금 파도가 아련하게 일기도 했다. 해변의 모래사장에는 간간이 등불이 있는데, 등불은 그다지 밝지 않고 군데군데 있어서 밤하늘의 별과 서로 잘 어울렸다.재아는 부드러운 모래를 밟으며 앞으로 한 걸음씩 폴짝폴짝 뛰어갔다. 귓가에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아득하고도 고요했다.윌은 재아의 뒤에서 몇 걸음 걷다가 재아가 전혀 알아채지 못하자 성큼성큼 몇 걸음 앞으로 나가 그녀의 손을 잡고 손바닥으로 감쌌다.재아는 어리둥절해 하더니 이내 두 눈이 반달 모양으로 변했다.“손잡고 싶은 거면 얘기하지 그랬어요.”재아의 표정이 너무 도도해서 윌은 눈살을 찌푸리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코끝을 긁었다.“그러게 누가 재아 씨더러 아무것도 모르래요?”술도 밥도 배불리 먹었으나 그 뒤로 딴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재아는 윌 덕분에 배불리 먹었고 지금은 기분이 너무 좋았다. 윌의 손을 잡고 있자니 따뜻한 손바닥에서 전해오는 힘에 말할 수 없는 안정감을 느꼈다.백사장을 따라 한참을 걸은 후에야 마침내 윌이 말한 그 ‘재미있는 곳’에 이르렀다.재아는 어두컴컴한 불빛 속 나무 밑에 숨어 있는 해먹에 하마터면 눈살을 찌푸릴 뻔했다.“여기가 재밌는 곳이에요?”“재미있는 곳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올 거잖아요?”윌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올라탄
회의가 끝난 후, 권재아는 권현우가 그녀를 쉽게 보지 못하게 하려고 여전히 당당하게 걸어 나갔지만, 사무실로 돌아온 후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초조하고 어쩔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재아는 매우 낭패한 모습이었다.재아는 권재민에게 이 일을 알리려 문자를 보냈지만, 그쪽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재아는 윤기태에게도 이 일을 말했다. 기태도 분노했지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재아가 풀이 죽은 모습을 보며 화가 났지만 재아를 먼저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대표님, 이런 결과는 대표님도 원하지 않겠지만, 정말 방법이 없잖아요. 자책하지 마세요, 권재민 대표님이 돌아오시면 분명히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재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기태의 위로가 전혀 소용이 없었고 재아는 여전히 괴로웠다.재아의 이런 모습을 본 기태는 더는 방해하지 않고 그녀에게 인사한 후 자리를 떴다.늦은 시간, 재아는 여전히 회사에서 일을 처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무실 문이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권재아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만 했다.갑자기 넓은 손이 재아 앞에 다가오더니 그녀의 머리를 강제로 들어 올렸다.재아는 화를 내려다가 윌임을 발견했다. 순간 화가 난 얼굴이 미리 설정된 듯 활짝 웃는 얼굴로 바뀌었다.“아, 윌, 여긴 어쩐 일이에요? 귀국하지 않았어요? 돌아왔으면 나한테 말해주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내가 공항으로 데리러 갔을 텐데.”윌은 재아의 머리를 받치고 있던 손을 풀고 책상을 돌아 재아의 앞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러는 내내 눈빛은 재아에게서 떠나지 않았다.“보고 싶어서 돌아왔어요. 알려줬으면 어떻게 서프라이즈를 해줬겠어요. 왜 이렇게 피곤한 얼굴이죠? 날 봤을 땐 화가 잔뜩 난 얼굴이었어요.”윌이 그녀 앞에 서자 재아는 윌의 허리를 끌어안고 머리를 살짝 윌의 몸에 기대며 풀이 죽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윌은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은 듯해 보여 더는 강요하지 않고 빨리 나가자고 재촉했다.“주차장에서 오래 기다렸는데도 안 내려와서 야근하는 거 아닌가
권재민은 강윤아의 움직임을 추적한 뒤 곧바로 현진성과 합류해 구출 계획을 논의하고 애스릭이 숨어 있는 곳으로 쳐들어가려 했다.하지만 이번에도 그들은 변장하고 다가갔다. 애스릭은 분명 그들을 경계할 것이고, 외딴 섬에서의 일을 겪었으니 애스릭의 경계와 의심이 더 강해지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들은 반드시 만반의 계획을 세워야만 윤아를 구해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같은 시간, 국내에 있던 김소혜와 서만옥은 출국할 예정이었다.그날 기슭에 도착한 후 재민은 아이를 안배하고 나서 소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혜는 발신자가 실종된 지 오래된 자기 아들이라는 것을 보고 매우 흥분했다.“재민아, 드디어 엄마한테 전화했구나. 그동안 네가 나한테 전화 안 해서 우리도 방해할 엄두가 안 났는데 너는 지금 어때? 윤아는 행방불명이야? 윤아를 구해낸 거 아니었어?”소혜는 재민의 전화가 희소식을 전하러 걸려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재민은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민의 전화를 받은 후 마음이 매우 흥분되고 기뻤기 때문이기도 했다.재민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소혜의 이렇게 흥분한 말투를 들으며 차마 그녀에게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급박해서 아이를 돌볼 가족이 있어야 했다. 비록 의사가 있지만 그는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다.그는 이를 악물고 실정을 소혜에게 말했다.“엄마, 내 말 좀 들어봐요. 마음을 다잡고 들어요, 일이 이렇게 됐어요…… 엄마가얘기한 거랑 상황이 좀 달라요. 윤아가 처음에 구출되긴 했는데 다시 잡혀갔어요. 그동안 연락이 없었던 건 내가 계속 그 사람의 경계에 잠복해있었기 때문이에요.”재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혜가 말을 끊었다.“뭐? 구출되긴 했는데 또 잡혀갔다는 건 뭐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엄마, 내 말끝까지 들어봐요.”재민이 이마를 어루만졌다.“이 일은 당분간 자세히 말하기 어려워요. 제가 윤아를 데려가고 나서 자세히 말해줄게요.”
고승혁 교수가 협조를 거부했기 때문에 애스릭은 더 심하게 때렸다. 거의 몇 시간마다 가서 괴롭혔는데 매번 때리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말로 욕했지만 고승혁 교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강윤아는 고승혁 교수가 돌아올 때마다 얼굴에 약간의 상처가 생기는 것을 보고 차마 지켜볼 수 없었다.사실, 애스릭이 매번 고승혁 교수를 데려갈 때마다 그가 입을 열어 경험을 전수해주도록 했을 뿐 매번 그를 때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승혁 교수는 돌아올 때마다 애스릭의 부하들에게 얻어맞았다.고승혁 교수는 베티를 치료해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배신하기까지 했기 때문에 그들은 매우 원망스러웠다.“고승혁 교수님, 저 때문에 교수님이 억울한 일을 당했으니 협조하고 절 그냥 내버려 둬요.”“괜찮아요, 때리고 싶으면 때리고 욕하고 싶으면 하라고 해요. 나는 견딜 수 있어요. 나는 오히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어디까지인 보고 싶어요. 언젠가 내가 정말 견딜 수 없게 되면 자연히 그들에게 항복할 거예요. 그때 가서 윤아 씨가 나를 원망하지 말아주세요.”고승혁 교수는 손을 내저으며 개의치 않는 듯 윤아를 향해 농담까지 했다.“교수님은 이미 내 목숨을 구해줬고 내 아이를 지켜줬어요. 이것만으로도 저는 이미 교수님에게 감사해요. 교수님이 앞으로 나를 어떻게 대하든 나는 받아들일 수 있어요.”윤아는 고승혁 교수의 이런 모습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다.“정말 내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이건 내 인생 경험의 일부일 뿐이에요. 살아서 나갈 수 있다면 밑지는 장사는 아니에요. 굴복해 연명할 수 있지만 내 양심에 어긋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고승혁 교수는 윤아가 미안한 표정을 짓자 그녀를 안심시켰다.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우리가 살아서 나갈 수 있다면 교수님의 연구원에 많이 투자할게요.”“그럼 먼저 윤아 씨에게 감사해야겠어요.”“고승혁 교수님, 우리는 함께 목숨 걸고 싸운 사이이니 그냥 저를 윤아라고 부르세요, 윤아 씨는 너무 서먹서먹해요.”윤아가 고승혁을
메리는 인큐베이터 옆에 있는 의사가 멍하니 있는 것을 보고 그를 한 번 쿡 찌르며 낮은 소리로 주의를 시키었다.“존, 사람들이 묻고 있잖아요.”“네?”존은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권재민은 옆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다시 물었다.“내 아이의 상태가 어떤지 물었어요.”“아기는 지금 상태가 안정돼 있고 아까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놀라지 않았어요. 달이 차지 않아 태어났기 때문에 면역력이 좋지 않아 인큐베이터에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요.”존은 마침내 반응을 보였고 무서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재민은 가볍게 알았다고 대답하고 고개를 숙이고 인큐베이터 안의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갑자기 생명이 정말 완강하다고 느꼈다.강윤아에게 그렇게 많은 위험이 닥쳤는데도 이 아이는 이렇게 안전하고 무사하게 태어났고, 게다가 아무런 문제도 없으니 앞으로도 꿋꿋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눈앞의 작은 아이가 이렇게 많은 일을 겪으면서도 건강할 수 있다면, 아이의 엄마 윤아는 분명 더 완강할 것이다. 그동안 많은 일을 겪었지만 윤아는 아슬아슬하게 돌아왔으니 이번에도 반드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재민은 보면 볼수록 더 반가웠고 윤아가 출산할 때 옆에 없었지만 수술실 밖에 있었으니 좀 멀지만 어떻게 보면 윤아 옆에 있은 셈이다. 다음번에는, 다음번에는 윤아 옆에 꼭 있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재민의 부드러운 표정을 보고 현진성과 한기현도 옆으로 다가가서 아기를 바라보았다.“윤아 씨를 많이 닮아서 참 예뻐. 앞으로 윤아 씨처럼 예쁘게 자랄 거야.”기현은 한참을 쳐다보았다.옆에 있던 진성은 자기도 모르게 웃으며 말했다.“태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어떻게 윤아 씨와 닮은 줄 알아요? 갓난아이는 이목구비도 다 비슷비슷하고 쭈글쭈글한 모습이 늙은이 같다는 생각만 들어요. 게다가 머리카락이나 눈썹도 다 나지 않았잖아요.”“진성 씨…… 왜 그래요? 분명 윤아 씨를 닮았잖아요?”핀잔을 들은 기현은 얼굴이 빨개졌다.“재민아. 진성 씨 봐, 너의 아이가
한기현은 다시 권재민에게 전화를 걸어 그들이 숨은 곳을 알려줬지만 강윤아가 끌려갔다는 사실은 알려주지 않았다.재민은 재빨리 이곳으로 달려와 둘러보았으나 윤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미간을 찌푸린 채 의심스러운 얼굴로 기현과 현진성을 힐끗 쳐다보았다.“기현아, 현진성 씨, 윤아 씨는요? 윤아 씨가 왜 여기에 없죠?”두 사람은 안절부절못했다. 평소 대단한 사람들이었지만 지금 재민 앞에서 감히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기현은 슬며시 진성을 쳐다보고 몰래 진성을 쿡 찔렀다. 진성은 방심하다 밀려났고 뒤를 돌아보며 기현을 노려보았지만 기현은 고개를 숙이고 더는 두 사람을 쳐다보지 않았다.“묻고 있잖아요! 윤아 씨는요? 내 아내 어디 갔어요? 당신들 윤아 씨를 어디로 데려갔어요?”재민은 두 사람의 행동을 보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소리쳤다.진성은 미안한 표정으로 재민을 바라보며 재민에게 그가 떠난 후의 일을 대충 말했다.“권재민 대표님, 죄송합니다, 제가 윤아 씨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애스릭에게 빼앗겼어요. 제가 부주의했어요. 그 방에 숨으면 아무 일도 없을 줄 알았는데, 애스릭이 이렇게 교활하게 두 가지 계략을 쓸 줄은 몰랐어요.”“권재민 대표님, 지금 저를 때리고 욕해도 저 할 말이 없어요.”이 말을 들은 재민은 온몸에 살기가 피어올랐고 두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진성을 노려보며 허리에서 총을 꺼내려 했다. 기현이 황급히 그런 재민을 말렸다.“재민아, 일단 흥분하지 마, 방법이 있을 거야. 같은 편이니 우릴 도울 수 있어. 게다가 인터폴이야. 너 인터폴을 죽이는 건 큰 문제가 아니지만, 윤아 씨부터 찾아야지. 지금 우리는 진성 씨가 필요해.”기현은 재민의 허리춤의 총을 쥔 손을 힘껏 눌렀다.진성도 황급히 위로했다.“권재민 대표님,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밖에 비도 오고 바람도 심해서 빨리 갈 수 없으니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거예요.”“게다가, 우리 배에는 위치추적 장치가 있어요. 아주 은밀한 곳에 두었으니, 그들은 분명히 찾을 수 없
한기현은 사람과 함께 현진성의 사람들을 따라 수술실의 암도 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길을 따라가다가 애스릭의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기현은 그들 모두가 깨끗이 떠난 줄 알고 있었는데 애스릭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사람을 남겨 그들을 몰살시킬 준비를 했을 줄은 몰랐다.기현의 눈에 갑자기 핏빛이 솟구쳐오르더니 몸을 돌볼 겨를도 없이 맨주먹으로 몇 사랑을 해치웠다.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독살스러운 모습까지 보여 상대방을 놀라게 했다.그 사람들은 애스릭을 보낸 후 매우 내키지 않았다. 한바탕 뒤지고 나서 도망갈 계획이었는데, 결국 절반 정도 뒤지다가 기현 일행을 만났다. 특히 기현은 어두운 얼굴을 한 채 그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듯 보였다.그들은 원래 기현 일당과 대충 싸우려고 일부러 그들을 놓아주려 했는데 기현이 달려들어 그들 몇 사람을 쓰러 눕히자 분노가 치밀어 올라 기현 일행과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기현이 상대방의 생각을 알면 지금쯤 후회해 죽을지도 모른다. 몇 분 동안 아무렇게나 싸우면 될 일을 이렇게 충동적으로 또 한 번 미뤘다.몇 분 동안 싸운 후, 쌍방은 모두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기현의 왼팔이 그 무리의 두목을 누르고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총을 쥐고 그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누고 있어 쌍방이 모두 시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기현은 그들의 타협을 기다렸고, 그 사람은 반격의 기회를 기다렸다.이 팀장은 원래 타협하려 했지만, 지금 이 지경에 이르니 승리욕이 자극되었고 지금은 고개를 숙일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머리를 숙이면 부하들이 그를 무시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라도 그는 승부를 내려고 했다.이때 폭발음이 드디어 또렷하게 들렸고 그 사람은 이때 갑자기 손을 썼다.기현은 그가 성급히 달려들 것을 예상한 듯 손을 빼 권총을 내던지고 날쌔게 상대방의 손을 잡아 그의 등 뒤로 돌렸다. 두 발은 날렵하게 그의 허리와 배를 걷어찼고 곧 사납게 그의 몸을 비틀어 앞을 가
현진성은 애스릭의 부하들이 베티를 데려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애스릭이 아직도 단념하지 않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애스릭이 베티를 포기하거나 그들과 함께 죽으려고 이 보이지 않는 장치를 작동시켰다고 생각했다.애스릭이 여전히 단념하지 않고 베티를 데려가서 부활을 꿈꾸고 있을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애스릭은 고승혁 교수와 강윤아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진성은 갑자기 눈꺼풀이 미친 듯이 뛰며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 윤아와 고승혁 교수가 숨어 있던 방에서 총소리가 났다.그는 급히 아까의 그 방으로 돌아갔다. 들어가 보니 그가 배치한 사람 중 몇 명은 상처를 입었고, 또 몇 명은 이미 의식을 잃었으며 그중 한 명은 이미 죽었는데 의사였다. 그 의사는 아기의 인큐베이터를 필사적으로 안고 있었다.진성은 그 의사의 시체를 땅에 부축하려고 했지만, 그 사람의 손이 인큐베이터 가장자리를 필사적으로 잡고 있어서 아주 많은 힘을 써서야 그 손을 쪼갰다. 진성은 겨우 옆 깨끗한 곳으로 메고 가서 그를 살며시 내려놓았다.의사를 내려놓은 진성은 돌아서서 인큐베이터 안의 아기를 살펴보았다. 아기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매우 달콤하게 자고 있었기에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모두가 엎드려 있어서 진성은 한동안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하나하나 뒤집어 보았다. 애스릭의 사람들이 그냥 들어와서 그들을 다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고승혁 교수를 데려갔을 줄은 몰랐다.진성은 갑자기 윤아가 떠올랐다. 총소리가 그렇게 컸으니 윤아가 정신을 차리지 않았을 리 없다. 진성은 급히 모퉁이의 병상 옆으로 달려갔다.이불 속이 울퉁불퉁했다. 그는 처음에는 고승혁 교수 등이 윤아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고 생각했지만 열어보니 안에 베개가 있었다. 진성은 멍해졌다.“이 방은 밀폐되어 있는데 그들은 어디에 잡혀간 거지? 게다가 방금 내가 문 앞에서 지키고 있었으니 문으로 나갔을 리가 없어.”진성은 조급했다.갑자기
고승혁 교수는 숨을 헐떡이며 말하고는 바다 위를 바라보았다. 바다 위에 배가 한 척 있었는데 애스릭이 그 배에 있었고 많은 사람이 그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고승혁 교수는 깜짝 놀라 몇 발짝 뒤로 물러서며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현진성은 그에게 대답할 방법이 없어서 그를 붙잡고 비밀 통로로 갔다.권재민도 급히 한기현에게 연락해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했다.그러나 신호를 받자마자 재민은 기현 쪽에서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기현아, 무슨 일이야?”재민은 노심초사하여 급히 물었다.“방금 그 사람들이 들이닥쳐 시스템을 파괴했어. 최선을 다해 구조했으니 지금은 30분 정도 지연될 수 있어.”“시스템 복구가 시급한데 지금 그들과 싸우는 중이라……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어.”기현은 시스템 감시실에서 애스릭의 부하들과 싸우며 관제탑에 다시 접근하지 못하게 막으면서 권재민과 이쪽의 상태를 보고했다.보고하는 과정에서 재민은 기현의 끙끙거리는 소리까지 듣고는 더욱 마음이 급해졌다.“기아현, 너는 어때? 버틸 수 있겠어? 시스템 쪽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지금은 복구할 방법이 없어. 이젠 네가 나설 차례야. 우리가 살아나갈 수 있는 시간은 안 남았어요, 재민아.”“상대편은 사람이 너무 많은데 우리 사람은 이 몇 명밖에 없어. 버티기 힘들 것 같아, 재민아, 빨리 와.”기현이 헐떡이며 소리쳤다.재민은 이 소식을 듣고 마음이 급했지만 윤아가 이쪽에 있었기에 결정하기 어려웠다. 윤아가 힘없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서 매우 걱정했다.진성은 재민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내 부하들이 애스릭의 부하들에게 습격당했고, 그자들이 통제실의 시스템을 파괴했대요. 지금 우리 부하들이 그들과 싸우고 있는데 기현이도 그들에게 얽매여 시스템을 고칠 기회가 전혀 없어요…… 나는 윤아 씨가 마음에 걸려요.”재민은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가요, 여기 내가 있을게요. 기지 안에 내 사람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