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 내일 시간 있어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같이 밥 한 끼 하고 싶어요.”송해나는 달콤한 목소리로 전화기 너머의 권지윤을 향해 말했다. “그래, 당연히 좋지.” 권지윤은 두 말없이 대답했다. “고모, 요즘 윤정호랑…… 어떻게 지나시나요?” 그러자 권지윤은 순간 흥분하더니 다소 수줍어하는 것 같았다. “꽤…… 잘 지내.” 들리는바로 윤정호는 송해나의 말은 무조건 잘 따라준다 한다. 그러므로 분명 윤정호가 권지윤을 잘 달랬을 것이라 생각한 송해나는 자신도 모르게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럼 윤정호도 같이 불러서 밥 먹을까요?” 송해나가 슬쩍 찔러보듯 물었다. 권지윤은 자연히 송해나의 제의에 의견 없었고 시원하게 승낙했다. 다음 날, 이들은 식당에서 만났다. 권지윤의 표정을 본 송해나는 권정호가 이미 권지윤을 잘 달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송해나는 권지윤과 윤정호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는데 눈빛은 다소 의미심장했다. 권지윤은 저절로 수줍하며 고개를 숙였고 윤정호는 다소 실망한 듯한 눈빛이 서려있었다. 하지만…… 송해나가 시킨 일이라면 그것이 자신의 뜻에 어긋나는 일일지라도 윤정호는 기꺼이 다 해주었다. “해나, 너 머리는 왜 그래?” 권지윤은 송해나 머리 뒤의 거즈를 바라보더니 물었다. 사실 윤정호는 일찌감치 눈치를 챘고, 처음부터 묻고 싶었지만 권지윤이 자신의 말투 속에서 이상함이라도 감지할까 두려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에휴…….” 여기까지 말한 송해나는 순간 화가 났다. “이건 모두 그 강윤아 때문입니다!” 송해나는 눈물을 약간 글썽이며 불쌍한 눈빛으로 권지윤을 쳐다보더니 말했다.“고모, 제가…… 제가 대체 강윤아보다 못한 게 뭐가 있나요? 왜 권재민의 마음엔 제 자리가 하나도 없는 걸까요?” 전부터 송해나는 자신에게 엄청 잘해줬고 지금은 윤정호도 자신에게 소개해 주었는데 권지윤은 얼마나 만족스러웠는지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 송해나가 억울한 일을 당한 이상 권지윤은 자신의 힘으
결국 권지윤과 말썽을 일으킨 여자들을 쫓아냈음에도 불구하고 회사에는 약간의 소문이 돌았다.강윤아와 태성그룹의 권재민이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찾아와서 소란을 피우니 의심이 생겼다.그러나 이런 문제는 원래 그들이 걱정해야 할 것도 아니다.심지어 강윤아가 할 만큼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기에 그녀의 프라이버시를 깊이 따지지 않았다.이 일은 곧 권재민의 귀에 전해졌다. 그는 권지윤이 이렇게 지나친 일을 하리라고는 도무지 생각하지 못했다.권지윤에게 의사를 분명히 전달했음에도…… 좋은 말로 타이를 때 듣지 않으니 그가 무정하다고 탓할 수도 없다.저녁에 권재민은 집에 돌아와 권지윤을 찾아 비행기 표 한 장을 그의 앞에 던졌다.권지윤은 비행기 표를 보다니 표정이 굳어버리며 물었다.“재민아, 이게 무슨 뜻이야?”“고모, 비록 고모라고 부르지만 당신이 한 모든 짓을 용납한다는 것은 아니에요.”권재민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의 불쾌함을 보아낼 수 있었다.권재민이 이번 일로 반드시 찾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권지윤의 속마음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재민아, 이해가 안 돼…… 너의 이 말은 무슨 뜻이야?”권지윤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권재민은 무표정한 얼굴로 권지윤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르는 척하지 마세요. 나의 뜻을 모를 리가 있겠어요? 속셈이 있는 줄 알았는데 여전히 후회가 무엇인지 모르네요. 그렇다면 나도 더는 참을 수 없어요.”그러면서 비행기 표를 가리키며 말했다.“당장 이곳을 떠나세요.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관용을 베푸는 셈이죠.”권지윤은 안색은 어두워지며 달갑지 않게 말했다.“무슨 근거로 날 쫓는 거야?”“싫어?”권재민은 눈썹을 치켜세웠다.“만약 가기 싫으면 당신이 요 몇 년간 밖에서 제멋대로 한 일을 전부 아버지에게 알려줄 거야.”이 말을 듣자 권지윤의 안색은 대번에 변해버렸다. 권재민이 그녀가 제일 무서워하는 말을 꺼냈다.“할아버지 앞에서 항상 착한 얼굴을 하고 있는걸 다 알고 있어. 그
권재민이 위협을 하자 권지윤은 송해나를 불러냈다.“해나야, 이제야 왔구나.”권지윤은 송해나의 손을 잡고는 그녀를 이미 예약한 룸에 데리고 들어갔다.“작은고모, 왜 이렇게 급하게 저를 불렀어요?”권지윤이 손을 잡아당겨 아팠지만 송해나는 아픈 기색을 감추며 물어보았다.“해나야, 작은고모는 너무 불쌍해.”권지윤은 우는 척하며 눈물을 닦는 시늉을 했다.“무슨 일 있었어요?”송해나가 의심스럽게 물었다.“그 나쁜 여자 때문이지.”강윤아를 언급하자 권지윤의낯은 혐오스러워졌다.“왜?”"며칠 전에 강윤아 회사에 따지러 갔었잖아? 재민이가 이 일을 알고는 엄청 화를 냈어. 나한테 비행기 표를 주며 내가 가지 않으면 아버지한테 일러 내 카드를 끊어 더는 돈을 못 쓰게 하겠다고 했어. 어쩜 좋아, 내가 어떻게 이런 재수 없는 일을 당했을까?”권지윤은 거리에서 소란을 피우는 아줌마처럼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어머, 어떻게 이런 일이!”송해나는 권재민이 그 여자를 위해 육친 불인의 이르렀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러나 송해나는 자상한 척하며 위로했다.“괜찮아요 작은고모. 재민이가 농담으로 한 말일지도 몰라요. 누가 자신의 고모를 쫓아내겠어요.”“아니야. 난 재민이를 알아. 그는 말하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야.”권지윤은 그날 권재민이 화를 내는 모습을 생각하면 아직도 두려웠다.“안심하세요 고모. 어머님도 계시니 어머니께서 대신 말씀해 주실 대신 말씀해 주실 거예요.”송해나는 권지윤의 등을 두드려주며 위로해 주었다."해나야, 내가 너를 위해 도우려고 한 거야.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내가 강윤아 회사에 가서 소란을 피우지 않았을 거고 권재민이게 욕을 먹지도 않았을 거야.”송해나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귀띔했다.“그런데……고모. 고모도 강윤아를 싫어해요.”“그래, 나도 싫지만, 그녀는 결국 나에게 아무런 위협이 없어.”아무튼 권지윤은 말끝마다 자신이 송해나를 위해 이렇게 되었다고 강조했다.송해나는 내심 이런 권지윤이 혐오스러웠다. 분명히 그
“어디 나가게요?”“네. 그러는 재민 씨는 뭔 일 있어요?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요?”의아한 듯한 눈빛을 보내는 권재민의 모습에 강윤아가 오히려 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이 시간에 권재민과 마주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하지만 권재민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눈을 가늘게 접으며 또 질문을 던졌다.“어디 가는데요? 뭐 약속이라도 있어요?”주말 이른 아침부터 집에서 휴식하지는 않고 밖으로 나가는 강윤아가 몹시 못마땅한 모습이었다.“아니요. 회사 나가려고요. 어제 하던 일이 좀 남아서 일찍 가서 처리하려고요. 안 그러면 주말 내내 불편할 것 같거든요.”신발을 다 갈아 신은 강윤아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못 가.”하지만 때마침 권재민이 문 앞을 막아섰다.‘이른 아침부터 또 왜 이런담?’강윤아는 권재민이 이러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힘들어 쓰러져야 일 그만할래요? 오늘 주말이에요, 휴식하는 날이라고요. 오늘은 제 말 들어요, 회사 나가지 말고 저랑 놀아요.”“재민 씨, 저는…….”잔뜩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권재민의 모습에 강윤아는 뭐라 설명하고 싶었지만 눈을 부릅뜬 채 보내오는 시선에 말을 잇지 못했다.“제 말 안 들어주면 어떤 결과가 있을 건지 윤아 씨도 알 텐데요?”잇따른 경고의 메시지에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그도 그럴 게, 강윤아도 권재민의 수단을 파악하고 있기에 자기가 고집을 부리면 권재민이 뭔가를 할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때문에 끝내 타협하기로 결정했다.“알았어요.”“은찬은 뭐 해요?”방으로 들어가면서 무심코 묻는 물음에 강윤아가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은찬이 아직 자요.”“은찬이가 아직 깨어나지도 않았는데 혼자 나가려고 한 거예요? 퍽이나 안심이 되겠어요.”‘어머니들은 아이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나?’그런데 어떻게 된 게 눈앞의 여자는 아이를 내팽개칠 정도로 워커홀릭인지 권재민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저 어제 은찬이한테 이미 말해뒀어요. 그리고 은찬이도 이제
밤이 되자 뭇별들이 탁 트인 하들은 수놓았고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담은 강윤아의 눈은 파도처럼 일렁였고 알 수 없는 정서가 반짝였다.그러던 그때, 은찬이 갑자기 손을 잡아 오더니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감탄했다.“엄마, 저기 펜션 봐봐요. 진짜 예뻐요.”어안이 벙벙해서 눈을 들어 확인한 순간, 강윤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고풍스러운 펜션은 바로 자기가 5년 전 처녀의 몸을 잃은 그 펜션이었으니까.강윤아의 눈빛은 순간 이상한 기색이 서렸고 눈에는 약간의 노여움과 막연함이 배어있었다.‘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지?’익숙한 곳을 다시 와보니 머릿속에 야릇하던 그날 밤의 화면들이 잠깐잠깐 스쳐지나갔다. 기억 속의 낯선 남자는 강윤아와 가장 친밀한 행위를 하고 난 뒤 차가운 옥패 하나만 남겨 놓고 떠나버렸다.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뒤 강윤아는 은찬을 임신했다.입술을 깨물며 머릿속에 흘러드는 기억을 털어버리며 강윤아는 복잡한 마음으로 권재민을 바라봤다.“왜 이 펜션을 선택한 거예요?”권재민도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눈을 들어 올리며 진지하게 대답했다.“여기가 이 부근에서 가장 유명한 펜션이라고 해서 일주일 전부터 예약한 거예요. 음…… 환경도 괜찮으니까 들어가 봐요.”강윤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미처 다른 반응을 보이기도 전데 권재민은 은찬을 데리고 나무다리를 건너 펜션 안으로 걸어 들어가 버렸다.이에 강윤아는 이상한 기색을 한 채로 하이힐을 밟으며 두 사람 뒤를 따랐다.권재민은 펜션에 발을 들이자마자 은찬을 데리고 예약해 둔 방으로 걸어갔다. 강윤아가 그 뒤를 따라 들어왔을 때, 은찬이 잔뜩 흥분한 채 방키를 가지고 노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강윤아는 발걸음을 잠깐 멈추고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훑어봤다.홀 안에 놓인 장식품들은 많이 변했지만 대체적인 인테리어는 5년 전과 똑같았다. 게다가 검은 뿔테 안경을 끼고 염주 팔찌를 한 채 카운터를 보고 있던 남자 사
오래된 술이라 그런지 마개를 여는 순간 알코올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강윤아는 본인이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권재민이 건네는 술을 받아 드는 순간 마치 홀리기라도 한 듯 목구멍으로 꿀꺼꿀꺽 넘겼다.그러고는 이내 발그레 해진 뺨을 들며 깊은숨을 내쉬었다.“이 술 진짜 괜찮네요. 향긋하면서도 목 넘김도 부드럽고.”잔뜩 흥분한 강윤아의 눈은 물이 차 넘치는 것처럼 일렁거리고 반짝거려 앞에서 보고 있던 권재민은 순간 호흡이 가빠왔다. 그러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눈웃음을 지었다.“거 봐요, 제가 뭐랬어요? 하윤 씨도 좋아할 거라고 했죠?”강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스스로 자기 잔을 채우더니 권재민이 들고 있는 잔에 짠하고 부딪혔다.“이렇게 둘만 술 마시는 것도 오랜만인데, 재민 씨도 마셔요.”그렇게 한 잔 두잔 마시다 보니 두 사람 모두 취기가 점점 올라왔다. 하지만 독한 술이 아닌지라 연속 몇 잔을 들이켰는데도 의식은 여전히 또렷했다.매혹적인 달빛 아래, 분위기는 점점 달아올랐고 강윤아의 발그스름한 양 볼은 부드러운 달빛 아래에서 더 매혹적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권재민은 순간 입이 말라 참지 못하고 강윤아를 잡아 자기 품에 끌어안았다.코끝을 스치는 술향기와 바디워시 냄새는 사람의 정신을 잡아끌었다.권재민은 강윤아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뜨거운 숨결이 피부에 닿자 간지러우면서도 화끈거려 강윤아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간지러워요.”손을 뻗어 자기를 꼭 끌어안은 남자의 팔뚝을 밀었지만 상대의 힘이 오히려 더해지는 바람에 강윤아의 심장은 더 심하게 요동쳤다. 그때, 귓가에 남자의 나자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디가 간지러워요? 응?”강윤아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권재민의 품에서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입을 뻐금거리며 뭐라고 하려던 찰나 권재민의 입이 덮쳐오는 바람에 완정하지 못한 신음만 뱉어냈다…….품 안의 몸은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졌고 너무나 뜨거웠다. 심지어 흐릿한
권재민이 요구한 건 10배의 위약금인데 그걸 권지윤이 내놓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때문에 고민하던 끝에 결국 송해나를 찾았다.“해나야, 나 이제 어떡하면 좋아?”“재민 씨가 원하는 대로 해줘요. 재민 씨도 그것 외에는 다른 거 요구한 거 없잖아요.”초조하게 묻는 권지윤과 달리 송해나는 차를 음미하며 느긋하게 대답했다.어찌 됐든 이 일은 자기와 큰 상관도 없거니와 윤정호가 계약 해지를 하든 말든 큰 관심이 없었으니. 송해나가 신경 쓰는 건 오직 권재민이었다.송해나의 그런 속내를 모르는 권지윤은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우는소리를 해댔다.“너도 알잖아, 나한테 그렇게 큰돈이 없다는 거.”“그런데 그 계약금 물어주지 않으면 다른 방법은 없잖아요.”송해나도 솔직히 권지윤이 윤정호한테 이렇게까지 빠질 줄은 생각지 못했다.“그래서 말인데 하루라도 시간 끌 수 있으면 시간을 끌어 보려고. 어찌 됐든 나도 재민이랑 같은 식구인데 제가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가족인 나를 뭐 어떻게 하기야 하겠어?”권지윤은 속으로 침착을 유지해야 한다고 계속 자기를 암시했다.하지만 그 말을 들은 송해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런데 고모님이 그렇게 하면 재민 씨가 난처해지지 않을까요?”“그게 뭐 내가 상관할 바인가? 아무튼 난 원래 이런 성격이야. 재민이도 내가 이렇다는 거 모르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안 된다고 해도 새언니도 있으니 꼭 나 도와줄 거야.”김소혜를 생각하니 권지윤은 저도 모르게 뱃심이 두둑해졌다.그때, 송해나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더니 뭔가 좋은 수가 생각난 것처럼 분위기를 잡았다.“고모님, 저한테 좋은 방법이 하나 있는데, 들어볼래요?”“그럼 얼른 말하지 않고 뭐해?”권지윤의 두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강수아를 우리 편으로 만들면 되지 않겠어요?”송해나는 권지윤의 귀에 대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강수아?”의아한 듯 이름을 한 번 더 중얼거리는 권지윤의 모습에 송해나는 씩 웃었다.“네. 강윤아의 이복 여동생이요. 강수아도 강윤아를 눈엣
잠시 생각하던 윤 실장은 끝내 입을 열었다.“속이 불편하면 먼저 병원 한번 가보세요. 이 서류들은 이미 며칠 동안 쌓여 있었는데 몇 시간 더 쌓여 있는다고 크게 달라질 거 없어요.”“안 돼요. 일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어요, 일에 차질이 생겨 회사에 손실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요?”강윤아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잠시 휴식하면 되니까 윤 실장님도 나가서 일 봐요.”“그래요.”윤 실장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강윤아의 고집 때문에 끝내 사무실을 나갔다.그 뒤로 강윤아는 잠깐 휴식하다가 상태가 괜찮아져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그렇게 하루 종일 회사에서 일에 파묻혀 있다 저녁 늦게야 집에 돌아왔다.강윤아가 집에 도착했을 때, 은찬도 이미 집에 있었다.하지만 혼자 집에 있으면서도 심심해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게, 은찬도 뭔가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고개를 파묻고 뭔가에 몰두하고 있는 은찬을 보자 강윤아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슬그머니 다가가 확인하더니 의자를 슬쩍 끌어당겨 옆에 앉으며 물었다.“은찬아, 지금 뭐 해?”“엄마, 저 지금 새로운 게임 연구하는 중이에요.”강윤아를 보자 은찬은 활짝 웃었다.“응? 무슨 게임인데?”아들의 반응을 보자 강윤아는 더 궁금해졌다.아이가 성장할 때 많이 관심 가져 주고 많이 소통해야 친밀감을 형성할 수 있다는 웬 박사의 말이 생각나 강윤아는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이건 2년 전에 갓 출시된 게임인데 엄청 빨리 발전해 이제는 핫한 게임이 됐거든요.”은찬은 진지한 표정으로 강윤아에게 게임에 대해 설명했다.어쩌다가 아는 게임을 보자 강윤아의 흥미도 한층 더해졌다.“아, 이거 말하는 거구나. 엄마도 이거 아는데. 확실히 핫한 거 같더라고, 이거 롤이랑 비슷한 게임이지?”“네. 그런데 조금은 달라요. 게다가 두 달 뒤면 시합이 있어서 지금 많은 작업실에서 게이머 모집하고 있어요.”은찬은 흥미진진해서 대답했다.그 말을 할 때 은찬은 눈을 반짝거렸다.“너도 신청할 거지?”“당연하
강윤아라는 말에 권재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윤아가 우리 집에 온 이후로 힘든 일을 많이 겪었고 늘 다른 사람의 타깃이 되었어요. 재민이가 너무 다른 사람의 호감을 사 그녀를 연루시킨 거죠.”“재아 씨가 지금 걱정해도 소용없어요, 재아 씨부터 잘 챙겨요.”윌은 재아의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자, 재아 씨 기분 전환하러 갔다가 나중에 우리 집에 가요.”그 말을 들은 권재아는 얼굴이 빨개졌다.“얼굴이 왜 빨개지는 거예요? 내가 옆에 있었으면 재아 씨가 좀 더 편하게 잠들 거예요.”윌은 웃으며 농담했다.재아는 얼굴이 빨갛게 상기 된 채 그를 한 대 때렸지만 거절하지 않았다.날이 저물자 바다는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고 이따금 파도가 아련하게 일기도 했다. 해변의 모래사장에는 간간이 등불이 있는데, 등불은 그다지 밝지 않고 군데군데 있어서 밤하늘의 별과 서로 잘 어울렸다.재아는 부드러운 모래를 밟으며 앞으로 한 걸음씩 폴짝폴짝 뛰어갔다. 귓가에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아득하고도 고요했다.윌은 재아의 뒤에서 몇 걸음 걷다가 재아가 전혀 알아채지 못하자 성큼성큼 몇 걸음 앞으로 나가 그녀의 손을 잡고 손바닥으로 감쌌다.재아는 어리둥절해 하더니 이내 두 눈이 반달 모양으로 변했다.“손잡고 싶은 거면 얘기하지 그랬어요.”재아의 표정이 너무 도도해서 윌은 눈살을 찌푸리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코끝을 긁었다.“그러게 누가 재아 씨더러 아무것도 모르래요?”술도 밥도 배불리 먹었으나 그 뒤로 딴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재아는 윌 덕분에 배불리 먹었고 지금은 기분이 너무 좋았다. 윌의 손을 잡고 있자니 따뜻한 손바닥에서 전해오는 힘에 말할 수 없는 안정감을 느꼈다.백사장을 따라 한참을 걸은 후에야 마침내 윌이 말한 그 ‘재미있는 곳’에 이르렀다.재아는 어두컴컴한 불빛 속 나무 밑에 숨어 있는 해먹에 하마터면 눈살을 찌푸릴 뻔했다.“여기가 재밌는 곳이에요?”“재미있는 곳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올 거잖아요?”윌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올라탄
회의가 끝난 후, 권재아는 권현우가 그녀를 쉽게 보지 못하게 하려고 여전히 당당하게 걸어 나갔지만, 사무실로 돌아온 후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초조하고 어쩔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재아는 매우 낭패한 모습이었다.재아는 권재민에게 이 일을 알리려 문자를 보냈지만, 그쪽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재아는 윤기태에게도 이 일을 말했다. 기태도 분노했지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재아가 풀이 죽은 모습을 보며 화가 났지만 재아를 먼저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대표님, 이런 결과는 대표님도 원하지 않겠지만, 정말 방법이 없잖아요. 자책하지 마세요, 권재민 대표님이 돌아오시면 분명히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재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기태의 위로가 전혀 소용이 없었고 재아는 여전히 괴로웠다.재아의 이런 모습을 본 기태는 더는 방해하지 않고 그녀에게 인사한 후 자리를 떴다.늦은 시간, 재아는 여전히 회사에서 일을 처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무실 문이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권재아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만 했다.갑자기 넓은 손이 재아 앞에 다가오더니 그녀의 머리를 강제로 들어 올렸다.재아는 화를 내려다가 윌임을 발견했다. 순간 화가 난 얼굴이 미리 설정된 듯 활짝 웃는 얼굴로 바뀌었다.“아, 윌, 여긴 어쩐 일이에요? 귀국하지 않았어요? 돌아왔으면 나한테 말해주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내가 공항으로 데리러 갔을 텐데.”윌은 재아의 머리를 받치고 있던 손을 풀고 책상을 돌아 재아의 앞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러는 내내 눈빛은 재아에게서 떠나지 않았다.“보고 싶어서 돌아왔어요. 알려줬으면 어떻게 서프라이즈를 해줬겠어요. 왜 이렇게 피곤한 얼굴이죠? 날 봤을 땐 화가 잔뜩 난 얼굴이었어요.”윌이 그녀 앞에 서자 재아는 윌의 허리를 끌어안고 머리를 살짝 윌의 몸에 기대며 풀이 죽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윌은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은 듯해 보여 더는 강요하지 않고 빨리 나가자고 재촉했다.“주차장에서 오래 기다렸는데도 안 내려와서 야근하는 거 아닌가
권재민은 강윤아의 움직임을 추적한 뒤 곧바로 현진성과 합류해 구출 계획을 논의하고 애스릭이 숨어 있는 곳으로 쳐들어가려 했다.하지만 이번에도 그들은 변장하고 다가갔다. 애스릭은 분명 그들을 경계할 것이고, 외딴 섬에서의 일을 겪었으니 애스릭의 경계와 의심이 더 강해지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들은 반드시 만반의 계획을 세워야만 윤아를 구해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같은 시간, 국내에 있던 김소혜와 서만옥은 출국할 예정이었다.그날 기슭에 도착한 후 재민은 아이를 안배하고 나서 소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혜는 발신자가 실종된 지 오래된 자기 아들이라는 것을 보고 매우 흥분했다.“재민아, 드디어 엄마한테 전화했구나. 그동안 네가 나한테 전화 안 해서 우리도 방해할 엄두가 안 났는데 너는 지금 어때? 윤아는 행방불명이야? 윤아를 구해낸 거 아니었어?”소혜는 재민의 전화가 희소식을 전하러 걸려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재민은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민의 전화를 받은 후 마음이 매우 흥분되고 기뻤기 때문이기도 했다.재민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소혜의 이렇게 흥분한 말투를 들으며 차마 그녀에게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급박해서 아이를 돌볼 가족이 있어야 했다. 비록 의사가 있지만 그는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다.그는 이를 악물고 실정을 소혜에게 말했다.“엄마, 내 말 좀 들어봐요. 마음을 다잡고 들어요, 일이 이렇게 됐어요…… 엄마가얘기한 거랑 상황이 좀 달라요. 윤아가 처음에 구출되긴 했는데 다시 잡혀갔어요. 그동안 연락이 없었던 건 내가 계속 그 사람의 경계에 잠복해있었기 때문이에요.”재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혜가 말을 끊었다.“뭐? 구출되긴 했는데 또 잡혀갔다는 건 뭐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엄마, 내 말끝까지 들어봐요.”재민이 이마를 어루만졌다.“이 일은 당분간 자세히 말하기 어려워요. 제가 윤아를 데려가고 나서 자세히 말해줄게요.”
고승혁 교수가 협조를 거부했기 때문에 애스릭은 더 심하게 때렸다. 거의 몇 시간마다 가서 괴롭혔는데 매번 때리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말로 욕했지만 고승혁 교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강윤아는 고승혁 교수가 돌아올 때마다 얼굴에 약간의 상처가 생기는 것을 보고 차마 지켜볼 수 없었다.사실, 애스릭이 매번 고승혁 교수를 데려갈 때마다 그가 입을 열어 경험을 전수해주도록 했을 뿐 매번 그를 때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승혁 교수는 돌아올 때마다 애스릭의 부하들에게 얻어맞았다.고승혁 교수는 베티를 치료해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배신하기까지 했기 때문에 그들은 매우 원망스러웠다.“고승혁 교수님, 저 때문에 교수님이 억울한 일을 당했으니 협조하고 절 그냥 내버려 둬요.”“괜찮아요, 때리고 싶으면 때리고 욕하고 싶으면 하라고 해요. 나는 견딜 수 있어요. 나는 오히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어디까지인 보고 싶어요. 언젠가 내가 정말 견딜 수 없게 되면 자연히 그들에게 항복할 거예요. 그때 가서 윤아 씨가 나를 원망하지 말아주세요.”고승혁 교수는 손을 내저으며 개의치 않는 듯 윤아를 향해 농담까지 했다.“교수님은 이미 내 목숨을 구해줬고 내 아이를 지켜줬어요. 이것만으로도 저는 이미 교수님에게 감사해요. 교수님이 앞으로 나를 어떻게 대하든 나는 받아들일 수 있어요.”윤아는 고승혁 교수의 이런 모습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다.“정말 내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이건 내 인생 경험의 일부일 뿐이에요. 살아서 나갈 수 있다면 밑지는 장사는 아니에요. 굴복해 연명할 수 있지만 내 양심에 어긋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고승혁 교수는 윤아가 미안한 표정을 짓자 그녀를 안심시켰다.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우리가 살아서 나갈 수 있다면 교수님의 연구원에 많이 투자할게요.”“그럼 먼저 윤아 씨에게 감사해야겠어요.”“고승혁 교수님, 우리는 함께 목숨 걸고 싸운 사이이니 그냥 저를 윤아라고 부르세요, 윤아 씨는 너무 서먹서먹해요.”윤아가 고승혁을
메리는 인큐베이터 옆에 있는 의사가 멍하니 있는 것을 보고 그를 한 번 쿡 찌르며 낮은 소리로 주의를 시키었다.“존, 사람들이 묻고 있잖아요.”“네?”존은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권재민은 옆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다시 물었다.“내 아이의 상태가 어떤지 물었어요.”“아기는 지금 상태가 안정돼 있고 아까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놀라지 않았어요. 달이 차지 않아 태어났기 때문에 면역력이 좋지 않아 인큐베이터에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요.”존은 마침내 반응을 보였고 무서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재민은 가볍게 알았다고 대답하고 고개를 숙이고 인큐베이터 안의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갑자기 생명이 정말 완강하다고 느꼈다.강윤아에게 그렇게 많은 위험이 닥쳤는데도 이 아이는 이렇게 안전하고 무사하게 태어났고, 게다가 아무런 문제도 없으니 앞으로도 꿋꿋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눈앞의 작은 아이가 이렇게 많은 일을 겪으면서도 건강할 수 있다면, 아이의 엄마 윤아는 분명 더 완강할 것이다. 그동안 많은 일을 겪었지만 윤아는 아슬아슬하게 돌아왔으니 이번에도 반드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재민은 보면 볼수록 더 반가웠고 윤아가 출산할 때 옆에 없었지만 수술실 밖에 있었으니 좀 멀지만 어떻게 보면 윤아 옆에 있은 셈이다. 다음번에는, 다음번에는 윤아 옆에 꼭 있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재민의 부드러운 표정을 보고 현진성과 한기현도 옆으로 다가가서 아기를 바라보았다.“윤아 씨를 많이 닮아서 참 예뻐. 앞으로 윤아 씨처럼 예쁘게 자랄 거야.”기현은 한참을 쳐다보았다.옆에 있던 진성은 자기도 모르게 웃으며 말했다.“태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어떻게 윤아 씨와 닮은 줄 알아요? 갓난아이는 이목구비도 다 비슷비슷하고 쭈글쭈글한 모습이 늙은이 같다는 생각만 들어요. 게다가 머리카락이나 눈썹도 다 나지 않았잖아요.”“진성 씨…… 왜 그래요? 분명 윤아 씨를 닮았잖아요?”핀잔을 들은 기현은 얼굴이 빨개졌다.“재민아. 진성 씨 봐, 너의 아이가
한기현은 다시 권재민에게 전화를 걸어 그들이 숨은 곳을 알려줬지만 강윤아가 끌려갔다는 사실은 알려주지 않았다.재민은 재빨리 이곳으로 달려와 둘러보았으나 윤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미간을 찌푸린 채 의심스러운 얼굴로 기현과 현진성을 힐끗 쳐다보았다.“기현아, 현진성 씨, 윤아 씨는요? 윤아 씨가 왜 여기에 없죠?”두 사람은 안절부절못했다. 평소 대단한 사람들이었지만 지금 재민 앞에서 감히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기현은 슬며시 진성을 쳐다보고 몰래 진성을 쿡 찔렀다. 진성은 방심하다 밀려났고 뒤를 돌아보며 기현을 노려보았지만 기현은 고개를 숙이고 더는 두 사람을 쳐다보지 않았다.“묻고 있잖아요! 윤아 씨는요? 내 아내 어디 갔어요? 당신들 윤아 씨를 어디로 데려갔어요?”재민은 두 사람의 행동을 보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소리쳤다.진성은 미안한 표정으로 재민을 바라보며 재민에게 그가 떠난 후의 일을 대충 말했다.“권재민 대표님, 죄송합니다, 제가 윤아 씨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애스릭에게 빼앗겼어요. 제가 부주의했어요. 그 방에 숨으면 아무 일도 없을 줄 알았는데, 애스릭이 이렇게 교활하게 두 가지 계략을 쓸 줄은 몰랐어요.”“권재민 대표님, 지금 저를 때리고 욕해도 저 할 말이 없어요.”이 말을 들은 재민은 온몸에 살기가 피어올랐고 두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진성을 노려보며 허리에서 총을 꺼내려 했다. 기현이 황급히 그런 재민을 말렸다.“재민아, 일단 흥분하지 마, 방법이 있을 거야. 같은 편이니 우릴 도울 수 있어. 게다가 인터폴이야. 너 인터폴을 죽이는 건 큰 문제가 아니지만, 윤아 씨부터 찾아야지. 지금 우리는 진성 씨가 필요해.”기현은 재민의 허리춤의 총을 쥔 손을 힘껏 눌렀다.진성도 황급히 위로했다.“권재민 대표님,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밖에 비도 오고 바람도 심해서 빨리 갈 수 없으니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거예요.”“게다가, 우리 배에는 위치추적 장치가 있어요. 아주 은밀한 곳에 두었으니, 그들은 분명히 찾을 수 없
한기현은 사람과 함께 현진성의 사람들을 따라 수술실의 암도 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길을 따라가다가 애스릭의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기현은 그들 모두가 깨끗이 떠난 줄 알고 있었는데 애스릭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사람을 남겨 그들을 몰살시킬 준비를 했을 줄은 몰랐다.기현의 눈에 갑자기 핏빛이 솟구쳐오르더니 몸을 돌볼 겨를도 없이 맨주먹으로 몇 사랑을 해치웠다.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독살스러운 모습까지 보여 상대방을 놀라게 했다.그 사람들은 애스릭을 보낸 후 매우 내키지 않았다. 한바탕 뒤지고 나서 도망갈 계획이었는데, 결국 절반 정도 뒤지다가 기현 일행을 만났다. 특히 기현은 어두운 얼굴을 한 채 그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듯 보였다.그들은 원래 기현 일당과 대충 싸우려고 일부러 그들을 놓아주려 했는데 기현이 달려들어 그들 몇 사람을 쓰러 눕히자 분노가 치밀어 올라 기현 일행과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기현이 상대방의 생각을 알면 지금쯤 후회해 죽을지도 모른다. 몇 분 동안 아무렇게나 싸우면 될 일을 이렇게 충동적으로 또 한 번 미뤘다.몇 분 동안 싸운 후, 쌍방은 모두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기현의 왼팔이 그 무리의 두목을 누르고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총을 쥐고 그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누고 있어 쌍방이 모두 시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기현은 그들의 타협을 기다렸고, 그 사람은 반격의 기회를 기다렸다.이 팀장은 원래 타협하려 했지만, 지금 이 지경에 이르니 승리욕이 자극되었고 지금은 고개를 숙일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머리를 숙이면 부하들이 그를 무시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라도 그는 승부를 내려고 했다.이때 폭발음이 드디어 또렷하게 들렸고 그 사람은 이때 갑자기 손을 썼다.기현은 그가 성급히 달려들 것을 예상한 듯 손을 빼 권총을 내던지고 날쌔게 상대방의 손을 잡아 그의 등 뒤로 돌렸다. 두 발은 날렵하게 그의 허리와 배를 걷어찼고 곧 사납게 그의 몸을 비틀어 앞을 가
현진성은 애스릭의 부하들이 베티를 데려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애스릭이 아직도 단념하지 않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애스릭이 베티를 포기하거나 그들과 함께 죽으려고 이 보이지 않는 장치를 작동시켰다고 생각했다.애스릭이 여전히 단념하지 않고 베티를 데려가서 부활을 꿈꾸고 있을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애스릭은 고승혁 교수와 강윤아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진성은 갑자기 눈꺼풀이 미친 듯이 뛰며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 윤아와 고승혁 교수가 숨어 있던 방에서 총소리가 났다.그는 급히 아까의 그 방으로 돌아갔다. 들어가 보니 그가 배치한 사람 중 몇 명은 상처를 입었고, 또 몇 명은 이미 의식을 잃었으며 그중 한 명은 이미 죽었는데 의사였다. 그 의사는 아기의 인큐베이터를 필사적으로 안고 있었다.진성은 그 의사의 시체를 땅에 부축하려고 했지만, 그 사람의 손이 인큐베이터 가장자리를 필사적으로 잡고 있어서 아주 많은 힘을 써서야 그 손을 쪼갰다. 진성은 겨우 옆 깨끗한 곳으로 메고 가서 그를 살며시 내려놓았다.의사를 내려놓은 진성은 돌아서서 인큐베이터 안의 아기를 살펴보았다. 아기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매우 달콤하게 자고 있었기에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모두가 엎드려 있어서 진성은 한동안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하나하나 뒤집어 보았다. 애스릭의 사람들이 그냥 들어와서 그들을 다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고승혁 교수를 데려갔을 줄은 몰랐다.진성은 갑자기 윤아가 떠올랐다. 총소리가 그렇게 컸으니 윤아가 정신을 차리지 않았을 리 없다. 진성은 급히 모퉁이의 병상 옆으로 달려갔다.이불 속이 울퉁불퉁했다. 그는 처음에는 고승혁 교수 등이 윤아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고 생각했지만 열어보니 안에 베개가 있었다. 진성은 멍해졌다.“이 방은 밀폐되어 있는데 그들은 어디에 잡혀간 거지? 게다가 방금 내가 문 앞에서 지키고 있었으니 문으로 나갔을 리가 없어.”진성은 조급했다.갑자기
고승혁 교수는 숨을 헐떡이며 말하고는 바다 위를 바라보았다. 바다 위에 배가 한 척 있었는데 애스릭이 그 배에 있었고 많은 사람이 그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고승혁 교수는 깜짝 놀라 몇 발짝 뒤로 물러서며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현진성은 그에게 대답할 방법이 없어서 그를 붙잡고 비밀 통로로 갔다.권재민도 급히 한기현에게 연락해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했다.그러나 신호를 받자마자 재민은 기현 쪽에서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기현아, 무슨 일이야?”재민은 노심초사하여 급히 물었다.“방금 그 사람들이 들이닥쳐 시스템을 파괴했어. 최선을 다해 구조했으니 지금은 30분 정도 지연될 수 있어.”“시스템 복구가 시급한데 지금 그들과 싸우는 중이라……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어.”기현은 시스템 감시실에서 애스릭의 부하들과 싸우며 관제탑에 다시 접근하지 못하게 막으면서 권재민과 이쪽의 상태를 보고했다.보고하는 과정에서 재민은 기현의 끙끙거리는 소리까지 듣고는 더욱 마음이 급해졌다.“기아현, 너는 어때? 버틸 수 있겠어? 시스템 쪽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지금은 복구할 방법이 없어. 이젠 네가 나설 차례야. 우리가 살아나갈 수 있는 시간은 안 남았어요, 재민아.”“상대편은 사람이 너무 많은데 우리 사람은 이 몇 명밖에 없어. 버티기 힘들 것 같아, 재민아, 빨리 와.”기현이 헐떡이며 소리쳤다.재민은 이 소식을 듣고 마음이 급했지만 윤아가 이쪽에 있었기에 결정하기 어려웠다. 윤아가 힘없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서 매우 걱정했다.진성은 재민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내 부하들이 애스릭의 부하들에게 습격당했고, 그자들이 통제실의 시스템을 파괴했대요. 지금 우리 부하들이 그들과 싸우고 있는데 기현이도 그들에게 얽매여 시스템을 고칠 기회가 전혀 없어요…… 나는 윤아 씨가 마음에 걸려요.”재민은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가요, 여기 내가 있을게요. 기지 안에 내 사람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