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그는 비밀조직 LY가 그저 도아린에게 체면을 세워주라고만 하는 줄 알았다. 사람들에게 도아린과 협력 중이라고 말하되, 협력 방식은 자신이 정하면 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도아린이 이 정도로 끈질길 줄 몰랐다. 그녀는 전혀 주저함 없이 노골적으로 협박하고 있었다.“도 대표님께서 정말 성의가 있으시다면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저는 좋습니다.”도아린은 전화를 끊고 일북에게 이동할 차를 준비하라고 했다.한유미는 그녀가 회사를 떠나는 걸 지켜본 후 신지훈의 사무실로 향했다.“신 대표님, 도 대표님께서 유 대표님을 만나러 갔습니다.”신지훈은 의자에 느슨하게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펜을 돌리고 있었는데 반 바퀴만 돌고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럴 때면 그는 항상 다시 집어 들고 계속해서 돌렸다.한유미는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생각했다.‘배 대표님은 펜을 아주 능숙하게 돌리던데 신 대표님은 반 바퀴 돌리기도 힘든가 보네...’“그 늙은것들 잘 감시해. 무슨 움직임이 있으면 바로 보고하고.”“네.”한유미가 문을 닫고 나간 뒤 신지훈의 펜이 또 떨어졌다. 그는 허리를 숙여 펜을 집고는 컴퓨터를 켰다.도아린이 요양 센터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센터 공사는 이미 끝났고 지금은 내부 인테리어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본사에서 오는 방문객을 응대하는 담당자도 따로 있었다.하지만 도아린의 공식 임명 소식을 아직 전달받지 못한 담당자는 그녀를 신지훈의 비서로 착각했다.“죄송합니다. 준비가 충분하지 않아서 도아린 씨가 다소 불편하실 수도 있습니다.”“이 철판 닭갈비에 넣은 고기도 유 대표님 농장에서 가져온 겁니까?”“네, 맞습니다.”“여기서 농장까지 얼마나 걸립니까?”도아린은 채소를 냄비에 넣으며 물었다. 이어 담당자에게 튀긴 고추를 한 그릇 더 달라고 요청했다.그는 고추 냄새에 기침이 나올 뻔했지만 참으며 답했다.“차로 산길을 돌아가면 한 시간 정도
이튿날, 도아린은 일북과 함께 양식장으로 향했다.산에 오르자마자 양식장에 그녀는 새로 도착한 사료 한 묶음을 봤다.누군가 샘플을 검사하더니 큰 창고로 옮기는 것이었다.그들은 내려가는 길에 마침 양식장에서 먹이를 주는 광경을 마주쳤다.사육사가 마당에서 호루라기를 불자 다양한 품종의 닭들이 산비탈에서 양식장으로 쏜살같이 내달렸다.어떤 닭들은 날개를 펼쳐 거의 먹이 주는 곳까지 미끄러져서 내려왔고 산비탈은 온통 날갯짓하는 닭들로 가득 찼다.그 장면을 본 도아린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닭도 명령을 알아듣는구나...”일북은 핸드폰을 꺼내 몇 장 사진을 찍더니 도아린의 뒤를 따랐다.양식장 직원들은 도아린이 지역 특산품을 사러 온 손님인 줄 알고 그들을 선물용 매장으로 안내했다.그때 도아린의 전화를 받고 직접 마중 나온 유서하는 그녀가 판매 직원과 판매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표정이 굳었다.“도 대표님?”“유 대표님, 직원분들이 정말 전문적이시네요.”도아린이 가볍게 칭찬하자 유서하는 판매 직원을 흘끗 보며 쓸데없는 말을 했는지 확인하려는 듯한 눈빛을 날렸다.그리고는 곧 도아린을 경계하며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이제 스무 살 갓 넘은 이 여자가 대체 무슨 능력이 있길래 비밀조직 LY의 사람들이 저 여자를 지원하는 거지?’상사의 표정이 안 좋아지자 직원은 얼른 핑계를 대고 자리를 떴다.“사무실에서 이야기하죠.”“어차피 온 김에 좀 둘러보고 싶은데 반대하진 않으시겠죠?”도아린이 이렇게 나오자 유서하는 바로 거절할 수 없었다.그는 옆 사람에게 눈치를 주더니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양식장이 좀 지저분하긴 한데 도 대표님이 개의치 않는다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마당에서는 수많은 토종닭과 야생 산닭들이 먹이를 쪼고 있었고 바닥에는 닭똥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냄새가 고약했다.하지만 도아린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앞으로 다가갔다.“제가 사료를 줄 수 있을까요?”유서하는 다소 귀찮아했지만 사람을 시켜 사료를 가져오게 했다.
유서하는 그들에게 방을 마련해 주고, 달콤한 후식을 보내주었다.“창고에 있는 사료를 가져올 수 있어? 가져가서 성분을 확인해 보고 싶어서 그래.”“한번 해볼게요.”일북은 어두운 틈을 타서 밖으로 나갔다.도아린은 핸드폰을 켰지만 청룡은 여전히 답장을 주지 않았다.그녀는 오늘 본 것, 들은 것, 그리고 의심스러운 점들을 모두 정리해 청룡에게 보냈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배건후에 대한 정보를 찾아봐 달라고 당부했다.하지만 청룡은 어제처럼 바로 답장하지 않았다....그녀가 온 것 때문인지 창고 근처에는 경호원들이 배치돼 있었다. 그는 창고 앞 땅바닥에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그를 유인해 내지 않으면 일북은 창고 문을 열 방법이 없었다.도아린은 고민하다가 화장실로 들어갔다.둘러보던 중, 오래된 샤워기가 눈에 띄었고 그녀는 수건으로 샤워기를 세게 당겼다.순간 샤워기 헤드가 부러졌고 물이 사방팔방으로 뿜어져 나왔다.“아악!”도아린은 큰 소리로 외치며 방을 뛰쳐나갔다.“누구 없어요? 사람 없어요?”“무슨 일이에요?”한 사람이 달려왔지만 창고를 지키던 남자는 아니었다.도아린은 젖은 옷을 움켜쥐고 불평했다.“물을 틀었더니 샤워기 헤드가 부러져서 사방으로 물이 튀었어요.”그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곧장 안으로 들다가 확인했다.“온수기가 누전된 것 같아요. 당장 사람을 불러서 고칠게요.”그 남자는 급히 뛰어갔고 이내 전체 양식장의 전기가 차단됐다.창고 문 앞에 있던 남자도 일어나며 불평했다.“왜 갑자기 인터넷까지 끊긴 거야?”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그때, 누군가가 갑자기 도아린의 입을 틀어막았다.그녀는 본능적으로 그 사람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넓고 단단한 손바닥, 뼈마디가 굵은 남자의 손이었다.도아린은 눈을 크게 뜨고 숨을 죽였다.‘나는 단지 샤워기를 망가뜨렸을 뿐인데... 온수기가 누전된 건 이 남자가 벌인 일인 건가?’그 남자는 도아린을 숙소 뒤편 벽까지 끌고 가서야 손을 놨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입 앞에 가져다 대
회의가 끝난 후, 신지훈은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사무실을 나오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를 불러 세웠다.“신 대표님!”도아린은 서류를 일북에게 건네며 가볍게 웃었다.“잠시만요.”신지훈은 한유미에게 눈치를 준 뒤 미소를 띠며 돌아봤다.“도 대표님, 무슨 지시 사항이라도 있나요?”도아린은 문 앞에서 서성이는 민철홍을 보고 바로 답하지 않았다.그는 일부러 펜을 떨어뜨리고는 바짓단을 정리하는 척했다. 그러자 한유미가 다가가서 말했다.“민 사장님, 어제 데이터가 좀 맞지 않더라고요. 담당자와 확인이 필요해요.”민철홍은 약간 눈살을 찌푸리고는 한유미를 따라갔다.회의실에는 도아린과 신지훈만 남았다. 그녀는 그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여러 고위직들 앞에서 신 대표님께 감사를 표하고 싶지 않았어요. 괜히 신 대표에게 불편한 상황을 만들까 봐요.”신지훈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왜 그렇게 생각하시죠?”“유서하네 양식장이 단순히 사료 문제로 폐쇄된 건 아닐 거예요. 사료 불합격은 그저 구실일 뿐이고 이 일에는 여러 세력이 개입했겠죠. 그 안에 신 대표님 손길이 없을 리 없잖아요.”신지훈은 가볍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제가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도 대표님께서 취임하기 전에 이미 정리했겠죠.”“어쨌든 감사합니다.”도아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회의실을 나섰다.그 뒤에 서 있던 신지훈은 서서히 웃음을 거두고 어두운 눈빛을 드리웠다.점심시간이 되자 비서가 들어와 보고했다.“도 대표님, 프런트에 강씨 성을 가진 남자분이 찾아오셨습니다. 예약이 없다고 합니다.”“기다리라고 하세요.”도아린은 하던 일을 마친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일북이 차를 몰고 데리러 오자 그녀는 강재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와서 왼쪽으로 걸어요. 그리고 그쪽 사거리에서 기다리세요.]강재민은 차에 타자마자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저랑 만나는 걸 이렇게 숨겨야 해요?”도아린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미소를 지었다.“무슨 일인데
“전 상관 없어요.”도아린이 강재민의 말을 끊으며 종업원에게 수저를 추가로 가져다 달라고 했다.육하경은 도아린이 지난번 USB 이야기를 꺼내지 않자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녀에게 공장 수익이 괜찮다고 전했다.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에는 강재민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그러자 강재민은 도아린과 해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화제를 돌렸고 이번에는 육하경이 끼어들지 못했다.그렇게 도아린은 육하경과 몇 마디 나누고 강재민과도 몇 마디 주고받으며 대화를 이어갔다.하지만 강재민은 도아린의 남자친구였기에 불공정하다고 느꼈다. 남자 친구라면 특권을 누려야 했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중요하게 여겨져야 했다.“제 기억에 의하면 세인트존스 호텔은 육씨 가문의 자산이었던 것 같은데... 민재 씨는 하경 씨한테 호텔 운영권만 준 거예요? 아니면 그 외에 다른 것도 받았어요?”강재민이 먼저 육하경을 공격했다. 그로 하여금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도아린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게 하려는 의도였다.그러자 육하경은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현재로선 없어요. 하지만 저도 육씨 가문 사람이에요. 앞으로 더 많은 자산을 맡게 될 수도 있죠. 하지만 제가 어떤 걸 맡든 아린 씨에게 해가 되는 일, 예를 들어 표절 같은 건 절대 하지 않을 거예요.”“우리 아버지는 연세가 많으셔서 사고방식이 보수적이에요. 본능적으로 학파 중심의 사고를 가지셨죠. 하지만 아린 씨는 그 고정관념을 깨는 중요한 존재예요. 아버지가 직접 공개적으로 사과한 것도 두 팔 벌려 아린 씨가 우리 가족이 되는 걸 환영하고 있는 거예요.”“사업적으로 의견이 다르다고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만들었는데 살면서 또 갈등이 생기면 어떡해요? 그러면 아린 씨가 또다시 실패한 결혼생활을 겪게 되는 거 아니에요?”강재민이 날카롭게 눈을 가늘게 뜨며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 도아린 사이의 가장 큰 장애물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말이다.하지만 도아린과 결혼만 할 수 있다
“괜찮으세요?”그 남자의 목소리는 배건후와 똑같았지만 생김새는 전혀 닮지 않았다.도아린의 목소리에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의아한 표정을 지은 것이었다.“괜찮아요! 미안해요. 슛 던지는데 제가 방해했네요.”도아린이 쑥스럽게 웃으며 사람들 속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아린 씨!”육하경이 그녀를 찾아왔다.그녀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눈치챈 그는 주변을 둘러본 뒤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혼자 나왔어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났어요?”“아뇨.”도아린은 빠르게 마음을 다잡았다.“너무 오래 걸리길래 그냥 나와봤어요.”육하경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미안해요. 괜히 다툴 게 아니라 그냥 재민 씨가 고른 보호대로 샀을 걸 그랬네요.”“아린 씨!”강재민도 그녀를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엉덩이 보호대를 들고 있었다.“괜찮아요?”“괜찮아요. 얼른 스케이트 타러 가요.”도아린은 보호대를 받아 허리에 찼다.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하자 두 남자는 또다시 경쟁을 벌였다.누가 도아린을 가르칠지 다투면서 각자의 실력을 뽐내기 위해 한 명은 앞으로 돌고, 다른 한 명은 뒤로 돌면서 묘기를 펼쳤다.하지만 도아린은 방금 있었던 일을 곱씹느라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그날 밤 양식장에서 만난 남자, 그리고 방금 만난 남자, 두 사람 모두 체형이 배건후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단순히 체형만 비슷한 것이 아니라 목소리도 같았다. 게다가 농구를 하는 모습까지 똑같았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말이 안 될 정도였다.‘건후 씨가 정말 죽었다면 왜 계속해서 날 시험하는 걸까?’다른 사람들은 다들 그녀가 주현정과 함께 병문안을 가서 배건후를 확인한 줄로 알았다.그 병실에 있는 사람이 정말 배건후였다면 도아린이 그를 닮은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을 것이니 말이다.그렇다면 그들은 그녀의 반응을 통해 배건후가 정말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도아린은 주먹을 꽉 쥐었다.방금 그녀의 반응으로 인해 상대는 이미 배건후가 병원에 없다
“저기 있는 공룡 캐릭터가 가지고 싶은데... 괜찮을까요?”도아린이 농구대와 가장 가까운 인형뽑기 기계를 바라보았다.“한번 해보죠.”두 사람은 각각 게임 코인을 바꿨다.도아린은 두 사람의 반응을 살피면서 누가 자신을 시험하는 건지 판단하려 했다.강재민이 연성까지 찾아온 것, 그리고 육하경과의 예상치 못한 만남...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우연이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만약 강재민이 그저 배건후를 없애려 했다면 이렇게까지 큰 판을 짤 필요가 없었다. 3년을 기다려 배건후의 집안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 필요도 없었다.육하경은 그녀의 USB를 몰래 본 적이 있었으니 분명 배건후의 적이었지만 배건후의 죽음이 그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다주는지 알 수 없었다.‘반대로 생각해 보면 배건후가 살아 있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누구지?’‘재민 씨는 내가 건후 씨랑 다시 이어지는 걸 두려워했으니 당연히 원하지 않겠지. 그러면 하경 씨는? 목적을 알 수 없어서 더 무서워.’도아린은 육하경을 바라보았다. 그는 모든 신경이 인형 뽑기 기계에 쏠려 있는 것 같았다. 간신히 인형을 집었지만 떨어뜨리고 말았다.“하...”육하경이 한숨을 쉬며 다시 게임 코인을 넣었다.“나이스!”그 소리에 도아린은 정신을 차렸다. 강재민을 보자 그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올리는 것이었다.그는 빨리 칭찬해달라는 듯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정말 대단해요!”도아린은 강재민 옆으로 가서 그가 들고 있던 농구공을 받아들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골대에 들어가지 않았다.“이렇게 던져야 해요. 손목에 힘을 주고요.”강재민이 도아린의 뒤에 서서 그녀의 두 손을 꼭 감싸 쥐고 그녀를 품 안에 가뒀다.“그대로 던져요!”도아린은 그의 말대로 손끝의 힘을 모아 공을 던졌다. 공은 링을 맞고 한 바퀴 돌더니 결국 골대를 통과했다.“들어갔어요! 제가 넣었다고요!”도아린은 흥분해서 소리쳤다.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순간적으로 감정을 숨기지 못한 육하경의 차가운 시선을 마주했다.그의
“집을 남겨둔 게 맞는 선택이었네요!”도아린이 반응하기도 전에 육하경이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자기 집에서 사는 게 호텔보다 편하고 안전하잖아요.”순간, 도아린은 제자리에 굳어버렸다.‘애초에 이런 날이 올 걸 예상하고 있어서 집과 차를 남겨뒀다는 건가? 오늘 있었던 모든 일까지 다 계획한 것이었을까?’에스컬레이터에 손을 올려둔 도아린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고 심장도 조여드는 느낌이었다.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녀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육하경에게 말했다.“그것도 맞네요. 그러니까 제 차도 돌려줘요. 괜히 새로 사면 해남으로 돌아갈 때 다시 팔아야 되잖아요..”고개를 돌려서 두 사람이 대화하는 걸 본 강재민의 눈빛에는 질투가 가득했다.마침 에스컬레이터를 다 내려왔고 그는 다시 도아린을 품 안에 가뒀다.“육하경 씨, 그럼 우린 이만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육하경은 도아린을 향해 옅게 미소 지으며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주말에 차량 정비 예약해 놨어요. 그때 다시 연락해요.”“그래요.”도아린이 차 키를 받아들였다.강재민은 뭐라 더 말하고 싶었지만 도아린이 자신의 손을 살짝 쥐는 걸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육하경의 모습이 쇼핑몰 안으로 사라지자 강재민은 불만스럽게 말했다.“제가 차 사줄게요. 해남으로 돌아갈 때면 사람을 시켜서 가져가게 하면 돼요.”“괜찮아요.”“괜찮긴 뭐가 괜찮아요.”강재민이 단호하게 말했다.“내 여자는 남이 베푸는 거 받을 필요 없거든요.”그 말을 들은 도아린은 그저 코를 문지를 뿐, 별다른 해명은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강재민에게 이끌려 옷 몇 벌을 사고 나왔다.“이 차를 회사로 몰고 가세요. 전 아린 씨를 데리고 드라이브하다가 올게요.”강재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북에게 차를 가져가라는 신호를 줬다.일북은 도아린을 바라보며 그녀가 거절하기를 바라는 눈빛을 보냈다.하지만 그녀는 차 키를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차는 전에 육하경 씨가 타던 거야.
“아린아, 나 찾았어? 의사랑 지유 상태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거든... 무슨 일이야?”신지훈은 유리 너머로 도아린을 바라보고 있었고 바로 떠나지 않았다.도아린은 코를 긁는 손짓으로 입을 가리며 조용히 물었다.“어머님, 건후 씨가 죽었을 때 장례식에 갔어요?”“난 안 갔어...”주현정은 후회와 죄책감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의사가 수술실에서 나와서 최선을 다했다고 했을 때 주현정은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다.그녀가 다시 깨어났을 때, 배건후의 장례식은 이미 끝나 있었다.우정윤은 배건후가 누명을 썼다는 것과 회사에 내통자가 있다는 사실을 주현정에게 모두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배건후의 사망 소식을 일단 숨기고 회사를 안정시킨 후에 발표하자고 조언했다.주현정은 아들의 마지막을 보내주고 싶었지만 그의 얼굴은 심하게 부서져 있었다. 수술로 다소 복구되었지만 사망 후에는 변형이 심해져서 보기만 해도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그래서 대부분 우정윤이 나서서 처리했다.“그 말은...”도아린은 깊은숨을 쉬며 점점 더 창백해졌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말인즉 주현정도 배건후의 시체가 온전한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우 실장님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 거야.’도아린이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주현정이 물었다.“아린아, 하고 싶은 말이 뭔데?”그녀는 조금이라도 진정하려고 다리를 움켜잡으며 말투를 조절했다.“제가 확인한 후에 말씀드릴게요.”“아린아,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스스로 잘 챙겨야 해...”“네, 알겠어요.”전화를 끊자마자 눈물이 도아린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더 이상 전화를 끊지 않으면 더 이상 감정을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신지훈은 차기 차 쪽으로 돌아가며 계속해서 돌아보았다.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도아린을 바라보며 차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쇼핑백을 안쪽으로 던졌다.차를 몰고 돌아가려 할 때, 갑자기 누가 그를 부른 것만 같이 발걸음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신지훈은 잠시 얼굴을 찡그리며 차 안을 둘러
하지만 서대은은 계획한 것대로 말하지 않았다. 청룡과 주작이 반대했기 때문에 현무와 백호의 의견이 일치하더라도 상황을 바꾸기는 어려웠다.그래서 강재민은 그냥 순순히 동의하는 척하면서 더 기다려보자는 선택을 했다.서대은 때문에 그들의 계획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서대은은 발밑에 있는 유리컵을 한번 훑어보며 차분하게 말했다.“육청아 씨, 저랑 정면으로 싸울 생각이세요?”육청아는 손에 위스키 한 잔을 들고 의자에서 내려왔다.잔을 흔들릴 때마다 얼음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아린 씨가 대은 씨를 믿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그쪽 아버지 병이 갑자기 나았다는 걸 아린 씨가 알면 어떻게 될 거 같으세요?”서대은은 시선을 내리며 타오르는 분노를 감추었다.“제 아버지의 몸으로 협박할 생각 마세요!”육청아는 혀를 차며 서대은의 모습을 비웃었다.“대은 씨 아버지가 받은 장기가 누구 것인지 알아요? 그쪽은 모르겠지만 제가 살짝 입을 열기만 해도 아린 씨는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뭐라는 거죠?”서대은은 경계심을 드러내며 물었다.그는 넥타이를 잡아당기고는 펜던트를 티셔츠 안에 숨겼다.서대은은 도청 장치를 끈 것이었다. 도아린은 이어폰을 뺐다.‘대은이 아버지가 퇴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장기 이식을 받았기 때문이었어? 청아 씨말에 따르면 나랑 연관 있는 사람인 것 같은데...’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고 손끝이 바들바들 떨려왔다.‘그럴 리 없어!’그녀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려 했지만 손끝이 너무 떨려서 그만 놓쳐버렸고 휴드폰은 미끄러져서 틈새로 떨어졌다.도아린이 몸을 숙여 휴대폰을 주울 때, 누군가가 전화를 받으면서 그녀 곁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정말 세상이 넓어서 그런지 별 사람이 있더라고... 상황만 괜찮다면 내가 본때를 보여줄 텐데!”“신 대표님!”도아린의 목소리에 신지훈이 뒤를 돌아보았다.해남시 쇼핑몰 지하 주차장에서 도아린을 만날 줄 몰랐는지 그는 잠시 멈칫하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도아린 대표를 만났어. 다음
꽃 모양으로 된 테이블에 네 개 조직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비어 있는 자리는 ‘라윤주’의 자리였다.도아린은 서대은의 오른쪽에 앉았고 옆에는 현무 조직의 강재민과 육청아가 있었다.육청아는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가끔 그녀를 힐끗히 쳐다봤다. 마스크를 통해서도 그녀의 질투와 혐오를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마주 앉은 청룡과 ‘라윤주’는 오랜 친구였다. 온라인에서의 대화를 나눌 때는 익숙한 패턴이었지만 만나게 되니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아현’이라는 이름으로 비밀조직 LY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미 네 명의 최고 책임자들을 만났었다. 그때 청룡은 지금과 다른 느낌이었지만 말이다.청룡은 그녀에게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는 듯했다.“이렇게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상태인데 이제 새로운 책임자를 뽑아야 되지 않나요?”백호가 청룡을 보며 말했다.“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청룡은 도아린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입을 열었다.“조금 더 기다려보자고 제안하고 싶어요.”그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다. 유럽식 더블브레스트 코트를 입고 가죽 장갑을 끼고 있는 그는 여전한 옷차림에 여전한 목소리였지만 도아린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3년을 기다렸어요.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거죠?”백호는 주작을 보며 말했다.“그쪽 의견은 어때요?”주작은 손으로 턱을 받친 채 부드럽게 말했다.“다들 알거라 생각하지만 저는 당연히 ‘라윤주’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해요.”서대은의 대답은 이전에 육청아와 약속했던 것과 달랐다. 그녀가 살짝 움직이며 입을 열려고 했지만 강재민이 책상 아래서 그녀의 발을 차며 입을 다물게 했다.육청아는 화가 치밀어 올라서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도아린을 노려보았다.백호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손가락을 책상 위에서 튕기며 강재민을 바라봤다.“현무 쪽 의견은 어때요?”강재민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바꾸는 건 명분도 없고 순서도 맞지 않으니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
그녀는 갑자기 육하경이 차에 도청 장치를 설치했다면 집에도 분명히 설치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도아린은 급히 일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빌라 안에 핀홀카메라랑 도청 장치가 있는지 확인하라고 말이다.그녀가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강재민이 문을 두드렸다.“아린 씨, 쉬고 있어요?”“아직이요.”도아린은 문을 열며 잠옷을 들고 있는 손을 보여주었다. 마치 갈아입으려는 모습이었다.“무슨 일이죠?”“육하경 그 자식이 방에 핀홀카메라를 설치했어요.”강재민은 손에 뜯어낸 장비를 들고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제가 방을 확인해 볼게요!”도아린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뭐라고요?”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그를 방 안으로 들였다.강재민은 핸드폰에 설치되어 있는 앱으로 벽을 점검하고 콘센트도 살펴봤다. 마지막으로 화장실과 드레스룸도 꼼꼼히 점검했다. 그러고는 굳은 얼굴로 문 앞에 서며 말했다.“아린 씨 방에는 없어요.”도아린은 살짝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가 처음 하경 씨를 만났을 때, 하경 씨는 도둑 잡는 걸 도와주고 있었는데 제가 하경 씨를 도둑으로 오해했었어요. 하경 씨는 좋은 일도 많이 했거든요. 그러니까 결론은 하경 씨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거죠.”“그럼 아린 씨는 제가 자작극을 하고 있다는 건가요?”강재민은 자신이 육하경에게 속았다고 느꼈다. 일부러 핀홀카메라를 발견하게 내버려두고 도아린에게 고자질하도록 유도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실패하고 오히려 도아린에게 의심을 받게 된 것이다.“그런 뜻은 아니에요. 그냥 재민 씨가 오해한 걸 수도 있다는 거죠.”“저는 오늘 하루 종일 아린 씨와 함께 있었어요. 이런 걸 할 시간이 없었다고요!”강재민의 손에 들린 장비가 증거였다.도아린은 그것을 한 번 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그냥 하경 씨가 한 거라고 칩시다. 별일 없으면 저는 샤워하러 가야겠어요.”‘그냥이라니 무슨 뜻이지? 그래도 여전히 내가 의심스러운 건가? 분명히 육하경 그
“미안해요. 주 대표님과 약속을 했어서 말할 수 없어요.”강재민이 한쪽 눈썹을 올리며 알겠다고 했다. 그녀의 대답을 받아들인 듯했다.도아린이 휴대폰을 꺼내서 일북에게 연락했다.“일 끝나면 도씨 가문 옛날 본가로 와. 내가 도착하면 위치 보내줄게. 택시 타고 와.”“알겠습니다!”일북은 간단하고 명확하게 대답했다.전화를 끊은 도아린은 육하경에게 다시 연락했다.“옛날 집 말이에요. 열쇠 바꿨어요?”“도어락으로 바꿨고요. 비밀번호는 아린 씨 생일로 했어요.”육하경은 부드럽게 말했다.“간단하게 리모델링했는데 혹시 마음에 안 드는 부분 있으면 제가 다시 손볼게요!”“괜찮아요. 제가 필요한 건 재민 씨가 해결해 줄 거예요.”그녀는 일부러 육하경 앞에서 강재민을 언급하고 강재민 앞에서 육하경을 칭찬했다.“하경 씨 너무 친절하시네요. 이건 단순히 리모델링이 아니라 완전 새로 꾸민 거잖아요! 가구도 다 바뀌었고... 모두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에요!”이전에 도정국이 살던 침실은 도하린의 방으로 리모델링되었고 옆 객실은 벽을 허물어 한쪽은 옷장, 나머지 한쪽은 작업실로 만들었다.옷장 안에는 일상적인 옷, 액세서리, 신발, 가방이 준비되어 있었고 작업실에는 그녀가 필요한 테이블, 모델, 다리미, 다양한 실크들이 벽에 정리되어 있었다.“하경 씨가 세인트존스 호텔만 관리한다는 게 시간이 너무 아깝네요...”도아린은 둘러보며 감탄했다.“하경 씨를 모건 그룹으로 데려오는 건 어때요?”“육씨 가문 사람이에요.”강재민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 뒤를 따랐다.도아린은 뒤를 돌아보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육민재 씨는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같은데요?”강재민의 눈빛이 위험하게 좁아지며 불만스럽게 말했다.“육씨 가문 사람들은 너무 야망이 커요. 하경 씨를 모건 그룹에 보내면 회사가 육씨가문한테 먹혀버리지 않겠어요?”“야망이 큰 건 육청아죠.”도아린은 차갑게 웃으며 강재민의 표정이 변하는 걸 봤다. 원래 독하던 눈빛에서 살기 서린 눈빛으
도아린이 말을 마치자 강재민은 금세 기뻐하며 억누를 수 없이 즐거운 표정을 드러냈다.반면 맞은편에 있던 신지훈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그는 주먹을 쥐고 손가락 마디를 소리 나게 꺾으며 한층 차가워진 목소리로 직원에게 말했다.“들으셨잖아요? 빨리 처리해 주세요.”그의 차가운 포스에 겁을 먹은 직원은 알겠다며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집으로 가려던 길에 강재민은 한술 더 떠서 말했다.“아린 씨, 저 호텔에서 자기 싫어요. 집에 가서 지낼 생각이면 저도 같이 가고 싶은데... 겸사겸사 아린 씨가 어릴 때 어떻게 살았는지도 보고 싶고요.”“그건 좀 어렵지 않을까요?”“경호원분도 집에서 자잖아요. 저도 절대 규칙 어기지 않을게요.”“도 대표님.”신지훈이 뒤에서 따라오며, 다소 비꼬는 어조로 말했다.“비록 이혼했다고 해도 배 대표님은 본인 명의의 지분과 자산을 전부 도 대표님에게 넘긴 사람이에요. 감정이 남아 있지 않더라도 배 대표님이 병에 걸린 와중에 배 대표님이 준 돈으로 다른 남자를 먹여 살리는 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그 말에 도아린은 소리 내어 웃었다.그녀는 신지훈을 조롱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신 대표님, 그 말은 틀린 것 같네요. 건후 씨가 지분과 자산을 저한테 준 건 자발적인 결정이에요. 제게 준 이상 제가 어떻게 쓰든 제 권리고요. 게다가 사고 나기 전부터 건후 씨는 제가 재민 씨와 사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런 상황에서도 전부 제게 줬다는 건 제가 재민 씨와 잘 지내지 못할까 봐 걱정됐던 거겠죠. 이렇게까지 저를 아껴주는데 저도 건후 씨가 편히 요양할 수 있도록 재민 씨와 행복하게 살아야죠!”도아린에게 반박당하자 신지훈은 가슴이 답답해졌다.그는 턱을 꽉 깨물고 강재민을 조롱하는 시선으로 바라봤다.“보아하니 강재민 씨는 남의 돈으로 사는 게 익숙한 사람이군요. 실례했습니다!”강재민은 원래 반박하려 했지만 신지훈의 기색이 심상치 않아 보이자 오히려 능청스럽게 말했다.“제 외모가 아린 씨 이상형이라서
“집을 남겨둔 게 맞는 선택이었네요!”도아린이 반응하기도 전에 육하경이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자기 집에서 사는 게 호텔보다 편하고 안전하잖아요.”순간, 도아린은 제자리에 굳어버렸다.‘애초에 이런 날이 올 걸 예상하고 있어서 집과 차를 남겨뒀다는 건가? 오늘 있었던 모든 일까지 다 계획한 것이었을까?’에스컬레이터에 손을 올려둔 도아린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고 심장도 조여드는 느낌이었다.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녀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육하경에게 말했다.“그것도 맞네요. 그러니까 제 차도 돌려줘요. 괜히 새로 사면 해남으로 돌아갈 때 다시 팔아야 되잖아요..”고개를 돌려서 두 사람이 대화하는 걸 본 강재민의 눈빛에는 질투가 가득했다.마침 에스컬레이터를 다 내려왔고 그는 다시 도아린을 품 안에 가뒀다.“육하경 씨, 그럼 우린 이만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육하경은 도아린을 향해 옅게 미소 지으며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주말에 차량 정비 예약해 놨어요. 그때 다시 연락해요.”“그래요.”도아린이 차 키를 받아들였다.강재민은 뭐라 더 말하고 싶었지만 도아린이 자신의 손을 살짝 쥐는 걸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육하경의 모습이 쇼핑몰 안으로 사라지자 강재민은 불만스럽게 말했다.“제가 차 사줄게요. 해남으로 돌아갈 때면 사람을 시켜서 가져가게 하면 돼요.”“괜찮아요.”“괜찮긴 뭐가 괜찮아요.”강재민이 단호하게 말했다.“내 여자는 남이 베푸는 거 받을 필요 없거든요.”그 말을 들은 도아린은 그저 코를 문지를 뿐, 별다른 해명은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강재민에게 이끌려 옷 몇 벌을 사고 나왔다.“이 차를 회사로 몰고 가세요. 전 아린 씨를 데리고 드라이브하다가 올게요.”강재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북에게 차를 가져가라는 신호를 줬다.일북은 도아린을 바라보며 그녀가 거절하기를 바라는 눈빛을 보냈다.하지만 그녀는 차 키를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차는 전에 육하경 씨가 타던 거야.
“저기 있는 공룡 캐릭터가 가지고 싶은데... 괜찮을까요?”도아린이 농구대와 가장 가까운 인형뽑기 기계를 바라보았다.“한번 해보죠.”두 사람은 각각 게임 코인을 바꿨다.도아린은 두 사람의 반응을 살피면서 누가 자신을 시험하는 건지 판단하려 했다.강재민이 연성까지 찾아온 것, 그리고 육하경과의 예상치 못한 만남...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우연이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만약 강재민이 그저 배건후를 없애려 했다면 이렇게까지 큰 판을 짤 필요가 없었다. 3년을 기다려 배건후의 집안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 필요도 없었다.육하경은 그녀의 USB를 몰래 본 적이 있었으니 분명 배건후의 적이었지만 배건후의 죽음이 그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다주는지 알 수 없었다.‘반대로 생각해 보면 배건후가 살아 있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누구지?’‘재민 씨는 내가 건후 씨랑 다시 이어지는 걸 두려워했으니 당연히 원하지 않겠지. 그러면 하경 씨는? 목적을 알 수 없어서 더 무서워.’도아린은 육하경을 바라보았다. 그는 모든 신경이 인형 뽑기 기계에 쏠려 있는 것 같았다. 간신히 인형을 집었지만 떨어뜨리고 말았다.“하...”육하경이 한숨을 쉬며 다시 게임 코인을 넣었다.“나이스!”그 소리에 도아린은 정신을 차렸다. 강재민을 보자 그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올리는 것이었다.그는 빨리 칭찬해달라는 듯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정말 대단해요!”도아린은 강재민 옆으로 가서 그가 들고 있던 농구공을 받아들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골대에 들어가지 않았다.“이렇게 던져야 해요. 손목에 힘을 주고요.”강재민이 도아린의 뒤에 서서 그녀의 두 손을 꼭 감싸 쥐고 그녀를 품 안에 가뒀다.“그대로 던져요!”도아린은 그의 말대로 손끝의 힘을 모아 공을 던졌다. 공은 링을 맞고 한 바퀴 돌더니 결국 골대를 통과했다.“들어갔어요! 제가 넣었다고요!”도아린은 흥분해서 소리쳤다.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순간적으로 감정을 숨기지 못한 육하경의 차가운 시선을 마주했다.그의
“괜찮으세요?”그 남자의 목소리는 배건후와 똑같았지만 생김새는 전혀 닮지 않았다.도아린의 목소리에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의아한 표정을 지은 것이었다.“괜찮아요! 미안해요. 슛 던지는데 제가 방해했네요.”도아린이 쑥스럽게 웃으며 사람들 속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아린 씨!”육하경이 그녀를 찾아왔다.그녀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눈치챈 그는 주변을 둘러본 뒤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혼자 나왔어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났어요?”“아뇨.”도아린은 빠르게 마음을 다잡았다.“너무 오래 걸리길래 그냥 나와봤어요.”육하경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미안해요. 괜히 다툴 게 아니라 그냥 재민 씨가 고른 보호대로 샀을 걸 그랬네요.”“아린 씨!”강재민도 그녀를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엉덩이 보호대를 들고 있었다.“괜찮아요?”“괜찮아요. 얼른 스케이트 타러 가요.”도아린은 보호대를 받아 허리에 찼다.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하자 두 남자는 또다시 경쟁을 벌였다.누가 도아린을 가르칠지 다투면서 각자의 실력을 뽐내기 위해 한 명은 앞으로 돌고, 다른 한 명은 뒤로 돌면서 묘기를 펼쳤다.하지만 도아린은 방금 있었던 일을 곱씹느라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그날 밤 양식장에서 만난 남자, 그리고 방금 만난 남자, 두 사람 모두 체형이 배건후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단순히 체형만 비슷한 것이 아니라 목소리도 같았다. 게다가 농구를 하는 모습까지 똑같았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말이 안 될 정도였다.‘건후 씨가 정말 죽었다면 왜 계속해서 날 시험하는 걸까?’다른 사람들은 다들 그녀가 주현정과 함께 병문안을 가서 배건후를 확인한 줄로 알았다.그 병실에 있는 사람이 정말 배건후였다면 도아린이 그를 닮은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을 것이니 말이다.그렇다면 그들은 그녀의 반응을 통해 배건후가 정말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도아린은 주먹을 꽉 쥐었다.방금 그녀의 반응으로 인해 상대는 이미 배건후가 병원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