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민은 당연히 사지 못하게 했다. 배석준의 카드에 있는 돈은 동생의 혼수를 마련하는 데 쓰고 또 결혼에 필요한 집과 차를 사는 데 써서 지금 4억도 안 남아 있었다.“여자애가 무슨 이런 걸 사, 다른 걸 골라. 이건 결혼하는 사람들이 사는 거지.”그녀의 동생이 결혼할 때도 올케한테 이렇게 비싼 액세서리를 사주지 않았다.배지유 같은 미친년은 그럴 자격이 없다.김지민은 직원에게 얼른 갖고 가라고 눈짓했다.배지유는 빠르게 직원을 붙잡고 투명한 유리 상자를 꾹 잡았다.“지금 사서 결혼할 때 착용하면 되지! 어차피 나도 결혼할 나이가 되었는데 아빠가 나를 위해 준비해준 혼수라고 하면 되잖아!”“아빠, 그렇죠?”배석준은 몸이 전보다 많이 좋아져서 아직 걸을 수는 없어도 말은 어물쩍하게 할 수 있었다.“지유가 갖고 싶다면, 사!”그는 휠체어의 팔걸이를 세게 붙잡고 힘있게 말했다.김지민의 눈빛에는 혐오감이 비쳤다.배지유는 용서를 빌기 위해 배석준에게 효도하고 보살펴주겠다고 했지만, 집에 온 이후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김지민을 가정부처럼 부리기만 했다.며칠 난리를 치고 돌아와서는 평소와는 다르게 배석준에게 잘해줬다. 그에게 음식을 먹이고 얼굴을 닦아주고 안마까지 해주었다.그러더니 오늘 배석준을 끌고 물건을 사러 온 것이다. 역시 다 계획이 있었다.“여보, 이번 달 생활비도 아직 안 들어왔잖아요.”김지민은 일부러 배를 내밀고 어루만졌다.“의사가 당신이 아직 한차례 재활을 더 해야 한다고 했잖아요. 아이도 아직 불안정한데 돈을 좀 남겨둬야 하잖아요! 지유가 정말 결혼을 한다면 제 본가에 가서 돈을 달라고 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화려하게 해줄 거예요. 지금은 그냥 생일일 뿐인데 이렇게 사치스러운 건 필요 없잖아요.”배지유는 눈을 부라렸다. ‘금 액세서리 세트 하나가 사치스러운 거라고? 정말 상종을 못 하겠네!’오빠가 도아린에게 사준 액세서리는 아무거나 꺼내도 이것보다 비쌌다. 그녀가 갖고 싶다면 도아린을 찔러보면 손에 넣을 수 있었다.오
큰손 고객을 만났다. 한 세트만 더 팔면 그녀가 판매왕이 될 것이다.“고객님, 정말 구매 안 하시는 거죠?”판매원은 당장 도아린 곁으로 순간이동 하고 싶었지만, 예의상 배지유에게 한 번 더 물어보았다.아무래도 배지유의 손이 아직 상자 위에 얹혀 있었기 때문이다.고개를 돌린 배지유는 순간 얼굴이 창백해졌다.“도아린?”따라서 표정이 변한 김지민도 뒤돌아보았다.배석준은 예전보다 기세가 한층 강해진 도아린을 올려다보며 복잡한 심경에 휩싸였다.만약 그녀가 아직 자신의 며느리였다면, 만약 배지유가 청부업자를 고용해 그녀를 해치려 하지 않았다면, 만약 배지유의 황당한 짓거리 때문에 자신과 아내의 사이가 멀어지지 않았다면, 그들은 아직 화목한 가족이었을 것이고 자신도 이렇게 병들지 않았을 것이다.“고객님, 아까 선택하신 주얼리 세트의 결제서를 작성했습니다. 무게를 다시 확인해 드릴까요?”매니저가 공손하게 도아린의 곁으로 다가왔다.도아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판매원의 손에 들려 있는 상자를 가리켰다.“저것도 한 번 더 보고 싶어요.”매니저는 판매원보다 더 침착하고 노련했다.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속으로는 무척 흥분하고 있었다.고급 주얼리 세트를 두 개나 팔게 되면 그녀는 각 매장의 매니저 중에서도 단연 1등일 것이다.매니저는 판매원을 바라보았고 판매원은 배지유를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배지유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도아린, 이건 결혼할 때나 쓰는 주얼리야. 설마 결혼하려는 거야?”배지유는 도아린이 아직도 오빠를 사랑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결혼할 리가 없다.도아린은 그제야 그녀를 발견한 듯한 표정을 짓고는 김지민과 배석준에게도 한 번씩 시선을 보낸 후 옅은 미소를 지었다.“왜? 축의금이라도 주려고?”“내가 너한테 왜 축의금을 줘야 해!”배지유는 목소리를 높였다.“넌 그냥 가문을 망치는 재앙 덩어리야! 누가 너랑 결혼하면 그 가문은 끝장나는 거라고! 우리 가문의 꼴을 보면 네가 얼마나 불
“변슬기?”배지유는 처음에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고 진씨 가문의 외사촌인 안민아인 줄 알았다.배지유는 다리가 부러져 휴학한 이후로 변슬기를 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의 변슬기는 옅은 화장을 했을 뿐만 아니라 분위기까지 달라져 있었다. 심플한 오피스룩을 입고 있었는데도 강단 있는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아빠! 저 여자예요! 저 여자가 바로 나를 옥상에서 떨어지게 만든 장본인이에요!”배지유는 화를 내며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배석준은 그녀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아직 아무런 결과도 없었는데 지금 이렇게 변슬기를 다시 만난 건 기회였다.배지유는 변슬기를 매섭게 노려보며 입가에 희미한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배석준이 그 소리를 듣고 변슬기를 바라보았다.비록 몸은 병들었지만, 시력에는 이상이 없었다. 게다가 몸 상태가 조금 회복되면서 예전처럼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도 되찾고 있었다.하지만 변슬기는 기죽지 않고 배석준과 눈을 맞추며 단호하게 말했다.“당신이 배지유의 아버지십니까? 당신 딸은 다른 사람들과 공모해 저를 괴롭혔고 제가 대회에 출품할 작품을 망가뜨렸습니다. 저는 경찰에 신고해 결백을 증명하려 했지만, 배지유는 오히려 옥상으로 올라가 투신 시도를 하면서 동정을 얻으려 했죠. 하지만 하늘도 배지유를 돕지 않았고 결국 스스로 그 대가를 치렀죠. 배지유가 떨어질 때 저는 지도 교수님과 경찰과 함께 있었죠. 만약 원망할 사람이 필요하다면 배지유를 부추긴 그 남자 친구를 원망하세요!”배지유는 갑자기 변슬기에게 달려들며 뺨을 때리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도아린에게 단단히 붙잡혔다.“네가 제대로 중심을 잡고 서면 손 놓아줄게. 괜히 넘어져서는 내가 넘어뜨렸다고 나한테 누명 씌우려 하지 마.”도아린의 차갑게 식은 시선이 옆에 있는 카운터 매니저를 향했다.매니저는 급히 직원을 시켜 배지유를 부축하게 했다. 직원들은 그녀를 가까운 의자에 억지로 앉혔다.배지유는 독기 어린 눈빛으로 도아린을 쏘아보고 있었지만, 도아린은 더는 신경
“말을 가려서 해. 지금 나는 네 새엄마야! 나는 너보다 윗사람인데, 나한테 이따위로 말하는 게 예의야? 네가 집에서 얼마나 버릇없이 굴었을지 뻔하구나! 네가 생일이라고 해서 내가 몸이 힘든데도 석준 씨를 모시고 너한테 선물 사러 왔잖아. 내가 안 사주겠다고 한 것도 아니잖아. 너도 좀 적당히 해야지! 입만 열면 수억짜리 사치품을 사달라고 하면 어쩌라는 거야? 우리 집안 사정이 어떤지 몰라? 석준 씨의 병이 더 악화해야 속이 시원하겠어?”주변 사람들은 배지유를 향해 경멸 어린 눈빛을 보내며 수군거렸다.‘자신의 가족을 풍비박산 내놓은 것도 모자라, 아버지가 새 가정을 꾸렸는데도 여전히 문제를 일으키네!'‘새엄마가 금팔찌라도 하나 사주면 감지덕지한 일이지, 어떻게 몇억 원짜리 명품을 바랄 수가 있어?’배지유는 점점 자신에게 불리해지는 분위기에 속이 끓어올랐다.그때 그녀의 시야에 도아린이 들어왔다. 그 눈빛 속엔 조롱과 냉소가 가득했다.배지유는 문득 깨달았다. 도아린은 분명 VIP 구역에서 나왔다. 즉, 자신들이 이곳에 오는 걸 미리 보고 일부러 시비 걸러 온 것이다.‘절대 도아린의 뜻대로 되게 할 수 없어!’배지유는 김지민을 쳐다보았다.“그 말도 안 되는 쇼를 작작 해! 너 같은 뻔뻔한 내연녀가 어디서 생색이야? 우리 아빠가 병들어서 정신이 없을 때 억지로 혼인신고를 한 거 다 알아! 우리 아빠 돈을 속여서 빼앗을 생각 말고, 당장 나한테 선물을 사 줘! 안 그러면 다음 달 생활비는 내 카드로 받을 거니까. 앞으로 너 그 돈 손끝 하나도 못 댈 줄 알아!”이 말에 김지민의 얼굴이 순간 새빨개졌다.배지유가 그녀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것이었다.그녀는 요즘 배석준의 돈으로 친정을 돕고 있었다. 한 번 돈을 대주기 시작하면 욕심이 끝도 없이 커지는 법인 것이다.만약 앞으로 생활비를 손에 쥘 수 없다면? 친정 남동생과 올케의 사이가 틀어질 것이고, 아들을 편애하는 어머니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배 속의 아이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아니야, 그게 아니라...”그냥 뜻밖의 상황일 뿐이었다. 하지만 김지민은 이 돈이 배석준의 딸이 주얼리를 사는 데 쓰인다는 걸 지춘미에게 말할 수 없었다.“엄마, 이번 투자 건은 시간이 촉박해요! 제발 빨리 보내 주세요. 딱 일주일만 있으면 갚을게요!”하지만 지춘미는 여전히 불안해서 질문을 퍼부으며 이것저것 캐물었다.배지유는 김지민에게 돈이 얼마 있는지 몰라 김지민이 계속 전화를 하며 돌아오지 않자 혹시 시간을 질질 끌다가 도아린이 떠나면, 아예 사 주지 않으려는 속셈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그녀는 초조하게 휠체어 팔걸이를 움켜쥐고 몸을 앞으로 숙여 배석준에게 속삭였다.“아빠, 제가 예전부터 김지민이 수상하다고 했죠? 이제 아시겠죠? 돈이 김지민의 손에 들어가면, 절대 다시 나오지 못할 거예요! 김지민이 아무리 달콤한 말로 포장해도 믿지 마세요. 아빠가 진짜 위급한 순간이 오면 치료비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산소호흡기 줄을 뽑고 돈을 가로채려 할걸요!”배석준은 화가 나서 온몸이 떨었고 휠체어까지 삐걱거리며 흔들렸다.혈압이 점점 올라가는 기분이었다.친딸도 믿을 수 없고 재혼한 아내는 돈에만 눈이 멀어 있었다.한때 모건 그룹 해외 지사의 책임자였던 자신이 이제는 여인들에게 휘둘리는 신세가 되어버렸다.돈이 없으면 얼마나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될지, 그는 뼛속까지 절감했다.배지유는 말을 마친 후, 슬며시 허리를 펴며 주변을 둘러봤다.그러다 도아린과 눈이 마주쳤는데 도아린은 비웃음이 섞인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사기 어려우면 억지로 애쓰지 마.”배지유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자신한테 돈이 없다고?그녀는 배씨 가문의 금지옥엽이다!이 세상에 그녀가 원하지 않는 건 있어도 사지 못하는 것은 없었다.그녀의 말 한마디만 하면 부모님과 오빠는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사람들이었다!도아린이 지금 와서 잘난 척을 하는 것이었다.“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주얼리 세트는 내가 살 거야!”배지유는 자랑스러운 듯 턱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배석준은 여러 차례 도아린의 말을 끊어버리는 배지유에 온통 신경이 쓰여 있었다. 딸이 분명 자신에게 숨기는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얼른 계산해. 뭐 하고 있는 거야?”옆에 있던 배지유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김지민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결제했다. 영수증이 인쇄된 것을 보고 배지유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도아린의 앞에서 체면이 섰다고 생각했고 곧 도망갈 밑천이 생겼다고 생각해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던 것이다. “배 여사님이 샀으니까 이제 그만 가죠.”도아린은 이미 계산을 마쳤고 매니저는 액세서리를 정교한 상자에 넣었다.옆에서 변슬기가 그걸 건네받고 두 사람은 팔짱을 끼고 자리를 떴다. 이때, 김지민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왜 너한테 여사님이라고 불러? 넌 아직 결혼도 안 했잖아?”“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제정신이 아닌 거겠지.”눈을 흘기던 배지유는 방금 도아린이 자신을 향해 여사님이라고 불렀던 것이 떠올랐다. 천한 계집애가 또 무슨 꿍꿍인 거야? 직원은 배지유가 마음에 들어 하는 액세서리를 포장했다. 지팡이를 짚고 있는 그녀가 물건을 들기 불편해하자 액세서리의 상자를 배석준의 다리에 놓고 두 손을 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목적을 이룬 배지유는 더는 쇼핑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집에 가자고 했다.김지민이 배석준을 차에 태우는 그때, 배지유가 손을 뻗어 상자를 집어 들었다.“먼저 들어가요. 난 친구 좀 만나고 갈게요.”퍼억.상자를 꾹 누르던 배석준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집에 가자.”“아빠, 저 볼일이 있어요.”배석준은 상자를 더 꽉 움켜쥐었고 김지민은 바로 그의 뜻을 이해했다.“그럼 갔다 와. 액세서리는 우리가 가져갈게. 몸도 불편한데 이렇게 비싼 걸 가지고 다니면 어떡해?”“이건 내 거야. 잃어버려도 그건 내 일이라고.”배지유는 손을 뻗어 상자를 빼앗으려고 하였다. 그 순간, 김지민은 재빨리 배석준의 앞을 가로막으며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배지유, 억지
아악.김지민과 배지유가 동시에 소리 질렀고 배석준은 눈을 감았다.쿵쾅쿵쾅.당황한 세 사람은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배지유의 곁으로 급히 달려온 전동 삼륜차는 사람을 피하느라고 옆으로 큰 호선을 그리며 넘어졌고 차량이 배지유의 쪽으로 넘어지게 되었다. 배지유는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쥐었고 곧이어 또다시 비명을 질렀다.그녀의 팔이 차에 눌려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이다.“운전을 어떻게 하는 거예요?”그녀는 울부짖었다.“당장 차부터 빼요. 내 손 눌린 거 안 보여요?”“어떻게...”기사는 차에서 내려와 눈앞의 세 사람을 쳐다보며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 사람은 임산부, 한 사람은 휠체어를 타고 있고 한 사람은 지팡이를 짚고 있다. 기사는 그들이 돈을 뜯어내려고 이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안해요. 이 도로가 그쪽 집 거실일 줄은 몰랐네요. 내가 눈이 없어서 그쪽 집 구역까지 들어왔네요.”“헛소리 집어치우고 빨리 차부터 치워요.”바닥은 차갑고 단단했고 다리 관절 부상이 아직 낫지 않은 그녀는 지금 팔에서도 지끈거리는 통증이 전해졌다.화가 치밀어 오른 그녀는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차도 살 주제가 안 되는 사람이 해남에서 돌아다녀요? 당장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나 짓지 그래요? 해남 사람들의 얼굴에 먹칠하지 말고.”“그래요. 난 소질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이렇게 당신 집 거실에 들이닥친 거겠죠.”기사는 팔짱을 낀 채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주위에 구경꾼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깜짝 놀란 김지민은 배석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배석준의 안색은 엄청 어두워졌다.그녀는 액세서리 상자를 그의 손에 꽉 쥐여주고는 구경꾼들에게 차를 옮기는 것을 도와달라고 했다.그녀가 임산부인 것을 보고 마음씨가 착한 사람들이 나서서 그녀를 도와주었고 이내 삼륜차를 일으켜 세웠다. 얼마 후, 경찰이 현장으로 와서 확인했고 삼륜차의 운전자는 운전하는 도중에 배지유가 갑자기 바닥에 드러누웠다고 해명했다. “손이 부러진 것 같아요.
정신을 차린 김지민은 눈물을 글썽이며 배석준을 쳐다보았다.“아까 주얼리 매장에서 도아린 씨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아요?”배석준은 온몸을 떨며 침을 흘렸고 필사적으로 눈을 크게 떴다.“배 대표님이 고발당해서 지금 조사를 받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거예요. 배 대표님 명의의 자산도 동결되었고요. 고발한 사람이 배지유라고 해요.”그 와중에 어렴풋이 뭔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이내 비린내 나는 소변 냄새가 진동했다.배석준이 실수를 한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소파에 엎드려 펑펑 울었다.어떻게 이 지경까지 된 건지?재벌 집에 들어와서 배석준에게 기대어 사람들의 눈치를 안 보며 모두가 부러워하는 부잣집 사모님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배석준은 이혼하고 나서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돈도 없고 병치레만 하고 있다. 사실 배건후가 준 생활비로는 충분했다. 배석준의 예전 생활 수준에 맞춰 준 금액이었기 때문에 적지 않은 돈이었기 때문에 그 생활비로 친정에 보탬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걸 배지유가 망쳐버렸다.“배지유, 이 악마 같은 년.”김지민은 목 놓아 울었다.“악마 같은 년. 새언니를 해치고 친엄마까지 독살하더니 이젠 친오빠도 가만두지 않네. 다리가 부러진 건 업보야.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니. 내 뱃속의 아이까지 죽이려는 건 아니겠지?”배석준은 머리가 하얘졌다. 지난날 화목하고 즐겁고 행복했던 장면들이 영화처럼 그의 머릿속에 반복적으로 떠올랐다.집안을 망친 건 배지유였다.다리의 온기가 서서히 차가워지자 그가 몸을 떨며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지민... 지민아.”김지민은 그를 올려다보고는 그가 책상 위의 보석 상자를 가리키자 눈물을 닦으며 불평을 늘어놓았다.“지유 같은 딸은 예뻐할 가치도 없는 거예요. 이제 정말 어떡해요? 지유한테 그렇게 비싼 액세서리를 사주었으니 앞으로 생활비와 약값은 어떡하냐고요? 배 대표님이 언제까지 조사를 받을지도 모르고. 회장님 병은 치료 안 하면 더
누군가는 사진 한 장을 들고 나타나 말했다.“도아린 곁에 있는 꽃미남이 사실 강재민이래.”과거, 두 사람이 함께 음악 페스티벌에 참석했던 적도 있다는 이야기였다.그 말에 또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번져갔다.그러던 어느 날.도아린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신인 배우가 몰래 찍은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 올라왔다.사진 속엔, 두 사람의 머리가 맞닿은 채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그 한 장의 사진은 결국 배건후의 정체를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고 그는 다시 한번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이번에도 역시 온갖 의심과 루머 그리고 비난이 따라붙었다.하지만 며칠 후, 연성 경찰청에서 공식 공지문이 게시되었다.바로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기 밀매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 공지였다.공지문에는 고성만, 손보미, 자상훈 등이 인신매매로 부당한 이익을 챙기다 결국 장기 밀매까지 손을 뻗친 사실이 요약되어 있었고 그 수사에 협조한 익명의 자원자들에게 감사의 뜻도 함께 담겨 있었다.그 단 하나의 공지로, 여론은 완전히 반전됐다.정월 대보름, 해남엔 보기 드문 큰 눈이 내리고 있었다.도로는 차들로 가득 막혀 10분이 지나도 백 미터를 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천천히 가. 우린 여기서 내려서 좀 걸을게.”도아린은 조수석 창문을 내리며 일북에게 말했다.그리고 배건후와 함께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까지 걷기로 했다.배건후는 우산을 펼쳐 도아린의 머리 위에 씌웠다.도아린은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은 외투 주머니 속에 꼭 쥐어져 있었다.“춥지 않아?”그가 우산을 더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안 추워요.”도아린은 입김을 내뿜으며 활짝 웃었다.발밑에서는 바삭거리는 눈이 소리를 냈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기억이 스쳐 갔다.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시절.어느 회사 대표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눈밭에서 몇 시간을 버텼던 그날, 발이 얼어 서 있지도 못하고 결국 쪼그려 앉았던 그 순간
그 여자는 바로 그날 수상 레스토랑에서 진경수에게 벨트를 빌렸던 그 여자였다.하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짧은 티셔츠와 청 반바지 대신 격식을 갖춘 정장 느낌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얘, 내 여동생. 그리고 이 사람은... 우리 제부.”진경수는 ‘제부’라는 단어에서 말끝을 흐렸다.여동생이 혼인신고까지 해놓고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그건 진수혁도 마찬가지였다.“큰형님, 작은 형님.”배건후가 정중히 일어나 인사를 건넸고 도아린은 해맑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오빠들, 호칭 바꿨으니까 용돈 좀 주셔야죠?”“혼인신고도 우리 몰래 해놓고, 무슨 용돈이야?”진경수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배건후를 노려보다가 결국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도아린에게 내밀었다.“다시 내 동생 울리기만 해봐. 그땐 진짜 널 갈기갈기 찢어서 물고기 밥으로 줄 거야. 명심해.”“고마워요, 둘째 오빠!”도아린은 싱긋 웃으며 봉투를 받아들었고 이번엔 진수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진수혁 역시 말없이 봉투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도아린은 봉투를 슬쩍 비춰보며 속으로 웃었다.‘안 봐도 이건 수표네.’그녀는 배건후를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더니 말했다.“이건 제가 따로 보관할게요.”“감사합니다, 우리 아내님.”“...”진씨 형제들은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쯧쯧, 벌써 아내한테 잡혀 사네...’하지만 상대가 도아린이라면, 뭐… 그럴 만했다.“근데, 여기 두 분은?”도아린은 일부러 모르는 척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진수혁은 변슬기를 소파에 앉히며 담담히 말했다.“예전 동료야.”변슬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진경수가 옆에 있던 여자를 품 안으로 확 끌어당기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부모님 말씀대로 아린이 일도 정리됐겠다... 이젠 내 차례지. 그래서 나도 결혼했어.”도아린과 배건후는 동시에 진수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둘째 오빠를 좀 본받으세요. 뭐 하세요, 진짜.’“작은 올
“...”집사는 조용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건후는 당연하다는 듯 도아린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고 도아린은 그런 그를 집사에게 소개했다.“이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서재랑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 둘째 오빠 방만 빼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게 해주세요.”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자마자 곧장 외출에 나섰다.“앞에 있는 만둣가게, 진짜 맛있어요!”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도아린의 시선은 창가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하던 진수혁에게 향했다.그 맞은편에는 변슬기가 앉아 있었고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설득 중이었다.“여긴 패스트푸드점이에요, 카페가 아니라고요. 여기서 일하시는 건 좀...”“카페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난 괜찮은데?”“그렇긴 해도 이렇게 계속 앉아 계시면 저희 가게 영업에 방해된다니까요!”그때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변슬기는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다.“도 선생님! 대표님 좀 말려주세요!”그 말에 진수혁은 고개를 돌리며 태연하게 말했다.“밥은 먹었어? 여기 만두 꽤 괜찮더라.”도아린은 황당함에 헛웃음이 났다.‘사람을 회사에서 내쫓아 놓고선 정작 본인은 여기에 눌러앉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내가 말할게.”도아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변슬기와 함께 옆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그사이 배건후는 주머니에서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내 진수혁 앞에 내려놓았다.“제가 이겼어요.”“...”진수혁은 조용히 종이를 펼쳐보고는 이를 악물었다.“너 이거 반칙 아냐?”“우린 내기했잖아요. 졌으면 인정해야죠.”“유럽 연수 그 자리, 잊지 말고 제 이름으로 신청해 주세요.”진수혁은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바라보았고 마침 도아린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둘의 눈이 마주쳤고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이 분위기 뭐야... 완전 닭살 돋게 하네.’그 순간, 배건후는 시선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형님도 제가 예전에
‘정말로 배고픈 거야? 아니면 날 원하는 거지?’도아린은 배건후를 흘끗 쳐다보며 가위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끌려가 밥을 먹었다.배건후의 요리 실력은 한층 더 늘어 있었고 맛뿐만 아니라 음식의 모양새도 훨씬 좋아졌다.“이제 영양식은 안 드세요?” 도아린은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 “전에 어떤 사람이 고기도 안 먹고 기름진 것도 안 먹고 오래된 것도 안 먹고 부드러운 것도 안 드셨잖아요!”배건후는 매운 닭 요리를 그녀 앞으로 밀어놓으며 진심으로 사과했다.“그때는 네 관심을 끌려고 그런 거야. 그리고 몸매가 망가져서 네가 싫어할까 봐 걱정도 됐고.”“그럼 이제는 몸매 망가지는 거 걱정 안 해요?”도아린은 고기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배건후는 가볍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 한 사람이 요리하면 다른 한 사람이 설거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배건후는 도아린에게 설거지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그녀를 안아 위층으로 올라갔다.도아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배건후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녀를 삼켜버릴 듯한 눈빛을 보였지만 쉽게 다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도아린은 그가 마음속 어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안고 몸을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며 달랬다.“천천히 해도 돼요.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세요.”도아린의 위로는 곧 배건후에게 그대로 되돌아왔다.그의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그녀의 흰 목 위로 떨어졌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도아린, 힘 빼... 너무 긴장했어...”도아린은 그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손가락은 그의 입에 물려 있었다. 그 후, 그녀는 머릿속이 멍해졌고 마치 거친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배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재미를 본 배건후는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도아린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마치 어젯밤 온몸이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된 것처럼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고 특히 허리
“배 대표님! 모든 자산을 도 대표님께 넘기신 것은 이전에 하신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셔서인가요? 손보미 씨가 형을 선고받았다고 들었는데 손보미 씨를 꺼내줄 계획이 있으신가요?”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기자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인터뷰의 주제는 챔피언십 선수들의 숙식 안전입니다.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겠습니다.”기자들이 더 질문하려 하자 도아린이 배건후의 손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숙식 문제에 대한 더 나은 제안이 있다면 제안서를 작성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수한 의견을 채택하고 그에 따라 보상을 제공할 예정입니다.”도아린은 카메라를 향해 당당하고 품위 있게 말했고 입가의 미소를 살짝 거두며 한층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제 개인적인 문제로 여러분의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배건후 씨에 대해서는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배건후는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도아린이 배건후에 대해 말하려 하자 기자들은 앞다투어 마이크를 내밀었다.도아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배건후 씨는 여태까지 운영부의 팀장이었지만 오늘부터는 한경 그룹의 특별 자문입니다. 이후의 직책은 배건후씨의 능력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도아린의 시선은 배건후가 도아린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를 거냐고 묻던 기자를 향했다.“과학 연구자, 의학 전문가, 스포츠 선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성을 존경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그러자 그 기자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갔다.다른 기자들도 더 이상 질문을 할 기세를 잃었고 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고유리를 보며 말했다.“기자분들 고생 많으셨으니 저녁 식사 후 차량을 준비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고유리는 기자들을 데리고 나가며 각자에게 돈 봉투를 나눠 주었다.그들은 어떤 내용을 발표할 수 있고
“뭐라도 먹고 가자.”배건후는 구운 닭 날개는 도아린에게 건네주고 주현정에게는 구운 식빵을 건네주었다.주현정은 빵을 받아 들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누렴. 나는 물 좀 마시러 들어갈게.”도아린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서 멈췄다.두 사람은 강가의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엄마는 진짜 다 내려놓으신 걸까요?”“적어도 시작은 하신 거지. 앞으로 진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와 함께 여행 다니면 점차 나아질 거야.”배건후는 핸드폰을 꺼내고는 방금 구 경관이 보내온 사진을 열었다.“남궁유민, 즉 고성만이야. 경찰이 고성만의 집을 수색할 때 이걸 발견했어.”도아린은 마지막 닭 날개를 입에 넣고 꼬챙이를 배건후에게 건네며 핸드폰을 받아서들었다.화면 속 사진에는 루비 목걸이가 찍혀 있었다.배건후가 큰돈을 들여 샀던 화려한 디자인의 목걸이지만 전에 잃어버렸던 목걸이였다.도아린은 배건후를 바라보며 말하려 했지만 입안은 닭 날개로 가득 차있어 눈만 깜빡였다.“내가 전에 너한테 줬던 그 목걸이야. 배지유가 몰래 차다가 잃어버렸던 거.”도아린의 입은 마치 발골 기계 같았다. 닭 날개가 입에 들어갔다 나올 때면 뼈만 남았다.도아린은 손바닥에 뼈를 뱉고는 차분하게 말했다.“배지유가 어떤 남자와 잤고 그 사람이 계속해서 그녀를 영상으로 협박했어요. 그 장본인이 바로 고성만이라구요!”“...”이번에는 배건후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성만이 배지유를 협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걸이를 철저히 숨겨놓고 분해해서 이미 팔아버렸을 거로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걸 집에 보관해 놓았을 줄은 몰랐어.”그것은 고성만이 자신을 위해 남겨둔 마지막 보험이었다.궁지에 몰리게 되면 목걸이를 분해해 팔고 다른 도시로 가서 새 삶을 살 계획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체포당하고 말았다.다음 날, 도아린은 연성으로 돌아갔다. 배건후가 신청한 챔피언십 대회 접대 임무가 승인되었기 때문이다.진수혁 역시 변
그는 입가에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자고충이 하나가 될 때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야. 앞으로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면 아프지도 않을 거야.”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다면 그 고통으로 인해 결국 죽게 될 것이다.도아린은 배건후의 머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들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고 애썼다.배건후는 그녀의 품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어서 너에게 혼수로 바칠게. 네가 나를 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너를 평생 지켜줄 거야.”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져 남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그렇게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빛이 어두워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다. “돌아가자.”배건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고 다리를 움직이며 불편했던 자세를 바꿨다.“이 근처에 야생 동물은 없지만 해가 지면 안전하지 않아.”도아린은 처음에는 감정에 휩싸여 배건후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몸을 움직이자 그녀는 즉시 이상함을 느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돌아갈 때 건후 씨 몸이 불편하니까 제가 태워드릴게요. 그리고 내리막길이라 힘도 덜 들 거예요.”“알았어. 네 말 들을게.”자전거 핸들이 비뚤어져 있었지만 배건후는 두 다리로 바퀴를 단단히 고정한 후 힘껏 돌려 단숨에 바로 고쳤다.도아린이 자전거 앞좌석에 타고 배건후는 그녀 뒤에 앉았다.그는 얼굴을 그녀의 등에 기댄 채 내리막에서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긴 다리를 쭉 뻗어 마찰력을 늘리며 조절했다.그들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진수혁과 변슬기도 막 돌아오고 있었다.변슬기는 도아린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들이 뭔가 진전이 있을 줄 알고 가서 물어보려 했지만 배건후가 붙잡았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 머리 위에서 붉은 잎 하나를 떼어냈다.“...”변슬기와 진수혁이 설마 자신과 배건후가 야외에서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배건후는 오직 도아린에게만 부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도아린은 그의 눈동자 속에 가득한 붉게 물든 단풍잎과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마음속 깊이 즐거워하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의 깊고 그윽한 눈이 가늘게 감기며 그 속에는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그래, 이거지!’그녀는 올해 겨우 25살이었다.어린 시절 양부모 곁에서 사랑받지 못했고 장애를 겪은 후 식물인간이 된 동생을 돌보며 결혼 생활에서는 남편의 감정적 학대 속에서 버텨야 했다.그녀는 너무도 많은 행복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이게 맞는 일이다.그녀는 웃어야 한다. 크게 소리 내어 마음껏 웃어야 한다.고작 25살에 불과한 그녀가 이토록 많고 무거운 책임과 압박을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눈앞 여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고 배건후의 심장도 저릿해 왔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거친 손끝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스쳤고 천천히 그녀의 눈꼬리를 눌렀다.“웃어. 앞으로 나쁜 감정들은 전부 나한테 넘겨. 내 앞에서는 일부러 강한 척 버틸 필요도 없어. 속상하면 때리고 욕해도 돼. 대신에 절대 자신을 괴롭히지 마.”도아린은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 뒤돌아 눈물을 닦으려 했다.그 순간 힘센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 특유의 나무 향기가 그녀를 감쌌고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여태까지 내가 나쁜 놈이었어. 미안해. 앞으로는 모든 일을 너와 상의할게. 네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을 거고 네가 속상해할 일도 만들지 않을 거야.”도아린은 팔꿈치로 그를 툭 쳤다.“입만 살아서!”배건후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운 뒤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도아린은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지도 못했잖아요. 그리고 저도 아직...”이후의 말은 더 이상할 수 없었다.배건후가 상자를 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청혼의 반지가 아니었다.작고 빨간 벌레가 들어 있었는데 다리가 없고 온몸이 부드러웠으며
변슬기는 바쁜 듯 뒤돌아보며 기대와 불안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진수혁은 흔쾌히 대답했다. 이미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배건후는 세 사람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빌라에는 자전거가 두 대 있었는데, 도아린과 함께 드라이브를 나가기 위해 일부러 다른 자전거의 페달을 떼어 놓았던 것이다. 도아린은 자전거를 보고 그에게 너 정말 얄밉다'는 눈빛을 보내며 빨리 고치라고 신호를 보냈다. 자전거를 고치고 네 사람은 문밖으로 나갔다. "꽉 잡아."배건후는 도아린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자 힘껏 페달을 밟았고, 자전거는 비탈길을 미끄러져 작은 길로 향했다.변슬기는 진수혁에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자전거 뒤쪽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진수혁은 자전거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저, 제가 밀어드릴까요...거의 정상에 도착하면, 그때 저를 밀어주세요."라고 제안했다. 진 대표님의 속도로는 누가 먼저 정상에 도착할지 내기는커녕,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수혁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거의 넘어질 뻔했고, 황급히 남자의 허리를 붙잡았다. 자전거는 갑자기 비틀거리지 않았고, 속도도 빨라졌다. 변슬기: "..."배건후는 도아린을 태우고 산길을 누볐고, 도아린은 뒤쪽 페달을 밟으며 일어섰다.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짧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렸다. "산속 공기가 도시보다 훨씬 좋네요. 매연 냄새도 없고, 에어컨 냄새도 안 나고." 배건후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어제 비가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당신도 비 온 뒤 흙냄새 좋아해요?"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웃으며 말했다. "나도 좋아해요! 비 온 뒤 흙과 풀이 섞인 냄새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배건후는 입꼬리를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깨달았다. 배건후가 말한 것은 바로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환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