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작더라니 안민아의 옷이였구나.재벌 집의 집안싸움을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드라마를 보기 좋아했던 차화영은 위세를 부리는 것이 뭔지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이 옷을 정말 안민아가 준 것이라면 안민아는 도아린이 이 집안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자신의 지위에 대해 똑똑히 알려준 것이었다. 도아린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거나 전혀 신경 쓰지 않은 것이겠지. 진옥경은 도아린이 자신의 딸을 모함할까 봐 급히 해명했다.“오해하지 마. 민아는 좋은 마음에서 준 거니까. 네가 처음 이 집안으로 돌아왔을 때 아무것도 없었으니 민아가 널 보살펴 준 거잖아. 사이즈를 모르면 네가 알려주면 될 것이지. 굳이 이렇게까지 불쌍한 척, 괴롭힘을 당한 척해야겠어?”도아린은 입술을 오므린 채 눈시울을 붉혔다. “잘 알아들었어요.”순순히 알겠다고 하는 그녀의 말에 진옥경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려 차화영을 쳐다보았다. 차화영은 찢어진 청바지를 한참 쳐다보다가 도아린을 올려다보았다.“민아가 널 대신해 너희 부모님과 오빠들을 돌봐주었다는 걸 알고 있으면 감사할 줄 알아야지. 너희 엄마한테 혼수 준비 잘하라고 설득해.”차화영은 소파를 만져보며 빠진 바늘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소파 손잡이에 기댔다. “너도 결혼을 해봤으니 친정 식구들이 든든하지 않으면 시댁 생활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겠지. 민아는 네 동생이야. 그러니 네가 민아를 도와줘야 하지 않겠니?”“듣자 하니 네가 아이를 가질 수 없어서 시댁에서 미움을 받았다고 하던데. 여자가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건 큰 흠이다. 나중에 너희 아버지한테 새로운 거처를 마련해 주라고 할 테니까 그곳으로 옮기거라. 이런 불행한 기운을 너희 두 오빠한테 가져다주지 말고.”막내딸을 잃어버리고 나서 두 아들들은 결혼할 나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여자 친구도 하나 없었다. 이건 분명 도아린의 불행한 기운이 그들에게까지 전해진 것이었다. 진작에 증손자를 봤어야 했는데... 차화영은 도아린을 쫓아내기로 결심했다.
“경수야, 네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않니?”진옥경이 불만스럽게 말했다.“네가 고모인 나를 무시한다 쳐도 할머니까지 무시할 셈이야?”“진씨 가문의 어른께서 내 친동생을 괴롭혔을 리 없겠죠.”진경수는 화난 기색 없이도 차갑고 단호한 말투로 대답하며 도아린을 품 안에 꼭 감쌌다.“우리가 그렇게 오랫동안 동생을 찾아 헤맸고 드디어 찾았는데 이혼했든 아니면 감옥에 다녀왔든 간에 우리 진씨 가문의 소중한 딸이에요. 게다가 이혼도 걔 잘못이 아니잖아요. 사람을 잘못 만난 것뿐인데 고모는 민아가 평생 잘살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어요? 만약 민아도 언젠가 그 강유준 같은 놈에게 당한다면 이혼하지 말고 안씨 가문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하실 건가요?”“나... 그건... 아니. 그게...”진옥경은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이 달아올랐다.안민아는 그녀의 목숨 같은 딸이었다. 그녀가 강유준에게 이용당해 명예를 잃었을 때 진옥경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마음 아파했다.그녀는 안민아가 시댁에서 당당히 살 수 있도록 하려고 강씨 가문에서 혼수를 챙기려고까지 자존심을 내려놓았었다.그런데 강유준이 만약 딸을 배신이라도 한다면 그를 죽이고 싶은 심정이 될 텐데 어떻게 딸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진옥경은 두 조카가 동생을 보호하려고 자신한테 대놓고 말대꾸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도움을 청하듯 차화영을 쳐다보았고 진경수도 차화영을 바라보며 말했다.“할머니, 작년에 고모가 고모부한테 맞았을 때 직접 고모를 데리러 가셔서 친정에서 쉬게 하셨잖아요. 그런데 왜 제 동생은 친정에 돌아오면 안 되는 거죠? 단지 진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라서요? 그래서 같은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 건가요?”“경수야...”차화영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부르며 자기 손을 들어 보였다.“내 손을 봐라 방금 아린이가 찔렀는데 아직도 아파. 약 좀 가져다주겠어?”그녀는 반박할 이유가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얼버무리듯 말을 돌리려 했다.진경수는 차화영의 손을 들어 올려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윤명희는 카메라를 뒤로 돌렸고 화면에는 해변에 있는 여자들이 모두 비키니를 입고 있었고 그 모습에 진범준은 서둘러 손으로 눈을 가렸다.“돌려, 돌려! 나는 내 아내만 볼 거야!”윤명희는 웃으며 카메라를 다시 전면으로 전환했다. “비교해 봐야 알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최고인 걸 어떻게 알겠어요?”“똑똑!”“범준아...”윤명희는 짜증 난 얼굴로 눈썹을 찌푸렸고 곧바로 전화를 끊고 중얼거렸다. “또 나한테 트집 잡으러 오셨나 봐.”진범준은 심호흡한 뒤, 어머니를 일부러 몇 분간 기다리게 했고 한참이 지나서야 천천히 문을 열었다.“엄마, 무슨 일이세요?”“할 얘기가 좀 있어서.” 차화영은 서재로 들어왔고 책상 위에는 열려 있는 서류 하나 없었다. 도대체 아들이 무슨 일을 하느라 문을 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차화영은 얼굴이 심드렁했다.“민아의 혼수 문제는 어떻게 하려고 해? 네가 외삼촌으로서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잖아.”진범준은 물을 따라 마시려는 듯 정수기로 걸어가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지만 돌아설 때는 공손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엄마, 명희가 말했잖아요. 어머니께서 하라는 대로 저희도 따르겠다고요.”“이 집에서는 네가 주도권을 가져야지. 왜 남의 말을 듣고 모든 걸 결정하는 거야?”차화영은 목소리를 높이며 화를 냈다.“도대체 명희가 무슨 자격으로 강유준 얘기를 꺼내는 거야? 윤명희도 아직 성을 바꾸지 않았잖아. 그러니 진씨 가문 일원도 아니야!”진범준은 그저 미소만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차화영은 아들이 아내에게 휘둘리는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내가 몇 번이나 말했니? 남자는 집안을 주도해야 하고 여자에게 휘둘리면 안 된다고. 그래야 앞날에 문제가 생기지 않아.”진범준은 웃으며 단순히 이렇게 말했다.“엄마, 집안이 평화로워야 모든 일이 잘 풀려요. 제가 이렇게 큰 사업을 이룬 것도 명희 덕분이에요.”그 말에 차화영은 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속만 끓였다. “아내를 존중하는 척만 하면 되지 왜
도아린의 방 안, 진경수가 그녀의 코를 가볍게 톡 건드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할머니랑 연극까지 했어?”“노인네니까 너무 강하게 나가면 불효라 할 거고 그렇다고 다 들어주자니 내가 억울하잖아요.”도아린은 방 안에 있던 도구들을 정리하며 물었다.“근데 오빠, 무슨 일이야?”사실 그녀는 아까 일부러 문을 살짝 열어 둔 채 소리 좀 크게 내며 울려고 했다.진경수가 돌아오면 일부러 유도해 자신을 도와 연극을 완성하려던 계산이었다.할머니와 너무 강하게 부딪치지 않으면서도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어가려는 것이었다.하지만 그녀가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진경수가 먼저 찾아왔다.그가 평소 같으면 반대쪽 계단으로 방에 돌아갔을 텐데 이렇게 바로 온 걸 보면 할 말이 있는 게 분명했다.진경수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전에 네가 수정해 줬던 그 전미나의 작품 말이야.”도아린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도아린이 조언을 한 덕에 디자인비가 두 배로 올라갔고 전미나한테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지금 고객 쪽에서 디자인이 표절이라며 문제로 삼고 있어.”진경수는 그날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도아린이 즉석에서 아이디어를 낸 작품이었다.하지만 상대방은 비슷한 디자인 도안을 들고 와서 계약금의 세 배를 반환하라고 요구하며 티파니 주얼리를 고객 기만 혐의로 고소하겠다고 협박하고 있었다.현재 도아린과 태식 주얼리 간의 갈등이 첨예해진 상황에서 진경수는 이 사건이 강씨 가문이 뒤에서 조종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강씨 어르신께는 전국적으로 영향력 있는 학생들이 많고 그중에는 뛰어난 디자이너도 많아. 그런데 이렇게까지 비슷한 디자인이 나온 건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기 힘들어.”도아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 고객이 딸 졸업 선물로 산다고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사람 신원이나 배경을 알아볼 수 있어요?”“조사 중이야. 주문서에 적힌 이름은 육청아야.” “육청아?” 도아린은 손에 들고 있
“아린아, 할머니의 마음을 받아들여서 조금이라도 먹어봐.”“저는 단 걸 안 먹어요.”“한 입만 먹어봐. 전혀 달지 않아. 내가 장담하건대 한 입만 먹으면 한 그릇 뚝딱 다 먹고 그다음엔 이 맛을 좋아하게 될 거야.”“저는 단 걸 안 먹어요.”“아침부터 짠 음식을 먹으면 목 건강에 안 좋고 몸에도 좋지 않아. 우리는 어릴 때부터 이걸 먹었어. 정말 맛있어.”도아린은 한결같이 반복했다.“저는 단 걸 안 먹어요.”“너 참 고집도 세다. 한 입도 안 먹어보고 맛없다니 다른 사람들은 다 잘만 먹는데 너만 왜 안 돼? 혹시 어제 할머니가 한 말을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는 거니?”도아린은 두부 수프를 들어 올렸다. 진옥경은 이내 차화영을 향해 자신이 잘했다고 자랑하듯 미소를 보냈다.‘이렇게 말을 안 듣는 건 버릇 때문이야. 세 날만 굶겨봐. 돼지 사료도 진수성찬처럼 먹을 거야.’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도아린은 두부 수프를 안민아 앞에 놓았다.“네가 어릴 때부터 이걸 좋아했다고 들었어. 다 먹어.”안민아는 눈가가 금세 붉어졌고 전혀 식욕이 없던 그녀는 하얗고 흐물흐물한 두부를 보자마자 구역질이 올라왔다.“윽...”안만아는 입을 막으며 그릇을 밀어냈다. “전... 속이 안 좋아서 못 먹겠어요.”“이 두부 수프는 소화도 잘 돼. 한 입 먹으면 금방 괜찮아질 거야.”도아린은 다시 그릇을 밀어 안민아 앞으로 놓았다.그 모습을 본 진옥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민아가 못 먹겠다잖아. 왜 그렇게 강요하는 거야?”“강요라니요? 제가 민아를 걱정해서 그러는 건데요. 저도 어릴 때 속이 안 좋으면 두부 수프 한 그릇만 먹어도 괜찮아졌거든요. 한 번 먹어보라고요. 정말 효과 있어요.”안민아는 울먹이며 눈물을 삼키려 했지만 얼굴은 이미 서럽게 일그러졌다.도아린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내 말을 믿고 한 입만 먹어봐요. 장담컨대 한 입 먹으면 한 그릇 다 먹게 될 거야.”진옥경은 이 말이 왜 이렇게 익숙하게 들리는지 곰
진범준은 윤명희가 정말 보고 싶었으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엄마가 명희를 화나게 했으니 이제 딸인 아린이가 나서야 해.’ 도아린은 한 손으로 윤명희에게 메시지를 보내 아빠의 의도를 전했고 윤명희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돈은 네가 갖고 있어. 내가 지금 갈게!]해남 대학 도서관.변슬기는 손에 쇼핑백을 들고 도서관 입구에서 초조하게 서 있었다.그녀는 심장이 이렇게 빠르게 뛴 적은 처음이었다.진수혁은 교장, 학장, 그리고 여러 교수의 환대를 받으며 나타났다. 그의 무표정한 잘생긴 얼굴은 그 주변의 아첨 가득한 웃음 속에서 묘하게 이질적이었다.그런데도 그는 교장의 감사 인사에는 고개를 끄덕였고 다른 사람들의 칭찬에는 손짓으로 답했다.사람을 차갑게 밀어내는 느낌은 없었지만 뭔가 이상한 매력을 가진 사람이었다.변슬기는 방해가 될까 봐 멀리서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진수혁이 건물에 들어가기 직전 그녀가 서 있는 방향을 스쳐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가 자신을 본 건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심장은 더 빠르게 뛰었다.그가 도서관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주변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몇몇은 소곤소곤 대화를 나눴다.“저 사람이 진씨 가문의 장남이야. 진짜 후계자라던데 저 사람이랑 결혼하면 인생 편하게 살겠지.”“진씨 가문의 두 형제는 잃어버린 여동생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아? 여동생을 찾지 못하면 결혼도 안 하겠다고 했대. 나도 그 여동생이었으면 좋겠다!”“밤새 게임을 했니? 꿈같은 소리 하고 있네. 진수혁 씨가 비서 모집한다던데 옆에 있을 수만 있어도 대박이지.”사람들의 이야기가 멀어지자 변슬기는 쇼핑백을 더 꽉 쥐었다.바람이 불어 나무에서 떨어진 계수나무 꽃잎과 먼지가 휘날리자 그녀는 몸을 돌려 피했다.어젯밤 안민아가 그녀한테 메시지를 보내왔다. 아마 결혼 전 불안감 때문인지 두 사람은 밤늦게까지 대화를 나눴고 덕분에 변슬기는 오늘 아침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대충 씻고 얇은 외투만 걸치고 나왔다. 찬 바람이 불자 몸이 점점
안민아는 강유준과의 약혼을 취소하고 더 좋은 상대를 찾고 싶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나 그냥 기분이 안 좋아서 그래. 친구랑 얘기 좀 나누면 괜찮아질 거야.”진옥경은 안민아가 변슬기와 친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예전에 변슬기가 안민아를 도운 적이 있어서 안심하며 그녀를 대학 정문 앞에서 내려주었다.안민아는 후문으로 학교에 들어갔다가 변슬기가 진수혁에게 옷을 건네는 모습을 보았다.“슬기야, 너 좋아하는 사람 있어?”“연예인도 포함이야?”안민아는 시선을 떨구며 말을 이어갔다.“우리 큰오빠랑 작은오빠가 잃어버린 언니를 찾기 전엔 결혼 생각 없다고 해서 계속 미루고 있거든. 큰오빠는 벌써 서른하나야.”“너...”그녀는 변슬기의 표정을 살폈으나 별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넌 우리 오빠가 어떤 사람을 아내로 맞을 것 같아?”그러자 변슬기는 진지하게 대답했다.“큰 도련님은 잘생기고 능력도 뛰어나니까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재벌가의 딸을 아내로 선택할 것 같아.”안민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내 결혼식 때 너는 꼭 내 들러리 해줘야 해. 그때 큰오빠 옆에 있는 젊고 유능한 사람들과 그리고 강씨 가문 사람 중에서 네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이어 줄게.”안민아는 방학 동안 진씨 가문에서 머물렀을 뿐이지 진정한 재벌가 딸이 아니었다.그녀는 재벌가의 사교 모임에 어울리지 못했지만 변슬기는 그녀를 친구로 대하며 종종 도와주었다.그 덕에 안민아는 변슬기에게 우월감을 느꼈고 이 우월감은 그녀에게 당연한 것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심지어 결혼 문제에서도 말이다.‘내가 강유준과 결혼하지 못한다고 해도 변슬기가 큰오빠와 맺어지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해.’“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꼭 말할게!”변슬기는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고 안민아는 그녀와 함께 기숙사로 들어갔다.배지유 사건 이후, 배석준은 학교를 협박하며 변슬기를 퇴학시키려고 했지만 학교는 변슬기에게 잘못이 없고 오히려 피해자였다는 이유로 그녀를 퇴학시키지 않
“민아야, 괜찮아?”변슬기가 안민아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는 서둘러 그녀를 부축해 자리에 앉혔다.안민아는 발코니에 걸린 드레스를 가리키며 말했다.“저거 밑단이 뜯어진 것 같아.”“정말?”변슬기는 다급히 드레스를 확인했다. 며칠 전 있었던 일 때문에 드레스를 갈아입을 시간도 없었던 그녀는 혹시라도 드레스가 손상됐다면 도아린에게 뭐라고 설명할지 걱정이었다.하지만 한참을 살펴보아도 아무 문제가 보이지 않아 결국 드레스를 창가 쪽으로 가져가 빛에 비춰가며 점검했다.안민아는 사진을 손에 쥔 채 앉아 있었고 머릿속이 복잡했다.‘정말 화가 나고 짜증 나!’그녀는 속으로 울분을 삼켰다.‘도아린은 내 사촌 언니야. 그런데 왜 변슬기만 데리고 연예인 행사에 가고 나는 데려가지 않는 거야? 날 진짜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는 거겠지! 오히려 내가 진씨 가문에서 받은 사랑을 질투해서 날 내쫓으려는 거야!’안민아는 점점 더 화가 치밀었다.‘그 차는 분명 도아린에게 가야 했는데 내가 잔을 바꾸지 않았다면 내가 마실 일도 없었어. 그러면 침대에서 강유준과 엉켜 있었던 건 도아린일 거고 강재민은 도아린을 싫어할 거고 시선은 나에게 돌아왔겠지!’‘정말... 도아린! 네가 날 다 망쳤어!’“민아야!”변슬기가 놀란 목소리로 외치면서 안민아의 손에서 사인 사진을 빼앗아 갔고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안민아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뜨거운 물이 쏟아져 사진 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진은 이미 끈적거리며 사인이 번지고 있었다.“미안해!”안민아는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며 말했다. “어젯밤 잠을 못 자서 정신이 없었어. 정말 일부러 이런 게 아니야. 미안해. 슬기야!”변슬기는 사진을 쥐고 화를 낼 뻔했지만 억지로 참았다.함예진의 친필 사인은 정말 소중했지만 친구의 불안정한 감정을 더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민아야, 너 혹시 결혼이 두려운 거야?”변슬기는 사진을 집게로 고정해 건조한 곳에 걸어두고는 테이블을 닦으며 상황을 정리한 뒤 안민아의 손
“아린아, 나 찾았어? 의사랑 지유 상태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거든... 무슨 일이야?”신지훈은 유리 너머로 도아린을 바라보고 있었고 바로 떠나지 않았다.도아린은 코를 긁는 손짓으로 입을 가리며 조용히 물었다.“어머님, 건후 씨가 죽었을 때 장례식에 갔어요?”“난 안 갔어...”주현정은 후회와 죄책감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의사가 수술실에서 나와서 최선을 다했다고 했을 때 주현정은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다.그녀가 다시 깨어났을 때, 배건후의 장례식은 이미 끝나 있었다.우정윤은 배건후가 누명을 썼다는 것과 회사에 내통자가 있다는 사실을 주현정에게 모두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배건후의 사망 소식을 일단 숨기고 회사를 안정시킨 후에 발표하자고 조언했다.주현정은 아들의 마지막을 보내주고 싶었지만 그의 얼굴은 심하게 부서져 있었다. 수술로 다소 복구되었지만 사망 후에는 변형이 심해져서 보기만 해도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그래서 대부분 우정윤이 나서서 처리했다.“그 말은...”도아린은 깊은숨을 쉬며 점점 더 창백해졌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말인즉 주현정도 배건후의 시체가 온전한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우 실장님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 거야.’도아린이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주현정이 물었다.“아린아, 하고 싶은 말이 뭔데?”그녀는 조금이라도 진정하려고 다리를 움켜잡으며 말투를 조절했다.“제가 확인한 후에 말씀드릴게요.”“아린아,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스스로 잘 챙겨야 해...”“네, 알겠어요.”전화를 끊자마자 눈물이 도아린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더 이상 전화를 끊지 않으면 더 이상 감정을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신지훈은 차기 차 쪽으로 돌아가며 계속해서 돌아보았다.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도아린을 바라보며 차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쇼핑백을 안쪽으로 던졌다.차를 몰고 돌아가려 할 때, 갑자기 누가 그를 부른 것만 같이 발걸음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신지훈은 잠시 얼굴을 찡그리며 차 안을 둘러
하지만 서대은은 계획한 것대로 말하지 않았다. 청룡과 주작이 반대했기 때문에 현무와 백호의 의견이 일치하더라도 상황을 바꾸기는 어려웠다.그래서 강재민은 그냥 순순히 동의하는 척하면서 더 기다려보자는 선택을 했다.서대은 때문에 그들의 계획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서대은은 발밑에 있는 유리컵을 한번 훑어보며 차분하게 말했다.“육청아 씨, 저랑 정면으로 싸울 생각이세요?”육청아는 손에 위스키 한 잔을 들고 의자에서 내려왔다.잔을 흔들릴 때마다 얼음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아린 씨가 대은 씨를 믿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그쪽 아버지 병이 갑자기 나았다는 걸 아린 씨가 알면 어떻게 될 거 같으세요?”서대은은 시선을 내리며 타오르는 분노를 감추었다.“제 아버지의 몸으로 협박할 생각 마세요!”육청아는 혀를 차며 서대은의 모습을 비웃었다.“대은 씨 아버지가 받은 장기가 누구 것인지 알아요? 그쪽은 모르겠지만 제가 살짝 입을 열기만 해도 아린 씨는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뭐라는 거죠?”서대은은 경계심을 드러내며 물었다.그는 넥타이를 잡아당기고는 펜던트를 티셔츠 안에 숨겼다.서대은은 도청 장치를 끈 것이었다. 도아린은 이어폰을 뺐다.‘대은이 아버지가 퇴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장기 이식을 받았기 때문이었어? 청아 씨말에 따르면 나랑 연관 있는 사람인 것 같은데...’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고 손끝이 바들바들 떨려왔다.‘그럴 리 없어!’그녀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려 했지만 손끝이 너무 떨려서 그만 놓쳐버렸고 휴드폰은 미끄러져서 틈새로 떨어졌다.도아린이 몸을 숙여 휴대폰을 주울 때, 누군가가 전화를 받으면서 그녀 곁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정말 세상이 넓어서 그런지 별 사람이 있더라고... 상황만 괜찮다면 내가 본때를 보여줄 텐데!”“신 대표님!”도아린의 목소리에 신지훈이 뒤를 돌아보았다.해남시 쇼핑몰 지하 주차장에서 도아린을 만날 줄 몰랐는지 그는 잠시 멈칫하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도아린 대표를 만났어. 다음
꽃 모양으로 된 테이블에 네 개 조직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비어 있는 자리는 ‘라윤주’의 자리였다.도아린은 서대은의 오른쪽에 앉았고 옆에는 현무 조직의 강재민과 육청아가 있었다.육청아는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가끔 그녀를 힐끗히 쳐다봤다. 마스크를 통해서도 그녀의 질투와 혐오를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마주 앉은 청룡과 ‘라윤주’는 오랜 친구였다. 온라인에서의 대화를 나눌 때는 익숙한 패턴이었지만 만나게 되니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아현’이라는 이름으로 비밀조직 LY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미 네 명의 최고 책임자들을 만났었다. 그때 청룡은 지금과 다른 느낌이었지만 말이다.청룡은 그녀에게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는 듯했다.“이렇게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상태인데 이제 새로운 책임자를 뽑아야 되지 않나요?”백호가 청룡을 보며 말했다.“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청룡은 도아린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입을 열었다.“조금 더 기다려보자고 제안하고 싶어요.”그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다. 유럽식 더블브레스트 코트를 입고 가죽 장갑을 끼고 있는 그는 여전한 옷차림에 여전한 목소리였지만 도아린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3년을 기다렸어요.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거죠?”백호는 주작을 보며 말했다.“그쪽 의견은 어때요?”주작은 손으로 턱을 받친 채 부드럽게 말했다.“다들 알거라 생각하지만 저는 당연히 ‘라윤주’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해요.”서대은의 대답은 이전에 육청아와 약속했던 것과 달랐다. 그녀가 살짝 움직이며 입을 열려고 했지만 강재민이 책상 아래서 그녀의 발을 차며 입을 다물게 했다.육청아는 화가 치밀어 올라서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도아린을 노려보았다.백호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손가락을 책상 위에서 튕기며 강재민을 바라봤다.“현무 쪽 의견은 어때요?”강재민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바꾸는 건 명분도 없고 순서도 맞지 않으니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
그녀는 갑자기 육하경이 차에 도청 장치를 설치했다면 집에도 분명히 설치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도아린은 급히 일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빌라 안에 핀홀카메라랑 도청 장치가 있는지 확인하라고 말이다.그녀가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강재민이 문을 두드렸다.“아린 씨, 쉬고 있어요?”“아직이요.”도아린은 문을 열며 잠옷을 들고 있는 손을 보여주었다. 마치 갈아입으려는 모습이었다.“무슨 일이죠?”“육하경 그 자식이 방에 핀홀카메라를 설치했어요.”강재민은 손에 뜯어낸 장비를 들고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제가 방을 확인해 볼게요!”도아린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뭐라고요?”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그를 방 안으로 들였다.강재민은 핸드폰에 설치되어 있는 앱으로 벽을 점검하고 콘센트도 살펴봤다. 마지막으로 화장실과 드레스룸도 꼼꼼히 점검했다. 그러고는 굳은 얼굴로 문 앞에 서며 말했다.“아린 씨 방에는 없어요.”도아린은 살짝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가 처음 하경 씨를 만났을 때, 하경 씨는 도둑 잡는 걸 도와주고 있었는데 제가 하경 씨를 도둑으로 오해했었어요. 하경 씨는 좋은 일도 많이 했거든요. 그러니까 결론은 하경 씨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거죠.”“그럼 아린 씨는 제가 자작극을 하고 있다는 건가요?”강재민은 자신이 육하경에게 속았다고 느꼈다. 일부러 핀홀카메라를 발견하게 내버려두고 도아린에게 고자질하도록 유도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실패하고 오히려 도아린에게 의심을 받게 된 것이다.“그런 뜻은 아니에요. 그냥 재민 씨가 오해한 걸 수도 있다는 거죠.”“저는 오늘 하루 종일 아린 씨와 함께 있었어요. 이런 걸 할 시간이 없었다고요!”강재민의 손에 들린 장비가 증거였다.도아린은 그것을 한 번 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그냥 하경 씨가 한 거라고 칩시다. 별일 없으면 저는 샤워하러 가야겠어요.”‘그냥이라니 무슨 뜻이지? 그래도 여전히 내가 의심스러운 건가? 분명히 육하경 그
“미안해요. 주 대표님과 약속을 했어서 말할 수 없어요.”강재민이 한쪽 눈썹을 올리며 알겠다고 했다. 그녀의 대답을 받아들인 듯했다.도아린이 휴대폰을 꺼내서 일북에게 연락했다.“일 끝나면 도씨 가문 옛날 본가로 와. 내가 도착하면 위치 보내줄게. 택시 타고 와.”“알겠습니다!”일북은 간단하고 명확하게 대답했다.전화를 끊은 도아린은 육하경에게 다시 연락했다.“옛날 집 말이에요. 열쇠 바꿨어요?”“도어락으로 바꿨고요. 비밀번호는 아린 씨 생일로 했어요.”육하경은 부드럽게 말했다.“간단하게 리모델링했는데 혹시 마음에 안 드는 부분 있으면 제가 다시 손볼게요!”“괜찮아요. 제가 필요한 건 재민 씨가 해결해 줄 거예요.”그녀는 일부러 육하경 앞에서 강재민을 언급하고 강재민 앞에서 육하경을 칭찬했다.“하경 씨 너무 친절하시네요. 이건 단순히 리모델링이 아니라 완전 새로 꾸민 거잖아요! 가구도 다 바뀌었고... 모두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에요!”이전에 도정국이 살던 침실은 도하린의 방으로 리모델링되었고 옆 객실은 벽을 허물어 한쪽은 옷장, 나머지 한쪽은 작업실로 만들었다.옷장 안에는 일상적인 옷, 액세서리, 신발, 가방이 준비되어 있었고 작업실에는 그녀가 필요한 테이블, 모델, 다리미, 다양한 실크들이 벽에 정리되어 있었다.“하경 씨가 세인트존스 호텔만 관리한다는 게 시간이 너무 아깝네요...”도아린은 둘러보며 감탄했다.“하경 씨를 모건 그룹으로 데려오는 건 어때요?”“육씨 가문 사람이에요.”강재민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 뒤를 따랐다.도아린은 뒤를 돌아보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육민재 씨는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같은데요?”강재민의 눈빛이 위험하게 좁아지며 불만스럽게 말했다.“육씨 가문 사람들은 너무 야망이 커요. 하경 씨를 모건 그룹에 보내면 회사가 육씨가문한테 먹혀버리지 않겠어요?”“야망이 큰 건 육청아죠.”도아린은 차갑게 웃으며 강재민의 표정이 변하는 걸 봤다. 원래 독하던 눈빛에서 살기 서린 눈빛으
도아린이 말을 마치자 강재민은 금세 기뻐하며 억누를 수 없이 즐거운 표정을 드러냈다.반면 맞은편에 있던 신지훈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그는 주먹을 쥐고 손가락 마디를 소리 나게 꺾으며 한층 차가워진 목소리로 직원에게 말했다.“들으셨잖아요? 빨리 처리해 주세요.”그의 차가운 포스에 겁을 먹은 직원은 알겠다며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집으로 가려던 길에 강재민은 한술 더 떠서 말했다.“아린 씨, 저 호텔에서 자기 싫어요. 집에 가서 지낼 생각이면 저도 같이 가고 싶은데... 겸사겸사 아린 씨가 어릴 때 어떻게 살았는지도 보고 싶고요.”“그건 좀 어렵지 않을까요?”“경호원분도 집에서 자잖아요. 저도 절대 규칙 어기지 않을게요.”“도 대표님.”신지훈이 뒤에서 따라오며, 다소 비꼬는 어조로 말했다.“비록 이혼했다고 해도 배 대표님은 본인 명의의 지분과 자산을 전부 도 대표님에게 넘긴 사람이에요. 감정이 남아 있지 않더라도 배 대표님이 병에 걸린 와중에 배 대표님이 준 돈으로 다른 남자를 먹여 살리는 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그 말에 도아린은 소리 내어 웃었다.그녀는 신지훈을 조롱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신 대표님, 그 말은 틀린 것 같네요. 건후 씨가 지분과 자산을 저한테 준 건 자발적인 결정이에요. 제게 준 이상 제가 어떻게 쓰든 제 권리고요. 게다가 사고 나기 전부터 건후 씨는 제가 재민 씨와 사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런 상황에서도 전부 제게 줬다는 건 제가 재민 씨와 잘 지내지 못할까 봐 걱정됐던 거겠죠. 이렇게까지 저를 아껴주는데 저도 건후 씨가 편히 요양할 수 있도록 재민 씨와 행복하게 살아야죠!”도아린에게 반박당하자 신지훈은 가슴이 답답해졌다.그는 턱을 꽉 깨물고 강재민을 조롱하는 시선으로 바라봤다.“보아하니 강재민 씨는 남의 돈으로 사는 게 익숙한 사람이군요. 실례했습니다!”강재민은 원래 반박하려 했지만 신지훈의 기색이 심상치 않아 보이자 오히려 능청스럽게 말했다.“제 외모가 아린 씨 이상형이라서
“집을 남겨둔 게 맞는 선택이었네요!”도아린이 반응하기도 전에 육하경이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자기 집에서 사는 게 호텔보다 편하고 안전하잖아요.”순간, 도아린은 제자리에 굳어버렸다.‘애초에 이런 날이 올 걸 예상하고 있어서 집과 차를 남겨뒀다는 건가? 오늘 있었던 모든 일까지 다 계획한 것이었을까?’에스컬레이터에 손을 올려둔 도아린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고 심장도 조여드는 느낌이었다.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녀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육하경에게 말했다.“그것도 맞네요. 그러니까 제 차도 돌려줘요. 괜히 새로 사면 해남으로 돌아갈 때 다시 팔아야 되잖아요..”고개를 돌려서 두 사람이 대화하는 걸 본 강재민의 눈빛에는 질투가 가득했다.마침 에스컬레이터를 다 내려왔고 그는 다시 도아린을 품 안에 가뒀다.“육하경 씨, 그럼 우린 이만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육하경은 도아린을 향해 옅게 미소 지으며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주말에 차량 정비 예약해 놨어요. 그때 다시 연락해요.”“그래요.”도아린이 차 키를 받아들였다.강재민은 뭐라 더 말하고 싶었지만 도아린이 자신의 손을 살짝 쥐는 걸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육하경의 모습이 쇼핑몰 안으로 사라지자 강재민은 불만스럽게 말했다.“제가 차 사줄게요. 해남으로 돌아갈 때면 사람을 시켜서 가져가게 하면 돼요.”“괜찮아요.”“괜찮긴 뭐가 괜찮아요.”강재민이 단호하게 말했다.“내 여자는 남이 베푸는 거 받을 필요 없거든요.”그 말을 들은 도아린은 그저 코를 문지를 뿐, 별다른 해명은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강재민에게 이끌려 옷 몇 벌을 사고 나왔다.“이 차를 회사로 몰고 가세요. 전 아린 씨를 데리고 드라이브하다가 올게요.”강재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북에게 차를 가져가라는 신호를 줬다.일북은 도아린을 바라보며 그녀가 거절하기를 바라는 눈빛을 보냈다.하지만 그녀는 차 키를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차는 전에 육하경 씨가 타던 거야.
“저기 있는 공룡 캐릭터가 가지고 싶은데... 괜찮을까요?”도아린이 농구대와 가장 가까운 인형뽑기 기계를 바라보았다.“한번 해보죠.”두 사람은 각각 게임 코인을 바꿨다.도아린은 두 사람의 반응을 살피면서 누가 자신을 시험하는 건지 판단하려 했다.강재민이 연성까지 찾아온 것, 그리고 육하경과의 예상치 못한 만남...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우연이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만약 강재민이 그저 배건후를 없애려 했다면 이렇게까지 큰 판을 짤 필요가 없었다. 3년을 기다려 배건후의 집안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 필요도 없었다.육하경은 그녀의 USB를 몰래 본 적이 있었으니 분명 배건후의 적이었지만 배건후의 죽음이 그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다주는지 알 수 없었다.‘반대로 생각해 보면 배건후가 살아 있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누구지?’‘재민 씨는 내가 건후 씨랑 다시 이어지는 걸 두려워했으니 당연히 원하지 않겠지. 그러면 하경 씨는? 목적을 알 수 없어서 더 무서워.’도아린은 육하경을 바라보았다. 그는 모든 신경이 인형 뽑기 기계에 쏠려 있는 것 같았다. 간신히 인형을 집었지만 떨어뜨리고 말았다.“하...”육하경이 한숨을 쉬며 다시 게임 코인을 넣었다.“나이스!”그 소리에 도아린은 정신을 차렸다. 강재민을 보자 그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올리는 것이었다.그는 빨리 칭찬해달라는 듯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정말 대단해요!”도아린은 강재민 옆으로 가서 그가 들고 있던 농구공을 받아들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골대에 들어가지 않았다.“이렇게 던져야 해요. 손목에 힘을 주고요.”강재민이 도아린의 뒤에 서서 그녀의 두 손을 꼭 감싸 쥐고 그녀를 품 안에 가뒀다.“그대로 던져요!”도아린은 그의 말대로 손끝의 힘을 모아 공을 던졌다. 공은 링을 맞고 한 바퀴 돌더니 결국 골대를 통과했다.“들어갔어요! 제가 넣었다고요!”도아린은 흥분해서 소리쳤다.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순간적으로 감정을 숨기지 못한 육하경의 차가운 시선을 마주했다.그의
“괜찮으세요?”그 남자의 목소리는 배건후와 똑같았지만 생김새는 전혀 닮지 않았다.도아린의 목소리에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의아한 표정을 지은 것이었다.“괜찮아요! 미안해요. 슛 던지는데 제가 방해했네요.”도아린이 쑥스럽게 웃으며 사람들 속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아린 씨!”육하경이 그녀를 찾아왔다.그녀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눈치챈 그는 주변을 둘러본 뒤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혼자 나왔어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났어요?”“아뇨.”도아린은 빠르게 마음을 다잡았다.“너무 오래 걸리길래 그냥 나와봤어요.”육하경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미안해요. 괜히 다툴 게 아니라 그냥 재민 씨가 고른 보호대로 샀을 걸 그랬네요.”“아린 씨!”강재민도 그녀를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엉덩이 보호대를 들고 있었다.“괜찮아요?”“괜찮아요. 얼른 스케이트 타러 가요.”도아린은 보호대를 받아 허리에 찼다.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하자 두 남자는 또다시 경쟁을 벌였다.누가 도아린을 가르칠지 다투면서 각자의 실력을 뽐내기 위해 한 명은 앞으로 돌고, 다른 한 명은 뒤로 돌면서 묘기를 펼쳤다.하지만 도아린은 방금 있었던 일을 곱씹느라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그날 밤 양식장에서 만난 남자, 그리고 방금 만난 남자, 두 사람 모두 체형이 배건후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단순히 체형만 비슷한 것이 아니라 목소리도 같았다. 게다가 농구를 하는 모습까지 똑같았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말이 안 될 정도였다.‘건후 씨가 정말 죽었다면 왜 계속해서 날 시험하는 걸까?’다른 사람들은 다들 그녀가 주현정과 함께 병문안을 가서 배건후를 확인한 줄로 알았다.그 병실에 있는 사람이 정말 배건후였다면 도아린이 그를 닮은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을 것이니 말이다.그렇다면 그들은 그녀의 반응을 통해 배건후가 정말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도아린은 주먹을 꽉 쥐었다.방금 그녀의 반응으로 인해 상대는 이미 배건후가 병원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