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불안해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그가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가뜩이나 차가운 남자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또 도아린 괴롭히러 간 거야?”“아니. 그런 거 아니야.”손보미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우리도 강씨 가문에 가서야 아린 씨가 있는 걸 알게 되었어. 그리고 지유가 아린 씨한테 사과도 했고.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은 다 잊기로 했어. 안 그래? 지유야.”“맞아요. 도아린 씨가 나한테 꽃까지 줬어요. 휠체어에 있는 꽃잎이 바로 그 꽃이에요. 우리 화해했어요.”그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꾹 누르며 차가운 눈으로 두 사람을 훑어보았다. 원한을 다 풀었다면 도아린이 준 꽃을 이리 으스러뜨렸을까?그의 어두운 눈빛이 쇠 방망이처럼 배지유의 가슴을 두드렸고 그녀를 더욱 두렵게 만들었다. “오빠, 보미 언니. 나 다리가 너무 아파요...”그 말에 손보미는 급히 의사를 찾아갔다. 그녀가 병실을 나간 뒤, 배지유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배건후를 쳐다보았다. “오빠, 이제 곧 보미 언니랑 결혼할 거잖아요. 오빠가 그렇게 말하면 언니가 많이 상처받을 거예요. 내 기분 풀어주려고 언니가 날 강씨 가문에 데리고 간 거예요. 재민 씨가 도아린 씨를 초대할 줄은 우리도 정말 몰랐어요.”“도아린 씨가 그러더라고요. 자기가 버린 남자를 언니가 주워가는 거라고. 그래도 보미 언니는 화 한번 내지 않았어요. 정말 도아린 씨 괴롭히려고 간 거 아니에요. 그리고 내가 지금 이런 꼴인데 누구를 괴롭혀요?”잠시 후, 손보미는 의사를 데리고 들어왔고 의사가 배지유 다리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연성에서 오느라고 수고했어. 얼른 가서 쉬어. 지유도 푹 쉬라고 해야지.”손보미가 그의 팔짱을 끼려고 하는데 그가 그녀의 손길을 피했다.“얌전히 병원에 있어. 합병증이라도 생기면 그땐 정말 다시 일어설 수 없을 테니까.”그가 차갑게 배지유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이불을 움켜쥐고 고개를 떨구고 있던 배지유의 눈빛에 원망이 가득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사람으로 인해 깜짝 놀란 강홍련은 무의식적으로 반박하려 하였다.오늘의 일은 네 몫도 있는데 여기서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고.그러나 문 뒤에서 걸어 나오는 남자를 보니 온몸의 피가 차가워지는 듯했다. “배 대표님이 여긴 어떻게...”그녀는 재빨리 도정국의 뒤에 몸을 숨기며 극구 변명했다.“오해하지 말아요. 난 그런 적 없으니까. 손보미 씨가 한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니에요. 안민아가 그런 거예요. 내 아들과 결혼하고 싶어서 꾸민 짓이고 그걸 도아린한테 뒤집어씌운 거라고요.”옆에 있던 손보미가 그녀를 노려보며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걸 배건후는 눈치채지 못하였지만 도정국은 두 사람이 주고받는 눈빛을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들이 합심하여 도아린을 모해하려고 일을 꾸몄다가 오히려 도아린에게 당한 것이었다. 손에 들고 있는 금속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며 배건후가 차가운 눈빛으로 도정국을 쳐다보았다. “도아린이 도유준의 성을 내일 당장 바꾸겠다고 했어요.”거절하려는 도정국을 보며 손보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도유준까지 시궁창에 끌어들이지 말아요. 강씨 가문의 사람이 되면 그래도 명문 가문의 도련님으로 인정받는 거니까. 다른 사람은 꿈도 못 꾸는 일이죠.”그녀는 필사적으로 강홍련에게 눈짓을 했고 강홍련도 따라서 도정국을 설득하기 시작했다.화가 치밀어 입술이 파랗게 질렸지만 도정국은 타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잠시 후, 손보미와 배건후가 자리를 뜬 뒤, 그가 강홍련을 발로 차서 바닥에 넘어뜨렸다.“이게 다 당신 탓이야. 이 여편네가 생각이 있는 건지.”문득 도아린의 말이 생각났다. 그동안 도정국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걸 생각하면 마음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당신, 내가 강씨 가문의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죠? 정은채 그 여자의 모든 것을 다 빼앗고도 한편으로 달콤한 말로 날 속이고 훗날 날 이용해 강씨 가문의 덕을 보려고 한 거 아니에요?”“그게 무슨
억울했던 안민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녀는 입술을 떨며 차마 말을 하지 못하였다.도아린이 통화 내용을 들을까 봐 일부러 물을 틀어놓았는데 어떻게 이리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일까?“아직도 도유준 편을 들고 싶어?”도아린은 그녀의 주머니에 손을 뻗어 핸드폰을 찾았다. “도유준한테 전화한 거 맞잖아.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또 도유준한테 속아 넘어간 거야?”안민아는 괴성을 지르며 급히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움켜쥐었다. 통화기록을 절대 도아린에게 보여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에요. 핸드폰 뺏지 말아요.”“도유준 그 자식이 또 널 속인 거지? 걱정하지 마. 내가 단단히 혼내줄게.”겉으로는 안민아를 걱정하고 있는 척했지만 사실 도아린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그러나 핸드폰을 꺼내려고 할 때마다 안민아가 한사코 그녀를 막았다.당황스러운 얼굴의 안민아는 안준휘에게 몇 번이나 도움의 시선을 보냈다. 이때, 안준휘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끊고는 언짢은 얼굴로 도아린을 쳐다보았다. “강요하지 말거라. 말하기 싫다는 애를 왜 그리...”“왜요?”손을 놓던 도아린은 시선을 안민아에게 돌리더니 뭔가 생각이 떠오른 듯했다.“설마 강재민 씨야?”“아니에요. 누구와도 약속한 적 없었어요.”“통화 기록은 양측한테 다 있는 거잖아.”이때, 윤명희가 갑자기 현관에 나타났다. 마트를 다녀온 윤명희는 식재료를 하인에게 건네주고는 손수건을 받아 손을 닦으며 안민아를 향해 걸어왔다. “민아야, 통화 기록은 양측한테 다 있는 기록이야. 나중에 도유준이 기록이라도 내세워 네가 먼저 만나자고 했다면 그땐 어떡할 거니? 차라리 지금 사실대로 털어놓거라. 그래야 우리도 뭔가 대책을 세우지. 안 그래?”안민아는 온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만약 손보미와 손을 잡고 도아린을 음해한 사실을 진씨 가문에서 알게 된다면 결혼을 물론 사업도 물 건너가고 원수가 되고 말 것이다. 고민 끝에 안민아는 결국 자신이 도유준에게 전화를 걸
도아린은 일의 자초지종에 대해 얘기하면서도 안민아와 손보미가 손을 잡고 벌인 짓이라는 걸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사실 안민아가 계속해서 강씨 가문으로 가자고 할 때부터 그녀는 수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가 강씨 가문에서 손보미를 보니 안민아와 손보미가 손을 잡았다는 걸 바로 눈치챘다. 지난번 백화점에서 안민아는 손보미를 싫어했고 경멸했다. 그러나 이번에 강씨 가문에서 두 사람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고 서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서로를 피하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엄마, 내일 연성에 좀 다녀올게요.”“뭐 하러?”“내일이 이혼 숙려기간의 마지막 날이에요. 건후 씨와 깨끗이 정리하려고요.”또한 도지현을 데려올 생각이었다.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도정국이 무슨 일이라도 벌일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윤명희는 그녀를 껴안으며 입을 열었다.“시집가기 싫으면 평생 엄마랑 같이 살아. 엄마가 너 평생 보살펴줄 테니까.”“고마워요.”“또 한 번 고맙다고 하면 엄마 진짜 화낼 거야.”도아린의 어깨를 살짝 내리치면서 피식 웃었다.“둘째 오빠랑 같이 갔다 와. 배건후가 후회라도 하면 일이 복잡해지니까.”“그럴 리 없어요.”그녀의 말투는 아주 단호했다. 그날 저녁, 욕조에 누워 마사지를 즐기고 있는데 옆에 놓인 핸드폰이 울렸다.확인해 보니 배건후였다.그녀는 다시 핸드폰을 옆에 두고 눈을 감았다.전화가 한번 끊기더니 다시 또 울리기 시작했다. 한동안 울리던 벨 소리가 잠잠해지고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잠시 후, 머리를 말리고 침대에 누운 그녀는 그제야 핸드폰을 꺼내 답장을 보냈다. [강재민: 강홍련이 도유준이 성을 바꾸는 걸 동의했어요. 내일 예단을 준비해서 찾아갈 생각인데 어디로 가면 되나요?][서대은: 안준휘와 계약을 취소한 두 회사는 모두 손보미가 강재희라는 이름으로 접근한 회사들이야. 나중에 계약을 이행하라고 했을 때, 상대 쪽에서 받아들이지 않았어.][소유정: 며칠 쉬러 갔다 올게. 전화기는 꺼둘 거야. 그러니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주주들이 다그치지 않았더라면 도아린을 절대 만나러 오지 않았을 것이다. 딸의 다리를 반쯤 부러뜨리고 그와 아내의 사이를 이간질시킨 것도 모라자 집안에 바람 잘 날이 없게 만든 도아린이 주주들에게는 목숨을 건질 지푸라기 같은 존재라니.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그녀의 눈빛은 차가웠고 태도는 서먹서먹하였다. 이것이 이혼에 필요한 절차라면 그녀는 양보할 수 있었다.“10분 드릴게요.”도아린은 옆 벤치로 가서 앉았다. 심호흡하던 그도 그녀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네가 우리 집안에 시집온 3년 동안, 우리 집안에서도 할 만큼 했다. 도정국 가게의 비용을 전부 부담했고 네 남동생의 병원비도 건후가 다 책임졌었지. 그동안 네가 입고 먹고 쓰고 한 것도 다 우리 가문의 돈이야.”“건후가 널 소홀히 한 건 다른 여자가 생겨서가 아니었다. 막 회사를 인수했으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겠지. 손보미와의 스캔들은 손보미가 귀국한 후, 언론에서 마구 퍼뜨린 것이야. 두 사람은 전혀 문제가 없었어.”...조용히 듣고 있던 그녀가 한마디 내뱉었다.“3분 남았습니다.”배석준은 마음이 불편했다. 윗사람이 체면을 구기고 호의를 베풀고 있는데 어찌 이리 쌀쌀맞기만 하는 건지.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전혀 굽힐 생각이 없는 그녀를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남자가 사업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거다. 네가 눈감아 주거라. 어차피 너한테서 건후의 아내 자리를 빼앗을 사람은 없을 테니까.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느냐? 건후의 명성에 금이라도 가면 너한테도 좋을 것이 없어.”배석준은 점점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배건후와 닮은 그의 얼굴에 짜증이 한껏 묻어났다. “이렇게 하자. 기자회견을 열 테니 최근의 일은 모두 네가 벌인 자작극이라고 하거라. 너희 두 사람 사이에는 제3자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기자들한테 말해. 이혼 얘기는 네가 먼저 꺼낸 것이 사실이 아니더냐? 건후는 널 쫓아낼 생각이 단 한 번도 없었어.”그녀는 피식
“뭐 하는 짓이에요?”배건후가 품 안에 그녀를 감싸고 차가운 눈빛으로 배석준을 쏘아보았다. 살짝 당황한 배석준은 해명하려다가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아 고개를 치켜들었다.“네가 제정신이냐? 여자 하나 때문에 대표 이사를 그만둬? 회사가 무슨 소꿉장난도 아니고.”“그건 제 일입니다.”“넌 내 아들이야. 너한테 뭐라 할 자격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해.”배석준은 이를 갈며 소리를 질렀다. 분노가 차올라 이마에 핏줄이 불거지고 눈이 충혈되었다.그러나 배건후는 그를 무시한 채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았다.“다친 데 없어?”그녀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손목을 주무르며 입을 열었다.“얼른 가서 이혼 신고 마무리해요.”뭔가 말을 하려던 그가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계단을 오르는 것을 보고 배석준은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배건후, 너 사인 하기만 해. 그럼 진짜 우리 부자지간도 이젠 끝이야.”배건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성큼성큼 구청 안으로 들어갔다.그들이 다시 나왔을 때, 배석준은 화가 나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배건후와 도아린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젠 다 컸다 이거지? 내가 외국에서 힘들게 회사를 키우는 동안 네 엄마가 널 이렇게 가르쳤어?”그러나 배건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차 문을 열었다.“데려다줄게.”거절하려고 했지만 주변에서 기웃거리는 배석준의 사람들 때문에 그녀는 그냥 차에 올라탔다.“고마워요.”차에 탄 후, 그녀는 그에게 주소를 말해주었다. 두 사람이 탄 차량은 뒤따라오던 차들을 따돌리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였다.차에서 내린 그가 근처의 건물들을 올려다보며 물었다.“여기 살아?”“친구 집이에요. 잠깐 머물고 있어요.”그와 더 이상 자세한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내일 해남으로 돌아갈 거예요. 잘 지내요.”그녀가 돌아서려는 그때, 그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율이 사건에 진전이 있어.”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하경 씨한테서 들었어요.”...그
도아린은 SNS에 새가 새장 밖으로 날아가는 사진을 올렸다. 자신이 마침내 자유를 얻은 것을 축하하는 뜻에서였다. 잠시 후, 음식을 배달시켜려고 하는데 문득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집안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주방에 들어가 냉장고를 열었고 그 안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신선한 재료와 과일들로 가득했다. 큰오빠의 배려에 감동했다. 가뜩이나 바쁜 사람인데 연성으로 돌아온 그녀가 걱정돼서 이리 모든 것을 준비해 주다니...진수혁에게 감사의 문자를 보내려는 그때, 육민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연성에 돌아온 거야?”“네.”“할머니가 아린 씨 많이 보고 싶어 하셔. 잠깐 들렀다 갈래?”“위치 보내줘. 내가 데리러 갈게.”이번에 연성을 떠나면 중요한 일이 없는 이상 다시는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한테 작별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았다. “혼자 갈 수 있어요.”전화를 끊은 그녀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대표님, 사모님... 아니 아린 씨가 집을 나섰습니다.”그에게 물병을 건네던 유정윤은 길가에 서서 차를 기다리는 도아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그가 물병을 건네받으며 약을 입에 넣었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입술이 파래졌다. 잠시 후, 통증이 조금 누그러지자 그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따라가.”“네.”고개를 끄덕이던 우정윤은 이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사실 오늘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이사회 사람들에게 붙잡혀 회사로 끌려가 회의에 참석했다. 사람들은 모건 그룹의 다음 계획에 대해 대책을 세우라고 그를 닦달했다. 그러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깨닫고 그는 재빨리 구청으로 달려갔고 마침 배석준이 도아린에게 손을 대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하루 종일 밥도 먹지 못한 탓에 위가 또 말썽인 듯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진 후, 위병은 점점 더 심해졌고 진통제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그녀가 탄 택시가 익숙한 길로 접어들자 그의 눈빛이
그녀는 입으로는 미안하다고 하지만 비아냥거리는 눈빛이었다.도아린은 그녀가 배건후한테 정말 진심인지 아닌지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육청아가 이상하게 그녀를 경계하는 느낌을 받았다.나영옥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너희들은 다 나가 있어. 아린이랑 할 얘기가 있어.”육청아는 육민재와 함께 문 앞까지 갔다가 뒤돌아 도아린을 한번 보더니 핑계를 대서 육민재와 갈라졌다.나영옥은 도아린에게 어쩔 예정인지 물었다. 요즘 모건 그룹에 불미스러운 일들이 있지만, 연성에서의 지위는 쉽게 흔들리는 게 아니었다.만약 도아린이 도움이 필요하다면 배씨 가문에서는 도울 수 있지만, 배건후의 반대편에 서는 것은 절대 안 될 일이다.재벌의 관계는 오래된 나무의 뿌리처럼 가닥이 많고 복잡해서 하나를 건드리면 모든 게 흔들리게 된다.“진씨 가문의 부모님은 너한테 잘해줘?”나영옥은 도아린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물었다.“저한테 엄청 잘해주세요. 두 오빠도 잘해줘요.”“그럼 다행이야. 청아의 말은 마음에 담아두지 마. 그 녀석은 어렸을 때부터 경솔하게 행동하는 면이 있었어. 기어코 바위에 부딪히려 하거든 가라고 해. 손해를 봐야 정신을 차리지.”도아린은 담담하게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영옥은 또 그녀와 친한 친구를 언급하였는데 해남에 사는 여씨 어르신이었다.“시간이 나면 나 대신에 가서 만나서 안부를 전해줘.”나영옥은 편지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주었고 전해달라고 했다.도아린은 조심스레 편지를 넣어두고 꼭 찾아뵙겠다고 얘기했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 중에 밖에서는 말소리가 들렸고 육청아의 발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나영옥의 표정에서는 불쾌한 기색이 보였지만 꾸짖지 않았고 도아린을 배웅하기 위해 가정부에게 식사를 준비하라고 했다.도아린이 나영옥을 부축하고 나왔을 때 정자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배건후의 잘생긴 얼굴은 차가웠고 넥타이를 매지 않고 셔츠는 살짝 열고 있었다. 꾸민 듯 안 꾸민듯한 모습이 매력적이었다.육청아는 그의 곁에 서서 고개를 들
누군가는 사진 한 장을 들고 나타나 말했다.“도아린 곁에 있는 꽃미남이 사실 강재민이래.”과거, 두 사람이 함께 음악 페스티벌에 참석했던 적도 있다는 이야기였다.그 말에 또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번져갔다.그러던 어느 날.도아린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신인 배우가 몰래 찍은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 올라왔다.사진 속엔, 두 사람의 머리가 맞닿은 채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그 한 장의 사진은 결국 배건후의 정체를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고 그는 다시 한번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이번에도 역시 온갖 의심과 루머 그리고 비난이 따라붙었다.하지만 며칠 후, 연성 경찰청에서 공식 공지문이 게시되었다.바로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기 밀매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 공지였다.공지문에는 고성만, 손보미, 자상훈 등이 인신매매로 부당한 이익을 챙기다 결국 장기 밀매까지 손을 뻗친 사실이 요약되어 있었고 그 수사에 협조한 익명의 자원자들에게 감사의 뜻도 함께 담겨 있었다.그 단 하나의 공지로, 여론은 완전히 반전됐다.정월 대보름, 해남엔 보기 드문 큰 눈이 내리고 있었다.도로는 차들로 가득 막혀 10분이 지나도 백 미터를 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천천히 가. 우린 여기서 내려서 좀 걸을게.”도아린은 조수석 창문을 내리며 일북에게 말했다.그리고 배건후와 함께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까지 걷기로 했다.배건후는 우산을 펼쳐 도아린의 머리 위에 씌웠다.도아린은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은 외투 주머니 속에 꼭 쥐어져 있었다.“춥지 않아?”그가 우산을 더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안 추워요.”도아린은 입김을 내뿜으며 활짝 웃었다.발밑에서는 바삭거리는 눈이 소리를 냈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기억이 스쳐 갔다.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시절.어느 회사 대표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눈밭에서 몇 시간을 버텼던 그날, 발이 얼어 서 있지도 못하고 결국 쪼그려 앉았던 그 순간
그 여자는 바로 그날 수상 레스토랑에서 진경수에게 벨트를 빌렸던 그 여자였다.하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짧은 티셔츠와 청 반바지 대신 격식을 갖춘 정장 느낌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얘, 내 여동생. 그리고 이 사람은... 우리 제부.”진경수는 ‘제부’라는 단어에서 말끝을 흐렸다.여동생이 혼인신고까지 해놓고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그건 진수혁도 마찬가지였다.“큰형님, 작은 형님.”배건후가 정중히 일어나 인사를 건넸고 도아린은 해맑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오빠들, 호칭 바꿨으니까 용돈 좀 주셔야죠?”“혼인신고도 우리 몰래 해놓고, 무슨 용돈이야?”진경수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배건후를 노려보다가 결국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도아린에게 내밀었다.“다시 내 동생 울리기만 해봐. 그땐 진짜 널 갈기갈기 찢어서 물고기 밥으로 줄 거야. 명심해.”“고마워요, 둘째 오빠!”도아린은 싱긋 웃으며 봉투를 받아들었고 이번엔 진수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진수혁 역시 말없이 봉투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도아린은 봉투를 슬쩍 비춰보며 속으로 웃었다.‘안 봐도 이건 수표네.’그녀는 배건후를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더니 말했다.“이건 제가 따로 보관할게요.”“감사합니다, 우리 아내님.”“...”진씨 형제들은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쯧쯧, 벌써 아내한테 잡혀 사네...’하지만 상대가 도아린이라면, 뭐… 그럴 만했다.“근데, 여기 두 분은?”도아린은 일부러 모르는 척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진수혁은 변슬기를 소파에 앉히며 담담히 말했다.“예전 동료야.”변슬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진경수가 옆에 있던 여자를 품 안으로 확 끌어당기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부모님 말씀대로 아린이 일도 정리됐겠다... 이젠 내 차례지. 그래서 나도 결혼했어.”도아린과 배건후는 동시에 진수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둘째 오빠를 좀 본받으세요. 뭐 하세요, 진짜.’“작은 올
“...”집사는 조용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건후는 당연하다는 듯 도아린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고 도아린은 그런 그를 집사에게 소개했다.“이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서재랑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 둘째 오빠 방만 빼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게 해주세요.”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자마자 곧장 외출에 나섰다.“앞에 있는 만둣가게, 진짜 맛있어요!”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도아린의 시선은 창가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하던 진수혁에게 향했다.그 맞은편에는 변슬기가 앉아 있었고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설득 중이었다.“여긴 패스트푸드점이에요, 카페가 아니라고요. 여기서 일하시는 건 좀...”“카페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난 괜찮은데?”“그렇긴 해도 이렇게 계속 앉아 계시면 저희 가게 영업에 방해된다니까요!”그때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변슬기는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다.“도 선생님! 대표님 좀 말려주세요!”그 말에 진수혁은 고개를 돌리며 태연하게 말했다.“밥은 먹었어? 여기 만두 꽤 괜찮더라.”도아린은 황당함에 헛웃음이 났다.‘사람을 회사에서 내쫓아 놓고선 정작 본인은 여기에 눌러앉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내가 말할게.”도아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변슬기와 함께 옆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그사이 배건후는 주머니에서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내 진수혁 앞에 내려놓았다.“제가 이겼어요.”“...”진수혁은 조용히 종이를 펼쳐보고는 이를 악물었다.“너 이거 반칙 아냐?”“우린 내기했잖아요. 졌으면 인정해야죠.”“유럽 연수 그 자리, 잊지 말고 제 이름으로 신청해 주세요.”진수혁은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바라보았고 마침 도아린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둘의 눈이 마주쳤고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이 분위기 뭐야... 완전 닭살 돋게 하네.’그 순간, 배건후는 시선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형님도 제가 예전에
‘정말로 배고픈 거야? 아니면 날 원하는 거지?’도아린은 배건후를 흘끗 쳐다보며 가위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끌려가 밥을 먹었다.배건후의 요리 실력은 한층 더 늘어 있었고 맛뿐만 아니라 음식의 모양새도 훨씬 좋아졌다.“이제 영양식은 안 드세요?” 도아린은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 “전에 어떤 사람이 고기도 안 먹고 기름진 것도 안 먹고 오래된 것도 안 먹고 부드러운 것도 안 드셨잖아요!”배건후는 매운 닭 요리를 그녀 앞으로 밀어놓으며 진심으로 사과했다.“그때는 네 관심을 끌려고 그런 거야. 그리고 몸매가 망가져서 네가 싫어할까 봐 걱정도 됐고.”“그럼 이제는 몸매 망가지는 거 걱정 안 해요?”도아린은 고기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배건후는 가볍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 한 사람이 요리하면 다른 한 사람이 설거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배건후는 도아린에게 설거지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그녀를 안아 위층으로 올라갔다.도아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배건후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녀를 삼켜버릴 듯한 눈빛을 보였지만 쉽게 다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도아린은 그가 마음속 어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안고 몸을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며 달랬다.“천천히 해도 돼요.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세요.”도아린의 위로는 곧 배건후에게 그대로 되돌아왔다.그의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그녀의 흰 목 위로 떨어졌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도아린, 힘 빼... 너무 긴장했어...”도아린은 그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손가락은 그의 입에 물려 있었다. 그 후, 그녀는 머릿속이 멍해졌고 마치 거친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배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재미를 본 배건후는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도아린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마치 어젯밤 온몸이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된 것처럼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고 특히 허리
“배 대표님! 모든 자산을 도 대표님께 넘기신 것은 이전에 하신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셔서인가요? 손보미 씨가 형을 선고받았다고 들었는데 손보미 씨를 꺼내줄 계획이 있으신가요?”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기자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인터뷰의 주제는 챔피언십 선수들의 숙식 안전입니다.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겠습니다.”기자들이 더 질문하려 하자 도아린이 배건후의 손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숙식 문제에 대한 더 나은 제안이 있다면 제안서를 작성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수한 의견을 채택하고 그에 따라 보상을 제공할 예정입니다.”도아린은 카메라를 향해 당당하고 품위 있게 말했고 입가의 미소를 살짝 거두며 한층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제 개인적인 문제로 여러분의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배건후 씨에 대해서는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배건후는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도아린이 배건후에 대해 말하려 하자 기자들은 앞다투어 마이크를 내밀었다.도아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배건후 씨는 여태까지 운영부의 팀장이었지만 오늘부터는 한경 그룹의 특별 자문입니다. 이후의 직책은 배건후씨의 능력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도아린의 시선은 배건후가 도아린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를 거냐고 묻던 기자를 향했다.“과학 연구자, 의학 전문가, 스포츠 선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성을 존경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그러자 그 기자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갔다.다른 기자들도 더 이상 질문을 할 기세를 잃었고 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고유리를 보며 말했다.“기자분들 고생 많으셨으니 저녁 식사 후 차량을 준비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고유리는 기자들을 데리고 나가며 각자에게 돈 봉투를 나눠 주었다.그들은 어떤 내용을 발표할 수 있고
“뭐라도 먹고 가자.”배건후는 구운 닭 날개는 도아린에게 건네주고 주현정에게는 구운 식빵을 건네주었다.주현정은 빵을 받아 들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누렴. 나는 물 좀 마시러 들어갈게.”도아린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서 멈췄다.두 사람은 강가의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엄마는 진짜 다 내려놓으신 걸까요?”“적어도 시작은 하신 거지. 앞으로 진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와 함께 여행 다니면 점차 나아질 거야.”배건후는 핸드폰을 꺼내고는 방금 구 경관이 보내온 사진을 열었다.“남궁유민, 즉 고성만이야. 경찰이 고성만의 집을 수색할 때 이걸 발견했어.”도아린은 마지막 닭 날개를 입에 넣고 꼬챙이를 배건후에게 건네며 핸드폰을 받아서들었다.화면 속 사진에는 루비 목걸이가 찍혀 있었다.배건후가 큰돈을 들여 샀던 화려한 디자인의 목걸이지만 전에 잃어버렸던 목걸이였다.도아린은 배건후를 바라보며 말하려 했지만 입안은 닭 날개로 가득 차있어 눈만 깜빡였다.“내가 전에 너한테 줬던 그 목걸이야. 배지유가 몰래 차다가 잃어버렸던 거.”도아린의 입은 마치 발골 기계 같았다. 닭 날개가 입에 들어갔다 나올 때면 뼈만 남았다.도아린은 손바닥에 뼈를 뱉고는 차분하게 말했다.“배지유가 어떤 남자와 잤고 그 사람이 계속해서 그녀를 영상으로 협박했어요. 그 장본인이 바로 고성만이라구요!”“...”이번에는 배건후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성만이 배지유를 협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걸이를 철저히 숨겨놓고 분해해서 이미 팔아버렸을 거로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걸 집에 보관해 놓았을 줄은 몰랐어.”그것은 고성만이 자신을 위해 남겨둔 마지막 보험이었다.궁지에 몰리게 되면 목걸이를 분해해 팔고 다른 도시로 가서 새 삶을 살 계획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체포당하고 말았다.다음 날, 도아린은 연성으로 돌아갔다. 배건후가 신청한 챔피언십 대회 접대 임무가 승인되었기 때문이다.진수혁 역시 변
그는 입가에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자고충이 하나가 될 때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야. 앞으로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면 아프지도 않을 거야.”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다면 그 고통으로 인해 결국 죽게 될 것이다.도아린은 배건후의 머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들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고 애썼다.배건후는 그녀의 품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어서 너에게 혼수로 바칠게. 네가 나를 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너를 평생 지켜줄 거야.”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져 남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그렇게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빛이 어두워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다. “돌아가자.”배건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고 다리를 움직이며 불편했던 자세를 바꿨다.“이 근처에 야생 동물은 없지만 해가 지면 안전하지 않아.”도아린은 처음에는 감정에 휩싸여 배건후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몸을 움직이자 그녀는 즉시 이상함을 느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돌아갈 때 건후 씨 몸이 불편하니까 제가 태워드릴게요. 그리고 내리막길이라 힘도 덜 들 거예요.”“알았어. 네 말 들을게.”자전거 핸들이 비뚤어져 있었지만 배건후는 두 다리로 바퀴를 단단히 고정한 후 힘껏 돌려 단숨에 바로 고쳤다.도아린이 자전거 앞좌석에 타고 배건후는 그녀 뒤에 앉았다.그는 얼굴을 그녀의 등에 기댄 채 내리막에서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긴 다리를 쭉 뻗어 마찰력을 늘리며 조절했다.그들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진수혁과 변슬기도 막 돌아오고 있었다.변슬기는 도아린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들이 뭔가 진전이 있을 줄 알고 가서 물어보려 했지만 배건후가 붙잡았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 머리 위에서 붉은 잎 하나를 떼어냈다.“...”변슬기와 진수혁이 설마 자신과 배건후가 야외에서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배건후는 오직 도아린에게만 부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도아린은 그의 눈동자 속에 가득한 붉게 물든 단풍잎과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마음속 깊이 즐거워하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의 깊고 그윽한 눈이 가늘게 감기며 그 속에는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그래, 이거지!’그녀는 올해 겨우 25살이었다.어린 시절 양부모 곁에서 사랑받지 못했고 장애를 겪은 후 식물인간이 된 동생을 돌보며 결혼 생활에서는 남편의 감정적 학대 속에서 버텨야 했다.그녀는 너무도 많은 행복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이게 맞는 일이다.그녀는 웃어야 한다. 크게 소리 내어 마음껏 웃어야 한다.고작 25살에 불과한 그녀가 이토록 많고 무거운 책임과 압박을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눈앞 여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고 배건후의 심장도 저릿해 왔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거친 손끝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스쳤고 천천히 그녀의 눈꼬리를 눌렀다.“웃어. 앞으로 나쁜 감정들은 전부 나한테 넘겨. 내 앞에서는 일부러 강한 척 버틸 필요도 없어. 속상하면 때리고 욕해도 돼. 대신에 절대 자신을 괴롭히지 마.”도아린은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 뒤돌아 눈물을 닦으려 했다.그 순간 힘센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 특유의 나무 향기가 그녀를 감쌌고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여태까지 내가 나쁜 놈이었어. 미안해. 앞으로는 모든 일을 너와 상의할게. 네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을 거고 네가 속상해할 일도 만들지 않을 거야.”도아린은 팔꿈치로 그를 툭 쳤다.“입만 살아서!”배건후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운 뒤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도아린은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지도 못했잖아요. 그리고 저도 아직...”이후의 말은 더 이상할 수 없었다.배건후가 상자를 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청혼의 반지가 아니었다.작고 빨간 벌레가 들어 있었는데 다리가 없고 온몸이 부드러웠으며
변슬기는 바쁜 듯 뒤돌아보며 기대와 불안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진수혁은 흔쾌히 대답했다. 이미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배건후는 세 사람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빌라에는 자전거가 두 대 있었는데, 도아린과 함께 드라이브를 나가기 위해 일부러 다른 자전거의 페달을 떼어 놓았던 것이다. 도아린은 자전거를 보고 그에게 너 정말 얄밉다'는 눈빛을 보내며 빨리 고치라고 신호를 보냈다. 자전거를 고치고 네 사람은 문밖으로 나갔다. "꽉 잡아."배건후는 도아린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자 힘껏 페달을 밟았고, 자전거는 비탈길을 미끄러져 작은 길로 향했다.변슬기는 진수혁에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자전거 뒤쪽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진수혁은 자전거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저, 제가 밀어드릴까요...거의 정상에 도착하면, 그때 저를 밀어주세요."라고 제안했다. 진 대표님의 속도로는 누가 먼저 정상에 도착할지 내기는커녕,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수혁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거의 넘어질 뻔했고, 황급히 남자의 허리를 붙잡았다. 자전거는 갑자기 비틀거리지 않았고, 속도도 빨라졌다. 변슬기: "..."배건후는 도아린을 태우고 산길을 누볐고, 도아린은 뒤쪽 페달을 밟으며 일어섰다.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짧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렸다. "산속 공기가 도시보다 훨씬 좋네요. 매연 냄새도 없고, 에어컨 냄새도 안 나고." 배건후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어제 비가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당신도 비 온 뒤 흙냄새 좋아해요?"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웃으며 말했다. "나도 좋아해요! 비 온 뒤 흙과 풀이 섞인 냄새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배건후는 입꼬리를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깨달았다. 배건후가 말한 것은 바로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환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