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한가요?” 도운이 물었다. 의사는 단호히 대답했다. “네, 확실합니다.” 아윤은 그 말을 듣고 곧장 도운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결과를 들은 뒤에도 담담한 얼굴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도운은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상태면 입원이 필요합니까?”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위장염이 심하지 않으니 약을 먹고 잘 쉬면 됩니다.” 도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곧 의사가 자리를 떠났다. 아윤은 이 결과가 믿기지 않았다. 임신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멍한 상태로 서 있었다. ‘정말로 임신이 아닌 건가?’ 그녀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제가 착각했어요. 이런 오해를 만들 줄은...” 주변에서는 아기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그 소리가 아윤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도운은 이 상황에 대해 길게 말하지 않았다. “일단 나가자.” 아윤은 그의 말을 듣고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천천히 도운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윤의 다리는 풀린 듯 힘이 없었고, 걷는 동안 그녀는 갑자기 주저앉을 뻔했다. 그 순간, 도운은 아윤을 단숨에 붙잡아 자기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녀는 도운의 행동에 깜짝 놀라며 얼굴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윤이 도운의 품에 안기자마자, 몸의 긴장이 풀리며 안도감이 몰려왔다. 지난 며칠간 그녀를 괴롭히던 불안과 두려움이 한순간 해소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도운의 품 안에서 낮게 중얼거렸다. “임신이 아니라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윤의 눈가는 붉게 물들어 있었고, 눈동자에는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눈물이 맺혀 있었으며,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도운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며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설령 임신
도운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병원에서 보였던 온기는 마치 착각이었던 것처럼, 도운은 다시 차갑고 담담한 태도로 돌아갔다. 아윤은 결국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그 순간, 그녀의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윤아!” 그 목소리에 아윤은 놀라며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5미터쯤 뒤에 서 있는 사람은 태오였다. 태오를 본 아윤은 마치 강한 바람에 맞은 듯, 순간적으로 멈춰 서서 그를 응시했다. 태오는 아윤을 발견하자마자 다급히 그녀에게 걸어왔다. 그는 아윤이가 검은색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누구의 차인지 알아보지 못했다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 차가 도운의 차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도운 대표님?” 태오는 차 옆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도운은 차창을 내리고 태오를 바라보았다. 태오는 도운을 보자 얼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정말 한도운 대표님이셨군요. 제가 착각한 줄 알았습니다.” 도운은 마치 후배를 대하듯 온화하지만 거리를 두는 태도로 태오에게 물었다. “회사에서 오는 길인가요?” 태오는 웃으며 대답했다. “네, 아윤이 보러 왔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두고 온 물건도 좀 챙겨야 해서요.” 도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볼일 보도록 해요.” 태오는 차를 한번 둘러보더니 물었다. “한 대표님이 아윤이를 학교까지 데려다주신 건가요?” 아윤은 그 질문에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태오를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이 흔들렸다. 도운은 아윤을 잠시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요. 학교까지 데려다줬어요.” 태오는 고마운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윤이를 잘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대표님.” 태오의 말투는 마치 자신이 아윤의 남자 친구인 것처럼 당당했고, 그 말이 끝나자 아윤과 도운 모두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도운은 별다른 반응 없이 가볍게 말했다.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요.” 그의 말투는 차가
도운이 떠난 뒤, 태오는 아윤에게 다가갔다. 그는 손을 들어 아윤의 얼굴을 만지려 했지만, 아윤은 본능적으로 그의 손길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태오는 그녀의 어깨를 두 손으로 단단히 붙잡으며 외쳤다. “아윤아!!” 그는 아윤을 자신의 품 안에 단단히 끌어안았다. 아윤도 힘없이 태오의 품에 안겨 있었다. 한편, 도운의 차는 멀리 떠났지만, 신호등 앞에서 차를 세운 그는 무심코 백미러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안에 보이는 태오가 아윤을 껴안는 모습에 시선이 멈췄다. 태오는 온통 아윤의 몸 상태를 걱정할 뿐이었다. “기숙사로 가자. 너 더 쉬어야 해.” 그는 아윤의 손을 잡고 앞장섰다. 하지만 아윤은 그를 따라가다가 조용히 말했다. “태오야, 나 좀 배고파.” 태오는 그녀의 말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뭘 먹으러 가자.” 둘은 자주 찾던 학교 근처의 작은 식당에 들어갔다. 태오는 아윤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그는 아윤의 그릇을 씻고, 젓가락까지 깨끗이 닦아 그녀 앞에 내놓았다. 아윤은 테이블에 앉아 태오가 자신을 위해 이런 일을 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과거에는 이런 모습을 보며 행복하게 웃곤 했지만, 오늘은 그녀의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음식이 테이블에 올라왔을 때, 태오는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 아윤의 그릇에 담아주며 말했다. “고기 좀 먹어. 단백질을 보충해야지.” 그러나 아윤은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태오는 그녀가 음식을 먹지 않자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배고프다며? 왜 안 먹어?” 이때, 아윤은 조용히 그러나 단호히 말했다. “태오야, 이제 날 찾는 거 그만 해. 우리 이미 끝났어.” 그녀의 말은 흔들림이 없었고, 한 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망설임은 태오에게 희망을 줄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아윤은 태오가 더 이상 헛된 희망을 품지 않기를 바랐다. 태오는 젓가락을 든 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 아윤은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
아윤은 창백한 얼굴로 휘청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결국 이런 식으로 내가 오랫동안 좋아했던 태오를 떠나보내는구나.’그날 밤, 아윤은 집으로 돌아갈 용기가 없었다. 기숙사에서 혼자 밤을 보냈고, 밤새 고열에 시달렸다. 몸도 마음도 지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아윤은 쏟아지는 전화벨 소리에 깨어났다. 땀에 흠뻑 젖은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발신자를 확인했다. 민지의 전화, 태오와 함께 알고 지내던 친구들, 그리고 학교 친구들까지 여러 통의 전화와 메시지가 와 있었다. 그중 민지가 보낸 메시지가 아윤의 눈에 들어왔다. [태오 사고 났어!!] 그 메시지를 보는 순간, 아윤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곧바로 민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지는 전화를 받자마자 다급하게 말했다. [야!! 드디어 전화를 받았네. 태오 지금 경찰서에 있어!]아윤은 ‘경찰서’라는 말을 듣자마자 숨이 멎을 것 같았고, 곧바로 물었다. “병원 아니고 왜 경찰서에?” 민지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태오가 어젯밤 술집에서 누군가와 싸웠는데, 상대를 심하게 때렸나 봐. 그런데 문제는 그 상대가 꽤 심한 부상을 입었다는 거야.]민지는 이어 말했다. [태오는 이제 막 HP 그룹에 입사했잖아. 이런 일을 만들어서 어쩌려고...? 이제 막 시작인데, 범죄 기록이라니! 아무도 지금은 태오를 만날 수가 없는데.]아윤은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한참 후, 그녀는 단호히 말했다. “알았어.” 전화를 끊고 나서도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혼란스러웠다. 그 순간 또 다른 전화가 걸려 오자 바로 받았다. [아윤아, 태오가 건드린 상대는 대단한 집안 사람이야. 우리 아빠가 손을 써도 소용없다는데...] 아윤은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았어.” 전화를 끊은 뒤, 그녀는 텅 빈 머릿속을 부여잡고 고민했다. ‘태오는 지금 안나 때문에 앞길을 망치고 있어. 그게 내 어제 말 때문이라면... 어떻게
아윤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도운 오빠가 이번 한 번만 날 도와준다면... 나는 오빠에게 평생 그 은혜를 갚아야 할 거야.’그녀는 간절히 부탁했다. “제발 태오가 감옥에 가지 않게, 전과 기록이 남지 않게 해주세요. 이런 일로 태오의 앞날을 망칠 수 없어요.” 도운은 아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마치 하늘이 무너진 듯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라이터를 무심하게 두어 번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이런 문제는 해결이 쉽지 않아. 게다가 그 친구는 이제 막 HP 그룹에 입사했잖아.” 그의 목소리는 냉정했고,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도운의 말을 듣자, 아윤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저, 저도 알아요...”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잠시 침묵했다. 도운은 고개를 약간 돌리며 말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왜 이렇게 어리석게도 자기 앞길을 망치려고 하는 걸까?” 아윤은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떨었다. “오빠, 제발 태오를 도와주세요. 이번에 태오를 도와주시면, 제가 뭐든 할게요.” 그녀의 절박한 목소리에, 도운은 잠시 아윤을 응시했다. “그 친구를 위해서라면, 못 할 게 없어?” 그의 질문은 단순했지만, 아윤은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아윤은 간절한 마음에 더 깊이 고개를 숙이며 더욱 낮고 비굴한 자세를 취했다. 도운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차 안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그는 앞좌석의 운전기사에게 말했다. “전화해서 이번 사건이 어떻게 된 일인지, 그리고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봐.” 운전기사는 도운의 지시에 곧바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운전기사는 차에서 내려 전화를 걸어 정보를 확인했다. 차 안에는 숨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도운은 무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아윤은 무릎 위에 놓인 손을 꼭 쥔 채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 운전기사가 차로 돌아와 보고했다. “대표님, 방금 전화로 알아본 결과로는, 우태오 씨가
아윤은 태오의 사건이 도운의 힘으로 이렇게 빨리 해결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손가락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도운은 운전기사의 보고를 들은 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 남은 일은 자네가 처리해.” 운전기사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대표님.” 아윤은 여전히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심정이었다. 상대가 무슨 조건을 내걸었는지, 도운이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명확한 것은, 모든 상황이 도운의 손에서 순식간에 매듭지어졌다는 사실뿐.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것에 대해 단 한 마디의 설명도 하지 않았다. 아윤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자신을 다독였다. ‘묻지 말자.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 그와 동시에, 아윤은 자신이 도운에게 평생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을 졌다는 불안한 깨달음에 사로잡혔다.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간절히 말했다. “오빠, 앞으로 무엇이든 시키시는 건 다 할게요.” 아윤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짙은 속눈썹이 눈꺼풀 아래로 드리워졌고, 눈 밑의 미세한 푸른빛은 그녀의 피로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도운은 그녀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고, 담담히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수업에 집중하기 힘들 테니, 병원에 가서 링거부터 맞아. 겸사겸사 언니도 좀 만나고.” 아윤은 여전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오빠, 감사합니다.” 차는 학교 정문을 벗어나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한 후, 도운은 아윤을 데리고 병원에 들어가 링거를 맞게 했다. 우연히도 이 병원은 시아가 입원해 있는 병원이었고, 시아는 아윤이 몸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듣고 곧장 내려와서 동생을 만나려 했다. 그러나 도운은 전화로 말리며 링거만 맞으면 괜찮아질 거라고 말했다. 시아는 그의 말을 듣고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았다. 도운이 시아와의 전화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아윤은 병상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이미 40도 가까이 체온이 올라가고
도운은 아윤의 이불 위에 올려두었던 손을 자연스럽게 거두며 담담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윤이 여기서 무슨 일 있었던 거야? 걱정돼서 내려와봤어.” 도운은 시아에게 특별히 숨기지 않고 말했다. “태오에게 문제가 좀 생겼어. 이제 막 정리했어.” 그는 이어 덧붙였다. “잘됐네, 네가 아윤이 좀 다독여줘.” 시아는 태오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시아는 방으로 들어와 바로 아윤의 침대 옆에 앉았다. 그리고 도운은 그녀가 침대 곁에 앉자 자리를 비워, 아윤과 거리를 두고 뒤로 물러났다. 시아는 아윤의 손을 잡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언니한테 말해봐.” 시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정하고 따뜻하게 아윤을 바라보았다. 아윤은 잠시 반응이 없었지만, 언니의 질문에 침묵하다 조용히 대답했다. “태오가 술집에서 누군가와 다툼이 있었어요. 그걸 ... 도운 오빠가 해결해 주셨어요.” 아윤은 언니가 이 일을 알게 된 것에 대해 약간 긴장했다. 도운에게 부탁했다는 사실이 혹시 언니를 화나게 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시아는 이 문제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단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도운 오빠가 널 돕는 건 당연한 일이야. 넌 내 동생이고, 도운 오빠에게도 마찬가지야.” 도운은 시아의 말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근처에 있던 간병인에게 담요를 가져오라고 조용히 지시했다. 시아는 아윤에게 물었다. “그래서 태오의 일은 해결됐니?” 아윤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네, 해결됐어요. 모레쯤 나올 거예요.” 시아는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해결된 거면 이제 큰일 아니야.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나나 도운 오빠한테 바로 말해. 혼자 끙끙대면서 다 떠맡으려고 하지 말고.” 아윤은 시아의 따뜻한 말에 마음이 약간 누그러졌다. 가슴속에 따스함이 퍼지며 언니와 가까워지고 싶다는 감정이 처음으로
도운은 살짝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시아를 보며 말했다. “이제 그만 고집부려.” 시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았어. 정말 못 이기겠네.” 도운은 간병인에게서 담요를 받아 시아의 몸에 둘러주었다. 자신을 바람 한 점 스치지 않도록 꼼꼼히 감싸는 도운의 모습에 시아는 기쁘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 내 걱정 너무 과한 거 아니야? 여긴 아윤이 병실이잖아.” 하지만 도운은 진지하게 대꾸했다. “알았으니까, 이제 돌아가자.” 아윤은 병상에 기대어 조용히 이 모든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도운이 시아를 부축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언니 먼저 병실로 데려다줄게. 필요한 게 있으면 운전기사에게 말하면 돼.” 아윤은 작게 대답했다. “네, 고마워요, 오빠.” 도운은 시아를 부축하며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이 점점 멀어지자, 시아는 도운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윤은 도운이 옅은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았다.‘도운 오빠가... 웃는 일은 정말 드문데... 그 웃음은 언제나 시아 언니에게만 향하지.’그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자, 아윤은 혼자 고요 속에 가라앉았다.시아는 병실로 돌아가면서도 아윤의 상태가 계속 걱정되었다. “아윤이 혼자 병실에 둬도 괜찮을까?” 도운은 그녀를 부축하며 담담히 말했다. “괜찮아. 운전기사가 나중에 아윤이를 학교로 데려다줄 거야.” 시아는 그제야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윤은 링거를 맞는 내내 조용히 있었다. 도운은 더 이상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밤이 되어서야 운전기사가 아윤의 귀가를 도우러 병원으로 왔다. 사실 아윤은 계속해서 도운을 기다리고 있었다. 태오의 상황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가 나타나지 않자 전화할 용기도 내지 못했다. 결국 모든 질문을 마음속에 눌러 삼킨 채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아윤이 집에 도착했을 때, 최현식은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
이진주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절박하게 말했다. “도운아, 너는 우리 시아를 그렇게 사랑하면서 정말로 시아가 죽는 걸 두 눈으로 지켜보기만 할 거야?” 시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자신을 보지 못하게 손으로 몸을 지탱하며 눈을 감고 눈물을 흘렸다. 도운은 시아의 이런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마침내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속에 쌓인 분노와 울분을 억누르며 한참을 침묵한 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술 과정도 길고 시아의 일이긴 하지만, 아윤이의 안전 또한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결정은 반드시 아윤이의 동의가 있어야만 가능할 겁니다.” 시아는 사실 시험관 시술을 더 희망했다. 그러나 도운이 이 제안을 거절하자, 시아는 도운이 자신을 책망하는 것처럼 느꼈다. 시아의 눈빛에는 실망이 가득했다. 도운은 시아의 감정적인 반응에 신경 쓰지 않고 아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윤아, 네가 선택할 수 있어. 물론 거절할 권리도 있어.” 이진주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아윤을 올려다보며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최현식은 더 나이 든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며 뒤에서 조용히 아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아윤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정말로 아윤에게 선택권이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자신에게 선택권은 없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엄청난 긴장으로 아윤의 몸은 떨려오고 두 주먹은 꼭 쥔 상태였다. 도운은 침착하게 기다리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5분가량 시간이 흘렀다. 아윤은 몸을 움직이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정말 제가 선택해야 하나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고, 단지 아윤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진주의 눈에는 간절함이 가득하며 딸을 살릴 모든 희망을 아윤에게 걸었다. 아윤의 목소리는 떨렸고,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고 느꼈다. 시아의 간절한 눈빛과 최현식의 애타는 표정이 아윤을 짓누르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병실 안은 죽음 같은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의사와 도운, 그리고 이진주와 최현식이 엄숙한 표정을 짓고 시아의 침상을 둘러서 있었다. 침대에 누운 시아는 눈에 눈물을 머금고 절망에 가까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의사가 입을 열었다. “이번 위기는 겨우 넘겼지만, 이는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환자분을 살리기 위해서는 이른 시일 내에 골수 이식을 하거나 제대혈을 채취해야 합니다.” 도운은 한참을 침묵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가보세요.” 의사는 더 머물지 않고 병실을 나갔다. 문밖에서 그 모든 이야기를 들은 아윤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 무슨 일이에요?” 아윤의 목소리가 병실에 울리자, 도운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아윤은 잠깐 도운의 눈을 마주쳤지만 병실 안 누구도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려고 무의식적으로 발을 옮겼다. 하지만 시아의 침대 옆에 다가선 순간, 이진주가 갑자기 아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진주는 절규하듯 울부짖으며 말했다. “아윤아!! 네가 언니를 구해줘야 해!” 이진주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아윤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도운은 그런 이진주의 행동을 냉정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진주는 이미 이성을 잃은 듯 아윤의 옷을 붙잡고 간청했다. “너희 언니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시험관 시술이 고통스럽다는 걸 알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게 가장 빠른 방법이야.” 침대 위의 시아가 소리쳤다. “엄마!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아윤이는 내 대체품이 아니에요. 이렇게 대하면 안 돼요!” 하지만 이진주는 눈물을 흘리며 아윤의 옷자락을 더 세게 붙잡았다. “의사 말로는, 아기가 생기기만 하면 그 탯줄의 제대혈로도 가능하대. 아윤아, 제발 부탁이야!” 이진주의 손에 흔들리는 아윤의 몸은 마치 바람에 날리는 천 조각 같았다. 아윤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시아는 계속 외쳤다. “엄마!
그날 이후 며칠 동안 아윤은 병원에서 조용히 요양하며 시간을 보냈다. 시아는 위기의 순간을 넘기고 몸 상태가 점차 안정되어 갔다. 시아의 병실은 부모님의 사랑과 도운의 세심한 보살핌 덕분에 따뜻하고 화목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어느 날 시아는 문득 떠올린 듯 물었다. “엄마, 아빠, 아윤이는요?” 이진주와 최현식은 딸의 질문을 듣고 나서야 아윤을 떠올렸다. 이진주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윤이는 괜찮아. 너만 그냥 조용히 요양하면 돼.” 하지만 시아는 부모님이 계속 자신 곁에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빠, 엄마, 아윤이 좀 더 챙겨주세요. 만약 이번에 아윤이가 아니었다면, 저는 아마 죽었을지도 몰라요.” 도운은 시아의 말을 들었지만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간병인에게 병실 공기청정기를 켜라고 지시했다. 최현식은 환한 얼굴로 시아에게 말했다. “알겠다. 이따가 네 엄마랑 같이 갈게.” 이진주도 시아를 달래며 말했다. “그래, 너무 걱정하지 마라. 아윤이는 괜찮아.” 시아는 부모님을 보며 다그쳤다. “그러면 지금 가세요.” 이진주와 최현식은 더 이상 어쩔 수 없어 그녀의 성화에 병실을 떠났다. 부모님이 떠난 뒤 시아는 도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 우리 부모님더러 아윤이에게 가보라고 말하지 않았어? 부모님이 계속 나한테만 신경 쓰니까 아윤이가 얼마나 불쌍해 보였겠어.” 도운은 간병인에게 마지막으로 지시를 한 뒤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병상 앞에 앉았다.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야. 아윤이는 네 동생이잖아.” 시아는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 부족한 것이 없었다. 지금처럼 모든 사랑을 독차지하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자신이 받은 사랑을 조금이라도 나누고 싶어 했다. 도운은 부드럽게 그녀의 눈높이로 몸을 숙이며 말했다. “너부터 네 건강을 잘 챙겨야지. 다른 사람은 그다음이야.” 시아는 입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자기까지 왜 이래.” 그녀는
도운은 이마를 찌푸린 채 손으로 시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아무 일 없을 거야. 알았지?” 시아는 그의 말을 믿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운은 손을 그녀의 머리 위에 얹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이때 도운이 최현식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아윤이는 저 뒤에 있어요.” 최현식은 그제야 뒤쪽에 누워 있는 아윤을 바라보며 반응했다. 최현식도 곧 아윤에게 다가가 딸의 상태를 살폈지만, 시아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이 모든 것을 묵묵히 지켜보는 도운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시아는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 물었다. “도운아, 이번에 아윤이가 나에게 수혈해 준 거야?” 도운은 아윤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응. 네 혈액형이 특이해서 다른 피를 구할 수 없었어.” 시아는 피곤한 듯 눈을 감으며 조용히 말했다. “아윤이 고생했네.” 도운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일단 조금 자둬.” 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시아는 병실로 옮겨졌고, 아윤은 여전히 이동식 간이침대에 누워 있었다. 최현식과 이진주는 아윤에게 짧게 관심을 보였지만, 곧 두 사람의 모든 관심은 시아에게로 쏠렸다. 아윤은 눈을 반쯤 감은 채 차분하게 대답했지만, 그녀의 속눈썹 아래로 보이는 눈동자에는 실망과 슬픔이 가득했다. 도운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아윤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 시선을 떼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속눈썹 아래로 드리운 창백함도 눈에 들어왔다. 최현식과 이진주의 마음은 이미 아윤에게서 떠나 시아에게로 가 있었다. 시아가 방금 수술실에서 나온 만큼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도운을 바라보았다. 도운은 그들 쪽으로 걸어가 조용히 말했다. “시아는 병실로 옮겨졌습니다. 위험은 넘겼으니 당분간은 큰 문제 없을 겁니다.” 이진주가 안도하며 말했다. “그러면 우리 먼저 시아를 보러 가요.” 도운은 아무 말도
아윤은 도운의 말을 듣고 한참 지나서야 비로소 다시 도운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도운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도 여전히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잠시 침묵 끝에 그는 다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봐.” 이번에는 아윤도 그에게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또다시 간호사에게 이끌려 앞으로 갔다. 이진주는 수술실 문 앞에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울고 있었다. 최현식은 아내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그의 얼굴에도 초조함이 가득했다. 도운 역시 시아가 무사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는 또 다른 한 사람, 즉 아윤의 몸을 희생해서 시아를 구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때문에 도운은 아윤에게 거듭 잘 생각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시아의 부모들, 특히 아윤의 아버지이기도 한 최현식은 그 문제를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도운은 그 점이 이상하게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 아윤은 간호사에게 이끌려 검사실로 들어갔다. 간호사가 물었다. “평소 빈혈 있으신가요?” 아윤은 자신도 몰랐다. 그녀는 몸 상태를 신경 써 본 적이 없어서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 없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일단 검사부터 진행할게요.” 피를 뽑아 검사하는 동안, 아윤은 주삿바늘이 자기 정맥에 들어가는 것을 보며 고통에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참아냈다. 간호사가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참으세요.” 아윤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사를 마친 뒤, 아윤은 수술실로 이동했다. 수술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아윤은 침대에 누워 있는 시아를 보았다. 시아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입술에도 혈색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아윤의 얼굴도 하얗게 질렸다. 아윤은 별다른 말 없이 지정된 침대에 드러누워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언니가 무사하길...’ 아윤은 얼마나 많은 양의 피를 시아에게 수혈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는 점점 머리
“위험하지 않을까요?” “일단 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도운의 표정은 한층 더 차갑고 어두워졌다. 그때, 최현식과 이진주가 허겁지겁 병원에 도착했다. 이진주의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이미 의사와 도운의 대화를 들은 듯 그녀는 곧장 의사에게 달려가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 “선생님, 시아 동생도 곧 도착할 겁니다. 동생이 오면 바로 수혈을 시작해주세요.” 최현식도 말했다. “그래요. 시아 동생이 오는 중이에요.” 도운은 짧게 물었다. “아윤이와 상의는 해보셨습니까?” 이진주는 즉시 답했다. “그럴 필요 없지. 아윤이도 분명 불쌍한 제 언니에게 수혈해줄 거야.” 최현식도 거들었다. “지금은 어떤 일이 있어도 시아를 구하는 게 우선이야. 위험을 감수하는 게 목숨을 잃는 것보다 낫지.” 의사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다만 이번 수혈은 상당한 양의 혈액이 필요할 겁니다.” 이진주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 “괜찮아요. 일단 수혈부터 하고 나머지는 나중에 생각합시다.” 도운은 최현식 부부의 태도에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마침내 아윤이 병원에 도착했다. 멀리서 이진주와 최현식, 그리고 도운이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한 그녀는 급히 달려가면서 물었다. “아버지, 어머니, 언니는 괜찮은 거죠?” 이진주는 아윤을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 울먹이며 말했다. “아윤아, 네 언니가 지금 수혈이 필요해. 혈액이 부족해서 네 도움이 절실해!” 아윤은 그 말을 듣자마자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 의사가 아윤에게 물었다. “수혈에 동의하시겠습니까? 필요한 혈액량이 많아 몸에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아윤은 잠시 멈칫하고,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때 도운이 나지막이 말했다. “잘 생각해봐.” 아윤은 약간의 망설임 끝에 단호히 대답했다. “제가 할게요.” 도운은 그녀가 이렇게 빠르게 대답할 줄 몰랐다. 그의 얼굴에는 아윤에 대한 약간의 염려가 드러났다.
아윤은 문득 생각에 잠겼다. ‘도운 오빠가 나에게 보이는 이 모든 관심은 결국 시아 언니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거겠지. 그래서 나를 이렇게까지 챙겨주는 거고...’ ‘아마 이게 바로 그 말로만 듣던,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그 사람의 주변까지 사랑하게 된다는 걸까...’“알겠어요... 형... 오빠, 감사해요. 이제 이해했어요...” 아윤은 ‘형부’라는 말을 꺼내려다 멈췄다. 단 두 글자였지만, 끝내 입술을 떼지 못했다. 도운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윤이가 선택한 호칭을 묵인한 셈이었고, 방금 그녀가 보였던 행동에 대해서도 그저 철없는 아이로 생각했다. 결국 아윤은 태오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대신 태오의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설령 태오가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더 신중해야 하는 거 아닌가... 부모님이 쏟아온 수년간의 정성과 노력까지 저버릴 수는 없을 텐데...’그리고 다음 날, 태오의 부모님이 경찰서를 찾아간 뒤 태오는 마침내 풀려났다. 아윤은 그날 경찰서에 가지 않고 학교에 머물렀다. 태오와 관련된 상황에 대해서도 전혀 묻지 않았으며, 태오 역시 그녀에게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 그 후 며칠 동안 아윤은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냈고, 집으로 돌아가지도, 학교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그러던 중 시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시아는 아윤에게 태오의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물었고, 아윤은 이미 모든 일이 해결되었다고 솔직하게 답했다. 그리고 전화로 감사의 말을 전했다. “언니와 도운 오빠에게 정말 감사해요.” [고맙긴, 그런 말 하지 마.]시아는 전화를 끊었지만, 어딘지 모를 막막한 기운이 가슴 속에 잔잔히 깔렸다. 마치 무거운 돌덩이가 마음 한켠을 짓누르는 듯했다. 한편, 간병인은 VIP 병실 내 간이주방에서 대추차를 준비하던 중, 병실 안에서 들려온 낯선 소리에 놀라 급히 뛰쳐나왔다. 그리고 간
도운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아윤이 자기 입술에 닿도록 두었다. 아윤이 갈팡질팡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할 때, 도운이 낮게 물었다. “지금 나를 유혹하는 거야?” 아윤은 공기 중 산소가 희박해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점점 더 좁아지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아윤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아니에요... 저는 그저... 감사...” 도운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그 친구를 돕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거야?” 아윤은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불안감과 긴장감으로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도운이 다시 물었다. “만약 지금 그 친구가 너의 이런 모습을 보면 뭐라고 생각할 것 같아?” 그 순간, 그의 말은 아윤의 마음속 마지막 방어선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그녀는 겨우 유지하던 표정을 놓쳐버렸다. 도운은 아윤을 내려다보며 낮게 속삭였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람을 유혹하려고 하다니.” 아윤은 크게 눈을 뜨며 한발 물러섰다. 숨 가쁘게 가슴이 오르내리며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제가 오빠와 언니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해서...”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이를 빨리 가지면 더 좋지 않을까 해서요.” 도운은 얼굴에 미묘한 냉기를 띠며 낮게 말했다. “여자가 남자 앞에서 자존심과 이성을 잃는 일은 없어야 해. 네 아버지는 너에게 그런 말 한 적 없어?” 그의 말은 아윤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바닥에 내던지게 했다. 그녀는 여태껏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 최현식은 늘 멀찍이서 아윤을 바라보는 존재일 뿐, 남자들 앞에서 딸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그늘이 아윤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운은 그녀의 귀에 낮게 속삭였다.
도운은 아윤이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확신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잠시 말이 없을 때, 아윤이 조심스럽게 먼저 말했다. “제가 직접 갈게요.” 도운은 잠시 생각에 잠긴 후 대답했다. [주소를 보낼게.] 아윤은 팽팽하게 당겨졌던 마음의 끈이 조금씩 느슨해져 가는 것을 느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을 건넸다.“네, 알겠습니다.” 도운이 전화를 먼저 끊었고, 1분 후 아윤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 메시지에는 주소가 하나 적혀 있었다. [청운힐스, 별빛 궁전.]아윤은 핸드폰을 꽉 쥔 채로 화면을 응시하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녀는 택시에 몸을 싣고 ‘청운힐스’라는 이름의 고급 전원주택단지를 향했다.택시가 청운힐스 입구에 다다르자, 아윤은 이 단지가 단순히 크다는 수준을 넘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하다는 사실을 실감했다.택시가 안으로 들어가려면 엄격한 검사를 받아야 했고, 안으로 들어가자 단지 한가운데로 호수가 보이고 푸른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아윤은 왜 많은 사람이 언니 시아가 좋은 결혼을 했다고 말했는지 깨달았다. 한씨 가문은 결코 평범한 집안이 아니었다. 최씨 집안도 나쁘지 않았지만, 한씨 가문에 비하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택시는 천천히 ‘별빛 궁전’이라 불리는 웅장한 단독주택의 정문 앞에 멈춰 섰다.아윤은 차에서 내려 금색 실로 조각된 나무 대문으로 걸어갔고, ‘별빛 궁전’의 화려한 거실로 들어섰다. 그곳에서 도운은 비서와 함께 바 테이블 근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윤은 입구에 서서 들어가야 할지 망설였다. 이곳은 그녀가 처음 와보는 낯선 곳이었다. 도운은 문쪽에서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비서와의 대화를 멈췄다. 그는 입구 쪽을 바라보고 아윤을 발견하자, 자신이 그녀를 이곳으로 부른 사실을 떠올렸다. 아윤은 도운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무르자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서로 꼭 맞잡았다. 그녀의 태도는 어딘가 긴장된 모습이었다. 도운은 비서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