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레 유강후도 주성원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곧바로 흰머리 한두 가닥을 보게 되었다.그는 겁에 질린 채로 재빨리 다가가 온다연의 손목을 잡고 흔들었다.“다연아.”그러나 온다연은 여전히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유강후는 그녀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아직 뜨거웠다.가슴을 쥐어뜯듯 고통이 밀려왔다.유강후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모든 상황을 설명해 줬고 심지어 아이까지 보여줬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지를 몰랐다.이때 주성원이 입을 열었다.“다연 씨의 현재 상태는 매우 심각합니다.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한 수준으로 돌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네요.”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사실대로 말했다.“대표님, 병원에 데려가 정밀검사를 받는 게 어떠신지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위에 문제가 있는 것 같네요. 자칫하다가 암으로 발전될 수도 있으니 검사를...”유강후는 고개를 휙 돌렸다.“뭐라고요?”주성원은 말을 이었다.“장난으로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 일만 30, 40년 해왔는데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다연 씨는 위에 문제가 생긴 게 확실합니다.”“왜 이렇게 짧은 시간에 상태가 악화된 거죠? 불과 한두 달밖에...”순간 유강후의 머릿속에는 막연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어쩌면 온다연이 아이가 없어진 걸 알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그저 이런 추측이 스쳐 지나갔을 뿐, 곧바로 그에게 부정을 당했다.유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다연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아시잖아요. 굉장히 내성적이고 뭐든 속에 담아두는 성향이에요. 제가 아무리 옆에서 달래도 절대 입을 열지 않거든요. 아마 최근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이렇게 된 것 같네요.”“혹시 다연이의 입을 열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주성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이건 대표님이 공들여 유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연 씨는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 어쩌면 마음의 병을 앓고 있을 수도 있겠네요. 대화를 최대한 많이 하는 게 좋습니다. 속에 담아둔
유강후는 잠시 생각했다.“같이 데려와. 다치지 않게 옆에서 잘 경호해.”그의 눈에는 착잡함이 스쳐 지나갔다.“자식은 부모의 보물이나 다름없어. 재혁이가 날 돕기 위해 기꺼이 아들을 보내줬는데 절대 다치게 해서는 안되지.”이권이 답했다.“그건 당연히 제가 할 일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재혁 씨의 아들도 하얗고 토실토실해서 엄청 예쁘더라고요. 심지어 전체적인 분위기는 대표님과 많이 비슷해요. 닮은 거로만 봤을 땐 우림 도련님보다 훨씬 더 대표님과 다연 씨를 닮았어요.”유강후는 기분이 언짢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그게 무슨 소리야? 재혁이는 우리 엄마 먼 친척의 아들이야. 친척끼리 당연히 닮은 구석이 있겠지.”“권아, 왜 이렇게 뭉그적거리지? 빨리 안 가고 뭐 해.”“지금 바로 가겠습니다.”두 곳은 서로 가까워 얼마 지나지 않아 진시현이 아이를 데리고 함께 찾아왔다.오늘 진시현은 가면 대신 가벼운 메이크업을 했다.최근 온다연을 따라 해서 그런지 눈매와 행동까지 점점 온다연과 매우 흡사해졌다.캐주얼한 운동복을 입은 그녀는 아이를 소파에 눕히고 자연스럽게 놀아줬는데 그 모습은 유난히 온화해 보였고 로운조차도 힐끔힐끔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얼마 후 유강후가 다가와 그녀에게 몇 마디 설명했다.그러고선 자연스레 시선이 아이에게 향했다.보면 볼수록 이재혁의 아들은 강씨 가문과 많이 닮았고 그제야 이권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문득 세상을 떠난 아이가 생각난 유강후는 가슴이 미어졌다.‘우리 아이가 살아있었다면 이만하겠지?’온다연과 유강후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으니 어쩌면 훨씬 더 예쁠지도 모른다.이때 아이가 갑자기 손을 뻗어 유강후의 옷깃을 잡더니 옹알이했다.흠칫한 유강후는 홀린 듯이 조심스럽게 아이를 안았다.어찌나 작고 가벼운지 깃털처럼 느껴졌고 말랑한 몸은 마치 작은 고양이를 안은 것처럼 부드러웠다.유강후는 씁쓸한 미소를 드러내며 나지막하게 물었다.“이름은 뭐야?”진시현이 웃으며 답했다.“진하림이요.”“재혁이의 아들인데 성
온다연은 말없이 진시현의 품에 있는 포동포동한 아이를 바라봤다.유강후가 다가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넋이 나갔다.그녀의 영혼은 아이에게 빨려 들어갔고 아이의 모든 움직임에 매료되었다.유강후는 혼이 나간 듯 얼굴마저 창백해진 온다연의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열은 없었다.그는 온다연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이 사람이 진시현이야. 로운의 부하이자 네가 말한 그 여자... ”온다연의 눈에는 아이밖에 없었기에 유강후의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그녀는 유강후의 손을 뿌리치고 한 걸음 한 걸음 진시현 앞으로 걸어갔다.진시현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사모님, 안녕하세요. 진시현이라고 합니다. 저랑 대표님의 관계를 오해하고 계신 것 같은데...”온다연은 정신이 멍해져서 진시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다만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가 있었다.‘네 아이잖아. 이건 네 아들이라고.’온다연은 가까이 다가가 아이의 생김새를 관찰했다.하얗고 토실토실한 아이는 이리저리 움직이며 맑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봤다.순간 아이의 얼굴에서 유강후의 모습이 언뜻 스쳐 갔다.호흡마저 가빠진 온다연은 재빨리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안아봐도 될까요?”얼굴은 식겁할 정도로 창백했지만 온다연의 아름다운 미모에는 전혀 영향이 없었다.진시현은 지금껏 멀리서만 온다연을 봤었다. 물론 그때도 청순하고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오늘처럼 가까이에서 보니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온다연의 피부는 매우 하얗고, 뚜렷한 이목구비는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여주인공이라 해도 무방했다.한편으로는 유강후가 이토록 집착하는 이유가 납득되었다.다만 아이를 바라보는 온다연의 눈빛은 평소와 매우 달랐는데 마치 당장이라도 아이를 빼앗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게다가 아이를 안아보고 싶다고 하니 진시현은 무의식적으로 유강후의 눈치를 살폈다.유강후도 온다연의 이상함을 눈치챘다.“다연아, 아이가 보고 싶어서 그래? 장 집사한테 얘기해서 우림이 데려올게.
유강후는 단호하게 말했다.“얼른 막아.”그러자 경호원들이 앞으로 나서며 온다연을 가로막았다.“사모님, 밖에 비가 옵니다. 여기 있는 게 좋을 거예요.”온다연이 계속 피하려고 하자 몇몇 경호원은 아예 문을 막아버렸다.다급함과 초조함이 밀려온 그녀는 또다시 경호원의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다행히 이를 알아챈 경호원은 재빨리 옆으로 몸을 피했다.“사모님, 또 총을 쓰시려고요?”온다연은 자신의 의도가 간파되자 뒤로 돌아서더니 주저 없이 창문으로 달려갔다.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녀가 창가에 다가가기도 전에 이미 창밖에는 건장한 경호원이 자리 지키고 있었다.절망은 밀물처럼 온다연을 덮쳤다.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그녀는 슬픔에 잠식할 듯한 눈빛으로 뚫어져라 유강후를 째려봤다.유강후도 이제는 그녀의 마음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그는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그녀는 한 걸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끝내 벽 모퉁이에 다다르고서야 온다연은 품에 있는 아이를 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강후 씨, 이건 내 아이예요.”유강후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그 고통을 애써 참으며 온다연에게 손을 내밀었다.“다연아, 우리의 아이는 우림이야. 그러니까 이리 줘.”“싫어요.”온다연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너무 긴장하고 불안한 탓인지 그녀의 옷은 어느새 식은땀으로 젖어있었고 이마와 손바닥도 땀투성이였다.한편으로는 유강후가 아이를 빼앗아 그녀의 곁에서 떼어 놓을까 봐 극도로 두려워했다.온다연은 삶의 이유를 찾지 못했다.그녀는 품에 있는 아이를 꼭 껴안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 아이가 내 아들이잖아요.”온다연은 고개를 들어 유강후를 바라봤다.“내 아이 맞잖아요! 강후 씨, 제발 부탁인데 빼앗지 마요. 사실 이미 알고 있어요. 우림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는걸.”유강후는 그대로 얼어붙었고 심장이 터질 듯 아팠다.“이 아이는 재혁이의 아들이야. 경호원 이재혁 알지? 우리의 아이는 우림이가 맞아.”그 말
그 말과 함께 온다연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이렇게 빌게요. 제발 아이를 다른 사람한테 주지마요. 안 그러면 확 죽어버릴 거예요.”“시키는 건 뭐든지 할게요. 제발 아이만...”유강후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애써 이성을 유지하며 온다연을 일으켰다.“다연아, 거짓말이 아니야. 저 아이는 우리 아들이 아니라니까?”온다연은 그를 바라봤다.“말했잖아요. 우림이랑 유전자 검사해 봤다고요. 혈연관계가 없다는 결과를 이미 확인했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날 속일 거예요?”하얗게 질린 얼굴에는 눈물이 가득했다.“저 아이가 내 아들이 아니라면 진짜 아들은요? 누구한테 줬어요?”유강후는 말없이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았다.그러나 온다연은 여전히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고 점점 더 과격해졌다.“말하라고요. 내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냐고요.”어느새 유강후의 눈에도 슬픔이 차올랐지만 입을 꾹 닫은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왜 대답을 못 해요? 말해줘요. 내 아이는 어디에 있는지.”“말하라고!”이때 뒤에 서 있던 이권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도련님, 이제 사실대로 말씀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큰일 날 것 같습니다.”온다연은 고개를 돌리더니 이권을 쳐다보며 물었다.“이권 씨는 알고 있죠? 아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줘요.”“이권, 입 닫아.”유강후가 단호하게 호통을 쳤지만 이권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다연 씨, 아이는 죽었어요.”“그 작은 아이가 5개월 동안 살아있을 리가 없잖아요.”“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도련님의 손바닥 위에서 마지막 숨이 끊겼습니다.”그 말은 날벼락처럼 날아가 온다연의 가슴을 후벼 찧었다.‘죽었다고?’‘내 아들이 죽었다고?’그녀의 눈빛은 서서히 생기를 잃었고 마치 영혼 전체가 고통에 휩싸인 것처럼 공허하고 슬퍼졌다.‘아니야. 분명히 건강을 되찾고 있었어.’‘거짓말하는 게 분명해. 세상이 지금 날 속이고 있는 거야.’심장이 멎은 듯 숨이 막혀온 온다연은 몸을 떨면서 중얼
“다연아, 너한테는 내가 있잖아.”“아이는 다시 생길 거야. 너만 건강하다면 반드시 선물처럼 찾아올 거야.”...드디어 차가 병원에 도착했고 온다연은 급히 응급실로 옮겨졌다.검사 결과 급성 위경련으로 이미 약했던 위가 강한 자극을 받아 대량의 출혈을 일으켜 피를 토해낸 것이다.곧이어 응급 처치 및 수혈이 시작됐다.장장 두 시간 정도 지속되었다.그 후 온다연은 병실로 옮겨졌지만 밤이 될 때까지도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의사도 이런 상황이 의외인 듯 다시 한번 정밀 검사를 진행했다.진찰을 마친 의사는 진지하게 말했다.“위출혈로 찾아오는 환자는 지금도 많습니다. 다만 그 심각도에 따라서 상황이 나뉘죠. 대량의 피를 토해낸 심각한 경우라면 30분 이내에 쇼크로 사망할 수도 있습니다.”“다연 씨의 경우 이미 심한 위궤양 증세를 보이고 있으니 절대 자극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보통 출혈이 끝나고 상태가 점차 호전되면 5시간 안에 의식을 되찾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열 시간이 지나도록 눈을 감고 있네요.”“대표님, 제 생각에 다연 씨는 스스로 코마 상태에 빠진 것 같습니다. 쉽게 말하면 깨어나고 싶지 않은 거죠. 현실을 마주하기가 두려운 모양입니다. 시간을 좀 더 주시죠.”의사가 떠난 후 유강후는 오랫동안 온다연의 침대 앞에 앉아 있었다.그는 손으로 온다연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온다연은 학교 다닐 때보다 훨씬 말랐고 성격도 많이 변해 있었다.어쩌면 아이가 바뀐 걸 알아채고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다가 더는 견디지 못해 육체적인 고통으로 이어진 것 같다.유강후는 온다연의 손을 잡고 자신의 얼굴에 대고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너한테는 내가 있잖아.”“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도망치지 말자. 우리 함께 맞서 싸우자.”...얼마 후 장화연이 들어왔다.유강후는 외로운 조각상처럼 홀로 온다연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세 시간 전에 봤던 모습과 똑같이 자세조차 바꾸지 않은 그를 보며 장화연은 가슴이 아팠다.그녀는 앞으로 나서서 유
이권은 재빨리 입을 닫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유강후는 자고 있는 온다연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자리 좀 지켜줘. 다연이 눈뜨면 바로 연락하고.”장화연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하게 답했다.“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지는 마세요. 다연 씨는 지금 대표님이 필요합니다.”유강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온다연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선 곧바로 병실을 나갔다.장화연은 그들을 배웅했다.그 시각 침대 위의 온다연은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피곤한 듯 다시 눈을 감았다.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권은 유강후가 나오자 재빨리 옆에서 다가갔다.“도련님, 헬기는 준비했습니다.”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통보하는 거야? 제멋대로 결정하는 거 보니까 미래 그룹의 대표를 해도 되겠어.”“그래도 도련님을 대신해 총을 막았으니 적어도 한번은 찾아가는 게 예의라고 생각합니다.”유강후는 말없이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피우지 않고 멍하니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경원은 매우 컸고 반짝이는 네온 불빛과 아름다운 야경을 자랑했다.한때 유강후는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 도시마저 그의 발밑에 있다고 느꼈다.그러나 현실은 아이를 지키지 못했고 온다연의 마음을 사로잡지도 못했다.만약 지금 가진 모든 것으로 아이의 생명을 바꾸고 온다연의 마음과 환심을 얻을 수 있다면 주저 없이 내놓을 준비도 되어있다.하지만 이 세상에 만약은 없다.담배 연기가 가라앉고 불꽃이 반쯤 꺼졌을 때 유강후가 입을 열었다.“권아, 넌 와이프랑 사이가 좋아?”“성격이 예민한 것 말고는 괜찮아요.”“와이프 임신했다며? 몇 개월이야?”이권의 얼굴에는 금세 미소가 떠올랐다.“3개월이요. 임신해서 그런지 더 예민하더라고요.”유강후는 한참이 지나서야 답했다.“아이가 태어나면 큰 선물을 줄게. 권아, 나는 네가 정말 부럽다.”밝은 불빛과 달리 유강후는 오히려 밤의 어둠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울고
유강후는 눈살을 찌푸렸다.“네 말은 배에 탄 사람 들중에 문제가 있다는 거야?”유강후는 단 한 번도 탑승한 사람들에 대해 의심한 적이 없다.그 배는 유강후의 소유였기에 당시 초청을 받은 사람들도 그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들이었다.굳이 꼽자면 소씨 가문과 유씨 가문의 사이가 어색한 것 빼고는 거의 다 유씨 가문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집안이다.집안의 뿌리까지 서로 얽혀있는 사이랄까?아무리 소씨 가문과 관계가 어색하다고 한들 가문 후계자가 유강후의 소꿉친구이니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다. 비록 능력이 많이 모자랐지만 책임감이 있고 품행이 단정한 사람이니까.이권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저는 단지 수상쩍은 생각이 들 뿐입니다. 도련님이 물에 들어갔을 때 마침 상어 떼가 나타났잖아요. 배에 타고 있던 그 많은 사람들 중 한재민 씨만 도련님을 발견한 것도 뭔가 좀 걸립니다.”“솔직히 말씀드리면 계획 살인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타깃은 도련님이 아닌 한재민 씨죠...”“듣기로는 그날 한재민 씨가 나은별 씨와 엄청 크게 다퉜다고 합니다.”유강후는 눈빛이 반짝였다.“이 일이 나은별이랑 관련 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야?”이권이 답했다.“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그 답을 들은 유강후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나은별이 성격이 더러운 건 사실이야. 우리 어렸을 때부터 친구인 건 알지? 내가 아는 나은별은 그런 일을 계획할 사람이 아니야. 재민이의 아이까지 임신했는데 굳이 그럴 이유가 없잖아.”그는 잠시 망설였다.“권아, 앞으로 이 일은 언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솔직히 내 친구를 의심하고 싶지 않아. 만에 하나 정말 크게 싸웠다 해도 상대를 죽일 만큼은 아닐 거야.”이권은 말문이 막혔다.바로 이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나은별이 걸어온 전화였기에 이권은 자연스레 스피커폰으로 돌렸다.통화가 연결되자 곧이어 연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후 씨, 나 보러 와줘. 응?”“어제 꿈꿨는데 계속 그 장면이 떠올라서 너무 괴로워.”“재민 씨
곧 온다연은 가방에서 한 장의 수표를 꺼내더니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이건 M 국 은행의 국제 수표입니다. 보상이 필요하다면 금액은 원하는 대로 적으세요.”그 커다란 액면의 국제 수표를 본 순간, 유강후는 그녀가 진수현의 딸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이런 수표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수천억 원 이상의 자산을 가진 대기업의 최고 인사들뿐이었다.‘역시 그랬구나.’오랜 시간 동안 그녀를 찾아 헤맸지만 단서 하나 찾을 수 없었던 이유가 명확해졌다.‘다연이가 진수현의 딸이었다니!’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고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정말 날 기억하지 못하겠어?”들어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온다연의 모든 행동은 방어적이었다.그것도 완전히 낯선 사람을 대할 때 보이는 방어였다.유강후는 확신했다. 온다연은 정말로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가슴이 누군가 칼로 깊게 도려낸 듯 아팠지만 그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을 억누르며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다.‘겁주지 말아야 해.’하지만 손에 쥔 펜을 너무 세게 잡아 펜이 약간 휘어질 정도였다.“다연아, 나 유강후야.”“유강후. 설마 너 정말 날 기억 못 한다는 거야?”‘유강후?’이 세 글자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온다연의 의식을 깊게 파고들었다.‘유강후!’그 이름이 너무나 익숙하게 느껴졌다.하지만 이름과 관련된 무언가를 떠올리려고 하면 머릿속이 터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지금까지 겪어본 적 없는, 그 어떤 통증보다도 극심했다.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내장까지 꼬이는 듯한 고통이 전신을 휘감았다.온다연은 고통스러운 듯 신음 소리를 내며 머리를 부여잡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그러자 유강후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그는 바로 그녀에게 달려가 안으며 외쳤다.“다연아!”익숙하고 차가운 스노우 우디향과 담배의 은은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그러나 그 순간, 온다연의 두통은 더욱 심해졌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너무 아파요!”“아파!”“건드리지 마요! 저리 가
눈앞의 남자는 압도적인 기운을 풍겼다.깊고 날카로운 눈빛은 마치 끝없는 심연을 품고 있는 듯했고 온다연은 그 시선에 빠져드는 느낌에 몸을 떨었다.그녀는 애써 자신을 진정시키며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어젯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가장 소중한 그 보석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고 이 고통은 이 남자를 두려워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렬했다.그래서 크루즈로 다시 와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도 망설임 없이 헬리콥터를 준비하게 했다.온다연은 한 걸음씩 그의 쪽으로 다가갔다.낮의 밝은 빛 속에서 남자의 모습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고급 맞춤 수트가 그를 더욱 고귀하게 보이게 했고 뚜렷한 이목구비는 마치 신이 빚어낸 최고의 작품 같았다.단순히 앉아 있을 뿐이었지만 그는 마치 온 세상을 발아래 둔 듯한 위압감을 풍겼다.온다연은 심장이 떨리는 걸 느끼며 그를 바라봤다.무섭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는 그녀가 본 남자 중 가장 잘생긴 사람이었다.그때 남자가 고개를 들어 온다연과 시선을 마주쳤다.그의 차갑고 깊은 눈빛이 그녀를 꿰뚫는 순간, 온다연은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숨이 막힐 것 같았다.남자와 가까워질수록 온다연은 더 답답함을 느꼈다.그리고 그가 왜 그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 눈빛은 마치 자신을 작은 사냥감으로 보는 것 같았는데 거대한 맹수처럼 그가 언제든 달려들어 삼켜버릴 듯한 느낌이었다.어젯밤 온다연은 인터넷을 뒤져 이 남자에 대한 정보를 찾으려 했으나 얻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오아시스 그룹이 세계 해양 자원 개발의 선두 기업이라는 사실과 수많은 크루즈와 원양 항로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 정도뿐이었다.막대한 자산 규모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지만 그들의 대표, 즉 이 남자에 대한 정보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온다연은 그의 책상 앞까지 가지 못하고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안녕하세요. 물건을 찾으러 왔습니다.”유강후는 그녀를 가만히
주먹을 꽉 쥐더니 아이의 눈가가 붉어졌다.“역시 아빠는 날 사랑하지 않아요! 이제는 내 분유까지 줄이겠다고요?”아이의 똑똑함은 누구나 인정할 정도였지만 기본적으로 아직 어린아이였다.특히 우유에 대한 집착이 심해 매일 밤 200mL를 마셔야만 잠이 들곤 했다.유강후가 분유를 끊겠다는 말에 아이는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울음을 터뜨렸다.아이가 울며 상심해 하는 모습을 보자 유강후는 마음이 약해졌다.어렸을 때부터 손수 키운 아이였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그저 친자식 같았다.특히 지난 3년 동안 둘은 서로 의지하며 살아왔기에 보통의 부자 관계보다 훨씬 더 가까웠다.그는 아이를 안아 의자에 앉히고 하인이 건네준 우유를 받아 아이 앞에 내밀었다.“마셔요, 작은 도련님.”아이는 한동안 거짓 울음을 흘리다 결국 우유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이내 아이는 우유병을 받아 들고 크게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말했다.“아빠는 사랑에 빠져서 많은 걸 제대로 못 보고 있어요.”그러고는 얼굴을 약간 들리더니 당돌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 보석 가짜예요. 근데도 그 사람은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서 그걸 차고 있었어요.게다가 값비싼 장신구들과 함께 말이에요. 그건 그 보석이 엄청나게 중요한 물건이라는 뜻이죠. 평소 절대 몸에서 떼어놓지 않는 것... 이해돼요?”“지금 분명 미친 듯이 찾고 있을 거예요!”“하지만 배로 찾아오진 않았어요. 그건 아빠를 두려워한다는 뜻이죠!”유강후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만족감을 내비쳤다.‘쪼끄만 녀석이 또 조금 더 똑똑해졌군. 잘 키워낸다면 양씨 가문은 앞으로도 걱정이 없겠어.’“혼수 얘기는 무슨 뜻이야?”아이는 손에 든 우유병을 흔들며 말했다.“아빠한테 시집갈 수 있다고 했어요. 혼수는 크루즈 전부와 이 넓은 바다라고 했고요. 나랑 약속했어요. 그 약속은 깨지 않을 거예요!”유강후의 마음 한편이 찢어지는 듯했다.이 정도 재산이 뭐가 대단하겠는가.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준다고 해도 그녀가 받지 않을까 봐 두려
그 시각, 크루즈에서는 손님들이 서서히 흩어지고 있었지만 유강후는 여전히 찾고자 하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다.온다연은 마치 배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 같았다.결국 두 부자는 지친 모습으로 갑판에 앉아 멀어지는 헬리콥터를 바라보았다.작은 아이는 화가 나서 콧김을 내뿜으며 말했다.“정말 쓸모없네요! 내가 간신히 찾아냈는데 아빠가 금방 놓쳐버렸잖아요.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조차 못 찾다니... 창피한 줄 알아요!”“차라리 집에 돌아가서 농사나 지어요! 진짜 너무 화나요!”유강후는 온몸에서 서늘한 기운을 뿜어내며 헬리콥터를 가만히 응시했다.아무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그때 이권이 다가와 오늘의 손님 명단을 전부 유강후에게 건넸다.“도련님, 모든 명단은 여기 있습니다. 남성 손님은 전부 제외했고 사모님 연령과 체격에 맞는 여성 손님은 총 101명입니다.”유강후는 일어나 몇 걸음 걸어 난간으로 다가가 멀리 보이는 희미한 불빛을 바라보았다.저곳이 바로 대진 그룹의 정원이라는 소문이 들리는 곳이었는데 진수현이 그의 부인 안심을 위해 조성한 사유 정원이었다.그곳에서 본 안심은 온다연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근데 왜 다연이가 딸이 아닌 거지? 분명 어딘가 잘못된 점이 있을 거야.’유강후는 저 멀리 반짝이는 불빛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조사할 필요 없어. 오늘 배에 탑승한 진씨 가문의 명단을 불러봐.”이권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지시에 따라 진씨 가문의 명단을 읽기 시작했다.하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진수현은 진씨 가문 사람들을 너무 철저히 보호하고 있었다.유강후는 이곳에 온 지도 오래되었고 신국의 다른 가문 정보는 대부분 손에 넣었지만 진씨 가문에 대한 실질적인 정보는 전혀 얻지 못했다.진씨 가문의 실종된 딸을 찾았다는 소식만 있었을 뿐 그녀의 사진조차 본 적이 없었다.그러나 온다연이 오늘 밤 이곳에 나타난 건 분명했다.그녀는 이 재벌가의 딸일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염지훈은 온다연의 손을 가볍게 잡고 그녀의 부드럽고 섬세한 손가락을 천천히 어루만졌다.“내일이면 북아메리카로 떠나야 해.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가 있어서 말이야. 이번엔 한 달 정도 걸릴 것 같아.”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미소 지었다.“돌아오면 더 강한 힘을 가질 거야. 그래야 다연이를 아내로 맞을 수 있으니까.”온다연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조심히 다녀오세요. 일이 잘 마무리되면 빨리 돌아오고요.”염지훈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웃었다.“나 걱정해 주는 거야? 혼자 가는 게 불안한 거지?”온다연은 조용히 ‘네’ 하고 대답했다.곧 약혼식을 앞두고 있었기에 온다연은 염지훈을 걱정하는 건 의무이자 책임처럼 느껴졌다.염지훈은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상담은 계속 받아야 해. 내가 없더라도 게으름 피우면 안 돼. 누군가 확인하러 갈 거니까.”“그리고 긴장을 풀게 해주는 최면 치료도 빠뜨리면 안 돼.”과거의 기억을 잊게 하기 위해 최면을 선택했던 건 매우 힘든 결정이었다.당시 온다연은 심각한 자살 충동에 시달리고 있었고 자신을 부정하며 누구도 믿지 못했다.심리 치료사는 몇 번의 철저한 검사를 거쳤고 매번 나온 결론은 명확했다.그녀가 과거의 기억에 계속 빠져 있다면 자신을 더욱 심하게 해치거나 새로운 인격이 생겨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다.지금 생각해보면 과거를 잊게 한 건 매우 올바른 선택이었다.현재의 온다연은 새로운 정체성에 완벽히 적응했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안정된 상태였다.게다가 그녀는 관심 있는 분야에서 놀라운 성과를 내고 있었다.온다연의 그림은 국제무대에서 여러 차례 금상을 받으며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신비로운 천재 소녀 화가로 불리고 있었다.금융 분야에서도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이런 온다연만이 진정한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었고 과거의 슬픔 속에서 울고 있는 존재로 남지 않을 수 있었다.최면 이야기가 나오자 온다연은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
매우 두려운 듯 작은 아이는 말을 하다 멈추고는 옆에 있는 아이를 조심스럽게 쳐다보았다.그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아이는 용기를 내어 다시 말했다.“나, 나도 그냥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어요...”눈이 시큰해지며 온다연의 가슴은 무겁게 내려앉았다.마음 한구석에 커다란 돌덩이가 얹힌 듯 답답하고 아팠다.두 아이를 품에 꼭 안자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내가 엄마야. 너희는 모두 내 아이들이야...”그때, 그녀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다연아!”동시에 두 아이가 갑자기 사라졌다.그녀의 품은 텅 비어 있었고 남은 건 온 하늘을 덮은 눈송이뿐이었다.온다연은 다급히 소리쳤다.“아가야, 어디 있어? 아가야!”그녀의 목소리가 허공을 가르며 메아리쳤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다연아, 일어나!”“다연아!”놀란 온다연이 벌떡 깨어났다.눈앞에는 염지훈의 커다란 얼굴이 보였다.그가 그녀의 이마를 만지며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열은 없는데 땀이 많이 났네.”온다연은 아직 꿈속에 머물러 있는 듯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땀이 젖은 머리카락이 하얀 피부에 들러붙어 그녀의 흑발과 백옥 같은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염지훈은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를 수 없다는 듯 그녀에게 키스를 하려 고개를 숙였다.그러나 온다연은 본능적으로 그의 행동을 피했다.그러자 염지훈의 눈에 순간적으로 어두운 빛이 스쳤다.3년이 지났지만 온다연은 여전히 염지훈의 스킨쉽을 거부하고 있었다.‘기억은 희미해졌다고 하지만... 왜 여전히 날 거부하는 거지?’그는 속으로 생각했다.‘그래도 괜찮아. 이제 곧 약혼식을 올릴 거야. 그 이후엔 다연이도 더 이상 나를 거부할 이유가 없겠지.’“또 악몽 꿨어?”그는 손에 든 휴지로 그녀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부드럽게 닦아주며 물었다.“요즘은 한동안 악몽 안 꿨잖아.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온다연은 염지훈의 손길을 피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어떻게 들어왔어요?
바닷바람이 창문 틈으로 스며들어 방 안 가득 시원함이 가득 찼다.공기에는 안심이 준비해준 라벤더 아로마의 은은한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온다연은 안심과 진수현을 떠올렸다. 그들은 온다연을 특별히 아껴주며 사랑으로 감싸주었다.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듯이 노력했다.‘이런 부모님이 곁에 있는 이상 과거의 기억을 잃었다면 잃은 대로 괜찮지 않을까...’이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서서히 잠에 들었다.꿈속에서 그녀는 전통 스타일로 꾸며진 정원에 살고 있었다.마치 설날처럼 느껴졌고 창밖에는 하늘 가득 불꽃놀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손에는 커다란 봉투를 들고 있었다.그리고 키가 큰 남자가 그녀를 품에 안으며 낮고 깊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다연아, 너는 내 거야. 그리고 너는 오직 나만의 것이야.”“말해 봐. 내가 누구인지.”그 남자의 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몸을 떨리게 했고 부끄러움에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그러나 남자는 온다연을 놓아주지 않았고 그녀를 더욱 부끄럽게 만드는 행동을 했다.결국 그녀는 숨죽인 채로 나지막이 속삭였다.“당신은... 내 남자예요...”꿈속에서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부끄러워했지만 남자의 끊임없는 스킨쉽을 이겨낼 수 없었다.그의 손길 아래 온다연은 마치 물처럼 부드럽게 녹아내렸다.그러나 어느 순간 꿈의 장면이 바뀌었다.모든 것이 사라지고 눈송이가 휘날리는 추운 풍경으로 바뀌었다.얼음장 같은 바람이 살을 에는 듯했고 하늘은 잿빛으로 흐려 있었다.그녀는 복도의 입구에 서 있었고 복도 끝에는 작은 아이가 서 있었다.그 아이는 남루한 옷을 입고 있었고 추운 겨울에도 맨발이었다. 작은 발은 어느새 새빨갛게 얼어있었다.아이의 손에는 더 작은 아이의 손이 잡혀 있었다.더 작은 아이는 온다연을 보더니 조심스럽게 그 아이 뒤에 숨었다.그리고 작은 머리만 빼꼼히 내밀어 그녀를 쳐다보았다.온다연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곧 마치 무엇에 이끌리듯 그녀는 그들에게 다가갔다.그녀를 본 작은 아이는 이내 눈
온다연이 사라진 것을 알자마자 아이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며 소리쳤다.“다 아빠 때문이에요! 아빠가 겁만 안 줬으면 도망가지 않았을 거라고요!”유강후도 속이 타고 화가 나서 소리쳤다.“네가 울고불고 소란만 피우지 않았으면 달아났겠어?”아이는 그 말에 더욱 화가 나서 갑판에 주저앉아 버릇없이 울며 떼를 썼다.“내가 찾았단 말이에요! 아빠가 못 찾은 걸 내가 찾았는데 아빠가 겁줘서 도망가게 했잖아요! 아빠가 책임요! 돌려달라고요!”“모두 엄마가 있는데 나만 없었어요! 겨우 찾았는데 아빠가 또 놓쳐버렸잖아요! 아바가 무능해서 그런 거예요!”유강후는 그녀를 쫓아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지만 아이가 계속 소란을 피워 참을 수가 없었다.하여 화를 억누르며 으름장을 놓았다.“지금 찾으러 갈 거야. 너는 여기 위층에 가서 기다려! 네가 울어서 도망간 거니까 못 찾으면 너 바다에 던져버릴 줄 알아!”이 말을 들은 아이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나도 같이 갈래요!”유강후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넌 따라오면 발목만 잡을 뿐이야!”아이는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맨날 사진만 들여다보고도 못 알아봤으면서! 내가 먼저 찾지 않았으면 또 놓쳤을 것 아니에요?! 근데 내가 발목을 잡는다고요? 이렇게 멍청해서 어떻게 돈을 번 건지 모르겠네요!”둘은 서로의 핑계를 대며 초조하게 온다연을 찾아 나섰다.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마치 이 세상에서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 것이었다.그도 그럴 것이 그 시각 온다연은 이미 진씨 가문 헬리콥터를 타고 진씨 가문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그날 크루즈에는 많은 손님들이 있었고 크고 작은 헬리콥터들이 이착륙을 반복하고 있었다.진씨 가문의 헬리콥터는 그중 하나로 특별히 눈에 띄지 않았다.온다연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쓰러질 듯한 기분으로 벽에 기대며 숨을 골랐다.가슴이 아직도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그녀는 창가로 다가가 멀리 보이는 바다를 바라보았다.거대한 크루
다만 그의 눈빛은 지나치게 차가웠다. 마치 사람을 천 리 밖으로 밀어내는 듯한 냉정함과 거리감이 느껴졌다.왜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눈을 보는 순간 온다연의 가슴이 다시 답답하게 조여왔다.게다가 남자가 점점 다가오자 그의 강렬한 존재감에 압도당해 숨이 막힐 것 같았다.온다연은 황급히 아이를 내려놓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꼬마야, 가족 왔으니까 난 먼저 갈게.”하지만 아이는 그녀의 다리를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유강후는 자신의 아들이 낯선 여자아이의 다리를 붙잡고 놓지 않는 모습을 보고 잠시 멍해졌다.아이는 사실 평소에 낯을 많이 가려서 자신과 장화연 외에는 누구에게도 가까이 가지 않았다.그런데 지금은 낯선 여자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으니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그는 본능적으로 그녀를 한 번 더 바라봤다.그러나 보이는 건 고개를 숙인 채 옆모습만 드러난 평범한 얼굴이었다.특별할 것 없이 평범해 보였지만 그녀는 유강후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그가 한 걸음 다가가면 그녀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결국 난간 근처까지 물러난 뒤, 그녀는 아이의 손을 억지로 떼어내고는 도망치듯 달아났다.그러자 아이는 눈에 금세 눈물이 고여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엄마!”그녀는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잠시 아이를 돌아봤지만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달아났다.하지만 그 짧은 순간,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 유강후는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순간, 그의 가슴이 어딘가에 세게 부딪힌 듯했다.그녀의 눈. 그 눈은 온다연의 눈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조명이 밝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 속에는 깊고 따뜻한, 샘물이 고인 듯한 투명함과 애틋함이 담겨 있었다.잠시 멍하니 있다가 유강후는 재빨리 앞으로 달려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온다연은 온몸이 경직되어 그의 손을 필사적으로 뿌리치려 했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이내 두려움에 온다연의 몸은 떨리기 시작했다.그녀는 유강후가 너무도 두려웠다.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