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정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며, 진구를 훑어보았다.“네 꼴 좀 봐. 이게 보호한다고 하는 사람이야?”진구는 순간 당황했지만, 곧 반박하려 했다. 그러나 유진이 이미 신발을 신고 다가와 진구의 팔을 가볍게 당겼다.“그만해요. 물이나 가져가서 방연하한테 줘요.”오늘은 다 같이 놀러 온 날이었다. 괜한 싸움으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진구는 속으로 불만이 있었지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물통을 들고 캠핑장으로 돌아갔다. 은정은 시선을 내리깔아, 바짓단을 걷어 올린 채 드러난 유진의 가녀린 종아리를 보았다.은정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밤이 되면 산속은 금방 쌀쌀해져. 바짓단 내려.”유진은 털썩 쪼그려 앉아 바짓단을 내리면서,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우리 아빠보다 더 간섭이 심하네.”이에 은정은 표정을 굳히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둘은 조용히 캠핑장으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유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삼촌, 저도 알아요. 제가 어려 보일 수도 있고, 예의상 저를 챙겨 주는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굳이 삼촌처럼 저를 돌볼 필요는 없어요.”은정은 유진의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난 널 조카처럼 생각한 적 없어.”임유진은 눈썹을 찌푸렸다.“그러면 왜 이렇게 저한테 간섭해요?”은정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널 안전하게 지켜주기 위해서.”유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어이없다는 듯 작게 중얼거렸다.“정말이지, 감사하네요.”유진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저 충분히 잘 지내고 있어요. 그러니까, 너무 간섭하지 말아 주세요. 제발요?”유진은 성인이었고, 혈연도 아닌 사람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관리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은정은 그녀의 애써 짓는 미소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그의 짙은 눈동자가 깊이를 더하며, 차분하게 말했다.“안 돼.”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답답한 듯 발걸음을 재촉했다. 일부러 은정과 거리를 두고 앞서 걸었다.은정은 그녀가 토라진 듯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유진은 진구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다가, 문득 옆에서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는 은정을 흘깃 바라보았다. 은정은 말없이 앉아, 혼자서 술을 기울이고 있었다.입술을 살짝 깨문 유진은 구운 스테이크 한 접시를 들고 그의 자리로 갔다.“저녁 내내 거의 안 드신 거 같아서요. 고기 좀 드세요.”“고마워.”은정은 접시를 받으며 짧게 답했고, 유진은 머뭇거리며 말했다.“아까 제가 좀 심하게 말한 것 같아요. 알아요, 삼촌이 저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은정은 접시를 집어 들다가 유진을 올려다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러니까, 네가 틀렸다는 걸 인정하는 거야?”유진은 바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그건 아니죠!”유진은 은정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덧붙였다.“고기 드세요! 랍스터도 곧 다 익을 텐데, 나중에 가져다드릴게요.”은정은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도 좀 쉬어. 내가 먹고 싶으면 스스로 가져가면 돼.”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서 방연하와 여진구에게 다시 합류했다.한편, 멀지 않은 곳에서 나영하와 오예나도 바비큐를 하고 있었다. 둘은 일부러 크게 떠들며, 이쪽의 관심을 끌려고 했다. 그러던 중, 또 차 한 대가 캠핑장에 들어왔다.그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젊은 커플처럼 보였고, 둘은 영하와 예나의 맞은편에 텐트를 설치하기 시작했다.영하는 자연스럽게 다가가 도와주었고, 직접 만든 바비큐까지 나눠 주었다. 그러는 사이, 영하는 어느새 그 커플과도 친해진 듯 보였다.유진은 영하가 양쪽을 오가며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조용히 영하를 바라보자, 연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신경 쓰지 마. 그냥 우리끼리 즐기자.”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하는 맥주를 반병쯤 비우고는, 은정을 향해 장난스럽게 물었다.“연애 몇 번이나 해보셨어요?”은정은 낮고 깊은 목소리로 답했다.“한 번도 없어.”유진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
“됐어요!”진구가 갑자기 말했다.“그만 싸워요. 이런 논쟁은 아무 의미 없으니까!”“그러면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해보죠.”연하가 물었다.“선배는 어떤 스타일의 여성을 좋아하시나요?”이에 진구는 주저 없이 말했다.“임유진 같은 사람!”연하는 바로 덧붙였다.“그럼 두 분이 사귀는 게 낫겠네요!”유진은 마시던 주스에 사레가 들렸다.“농담하지 마! 나랑 선배는 절친이야. 우정은 소중한 거라고!”진구는 일부러 가슴을 툭 치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봤지? 유진이는 나한테 전혀 관심 없어!”유진이 웃으며 말했다.“나 억울하게 만들지 마. 이건 관심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야!”연하가 다시 물었다.“그럼 유진은 어떤 스타일의 남자친구를 원해?”유진은 잠시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눈에 띄는 사람이 좋아. 첫눈에 끌리는, 깨끗하고 단정한 스타일?”‘깨끗하고 단정한 남자?’은정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자신이 샤부샤부 가게에서 보였던 모습을 떠올렸다. 이에 연하가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간단해? 다른 조건은 없어? 예를 들면 성격이나 나이, 학벌이나 집안 같은 거?”유진은 의자 위로 두 발을 올리고 한 손으로 무릎을 감싸며 주스 잔을 들고 진지하게 생각했다.“성격은 밝은 사람이 좋고, 나이는 나보다 많아도 돼. 근데 다섯 살 이상 차이 나면 대화가 잘 안 통할 것 같아.”“학벌은 나랑 비슷하면 되고, 집안은 별로 신경 안 써.”은정은 묵묵히 임유진을 바라보며 깊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말하는 조건들이 하나같이 자신을 완벽하게 피해 가고 있었다.진구는 흥분한 듯 말했다.“그럼 나는 너한테 딱 맞는 사람인데?”유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웃었다.“그러네요. 그런데 왜 난 선배한테 끌리지 않을까요?”진구는 막 피어나려던 미소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에 연하는 옆에서 크게 웃었다. 심지어 조금 전까지 기분이 안 좋았던 은정조차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진구는 은정의 조소를 감지하고 다시 불타올랐다. 일부러
‘2천만 원!’ 송연석은 막 졸업해 취업을 준비 중이었다. 일을 해도 1년 연봉이 2천만 원 좀 넘는다 싶은데, 어떤 사람은 한 달 용돈이 2천만 원이라니. 도저히 비교할 수가 없었다.영하는 더욱 점잖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아빠가 저를 많이 아껴 주셔서, 조금이라도 고생하는 걸 못 보시거든요.”연하는 유진을 힐끗 보았다. 마치 선생님 앞에서 웃긴 이야기를 듣고도 꾹 참고 있는 학생처럼, 웃음을 참느라 애쓰고 있었다.영하는 다시 물었다.“랍스터는 어디에 두면 될까요?”연하는 영하가 들고 있는 냉동 랍스터를 흘끗 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바비큐 그릴 옆에 보온 상자가 있어요. 거기에 넣어 둬요.”“알겠어요!”영하는 가볍게 웃으며 랍스터를 들고 가다가 보온 상자 안을 보고는 순간 굳어버렸다. 그 안에는 살아 있는 프랑스산 블루 랍스터가 가득 들어 있었다. 자신이 가져온 냉동 랍스터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그제야 영하는 깨달았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자신보다 더 부유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방금 했던 말이 떠오르며, 연하 일행이 자신을 비웃고 있을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랍스터를 보온 상자의 찬물에 넣고 돌아와 태연하게 말했다.“이따가 내가 구워 줄게요!”그 커플 중 남자는 송연석, 여자는 하명아로 올해 갓 졸업한 신입생이었다. 취업을 준비하기 전에 여행을 다니고 있었다.두 사람 모두 풋풋하고 순수해 보였다. 둘 덕분에 연하 일행도 내쫓을 수 없었다. 모두 함께 둘러앉아 각자 가져온 음식을 나누며 식사를 시작했다.연석과 명아는 평범한 대학생들이었기에, 가져온 음식도 빵이나 햄 같은 인스턴트식품뿐이었다. 연석은 자신들이 가져온 육포 한 상자를 영하에게 건넸다.영하는 한 번 쳐다보더니, 눈에 싫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면서도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집에서는 이런 건 먹지 않아요. 그래도 고마워요.”연석은 당황하며 손을 거두었다. 명아도 원래 유진에게 두부 간식을 주려 했지만,
이에 영하는 장난스럽게 말했다.“나 요리사 자격증도 땄어. 프로니까 내가 만든 요리를 기대해 봐!”영하는 바비큐 그릴 쪽으로 가서 몸을 숙여 랍스터를 집으려다가 잠시 망설이더니, 결국 블루 랍스터 한 마리를 꺼내 들었다.“연석 씨, 와서 이거 좀 도와줘요!”연석은 바로 대답하며 다가갔다. 예쁘고 돈 많은 영하 앞에서 약간 주눅이 든 듯, 머뭇거리며 물었다.“이거 어떻게 손질해야 해요?”영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미 담가서 씻어 놨어요. 먼저 여기에 칼집을 넣고, 그런 다음 여기서부터 잘라야 해요.”영하는 연석에게 랍스터를 들게 하고, 자신은 가위를 들고 직접 시범을 보였다. 두 사람은 가까이 붙어 있었고, 송연석은 그녀의 향수 냄새를 맡으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얼굴까지 붉어진 그는 그녀의 말 세 마디 중 한 마디밖에 들리지 않았다. 연하는 바비큐 쪽 상황을 곁눈질하며, 명아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이 나영하라는 여자는 예쁜 얼굴을 믿고 어디서든 남자를 유혹하는 게 습관인가 보네.’‘구은정을 유혹하려다 실패하고, 선배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자 바로 목표를 바꾼 건가? 게다가, 여자친구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말이야.’연석도 별로 의지가 강한 타입은 아닌 듯했고, 곧 영하에게 넘어갈 것 같았다.연하는 살짝 몸을 기울여 유진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갑자기 보니까 우리 선배랑 은정 씨, 꽤 괜찮은 사람들 같아.”유진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물었다.“갑자기 왜 그래?”연하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곧 알게 될 거야.”영하는 손질한 랍스터를 바비큐 그릴 위에 올려놓고 갑자기 말했다.“화장실 좀 다녀와야겠어요. 그런데 저쪽 너무 어둡다.”캠핑장 화장실은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고, 가로등도 하나밖에 없어 중간 길은 거의 깜깜했다.이에 연석이 바로 나섰다. “제가 같이 가 드릴게요!”영하는 요염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연석 씨!”두 사람이 함께 어두운 길로 향하자, 명아는 둘의 뒷모습을 바라
영하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아까 상자를 들고 왔을 때는 어두운 조명 덕분에 아무도 제대로 보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대놓고 들켜 버릴 줄은 몰랐다.예나는 순간 당황한 듯한 눈빛을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보온 상자로 다가갔다.뚜껑을 열어 확인하자, 안에는 블루 랍스터 두 마리가 그대로 있었고, 그 옆에 영하가 가져온 냉동 호주 랍스터 한 마리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예나는 멍해진 표정으로 상자를 바라보았다.“랍스터 하나 때문에 사람을 무시한다고?”진구가 더욱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별 대단한 것도 아니구만!”연하는 가볍게 눈썹을 올리며 말했다.“어떤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보물인가 보죠?”예나는 얼굴이 창백해졌다가 금세 붉어졌다. 그러나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자리로 돌아가 영하의 손을 잡아당겼다.“우리 가자! 저 사람들이랑은 말이 안 통해!”진구는 고개를 돌려 연하에게 물었다.“남의 분위기를 망쳐 놓고, 남의 음식까지 가져가려는 건 사과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연하는 바로 맞장구쳤다.“됐어요. 그런 사람들한테 뭘 바라겠어요? 기대할 필요도 없죠.”진구는 아까 나영하가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며 말했다.“가져온 랍스터는 빨리 챙겨 가요. 우리 엄마 냉동 해산물 먹지 말라고 하시거든요.”유진은 두 사람이 이렇게 한마음으로 저격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고개를 숙여 몰래 웃었다.예나는 얼굴이 새하얘지더니 갑자기 화를 내며 다가오려 했다. 그러나 영하가 그녀를 막아섰다.“그만하고 돌아가자!”그렇게 말하고는 예나의 팔을 잡아끌고 자기들 텐트 쪽으로 갔다. 가던 중, 영하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연석에게 보냈다.연석은 그걸 보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명아에게 말했다.“우리도 가자!”명아는 사실 연하와 유진이 더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남자친구가 가자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유진 씨, 연하 씨, 우리도 돌아갈게요.”연하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
은정은 여진구의 비꼬는 말에도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유진만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직접 선택해. 누구랑 팀이 될지.”은정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깊고 어두운 눈빛은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절대 방연하랑 한 팀이 되도록 하지 마.’유진은 재빨리 머리를 굴리더니 웃으며 말했다.“우리 각자 혼자서 하면 되잖아요. 팀 안 짜고 그냥 개인전으로요!”연하는 바로 카드를 섞으며 말했다.“그럼 골드 플러시로 하죠. 혼자서 자기 패만 보고 운에 맡기는 거죠.”“좋아!”유진은 누구보다 빠르게 동의했다. 그렇게 규칙을 정하고 게임이 시작되었다.몇 라운드가 지나자, 진구의 얼굴에는 다섯, 여섯 개의 종이쪽지가 붙어 있었다. 쪽지마다 귀여운 거북이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진구가 한숨을 내쉴 때마다 쪽지들이 펄럭였고, 이를 본 유진과 연하는 배를 잡고 웃었다.진구는 눈살을 찌푸리며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는 은정을 노려보았는데,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았다.진구는 몇 판을 해보며 나름대로 패턴을 파악했다. 자신이 나쁜 패를 뽑으면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게 나빴다. 그런데 자신이 좋은 패를 뽑을 때는 항상 누군가 더 좋은 패를 가지고 있었다.‘설마 구은정이 카드 컨트롤을 하는 건가? 하지만 중간중간 유진과 연하가 직접 카드를 섞었는데, 설마 그때도 조작한 건가?’그러나 몇 번 더 해보니, 진구는 연속해서 처참하게 졌다. 속으로 억울했지만, 결국 은정의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연하도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이었다. 은정을 향한 존경심이 더 깊어지며, 진구의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보며 낄낄 웃었다.“누군가 지금 제대로 망신당했네?”유진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착한 마음으로 진구의 어깨를 두드렸다.“선배, 오늘 운이 너무 안 좋네요. 그럼 이렇게 해요, 다음 판에서도 지면 내가 대신 쪽지 붙여 줄게요!”진구는 감동하여 눈물이 그렁그렁했다.“역시 유진이가 제일 좋아!”그런데 다음 판에서는 연하가 졌다....게임이 계속되면서, 종이쪽
흥성산에 있었을 때, 유진은 은정에게 불평했다. 일출 보러 갈 때 왜 나한테 말 안 했냐고. 이번에는 함께 갈 수 있었지만 유진은 기지개를 켜며 별로 관심 없다는 듯 부드럽게 거절했다.“저 아침에 일어날 자신 없어요!”은정은 잠시 말없이 서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유진이 좋아하는 건 일출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랑 함께 보는 것이었다.왜 은정은 항상 유진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까? 설령 이해했더라도,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제야 알았다.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유진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전 잘게요! 은정 오빠도 일찍 자요.”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밤에는 기온이 많이 떨어지고 습기가 심해. 꼭 침낭 덮고 자.”“알았어요!”유진의 목소리에는 벌써 졸린 기운이 묻어났고, 유진은 몸을 돌려 텐트로 들어갔다.유진이 들어가기 전, 무심코 나영하 쪽을 힐끗 보았다. 둘과 함께 있는 사람들은 아직 잠들지 않았고, 세 명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그중 한 명은 송연석이었고, 그의 여자친구 하명아는 보이지 않았다.유진은 살짝 고개를 갸웃하다가, 몸을 낮춰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연하는 술에 취해 깊이 잠들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연하를 들어서 옮겨도 모를 것처럼 완전히 곯아떨어졌다.유진은 조용히 텐트 안의 등을 끄고, 침낭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피곤해서 금방 잠이 들 줄 알았는데, 막상 누워 보니 잠이 오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몸을 돌려 밖을 내다보았다.캠핑장 의자에 앉아 있는 실루엣이 보였는데, 은정이었다.‘아직 안 자네. 뭔가 고민이 있는 걸까?’항상 말이 없고 냉정한 사람이었지만, 가끔은 의외로 감정이 깊어 보였다. 유진은 문득 은정이 자신에게 줬던 팔찌를 떠올렸다. 어둠 속에서 주머니를 뒤적이며 그것을 꺼냈다.차가운 은 장식이 손끝에서 미묘한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표면의 문양을 천천히 더듬자, 어렴풋한 기억이 떠올랐다.누군가가 말했던 것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장효성이 출장 갔다가 돌아왔거든요. 오늘 우리 집에 들른다고 했어요.”여진구는 오늘 일정을 확인하더니 웃으며 말했다.“그럼 나도 저녁에 갈게. 술이랑 음료, 저녁까지 내가 다 챙길게!”유진은 웃으며 말했다.“좋아요! 그럼 연하랑 효성한테 단톡방에서 말할게요.”진구는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그런데 요즘 그 이웃, 또 널 귀찮게 하진 않았어? 남자야, 여자야? 얼굴은 봤어?”“그 사람은...”유진이 막 대답하려던 찰나,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온 사람은 기획팀 부장이었고, 업무 보고를 하러 온 참이었다.유진은 잡담을 멈추고, 진구에게 먼저 일 보라고 한 뒤, 자리를 나섰다. 사장실에서 나와 걸으면서 유진은 속으로 생각했다.‘이웃이 구은정 삼촌이라는 걸 선배가 알면 어떤 반응일까?’오후.은정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저녁 약속이 생겨서 좀 늦게 들어간다며, 애옹이를 잘 부탁한다고 했다.은정은 예전부터 애옹이를 돌보던 도우미 아주머니를 그만두게 했고, 그 뒤로는 그가 자리를 비우면 애옹이를 돌보는 일은 자연스럽게 유진의 몫이 되었다.마침 오늘은 집에 친구들이 오기로 되어 있어 은정에게 수업할 시간도 없었는데, 잘 됐다 싶었다.유진은 메시지를 보냈다.[퇴근하고 애옹이 우리 집으로 데려갈게요. 집에 올 때 데리러 오세요.]은정이 보냈다.[응. 저녁은 밖에서 먹을 테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어.]유진은 은정이 보낸 메시지를 보며, 다시 묘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곧 누가 다가와 업무 얘기를 꺼냈고, 그녀는 휴대폰을 내려놓은 채 은정에게 답장하는 것도 잊어버렸다.퇴근 후, 진구를 포함한 몇 명이 유진의 집에서 모였다. 해외에서 돌아온 효성이 모두에게 선물을 준비해 왔고, 진구까지 빠짐없이 챙겼다.유진은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앉아 있으라 하고, 옆집에서 애옹이를 데리고 왔다. 그리고 먼저 간식을 먹이며 애옹이를 달랬다.“고양이 너무 귀여워! 어디서 데려온 거야?”고양이를 좋아하는 연하가 애옹이
“열나는 거 아니야?”구은정이 손을 들어 임유진의 이마에 닿으려 했다. 유진은 고개를 저으려다, 따뜻한 손바닥이 이마에 닿는 순간 겁이 나서 몸을 멈췄다.“괜찮아. 열은 없네.”은정은 손을 거두며, 자연스럽게 덧붙였다.“내일이나 모레 비 온대. 날도 추워질 테니까 출근할 땐 따뜻하게 입고.”“네.”유진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들어가.”은정은 유진의 얼굴빛이 아직도 어두워 보이자, 아무 일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재채기라는 건 누군가에게 마음이 생기는 것처럼 제어할 수 없는 거니까, 굳이 미안해할 필요 없어.”그는 자기 책을 정리하면서 툭 던지듯 물었다.“내일 아침엔 뭐 먹고 싶어?”은정의 담담한 태도 덕분에 유진도 점차 긴장이 풀렸다. 조금 전의 상황도 잊은 듯 웃으며 말했다.“건너편 가게의 호떡이랑, 만두요! 치즈 들어간 거로!”은정은 잔잔하게 웃었다.“알겠어. 일찍 자. 내일 아침에 내가 사다 줄게.”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 삼촌도 일찍 쉬세요!”애옹이는 눈을 반쯤 뜬 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가 나가는 걸 보고 아쉬운 듯 두어 번 울었다.“착하지, 얼른 자. 내일 보자!”유진은 애옹이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유진의 표정은 생기 있었고, 목소리는 맑고 귀에 감겼다.애옹이를 달랜 후, 유진은 은정에게 미소로 작별 인사를 건넨 뒤 집으로 돌아갔다.이번엔 은정이 현관까지 배웅하지 않았다. 앉아 있을 때야 그나마 괜찮지만, 함께 일어나면 서로 민망해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괜히 유진이 다음에 또 오기 꺼려질 수도 있었으니까.문이 닫히고 나서야, 은정 길게 숨을 내쉬었다. 옆에 있던 얼음물 병을 들어 반쯤 단숨에 들이켜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조금 전 유진이 당황하던 모습이 자꾸 떠올라 웃음이 났다. 애옹이가 그의 무릎 위로 올라와 하품하며 몸을 늘어뜨렸다. 그는 애옹이의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유진의 생각뿐이었다.조금 전 그녀가 나갔을 뿐인데
저녁 식사를 할 때까지도 유진의 귀 끝은 여전히 붉었다.마침 은정이 자연산 농어를 쪄서 내왔는데, 아까 유진에게 다가왔던 것도 이걸 간장조림으로 할지, 찜으로 할지 물어보려던 참이었다.유진은 찜으로 조리된 생선을 한 입 먹어보았다. 살점이 부드럽고 신선해서 비린내 하나 없이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그녀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생선 냄새 너무 좋아요!”은정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애옹이 간식보다 더 맛있어?”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볼이 부풀 정도로 화가 난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애옹이 간식이 더 맛있거든요!”은정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다음엔 애옹이 간식 살 때, 두 봉지 사야겠네.”얼굴에 철판 깐 지 오래라고 생각한 유진도 결국 푸하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고개를 든 은정은, 조금 전까지 웃음이 어린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진의 반짝이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며,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식사가 끝나고 나자, 은정이 식탁을 치우고, 유진도 자청해서 거들었다. 남은 재료들을 냉장고에 정리한 뒤, 유진은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오는 주방 쪽으로 돌아섰다.유진은 등을 조리대에 기대고 애옹이를 품에 안고 장난을 치고 있었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자, 은정이 소매를 걷은 채 설거지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은은한 회색 셔츠의 소매가 팔꿈치까지 올라가 있었고, 전완근이 드러났다. 그의 동작은 느긋하면서도 단정했고, 어딘가 나른한 멋이 묻어났다.맞춤형 정장 바지까지 갖춰 입은 모습은 단정하면서도 날렵했다. 은정의 길고 탄탄한 다리와 넓은 어깨, 단단한 상체가 균형을 이룬 체형이 눈에 띄었다.예전에 유진은 방연하에게 왜 그렇게 구은정을 좋아하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방연하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거칠고 야성미가 넘치면서도 퇴폐적인 페로몬이 있다며 능글맞게 웃었다.유진은 그 말을 듣고 비웃었었다. 페로몬은 무슨, 그냥 몸이 좋은 거라고 하자 연하는 유진이 잘 몰라서 그렇다며 웃
“그러니까, 넌 왜 받은 거야?”은정은 낮고 깊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한 번 받으면, 그 뜻을 인정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계속 오해하게 만들겠다는 거지?”유진은 입술을 깨물었다.“이제 알았어요. 다음에 여진구 선배한테 확실히 말하고, 더는 안 받을게요.”은정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칼을 들어 채소를 썰기 시작했다.“그래. 그럼 이제 나가서 놀아.”유진은 주방을 나가려다가 문득 뭔가 떠오른 듯 걸음을 멈췄다.“잠깐만요, 삼촌, 그러면 삼촌은요?”은정은 손을 멈추고 천천히 유진을 돌아보았다.“뭐?”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장난스럽게 물었다.“나한테 잘해주는 이유는 뭐예요? 삼촌도 나한테 무슨 목적 있는 거 아니죠?”은정은 잠시 말이 없다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네가 나한테 수업해 주니까.”이에 유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와, 진짜 솔직하네.”은정은 단호하게 말했다.“너한테는 가식 떨 필요 없으니까.”유진은 은정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가슴이 살짝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하지만 애써 웃으며 넘겼다.‘아냐, 원래 저 사람 성격이 저런 거야.’그러고는 애옹이를 꼭 안고 거실로 돌아갔다.유진은 퇴근길에 들른 펫숍에서 애옹이의 새 옷과 장난감을 몇 개 사 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애옹이에게 한 벌씩 입혀 보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애옹이는 무척 순순히 유진에게 협조했다.마지막으로 핑크색 레이스 원피스를 입혔을 때, 은정이 부엌에서 접시를 들고 나왔다. 그는 애옹이의 차림을 보고, 한순간 멈칫했다.유진은 애옹이를 들어 올려 은정에게 보여주며 말했다.“어때요? 예쁘죠?”은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가 좋으면 됐어.”그러자 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이건 철저히 삼촌 같은 빠꾸 없는 상남자의 취향에 맞춘 코디예요.” 그러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빠꾸 없는 상남자 취향?”“그렇죠! 핑크색, 반짝이, 공주풍 스타일을 좋아하는 거.”유진이 장난
하루가 금세 지나갔다. 평소처럼 임진은 부서 동료들과 함께 야근했다. 유진은 자기 일을 사랑했고, 늦게까지 일하는 것에 대해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자꾸만 시간을 확인하게 되었다.창밖이 점점 어두워지는 게 유난히 지루하게 느껴졌다.‘이거 혹시 애옹이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걸까?’마침내 모든 업무를 마치고 퇴근할 시간이 되자, 유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서둘러 짐을 챙겼다.그때, 여진구가 다가와 삼계탕이 담긴 보온 용기를 건넸다.“우리 엄마가 오후에 보내주신 거야. 저녁에 가서 먹어.”그러나 유진은 얼른 손을 저었다.“아니요, 선배 어머니가 주신 건데 제가 어떻게 받아요?”“뭐 이렇게 딱 잘라 거절해?”진구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농담이야. 두 개 보내주셨거든. 하나는 너 주려고 한 거야. 오후에 너무 바빠서 이제야 전해주네.”그 말에 유진은 그제야 받아들었다.“그럼, 이모께 꼭 감사하다고 전해줘요!”“무슨 새삼스럽게.”진구는 일할 때 끼는 얇은 금테 안경을 썼는데, 더 똑똑하고 멋있어 보였다.“집에 가서 따뜻하게 먹어.”“알겠어요!”유진은 손을 흔들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진구는 유진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라지는 걸 보며 가만히 미소 지었다.한편, 옆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진소혜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가방을 챙겨 다가왔다.“사장님, 오늘 차 안 가져왔어요. 혹시 태워다 주실 수 있을까요?”그러자 진구는 순간 표정이 굳었다.“회사 근처에 집 구한다고 하지 않았나요?”그 말에 소혜는 잠시 당황했지만, 빠르게 대답했다.“어머니가 오늘은 집으로 오라고 하셨어요!”진구의 태도는 이미 냉대하는 태도였다.“난 아직 볼 일이 있어서요. 오늘 택시비 회사에서 처리해 줄 테니까 그렇게 가요.”진구는 말을 끝내고 곧장 사무실로 돌아갔다.소혜는 주변을 지나가는 동료들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는 걸 보며 민망한 듯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유진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옆집 문이 열렸
은정은 안으로 들어오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양치 끝내고 와서 아침 먹어.”임유진은 그의 짙은 색 운동복 차림을 보고, 칫솔을 문 채로 웅얼거렸다.“조깅 갔다 왔어요?”“응.”은정은 식탁 쪽으로 걸어가며 무심히 물었다.“내일 같이 갈래? 천천히 걸어도 돼.”그러나 유진은 단호하게 거부했다.“싫어요! 난 더 자야 한단 말이에요.”유진이 이 동네로 이사 온 이유는 출근 시간을 줄이고 아침잠을 더 자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새벽부터 조깅이라니? 그건 차라리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이에 은정이 낮게 웃었다.“게으름뱅이.”은정의 목소리는 어딘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이에 유진은 순간 심장이 두근거리는 느낌을 받았다.‘이거 뭐야?’유진은 그 감정을 애써 무시하며 고개를 돌려 애옹이를 쓰다듬고는 욕실로 향했다. 세면대 앞에서 거울을 보며 양치하다 말고 생각했다.‘뭔가 이상한데?’하지만 정확히 뭐가 이상한지는 알 수 없었다. 양치와 세수를 마친 후, 유진은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식탁으로 나왔다.은정은 마치 자기 집에서처럼 자연스럽게 식기를 정리하고 있었고, 유진은 식탁 위에 놓인 음식들을 보고 기분이 좋아졌다.유진이 좋아하는 샌드위치와 군만두였다.“오! 아침 메뉴 마음에 드네요!”애옹이는 테이블 위로 올라와 유진을 바라보자, 유진은 샌드위치에서 햄을 꺼내 애옹이에게 건넸다. 그리고 은정은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아침 햇살이 부드럽게 스며든 공간에서, 유진이 밝은 얼굴로 애옹이를 쓰다듬으며 웃고 있었다. 그 순간, 은정은 문득 상상했다.‘만약 우리가 가족이 되어 아이가 있었다면?’이런 맑은 아침, 자신이 아침을 사 오면 유진이 똑같이 아이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고,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그러다가 유진이 은정을 올려다보며 물었다.“왜요? 애옹이한테 주면 안 돼요?”이에 유진은 정신을 차리고 담담하게 말했다.“아니야. 괜찮아.”유진은 샌드위치를 조금 더 먹인 후, 숟가락을 들어 수프를 한 모금 마
은정은 유진의 행동을 지켜보며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면 네가 가끔 애옹이를 돌봐줘. 퇴근하고 일찍 들어오면 밥도 챙겨주고. 이따가 출입문 비밀번호를 네 폰으로 보내줄게.”유진은 애옹이를 너무 좋아해서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좋아요!”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그렇게 하자.”사실 은정은 유진과 같은 날 이 집을 계약했다. 원래는 유진이 혹시라도 좋지 않은 이웃을 만나면 곤란할까 봐 옆집을 함께 구매했던 것이다. 애초에 이곳에 살 계획은 없었다.하지만 가족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고, 그 과정에서 구은태와도 이야기를 나눴다. 돌아온 이상, 회사를 제대로 맡고 가족 곁에 머물겠다고.그러나 서선영 모녀가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켜 은정의 인내심을 시험했고, 그는 결국 이곳으로 나오는 명분을 얻었다.식사가 끝난 후, 유진은 스스로 식탁을 정리하고는 말했다.“그럼 전 이제 가볼게요.”은정은 시계를 보고 나직이 말했다.“가서 일찍 자.”“알겠어요!”유진은 해맑게 웃으며 애옹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애옹아, 잘 있어!”하지만 애옹이는 유진의 다리를 끌어안으며 놓아주지 않았다. 이에 유진은 웃으며 말했다.“너 정말 애교가 많구나!”은정은 몸을 숙여 애옹이를 들어 올렸다. 그의 깊은 눈빛이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을 품고 있었다.“얘는 원래 낯을 많이 가려. 한 번 상처받은 적이 있어서 사람을 쉽게 믿지 않아. 그런데 너한테만 이렇게 굴어. 넌 예외야.”유진은 기뻐하며 말했다.“봐요, 역시 우리 궁합이 잘 맞는다니까요!”그 말에 은정은 살짝 웃었다.“그래, 너희는 특별한 인연이 있나 봐.”유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문득 애옹이가 혹시 은정의 여자친구가 키우던 고양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성격을 봤을 때, 스스로 고양이를 키울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묻지 않았다. 그냥, 어떤 상처도 들추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럼 전 진짜 가볼게요!”유진은 노트북과
임유진은 손을 뻗어 저녁을 집어 들었다.“괜찮아요. 집에 가서 데워 먹으면 돼요!”하지만 구은정이 유진의 손을 막아섰다.“차가워진 건 그냥 먹지 마. 내가 뭐 좀 만들어 줄게.”“그럴 필요까지야!”유진은 조심스럽게 거절했지만, 은정은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며 자연스럽게 주방으로 걸어갔다.“괜찮아. 나도 아직 저녁 안 먹었어. 그리고 너 오늘 하루 종일 애옹이를 봐줬잖아. 그 정도는 고맙다고 해야지.”유진은 따라가면서 무심결에 물었다.“구은정 아니, 삼촌! 요리도 할 줄 알아요?”말을 내뱉고 나서야 유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은정이 처음으로 그녀에게 저녁을 가져다줬을 때, 유진은 그걸 별 의심 없이 먹었었다. 이제야 문득 궁금해졌다. 유진은 은정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처음부터 옆집에 내가 이사 온 거 알고 있었던 거예요?”은정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딱 잘라 말했다.“아니.”“그런데 왜 저녁을 챙겨 줬어요?”은정의 냉장고 문을 여는 손이 잠시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유진을 돌아보며 대답했다.“그날 관리사무소 직원이 와서 새 이웃이 이사 왔다고 하더라고. 이웃 관계 잘 만들어 놓으려고 챙긴 거지.”“아, 그런 거였구나!”유진은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내가 준 디저트는 봤어요?”“응. 먹었어.”유진은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즉흥적으로 집을 사기로 결심했는데, 옆집이 알고 보니 은정이었다. 그것도 서로의 정체를 모른 채로 음식까지 주고받았다는 게 이상하면서도 묘했다.은정이 냉장고를 뒤지는 모습을 보며 유진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뭐 만들어 줄 건데요?”유진이 처음으로 이사 온 첫날부터, 은정은 유진이 스스로 밥을 해 먹을 줄 모를 거라고 예상하여, 미리 준비해서 보냈다. 그리고서는 은정은 며칠동안 스스로 밥을 해 먹지 않아, 주방에는 계란 몇 개와 토마토 2개 그리고 냉동된 인스턴트 식품들이 있었다.은정은 고개를 돌려 유진에게 물었다.“요 며칠 뭐 먹
애옹이는 밥을 다 먹고도 임유진을 방해하지 않았다. 카펫 위에서 공을 가지고 놀다가, 한참 후에는 유진의 무릎 위에 올라와 셔츠 단추를 장난스럽게 건드렸다.한 시간이 지나, 유진은 작업을 마쳤지만 애옹이의 주인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유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졸음에 취해 있던 애옹이가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크고 동그란 눈망울이 간절한 듯 유진을 올려다보았다.‘이런 눈빛을 보면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잖아.’결국, 유진은 다시 자리에 앉아 애옹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안 가. 네 주인이 올 때까지 기다릴게. 그러니까 얌전히 자.”...한 시간 후, 구은정은 차를 지하 주차장에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다. 엘리베이터가 27층에 멈추자, 그는 걸음을 느리게 했다. 곧 마주할 그녀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면서.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현관에 놓인 크림색 하이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고, 이내 그의 짙은 눈빛이 순간 부드러워졌다.은정은 재킷을 벗고, 손을 들어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실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살짝 멈춰 섰다.방 안은 은은한 조명으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소파 한쪽에 기댄 채, 유진이 곤히 잠들어 있었고, 품에는 애옹이를 꼭 안고 있었다.냉방이 잘 되어 있어 그런지, 유진은 몸을 움츠리고 작은 체구로 고양이를 품에 감쌌다.은정은 조용히 다가가 소파 앞에 앉아 유진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얼굴, 살짝 벌어진 연한 핑크빛 입술. 가슴 한편이 묘하게 간질거렸다.‘얘는 대체 얼마나 경계심이 없는 거야? 남의 집에서 이렇게 깊이 잠들다니! 당장 깨워서 한 소리 해야겠네.’그 순간, 아마도 은정의 기운을 감지했는지 유진의 길고 풍성한 속눈썹을 떨며 천천히 눈을 떴다. 살짝 흐릿한 눈동자가 천천히 초점을 맞추더니,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쳤다.은정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일어났어?”유진은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