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정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며, 진구를 훑어보았다.“네 꼴 좀 봐. 이게 보호한다고 하는 사람이야?”진구는 순간 당황했지만, 곧 반박하려 했다. 그러나 유진이 이미 신발을 신고 다가와 진구의 팔을 가볍게 당겼다.“그만해요. 물이나 가져가서 방연하한테 줘요.”오늘은 다 같이 놀러 온 날이었다. 괜한 싸움으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진구는 속으로 불만이 있었지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물통을 들고 캠핑장으로 돌아갔다. 은정은 시선을 내리깔아, 바짓단을 걷어 올린 채 드러난 유진의 가녀린 종아리를 보았다.은정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밤이 되면 산속은 금방 쌀쌀해져. 바짓단 내려.”유진은 털썩 쪼그려 앉아 바짓단을 내리면서,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우리 아빠보다 더 간섭이 심하네.”이에 은정은 표정을 굳히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둘은 조용히 캠핑장으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유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삼촌, 저도 알아요. 제가 어려 보일 수도 있고, 예의상 저를 챙겨 주는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굳이 삼촌처럼 저를 돌볼 필요는 없어요.”은정은 유진의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난 널 조카처럼 생각한 적 없어.”임유진은 눈썹을 찌푸렸다.“그러면 왜 이렇게 저한테 간섭해요?”은정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널 안전하게 지켜주기 위해서.”유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어이없다는 듯 작게 중얼거렸다.“정말이지, 감사하네요.”유진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저 충분히 잘 지내고 있어요. 그러니까, 너무 간섭하지 말아 주세요. 제발요?”유진은 성인이었고, 혈연도 아닌 사람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관리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은정은 그녀의 애써 짓는 미소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그의 짙은 눈동자가 깊이를 더하며, 차분하게 말했다.“안 돼.”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답답한 듯 발걸음을 재촉했다. 일부러 은정과 거리를 두고 앞서 걸었다.은정은 그녀가 토라진 듯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유진은 진구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다가, 문득 옆에서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는 은정을 흘깃 바라보았다. 은정은 말없이 앉아, 혼자서 술을 기울이고 있었다.입술을 살짝 깨문 유진은 구운 스테이크 한 접시를 들고 그의 자리로 갔다.“저녁 내내 거의 안 드신 거 같아서요. 고기 좀 드세요.”“고마워.”은정은 접시를 받으며 짧게 답했고, 유진은 머뭇거리며 말했다.“아까 제가 좀 심하게 말한 것 같아요. 알아요, 삼촌이 저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은정은 접시를 집어 들다가 유진을 올려다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러니까, 네가 틀렸다는 걸 인정하는 거야?”유진은 바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그건 아니죠!”유진은 은정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덧붙였다.“고기 드세요! 랍스터도 곧 다 익을 텐데, 나중에 가져다드릴게요.”은정은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도 좀 쉬어. 내가 먹고 싶으면 스스로 가져가면 돼.”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서 방연하와 여진구에게 다시 합류했다.한편, 멀지 않은 곳에서 나영하와 오예나도 바비큐를 하고 있었다. 둘은 일부러 크게 떠들며, 이쪽의 관심을 끌려고 했다. 그러던 중, 또 차 한 대가 캠핑장에 들어왔다.그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젊은 커플처럼 보였고, 둘은 영하와 예나의 맞은편에 텐트를 설치하기 시작했다.영하는 자연스럽게 다가가 도와주었고, 직접 만든 바비큐까지 나눠 주었다. 그러는 사이, 영하는 어느새 그 커플과도 친해진 듯 보였다.유진은 영하가 양쪽을 오가며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조용히 영하를 바라보자, 연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신경 쓰지 마. 그냥 우리끼리 즐기자.”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하는 맥주를 반병쯤 비우고는, 은정을 향해 장난스럽게 물었다.“연애 몇 번이나 해보셨어요?”은정은 낮고 깊은 목소리로 답했다.“한 번도 없어.”유진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
“됐어요!”진구가 갑자기 말했다.“그만 싸워요. 이런 논쟁은 아무 의미 없으니까!”“그러면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해보죠.”연하가 물었다.“선배는 어떤 스타일의 여성을 좋아하시나요?”이에 진구는 주저 없이 말했다.“임유진 같은 사람!”연하는 바로 덧붙였다.“그럼 두 분이 사귀는 게 낫겠네요!”유진은 마시던 주스에 사레가 들렸다.“농담하지 마! 나랑 선배는 절친이야. 우정은 소중한 거라고!”진구는 일부러 가슴을 툭 치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봤지? 유진이는 나한테 전혀 관심 없어!”유진이 웃으며 말했다.“나 억울하게 만들지 마. 이건 관심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야!”연하가 다시 물었다.“그럼 유진은 어떤 스타일의 남자친구를 원해?”유진은 잠시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눈에 띄는 사람이 좋아. 첫눈에 끌리는, 깨끗하고 단정한 스타일?”‘깨끗하고 단정한 남자?’은정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자신이 샤부샤부 가게에서 보였던 모습을 떠올렸다. 이에 연하가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간단해? 다른 조건은 없어? 예를 들면 성격이나 나이, 학벌이나 집안 같은 거?”유진은 의자 위로 두 발을 올리고 한 손으로 무릎을 감싸며 주스 잔을 들고 진지하게 생각했다.“성격은 밝은 사람이 좋고, 나이는 나보다 많아도 돼. 근데 다섯 살 이상 차이 나면 대화가 잘 안 통할 것 같아.”“학벌은 나랑 비슷하면 되고, 집안은 별로 신경 안 써.”은정은 묵묵히 임유진을 바라보며 깊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말하는 조건들이 하나같이 자신을 완벽하게 피해 가고 있었다.진구는 흥분한 듯 말했다.“그럼 나는 너한테 딱 맞는 사람인데?”유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웃었다.“그러네요. 그런데 왜 난 선배한테 끌리지 않을까요?”진구는 막 피어나려던 미소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에 연하는 옆에서 크게 웃었다. 심지어 조금 전까지 기분이 안 좋았던 은정조차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진구는 은정의 조소를 감지하고 다시 불타올랐다. 일부러
‘2천만 원!’ 송연석은 막 졸업해 취업을 준비 중이었다. 일을 해도 1년 연봉이 2천만 원 좀 넘는다 싶은데, 어떤 사람은 한 달 용돈이 2천만 원이라니. 도저히 비교할 수가 없었다.영하는 더욱 점잖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아빠가 저를 많이 아껴 주셔서, 조금이라도 고생하는 걸 못 보시거든요.”연하는 유진을 힐끗 보았다. 마치 선생님 앞에서 웃긴 이야기를 듣고도 꾹 참고 있는 학생처럼, 웃음을 참느라 애쓰고 있었다.영하는 다시 물었다.“랍스터는 어디에 두면 될까요?”연하는 영하가 들고 있는 냉동 랍스터를 흘끗 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바비큐 그릴 옆에 보온 상자가 있어요. 거기에 넣어 둬요.”“알겠어요!”영하는 가볍게 웃으며 랍스터를 들고 가다가 보온 상자 안을 보고는 순간 굳어버렸다. 그 안에는 살아 있는 프랑스산 블루 랍스터가 가득 들어 있었다. 자신이 가져온 냉동 랍스터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그제야 영하는 깨달았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자신보다 더 부유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방금 했던 말이 떠오르며, 연하 일행이 자신을 비웃고 있을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랍스터를 보온 상자의 찬물에 넣고 돌아와 태연하게 말했다.“이따가 내가 구워 줄게요!”그 커플 중 남자는 송연석, 여자는 하명아로 올해 갓 졸업한 신입생이었다. 취업을 준비하기 전에 여행을 다니고 있었다.두 사람 모두 풋풋하고 순수해 보였다. 둘 덕분에 연하 일행도 내쫓을 수 없었다. 모두 함께 둘러앉아 각자 가져온 음식을 나누며 식사를 시작했다.연석과 명아는 평범한 대학생들이었기에, 가져온 음식도 빵이나 햄 같은 인스턴트식품뿐이었다. 연석은 자신들이 가져온 육포 한 상자를 영하에게 건넸다.영하는 한 번 쳐다보더니, 눈에 싫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면서도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집에서는 이런 건 먹지 않아요. 그래도 고마워요.”연석은 당황하며 손을 거두었다. 명아도 원래 유진에게 두부 간식을 주려 했지만,
이에 영하는 장난스럽게 말했다.“나 요리사 자격증도 땄어. 프로니까 내가 만든 요리를 기대해 봐!”영하는 바비큐 그릴 쪽으로 가서 몸을 숙여 랍스터를 집으려다가 잠시 망설이더니, 결국 블루 랍스터 한 마리를 꺼내 들었다.“연석 씨, 와서 이거 좀 도와줘요!”연석은 바로 대답하며 다가갔다. 예쁘고 돈 많은 영하 앞에서 약간 주눅이 든 듯, 머뭇거리며 물었다.“이거 어떻게 손질해야 해요?”영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미 담가서 씻어 놨어요. 먼저 여기에 칼집을 넣고, 그런 다음 여기서부터 잘라야 해요.”영하는 연석에게 랍스터를 들게 하고, 자신은 가위를 들고 직접 시범을 보였다. 두 사람은 가까이 붙어 있었고, 송연석은 그녀의 향수 냄새를 맡으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얼굴까지 붉어진 그는 그녀의 말 세 마디 중 한 마디밖에 들리지 않았다. 연하는 바비큐 쪽 상황을 곁눈질하며, 명아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이 나영하라는 여자는 예쁜 얼굴을 믿고 어디서든 남자를 유혹하는 게 습관인가 보네.’‘구은정을 유혹하려다 실패하고, 선배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자 바로 목표를 바꾼 건가? 게다가, 여자친구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말이야.’연석도 별로 의지가 강한 타입은 아닌 듯했고, 곧 영하에게 넘어갈 것 같았다.연하는 살짝 몸을 기울여 유진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갑자기 보니까 우리 선배랑 은정 씨, 꽤 괜찮은 사람들 같아.”유진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물었다.“갑자기 왜 그래?”연하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곧 알게 될 거야.”영하는 손질한 랍스터를 바비큐 그릴 위에 올려놓고 갑자기 말했다.“화장실 좀 다녀와야겠어요. 그런데 저쪽 너무 어둡다.”캠핑장 화장실은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고, 가로등도 하나밖에 없어 중간 길은 거의 깜깜했다.이에 연석이 바로 나섰다. “제가 같이 가 드릴게요!”영하는 요염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연석 씨!”두 사람이 함께 어두운 길로 향하자, 명아는 둘의 뒷모습을 바라
영하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아까 상자를 들고 왔을 때는 어두운 조명 덕분에 아무도 제대로 보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대놓고 들켜 버릴 줄은 몰랐다.예나는 순간 당황한 듯한 눈빛을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보온 상자로 다가갔다.뚜껑을 열어 확인하자, 안에는 블루 랍스터 두 마리가 그대로 있었고, 그 옆에 영하가 가져온 냉동 호주 랍스터 한 마리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예나는 멍해진 표정으로 상자를 바라보았다.“랍스터 하나 때문에 사람을 무시한다고?”진구가 더욱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별 대단한 것도 아니구만!”연하는 가볍게 눈썹을 올리며 말했다.“어떤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보물인가 보죠?”예나는 얼굴이 창백해졌다가 금세 붉어졌다. 그러나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자리로 돌아가 영하의 손을 잡아당겼다.“우리 가자! 저 사람들이랑은 말이 안 통해!”진구는 고개를 돌려 연하에게 물었다.“남의 분위기를 망쳐 놓고, 남의 음식까지 가져가려는 건 사과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연하는 바로 맞장구쳤다.“됐어요. 그런 사람들한테 뭘 바라겠어요? 기대할 필요도 없죠.”진구는 아까 나영하가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며 말했다.“가져온 랍스터는 빨리 챙겨 가요. 우리 엄마 냉동 해산물 먹지 말라고 하시거든요.”유진은 두 사람이 이렇게 한마음으로 저격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고개를 숙여 몰래 웃었다.예나는 얼굴이 새하얘지더니 갑자기 화를 내며 다가오려 했다. 그러나 영하가 그녀를 막아섰다.“그만하고 돌아가자!”그렇게 말하고는 예나의 팔을 잡아끌고 자기들 텐트 쪽으로 갔다. 가던 중, 영하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연석에게 보냈다.연석은 그걸 보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명아에게 말했다.“우리도 가자!”명아는 사실 연하와 유진이 더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남자친구가 가자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유진 씨, 연하 씨, 우리도 돌아갈게요.”연하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
은정은 여진구의 비꼬는 말에도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유진만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직접 선택해. 누구랑 팀이 될지.”은정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깊고 어두운 눈빛은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절대 방연하랑 한 팀이 되도록 하지 마.’유진은 재빨리 머리를 굴리더니 웃으며 말했다.“우리 각자 혼자서 하면 되잖아요. 팀 안 짜고 그냥 개인전으로요!”연하는 바로 카드를 섞으며 말했다.“그럼 골드 플러시로 하죠. 혼자서 자기 패만 보고 운에 맡기는 거죠.”“좋아!”유진은 누구보다 빠르게 동의했다. 그렇게 규칙을 정하고 게임이 시작되었다.몇 라운드가 지나자, 진구의 얼굴에는 다섯, 여섯 개의 종이쪽지가 붙어 있었다. 쪽지마다 귀여운 거북이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진구가 한숨을 내쉴 때마다 쪽지들이 펄럭였고, 이를 본 유진과 연하는 배를 잡고 웃었다.진구는 눈살을 찌푸리며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는 은정을 노려보았는데,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았다.진구는 몇 판을 해보며 나름대로 패턴을 파악했다. 자신이 나쁜 패를 뽑으면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게 나빴다. 그런데 자신이 좋은 패를 뽑을 때는 항상 누군가 더 좋은 패를 가지고 있었다.‘설마 구은정이 카드 컨트롤을 하는 건가? 하지만 중간중간 유진과 연하가 직접 카드를 섞었는데, 설마 그때도 조작한 건가?’그러나 몇 번 더 해보니, 진구는 연속해서 처참하게 졌다. 속으로 억울했지만, 결국 은정의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연하도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이었다. 은정을 향한 존경심이 더 깊어지며, 진구의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보며 낄낄 웃었다.“누군가 지금 제대로 망신당했네?”유진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착한 마음으로 진구의 어깨를 두드렸다.“선배, 오늘 운이 너무 안 좋네요. 그럼 이렇게 해요, 다음 판에서도 지면 내가 대신 쪽지 붙여 줄게요!”진구는 감동하여 눈물이 그렁그렁했다.“역시 유진이가 제일 좋아!”그런데 다음 판에서는 연하가 졌다....게임이 계속되면서, 종이쪽
흥성산에 있었을 때, 유진은 은정에게 불평했다. 일출 보러 갈 때 왜 나한테 말 안 했냐고. 이번에는 함께 갈 수 있었지만 유진은 기지개를 켜며 별로 관심 없다는 듯 부드럽게 거절했다.“저 아침에 일어날 자신 없어요!”은정은 잠시 말없이 서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유진이 좋아하는 건 일출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랑 함께 보는 것이었다.왜 은정은 항상 유진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까? 설령 이해했더라도,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제야 알았다.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유진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전 잘게요! 은정 오빠도 일찍 자요.”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밤에는 기온이 많이 떨어지고 습기가 심해. 꼭 침낭 덮고 자.”“알았어요!”유진의 목소리에는 벌써 졸린 기운이 묻어났고, 유진은 몸을 돌려 텐트로 들어갔다.유진이 들어가기 전, 무심코 나영하 쪽을 힐끗 보았다. 둘과 함께 있는 사람들은 아직 잠들지 않았고, 세 명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그중 한 명은 송연석이었고, 그의 여자친구 하명아는 보이지 않았다.유진은 살짝 고개를 갸웃하다가, 몸을 낮춰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연하는 술에 취해 깊이 잠들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연하를 들어서 옮겨도 모를 것처럼 완전히 곯아떨어졌다.유진은 조용히 텐트 안의 등을 끄고, 침낭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피곤해서 금방 잠이 들 줄 알았는데, 막상 누워 보니 잠이 오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몸을 돌려 밖을 내다보았다.캠핑장 의자에 앉아 있는 실루엣이 보였는데, 은정이었다.‘아직 안 자네. 뭔가 고민이 있는 걸까?’항상 말이 없고 냉정한 사람이었지만, 가끔은 의외로 감정이 깊어 보였다. 유진은 문득 은정이 자신에게 줬던 팔찌를 떠올렸다. 어둠 속에서 주머니를 뒤적이며 그것을 꺼냈다.차가운 은 장식이 손끝에서 미묘한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표면의 문양을 천천히 더듬자, 어렴풋한 기억이 떠올랐다.누군가가 말했던 것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
이날, 임유진은 티타임에 진소혜와 마주쳤다. 소혜는 입술을 다물고 웃으며 말했다.“팀장님, 구씨그룹의 총애를 받으니 우리 부서 실적도 쭉쭉 오르겠죠? 부서 직원들 대신 감사드려요, 팀장님.”유진은 커피를 받아 들고 나가려다, 소혜의 옆을 지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 소혜 씨가 한 거라는 거 알아요. 이미 누가 나한테 말해줬거든요. 그래서 소혜 씨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소혜의 얼굴빛이 살짝 굳어졌고, 고개를 돌려봤을 땐, 유진은 이미 자리를 떠나 있었다.오후 회의에서 유진은 이렇게 발표했다.“이번 평가 기간 동안 곽시양 씨가 업무에 성실히 임했고,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었어요. 따라서 정현준 씨의 직책을 승계하여 부서 부팀장으로 승진해요.”“인사팀에서 곧 공식 공지드릴 예정이에요.”유진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엔 놀라움이 번졌고, 시양 본인조차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부서 내에서도 존재감이 적었고, 입사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으며, 능력이나 실적 모두 소혜에 비해 부족했기에, 시양이 발탁된 건 모두에게 의외였다.소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팀장님, 부팀장 선발 기준이 뭔가요? 기준을 명확히 해주시죠.”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소혜를 응시하며 말했다.“기준? 내 마음대로 정하는 게 기준이라면 기준이겠죠”소혜는 눈을 크게 떴고, 유진은 고개를 돌려 멍하니 있는 시양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시양 씨, 제 사무실로 잠깐 와요.”“네?”시양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소혜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유진을 따라갔다.유진이 회의실을 나서자, 안에서는 수군거림이 폭발했다. 최근 있었던 일로 인해 유진은 여전히 비난의 대상이었고, 그런 유진이 능력도 부족한 신입을 뛰어넘어 부팀장으로 발탁했다는 점에서 불만과 의문은 더 커졌다.현준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이 인사 결정은 사전 상의 없이 유진이 발표한 것이었고, 그 역시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소혜는 맞은편에 앉은 베
유진은 구은정의 표정을 보고, 가슴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그는 평소와는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고, 유진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어제 술 마셨다던데, 괜찮아요?”은정은 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안 좋아 보이던데, 이제 술은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유진이 조용히 은정에게 당부했다.“응.”그 말에 은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시간 됐어요. 나 출근해야 해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고, 그렇게 둘은 스쳐 지나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유진은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조금 전 은정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렸고,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순간 망설임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고, 급히 뛰쳐나왔다.그러나 복도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 유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스스로가 어이없었다.‘내가 지금, 도대체 뭐 하는 거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아니, 지금은 내 문제부터 정리해야 해. 괜히 그 사람한테 짐이 되어선 안 돼.’그날 오후, 은정은 늦게서야 회사에 출근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법무팀에 최이석 관련 고소를 철회하라고 지시했다.마심호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그 사람 같은 놈은 봐줄 이유가 없죠. 이번 기회에 서성 라인 애들도 좀 눌러놓는 게 나아요.”그러나 은정은 별다른 설명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저도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요.”그날 저녁, 은정은 늘 그랬듯 이경 아파트로 돌아왔다. 조용히 복도를 지나, 곧장 유진의 집 앞으로 갔다.문 비밀번호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고, 은정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 안은 예전 그대로였고, 유진은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았다.그런데도 방 안은 왠지 썰렁했는데, 무언가 본질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은정은 그녀가 드라마를 자주 보던 소파에 앉았다.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드리울 때까지 그렇게 있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정은 책상 위의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녹음 안 했어요.”서선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은정아, 이 일은 내가 밖에 알리지 않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최이석 일, 바로 고소 취하하고 다시는 들추지 마.”“그리고 스스로 구씨그룹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회사도, 강성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네 아버지에겐 그냥 말하면 돼. 죄책감 때문에 이 집에 더는 못 있겠다고. 이번엔 분명히 놔줄 거야.”“네가 떠날 땐, 내가 사람을 시켜서 돈도 챙겨줄게. 아버지한텐 그걸로도 충분히 체면 세워준 셈이 될 거야.”은정은 서선영을 냉랭하게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당신 딸을 희생해서까지 날 함정에 빠뜨린 이유가 최이석 때문이었네요.”서선영의 얼굴이 순간 굳더니 곧바로 해명했다.“그 사람은 내 동생 밑에서 오래 일했어. 난 내 동생을 위해서 한 거야. 은정아, 지금 네가 분위기 바꿔서 빠져나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마.”“내가 당신 말대로 안 하면요?”은정은 담배를 내뿜으며 한껏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어차피 난 이미 악명 높은 놈이 됐어. 하나쯤 더 얹혀도 그만이죠. 오히려 구은서는 이제 절대 부잣집 자제와의 결혼은 꿈도 못 꾸겠죠.”서선영의 얼굴은 날카롭고 차가웠다.“끝장을 보겠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은서는 동정받는 쪽이 될 거야.”서선영은 은정을 똑바로 노려봤다.“임유진하고 너, 꽤 가까운 사이잖아. 그 애는 나랑 너 때문에 몇 번이나 맞붙었지. 근데 만약 그 애가 네가 술에 취해 여동생을 건드린 놈이라는 걸 알게 되면?”“그 아이 눈엔 네가 어떻게 보일까? 널 어떻게 생각할까? 넌 그걸 감당할 수 있어?”그 말에 은정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서선영은 그 반응에 확신을 얻은 듯 미소를 지었다.“내 말대로 해. 열흘 안에 강성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 안 그러면 임유진이든, 임씨 집안이든, 강성 전체가 너란 인간이 얼마나 추잡한 놈인지 알게 될 거야.”“널 사회적으로 매장 시킬거고, 임유진도 널 경멸하
은정은 격노한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저는 그런 짓 하지 않았어요. 이건 서선영 저 사람이 꾸민 함정이에요.”서선영은 엉엉 울면서 외쳤다.“내가 내 딸을 희생시켜서 너한테 함정을 판다고? 구은정, 네가 나를 미워하는 건 알아.”“예전부터 나한테 편견이 있었지. 그래, 미우면 나한테 손찌검을 해. 왜 애먼 은서를 괴롭혀?!”“은서는 아직 시집도 안 갔어. 이제 어떻게 살라고 해? 이 소문이 밖에 나가면, 우리 집안은 완전히 끝장이야!”은정은 오직 구은태만 바라보며 물었다.“저를 믿으세요?”구은태는 아들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다른 기억 하나가 떠오르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때 갑자기 은서가 벽을 향해 몸을 던지듯 달려갔다. 죽을 각오로 내달리는 눈빛이었다.“은서야! 안 돼, 은서야!”서선영이 급히 은서를 껴안고 붙잡았고, 울음이 멎지 않았다.“은서야, 제발 그런 짓 하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거기 누구 없어요! 얘 좀 붙잡아줘요!”서선영은 울먹이며 도우미들을 향해 소리쳤다. 몇 명의 도우미가 급히 달려와 은서를 붙들고 감싸 안았다.그중 평소 은서를 따르던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구은태 앞에 다가와 입을 열었다.“회장님, 사실은 전에도 도련님께서 밤에 아가씨 방문을 두드리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어요.”“하지만 도련님이 너무 무서워서, 보복당할까 봐 말씀 못 드렸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 도우미는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제가 좀 더 일찍 말씀드렸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은정은 도우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애옹이가 은서에게 보내졌던 그날 밤, 은정은 술에 취해 돌아와 애옹이가 사라진 걸 알고 은서를 찾아갔다. 그때 이 도우미가 어두운 구석에서 숨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은태는 거기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죽을힘을 다해 몸을 던지려던 은서, 그리고 도우미의 일방적인 증언이 더해지자, 구은태는 은정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다시 근처에 있던 물
[말 좀 해봐요.][삼촌?]서선영이 천천히 2층에서 걸어 내려오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을 집어 장말숙 아주머니에게 건네며 눈짓을 보냈다. 이에 장말숙 아주머니는 눈치를 채고 전화를 받아 들고 말했다.“유진 씨죠? 저희 도련님이 술에 취하셨어요.”유진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네, 신세 좀 질게요. 잘 부탁드려요.]“네!”장말숙 아주머니는 괜히 말을 더했다가 실수라도 할까 봐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은정의 까만 눈동자가 서선영을 향해 있었지만, 그 시선은 이미 흐릿했다.서선영은 은정을 부축하듯 손을 내밀며, 자애로운 얼굴로 말했다.“은정아, 술 너무 많이 마셨잖아. 방으로 데려다줄게.”“으악!”날카로운 비명에 은정은 정신이 번쩍 들며 눈을 떴고, 날은 훤하게 밝아 있었다.옆에서는 구은서가 실크 잠옷 차림으로, 옷가지로 몸을 허둥지둥 가리고 있었고, 얼굴은 절망감에 젖은 눈물로 가득했다. 그녀는 분노로 떨리는 눈으로 은정을 노려보고 있었다.구서의 비명은 곧 서선영과 집 안 도우미들을 방으로 불러 모았다. 문이 열리고 방 안 풍경을 본 순간, 모두가 굳어버렸다.은정은 조금씩 의식을 되찾았고, 은서를 훑어보며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이불을 들추고 자신을 확인해 보니, 바지는 제대로 입고 있었지만 상의는 전혀 없었다.은정은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 이마를 짚으며 침대 머리에 기대앉았다. 머리가 묵직하게 지끈거렸다.“엄마!”은서는 멘탈이 완전히 무너져 울부짖었다.“은서야!”서선영이 달려와 은서를 안고, 옷을 덮어주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몰라요!”구은서는 서선영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오열했다.“밤에 오빠가 갑자기 방에 들어왔어요. 술에 취해서 저를 한 대 치더니 그다음은...”은서의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드러난 어깨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짐승 같은 놈!”서선영은 벼락을 맞은 듯 충격에 빠져 온몸을 떨며 은정을 향해 소리
우정숙은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예전에 은정은 분명히 임유진은 내 스타일 아니라며 선을 그은 적이 있는데, 왜 지금 와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쫓고 있는 걸까?“넌 어떻게 생각해?”우정숙이 묻자, 유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했다.“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돌아왔어요.”그 말투가 생각보다 무거워, 우정숙은 분위기를 일부러 누그러뜨리며 웃었다.“이미 거절했는데도 냉정해져야 해?”유진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어쨌든, 엄마는 이 일. 할아버지, 할머니한테는 말하지 말아줘요. 그리고 삼촌한테도 되도록 비밀로 해주세요.”그 말에 우정숙은 딸의 속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갑자기 이렇게 서둘러 집에 돌아온 이유 혹시 일이 더 커질까 봐? 너희 할아버지가 구은정한테 가서 따질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 아니야?”유진은 재빨리 대답했다.“누가 그 사람 걱정했대요? 밖에서 사는 게 질려서 온 거지, 그 사람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하지만 우정숙의 따뜻하고 조용한 눈빛은 유진의 진심을 꿰뚫고 있었다. 우정숙은 다만 조용히 숨을 내쉬며, 더는 묻지 않았다.그날 밤, 구은정은 외부 일정으로 접대를 나갔고, 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좀 늦을 것 같아. 집에 들어가면 애옹이 좀 봐줘.]유진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저도 집에 왔어요. 아주머님께 부탁하세요.]은정은 유진이 하루 정도 집에서 자려는 줄로만 알고, 별 의심 없이 답했다.[알겠어.]밤 10시.은정은 아직 접대 자리에서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에 구은태가 보낸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은정아, 나 몸이 좀 안 좋다. 한번 집에 들러줄래?]은정은 미간을 찌푸렸다.[몸 안 좋으면 병원 가시죠.]그렇게 답장을 보냈지만, 더 이상의 응답은 없었다.술자리가 끝나고 나니 이미 자정 무렵이었다. 은정은 그래도 아버지를 확인하고자 구씨 저택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서자, 애옹이를 돌봐주던 장말숙 아주머니가 거실에서 그
정현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지난번에 뭐라고 했죠? 임유진 건드리지 말랬잖아요. 왜 말을 안 들어요?”진소혜는 웃었다.“들었어요. 적이 내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없애버리라는 그 말, 정말 감명 깊었거든요. 곧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쫓겨날 거예요.”현준은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임유진은 쫓겨나지 않아요. 사장님이 반드시 지킬 거니까요.”현준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덧붙였다.“유진 씨, 그 정체가 간단하지 않아요. 사장님이 곤란한 일에 휘말릴 때마다 뒤에서 도와준 사람이 바로 그 애였다고요.”“이렇게 성급하게 나가면 결국 당하는 건 소헤 씨라고요.”소혜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런 것도 그 얼굴 덕 아니었을까요? 임유진이 무슨 대단한 집안 출신이라도 돼요?”현준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 애, 성이 임이야.”소혜는 비웃었다.“강성에 임 씨 많은데요? 임씨라고 다 임씨 집안이예요?”“임유진이 정말 그 임씨 집안 사람이었으면, 이런 작은 곳에서 평사원으로 일할 일이 없죠.”강성에서도 가장 윗자리에 있는 집안, 그 임씨 집안 사람이라면 당연히 격이 달랐을 것이다.현준은 소혜를 바라보며, 무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소혜 씨, 소혜 씨는 너무 자만해요. 이제 막 졸업한 사람이잖아요. 세상이 어떤지 아직 몰라요.”“내가 경력은 부족하지만, 머리는 좋아요.”소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원하는 건, 어떻게든 손에 넣을 수 있어요.”현준은 더는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고, 소혜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이번 달 말이면,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존재 자체가 사라질 거예요.”이메일은 해외 IP에서 발송된 것으로 확인되어, 추적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루머는 벌써 영업팀까지 퍼진 상황이었다.한때 유진이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걸 보고 감탄했던 동료들조차, 그녀가 정말 실력만으로 이룬 건지 의심하기 시작했다.너무 젊은 나이에, 임씨 그룹 같은 대형 고객을 설득하고, 이미 다른 부서에서 거의 성
서선영은 유혹적인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거절하려는 듯하면서도 몸은 피하지 않았다.“안 돼. 나, 한 시간밖에 못 나와 있어.”“당신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최이석은 그렇게 말하면서 서선영의 치마 지퍼를 내렸다.“밖에 사람 세워놨어. 아무도 안 들어와.”...오전, 임유진은 구씨그룹과의 계약을 마무리했다. 오후에는 회사 고위층 회의에 참석했고, 회의가 끝나고 마케팅부로 돌아왔을 때쯤, 팀 동료들의 시선이 평소와 달랐다.유진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모두는 급히 예의를 갖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유진은 손에 든 자료를 들고 여진구를 찾아갔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진구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유진이 들어오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무슨 일 있었어요?”유진이 맑은 목소리로 묻자, 진구는 곧바로 말을 돌렸다.“아니야. 너 손에 든 거, 청원안 자료야? 나 좀 볼게.”하지만 유진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휴대폰, 보여줘요.”진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켰다. 방금 보고 있던 건, 유진과 은정이 함께 있는 사진들이었다.둘이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 그리고 둘이 함께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는 장면. 얼마 전 중식당에서 있었던 그날이었다.진구는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누군가 이 사진들을 너희 팀 메일에 전체 전송했어. 내용은, 네가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게 구은정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어서라고.”유진은 이미 그 메일을 확인했었다. 메일에는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구씨 그룹 사장을 유혹했다는 식의 악의적이고 천박한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업계 풍기를 망친다는 말까지, 표현이 거칠고 추했다. 유진은 이를 꽉 물었지만, 곧 침착하게 물었다.“발신 IP 추적할 수 있어요?”진구가 답했다.“지금 IT팀에서 추적 중이야. 내부 직원일 수도 있고, 유지그룹 쪽의 보복일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반드시 밝혀낼 거야.”“일단 외부로 확산은 안 됐고, 회사 내부 루머 수준이야. 이미 전체 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