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심은 눈가가 붉어지며 살짝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할아버지께도 말씀 좀 전해주세요.”[알겠어. 비행기 표는 취소했으니 집에서 네가 돌아오길 기다릴게. 네가 돌아오고 나서 떠나자.] 도도희는 부드럽게 말했다.[이미 이반스와 이야기를 나눴어. 그 사람은 나를 이해하고, 너도 이해해 줬어.”아심은 미안한 마음으로 말했다.“최대한 빨리 돌아갈게요.”[서두르지 않아도 돼. 이반스를 먼저 보내고 우리는 천천히 준비할 거야.] 도도희는 웃으며 덧붙였다.[너와 시언의 행복이 제일 중요하니까.]그 순간 아심은 진심으로 감사했다. 자신에게 가족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가족들이 자신을 이렇게 사랑하고, 이해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행복할 뿐이었다.도도희와의 통화를 마친 후, 아심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책장을 지나치던 중, 아심은 왼쪽 서랍 중 하나가 살짝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안쪽에서 뭔가가 희미하게 보였는데, 어딘가 낯익은 물건 같았다.아심은 이미 서랍을 지나쳤지만, 무언가에 이끌리듯 다시 돌아가 서랍을 열어보았다. 안에는 스케치북 하나가 들어 있었다. 이전에 시언과 함께 저택에서 수업을 들을 때, 시언이 자주 손에 들고 있던 그 스케치북이었다.아마도 시언이 저택을 떠날 당시 이곳에 들러, 소지품 몇 가지를 여기에 두고 간 듯했다. 그녀는 시언이 수업 시간마다 손에 들고 뭔가를 그리고 있는 것을 봤지만, 한 번도 그가 무엇을 그렸는지 직접 확인한 적은 없었다. 그랬기에 이번에야말로 그 내용이 무엇인지 확인할 기회였다.호기심이 가득한 그녀는 스케치북을 꺼내 펼쳤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그림들을 보고 그대로 멈춰 섰다.스케치북에는 약 열다섯 장 정도의 인물 스케치가 있었다. 놀랍게도, 모든 그림의 주인공은 아심이었다.아심이 수업을 집중해서 듣고 있는 표정, 아이들과 정원에서 노는 모습, 의자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긴 옆모습까지...모든 그림의 선은 부드러우면서도 섬세했고, 구도는 빈틈없이 완벽했다. 각
강아심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챙겼어요.”강시언은 그녀의 손을 잡아 침실로 걸어가며 말했다.“그러면 오늘 바로 하자. 먼저 씻고 아침 먹고, 곧바로 서류 처리하러 가자!”...한 시간 후, 아심은 서류를 작성한 뒤, 직원의 안내를 받고는 앉아서 기다렸고,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그럴 만도 했다. 지난 이틀 동안 그녀의 감정은 너무 큰 변화를 겪었고, 벌어진 일들이 모두 예상 밖이었다.예를 들어, 어제는 시언을 배웅하러 왔다가 마음을 정리하고 강성에 남기로 결심했는데, 그는 오히려 아심에게 더 이상 떠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그 기쁨에 흥분을 주체 못 했고, 오늘 아침 스케치북에서 발견한 쪽지는 그녀를 더더욱 설레게 했다. 그런데 이제 막 결혼 얘기를 꺼냈는데, 시언이 이렇게 빠르게 일을 처리할 줄은 정말 몰랐다.불과 한 시간 전에 결혼 얘기를 꺼냈을 뿐인데, 이제는 이미 서류 작성하고 심사를 기다리고 있었다.건물을 나와 정말로 결혼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자, 아심은 여기가 어딘지 자신이 누구인지 헷갈릴 정도로 멍해졌다.아심은 옆에 있는 시언을 돌아보며 물었다.“우리 진짜 결혼한 거예요?”어제까지만 해도 어떻게 시언과 작별할지 고민하던 자신이, 오늘은 이미 그와 부부가 되다니 믿기지 않았다.시언은 담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그래, 게다가 후회도 못 하는 결혼이야.”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결혼식은 언제 하고 싶어?”“아?” 아심은 멍하니 그를 쳐다보다 무심코 대답했다.“지금 날씨가 너무 더우니까, 좀 시원해지면 하죠.”“좋아, 네가 정한 대로 하자.”시언은 아심의 손을 잡고 차로 걸어갔다.“그럼 지금은 어디로 가요?” 아심이 시언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집으로 가자. 할아버지께 이 좋은 소식을 알려드려야지.”아심은 그제야 조금씩 정신이 들었다.“우리가 양쪽 부모님께 알리지도 않고 갑자기 결혼한 건, 좀 예의에 어긋난 거 아닐까요?”시언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우리 할아버지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
수요일 저녁 7시 정각 소희는 전위 호텔 앞에 나타났다.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리자 소희는 카카오톡을 확인했다. 아빠 소정인이었다. [소희야, 아빠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 차가 좀 막히네. 먼저 들어가있어.]소희는 발걸음을 늦추며 이따 임구택을 만나면 어떻게 인사할까 생각하고 있었다.결혼 3년 동안 그들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임구택이 이 결혼을 동의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심지어 거부한다는 것은 안 봐도 뻔했다.그렇다고 임구택을 탓할 일도 아니었다. 과거 소씨 가문의 회사가 위기를 맞자 뻔뻔하게 임씨 가문을 찾아가 혼인 약속을 이행하라고 요구하였고, 당시 임씨 가문의 장남은 이미 결혼을 한 터라 자연스레 그 약속은 차남 임구택이 이행하게 되었다. 그가 내키지 않아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임씨 가문은 당연히 소씨 가문에 좌지우지 당하지만은 않았다. 예물로 50억 원을 건네어 소씨 가문이 난관을 이겨내게 도우면서도 조건을 제시했다. 3년 뒤에 이 혼사가 자동 해지되는 것으로.3년 전, 그녀는 아직 법정 결혼 연령이 되지 않아, 두 사람은 라스베가스에 가서 혼인신고를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두 사람이 아니라 각자의 대리인이 가서 혼인신고를 마쳤다. 결혼하자마자 임구택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결혼 해지를 석 달 앞두고 돌아왔다. 결혼을 거부한다는 태도가 너무나도 뚜렷했다.하필이면 오늘, 그녀의 아버지가 회사 때문에 그녀를 앞세워 다시 한번 그를 찾아가 부탁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소희는 스스로를 비웃으며 자신을 어떻게 소개할지 생각하였다. “임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당신 아내에요!”그가 그녀를 거들떠보기나 할까?듣건대 임구택은 미국으로 떠나기 전 강성의 유명한 악질이었다고 한다. 강성의 흑과 백을 모두 통솔하며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매섭고 결단력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지만 며칠 전 TV의 경제 채널에서 임구택을 본 적이 있는데 그녀가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명품 양복을 입고, 거만하면서도 우아하고 듬직해 보였다.그녀는
그의 손에는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일을 마친 후 돈을 지불하다니. 그녀는 그를 무엇으로 생각하는 걸까?남자가 냉담한 얼굴을 하고 발코니로 성큼성큼 걸어가니 과연 창문이 열려 있었다.여기는 층고가 높아서 3층이 4층 높이일 텐데 그녀는 어떻게 뛰어내렸을까?그가 그렇게 무서웠나?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칠 만큼?창문으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물을 끼얹은 듯 청량한 바람이지만 남자의 마음속에서 타오르는 화는 식히지 못하였다. 이 여인은 만 원으로 그를 모욕했을 뿐만 아니라, 일이 끝난 후에 창문으로 뛰어내려 도망쳤다... 잡히기만 해봐! ......택시에 앉은 소희가 재채기를 하자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보며 물었다. “아가씨, 괜찮아요?”이렇게 예쁘게 생겨서 홀딱 젖어있다니, 딱 봐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소희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기사는 웃으며 말했다. “아직 학생이죠? 밖에 혼자 다닐 때 각별히 조심해야 되요.”“네, 감사합니다. 기사님.”소희는 대답하고 휴대폰을 꺼내 재빨리 문자를 보냈다. “천위 호텔의 7시와 9시경에 내가 찍힌 CCTV 기록은 모두 없애!”“ok!” 상대방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지시에 따랐다.남자의 귀에 거슬리는 말이 다시 귓가에 울려 퍼졌다. 소희는 오늘 임구택과 만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따위 고민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다만 임구택이 그녀가 왔었다는 사실을 모르게만 하고 싶었다.운해로에서 내리면서 소희는 뒷좌석을 적신 대가로 택시비를 두 배로 지불했다.별장으로 돌아오자 하인은 소희의 젖은 옷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작은 아가씨, 무슨 일이에요?”“일이 좀 있었어요, 일단 올라가서 샤워부터 할게요.”소희는 위층으로 걸음을 옮겼다.“목욕물 준비해 드릴게요.”하녀는 더 묻지 못한 채 위층으로 올라가 준비했다.몇 분 후 소희는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긴장했던 몸이 점차 풀리기 시작했다.머릿속이 복잡해서 머리까지 물속에 파묻고 오늘 밤에 있
소희는 멍해졌다.남자는 차갑게 입을 열었다. “왜 절 따라오시는 거예요? 강성대 학생이신가요?”그는 오는 길에서부터 이 여자가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멈추면 그녀도 무슨 일이 있는 척 멈추더니 엘리베이터까지 따라왔다.소희는 얼굴이 빨개졌지만 이내 다시 냉정을 되찾고 반문했다. “여기가 당신 집으로 가는 길인가요? 모든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을 왜 제가 따라다닌다고 하는 거죠?”남자의 눈동자의 싸늘한 빛이 스치더니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소희에게 올라오라고 눈짓했다.소희는 입술을 실룩거리며 비꼬듯 말했다. “됐어요, 오해받을 만한 행동 안할게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돌아서서 계단으로 걸어갔다.그녀 뒤로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히며 남자의 가늘게 뜬 눈을 가렸다.소희는 임구택과 다시 마주칠까 봐 아예 계단으로 9층까지 올라갔다.회의실에 도착하니 조교가 학과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조교는 그녀를 보자 잠시 기다리라고 눈짓했다.그 옆에는 몇몇 학생들도 자료를 제출하러 왔는데, 그중 한 명은 따가운 눈빛으로 소희를 노려보았다. 소희는 못 본 척 휴대폰을 꺼내 스도쿠를 했다.5분도 안 돼 한 판을 풀고 나니 밖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돌아온 지 얼마 안 됐죠? 출국한지 오래됐으니 돌아올 때 됐구나 싶었는데”교장선생님의 목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한 사람은 교장선생님이고, 다른 한 사람은...소희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공교로운 일이...?임구택도 소희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그녀에게 머물지 않고 바로 지나갔다.학과장은 급히 마중 나가 교장선생님과 인사를 나누었다.방 교장은 그에게 소개하였다. “이 분은 LS그룹의 대표이사님이십니다. 예전에 우리 학교 학생이었지요. 참, 우리 학교 여러 항목의 장학금도 임 회장님이 후원한 것입니다.”그러자 학과장은 냉큼 공손한 표정을 지으며 임구택과 악수를 나누었다. “오늘 마침 학생들에게 장학금 신청 서류를 제출
임구택은 그날 창문에서 뛰어내린 여자를 조사하라고 지시했고, 명우는 제일 먼저 천위 호텔의 CCTV를 조사했다.이상하게도 7시와 9시 두 시간대 모두 공백 상태였고 천위 호텔의 보안요원조차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하지 못하고 당시 인터넷이 끊겼을 것이라고 추측만 하고 있었다.그래도 명우는 한 사람을 찾았다. 서이연.서이연은 B급 배우로 청순하고 러블리한 이미지의 노선을 걷고 있으나 줄곧 뜨지 못했다. 어제 저녁 6시 50분쯤 그녀가 천위 호텔에 들어가 연풍관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CCTV에서 볼 수 있었다. 이후 CCTV 기록에는 공백이 있어 그녀가 어느 방으로 갔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다.9시 5분경 서이연의 매니저가 그녀를 부축하고 연풍관 밖에 나타났는데, 그녀는 한쪽 다리를 구부린 채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부상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그 뒤로 기록이 사라졌기 때문에 명우는 서이연이 어떤 차를 타고 떠났는지 몰라 어느 병원에 입원해 있는지 알아내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어젯밤 그녀는 왼쪽 다리를 수술했다.명우는 이미 차트를 확인했는데 낙상이었다.그날 밤, 강성의대 부속병원.VIP706호. 병상에 누워있는 여인은 두 손을 맞잡고 불안한 표정으로 맞은 켠 소파에 앉은 임구택을 바라보았다. “임 대표님 무슨 일이에요?”“다리 어떻게 다쳤어요?” 임구택은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서이연은 한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 반쯤 늘어뜨린 눈꺼풀 아래 눈물을 반짝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임 대표님과 관련이 있나요?”“숨길 필요 없어요, 사람을 시켜 이미 CCTV를 확인했으니까. 어젯밤 9시쯤 매니저가 당신을 부축해서 차를 타고 떠날 때 다리는 이미 부러져 있었죠. 그날 밤 제 방에서 뛰어내린 사람은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맞나요?” 임구택의 어조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담담했다.손님의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천위 호텔은 카메라가 객실 창문을 향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서이연이 어디서 뛰어내렸는지는 볼 수 없지만,
여인이 달려들며 손에 들고 있던 꽃들은 소희의 몸에 던져졌다. 힘껏 소희를 뒤로 밀치고는 소연을 품에 끌어안았다.진원은 긴장한 채 소연의 몸을 살펴보며 물었다. “다친 거야? 혹시 피났어? 어디 아프니?”이슬을 머금은 꽃잎이 온 바닥에 흩어지고 꽃의 가시가 소희의 목덜미를 찔러 따끔거렸다. 그녀는 여인의 긴장된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소정인은 이내 다가와 소희에게 물었다.“안 다쳤니?”진원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무서운 눈빛으로 소희를 노려보았다. “뭐 하는 거야, 소연이를 죽이려는 거니?”소희는 여인의 눈에 비친 혐오와 원한을 보고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소연은 소희를 한 번 쳐다보고는 급히 진원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엄마, 오해예요. 제가 언니한테 머리 좀 잘라달라고 했어요. 언니는 절 다치게 하지 않았어요.”“그렇구나!”소정인은 ‘하하’하고 웃으며 진원을 원망했다. “당신은 항상 너무 급해서 문제야. 무슨 일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화부터 낸단 말이야. 당신 때문에 소희 옷이 다 더러워졌잖아.”진원은 자신이 소희를 오해했다는 것을 깨닫고 무안해하며 변명했다. “들어오자마자 소희가 가위를 소연이의 목에 대고 있길래... 머리를 자르는 건줄도 모르고...”“그만 해!”소정인은 진원에게 눈짓을 하고는 소연에게 말했다. “언니 데려고 가서 옷 좀 갈아입혀. 옷이 다 더러워졌네.”“언니, 이리 와!”소연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소희는 어깨의 꽃잎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2층 침실로 들어가자 소연이 사과했다. “언니, 정말 미안해, 엄마가 이 시간에 돌아올 줄 몰랐어. 나 때문에 언니가 다쳤네.”“너 때문이 아니야!”소희의 순수한 얼굴에는 한 줄기 미소를 띠고 있었다.소연은 옷방에 가서 흰색 티셔츠를 가져와 소파에 놓았다. “언니, 이건 새거야, 한 번도 안 입었어. 옷 갈아입어, 난 내려가서 기다릴게.”“응.”소연이 문을 닫자 소희는 소파 위의 옷을 보며 안색이 흐려졌다. 한쪽에서는 머리를 잘라달라
임구택은 고개도 들지 않고 손에든 서류를 보고 있었다.임유림은 고개를 돌려 웃으며 물었다. “소희야, 과외하러 온 거야?”그녀는 소희의 집안 형편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곳이 부자동네여서 당연히 과외 하려 온 줄 알았다.소희는 웃어 보였다. “널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그녀는 임유림이 임구택 형의 딸, 즉 그의 조카라는 걸 어떻게 잊었단 말인가?거의 3년 동안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최근에만 일주일에 3번을 만났다. 그들을 주선해 준 중매쟁이가 드디어 깨어난 건가요?임유림은 돌아보며 소희에게 소개해 주었다. “이분은 내 둘째 삼촌이야!”소희는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임구택은 목소리가 익숙한 것 같아 고개를 들어보니 그녀가 또 있어 눈을 가늘게 떴다.소희는 손에 들고 있는 우산 손잡이를 꽉 쥔 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임유림은 열정적으로 소희와 대화를 나눴다. “주경이가 고석 좋아하는 거 아니야?”소희는 어제의 일을 떠올리며 답하였다. “그런 것 같아!”소희는 무의식적으로 임구택을 바라보며 미소를 띠며 답했다. “나와 고석은 그냥 친구야, 그가 누구와 함께 있는 나랑 상관없어.임유림이 계속해서 그녀에게 눈치를 보내니 소희의 마음속이 불안해졌다. 그녀가 결혼을 합의 때문에 하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 그녀는 결혼한 신분이다.시내로 들어서자 앞쪽에 사고가 나 차가 막혔다. 임유림은 고픈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 “길 언제 뚫리지, 배고픈데 먼저 밥 먹으러 갈까?”소희는 답혔다. “나 여기서 내릴게 나 학교 가야 해.”“학교는 무슨, 점심인데 같이 밥 먹으러 가자.” 임유림은 이미 스스로 결정을 내린 듯했다.아무 말도 하지 않던 임구택은 시계를 보고 명우에게 차를 세우라고 지시했다.세 사람은 프렌치 레스토랑에 들어가 앉았다. 임유림은 소희가 이런 고급 레스토랑에 와본 적이 없을까 봐 소희에게 물어본 뒤 대신 주문해 주었다.임유림이 음식을 주문하고 화장실에 가자 자리에는 임구택과 소희 둘만 남았다.소
강아심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챙겼어요.”강시언은 그녀의 손을 잡아 침실로 걸어가며 말했다.“그러면 오늘 바로 하자. 먼저 씻고 아침 먹고, 곧바로 서류 처리하러 가자!”...한 시간 후, 아심은 서류를 작성한 뒤, 직원의 안내를 받고는 앉아서 기다렸고,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그럴 만도 했다. 지난 이틀 동안 그녀의 감정은 너무 큰 변화를 겪었고, 벌어진 일들이 모두 예상 밖이었다.예를 들어, 어제는 시언을 배웅하러 왔다가 마음을 정리하고 강성에 남기로 결심했는데, 그는 오히려 아심에게 더 이상 떠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그 기쁨에 흥분을 주체 못 했고, 오늘 아침 스케치북에서 발견한 쪽지는 그녀를 더더욱 설레게 했다. 그런데 이제 막 결혼 얘기를 꺼냈는데, 시언이 이렇게 빠르게 일을 처리할 줄은 정말 몰랐다.불과 한 시간 전에 결혼 얘기를 꺼냈을 뿐인데, 이제는 이미 서류 작성하고 심사를 기다리고 있었다.건물을 나와 정말로 결혼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자, 아심은 여기가 어딘지 자신이 누구인지 헷갈릴 정도로 멍해졌다.아심은 옆에 있는 시언을 돌아보며 물었다.“우리 진짜 결혼한 거예요?”어제까지만 해도 어떻게 시언과 작별할지 고민하던 자신이, 오늘은 이미 그와 부부가 되다니 믿기지 않았다.시언은 담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그래, 게다가 후회도 못 하는 결혼이야.”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결혼식은 언제 하고 싶어?”“아?” 아심은 멍하니 그를 쳐다보다 무심코 대답했다.“지금 날씨가 너무 더우니까, 좀 시원해지면 하죠.”“좋아, 네가 정한 대로 하자.”시언은 아심의 손을 잡고 차로 걸어갔다.“그럼 지금은 어디로 가요?” 아심이 시언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집으로 가자. 할아버지께 이 좋은 소식을 알려드려야지.”아심은 그제야 조금씩 정신이 들었다.“우리가 양쪽 부모님께 알리지도 않고 갑자기 결혼한 건, 좀 예의에 어긋난 거 아닐까요?”시언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우리 할아버지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
강아심은 눈가가 붉어지며 살짝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할아버지께도 말씀 좀 전해주세요.”[알겠어. 비행기 표는 취소했으니 집에서 네가 돌아오길 기다릴게. 네가 돌아오고 나서 떠나자.] 도도희는 부드럽게 말했다.[이미 이반스와 이야기를 나눴어. 그 사람은 나를 이해하고, 너도 이해해 줬어.”아심은 미안한 마음으로 말했다.“최대한 빨리 돌아갈게요.”[서두르지 않아도 돼. 이반스를 먼저 보내고 우리는 천천히 준비할 거야.] 도도희는 웃으며 덧붙였다.[너와 시언의 행복이 제일 중요하니까.]그 순간 아심은 진심으로 감사했다. 자신에게 가족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가족들이 자신을 이렇게 사랑하고, 이해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행복할 뿐이었다.도도희와의 통화를 마친 후, 아심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책장을 지나치던 중, 아심은 왼쪽 서랍 중 하나가 살짝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안쪽에서 뭔가가 희미하게 보였는데, 어딘가 낯익은 물건 같았다.아심은 이미 서랍을 지나쳤지만, 무언가에 이끌리듯 다시 돌아가 서랍을 열어보았다. 안에는 스케치북 하나가 들어 있었다. 이전에 시언과 함께 저택에서 수업을 들을 때, 시언이 자주 손에 들고 있던 그 스케치북이었다.아마도 시언이 저택을 떠날 당시 이곳에 들러, 소지품 몇 가지를 여기에 두고 간 듯했다. 그녀는 시언이 수업 시간마다 손에 들고 뭔가를 그리고 있는 것을 봤지만, 한 번도 그가 무엇을 그렸는지 직접 확인한 적은 없었다. 그랬기에 이번에야말로 그 내용이 무엇인지 확인할 기회였다.호기심이 가득한 그녀는 스케치북을 꺼내 펼쳤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그림들을 보고 그대로 멈춰 섰다.스케치북에는 약 열다섯 장 정도의 인물 스케치가 있었다. 놀랍게도, 모든 그림의 주인공은 아심이었다.아심이 수업을 집중해서 듣고 있는 표정, 아이들과 정원에서 노는 모습, 의자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긴 옆모습까지...모든 그림의 선은 부드러우면서도 섬세했고, 구도는 빈틈없이 완벽했다. 각
“어. 직원이 말하길, 네가 막 떠났다고 하더라고.”“그럼 이제 어디로 갈까요?”“너무 늦었으니 집으로는 가지 말고, 전에 머물렀던 저택으로 가죠.”강아심은 시간을 확인했다. 밤 9시, 확실히 꽤 늦은 시간이었다. ...저택에 도착하자, 강시언은 아심을 안은 채로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으며 계단을 올라갔다. 2층 침실에 들어서자 자동으로 불이 켜졌지만, 아심은 손을 뻗어 그 불을 꺼버렸다.침실은 넓고 고요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은은한 달빛이 그림자를 만들었고, 어둠 속에서 둘 사이의 긴장감과 온도가 빠르게 고조되었다. 아심의 셔츠 단추가 하나씩 풀어지며 드러난 그녀의 쇄골과 옥처럼 빛나는 피부는 시언을 더욱 사로잡았다. 그녀는 시언의 강인한 허리를 두 다리로 감싼 채, 살짝 쉰 목소리로 말했다.“나, 씻어야 해요.”“응.” 시언은 낮고 갈라진 목소리로 답하며, 아심을 욕실로 데려갔다. 욕실에 들어가자 그는 셔츠의 단추를 단숨에 뜯어내며 아심에게 다시 입을 맞췄다.아심은 머리를 뒤로 젖히며 숨을 고르고, 살짝 깨문 입술 사이로 가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반쯤 감긴 눈은 달빛보다도 더 매혹적이고 아릿했다.그 밤은 길었다. 아심은 처음으로 동이 트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몸과 마음 모두 강언의 품에 깊이 빠져들었고, 그녀의 감정과 감각은 더없이 충만했다....다음 날, 아심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아심은 눈을 깜빡이며 반사적으로 옆을 돌아봤지만, 시언은 보이지 않았다. 순간 당황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거실에서 그의 전화 통화 소리가 들려왔다.시언도 막 일어난 듯했다. 아심 옆자리의 온기가 여전히 남아 있었고, 그녀를 깨우지 않으려고 일부러 거실로 나가 전화를 받는 것 같았다.햇살이 따뜻하게 창을 통해 들어와 짙은 회색 침대 위를 감싸고 있었다. 아심의 벌거벗은 어깨에도 햇빛이 내려앉아 더욱 매혹적으로 보였다.몸이 나른하게 풀린 아심은 반쯤 감긴 눈으로 침대에 누운 채 생각했다. 이제
달빛이 강시언의 눈썹과 얼굴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아, 시언의 모습을 더욱 고귀하고 깊이 있어 보이게 만들었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삼각주의 일은 이미 시경 걔네들한테 맡겼어. 난 본국으로 돌아왔고. 물론 완전히 손을 놓은 건 아니야. 그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 있으면 내가 나서야겠지만.”아심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눈동자에 작은 기쁨이 스며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믿기 어렵다는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정말이에요?”“물론이지. 내가 거짓말하겠어?”아심의 마음속에서 억누를 수 없었던 환희가 점점 커져갔다. 그녀의 눈은 밝게 빛났고, 붉은 입술은 매혹적으로 빛나며 시언을 뜨겁게 바라봤다. 시언은 아심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아심은 한껏 들뜬 마음속에서 약간의 이성을 찾아냈다. 그녀는 살짝 몸을 뒤로 젖히며 눈썹을 살짝 올려 물었다.“당신이 떠나지 않겠다고 결정한 건 언제부터였죠?”시언은 굳게 다문 입술을 살짝 깨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아심의 얼굴에서 설렘은 점점 사라지고, 화가 난 기색으로 변해갔다.“이번에 돌아오기 전에 이미 결정한 거죠? 그런데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요?”시언이 은퇴를 결심한 것은 분명 갑작스럽게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 돌아오기 전에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쳤을 터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오랫동안 아심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다.아심은 최근의 갈등과 고민이 떠올라 더욱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시언을 밀어내며 돌아서려 했다. 그러나 시언은 긴 팔로 아심의 허리를 끌어안아 다시 품에 안으며 말했다.“고의는 아니었어.”방금까지 울었던 아심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머물러 있었다. 붉어진 눈꼬리는 그녀의 화난 표정을 더욱 매혹적으로 만들었다.“아니라고요? 이게 어떻게 고의가 아니에요?”아심은 힘껏 시언을 밀어냈지만, 그는 손쉽게 아심의 손목을 붙잡고 품에 가둔 채 놓아주지 않았다. 이에 시언은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만
멀리서 들려오는 기타 선율에 실린 애잔한 사랑 노래가 밤을 더욱 고요하고 쓸쓸하게 만들었다. 강아심의 눈에는 언제나 강시언이 있었고, 그의 모습은 늘 아심의 시선 끝에 있었다.아심은 시언을 꼭 끌어안고, 감정이 북받친 듯 목소리가 살짝 쉰 채로 말했다.“사랑해요. 정말로 사랑해요!”오랫동안 감춰왔던 마음이 마침내 터져 나왔다. 그것은 마치 잔잔하게 흘러가던 물이 끝없이 휘돌아 결국 마음을 강하게 휘감고 넘쳐흐르는 듯했다.“예전엔 아무것도 바랄 수 없었어요. 하지만 설날에 당신이 나에게 희망을 주었을 때부터, 나는 점점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어요.”“욕심을 부려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노력했어요. 새로운 감정을 받아들이려고, 가족의 사랑을 느끼려고, 자유로운 미래를 꿈꾸려고요.”“그런데 왜 결국엔 이 모든 게 당신 하나를 이기지 못하죠?”모든 것을 잃었을 때, 시언은 아심의 전부였다. 모든 것을 얻었을 때조차, 그는 아심의 전부를 초월했다. 이 세상에 모든 아름다움을 소유한들, 시언이 없다면 아심의 인생에는 기쁨도, 의미도 없었다.시언은 아심의 울음 섞인 목소리와 함께 자신의 등에 스며드는 눈물을 느꼈다. 마음이 찌르듯 아파와 손을 뻗어 그녀를 안으려 했다.“아심아...”하지만 아심은 그를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절망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사랑해요. 하지만 정말로 미워요. 왜 나에게 도망칠 길 하나조차 남겨주지 않았나요? 왜, 단 하나도!”어두운 밤 속, 시언의 눈동자는 깊은 바다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저음으로 물었다.“그래도 떠날 거야?”아심은 시언의 등에 머리를 기댄 채 고개를 저었다. 울음을 참고자 했지만 묵직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요. 떠나지 않을 거예요. 어디에도 가지 않아요. 여기 강성에서 당신을 기다릴 거예요.”“1년이든, 2년이든, 당신이 언제 돌아오든 나는 여기 있을 거예요.”정월 대보름 그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아심 스스로 찾았다.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았다. 아심은 시언을 사랑했다. 이 사랑은
강시언은 오후 네 시가 되도록 강아심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도도희에게 전화를 걸었고, 도도희는 아심이 운성으로 갔다는 사실을 전했다.시언은 아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리 시도해도 받지 않았다. 그동안 비교적 침착하던 강재석마저 걱정하기 시작했다.“길이 아무리 멀어도 이렇게 오래 걸리진 않아야 하는데.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시언은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 채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이에 강재석은 뒤에서 당부했다.“아심을 만나거든 꼭 내게도 알려라.”시언은 가볍게 대답했다.“알겠어요.”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시언은 문밖으로 나갔다. 오석이 방으로 들어와 강재석에게 차 한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어르신, 오늘의 바둑은 좀 난잡해 보이네요.”강재석은 바둑판 위의 돌들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마음이 복잡하니, 바둑이 난잡하지 않을 수 있겠나.”오석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아직 회복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을까요?”강재석은 잠시 바둑판을 주시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판은 이미 짜여 있어. 어떤 상황이든 계속 두어야 해. 끝까지 두다 보면 반드시 돌파구가 있을 거야.”...하늘이 점점 어두워지자 서점에도 손님이 줄어들었다. 아심은 마지막으로 서점을 나서며 책 두 권을 계산했다.계산대에 있던 직원이 밝게 말했다.“혼자 오셨나요? 제가 저녁 식사 대접할게요. 이 마을에서 가장 맛있는 곳을 알아요.”아심은 미소를 지으며 정중히 거절했다.“고마워요. 하지만 다음에 먹죠.”돈을 지불한 뒤 책을 가방에 넣으며 직원에게 말했다.“그럼, 다음에 또 올게요.”“좋아요. 다음에 또 오세요!”“안녕히 계세요.”서점을 나온 아심은 저물어가는 황혼 속 긴 골목길을 걸었다. 가로등이 드문드문 켜져 있었고, 곧 어둠이 깔릴 듯했다. 그녀는 만나야 할 사람을 보지 못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골목을 빠져나와 거리에서 무의미하게 산책을 하던 아심은 문득 자신이 왜 이곳에 계속 머무
강아심이 운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정오 무렵이었다. 하지만 강씨 저택으로 향하던 중, 그녀는 갑작스럽게 마음이 흔들렸다.도로 옆에 차를 잠시 멈추고 고민한 뒤, 아심은 차를 다시 움직여 차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는 운성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고즈넉한 고장을 향해 운전하기 시작했다.약 두 시간에 걸친 이동 끝에 아심은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차를 주차하고 천천히 마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마을은 여전히 관광객들로 붐볐다. 대부분은 젊은이들로, 배낭을 메거나 카메라를 들고 마을 곳곳을 누비고 있었다.마을은 산과 물에 둘러싸여 있었다. 여름의 더위에도 불구하고 마을 안은 청량하고 상쾌했다. 강아심은 깨끗해 보이는 작은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먹은 뒤, 익숙한 골목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정오의 햇살 아래 깊고 조용한 골목은 한결 평온했다. 이따금 떠도는 햇빛과 그림자 속, 누군가의 고양이가 담장을 가볍게 뛰어넘으며, 담장 위의 꽃잎 하나가 떨어져 이끼 낀 벽돌 구석에 내려앉았다.골목 깊숙한 곳에 자리한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서점. 서점 뒤뜰의 붉은 담장 위로 장미꽃 몇 송이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꽃향기는 골목 특유의 습한 공기와 어우러져 은은하게 퍼졌다.서점의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강아심은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조용했다. 몇몇 손님들이 테이블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책을 정리하던 직원이 소리가 나자 고개를 돌렸고, 그녀의 얼굴엔 반가움이 가득했다.“어서 오세요!” 직원이 인사하며 웃고는 아심의 얼굴을 알아보는 순간, 놀라움과 기쁨이 그녀의 눈에 스쳤다.“아, 손님이시네요!”아심도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오랜만이에요.”직원은 연한 하늘색 멜빵 청바지와 동그란 검은 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인상이었다. 그녀는 책장을 정리하던 사다리에서 내려오더니 아심의 앞으로 다가와 친근한 미소를 지었다.“역시 올 줄 알았어요!”아심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 그렇
그날 밤, 강아심은 샤워를 마친 뒤 침대에 누웠지만, 뒤척이며 쉽게 잠들지 못했다. 이미 많은 것들을 정리하고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도, 어딘가 풀리지 않은 매듭이 남아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밤이 깊어지며 바람이 일었고, 폭우와 천둥, 번개가 이어졌다. 새벽녘이 되자 비가 조금씩 잦아들었다.도도희는 이른 아침에 조깅하러 나가는 습관이 있었지만, 이날은 비 때문에 늦게 일어났다. 문을 열자마자 이미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서려는 아심과 마주쳤다.“운성으로 가는 거니?”이에 아심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작별하려고요. 내일 공항으로 가기 전에 돌아올게요.”도도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 잘 다녀와. 아침은 먹고 가는 게 어때?”아심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가는 길에 먹을게요.”두 사람은 함께 계단을 내려왔다. 도경수는 아심이 강시언을 배웅하러 간다는 사실을 알고는 딱히 뭐라고 하지 않고, 다만 길에서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아심이 떠나자, 도경수는 얼굴을 찡그리며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둘 다 내일 떠날 텐데, 왜 시언이 우리 아심일 배웅하지 않는 거야?”도도희는 그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그렇게 따지지 마세요. 아심이가 행복하면 되는 거잖아요.”도경수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우리 아심이가 삼각주로 끌려가 버리면 어쩌려고 그래? 그건 내가 절대 못 봐!”도도희는 웃으며 답했다.“그럴 일 없으니 안심하세요. 자, 이제 밥 먹으러 가요.”그러나 도경수는 여전히 찌푸린 얼굴로 중얼거렸다.“아심인 아침도 못 먹고 나갔는데, 날씨도 안 좋은데 내가 가지 말라고 막았어야 했는데. 시언은 늘 여유로우니 우리도 좀 참을 수 있었잖아!”도도희는 그저 미소만 지었다....운성, 강씨 저택.강재석은 아침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때 집사인 오석이 다가와 말했다.“어르신, 어젯밤에 도련님 방의 불이 밤새 켜져 있었습니다.”강재석은 고개를 들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얼굴엔 걱정의 기색 없이 여전히 온화한 미소
아심은 눈에 은은한 빛을 띠며 성연희를 바라보았다.“연희야, 고마워.”연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내가 괜히 참견했다고 화내지만 않으면 됐어! 저기 가서 새 친구를 사귀더라도 우리를 잊으면 안 돼.”아심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절대 잊지 않을 거야.”그날 저녁아심은 이전에 살던 집에 잠시 들렀다. 파티를 마친 후 한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아 방 안은 이미 얇은 먼지로 덮여 있었다.소파 위에는 강시언의 셔츠가 놓여 있었다. 며칠 전 밤, 세탁소 직원이 가져가 깨끗이 세탁한 후 다시 배달해 놓은 것이었다.강심은 그 옷을 옷장에 다시 걸어두었다. 옷장에는 남성용 셔츠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녀는 그것들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한참 후 마음을 가라앉혔지만, 대신 가슴 한켠이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가져갈 물건들을 정리한 후, 그녀는 발코니로 나갔다. 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두 권의 책과 고즈넉한 설에 갔던 서점에서 소녀가 건넨 엽서가 놓여 있었다.아심은 책을 들어 첫 페이지를 펼쳤고, 거기엔 남자가 힘 있게 써놓은 글씨가 있었다.강아심 2월 3일, 인가마을특색거리책을 내려놓고, 그녀는 밖의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강성에 처음 왔던 날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이후로 무수한 밤들, 아심은 늘 이 자리에서 강성의 밤을 바라보았다.고요하거나, 떠들썩하거나, 혹은 비가 억수같이 내리거나, 아니면 별빛이 찬란한 밤들. 하지만 아심은 늘 방관자처럼, 조용하고 담담한 시선으로 바라봤다.그러나 시언의 등장으로, 그 후의 밤들은 전과는 다른 감정들로 물들기 시작했다. 아심은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듯했지만, 머릿속의 그 기억은 금세 사라져 잡을 수가 없었다.유리창에 비친 아심의 얼굴은 미간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마치 투명한 유리벽 속에 갇힌 포로처럼, 어떻게 이 족쇄를 깨부술지 고민하는 듯했다.‘떠나는 것이 해답일까?’아심은 창문 앞에 오래 서 있다가 테이블 위의 책과 엽서를 모두 여행 가방에 넣었다.도씨 저택으로 돌아오자 도도희는 거실 밖 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