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잤는지 모를 정도로 시간이 지났고, 임구택은 갑자기 놀라 깨어났다. 눈앞은 완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고, 코끝에는 여전히 소독약 냄새가 가득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는 한동안 자신이 어디 있는지조차 떠올리지 못했다.그러다 품속에 안고 있는 누군가를 느끼고 나서야 골목에서 본 광경이 떠올랐다. 들개들에게 물려 있던 그 소녀였다.표정이 굳어진 구택은 재빨리 몸을 곧추세워 소녀를 꽉 끌어안으며 안도했으나 곧 이상함을 느꼈다.원래는 세네 살 정도로 보이던 소녀가 어느새 길고 가녀린 여자의 몸으로 변해 있었고, 고개를 조용히 구택의 어깨에 기대고 있었다.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몇 초 후, 그는 자신과 서희가 함께 지하 실험실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서희는 깊이 잠들어 있었고, 뜨겁고 메마른 숨결이 구택의 피부를 스쳤다. 그는 손을 들어 서희의 이마를 만져봤고, 서희가 고열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았다.밀실은 무척 추웠고,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다. 그는 한쪽 팔로 그녀를 지탱하며 자기 겉옷을 벗어 서희의 몸에 덮어주고, 다시 품에 꼭 안았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우리는 여기서 나갈 거야. 꼭 버텨야 해!”구택은 주머니를 뒤져 초콜릿 세 조각을 꺼냈다. 그중 한 조각을 꺼내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받쳐 들고 입가에 가져갔다. 그러나 서희는 이미 의식을 잃어 구택의 움직임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씹지도 삼키지도 않았다.결국 그는 초콜릿을 자기 입에 넣고 녹인 뒤 서희에게 입으로 전해주었다. 서희의 몸은 뜨겁게 불타올랐고, 입술 또한 마치 불길처럼 뜨거웠다. 초콜릿은 금방 녹아내렸다. 구택은 자신의 혀로 그녀가 삼킬 수 있도록 유도했다. 더 이상 먹지 않으면 체력이 고갈되어 이곳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초콜릿의 쌉싸름한 단맛이 입안 가득 번졌다가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본능과 기억에 이끌려 점점 더 깊은 키스를 했다.어둠과 그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로 인해 구택의
“네가 말하지 않으면 내가 말하지. 나는 너를 믿어. 정말로 믿어. 내 목숨을 너에게 맡겨도 상관없어.”임구택은 단호한 어조로 한 단어씩 또박또박 말하자, 서희는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당신 너무 우리가 나가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는 거 아니에요?”그 말에 구택은 이마를 찌푸렸다.“진심이야. 죽기 전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고!”서희의 목소리는 거칠게 울렸다.“그럼 당신은 정말 형편없는 용병이겠네요.”‘그렇게 쉽게 사람을 믿으니.’그 말에 구택은 낮게 웃으며 말했다.“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네 맘이지.”“그럼 왜 날 믿는 건데요?”“왜냐하면.” 구택은 천천히 대답했다.“조금 전, 네가 나를 구하려 하지 않았다면 이미 혼자 도망쳤을 거니까.”서희는 다시 침묵에 빠졌고, 구택은 고개를 돌려 물었다.“너 몇 살이야?”“왜?” 서희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갑기만 했다.“빨리 말해봐. 몇 살이냐고? 성인이야?”“아니요!”“와우 정말 어린데!”구택은 조금 전의 키스가 조금 부끄러워지려 했지만, 곧 그 감정을 떨쳐냈다.“만약 우리가 여기서 살아서 나간다면, 밖에 나가서는 용병 일 하지 마. 학교에 다니고, 정상적인 삶을 살아.”서희가 대답했다.“용병 생활이 나한테는 정상적인 삶이에요.”그러자 구택은 단호하게 말했다.“아니야. 너는 언젠가 떠날 거야!”구택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자, 서희는 그저 그가 헛소리한다고 생각했다.이윽고, 구택은 다시 말을 꺼냈다.“만약 네가 떠난다면, 나를 꼭 찾아와!”서희는 구택의 목덜미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이 그녀에게 편안함을 줬다. 지금은 그저 이 편안함이 중요할 뿐, 다른 건 상관없었다. 눈을 반쯤 감은 채, 그녀는 구택의 말에 나른하게 대답했다.“어디서 찾는데요?”“C국, 강성!”구택은 힘주어 말했다.“기억해. 강성에서 날 찾아. 내가 없으면 기다려. 반드시 돌아올 거야!”“기다려서 뭐 하게요?” 서희의 목소리는 점점 더 거칠고 낮아
심명은 블루드를 나와 도로 건너편에 있는 작은 공원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어갔다. 그는 울리는 경적 소리도, 욕설을 퍼붓는 운전자들도 무시한 채, 모든 힘을 다해 길을 건너 공원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사방을 둘러보며 그녀를 찾기 시작했다.마침내, 심명은 한 그루 목련나무 아래의 긴 의자에서 소희를 발견했다.소희는 흰색 티셔츠와 파란색 청바지를 입고, 의자에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은 얼굴을 가리며 흩어져 있었고, 창백한 얼굴은 열기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공원은 어두운 나무와 덤불로 가득하고, 희미한 조명만이 소희의 약하고 여린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의 차갑고 냉철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누구나 그녀를 꼭 안아주고 싶게 만드는 연약함만 남아 있었다.심명은 숨을 헐떡이며 다가가더니, 소희 앞에서 조심스레 무릎을 꿇고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희야!”소희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평소 맑고 검은 눈동자는 이내 흐릿하고 촉촉하게 변했고, 심명을 보고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심명?”심명은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들어 소희의 얼굴을 어루만지려 했다.“괜찮아? 상태는 어때?”소희는 본능적으로 몸을 피하며, 약간의 경계심을 띤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붉어진 얼굴은 경계로 인해 더욱 날카롭게 보였다.심명은 더욱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많이 힘든 거 알아. 하지만 난 널 해치지 않아. 나랑 같이 가자. 내가 널 도울게.”소희는 주먹을 꽉 쥐었고,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다시 조금 맑아졌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내게서 떨어져!”“널 해치지 않아. 널 병원으로 데려가 약의 효과를 없앨 수 있도록 의사에게 맡길게.”심명은 거의 간청하듯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날 믿어주면 안 될까?”하지만 소희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아니야. 내 친구가 금방 올 거야. 난 어디도 가지 않아!”심명은 점점 초조해졌고, 소희의 손을 잡으려 하며 말했다.“그를 기다리지
임구택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소희가 이런 상황인데 네가 하필 여기 나타나다니, 네 의도도 불분명한데 무슨 자격으로 날 질책하는 거지?”“그리고 난 너처럼 비열하지 않아. 소희는 내 조카 임유민의 가정교사야. 내가 소희를 어떻게 하겠어?”심명은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정말 그렇게 확신할 수 있어요?”그 사이, 소희는 계속해서 구택의 품속으로 파고들었고, 구택은 미간을 꽉 찌푸리며 심명을 지나쳐 자신의 차로 향했다.심명은 여전히 구택을 막아섰다.“말했잖아요. 당신 혼자서 소희를 데려가게 하진 않을 거라고!”구택은 한층 더 냉담한 기운을 뿜으며 말했다.“대체 왜 이러는 거지? 그럼 네가 직접 소희에게 물어봐. 누구와 가고 싶어 하는지.”심명은 소희의 손목을 잡으려고 했다.“소희야, 날 따라와. 믿어줘. 저 사람은 널 해치고 말 거야!”그러나 소희는 심명의 손을 본능적으로 피하며 구택의 품속으로 몸을 더 깊이 파묻었다. 소희의 태도는 이미 분명했다.“봤나?”구택은 냉소를 지으며 발걸음을 옮겼고, 심명은 맥없이 손을 내려놓으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깊은 무력감과 절망이 다시 몰려왔다.그는 깨달았다.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소희는 여전히 자신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소희의 선택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택뿐이었다....서희는 잠든 상태였고, 구택도 잠시 눈을 붙였다. 그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어둑한 저녁이었다. 주변에는 나무들만 가득했다. 그는 자신과 서희가 구조된 줄 알았다.하지만 완전히 정신이 돌아오자 구택은 자신이 원시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무나무 농장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때, 누군가 다가와 그에게 보고했다.“불곰이 이미 도착했고, 곧 포위전이 시작될 거예요.”그는 순간 멍해졌다가 고무나무 농장 깊숙한 곳을 바라보며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얼굴에는 두려움이 서렸고, 급히 지시했다.“농장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모아서 불곰을 막아!”말을 마친 구택은 망설임 없이 전망대에서 뛰어내려 농장 깊숙한 곳에
갑자기 눈앞이 다시 어두워졌다. 임구택은 거실 한가운데에 서서 무려 세 분 동안 꼼짝하지 않다가 머리 위의 VR 기기를 천천히 벗어냈다.스크린이 열리자, 성연희와 심명이 함께 나타났다. 심명도 손에 VR 기기를 들고 있었다. 연희는 들러리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화사하면서도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와 간미연이 반년 가까이 걸려서 준비한 신혼 선물이에요. 신랑님, 마음에 드셨나요?”햇빛이 커다란 홍목 창문을 통해 방으로 들어와, 어둑어둑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현실과 환상이 겹쳐 있는 듯한 순간이었다. 구택의 눈동자는 깊은 감정을 품고 있었고,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고마워요.”연희가 준비한 선물은 금전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커다란 선물이었으며, 엄밀히 말하면 구택을 위해 준비된 선물이었다. 그것은 소희에 대한 그의 마음속 공백을 채워주었고, 가장 큰 아쉬움을 보완해 주었다.구택은 아까 회전판이 돌아가는 순간부터 이미 깨달았다. 연희는 천천히 그를 환상의 세계로 이끌어 그가 소희의 강인함과 결단력을 이해하도록 도왔다. 소희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굳건하게 걸어왔는지 깨닫게 한 것이다.사실 구택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직접 경험해 보니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가장 부드러운 부분이 더 강하게 울렸다.심명은 붉은 입술을 가볍게 말아 올리며 미소 지었다.“비록 환상 속에서도 내가 당신에게 졌지만, 이번엔 확실히 알았어요. 그리고 당신도 깨닫길 바라요.”“당신이 계속 이길 수 있었던 건 네가 소희를 더 오래 알아서도 아니고, 소희를 더 사랑해서도 아니에요. 소희가 흔들림 없이 너를 선택했기 때문이죠.”구택의 눈빛이 더 깊어졌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심명에 대한 적대감마저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연희는 방 안쪽을 한번 힐끔 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희가 오래 기다렸어요. 들어가세요. 밖은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두 분만의 시간을 즐기세요.”“고마워요.”“임구택 사장님!”연희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목
신부와 신랑 친구들은 모두 밖에서 사진을 찍고 웃으며 떠들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모두 성연희가 나온 줄 알고 순식간에 몰려들며 외쳤다.“연희 씨, 너무 사심이 드러나는 거 아니에요?”“이렇게 쉽게 넘어가려 하지 마세요. 노명성 사장님께도 꼭 미션 하나 더 추가해야죠!”“어라, 근데 왜 심명 씨가 나와요?”“연희 방 안에 있었던 거 아니에요? 어디 간 거죠?”그 틈을 타 연희는 손에 든 두툼한 돈봉투를 흔들며 빠르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어 몰려드는 손님들을 향해 봉투 속 돈을 흩뿌렸고, 곧바로 명성에게 달려갔다. 명성은 두 팔을 활짝 벌려 그녀를 받아 안았다.연희는 명성의 허리를 다리로 감고 크게 웃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드레스의 스커트가 땅에 끌렸고, 그녀의 오목조목한 이목구비는 눈부시게 빛나며 자유롭고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뒤에서는 돈봉투를 잡으려는 사람들 때문에 성연희를 잡으려던 조백림과 몇몇 이들이 이미 밀려나 있었다.순식간에 정원은 돈봉투를 다투는 사람들, 심명과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 그리고 연희를 찾으려는 사람들로 혼란이 가득했다....한편 방 안에서는, 임구택이 안방으로 들어서며 침대에 앉아 있는 소희를 발견했다.소희는 전통 혼례복을 입고 있었다. 광택 있는 이중 비단 소매와 어깨를 덮은 복잡한 금실 문양이 돋보이는 상의에는 커다란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옷에는 금실로 수놓아진 구름과 황금 문양이 화려하게 펼쳐져 있었고, 그 아래 치맛자락은 침대 위로 펼쳐졌다. 마치 금실로 수놓은 것이 살아 움직일 것 같은 생동감으로 소희의 자태를 감쌌다.머리는 단정히 뒤로 올려 묶고, 귀 옆으로는 금실과 옥으로 된 긴 술 장식이 살짝 내려와 있었다. 그녀의 눈은 검고 맑았으며, 붉은 입술은 화사하게 빛났다. 어여쁜 혼례복이 소희의 희고 맑은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오랜 기다림 때문인지 소희의 눈빛에는 약간의 나른함이 서려 있었지만, 등을 곧게 편 기품과 달처럼 차분하고 서늘한 분위기가 자신이 입은 이 복잡한 혼례복을 완벽히
소희는 침대 위에 서서, 서 있는 임구택보다 한 뼘 더 높아진 위치에서 손을 뻗어 그의 정장 상의를 벗기기 시작했다. 구택은 그녀의 가늘고 하얀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낮게 웃었다.“밤에나 받을 줄 알았던 대접을 지금 받게 된다니, 생각도 못 했네.”소희는 그의 농담에 반응하지 않고 미소를 머금은 채 계속 손을 움직였다. 구택의 정장을 벗긴 뒤, 소희는 준비해 둔 긴 예복을 집어 들고 그의 어깨 위에 입혀 주었다. 소희는 구택의 단추를 하나하나씩 잠갔다.구택이 입은 혼례복은 소희가 직접 디자인한 것이었다. 자기 혼례복과 동일한 비단으로 만들어졌으며, 중심에는 도경수가 직접 수놓은 문양이 있었다.소매와 깃에는 그녀의 혼례복과 동일한 금색 음각 무늬가 들어가 있었고, 전통적인 디자인에 현대적인 요소를 가미해, 그의 검은 바지와도 완벽히 어울렸다.소희는 마지막 단추를 잠그고 한 발짝 물러섰다. 소희는 혼례복을 입은 구택을 바라보며 그의 한층 더 빛나는 모습에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가 풍기는 고결함과 당당함은 눈부시게 찬란했다.구택은 소희를 번쩍 들어 올려 침대에 앉혔다. 한쪽 팔로 그녀를 지탱하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의 눈빛은 뜨겁고도 강렬했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성연희가 너한테 키스하지 말라 했는데 참을 수가 없어. 어쩌지?”소희는 구택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손을 들어 치맛자락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녀의 손바닥에는 립스틱 한 개가 있었다.“연희가 이걸 준비해 줬어.”구택의 눈빛이 깊어지며 주저 없이 소희의 얼굴을 감싸고 입술을 맞추었다. 그의 키스는 절제되지 않았고, 마치 그녀를 삼키려는 듯한 강렬함이 담겨 있었다. 소희를 향한 그리움과 사랑이 폭발하듯 키스 속에 담겨 쏟아져 나왔다....정원에서는 들러리와 신랑 친구들이 게임을 하며 환호를 질렀다. 손님들은 이 광경을 사진으로 찍으며 웃음과 함성을 쏟아냈고, 결혼식의 흥겨운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었다.구택은 한 손으로 침대를 짚고, 다른 손으로는 소희의 허리를 감싸 그녀에
“소희야, 이제 나와 함께 갈래?”임구택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소희는 구택의 손바닥 위에 자기 손을 살며시 얹자, 그는 그녀의 손을 단단히 움켜쥐었다....밖에서는 신부 친구들과 신랑 친구들이 게임을 하며 시끌벅적하게 놀고 있었고, 많은 하객도 그 대열에 합류하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사람들의 소리가 잦아들며 모두 일제히 방의 문 쪽을 바라보았다.문이 열리자, 구택이 소희의 손을 잡고 나왔다. 눈이 부시는 티아라와 혼례복을 입은 소희의 모습은 사람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티아라의 다이아몬드 장식이 햇빛 아래 반짝이며 소희의 얼굴을 은은하게 감췄다 드러냈다. 옆에 서 있는 신랑은 그의 잘생긴 외모 때문인지 날씨 때문인지 눈이 부셨다.두 사람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조선 시대의 왕과 중전이 오랜 시간을 넘어 나타난 것처럼 고풍스럽고 위엄이 넘쳤다.결혼식을 중계하던 기자들도 멍하니 한동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이런 결혼식, 이런 신랑과 신부는 평생을 두고 다시 보기 어려운 광경이었다.붉은 카펫이 깔린 길을 따라 구택은 소희의 손을 잡고 본채로 향했다. 뒤따르던 사람들도 정신을 차리고 그들을 따라갔다. 신랑과 신부는 마치 하늘의 별들로 둘러싸인 듯 모두의 중심에 서 있었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워낙 압도적이어서, 본래의 떠들썩했던 분위기마저 차분하고 엄숙해졌다. 붉은 카펫을 밟으며 본채에 들어서자, 안에는 강재석, 도경수, 강시언을 비롯한 강씨 집안의 주요 어른들과 중요한 하객들이 자리하고 있었다.혼례복을 입고 들어오는 소희를 보자, 강재석은 아무 말도 하기 전에 이미 눈가가 젖어 있었다. 그는 감격과 기쁨이 뒤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약하고 왜소했던 그 소녀가 이렇게 자라 웅장하고 아름다운 혼례복을 입고 자신이 준비한 옷으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게 된 모습을 보고 있었다.오석은 차를 들고 다가오며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다.“소희 아가씨, 임구택 사장님, 두 분
서인은 안토니네 가족과 이야기를 나눈 지 채 30분도 되지 않아, 밖에서 누군가가 소리치는 소리를 들었다.“윤석경 씨, 잠깐 나와 보세요! 이 사람이 당신네 집 손님 맞나요?”서인은 순간 미간을 좁히며, 무언가를 예감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밖으로 향했다. 토니의 부모도 급히 그를 따라 나갔다. 밖에는 오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 단정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머리는 곱슬머리로 말려 있었다. 여자는 토니네 가족을 보자마자, 곧장 손가락으로 한쪽에 서 있는 유진을 가리켰다.“이 사람이 당신네 손님 맞아요?”유진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제발 소리치지 마세요! 제가 돈 드린다고 했잖아요!”유진은 당장이라도 땅속에 숨고 싶은 심정이었고, 서인은 다가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죠?”박민란은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이 여자랑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지만, 내 난초를 뽑아서 토끼 먹이로 줬어요! 내 난초가 얼마나 비싼 줄 알아요?”“조금만 늦었어도 다 뽑혀 나갔을 거예요!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에요? 이건 엄연한 도둑질이라고요!”유진은 머리를 싸매고 싶었고, 작은 목소리로 서인에게 변명했다.“난초인 줄 몰랐어요. 그냥 잡초인 줄 알았어요.”유진은 마치 잘못을 저지르고 부모님께 혼나는 아이처럼 위축되었다. 그러나 박민란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듯 쏘아붙였다.“변명하지 마요! 어쨌든 내 난초를 뽑은 건 사실이잖아요!”그때, 윤석경이 나서서 말했다.“우리 집에도 난초가 있으니까, 그걸로 대신 보상해 줄게요. 어린애한테 그렇게 큰소리칠 필요까지야 있나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요.”하지만 박민란은 완강했다.“안 돼요! 당신네 집 난초랑 내 난초는 품종이 달라요! 그러니 난 절대 못 받아요!”윤석경도 화가 났다.“똑같은 난초잖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박민란이 계속해서 억지를 부렸다.“내 난초는 특별히 돈 들여 키운 거예요. 이미 손님이 예약한 거라고요! 근데 이제 어쩌란 말이에
안토니는 이미 저들과 한 차례 몸싸움을 벌였는지, 얼굴에 상처가 있었다. 그는 부모님 앞을 가로막고 서서, 강제로 계약서에 서명시키려는 남자들과 격렬하게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그때, 서인이 안으로 들어섰고,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란 눈으로 서인을 바라봤다. 서인은 그저 아무 말 없이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이윽고 한 손으로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며 차갑게 말했다.“안토니네 가족은 이사하지 않으니까, 당장 꺼져요!”그때, 상대편의 우두머리 격인 남자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당신 누구야? 당신이 뭔데 결정해?”서인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지금부터 이 집안일은 내가 결정해.”임유진도 단호하게 나섰다.“당신들, 합법적인 철거 허가서라도 있어요? 없으면, 지금 이건 불법으로 민가에 침입한 거고, 타인의 재산을 침해하는 범죄예요! 신고하면 처벌받을 수 있다고요!”남자는 싸늘한 눈빛으로 유진을 노려보았다.“신고? 해보시지, 이 계집애가!”남자는 말을 끝맺지 못했는데, 서인의 차가운 눈빛이 번뜩이며 그를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했고,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이내 남자는 수치심에 휩싸여 분노를 터뜨렸고 뒤에 있던 부하에게 눈짓을 보냈다. 곧, 우락부락한 남자가 앞으로 나서더니, 주먹을 쥐고 서인을 향해 돌진했다.그러나 서인은 간단하게 공격을 막았다. 팔을 낚아채어 비틀어버린 후, 가슴팍을 발로 걷어찼다.쿵! 남자는 그대로 공중으로 튕겨 올라 바닥에 내팽개쳐졌다.“으악!”놀란 안주설과 토니네 부모님이 급히 뒤로 물러섰다. 토니는 같이 싸우려 했지만, 서인이 손을 들어 막았다.“넌 신경 쓰지 마.”서인의 태도는 한결같이 차분했지만, 움직임은 날카롭고 거칠었다. 몇 초 만에 남은 두 명까지 모두 쓰러졌다.우두머리는 바닥에 널브러진 부하들을 보며, 서인이 보통 상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대로 정면으로 붙었다가는 자기들이 더 크게 당할 것이 뻔했다.그는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쳤다.“기
서인이 약속한 장소는 호텔 맞은편에 있는 찻집이었다. 두 사람이 몇 분을 기다리자, 상대가 도착했다.그는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였고, 짙은 남색의 운동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멀리서 서인을 발견한 남자는 곧바로 흥분한 표정을 지었다.걸어오면서 팔을 벌렸고, 서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하이파이브를 한 뒤, 어깨를 가볍게 맞댔다가 서로를 끌어안았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 같았다.“이렇게 오래 못 봤는데, 네가 갑자기 연락할 줄이야. 아직도 믿기지 않네!”남자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그는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얼굴에는 감정이 서려 있었다.이에 서인은 담담하게 웃었다.“정말 오랜만이긴 하죠.”“예전에 너희 작전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남자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아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살아 있어서 다행이네.”서인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인은 남자를 데리고 자리로 돌아왔다.임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안녕하세요!”남자는 놀란 듯 서인을 쳐다보았다.“여자친구야?”서인은 짧게 답했다.“아니요. 그냥 같이 온 친구예요. 임유진.”그는 이어서 남자를 소개했다.“이한우라고 해요.”유진은 그를 한 번 보더니 따라 불렀다.“한우 씨!”한우는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서인의 친구라면 나한테도 친구나 다름없죠. 편하게 있어요.”세 사람은 자리에 앉았고, 서인과 한우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유진은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다실에서 나온 말차 케이크와 재스민 차를 즐겼다.서인은 흥성에서 기반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한우는 지역에 오래 정착한 사업가로, 여러 방면에 인맥이 있었다.서인은 안토니네 가족을 돕기 위해 한우를 찾아온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한우는 별다른 고민도 없이 흔쾌히 말했다.“리조트 호텔 사장은 모르지만, 철거 보상 담당자는 잘 알지. 같이 술도 마셨던 사이라, 내
서인이 자신을 바라보자, 임유진은 재빨리 침대 옆 협탁에서 안대를 꺼내 들었다. 자신이 눈을 가릴 거라는 뜻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이미 씻었어.”서인은 무심하게 말한 뒤, 고개를 돌려 물었다.“불 꺼도 돼?”방 안에는 서인의 쪽에만 벽 등이 켜져 있었다. 이에 반쯤 몸을 돌린 채 유진을 바라자, 유진도 마찬가지로 그를 바라봤다. 둘의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 공간이 멈춘 듯한 정적이 흘렀다.그저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고작 오초였지만, 묘하게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유진의 눈빛은 마치 깊고 맑은 호수 같았다. 그 안에 잔잔한 물결이 퍼지는 듯했다.어둠 속에서도 유진의 눈빛이 한층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 헐렁한 티셔츠의 목 부분이 흘러내려, 가느다란 어깨가 반쯤 드러났다. 유진의 피부는 눈이 부시게 하얗고 매끄러웠다. 마치 만지기라도 하면 부서질 듯한 촉감이 느껴질 것 같았다. 그러나 곧, 방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그 짧은 순간에 묘한 분위기도 함께 사라졌다. 유진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유진은 서인의 침대 너머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야외 수영장의 물이 조명이 반사되어 은은하게 출렁이고 있었다. 마치 유진의 들뜬 마음처럼, 물결이 잔잔하게 일렁였다. 그러나 곧, 자동으로 커튼이 내려졌다.그 작은 물결조차 보이지 않게 되었다. 서인이 일부러 그런 것임을 알고, 유진은 살짝 토라진 얼굴로 침대에 누웠다. 이윽고 이불을 단정하게 덮고 눈을 감았다.서인도 조용히 눈을 감았으나 방 안에는 은은한 향이 맴돌고 있었다. 샤워를 마친 유진의 상쾌한 바디워시 향이 공기 속에 가볍게 떠돌았다. 희미하지만, 너무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마치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가슴 깊이 스며드는 듯했다.다음 날 아침, 서인은 눈을 뜨자마자 머리가 멍해졌다. 그러나 곧 모든 감각이 선명해지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이게 뭐지?’유진은 원래 잘 때 얌전한 모습이었으나 자고 나면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녀의 이불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침대 위에
유진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방으로 돌아가 휴대폰을 챙겼다. 왜냐하면 유진이 가져온 것은 오직 휴대전화뿐이었다. 두 사람은 조용히 계단을 내려갔다. 어둑한 복도에서, 유진은 무의식적으로 서인의 손을 잡았다.그리고 이번에는 서인이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유진은 조금씩 용기를 내어 손가락을 더 깊이 엮었고, 결국 그의 손 전체를 단단히 쥐었다.서인의 손은 크고 뼈마디가 굵었으며, 손바닥에는 거칠지만 단단한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그러나 유진은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촉감이 이상하게도 더 마음에 들었다.깊은 밤, 조용한 복도에서, 유진은 자기 심장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쿵, 쿵. 긴장과 부끄러움, 그리고 묘한 설렘이 섞여 있었다.민박집을 떠난 뒤, 서인은 차를 몰아 유진과 함께 산을 내려가 도시로 향했다. 그는 자기 외투를 벗어 유진의 어깨 위에 걸쳤다. 어둠 속에서 서인의 날렵한 얼굴선이 더욱 차갑고 도도해 보였다.“잠깐 눈 붙여. 도착하면 깨울게.”하지만 깊은 밤 도로를 달리는 이 순간이, 유진에게는 너무나도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그리고 유진은 전혀 졸리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반짝이며 전방을 바라보며 서인과 대화를 나눴다.“그 쥐덫, 아무 소용도 없을 거예요. 쥐는 계속 나올 거라고요.”그곳의 쥐들은 너무 대담했다. 사람을 무서워하기는커녕, 창가에 올라와 그녀와 눈을 마주치기까지 했다.서인은 물었다.“그러면 왜 날 안 불렀어?”유진은 서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입을 막고 있었거든요!”유진은 서인이 피곤할까 봐 일부러 참고 있었다. 하루 종일 운전했으니, 이미 녹초가 됐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침대 속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그냥 밤새도록 그렇게 버틸 생각이었다가 그 소리를 들었다. 바로 맞은편 방에서 들려오는 민망한 소리.그 순간, 유진은 차라리 쥐랑 함께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 그때, 서인이 문을 두드렸다. 그 순간이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유진은 본능적
“임유진!”서인의 목소리는 다급하고 거칠게 떨렸다. 그는 급히 옆방 문을 두드렸고, 문이 열리는 순간, 임유진이 그대로 서인의 품에 뛰어들었다.서인은 방 안을 빠르게 둘러봤으나 별다른 이상은 없는 듯했다. 그제야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 풀어지며 조용히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유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저, 저기 쥐가 있어요!”서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반쯤 설명하고 반쯤 달래듯 말했다.“이런 곳에서는 쥐가 나오는 게 당연해. 그냥 네 방을 지나간 거야. 널 물지는 않아. 오히려 네가 더 무서울걸?”하지만 유진은 서인의 품 안에서 겁에 질린 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제야 서인은 유진의 모습을 제대로 보았다.커다란 티셔츠 한 장만 걸친 채, 하얀 다리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 창백할 정도로 희고 매끈한 피부가 시각을 자극했다.반면, 서인은 방금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있다가 나왔기에, 바지만 입고 상의는 벗은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 서인은 목이 바짝 타는 듯했고,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얼굴이 굳어버렸다.손을 뻗어 유진을 떼어내려 했지만, 유진은 겁에 질려 서인의 허리를 더 꼭 붙잡았다. 두 사람은 문 앞에서 그렇게 서 있었다.혹시라도 누가 지나갈까 걱정된 서인은 유진을 가볍게 안아 방 안으로 들어간 뒤, 문을 닫았다. 그러나 유진의 티셔츠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였기에, 그녀의 부드러운 체온이 서인의 맨가슴에 고스란히 닿았다.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느낌이 들자, 서인은 서둘러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고 이불로 감싸주었다.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유진은 얼굴이 불타오르듯 붉어졌다.그녀는 이불을 꼭 움켜쥔 채 눈을 피했고, 서인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안토니한테 가서 쥐 잡을 도구가 있는지 물어볼게.”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이자, 서인은 곧장 방을 나섰다. 유진은 그의 넓은 어깨와 탄탄한 허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길이 미묘하게 흔들렸다가, 황급히 창밖으로 시
안토니는 서인에게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부모님이 여기서 민박집을 운영하는 모든 절차는 다 정식으로 등록된 거예요. 게다가 이 땅은 호텔 부지에 포함되지도 않고요.”“그런데도 그 사람들이 철거하라고 명령할 수 있어요? 보상금도 터무니없이 적고, 우리 부모님은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라는 거죠?”“하지만 호텔 뒤에는 권력과 돈이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아무도 우리 편에 서지 않아요.”임유진은 분통이 터져 소리쳤다.“이건 완전히 강도질이잖아요! 소송이라도 걸어야 하죠!”토니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소용없어요.”“사실, 보상금이 충분하다면 철거를 고려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그 옆에서 안주설이 조용히 말하자, 토니는 즉시 그녀의 말을 끊었다.“얼마를 준다 해도 안 돼. 우리 고향 집도 이미 팔아버렸어. 부모님께 남은 건 이 민박집뿐이야. 여기가 없어지면 어디로 가란 말이야?”주설은 난처한 표정으로 웃으며 변명했다.“그냥 의견을 낸 것뿐이야.”서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상황은 알겠으니까 방법을 찾아볼게.”토니는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정말 어쩔 수 없어서 서인 형한테 전화한 거예요. 형이 강성에 있는 거 알지만, 흥성 일에는 개입하기 어려울 수도 있잖아요.”토니는 분노에 휩싸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서인에게 연락을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서인은 그날 바로 달려와 주었다.서인은 단호하게 말했다.“토니 형과 나는 형제나 다름없어요. 걔의 일은 내 일이나 마찬가지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해결할 테니까요.”토니의 부모는 연신 감사를 표했다.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밤 11시가 되었다. 토니는 2층에 서인과 유진을 위한 방 두 개를 준비해 주었다. 계단을 올라가며, 유진은 서인에게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나 아무것도 안 가져왔어요.”서인은 고개를 돌려 토니에게 물었다.“새 세면도구 있어? 갑자기 오느라 아무것도 못 챙겼어.”“당연하죠! 다른 건 몰라도 세면도구는 넉넉
유진은 뭔가 떠오른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생각하니까 정말 비싼 건 아니네요!”서인의 품에 안겼으니, 20만원이라도 아깝지 않았다. 서인은 본래 유진을 위로하려 했는데, 그녀의 표정을 보자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순간 서인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유진은 기분이 좋아진 듯 미소를 지었다.“이미 산 거니까, 그냥 먹어요. 버리긴 아깝잖아요!”그녀는 티슈로 사과를 닦아내고 서인에게 하나 건넸지만, 서인은 거절하며 고개를 저었다.“난 안 먹어.”“그럼 저 혼자 먹을게요!”유진은 사과를 입에 가져가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사과가 신선해서 아삭하게 씹히며 입안 가득 달콤한 과즙이 퍼졌다.이윽고 차 안에 오직 사과를 씹는 소리만 울렸다. 서인은 앞을 주시하며 운전을 계속했지만, 무심결에 목젖이 한 번 움찔거렸다. 유진은 연달아 몇 입을 베어 물다가 반쯤 먹은 사과를 들고 서인을 바라봤다.“정말 안 먹어요? 진짜 맛있어요!”2만원으로 이 정도 퀄리티라면 완전 대박이었다. 그러나 서인은 도로를 응시한 채 담담하게 말했다.“보통 과수원에서는 사람들이 몰래 따 먹는 걸 방지하려고 사과에 농약을 뿌려 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에 든 사과를 바라봤다가 곧 얼굴이 새파래졌다.“왜 이제야 말하는 거예요?”서인은 태연하게 대답했다.“방금 떠올랐어.”“어떡하죠? 나 중독되는 거 아니에요?”유진은 볼을 불룩하게 부풀리며 억울한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내가 만약 중독돼서 장애라도 생기거나, 바보가 되면, 사장님이 평생 책임져야 해요!”서인은 웃음을 터뜨렸다.“그게 왜 내 탓이지?”“사장님이 산 사과잖아요!”당당한 유진의 태도에 서인은 말문이 막혔다. 물론, 사과에 농약 따위는 없었다. 결국 유진은 바보가 되지도, 장애가 생기지도 않았고, 심지어 배 아픈 일조차 없었다.두 사람이 안토니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10시였다. 토니네 민박집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다.주변에는 몇 개의 민박집이 듬
산길 위로 가끔 여행객들의 차가 지나갔다. 멀리 보이는 민박집의 불빛이 어둠 속에서도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이게 무슨 냄새지? 사과 향 같은데?”임유진은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기쁜 표정으로 돌아보며 말했다.“저기 사과나무가 있어요!”서인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만 가자. 이제 출발해야 해.”“딱 하나만 따면 돼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성큼성큼 사과나무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무에 열린 사과를 봤다. 달빛을 받아 가장 크고 탐스러운 사과를 골라 따냈다. 그리고 서인에게 줄 사과도 하나 더 따려 했다.사과를 막 손에 쥐려던 찰나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가 내 사과를 훔쳐 가지? 거기 서요!”어둠 속에서 손전등 불빛이 깜박였고,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멀리서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유진은 얼어붙었다. 사과나무가 야생인 줄 알았는데, 주인이 있는 나무였다니!유진은 처음에는 자리에 서서 주인을 기다려 설명하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사람의 고함과 함께 거친 숨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개 한 마리가 보였다. 커다란 개가 사나운 기세로 유진을 향해 돌진했다.유진은 등골이 오싹해지며 온몸의 털이 곤두서, 본능적으로 뒤돌아 도망쳤다.“사장님!”멍! 멍멍멍! 사람 허리까지 올 법한 덩치 큰 검은 개가 빠르게 움직였다. 유진이 달아나는 것을 보자 더욱 거칠게 그녀를 향해 뛰어들었다. 유진은 손에 사과 두 개를 꼭 쥔 채, 있는 힘껏 서인을 향해 달렸다.서인도 상황을 보고 얼굴이 굳어졌고, 유진을 향해 달려갔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자, 유진은 순식간에 뛰어올라 그의 품에 안겼다. 유진은 겁에 질린 채 서인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 순간, 개가 가까이 다가왔고, 서인은 한쪽 다리를 들어 강하게 개를 걷어찼다. 50킬로그램은 나갈 듯한 큰 개가 힘껏 날아가 땅에 쾅 하고 떨어졌다.개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몇 번 뒤틀다가 겨우 일어났지만, 아까의 사나운 기세는 사라지고 멀찍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