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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노을
다음날, 난 간호사의 안내를 받으면서 수술실로 향했다.

산부인과 병동이라 출산한지 얼마 안 된 아이가 수술실에서 실려 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이가 나오는 순간 가족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우르르 다가가 아이와 산모의 건강을 살피면서 걱정해 마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고서 난 자기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졌고 고개를 숙인 채 배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간호사는 나의 그러한 모습에 내가 긴장이라도 한 줄 알고 핸드폰을 보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라고 했다.

난 영혼 없이 핸드폰을 손에 들고서 멍하니 넋을 놓기 시작했다.

손가락은 어느새 SNS 스토리를 향해 누르고 있었고 마침 지현이가 정성껏 올린 스토리를 보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행복한 여행.]

이러한 문구와 함께 손깍지를 하고서 다정한 모습으로 사진을 찍은 두 사람이 보였다.

비록 결혼식날에 난 이미 이 감정을 포기하기로 마음을 먹었었지만, 지현의 스토리를 보게 된 순간 어느새 눈물이 앞을 가리고 말았다.

평소 정훈은 사업으로 눈 코 뜰 새가 없었고 우린 결혼식을 한없이 뒤로 미뤄야만 했었다.

따라서 결혼식도 신혼 여행도 난 미뤄지는 시간 동안 이내 기대하고 기다려왔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기대의 끝에 이러한 실망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었다.

난 눈물을 닦고난 뒤 어느새 화면까지 적셔버린 눈물 방울을 닦으려고 했으나 그만 ‘좋아요’를 누르고 말았다.

‘취소’버튼을 누르기도 무섭게 바로 알림 소리가 들려왔다.

[소이현, 이번 신혼 여행은 원래 너랑 가려고 했었어. 근데 네가 고집부리면서 싫다고 했잖아. 그렇다고 이미 예약해놓은 코스를 취소할 수도 없잖아.]

난 정훈의 연락처를 바로 차단해 버렸다.

‘차라리 보지 않은 게 편해.’

그러자 정훈은 계속 전화를 걸러왔고 엉겹결에 간호사가 나를 부르고 있는 걸 듣게 되었다.

정훈은 그제야 내가 병원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관심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소이현, 너 아파? 얼마나? 지금 갈까?]

그러자 옆에서 말리고 있는 지현의 목소리가 뒤따라 들려왔다.

[오빠, 이현 언니 말이야, 혹시 내가 올린 스토리 보고서 꾀병 부리는 거 아니야? 우리 여행 망치려고 말이야. 오빠, 절대 속아 넘어가면 안 돼. 아파봤자 나보다 심각하겠어?]

정훈은 잠시 생각하더니 지현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 날 그렇게 세게 때려놓고 나서 갑자기 아프다니 말도 안 돼.’

이윽고 정훈의 욕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이현! 제발 그깟 연기 좀 그만해! 수작도 제발 좀 그만 부리고! 그깟 꼼수에 내가 바보처럼 넘어갈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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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에서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회사 상사 역시 다음 시즌 테마 평론을 나에게 맡겨주신다고 약속해주셨다.정훈은 외국까지 쫓아와서 매일 나에게 출근 체크를 했다.매일 신선한 장미를 보내왔고 내가 쥬얼리 매점을 지나다가 우연히 흘끗 본 보석을 사서 주기까지 했다.외국인 동료들조차 내 매력이 뛰어나다면서 놀릴 정도로 말이다.내일은 또 어떤 선물을 안고 올지 서로 내기까지 하면서.그러나 난 매번 그 선물들을 그대로 도로 보냈다.“네 감정과 마찬가지로 값싸고 의미 없어.”그 말에 자극을 받았는지 정훈은 자신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크리스마스 눈 내리는 밤에 정훈은 내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참회했었다.“네가 겪었던 모든 억울함을 나 역시 그대로 받아볼게.”그는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고 초췌해져서 본연의 모습을 잃은 지 오래였다.흩날리는 눈이 그에게 내려 난 서서히 예전의 일이 생각나기 시작했다.그날도 오늘과 같은 눈 내리는 밤이었다.운전하다가 실수로 외곽에서 고장이 났었는데, 그때 난 정훈이에게 전화를 걸었었다.그때 정훈은 술에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곧 도착할 것이라고 했었다.그러나 밤새도록 기다려서 거의 기절할 뻔했고 그는 뒤늦게 와서 회사에 일이 있다면서 늦게 왔다고 했었다.알고 보니 그는 내가 어떤 억울함과 상처를 받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여태껏 못 본 척했을 뿐이었다.다만 난 지현처럼 자꾸 아프다고 호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이제야 날 소중히 여기기 시작하는 거야...’“이제 곧 파티 시작될 거야. 방해하지 말고 얼른 가.”“무릎 꿇고 싶다면 내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서 꿇어.”정훈이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집안의 따뜻한 조명 아래서 내가 동료들과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파티를 즐기고 있는 걸 바라보았다.오직 그에게만 있었던 행복이었는데.하지만 지금은 마치 시궁창에 있는 쥐처럼 남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다.스스로 수없는 모욕을 자초하는 외에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정도로.

  • 대타에서 주인공으로   제15화

    이혼 후, 난 회사의 해외 연수 프로젝트를 신청했다.예전에 난 정훈을 위해 너무 많은 기회를 포기했고 회사 상사조차도 항상 명문대 출신이 아깝다고 말했었다.난 회사 근처에 셋방을 얻어 살기 시작했는데, 아빠와 엄마의 스팸 전화가 끊이지 않았고 심지어는 회사로 찾아와서 내가 부모님을 모시지 않는다고 폭로하겠다고 협박까지 가했었다.난 그들을 고소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뜻밖에도 정훈이가 먼저 그들을 법정에 세웠다.정훈이가 나에게 소식을 전하러 왔을 때, 난 저녁 출국 비행기를 타기 위해 서둘러 짐을 싸고 있었다.일하느라 나날이 야위어가는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정훈은 후회와 더불어 안쓰러워했다.“이현아, 이혼한 거 알지만 그래도 보고 싶어서 그래.”“그날 네가 준 건 지금껏 보고 있고 반성도 많이 하고 있어. 앞으로 네 기분부터 생각해주고 더는 속상하지 않게 해줄게. 그러니 다시 한번 기회 주면 안 돼?”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정훈의 차를 타고 함께 온 지현이었다.지현은 눈물을 글썽이며 전과 같은 뉘앙스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오빠, 이미 이혼한 사이에 왜 이렇게 비굴하게 구는 거야?”정훈은 귀찮아하면서 지현을 확 밀쳐냈다.“우리 사이가 어떤지 그건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지현은 그 말을 듣고서 얼굴이 하얗게 질려 쓰러진 척 하려고 했는데, 정훈이가 꺼낸 캡쳐 사진에 놀라 정신을 번뜩 차렸다.그건 정훈이가 그동안 애써서 지현 친구에게 부탁해서 얻은 외국 의사 진찰 기록이다.그 외국 의사는 자기가 내린 진찰이 아니라면서 불치병도 모두 지어낸 일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더 할 말이 남았어? 내가 널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데, 그동안 날 속인 거였어? 그래 놓고서 나랑 이현이 사이를 그렇게 찢어놓은 거야?”지현은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오빠, 난 오빠 사랑해서 그런 거야.”“닥쳐! 그게 사랑이야? 그리고 넌 날 사랑한 거야? 내 돈을 사랑한 거지.”정훈은 진작에 지현의 채팅 기록을 보

  • 대타에서 주인공으로   제14화

    정훈은 그대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고 회사의 주가도 하한가로 떨어졌다.경찰의 도움으로 별장에서 구조되었을 때, 난 정원에 서서 오랜만에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경찰이 가족에게 연락을 했는데 그들은 내가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비난하기 위해서 찾아왔었다.“남편을 감옥에 보내? 너 죽고 싶어 환장했어?”“누나,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독할 수 있어? 매형이 얼마나 잘해주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그래. 나 원래 독한 사람이야! 이제 알았어?”난 어이가 없어서 웃으면서 덧붙였다.“아참, 오늘부터 난 더는 당신들 딸도 누나도 아니야.”아빠는 눈을 부라리며 달려들어 날 때리려고 했고 난 바로 경찰 뒤로 몸을 피했다.“잠깐! 그동안 집에서 가져간 돈이 어마어마하지? 부부 공동 재산이니 난 되찾을 권리가 있어.”“그리고 내 은행 카드에 있는 돈 무단으로 가져간 죄까지 받아야 할 거야.”“사위 콩밥 먹이고 싶지 않으면 내 제안 고려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우린 앞으로 그 어떠한 관계도 없고 서로 남남이거든!”그들은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경찰이 바로 앞에 있어서 나를 쏘아보고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경찰서에서 나왔을 때 정훈의 얼굴은 초췌하기 그지없었다.그는 비로소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고 줄곧 그를 떠나려고 애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내 말은 한 번도 진지하게 들은 적이 없지?”난 증거들을 그의 얼굴에 확 뿌리쳤다.그동안 당한 상처와 억울함을 모두 기억하고 있으며 책으로 수록했으니 말이다.정훈은 보면 볼수록 당황스러웠고 과거에 나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었는지 알게 되는 듯했다.정훈은 줄곧 나에게 사과를 하면서 통곡을 그치지 않았다.“이현아, 미안해... 내가 죽일 놈이야... 상처주서 진짜 미안해...”그의 뒤늦은 참회는 그토록 우습게 보일 수가 없었다.난 진작에 경찰과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이혼 합의서를 작성했고 그가 서명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내가 이혼하자고 얘기를 꺼내자 정훈은 바로 쩔쩔매며 무릎을

  • 대타에서 주인공으로   제13화

    정훈은 나의 어깨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기자는 내가 불러줄 테니 넌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돼.”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고서 미동도 없이 그의 포옹을 피했다.과연, 바로 다음 날 기자들이 우르르 찾아왔다.한시도 기다릴 수 없는 듯한 정훈의 모습이었다.‘지현이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날 휘몰아칠 수 있구나.’정훈이 준비해준 대사로 난 읽기만 하고 모든 잘못을 짊어지기만 하면 된다.이번 인터뷰는 생방송으로 진행되는데, 그동안 내가 일해온 환경이라 두렵지는 않았다.조명이 얼굴을 쏘아올 때, 생방송이 시작되었다.순간 쏟아져 들어온 네티즌들은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고 하나같이 듣기 거북했다.난 그 모든 걸 못 본 척하고 기자가 취재를 준비하는 동안 두꺼운 대사 아래에서 인쇄된 스크린샷 몇 장을 꺼냈다.전에 지현이가 보내준 그들의 다정한 사진, 그리고 나와 정훈의 결혼 증명서, 내가 그에게 구금되어 협박을 당했었던 증거들이다.정훈은 잘못된 것을 깨닫고 생방송을 끊으려고 허둥지둥했다.그렇게 방송이 끊기기 1초 전, 난 ‘신고해주세요’라고 미친듯이 목청놓아 소리쳤다.

  • 대타에서 주인공으로   제12화

    다음날, 집으로 돌아온 정훈의 안색은 수척하기 그지없었다.한눈에 봐도 밤새 잠을 못 잔 모습이었다.정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지시하는 듯 말했다.“소이현, 어제 일은 내가 대충 알아봤는데, 제삼자 그 신분 말이야 일단은 네가 좀 짊어지고 있어.”난 그런 정훈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었다.정훈은 내 시선을 피하며 한마디 덧붙였다.“지현이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잖아. 지현이 명성에 영향줘서도 안 되고.”이유 불문하고 무조건 지현을 지지해주리라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어이가 없었다.“그럼, 내 명성은? 욕 먹어도 싸다는 거야?”정훈은 큰소리를 치면서 별문제가 아닌 것처럼 말했다.“여하튼 넌 이미 나랑 결혼했잖아. 명성 따위가 중요하지도 않잖아.”“게다가 네가 하고 있는 일이 이런 거잖아. 네 일에 영향을 줬다면 그래서 해고라도 됐다면 집에서 가정주부로 살아. 내가 널 먹여살릴 수 있어.”사실 난 저 미디어회사에서 화면에 자주 등장하는 뉴스 평론가이다.평소에 많은 여론을 겪었지만 그것은 업무상 필요한 위험 요소일 뿐이었다.따라서 지현이보다는 내가 더 잘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욕을 먹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정훈인 듯싶다.정훈은 내 표정이 점점 차가워지자 당황해 하더니 이내 말투를 누그러뜨리고 손을 들어 맹세하며 덧붙였다.“이 일만 지나고 나면, 다시는 지현이랑 만나지 않을게.”그러한 거짓말 역시 정훈의 말뿐이라 생각했다.난 잠시 침묵하며 비웃었다.“그래. 내가 해명할게.”“걔보다는 내가 더 유명하잖아.”

  • 대타에서 주인공으로   제11화

    정훈에게 감금된 일주일 동안, 정훈은 자주 집으로 돌아왔었다.예전보다 훨씬 많을 정도로.그러한 정훈의 모습에 지현은 분명 당황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갈수록 수단이 졸렬해졌으니 말이다.그러던 어느 날 인터넷에서 여론이 돌아선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갑자기 사람들이 지현이더러 제삼자라고 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난 그 기사를 보고서 혹시 지현의 자작극이 아닌지 생각이 들었다.그날 저녁상에 정훈은 깨끗하게 손을 씻고 난 뒤 나에게 전복죽 한 그릇을 덜어주며 다정하게 입을 열었다.“이현아, 네가 좋아하던 거야. 얼른 먹어봐.”난 가벼운 미소와 함께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입맛은 이미 달라졌는데 말이다.하지만 달라진 나의 입맛을 정훈이가 모르는 것도 사실이다.그의 마음은 온통 지현을 향해 있었으니 알고 있는 게 이상할 정도다.결혼식에서 꽃의 종류가 전에 주문했던 것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난 그가 정말 이런 물건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줄 알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제 와서 더는 정훈과 따지고 싶지 않아 난 전복죽을 그대로 건네받았다.따스한 조명 속에서 저녁을 즐기고 있는 우리, 서로 다른 마음을 품은 채 고요한 이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그의 전화가 다시 울리고 지현의 울음소리로가 다시 들려오기까지.[오빠, 인터넷에 날 욕하고 모욕하는 사람이 늘고 있어.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나 진짜 너무 무서워! 언니는 아직 화 풀리지 않았어? 그래서 나한테 복수하는 거야?]정훈은 잇달아 보내온 내용을 확인했는데,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욕설들로 온몸이 오싹해질 정도였다.[오빠, 그냥 차라리 내가 죽을게. 그게 제일 좋은 것 같아. 내가 거슬려서 그러는 거잖아.]그 말속에 숨겨둔 뜻은 가득했고 정훈은 바로 나를 바라보았다.“이현아, 난 이미 네 뜻대로 네 곁에만 있고 너만 바라보고 있어. 대체 뭘 더 어떻게 해야 직성이 풀리겠어?”그는 내가 들고 있는 전복죽을 보더니 갑자기 화를 내기 시작했다.“밤새 요리하느라 바빴는데, 뒤에서

  • 대타에서 주인공으로   제10화

    이성을 잃어버릴 정도로 화가 난 지현은 나에게 욕설로 가득 찬 메시지를 수없이 보냈다.미쳐서 날뛰는 지현과 달리 난 피식 웃었다.‘여하튼 내 목적은 달성했어.’난 바로 해외로 나갈 수 있게끔 도와만 준다면 지현과 합작할 의향이 있다고 제안했다.비록 욕설은 끊이지 않았지만 나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부랴부랴 달려온 정훈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내가 하얀 원피스를 입고서 세상 참한 모습으로 책을 보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정훈은 간만에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이현아, 네가 그동안 억울하고 힘들었던 거 잘 알고 있어. 내가 앞으로 천천히 보상해줄게.”‘미친놈...’난 속으로 그를 욕했지만 바로 억울한 연기를 하면서 대사를 이어갔다.“여보, 나도 그동안 진지하게 생각해 봤는데, 난 그래도 여보를 사랑하는 것 같아. 여보도 나 사랑하지?”정훈은 입꼬리를 씩 하고 올리면서 역시나 떼어낼 수 없는 개라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것만 같았다.그러나 내가 고개를 들어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을 때, 그는 살짝 흔들리기 시작했다.바로 나를 품에 안고서 귓가에 나지막히 속삭였으니 말이다.“이현아, 우리 다시 한번 아이 가져보는 건 어때?”말하면서 그는 나의 치마 속으로 손을 뻗었고 난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그때 마침 전화 한 통이 걸려왔고 거의 죽어가는 지현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빠, 나 너무 아파... 아파서 죽을 것 같아...]그동안 수없이 써왔던 핑계였고 쓰는 족족 걸려든 정훈이었다.내가 아무리 애원하고 붙잡아도 정훈은 늘 주저 없이 자리를 박차고 지현을 향해 달려갔었다.차갑기 그지없는 뒷모습만 남기고서 멘트는 매번 똑같았다.“아픈 사람이잖아.”“얼른 가봐.”하지만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정훈이가 갔으면 했다.더는 그와 남녀 사이의 일을 파고들고 싶지 않았으니 말이다.특히 지난번 그 일 뒤로 난 피부가 망가질 정도로 샤워를 했었지만, 역겨움은 사라지지 않았었다.그러나 정훈은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그는

  • 대타에서 주인공으로   제9화

    며칠이 지나도 지현이가 원하던 장면은 일어나지 않았다.이씨 가문 도우미들은 국가 보물을 챙기듯이 매일 조심스러운 모습으로 나를 챙겨왔다.살이 조금이라도 빠지기라도 할까 봐 내가 조금이라도 다쳐서 정훈에게 욕먹을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난 나를 향한 정훈의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지현에게 그토록 부드럽고 자상한 모습을 보이면서 나에게는 귀찮고 싫어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말이다.그러나 그러한 모습과 달리 날 놓아주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전혀 반대되는 말을 하니 알 수가 없었다.심지어 지금은 날 카나리아처럼 별장에 가두어 놓고서 나랑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도무지 도망갈 수 있는 틈이 보이지 않아 난 아빠랑 엄마한테 연락을 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침 상대로부터 전화가 먼저 왔었다.전화를 받자마자 정훈이랑 그냥 잘 살아라는 말뿐이었고 앞으로 재혼하기도 힘들다는 익숙한 소리였다.엄마는 울부짖으면서 나에게 자기 손자를 돌려달라고 책망하기까지 했었다.그렇게 마지막으로 남았던 희망마저 그들의 울부짖는 소리속에서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그리고 난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엄마, 제가 잘못했어요. 앞으로 정훈이랑 잘 살아볼게요.”듣고자 하는 대답을 들은 그들은 180도 달라진 태도를 보였고 잘 생각했다면서 칭찬을 아까지 않았다.실은 또 다른 계획이 움틀거리고 있는 나였다.난 그날 밤 정훈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 나랑 좀 있어주면 안 돼? 잠이 오지 않아서 그래.”그 말에 정훈은 기쁨을 감출 수 없었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고 꾹꾹 누르는 모습을 보였다.그렇다, 실은 나의 가족에게 연락했었던 사람은 정훈이었다.그들이 나서서 나를 말리게끔 수를 썼던 정훈.이번에도 다를 바 없이 싸움의 끝에는 항상 내가 먼저 사과했었다.[알았어. 일 마무리하는 대로 바로 갈게. 조금만 더 기다리고 있어.]수화기 너머 지현의 목소리로 어렴풋이 들려왔다.전복죽 맛이 어떠냐고 하는 지현의 물음이.난 문득 나에게 구애를 했었던 정훈의 예전 모습이 떠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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