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는 말을 더듬으며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그저 울기만 했다.“분명 고모가 맞는데… 뭔가 무서웠어요…”권욱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딸을 품에 안고 조심스레 등을 쓸어내렸다.“온유야, 괜찮으니까 천천히 말해줄래? 고모가 어떻게 했길래 무서웠어?”하지만 아무리 다독이며 물어도 어린 권온유는 상황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온유 역시 혼란스러웠다. 항상 친절하고 다정했던 백인서가 왜 갑자기 가면을 쓴 듯한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혹시 병에 걸린 자신이 고모에게 미움을 사게 된 걸까?온유는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몸이 너무 약해져 급기야 기침하며 숨조차 가빠졌다. 이를 본 권욱은 서둘러 딸을 병실로 데려가고 의사와 간호사들은 지체 없이 온유의 상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조순영은 병실 밖에서 벽에 기댄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울고 싶었지만, 눈물마저 메말라 흐르지 않았다.오랜 시간이 흐른 뒤 권욱이 병실에서 나왔다. 권욱은 연민이 담긴 눈길로 조순영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서로의 눈길이 닿는 순간,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감싸안았다.“권욱, 내가… 뭘 잘못한 걸까?”“아니야.”권욱은 깊은숨을 내쉬며 조순영을 비난하지 않았다.조순영은 그저 한 어머니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을 뿐이었다.그러나 딸을 향한 조순영의 지나친 사랑은 때때로 이성을 잃게 만들었다.“그래도 난 여전히 백시연이 의심스러워.”권욱은 낮게 말했다. 권욱은 발끝을 응시하며 며칠 동안 마음속을 채운 복잡한 생각들로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나의 의문이 권욱의 마음속에서 점점 더 강하게 자리 잡았다.백시연의 어머니는 백홍이고 그녀는 악명 높은 인신매매범이었다.그렇다면 백인서의 어머니는 누구일까?권욱은 입술을 깨물었다. 끝없이 이어진 미로를 헤매는 기분이었다. 사방으로 길이 뻗어 있었지만, 어디에도 출구는 없었다.그때 권욱의 전화기가 울렸다.“권 대표님, 일은 잘 끝냈습니다.”“그래, 어떻게 됐어?”“교도소 측에서
“왜 그래?”강소아가 백인서를 멍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설마, 그날 병원에 안 간 거야?”“갔어요.”백인서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병원에 가긴 했지만, 강소아를 만난 기억은 없었다.게다가 그날 병실에 들어가 온유를 보지도 않았다. 온유가 자신을 꺼린다는 걸 알기에 병으로 힘겨운 아이에게 더 큰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백인서는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이 모든 게 오해에서 비롯된 걸까?그때 최지용이 돌아왔다. 최지용은 신선한 과일이 든 봉투를 들고 있었는데 모두 백인서가 좋아하는 과일들이었다. 그 뒤로 최군형이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두 사람 오늘 딱 맞춰 왔네!”최지용이 웃으며 말했다.“점심 먹고 가. 요즘 내가 요리 실력이 부쩍 늘었거든!”“지용 씨 요리 실력은 원래 좋았잖아요. 아니었으면 우리 백인서를 살찌우진 못했겠죠?”강소아가 농담을 던졌다.백인서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허리를 내려다보았다.최지용은 웃으며 음식을 부엌으로 들고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덟 가지 요리에 국 한 그릇까지 차려진 완벽한 한 상이 테이블에 올라왔다. 이를 본 강소아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만약 이걸 최군형이 준비했다면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물론이고 부엌은 엉망이 됐을 게 뻔했다. 게다가 최군형이 만든 음식이 과연 먹을 수 있는 상태일지조차 의문이었다.네 사람은 음식을 먹으며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갔고 곧 화제는 권씨 가문으로 옮겨갔다.“권욱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해.”최군형이 말했다.“이미 외할아버지와 연락을 마쳤어. 외삼촌이 윤제 그룹 약물을 남양에서 가져와 온유의 치료를 도울 거래.”“정말 다행이다!”최지용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이제 백인서도 마음을 놓을 수 있겠고 정승우도 더는 우울한 얼굴로 다니지 않아도 되겠네!”“외삼촌 말로는, 이 병에 가장 좋은 방법은 여전히 골수 이식이래. 권욱이 여동생을 찾지 않았어? 그런데 왜 아직 골수 적합성 검사를 하지 않은 거지?”“글쎄.”최지용이 무심히 대답했다.“
권욱은 멍하니 자리에 서 있었다. 머릿속은 순간 새하얘지고 말았다.“권 대표님? 권 대표님! 듣고 계십니까?”권욱은 정신을 번쩍 차리고 눈살을 찌푸렸다.“그 죄수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유... 혹시 밝혀진 게 있습니까?”“현재 조사 중입니다만, 우리가 아는 바로는 영미 씨가 수감 후 계속 우울해했고 가족들에게 배척당하면서 마음이 점점 더 어두워진 것으로 보입니다.”권욱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우울했다면 왜 하필 지금, 자신이 영미와 대화를 준비하던 이 시점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걸까?이 모든 게 정말 단순한 우연일까?“권 대표님.”상대방이 말을 이었다.“이런 이유로 이번 면회는 취소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알겠습니다.”권욱은 묵묵히 전화를 끊었다.잠시 생각에 잠긴 뒤, 권욱은 부하에게 지시했다.“지체 말고 백시연의 골수 적합성 검사 바로 준비해! 내가 말했던 거 꼭 기억하고!”부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시를 따랐다.같은 시각, 백시연은 커다란 가죽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방 안 가득 사치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이곳은 며칠 전 조순영이 백시연에게 선물한 별장이었다.백시연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빨간색 매니큐어를 정성스레 칠하고 있었다. 백시연의 뒤에는 중년의 남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백시연을 지켜보고 있었다.“시연아, 우리 이쯤에서...”“종수 아저씨.”백시연이 종수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손톱 색 어때요? 예쁘지 않나요?”종수는 무거운 눈빛을 띤 채 한동안 대답하지 않고 백시연을 바라보았다.그는 이 소녀를 어릴 적부터 지켜보며 자랐다.과거에 백홍이 남양에서 조직의 보스들에게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된 종수를 구해줬고 값비싼 치료를 받게 해 종수의 목숨을 구했다.그 이후로 종수는 은혜를 갚기 위해 백홍을 따라다녔다.결코 떳떳한 길은 아니었지만 백홍에게 충성을 다했고 백홍의 자녀들 역시 물심양면으로 돌보았다.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본 적 없었던 백시연은 이 남자를 아버지이자 오빠처럼 의지했다.백시연이 마음껏
종수는 백시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깊은 실망감이 어른거렸다.“종수 아저씨, 저한테 한 가지 더 해주실 일이 있어요.”백시연은 종수의 표정을 모른 척하며 말했다.“백인서를 데려와 주세요.”“무슨 일을 꾸미려는 거야?”“뭐겠어요? 당연히 골수 적합성 검사죠.”백시연은 비웃으며 대답했다.“설마 제가 직접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너...”“왜요, 뭐 문제라도 있어요?”종수는 참다못해 말했다.“그래도 너를 고모라고 부르는 아이야. 지금 목숨이 위태로운데 그걸 모른 척할 거냐?”“고모?”백시연은 비웃으며 말했다.“제가 무슨 고모에요. 게다가 백인서도 그 애의 고모잖아요. 왜 백인서가 골수를 주면 안 되죠?”“시연아!”“가족이라는 말로 저를 옭아매려 하지 마세요!”백시연은 종수를 노려보며 말했다.“저는 가족 같은 말로 저를 억압하는 게 제일 싫어요! 아저씨, 하나 묻겠는데요. 쌍둥이인 저희 둘 중 하나만 살아야 한다면, 아저씨는 저와 백인서 중 누구를 택할 건데요?”종수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마에는 푸른 핏줄이 도드라졌다.“종수 아저씨, 저는 어려서부터 봐온 아이잖아요.”백시연은 소파에서 일어나 종수의 옆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백시연은 종수의 팔짱을 끼고 어릴 적처럼 의지하는 눈빛으로 종수를 바라보았다.“저에겐 아저씨가 엄마보다도 더 소중해요.”“시연아...”종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백인서도 네 엄마의 딸이야.”“하지만 아저씨는 엄마가 너무 불공평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백시연은 조용히 말했다.“엄마는 우리 미래를 동전 던지기로 결정했어요. 한 명은 데리고 가고 한 명은 남겨두고 갔죠... 흥! 저를 데리고 다니면서 온갖 고생을 다 시키면서 백인서에게는 매달 꼬박꼬박 돈을 보내줬어요! 엄마는 번 돈을 대부분 백인서에게 줬어요!”이것이 백시연이 가장 분노하는 부분이었다.같은 쌍둥이지만 완전히 다른 운명이었다. 백시연은 엄마와 떨어져 지낸 백
“종수 아저씨, 결국 백인서 편을 드시겠다는 거예요?”백시연은 점점 차가워진 눈빛으로 돌변하며 물었다.“아저씨가 정말 기억해야 할 건, 어릴 때부터 아저씨 손에 자란 사람은 저라는 거예요.”종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천천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가까운 정으로만 따진다면 당연히 백시연과 더 깊은 유대를 가졌을 것이다. 백시연이 어린아이였던 시절부터 자신의 손으로 돌봤으니 말이다.하지만 종수의 마음속에는 백인서이라는 존재가 항상 걸림돌로 남아 있었다.그 또한 백홍의 딸이자 은인의 아이였기 때문이다.“종수 아저씨, 엄마는 남양에서 저와 마지막 아침 식사를 하고 나서 바로 오성으로 떠났어요. 그러니까 오성에서 남양으로 돌아오던 길에 경찰에 체포된 거예요. 엄마가 감옥에서 아저씨에게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세요?”백시연은 종수의 가장 약한 부분을 알고 있었다. 백시연은 그것을 철저히 이용했다.“엄마는 저를 잘 돌봐달라고 부탁하셨잖아요.”백시연은 종수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말했다.“종수 아저씨, 늘 은혜를 갚는다면서 엄마의 이 마지막 부탁조차 지키지 못하시겠다는 거예요?”“홍이 누님은 널 돌보라고 하셨지, 다른 딸을 해치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어!”“아니요, 엄마에게는 딸이 저 하나뿐이었어요.”백시연의 눈빛이 점점 광기를 띄기 시작했다.“저와 백인서, 둘 중 하나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요!”“너…”백시연은 차갑게 웃으며 종수의 손을 뿌리치고 방으로 들어갔다.종수는 한동안 그 자리에 굳은 채 서 있었다. 마치 막다른 길에 갇혀 어디로도 발을 뻗을 수 없는 듯했다.백홍이 세상을 떠난 이후, 남양에서 운영하던 사업은 계속해서 적자를 기록했다. 몇몇 술집과 나이트클럽은 거의 문을 닫기 직전이었다.이 업계는 경쟁이 치열했고 백시연은 사업을 운영할 능력이 없었다. 백시연은 빠르게 돈을 탕진했고 돈은 결국 바닥을 드러냈다.결국 그 시점에 이르러, 종수는 오성에 있는 권씨 가문을 떠올렸다. 종수는 단순히 그들과의 관계를 통해 약간의 돈을 받아낼 생
"늦었으니 그만 쉬자."남자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강서연의 주의를 끌어당겼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그의 깊은 눈동자와 바로 마주쳤는데, 그 안에는 그녀가 종잡을 수 없는 정서가 뒤섞여 있었다.강서연은 긴장한 듯 원피스를 움켜쥐었고, 심장 박동도 빨라지는 것 같았다.그녀는 방에 들어온 후부터 줄곧 침대의 가장 끝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오랫동안, 이 자세를 유지하다 보니 등줄기가 뻣뻣해졌고, 아직 웨딩드레스 차림 그대로였다. 남자가 샤워하고 욕실에서 나오자, 그녀는 비로소 오늘 밤이 바로 눈앞의 이 남자와의 신혼 첫날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하지만 그녀는 새 남편과 어떻게 지내야 할지 전혀 몰랐다. 게다가 언니 대신에 시집온것이니...재벌집 사생아 신분으로 언니를 대신하여 빈털터리 남자에게 시집온 것은, 단지 양가 어른들이 정한 혼약을 완성하고 상당한 액수의 혼수를 얻기 위함이었다.돈이 있어야 엄마의 병이 나을 수 있고, 동생이 학업을 계속할 수도 있으며, 온 가족이 잘 살 수 있을 것이다.강서연은 심호흡을 깊게 하더니 겁먹은 토끼처럼 조마조마한 모습으로 화장실을 향해 갔다."저… 저도 씻고 올게요."남자의 숨소리가 더욱 잠잠해졌다.강서연은 재빨리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려는데, 이 낡은 널빤지 문에 자물쇠 하나 없는 것을 발견했다. 비록 그녀도 어려운 삶을 살아왔지만, 이 정도로 가난한 삶을 경험한 적은 없었다.그녀는 눈시울을 약간 붉히더니 화장실에서 머뭇거리며 한참이나 드레스를 벗지 못했다. 문밖의 남자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갑자기 입을 열었다."난 밖에 가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올 테니 천천히 씻어."강서연은 가슴을 졸이며 문에 엎드려 바깥의 기척을 엿들었다. 그의 발걸음은 점점 멀어지더니 대문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더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얼룩덜룩한 벽은 조금 창백해 보였다. 결혼을 하루 앞두고 태풍이 도시를 휩쓸면서 도로 곳곳에 떨어진 광고판과 허리가 잘린 나무들을 남겨뒀다. 강서연은 이
강서연은 머리가 텅 비는 것만 같았다.뜨거운 가슴이 그녀의 등에 닿아왔고, 그의 뜨거운 심장 박동 소리도 들려왔다.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지만, 여전히 팔다리가 뻣뻣하여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남자의 손이 갑자기 멈춘다."내가 누군지 알아?"강서연은 이 말에 머리가 멍해졌다.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내 남편이고, 오늘이 신혼 첫날밤이기도 하니, 부부 사이에 이런 일은 당연하다는 건가?강서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네, 알고 있어요… 구현수 씨잖아요."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구현수라...'내가 진짜 구현수는 아니라는 걸 알까? 하지만 뭐 그녀도 진짜 강서연은 아니잖아.'사실 그녀가 들어온 순간부터 그는 그녀가 강서연 본인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어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강 씨네 아가씨의 성격으로는 이런 시골뜨기에게 시집올 리가 없다.하지만 상관없었다, 둘 다 사기 결혼인 셈이니..."구현수씨..."그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여보니 사슴같이 무고한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녀의 수줍고 부드러운 표정은 그의 마음속 어딘가를 움켜잡는 듯하였다."죄송해요, 제가 너무 긴장해서..."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작고 가는 손을 내밀어 그의 목을 껴안았다."구현수 씨는 이제 제 남편이니… 이런 일은 당연한 거죠, 그럼, 우리 시작해요."그녀의 앙증맞은 코끝에서 땀방울이 스며 나오기 시작했고, 그녀는 서툰 동작으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온몸을 떨면서 말이다.구현수는 살짝 설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그의 입술에 키스하려고 할 때, 그는 갑자기 그녀의 작은 손을 잡더니 그녀와 거리를 두었다.강서연은 달아오른 멍한 얼굴로 그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됐어. 오늘 너도 피곤할 텐데 일찍 쉬어.""구현수 씨, 저...""너에게도 좀 적응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남편이 있다는 사실에 적응하게 되면 그때 다시 봐."그는 말을 남기고는 몸을 돌려 누웠다.그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던 강서연의 귓가
강서연이 옷을 걸치고 마당에 나오자, 아침 운동을 하는 구현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는 상의를 벗고 두 손으로 아령을 번갈아 가며 들고 있었다. 탄탄한 근육질 몸매는 아침 햇살 아래에서 마치 태양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듯했다. 강서연은 얼굴을 붉히며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였다."일찍이네요."구현수는 고개를 돌려 표정 없이 그녀를 힐끗 보았다.강서연이 주위를 둘러보니, 그다지 크지 않은 마당에는 샌드백, 권투 장갑, 야구 방망이, 아령 등이 어수선하게 널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구현수는 평소에 싸움을 많이 하는 것이 분명하다.이 남자의 성격은 어떨까?듣자니 이곳 사람들은 술에 취해 아내를 때리는 일이 드물다고 한다.강서연은 입술을 깨물더니 작은 걸음으로 다가가 긴장한 듯 물었다."저기… 아침 식사는 하였나요?""아직이야."남자가 차갑게 몇 마디 내뱉었다."네가 가서 차려봐."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엌으로 뛰어 들어갔다.그녀는 평소 일을 많이 하던 탓이라 손이 빨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좁쌀죽 한 가마에 계란전도 부쳤고, 장조림도 한 그릇 담아 구현수 앞에 차려놓았다.구현수가 고개를 들어보니 그녀의 활짝 웃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부드러워지는 것 같았다. 구현수는 소고기 한 조각을 집어 그녀의 그릇에 가져다 놓았다.강서연은 어리둥절하며 사양하려다가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말을 멈췄다."많이 먹어, 너무 말랐어!""네..."그녀는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사실 그녀는 구현수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예를 들어, 어젯밤 일에 대하여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신혼부부 사이에 당연한 일을 가지고 마치 그가 강요라도 한 것처럼 행동한 것에 대하여 말이다.또한, 그녀는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관하여 묻고 싶었다. 이제 부부가 된 이상 함께 앞날을 계획하는 것은 응당하다. 그리고 그녀는 아직 그의 직업이 무엇인지, 무슨 수입으로 생활을 이어 나가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종수 아저씨, 결국 백인서 편을 드시겠다는 거예요?”백시연은 점점 차가워진 눈빛으로 돌변하며 물었다.“아저씨가 정말 기억해야 할 건, 어릴 때부터 아저씨 손에 자란 사람은 저라는 거예요.”종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천천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가까운 정으로만 따진다면 당연히 백시연과 더 깊은 유대를 가졌을 것이다. 백시연이 어린아이였던 시절부터 자신의 손으로 돌봤으니 말이다.하지만 종수의 마음속에는 백인서이라는 존재가 항상 걸림돌로 남아 있었다.그 또한 백홍의 딸이자 은인의 아이였기 때문이다.“종수 아저씨, 엄마는 남양에서 저와 마지막 아침 식사를 하고 나서 바로 오성으로 떠났어요. 그러니까 오성에서 남양으로 돌아오던 길에 경찰에 체포된 거예요. 엄마가 감옥에서 아저씨에게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세요?”백시연은 종수의 가장 약한 부분을 알고 있었다. 백시연은 그것을 철저히 이용했다.“엄마는 저를 잘 돌봐달라고 부탁하셨잖아요.”백시연은 종수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말했다.“종수 아저씨, 늘 은혜를 갚는다면서 엄마의 이 마지막 부탁조차 지키지 못하시겠다는 거예요?”“홍이 누님은 널 돌보라고 하셨지, 다른 딸을 해치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어!”“아니요, 엄마에게는 딸이 저 하나뿐이었어요.”백시연의 눈빛이 점점 광기를 띄기 시작했다.“저와 백인서, 둘 중 하나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요!”“너…”백시연은 차갑게 웃으며 종수의 손을 뿌리치고 방으로 들어갔다.종수는 한동안 그 자리에 굳은 채 서 있었다. 마치 막다른 길에 갇혀 어디로도 발을 뻗을 수 없는 듯했다.백홍이 세상을 떠난 이후, 남양에서 운영하던 사업은 계속해서 적자를 기록했다. 몇몇 술집과 나이트클럽은 거의 문을 닫기 직전이었다.이 업계는 경쟁이 치열했고 백시연은 사업을 운영할 능력이 없었다. 백시연은 빠르게 돈을 탕진했고 돈은 결국 바닥을 드러냈다.결국 그 시점에 이르러, 종수는 오성에 있는 권씨 가문을 떠올렸다. 종수는 단순히 그들과의 관계를 통해 약간의 돈을 받아낼 생
종수는 백시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깊은 실망감이 어른거렸다.“종수 아저씨, 저한테 한 가지 더 해주실 일이 있어요.”백시연은 종수의 표정을 모른 척하며 말했다.“백인서를 데려와 주세요.”“무슨 일을 꾸미려는 거야?”“뭐겠어요? 당연히 골수 적합성 검사죠.”백시연은 비웃으며 대답했다.“설마 제가 직접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너...”“왜요, 뭐 문제라도 있어요?”종수는 참다못해 말했다.“그래도 너를 고모라고 부르는 아이야. 지금 목숨이 위태로운데 그걸 모른 척할 거냐?”“고모?”백시연은 비웃으며 말했다.“제가 무슨 고모에요. 게다가 백인서도 그 애의 고모잖아요. 왜 백인서가 골수를 주면 안 되죠?”“시연아!”“가족이라는 말로 저를 옭아매려 하지 마세요!”백시연은 종수를 노려보며 말했다.“저는 가족 같은 말로 저를 억압하는 게 제일 싫어요! 아저씨, 하나 묻겠는데요. 쌍둥이인 저희 둘 중 하나만 살아야 한다면, 아저씨는 저와 백인서 중 누구를 택할 건데요?”종수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마에는 푸른 핏줄이 도드라졌다.“종수 아저씨, 저는 어려서부터 봐온 아이잖아요.”백시연은 소파에서 일어나 종수의 옆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백시연은 종수의 팔짱을 끼고 어릴 적처럼 의지하는 눈빛으로 종수를 바라보았다.“저에겐 아저씨가 엄마보다도 더 소중해요.”“시연아...”종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백인서도 네 엄마의 딸이야.”“하지만 아저씨는 엄마가 너무 불공평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백시연은 조용히 말했다.“엄마는 우리 미래를 동전 던지기로 결정했어요. 한 명은 데리고 가고 한 명은 남겨두고 갔죠... 흥! 저를 데리고 다니면서 온갖 고생을 다 시키면서 백인서에게는 매달 꼬박꼬박 돈을 보내줬어요! 엄마는 번 돈을 대부분 백인서에게 줬어요!”이것이 백시연이 가장 분노하는 부분이었다.같은 쌍둥이지만 완전히 다른 운명이었다. 백시연은 엄마와 떨어져 지낸 백
권욱은 멍하니 자리에 서 있었다. 머릿속은 순간 새하얘지고 말았다.“권 대표님? 권 대표님! 듣고 계십니까?”권욱은 정신을 번쩍 차리고 눈살을 찌푸렸다.“그 죄수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유... 혹시 밝혀진 게 있습니까?”“현재 조사 중입니다만, 우리가 아는 바로는 영미 씨가 수감 후 계속 우울해했고 가족들에게 배척당하면서 마음이 점점 더 어두워진 것으로 보입니다.”권욱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우울했다면 왜 하필 지금, 자신이 영미와 대화를 준비하던 이 시점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걸까?이 모든 게 정말 단순한 우연일까?“권 대표님.”상대방이 말을 이었다.“이런 이유로 이번 면회는 취소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알겠습니다.”권욱은 묵묵히 전화를 끊었다.잠시 생각에 잠긴 뒤, 권욱은 부하에게 지시했다.“지체 말고 백시연의 골수 적합성 검사 바로 준비해! 내가 말했던 거 꼭 기억하고!”부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시를 따랐다.같은 시각, 백시연은 커다란 가죽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방 안 가득 사치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이곳은 며칠 전 조순영이 백시연에게 선물한 별장이었다.백시연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빨간색 매니큐어를 정성스레 칠하고 있었다. 백시연의 뒤에는 중년의 남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백시연을 지켜보고 있었다.“시연아, 우리 이쯤에서...”“종수 아저씨.”백시연이 종수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손톱 색 어때요? 예쁘지 않나요?”종수는 무거운 눈빛을 띤 채 한동안 대답하지 않고 백시연을 바라보았다.그는 이 소녀를 어릴 적부터 지켜보며 자랐다.과거에 백홍이 남양에서 조직의 보스들에게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된 종수를 구해줬고 값비싼 치료를 받게 해 종수의 목숨을 구했다.그 이후로 종수는 은혜를 갚기 위해 백홍을 따라다녔다.결코 떳떳한 길은 아니었지만 백홍에게 충성을 다했고 백홍의 자녀들 역시 물심양면으로 돌보았다.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본 적 없었던 백시연은 이 남자를 아버지이자 오빠처럼 의지했다.백시연이 마음껏
“왜 그래?”강소아가 백인서를 멍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설마, 그날 병원에 안 간 거야?”“갔어요.”백인서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병원에 가긴 했지만, 강소아를 만난 기억은 없었다.게다가 그날 병실에 들어가 온유를 보지도 않았다. 온유가 자신을 꺼린다는 걸 알기에 병으로 힘겨운 아이에게 더 큰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백인서는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이 모든 게 오해에서 비롯된 걸까?그때 최지용이 돌아왔다. 최지용은 신선한 과일이 든 봉투를 들고 있었는데 모두 백인서가 좋아하는 과일들이었다. 그 뒤로 최군형이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두 사람 오늘 딱 맞춰 왔네!”최지용이 웃으며 말했다.“점심 먹고 가. 요즘 내가 요리 실력이 부쩍 늘었거든!”“지용 씨 요리 실력은 원래 좋았잖아요. 아니었으면 우리 백인서를 살찌우진 못했겠죠?”강소아가 농담을 던졌다.백인서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허리를 내려다보았다.최지용은 웃으며 음식을 부엌으로 들고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덟 가지 요리에 국 한 그릇까지 차려진 완벽한 한 상이 테이블에 올라왔다. 이를 본 강소아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만약 이걸 최군형이 준비했다면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물론이고 부엌은 엉망이 됐을 게 뻔했다. 게다가 최군형이 만든 음식이 과연 먹을 수 있는 상태일지조차 의문이었다.네 사람은 음식을 먹으며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갔고 곧 화제는 권씨 가문으로 옮겨갔다.“권욱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해.”최군형이 말했다.“이미 외할아버지와 연락을 마쳤어. 외삼촌이 윤제 그룹 약물을 남양에서 가져와 온유의 치료를 도울 거래.”“정말 다행이다!”최지용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이제 백인서도 마음을 놓을 수 있겠고 정승우도 더는 우울한 얼굴로 다니지 않아도 되겠네!”“외삼촌 말로는, 이 병에 가장 좋은 방법은 여전히 골수 이식이래. 권욱이 여동생을 찾지 않았어? 그런데 왜 아직 골수 적합성 검사를 하지 않은 거지?”“글쎄.”최지용이 무심히 대답했다.“
온유는 말을 더듬으며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그저 울기만 했다.“분명 고모가 맞는데… 뭔가 무서웠어요…”권욱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딸을 품에 안고 조심스레 등을 쓸어내렸다.“온유야, 괜찮으니까 천천히 말해줄래? 고모가 어떻게 했길래 무서웠어?”하지만 아무리 다독이며 물어도 어린 권온유는 상황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온유 역시 혼란스러웠다. 항상 친절하고 다정했던 백인서가 왜 갑자기 가면을 쓴 듯한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혹시 병에 걸린 자신이 고모에게 미움을 사게 된 걸까?온유는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몸이 너무 약해져 급기야 기침하며 숨조차 가빠졌다. 이를 본 권욱은 서둘러 딸을 병실로 데려가고 의사와 간호사들은 지체 없이 온유의 상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조순영은 병실 밖에서 벽에 기댄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울고 싶었지만, 눈물마저 메말라 흐르지 않았다.오랜 시간이 흐른 뒤 권욱이 병실에서 나왔다. 권욱은 연민이 담긴 눈길로 조순영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서로의 눈길이 닿는 순간,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감싸안았다.“권욱, 내가… 뭘 잘못한 걸까?”“아니야.”권욱은 깊은숨을 내쉬며 조순영을 비난하지 않았다.조순영은 그저 한 어머니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을 뿐이었다.그러나 딸을 향한 조순영의 지나친 사랑은 때때로 이성을 잃게 만들었다.“그래도 난 여전히 백시연이 의심스러워.”권욱은 낮게 말했다. 권욱은 발끝을 응시하며 며칠 동안 마음속을 채운 복잡한 생각들로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나의 의문이 권욱의 마음속에서 점점 더 강하게 자리 잡았다.백시연의 어머니는 백홍이고 그녀는 악명 높은 인신매매범이었다.그렇다면 백인서의 어머니는 누구일까?권욱은 입술을 깨물었다. 끝없이 이어진 미로를 헤매는 기분이었다. 사방으로 길이 뻗어 있었지만, 어디에도 출구는 없었다.그때 권욱의 전화기가 울렸다.“권 대표님, 일은 잘 끝냈습니다.”“그래, 어떻게 됐어?”“교도소 측에서
“골수 이식 동의서에 서명하러 온 김에 온유를 한 번 보고 싶어서 왔어요.”“온유야.”권욱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이분은...”그러나 권욱의 소개가 끝나기도 전에 온유는 몸을 뒤로 움츠리며 조심스럽게 백시연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조그맣고 소심한 목소리로 말했다.“고모, 안녕하세요.”“뭐라고?”권욱과 조순영은 동시에 깜짝 놀라며 온유를 바라보았다.“온유야, 너... 방금 뭐라고 했니?”온유는 고개를 푹 숙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백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못 들으셨나요? 이 아이가 분명 저를 고모라고 불렀어요.”“하지만... 두 사람 오늘 처음 만난 거 아니야?”권욱의 깊은 눈빛 속에 어두운 빛이 스쳤다. 권욱은 상황이 점점 더 의심스러워지며 마음속에 강한 경계심이 자리 잡았다.조순영은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왜냐하면 온유가 처음 백인서를 만났을 때도 고모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왜 그래요?”백시연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물었다.“많이 놀랐나요? 두 분 표정이 왜 그래요?”“조금.”권욱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말했다.“온유는 낯을 많이 가려. 특히 너처럼 가면을 쓰고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에게는 먼저 인사하지 않아. 그런데 예전에...”권욱은 말을 멈추고 깊은 생각에 잠겼고 백시연은 온유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병실을 나섰다.잠시 후, 권욱은 조순영을 밖으로 데리고 나와 냉정한 얼굴로 물었다.“너, 백시연한테 대체 무슨 약속을 한 거야??”조순영은 침묵했다.권욱은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백시연에게 돈 준 거야?”“권욱!”조순영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내 딸을 위해서였어!”“내가 다른 방법을 찾겠다고 했잖아.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당신이 방법을 생각해 낼 동안, 내 딸은 죽게 생겼다고!”권욱은 조순영을 노려보았지만, 조순영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당신이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알아.”조순영은 목이 메어 말을 힘겹게 이어 나갔다.“당신은 백
백시연은 강소아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병원 후문으로 발길을 돌렸다.그곳은 사람이 없었고 백시연은 침착하게 가면을 쓰며 미리 약속한 시간에 맞춰 조순영을 만나러 갔다.병원 옆의 카페는 조용했고 조순영은 이미 창가 자리에서 백시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백시연이 들어오자, 조순영은 급히 손을 흔들었다.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백시연의 금빛 가면을 비추자, 조순영은 묘한 불편함에 사로잡혔다.“시연아...”조순영은 망설이며 말했다.“너... 도대체 언제쯤 골수 검사를 할 거야?”백시연은 몸을 느긋이 뒤로 젖히며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가면 아래로 드러난 백시연의 눈에는 차갑고 영리한 빛이 서려 있었다.“골수 검사 날짜는 당신들이 정하는 거 아니에요?”“너...”“말했잖아요. 돈을 먼저 보내라고요. 그렇지 않으면 저와 아무 상관 없는 아이를 구할 이유가 없죠.”“백시연!”조순영은 격한 목소리로 말했다.“온유가 왜 너와 상관없어? 그 아이는 권욱의 딸이야!”“하지만 저는 권씨 성을 쓰지 않아요.”백시연은 입을 벌리며 크게 웃었다.조순영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고 머릿속이 하얘졌다.그렇다. 백시연은 권씨 성이 아니었다.그리고 백시연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권씨 가문에 당당히 들어가기 위험이었다.“당신들이 이런 조건을 받아들이기 힘들 거란 거 알아요.”백시연은 느긋하게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하지만 세상에 공짜라는 건 없잖아요. 물론 저도 알아요. 검사 결과가 이상적이지 않으면 제가 협박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백시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검은 옷을 걸친 백시연의 모습은 대낮의 밝은 햇살에도 음산하고 서늘한 기운을 자아냈다.“제가 당신들에게 골수 검사를 약속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배려한 거예요. 그러니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 하겠죠. 설령 검사가 성공하지 않더라도 권씨 가문이 저를 버린 세월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감당해야 하지 않겠어요?”조순영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조
모두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백인서는 말없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세심한 강소아는 백인서의 낙담한 표정을 눈치채고 부드럽게 물었다.“무슨 일 있어?”백인서는 강소아를 보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저... 온유를 봤어요.”“온유가 정말 아팠던 거야? 그래?”최군성이 성급히 물었다.“봐요, 제가 들은 소식이 맞았잖아요! 권욱과 조순영이 요즘 마음고생 엄청 심하다고 들었어요.”“맞아요, 온유가 많이 아파. 우리가 직접 봤어.”최지용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내가 보기엔 온유가 예전 같지 않아.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어.”“그게 무슨 말이에요?”“예전에는 백인서를 보면 그렇게 좋아했잖아. 그런데 이번에는... 온유가 백인서를 싫어한다고 말했어.”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의아해했다.백인서는 며칠이 지나도록 그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강소아가 백인서의 손을 잡고 위로하며 말했다.“어린애들은 가끔 그렇게 투정을 부릴 때도 있잖아. 게다가 지금 몸이 아프니 마음도 지쳤을 거야. 자주 가서 온유를 챙기다 보면 다시 예전처럼 돌아올 거야!”백인서는 고개를 끄덕였다.강소아의 마음속에는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다음 날, 강소아는 최가원을 데리고 병원에 검진을 받으러 갔다. 한 살 된 최가원은 건강 상태가 매우 좋았다. 검사 결과가 모두 기준치 이상으로 나와 이 연령대 아이들의 건강 모범으로 손꼽힐 정도였다. 피를 뽑을 때조차 울지 않고 큰 눈을 깜빡이며 간호사를 보며 옹알이를 했다.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들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최씨 가문의 작은 공주에게 푹 빠져 있었다.하지만 병원의 다른 한쪽은 암울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똑같이 재벌가의 딸로 태어났지만, 한쪽은 생기 넘치는 웃음을 보였고 다른 한쪽은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강소아는 최가원을 보모에게 맡기고 권온유의 병실로 향했다.병실로 가기 전에 화장실에 들렀는데 누군가가 칸막이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강소아는 순간 멈칫했다. 잠시 놀란
의사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방금... 권욱 씨의 여동생이 다녀갔습니다.”“여동생이요?”최지용은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무슨 여동생이요?”의사는 더는 말을 잇지 않고 최지용을 한 번 쳐다본 뒤,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갔다.백인서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잊었어요? 권씨 가문에 사생아가 있다는 얘기 들었잖아요...”최지용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럼... 그 사생아를 찾은 이유가 온유의 골수 이식을 위한 거란 말이야?”백인서는 아무 말 없이 병실 안을 바라보았다. 온유는 어느 정도 감정을 추스른 듯했지만, 여전히 침대에 웅크린 채 흐느끼고 있었다. 그 작은 모습은 너무나도 안쓰러웠다.하지만 온유가 방금 보였던 반응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고모를 싫어한다니...평소에 고모를 가장 좋아한다고 하던 아이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한편, 강소아와 최군형은 둘째 아이를 계획 중이었다.오랜만에 만난 그들은 작은 야외 레스토랑에서 따스한 봄 햇살을 즐기며 식사 중이었다. 최지용은 웃으며 차라리 축구팀을 꾸릴 만큼 아이를 낳아 인원이 적은 최씨 가문에 활력을 불어넣으라고 농담을 던졌다.최군형은 깜짝 놀라며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 최군형은 급히 강소아의 손을 잡고 최지용을 노려보며 말했다.“이 녀석! 말 함부로 하지 마! 우리 아내가 그런 고생하게 놔둘 수 없어!”잠시 후, 최군성과 배윤아도 식당에 도착했다.두 사람이 손을 잡은 모습을 본 모두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최군성은 막 만화를 완성한 뒤였는지 자리에 앉자마자 배가 고픈 듯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배윤아는 그런 그의 손등을 가볍게 툭 치며 살짝 꾸짖는 듯했지만, 눈에는 애정 어린 빛이 가득했다.두 사람은 최근 열린 만화 전시회 이야기를 나눴다.전시회는 대성공을 거뒀고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한 새 작품은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호평을 받았다. 심지어 여러 대형 제작사에서 관심을 보이며 저작권 계약을 제안하기도 했다.“그럼 팔기로 했어?”최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