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서야...”최지용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심스레 다가섰다. 백인서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분명했지만, 백인서가 말하고 싶지 않다면 누구도 강요할 수 없었다.최지용의 속은 타들어 갔지만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그 따귀는 전혀 아프지 않았다. 백인서의 속상함이 조금이라도 풀릴 수 있다면 백인서에게 맞는 것쯤은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다.“미안해요...”백인서는 자신을 감싸안고 웅크린 채, 최지용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계속 사과했다.“미안해요, 지용 씨 미안해요...”“너 오늘 이상해. 도대체 무슨 일이야?”백인서는 고개를 숙였고 어깨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인서야! 제발 말해 줘? 내가 도와줄게!”“혼자 있고 싶어요.”최지용의 손이 공중에 멈춰 그대로 굳어버렸다.손을 조금만 더 뻗으면 백인서의 머리를 쓰다듬을 수 있었고 조금만 더 가면 백인서를 품에 안고 예전처럼 위로하고 다독여 줄 수 있었다.혼자 있고 싶다는 백인서의 한마디가 두 사람 사이에 넘기 힘든 벽을 세운 것만 같았다.최지용은 백인서와 자신 사이에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가 가로놓인 듯한 아득함을 느꼈다.최지용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며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최지용은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떨어진 외투를 집어 들었다. 문을 나서기 전, 백인서를 마지막으로 바라본 뒤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문이 잠기는 소리가 바깥에서 들리자, 백인서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쓰라린 통증이 밀려왔고 눈물이 쏟아졌다.얼마나 오랜 시간 침대에 앉아 있었는지도 모른 채, 감정이 조금 가라앉은 후에야 백인서는 천천히 거실로 나섰다. 그곳엔 여전히 이단 케이크가 놓여 있었고, 바닥에는 장미 꽃잎이 깔려 있었으며, 최지용이 선물한 분홍빛 다이아몬드가 반짝이고 있었다.이 밤은 아름답고 낭만적인 밤이 되어야 했다.하지만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 없었다.백인서는 붉어진 눈으로 거실을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케이크를 잘라 냉장고에 넣고 다이아몬드 반지는 조심스레 서랍에 보관한 뒤 지친 몸을 카펫
정대명의 손이 살짝 떨렸다.오성에 오고 나서 정대명은 최씨 가문과 육씨 가문에 대한 소문을 여기저기서 들었다. 육씨 가문은 연예계의 절반을 장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폭 배경의 가문이었다.“허허...”정대명은 쓴웃음을 지었다.“어린아이인데도 정말 대단한 배경을 가졌군. 태어날 때부터 복이 터졌어, 이렇게 대단한 집안에서 태어나다니!”영미는 방금 새로 한 네일아트를 무심히 살펴보며 정대명의 말에는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영미 아가씨.”대명이 누렇게 변한 이를 드러내며 물었다.“저한테 이 사진을 주신 이유가 뭔가요?”“그 아이 어떻게 해서든 훔쳐 오세요.”“네?”정대명은 너무 놀라 휘청거릴 뻔했다.“왜 그러시죠?”영미는 고개를 돌려 정대명을 바라보며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당신네 마을은 인신매매가 심각한 곳으로 소문났잖아요. 아이나 여자를 납치하는 기술쯤은 다들 익혔다면서요? 심지어 당신 아내도 그렇게 끌려온 거 아닌가요? 흥, 아이 하나 훔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요?”“그게...”정대명은 말문이 막혀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며 굳어버렸다.“하하, 영미 아가씨, 너무 쉽게 말하네! 우리 마을에 끌려온 여자랑 아이들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그건 전문 인신매매범들이 하는 일이고 난 잘 몰라.”“정대명 씨.”영미는 진지한 눈빛으로 정대명을 쏘아봤다.“여기 호텔에서 지내시기에 편한가요?”“편안하지...”“그러면 계속 여기서 살고 싶다면 제 일을 도와줘야죠. 전에 분명 그렇게 말했잖아요.”“하지만 영미 아가씨...”“이 아이를 훔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영미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정대명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아이는 지금 여덟 달 됐어요. 뒤집고 기어다니기도 하죠. 최씨 가문은 교육을 중요시하는 집안이라 벌써 조기교육을 시작했더라고요.”정대명은 '조기교육'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최씨 가문의 경호원 두 명을 이미 매수해 뒀어요.”영미는 정대명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영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소리쳤다.“정대명 씨! 말도 안 되는 말 좀 그만해요!”정대명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영미를 바라보았다. 마치 영미가 정신 나간 사람이라도 되는 듯 쳐다보았다.뭐 잘못 말했나? 남자아이가 더 귀한 건 사실이잖아! 이 여자도 참, 돈이 될 만한 건 마다하고 오히려 돈이 안 되는 여자아이를 고집하다니!아휴, 역시 여자는 태생부터 천박한 존재야!정대명의 어리석고 근거 없는 우월감이 속에서 서서히 꿈틀거렸다.“영미 아가씨, 아직도 잘 모르겠어? 하하!”그는 들고 있던 술병을 흔들며 말했다.“여자애는 어차피 자라 봤자 시집가야 할 운명이야. 결국 여자는 남자의...”“닥쳐요! 제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영미는 더는 말로 설득할 여유가 없었다.“당신은 그저 이 아이를 데려오면 돼요. 제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요!”분노에 휩싸인 영미는 이성을 잃고 소리쳤고 여기가 호텔 뒤뜰이라는 사실도 잊어버렸다.사람이 없다 해도 여긴 엄연한 공공장소였다.“정대명 씨.”영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두 눈을 번뜩이고 정대명을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가방에서 두툼한 돈뭉치를 꺼내 정대명의 얼굴에 내던졌다.정대명은 순간 당황했다. 지폐가 비처럼 흩날리며 땅에 떨어졌다. 돈을 보는 순간 정대명의 두 눈은 탐욕으로 반짝였고, 그는 모든 것을 잊은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지폐를 하나씩 주워 손에 꽉 쥐었다.영미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이제, 그 아이를 데려올 수 있겠죠?”정대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이 찢어지도록 웃었다.“당연하지! 영미 아가씨, 걱정하지 마. 아이 하나가 아니라 열 명이라도 데려올 수 있어!”“말귀를 알아듣기나 한 겁니까?”영미는 정대명을 흘겨보며 말했다.“내가 원하는 건 오직 그 아이 하나뿐이라고요!”“알았어, 알았어.”돈을 다 주운 정대명은 몸을 일으켜 손가락에 침을 묻혀 돈을 세려다, 영미의 혐오 가득한 시선을 느끼고는 머쓱해졌다.정대명은 멋쩍게 웃으며 손을 옷에 닦고
정승우는 정대명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정대명은 문을 열어 정승우를 들여보냈다. 정승우는 방 안을 둘러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이 방은 마치 금으로 뒤덮인 듯 반짝이고 있었다.정대명이 이런 곳에서 살고 있다니.정승우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저런 인간이 무슨 자격으로 이런 곳에 살고 있는 건가 생각했다.“여긴 왜 온 거야?”정대명은 거칠게 정승우의 등을 밀며 물었다.“지금 학교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정승우는 정대명을 돌아보며 무심하게 말했다.“그냥 좀 보고 싶어서요. 그래서 왔죠.”“네가 날 보러 왔다고?”정대명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 소리를 들은 듯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이 개자식이 언제부터 제 아비를 생각했다고! 흥!”정승우는 피식 웃었다. 맞는 말이었다.제정신이라면 주먹만 휘두르는 아버지를 그리워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좋아요, 그러면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아버지 술 마실 시간 뺏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정승우는 정대명의 손에 들린 술병을 힐끔 보고, 시선을 그의 바지 주머니로 옮기며 눈에 장난기가 어렸다.“저, 다 봤어요!”“뭐?”“그 여자가 아버지에게 돈을 준 거요.”정대명은 당황하며 정승우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정승우는 재빠르게 옆으로 비껴가며 비웃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저, 다 봤고, 다 들었어요! 두 분은 아무도 못 봤을 거라고 생각하셨나 봐요?”“이 자식아, 헛소리하지 마!”정대명은 부끄러움과 분노에 휩싸였다. 또 영미의 경고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에, 이 일이 절대 밖으로 새 나가면 안 된다는 생각에 다급해졌다.“헛소리 아니에요.”정승우는 이례적으로 침착한 표정이었다.“아버지는 그 여자랑 손잡고 우리 누나를 모함하려는 거잖아요!”“이 자식이!”“아버지, 제 입을 막고 싶으시죠?”“뭐?”정대명은 얼떨떨해졌다.“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이 일은 비밀로 해 드릴게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정승우는 천천히 말했다.“단, 입 막
어느 일요일, 정승우는 돈을 꼭 쥔 채 백인서를 찾아갔다.처음에는 백인서에게 밥을 사주고 싶었지만, 지금의 백인서는 예전과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맛있는 건 이미 다 먹어봤을 테니, 한 끼 식사가 백인서에게 그다지 특별할 리 없었다.그럼에도 정승우는 이 돈으로 어떻게든 백인서에게 무언가 해주고 싶었다.결국 정승우는 백인서에게 이렇게 제안했다.“백 선생님, 우리 놀이공원 가요! 제가 살게요.”백인서는 원래 거절하려 했지만, 정승우의 간절한 부탁에 결국 놀이공원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사실, 백인서도 놀이공원은 처음이었다.오랜 시간 오성에서 살았지만, 이런 곳에 대해선 왠지 모를 거부감이 있었다. 여긴 웃음과 즐거움이 넘쳐흐르는 곳이었고 왠지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세상처럼 느껴졌다.늘 자신에겐 잿빛 하늘이 어울린다고 생각해 왔으니까.최지용을 만난 후에도 이곳에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커플들이 관람차를 타면 결국 헤어진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백인서는 최지용과 영원히 함께하고 싶었기에 그 소문이 괜히 두려워 오지 않았던 것이다.“백 선생님, 무슨 생각 해요?”맑고 발랄한 목소리가 백인서를 현실로 끌어당겼다.백인서는 정승우의 미소 가득한 눈을 내려다보았다.“제가 이미 자유 이용권을 사뒀어요.”정승우는 백인서에게 자유 이용권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자유 이용권이 뭔지 아세요? 그거 있잖아요, 놀이공원의 모든 놀이기구를 탈 수 있는 통행증 같은 거요! 따로 사는 것보다 훨씬 저렴해요!”“생각보다 똑똑하네.”백인서는 미소를 지었다.“적응력도 빠르고.”“똑똑하지 않으면 선생님을 즐겁게 해드릴 수 없잖아요!”“그래, 오늘은 네 말에 따를게.”백인서는 정승우를 바라보며 물었다.“먼저 어떤 걸 타볼까?”남자애들은 자극적인 놀이기구를 특히 좋아하곤 했다. 정승우는 백인서를 데리고 롤러코스터, 자이로드롭, 급류타기 같은 놀이기구들을 함께 탔다.하지만 백인서는 오히려 회전목마를 타고 싶었다.두 사람은 떠들썩한 놀이공원에서 땀을
정승우의 머릿속엔 여전히 어린 시절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그 시절, 백인서는 낮에는 그를 등에 업고 다녔고 밤에는 재워주며 보살폈다. 따뜻함이라고는 거의 없었던 그의 삶에서 백인서는 유일하게 빛을 밝혀 준 존재였다.누가 세 살, 네 살 아이에게 기억이 없다고 했던가? 그 기억은 정승우의 성장 내내 곁을 지켜 주었고 다시 누나를 찾을 수 있도록 지탱해 주었다.“누나, 제발... 울지 마세요. 백 선생님!”백인서는 깜짝 놀라 정승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백인서는 정승우의 미소에 눈물을 멈췄다.두 사람은 작은 음식점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우연히도, 이곳은 예전에 최지용이 백인서를 데리고 와 소고기 국수를 먹던 곳이었다.이번에도 그 가게 주인이 반갑게 맞이하며 다가왔다.“오, 이게 누구야! 귀한 손님이 오셨네!”그의 시선이 정승우에게로 멈췄다.“이 아이는?”“동생이에요!”정승우가 먼저 씩씩하게 대답했다.백인서는 미소를 지으며 주인에게 소고기 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주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한번 보고는 주방으로 돌아가 푸짐하게 고기가 올라간 소고기 국수를 내왔다.“얼른 먹어!”백인서는 젓가락을 건네며 말했다.“여긴 정직하게 장사하는 곳이라 양도 푸짐하고 맛도 아주 좋아. 지용 씨가 나를 데리고 왔던 곳인데...”최지용을 언급하자 백인서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정승우는 장난기 어린 미소로 백인서를 바라보며 물었다.“그 남자, 누나한테 잘해 줘요?”백인서는 모르는 척하며 대답했다.“무슨 남자?”“그러니까, 방금 말한 그 지용이란 사람 말이에요!”정승우는 더욱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숨기지 않아도 돼요. 산에 있을 때, 두 사람이 포옹하는 것도 봤고 그 사람이 누나한테 키스하는 것도 다 봤어요!”“정승우!”백인서는 정승우를 노려보았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씩 쏠렸다.“그만해!”백인서는 테이블 아래로 정승우의 다리를 가볍게 툭 차며 말했다.“애가 무슨 이상한 소릴 하고 있어!”“저
백인서는 웃으며 정승우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정승우는 전혀 망설임 없이 백인서의 그릇에 고기가 많은 걸 보자마자 젓가락을 뻗었다.“너 지금 내 소고기를 뺏어 먹는 거야?”“사장님이 누나만 편애하는 거 아니에요? 고기를 이렇게나 많이 주다니!”“안 돼, 내 거야. 뺏어 먹지 마.”백인서는 웃으며 말했다.“이건 사장님이 특별히 주신 사랑의 소고기야!”“저는 성장기 남자애라 많이 먹어야 해요!”두 사람은 웃고 떠들며 면을 거의 다 비워가고 있었다. 백인서가 정승우에게 국수를 한 그릇 더 가져다주려고 일어서려는 순간, 달콤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고모!”백인서는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예쁘고 앙증맞은 작은 공주가 백인서에게 달려왔다.“온유야?”권온유는 백인서에게 달라붙어 작은 머리로 백인서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정승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정승우는 이렇게 예쁜 여자아이를 본 적이 없었다. 두 갈래로 묶은 머리에 공주 같은 퍼프 드레스를 입고, 마치 아까 놀이공원에서 본 백설 공주처럼 보였다.이 아이는 정말 동화 속에서 나온 공주일까?작은 소녀는 고개를 기울여 정승우를 한 번 바라보더니 달콤하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백인서를 보며 물었다.“고모, 이 사람은 누구예요?”“이 사람은...”백인서가 대답하려던 찰나, 문밖에서 권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오빠는 학교에서 우등생이야. 공부도 엄청 열심히 하거든. 온유도 나중에 커서 이 오빠처럼 열심히 공부해야 해.”백인서는 권욱을 올려다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여긴 어떻게 오셨어요?”“왜? 딸과 단둘이 외식하러 나오는 게 이상해?”“아니요.”백인서는 고개를 저었다.“그냥 권욱 씨가 이런 작은 가게에서 식사하실 줄은 몰랐어요...”“여기도 꽤 유명한 맛집이야!”권욱은 의자에 앉으며 사장에게 소고기 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오늘 주말이라 온유를 데리고 나왔는데, 이 녀석이 배고프다고 해서 핸드폰으로 근처 맛집을 검색해 보니 이곳 평이 좋더라고.
정대명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얼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며칠을 기다린 결과가 고작 최가원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었다.그럼에도 영미는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왔다.“정대명 씨, 대체 뭐 하고 있는 겁니까? 대단한 것도 아니고 아이 하나 훔쳐 오는 게 그렇게 어렵나요?”젠장! 정대명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차라리 보석을 훔치는 게 더 쉬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하하... 영미 아가씨.”마음속으로는 욕하고 있었지만, 얼굴엔 여전히 웃음이 서려 있었다.“이게, 그렇게 쉽지 않네요! 제가 며칠 동안 지켜본 결과, 그 경호원들이 전부 총을 들고 있더라고요. 제가 무턱대고 나서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정말 쓸모없네요.”영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내가 사람들까지 매수해 놨는데, 일을 이따위로 하다니!”정대명은 억눌린 분노를 꾹 참고 입을 다물었다.“말해 두겠는데요!”영미는 한발 더 나아가 말했다.“이 일 못 해내면, 화려한 호텔 스위트룸도 더 이상 못 쓰게 될 테고 돈 한 푼도 못 받는 줄 아세요! 다시 그 작은 산골 마을로 돌아가서 평생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하세요!”정대명은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호사에 길든 사람이 다시 가난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최근 정대명은 오성에서 살아가며 화려한 삶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이 잘 먹고 살게 도와줬고 돈까지도 넉넉히 주니 점점 체면이 생기기 시작했다.호텔에서 정대명이 매일 스위트룸에서 지내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그를 대단한 부자로 착각했고 그에게 예의를 갖추며 인사했다.이런 삶은 초라했던 지난날에선 꿈도 꾸지 못한 것이었다.고작 아이 하나 때문에 이 모든 걸 잃기엔 너무 아까웠다.정대명은 급히 전화기를 붙잡고 외쳤다.“영미 아가씨, 너무 흥분하지 마!”영미는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내가...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정대명은 어영부영 답했다.“겨우 아이 하나 가지고, 뭐 대단한 일도 아니지! 내가
“종수 아저씨, 결국 백인서 편을 드시겠다는 거예요?”백시연은 점점 차가워진 눈빛으로 돌변하며 물었다.“아저씨가 정말 기억해야 할 건, 어릴 때부터 아저씨 손에 자란 사람은 저라는 거예요.”종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천천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가까운 정으로만 따진다면 당연히 백시연과 더 깊은 유대를 가졌을 것이다. 백시연이 어린아이였던 시절부터 자신의 손으로 돌봤으니 말이다.하지만 종수의 마음속에는 백인서이라는 존재가 항상 걸림돌로 남아 있었다.그 또한 백홍의 딸이자 은인의 아이였기 때문이다.“종수 아저씨, 엄마는 남양에서 저와 마지막 아침 식사를 하고 나서 바로 오성으로 떠났어요. 그러니까 오성에서 남양으로 돌아오던 길에 경찰에 체포된 거예요. 엄마가 감옥에서 아저씨에게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세요?”백시연은 종수의 가장 약한 부분을 알고 있었다. 백시연은 그것을 철저히 이용했다.“엄마는 저를 잘 돌봐달라고 부탁하셨잖아요.”백시연은 종수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말했다.“종수 아저씨, 늘 은혜를 갚는다면서 엄마의 이 마지막 부탁조차 지키지 못하시겠다는 거예요?”“홍이 누님은 널 돌보라고 하셨지, 다른 딸을 해치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어!”“아니요, 엄마에게는 딸이 저 하나뿐이었어요.”백시연의 눈빛이 점점 광기를 띄기 시작했다.“저와 백인서, 둘 중 하나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요!”“너…”백시연은 차갑게 웃으며 종수의 손을 뿌리치고 방으로 들어갔다.종수는 한동안 그 자리에 굳은 채 서 있었다. 마치 막다른 길에 갇혀 어디로도 발을 뻗을 수 없는 듯했다.백홍이 세상을 떠난 이후, 남양에서 운영하던 사업은 계속해서 적자를 기록했다. 몇몇 술집과 나이트클럽은 거의 문을 닫기 직전이었다.이 업계는 경쟁이 치열했고 백시연은 사업을 운영할 능력이 없었다. 백시연은 빠르게 돈을 탕진했고 돈은 결국 바닥을 드러냈다.결국 그 시점에 이르러, 종수는 오성에 있는 권씨 가문을 떠올렸다. 종수는 단순히 그들과의 관계를 통해 약간의 돈을 받아낼 생
종수는 백시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깊은 실망감이 어른거렸다.“종수 아저씨, 저한테 한 가지 더 해주실 일이 있어요.”백시연은 종수의 표정을 모른 척하며 말했다.“백인서를 데려와 주세요.”“무슨 일을 꾸미려는 거야?”“뭐겠어요? 당연히 골수 적합성 검사죠.”백시연은 비웃으며 대답했다.“설마 제가 직접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너...”“왜요, 뭐 문제라도 있어요?”종수는 참다못해 말했다.“그래도 너를 고모라고 부르는 아이야. 지금 목숨이 위태로운데 그걸 모른 척할 거냐?”“고모?”백시연은 비웃으며 말했다.“제가 무슨 고모에요. 게다가 백인서도 그 애의 고모잖아요. 왜 백인서가 골수를 주면 안 되죠?”“시연아!”“가족이라는 말로 저를 옭아매려 하지 마세요!”백시연은 종수를 노려보며 말했다.“저는 가족 같은 말로 저를 억압하는 게 제일 싫어요! 아저씨, 하나 묻겠는데요. 쌍둥이인 저희 둘 중 하나만 살아야 한다면, 아저씨는 저와 백인서 중 누구를 택할 건데요?”종수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마에는 푸른 핏줄이 도드라졌다.“종수 아저씨, 저는 어려서부터 봐온 아이잖아요.”백시연은 소파에서 일어나 종수의 옆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백시연은 종수의 팔짱을 끼고 어릴 적처럼 의지하는 눈빛으로 종수를 바라보았다.“저에겐 아저씨가 엄마보다도 더 소중해요.”“시연아...”종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백인서도 네 엄마의 딸이야.”“하지만 아저씨는 엄마가 너무 불공평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백시연은 조용히 말했다.“엄마는 우리 미래를 동전 던지기로 결정했어요. 한 명은 데리고 가고 한 명은 남겨두고 갔죠... 흥! 저를 데리고 다니면서 온갖 고생을 다 시키면서 백인서에게는 매달 꼬박꼬박 돈을 보내줬어요! 엄마는 번 돈을 대부분 백인서에게 줬어요!”이것이 백시연이 가장 분노하는 부분이었다.같은 쌍둥이지만 완전히 다른 운명이었다. 백시연은 엄마와 떨어져 지낸 백
권욱은 멍하니 자리에 서 있었다. 머릿속은 순간 새하얘지고 말았다.“권 대표님? 권 대표님! 듣고 계십니까?”권욱은 정신을 번쩍 차리고 눈살을 찌푸렸다.“그 죄수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유... 혹시 밝혀진 게 있습니까?”“현재 조사 중입니다만, 우리가 아는 바로는 영미 씨가 수감 후 계속 우울해했고 가족들에게 배척당하면서 마음이 점점 더 어두워진 것으로 보입니다.”권욱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우울했다면 왜 하필 지금, 자신이 영미와 대화를 준비하던 이 시점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걸까?이 모든 게 정말 단순한 우연일까?“권 대표님.”상대방이 말을 이었다.“이런 이유로 이번 면회는 취소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알겠습니다.”권욱은 묵묵히 전화를 끊었다.잠시 생각에 잠긴 뒤, 권욱은 부하에게 지시했다.“지체 말고 백시연의 골수 적합성 검사 바로 준비해! 내가 말했던 거 꼭 기억하고!”부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시를 따랐다.같은 시각, 백시연은 커다란 가죽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방 안 가득 사치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이곳은 며칠 전 조순영이 백시연에게 선물한 별장이었다.백시연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빨간색 매니큐어를 정성스레 칠하고 있었다. 백시연의 뒤에는 중년의 남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백시연을 지켜보고 있었다.“시연아, 우리 이쯤에서...”“종수 아저씨.”백시연이 종수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손톱 색 어때요? 예쁘지 않나요?”종수는 무거운 눈빛을 띤 채 한동안 대답하지 않고 백시연을 바라보았다.그는 이 소녀를 어릴 적부터 지켜보며 자랐다.과거에 백홍이 남양에서 조직의 보스들에게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된 종수를 구해줬고 값비싼 치료를 받게 해 종수의 목숨을 구했다.그 이후로 종수는 은혜를 갚기 위해 백홍을 따라다녔다.결코 떳떳한 길은 아니었지만 백홍에게 충성을 다했고 백홍의 자녀들 역시 물심양면으로 돌보았다.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본 적 없었던 백시연은 이 남자를 아버지이자 오빠처럼 의지했다.백시연이 마음껏
“왜 그래?”강소아가 백인서를 멍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설마, 그날 병원에 안 간 거야?”“갔어요.”백인서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병원에 가긴 했지만, 강소아를 만난 기억은 없었다.게다가 그날 병실에 들어가 온유를 보지도 않았다. 온유가 자신을 꺼린다는 걸 알기에 병으로 힘겨운 아이에게 더 큰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백인서는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이 모든 게 오해에서 비롯된 걸까?그때 최지용이 돌아왔다. 최지용은 신선한 과일이 든 봉투를 들고 있었는데 모두 백인서가 좋아하는 과일들이었다. 그 뒤로 최군형이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두 사람 오늘 딱 맞춰 왔네!”최지용이 웃으며 말했다.“점심 먹고 가. 요즘 내가 요리 실력이 부쩍 늘었거든!”“지용 씨 요리 실력은 원래 좋았잖아요. 아니었으면 우리 백인서를 살찌우진 못했겠죠?”강소아가 농담을 던졌다.백인서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허리를 내려다보았다.최지용은 웃으며 음식을 부엌으로 들고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덟 가지 요리에 국 한 그릇까지 차려진 완벽한 한 상이 테이블에 올라왔다. 이를 본 강소아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만약 이걸 최군형이 준비했다면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물론이고 부엌은 엉망이 됐을 게 뻔했다. 게다가 최군형이 만든 음식이 과연 먹을 수 있는 상태일지조차 의문이었다.네 사람은 음식을 먹으며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갔고 곧 화제는 권씨 가문으로 옮겨갔다.“권욱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해.”최군형이 말했다.“이미 외할아버지와 연락을 마쳤어. 외삼촌이 윤제 그룹 약물을 남양에서 가져와 온유의 치료를 도울 거래.”“정말 다행이다!”최지용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이제 백인서도 마음을 놓을 수 있겠고 정승우도 더는 우울한 얼굴로 다니지 않아도 되겠네!”“외삼촌 말로는, 이 병에 가장 좋은 방법은 여전히 골수 이식이래. 권욱이 여동생을 찾지 않았어? 그런데 왜 아직 골수 적합성 검사를 하지 않은 거지?”“글쎄.”최지용이 무심히 대답했다.“
온유는 말을 더듬으며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그저 울기만 했다.“분명 고모가 맞는데… 뭔가 무서웠어요…”권욱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딸을 품에 안고 조심스레 등을 쓸어내렸다.“온유야, 괜찮으니까 천천히 말해줄래? 고모가 어떻게 했길래 무서웠어?”하지만 아무리 다독이며 물어도 어린 권온유는 상황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온유 역시 혼란스러웠다. 항상 친절하고 다정했던 백인서가 왜 갑자기 가면을 쓴 듯한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혹시 병에 걸린 자신이 고모에게 미움을 사게 된 걸까?온유는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몸이 너무 약해져 급기야 기침하며 숨조차 가빠졌다. 이를 본 권욱은 서둘러 딸을 병실로 데려가고 의사와 간호사들은 지체 없이 온유의 상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조순영은 병실 밖에서 벽에 기댄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울고 싶었지만, 눈물마저 메말라 흐르지 않았다.오랜 시간이 흐른 뒤 권욱이 병실에서 나왔다. 권욱은 연민이 담긴 눈길로 조순영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서로의 눈길이 닿는 순간,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감싸안았다.“권욱, 내가… 뭘 잘못한 걸까?”“아니야.”권욱은 깊은숨을 내쉬며 조순영을 비난하지 않았다.조순영은 그저 한 어머니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을 뿐이었다.그러나 딸을 향한 조순영의 지나친 사랑은 때때로 이성을 잃게 만들었다.“그래도 난 여전히 백시연이 의심스러워.”권욱은 낮게 말했다. 권욱은 발끝을 응시하며 며칠 동안 마음속을 채운 복잡한 생각들로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나의 의문이 권욱의 마음속에서 점점 더 강하게 자리 잡았다.백시연의 어머니는 백홍이고 그녀는 악명 높은 인신매매범이었다.그렇다면 백인서의 어머니는 누구일까?권욱은 입술을 깨물었다. 끝없이 이어진 미로를 헤매는 기분이었다. 사방으로 길이 뻗어 있었지만, 어디에도 출구는 없었다.그때 권욱의 전화기가 울렸다.“권 대표님, 일은 잘 끝냈습니다.”“그래, 어떻게 됐어?”“교도소 측에서
“골수 이식 동의서에 서명하러 온 김에 온유를 한 번 보고 싶어서 왔어요.”“온유야.”권욱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이분은...”그러나 권욱의 소개가 끝나기도 전에 온유는 몸을 뒤로 움츠리며 조심스럽게 백시연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조그맣고 소심한 목소리로 말했다.“고모, 안녕하세요.”“뭐라고?”권욱과 조순영은 동시에 깜짝 놀라며 온유를 바라보았다.“온유야, 너... 방금 뭐라고 했니?”온유는 고개를 푹 숙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백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못 들으셨나요? 이 아이가 분명 저를 고모라고 불렀어요.”“하지만... 두 사람 오늘 처음 만난 거 아니야?”권욱의 깊은 눈빛 속에 어두운 빛이 스쳤다. 권욱은 상황이 점점 더 의심스러워지며 마음속에 강한 경계심이 자리 잡았다.조순영은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왜냐하면 온유가 처음 백인서를 만났을 때도 고모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왜 그래요?”백시연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물었다.“많이 놀랐나요? 두 분 표정이 왜 그래요?”“조금.”권욱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말했다.“온유는 낯을 많이 가려. 특히 너처럼 가면을 쓰고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에게는 먼저 인사하지 않아. 그런데 예전에...”권욱은 말을 멈추고 깊은 생각에 잠겼고 백시연은 온유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병실을 나섰다.잠시 후, 권욱은 조순영을 밖으로 데리고 나와 냉정한 얼굴로 물었다.“너, 백시연한테 대체 무슨 약속을 한 거야??”조순영은 침묵했다.권욱은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백시연에게 돈 준 거야?”“권욱!”조순영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내 딸을 위해서였어!”“내가 다른 방법을 찾겠다고 했잖아.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당신이 방법을 생각해 낼 동안, 내 딸은 죽게 생겼다고!”권욱은 조순영을 노려보았지만, 조순영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당신이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알아.”조순영은 목이 메어 말을 힘겹게 이어 나갔다.“당신은 백
백시연은 강소아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병원 후문으로 발길을 돌렸다.그곳은 사람이 없었고 백시연은 침착하게 가면을 쓰며 미리 약속한 시간에 맞춰 조순영을 만나러 갔다.병원 옆의 카페는 조용했고 조순영은 이미 창가 자리에서 백시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백시연이 들어오자, 조순영은 급히 손을 흔들었다.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백시연의 금빛 가면을 비추자, 조순영은 묘한 불편함에 사로잡혔다.“시연아...”조순영은 망설이며 말했다.“너... 도대체 언제쯤 골수 검사를 할 거야?”백시연은 몸을 느긋이 뒤로 젖히며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가면 아래로 드러난 백시연의 눈에는 차갑고 영리한 빛이 서려 있었다.“골수 검사 날짜는 당신들이 정하는 거 아니에요?”“너...”“말했잖아요. 돈을 먼저 보내라고요. 그렇지 않으면 저와 아무 상관 없는 아이를 구할 이유가 없죠.”“백시연!”조순영은 격한 목소리로 말했다.“온유가 왜 너와 상관없어? 그 아이는 권욱의 딸이야!”“하지만 저는 권씨 성을 쓰지 않아요.”백시연은 입을 벌리며 크게 웃었다.조순영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고 머릿속이 하얘졌다.그렇다. 백시연은 권씨 성이 아니었다.그리고 백시연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권씨 가문에 당당히 들어가기 위험이었다.“당신들이 이런 조건을 받아들이기 힘들 거란 거 알아요.”백시연은 느긋하게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하지만 세상에 공짜라는 건 없잖아요. 물론 저도 알아요. 검사 결과가 이상적이지 않으면 제가 협박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백시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검은 옷을 걸친 백시연의 모습은 대낮의 밝은 햇살에도 음산하고 서늘한 기운을 자아냈다.“제가 당신들에게 골수 검사를 약속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배려한 거예요. 그러니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 하겠죠. 설령 검사가 성공하지 않더라도 권씨 가문이 저를 버린 세월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감당해야 하지 않겠어요?”조순영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조
모두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백인서는 말없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세심한 강소아는 백인서의 낙담한 표정을 눈치채고 부드럽게 물었다.“무슨 일 있어?”백인서는 강소아를 보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저... 온유를 봤어요.”“온유가 정말 아팠던 거야? 그래?”최군성이 성급히 물었다.“봐요, 제가 들은 소식이 맞았잖아요! 권욱과 조순영이 요즘 마음고생 엄청 심하다고 들었어요.”“맞아요, 온유가 많이 아파. 우리가 직접 봤어.”최지용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내가 보기엔 온유가 예전 같지 않아.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어.”“그게 무슨 말이에요?”“예전에는 백인서를 보면 그렇게 좋아했잖아. 그런데 이번에는... 온유가 백인서를 싫어한다고 말했어.”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의아해했다.백인서는 며칠이 지나도록 그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강소아가 백인서의 손을 잡고 위로하며 말했다.“어린애들은 가끔 그렇게 투정을 부릴 때도 있잖아. 게다가 지금 몸이 아프니 마음도 지쳤을 거야. 자주 가서 온유를 챙기다 보면 다시 예전처럼 돌아올 거야!”백인서는 고개를 끄덕였다.강소아의 마음속에는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다음 날, 강소아는 최가원을 데리고 병원에 검진을 받으러 갔다. 한 살 된 최가원은 건강 상태가 매우 좋았다. 검사 결과가 모두 기준치 이상으로 나와 이 연령대 아이들의 건강 모범으로 손꼽힐 정도였다. 피를 뽑을 때조차 울지 않고 큰 눈을 깜빡이며 간호사를 보며 옹알이를 했다.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들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최씨 가문의 작은 공주에게 푹 빠져 있었다.하지만 병원의 다른 한쪽은 암울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똑같이 재벌가의 딸로 태어났지만, 한쪽은 생기 넘치는 웃음을 보였고 다른 한쪽은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강소아는 최가원을 보모에게 맡기고 권온유의 병실로 향했다.병실로 가기 전에 화장실에 들렀는데 누군가가 칸막이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강소아는 순간 멈칫했다. 잠시 놀란
의사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방금... 권욱 씨의 여동생이 다녀갔습니다.”“여동생이요?”최지용은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무슨 여동생이요?”의사는 더는 말을 잇지 않고 최지용을 한 번 쳐다본 뒤,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갔다.백인서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잊었어요? 권씨 가문에 사생아가 있다는 얘기 들었잖아요...”최지용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럼... 그 사생아를 찾은 이유가 온유의 골수 이식을 위한 거란 말이야?”백인서는 아무 말 없이 병실 안을 바라보았다. 온유는 어느 정도 감정을 추스른 듯했지만, 여전히 침대에 웅크린 채 흐느끼고 있었다. 그 작은 모습은 너무나도 안쓰러웠다.하지만 온유가 방금 보였던 반응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고모를 싫어한다니...평소에 고모를 가장 좋아한다고 하던 아이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한편, 강소아와 최군형은 둘째 아이를 계획 중이었다.오랜만에 만난 그들은 작은 야외 레스토랑에서 따스한 봄 햇살을 즐기며 식사 중이었다. 최지용은 웃으며 차라리 축구팀을 꾸릴 만큼 아이를 낳아 인원이 적은 최씨 가문에 활력을 불어넣으라고 농담을 던졌다.최군형은 깜짝 놀라며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 최군형은 급히 강소아의 손을 잡고 최지용을 노려보며 말했다.“이 녀석! 말 함부로 하지 마! 우리 아내가 그런 고생하게 놔둘 수 없어!”잠시 후, 최군성과 배윤아도 식당에 도착했다.두 사람이 손을 잡은 모습을 본 모두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최군성은 막 만화를 완성한 뒤였는지 자리에 앉자마자 배가 고픈 듯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배윤아는 그런 그의 손등을 가볍게 툭 치며 살짝 꾸짖는 듯했지만, 눈에는 애정 어린 빛이 가득했다.두 사람은 최근 열린 만화 전시회 이야기를 나눴다.전시회는 대성공을 거뒀고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한 새 작품은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호평을 받았다. 심지어 여러 대형 제작사에서 관심을 보이며 저작권 계약을 제안하기도 했다.“그럼 팔기로 했어?”최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