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용이 거실을 나서려다 마침 찻주전자를 들고 들어오는 최연서와 마주쳤다.아버지가 아직 말을 건네기도 전에 아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최연서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표아정의 컵에 물을 채우고는 옆에 앉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여보, 왜 그렇게 진지하게 굴어? 그 백인서 아가씨, 당신도 이미...”“이미 뭐?”표아정은 눈을 번쩍이며 최연서를 노려보았다.“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최연서는 체념하며 말했다.“내 말은, 우리 아들이랑 좀 잘 지내봐. 우리 목석같은 아들, 언제 여자를 좋아한 적 있었어? 이번에야 겨우 마음을 연 건데, 우리도 너무 따지지 말자고!”“당신은 아무것도 몰라!”표아정은 주먹으로 최연서의 팔을 살짝 쳤다.“어쨌든 나는 내 계획이 있으니까, 당신은 참견하지 마!”“흐흐.”최연서는 이미 모든 걸 이해한 듯 미소를 지었다.“당신, 사실 며느리가 들어와서 당신 자리를 뺏을까 봐 걱정하는 거지? 여보, 걱정하지 마. 우리 집에서 당신은 언제나 여왕이잖아!”“저리 가!”표아정은 말로는 최연서를 밀어냈지만, 눈빛에는 이미 살짝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최연서는 소파 옆에 앉았고 표아정은 자연스럽게 다리를 그의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최연서에게 발 마사지를 부탁했다.최연서는 미소를 지으며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표아정을 바라보았다....그날 식사 이후, 백인서는 표아정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생각해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최씨 가문 같은 곳에서 일반적인 재벌 가문조차 하찮게 여기는데, 하물며 백인서처럼 보잘것없는 출신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이대로 계속 가다간 최지용만 고생을 시키는 것이었다.백인서의 생각을 들은 강소아는 놀란 눈으로 백인서를 바라보며 말했다.“너, 설마 포기하려는 건 아니지?”“당연히 그럴 리 없죠.”백인서는 미소를 지으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눈빛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지용 씨가 먼저 나를 포기하지 않는 한, 나는 계속 그의 곁에 있을 거
그럴 리가 없는데?그날 표아정의 태도는 며느리를 맞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당장이라도 최지용과 백인서를 갈라놓으려는 것처럼 보였는데 말이다.강소아는 웃음을 터뜨리려다가 옆에서 잠든 작은 가원이를 깨울까 봐 조심했다.“후.”강소아는 살짝 한숨을 쉬며 말했다.“숙모는 뭐랄까, 군형 씨의 외할아버지랑 비슷한 분이야. 겉으로는 오만하고 냉정해 보이지만 사실 속은 엄청 따뜻한 사람이야. 숙모가 좀 까탈스럽긴 하지. 하지만 숙모가 자란 환경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백인서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웃었다.최군형의 외할아버지는 ‘남양 복어’라는 별명을 가진 분이라고 들었다.백인서는 표아정이 복어처럼 온몸에 가시를 세우고 있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그리고 표아정의 성장 환경을 생각해 보면... 군인 가문의 외동딸이니 가족들이 얼마나 아끼고 보살폈을지 당연히 이해가 갔다.최지용의 말에 따르면, 표아정은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시집을 갔고 남편 최연서 역시 다정하고 우아한 학자였다.결혼 후에도 시댁에서 극진히 아껴주었다.최지용이 어머니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라고 말하는 것도 그럴 법했다.50년 동안 한결같이 사랑받으며 살아온 인생이라니.어떤 여자는 정말로 태어날 때부터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그런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까탈스럽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사실, 백인서는 표아정이 조금 부러웠다. 만약 단 하루만이라도 표아정과 인생을 바꿔볼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할지도 모른다....표아정이 백인서에게 카페에서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다.“Afternoon에 시간 있겠지? 나와서 coffee 한잔하자고. 너랑 할 이야기가 있어.”백인서는 표아정의 영어를 들을 때마다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예의에 어긋날까 봐 억지로 참곤 했다.백인서는 약속 시간보다 10분 일찍 카페에 도착했다.창가에 앉아 무심코 바깥을 바라보자, 표아정의 포르쉐가 길가에 멈추는 게 보였다.차에서 내린 표아정은 약간 과장된 동작으로 차 열쇠를 보디가드
하지만...아들의 안목이 꽤 독특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표아정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 갑자기 외부에서 소리가 들려왔다.“최 사모님?”“어머나, 진짜 최 사모님이시네요!”“최 사모님, 오늘 기분 좋으신가 봐요. 차 마시러 나오셨네요?”표아정은 거의 목구멍에 있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백인서도 멍하니 고개를 들어보니 화려한 액세서리로 치장한 몇 명의 부인들이 다가와 표아정 주변을 에워쌌다. 그들은 입을 모아 ‘최 사모님'이라고 부르며 아부 섞인 미소를 지었다.“사모님, 이 숄 정말 멋지네요!”“최 사모님 피부가 여전히 이렇게 좋으시다니, 전 완전히 안 되겠네요! 최 사모님과 비교하면 저는 그냥 늙은 주부일 뿐이죠!”“그야 당연하죠! 최 사모님이 쓰시는 것과 당신이 쓰는 건 차원이 다르지 않겠어요? 하하하...”그들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었지만, 표아정은 분명히 건성으로 웃고 있을 뿐이었다.표아정은 성격이 직설적이라 이런 상황이 가장 불편했다. 특히 사람들과 사진을 찍을 때마다 사람들은 표아정을 가운데에 세우려고 했고 표아정은 가식적인 웃음을 지어야 했다.다른 건 다 참아도 가식적인 웃음만은 참을 수 없었다.차라리 총 맞는 것보다 괴로웠다.“최 사모님!”눈치 빠른 한 사람이 백인서를 발견하고는 눈을 번쩍이며 아첨했다.“이분이 며느님이신가요?”“어? 어...어...”표아정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아유, 며느님이 정말 예쁘네요! 사모님이 딸이 없다는 걸 우리가 아니까 그렇지, 몰랐으면 친딸인 줄 알았을 거예요!”백인서와 표아정은 서로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마주쳤다.둘 다 이런 사교술이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됐어, 됐어, 여기서 사람들 방해하지 말자고!”그들은 피식거리며 웃으며 말했다.“최 사모님, 우리 저쪽으로 가서 앉을 테니 계속 얘기 나누세요!”그들이 떠나가 표아정은 눈을 치켜뜨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그들이 돌아서며 떠나가는 순간, 작은
포르쉐는 고속으로 질주했고 경호차와 보모 차가 허겁지겁 뒤따라왔다.마침내 차는 DL 쇼핑몰 앞에 멈췄다.표아정이 사전에 연락하지 않아서 쇼핑몰에는 특별한 준비가 없었고 누군가가 표아정을 맞이하러 나오지도 않았다.백인서는 화려한 명품 매장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안 들어가고 뭐 해?”표아정은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이 매장 주얼리는 모두 한정판이야. 들어가서 마음에 드는 반지를 골라. 가격은 신경 쓰지 말고.”백인서의 눈이 커졌다.“아니, 잠시만요! 가격은 확인해야죠!”표아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래, 그렇게 해야지. 최씨 집안에서 반지 하나 살 돈이 없다고 생각하면 곤란하잖아? 가장 비싼 걸로 골라, 알았지?”“...”“됐어, 됐어. 그냥 그렇게 해!”표아정은 말하면서 돌아섰다.“넌 먼저 들어가서 반지를 고르고 있어. 난 잠시 화장실에 다녀올게.”“어머님...”백인서가 말하려는 순간, 표아정은 이미 멀리 가버렸다.백인서는 고개를 들어 매장을 바라보았다.이곳의 화려함은 백인서의 상상 이상이었다. 이곳은 다이아몬드 주얼리 매장이었는데, 매장 자체가 거대한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고 있었다.밖에서 보기만 해도 이곳의 가격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 알 수 있었다.매장은 넓었고 직원 수가 손님보다 훨씬 많았다.심지어 바닥 타일에도 금색 테두리가 박혀 있었다.백인서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최지용에게 전화를 걸까 고민했지만 표아정을 화나게 할까 봐 걱정되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용기를 내어 안으로 들어갔다.하지만 들어가자마자 백인서를 반기는 직원은 보이지 않았다.몇몇 직원들은 백인서의 수수한 차림을 보고는 응대할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백인서를 힐끗 한 번 쳐다보고 다시 무표정하게 제자리에 서 있었다.백인서는 카운터 앞으로 다가가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들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저기...”백인서는 반지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이거 한 번 껴볼 수 있을까요?”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백인서가 고개를
백인서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그 여자들이요?”“그래, 눈치 없는 그 여자들 말이야! 도대체 우리 최씨 가문이 어떻게 며느리를 소홀히 대했다고 생각하는지, 내가 꼭 보여줘야겠어!”표아정은 이를 악물고 핸들을 쥐며 말했는데 손에 들어간 힘이 너무 강해 핸들이 부러질 듯했다.백인서는 고개를 숙이며 미소를 지었다.손가락 위에 있는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는 자신의 것과는 거리가 먼 사치스러움으로 반짝였지만, 마음 한구석에 따뜻함이 번졌다.표아정은 빠르게 차를 몰았고 가는 도중에 이미 경호원에게 아까 만난 사모님들에게 연락하라고 지시했다.사모님들은 평소에 표아정과 친해지기 어려웠는데, 이번에 표아정이 직접 게임을 하자고 하자 감격하며 약속 장소에 표아정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백인서는 표아정을 따라 고급스러운 한 회장에 들어섰다.그곳은 고요하고 우아하면서도 극도의 사치스러움이 묻어나는 장소였다. 표아정을 맞이하러 나온 사람도 분명 사회적 지위가 있어 보였지만 표아정 앞에서는 여전히 경건하고 겸손한 태도를 유지했다.방에 들어가기 직전, 표아정은 발걸음을 멈추고 살짝 팔을 들어 백인서에게 신호를 보냈다.백인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손을 내밀었고 표아정은 그 손을 잡아 자신의 팔짱에 끼우더니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백인서를 흘겨보았다.“지용이가 너는 꽤 시원시원한 성격이라고 하던데? 왜 일을 이렇게 더디게 하니?”백인서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잠깐, 손가락 내밀어 보여줘!”표아정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여기까지 온 의미가 없잖아?”백인서는 표아정의 말에 따랐다.평소엔 차가운 모습으로 남을 거부하는 듯했던 백인서였지만 지금은 마치 순한 토끼처럼 표아정의 말에 따랐다.“아이고!”방에 들어서자마자 표아정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왕 사모님, 정 사모님, 이 사모님! 모두 오랜만이네요... 하하하!”“어...”사모님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어색해했다.이렇게 반갑게 맞이하는 표아정은 드물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손 사모님,
이렇게 속마음을 쉽게 드러내다니, 앞으로 이 아가씨 앞에서 어떻게 위엄을 세워야 하나...“저기... 인서야! 차에 가서 내 에르메스 가방 좀 가져와!”백인서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최 사모님, 이 아가씨 정말 괜찮은 사람이네요!”한 사모님이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예쁘고 말수도 적으면서 최 사모님 말씀도 잘 따르니, 지용이가 현명한 아내를 맞이한 것 같아요. 백인서 아가씨와 지용이가 정말 잘 어울려요. 천생연분이에요!”최 사모님은 숄을 고쳐 입고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자부심 가득한 표정을 더는 감추지 못했다.하지만 여전히 입으로는 강하게 말했다.“아니, 그런 말 마! 난 아직 동의한 적 없으니까.”“최 사모님께서 동의하지 않으셨다고요?”다른 한 사모님이 눈을 굴리며 말했다.“우리 아들은 아직 싱글인데, 혹시...”“뭐 하자는 거야?”표아정은 즉시 눈을 번쩍 뜨며 노려보았다.표아정의 눈빛이 변하자, 아무도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했다.표아정은 가볍게 기침을 두 번 하더니, 정도껏 하라는 눈빛을 던지고는 몸을 돌려 천천히 나갔다.이때 마침 백인서가 한정판 에르메스를 들고 돌아왔고 방 밖에서 표아정을 마주쳤다.표아정은 가방을 받아 들고 방금 들은 사모님들의 칭찬이 마음에 쏙 들었는지 백인서를 보며 한층 더 마음에 들어 하는 눈빛을 보냈다.사실 처음부터 표아정은 백인서를 못마땅하게 여긴 적이 없었다.그저 자신의 마음을 너무 쉽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평생 자존심 강하게 살아온 표아정에게 마음에 드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처음 백인서를 만났을 때부터 조용하고 예쁘지만, 별다른 배경도 없는 이 아가씨가 마음에 들었던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건 표아정의 논리와 너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현실 속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원래 앙숙이어야 하지 않나?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늘 불만스럽게 생각해야 정상 아닌가?그래서 표아정은 일부러 까다로운 척을 하며 자신만의 균형을 잡으려 했다.“어머님.”문
백인서가 고개를 돌리자, 누군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느긋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 얼굴엔 장난기 어린 미소가 가득 번져 있었다.“권욱 씨?”“정말 미안하게 됐네.”권욱이 웃으며 말했다.“우연히 너와 최 사모님이 나눈 대화를 들었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예비 시어머니'가 맞겠지?”“아니에요.”백인서는 차분한 얼굴로 대답하며 그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를 무심하게 주머니에 넣었다.“이렇게 큰 다이아몬드 반지 보기 쉽지 않은데!”권욱이 가까이 다가와 말하며 반지의 광채와 디자인을 훑어보았다.“너희 시어머니, 돈 꽤 쓰셨네!”“아니라고 했잖아요! 정말 집요하시네요?”백인서는 얼굴이 붉히며 권욱을 노려보았고 권욱은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권욱은 일 때문에 이곳에서 고객을 만났다가 우연히 백인서와 최 사모님의 고부 대화를 듣게 된 것이다.백인서는 입을 삐죽거리며 떠나려고 했지만, 권욱이 백인서를 다시 막아섰다.“잠깐만, 너무 서두르지 마. 할 얘기가 있어.”“무슨 일이죠?”권욱은 바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내가 이제 육자 그룹 회사를 떠나 새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마침 비서가 하나 필요해, 너 나 좀 도와줄래?”“제가요?”백인서는 잠시 멈칫했다. 권욱이 농담을 하는 건가 싶었다.하지만 권욱의 진지한 얼굴은 전혀 농담이 아닌 것 같았다.“너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잖아.”권욱은 부드럽게 말했다.“나는 이제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해야 해. 그래서 나와 함께할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해.”“하지만 저는...”“뭐야, 아직도 작은 대표님을 생각하고 있는 거야?”권욱이 웃으며 말했다.“강소아가 네 친언니도 아닌데, 왜 그렇게 신경을 써? 게다가 너 지금 어떤 신분으로 육씨 집안 사람과 어울릴 수 있겠어?”백인서는 고개를 살짝 떨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권욱은 다가와서 아까 표아정이 떠난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그리고... 저분도 너를 완전히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진 않던데?”백인서는 고집스럽게 대꾸했다.“처
최지용은 순간 당황해 말문이 막혔다.백인서가 웃으며 최지용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추며 부드러운 입술이 닿는 순간 최지용은 순간적으로 온몸이 뜨거워졌다. 피가 갑자기 어딘가로 쏠리는 느낌이었다. 요즘 들어 백인서를 향한 갈망이 더 강렬해진 최지용이었다.문득 최군형이 자주 하던 ‘그냥 한 방 먹여라’는 말이 떠올랐다. 지금, 이 순간에야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 최지용은 ‘총알이 이미 장전된 상태’였지만 필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기지 않으려 애썼다.“지용 씨, 무슨 일 있어요?”“응?”백인서는 크고 맑은 눈으로 최지용을 쳐다보았다. 최지용의 이마엔 어느새 땀이 맺혔고 백인서가 키스했던 자리는 살짝 붉게 변해 있었다.최지용은 백인서를 바라보며 눈길을 떼지 못했고 깊은 눈동자엔 백인서의 모습이 가득했다.숨결마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최지용은 자신의 상태가 이상해 보일까 봐 얼른 자리를 옮겨 백인서와 거리를 두고 앉았다.“지용 씨, 어디 아파요?”“어...”어딘가가 좀 불편했다.“내가 도와줄까요?”최지용은 쓴웃음을 지었다. 최지용도 백인서가 ‘도와주기’를 바랐지만...백인서는 최지용의 얼굴이 붉어졌다 창백해졌다 하는 걸 보고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다급해졌다.“지용 씨,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별일 아니야.”최지용은 몇 번 심호흡하고는 백인서의 작은 손을 잡아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그냥 네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어.”“무슨 말이요?”“반지같이 중요한 건, 당연히 내가 줘야지.”“지용 씨...”“이 반지는 우리 엄마가 너한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최지용은 그 큰 반지를 서랍에 넣으며 말했다.“내가 너한테 줄 반지는 네가 직접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백인서는 피식 웃음을 참지 못했다.“제가 이 반지를 마음에 안 들어 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그야...”최지용은 입을 삐죽거렸다.“이런 졸부 스타일은 딱 봐도 우리 엄마 취향이잖아.”말을 마친 두 사람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최지용은 백인서를 품에 안았고 백인서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