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한편, 서재에서는 최지용도 최군형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고 있었다.“인서 말이야...”“참 괜찮은 사람이지.”최군형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출신 배경만 빼면 다른 부분에선 너와 전혀 뒤지지 않아. 게다가 두 사람이 함께하는 데 집안 배경이 그렇게 중요한가? 게다가 넌 남들의 말에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잖아! 심지어 증조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까지 스스로 바꾼 사람이잖아.”“나는 상관없어, 그런데 인서는 그 모든 걸 현실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야.”최지용은 쓴웃음을 지었다.“보통 사랑에 빠지면 판단력이 흐려지는데, 인서는 사랑을 할수록 더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너도 참 만족을 몰라!”“나 정말 만족해.”최지용은 최군형을 바라보며 말했다.“문제는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일이야. 네가 좀 도와줘야 해.”최군형은 최지용을 째려보며 말했다.“군형아, 아무튼 난 몰라!”최지용은 갑자기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네가 안 도와주면, 나...”“도와주지 않으면 뭐?”“매일 네 딸을 안고 있을 거야!”최지용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안겨서 자는 게 얼마나 편안한지 알려주면 가원이는 더는 자기 침대에서 자지 않으려고 할 거야! 그럼, 너도 이제부터 밤마다 가원이를 안고 자야 할 걸? 안아주지 않으면 울고불고할 테니까!”“최지용!”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그래서 네 대답은?”최군형은 최지용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도와줄게!”최지용은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으며 최군형의 어깨를 두드렸다.“하지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한정적이야. 중간에서 좀 조율해 줄 수 있을 뿐이야.”“우리 아버지는 괜찮은데.”최지용은 최군형을 보며 말했다.“문제는 우리 엄마야.”“알겠어.”최군형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한 번 생각해 볼게.”...강소아는 백인서의 작은 손을 잡고 부드럽게 물었다.“솔직히 말해 봐, 너 최지용 씨 사랑해?”백인서는 순간 멍해졌다.대답할 필요가 있을까? 백인서는 최지용에게
최지용의 집으로 가기 전, 백인서는 강소아에게 미리 이야기를 들었다. 최지용의 아버지인 최연서는 최씨 가문의 자제들 중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아니지만 결코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그의 이름처럼 최연서는 지식이 깊고 예의 바르며 온화한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 상업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평생을 고고학 연구에 헌신했다. 현재는 오성 대학교 고문학과 명예 교수로 있다.그의 아내인 표아정 역시 만만치 않은 배경을 가지고 있다.표씨 가문은 무장 가문으로, 조상 대대로 국경을 지키며 군사 활동을 이어온 집안이다. 표씨 가문의 많은 사람들이 특히 국경 지역에서 군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으며 국경의 평화에 표씨 가문의 공헌은 매우 크다.“인서야.”최지용은 만나러 가는 길에 조심스레 말했다.“우리 엄마는 어릴 때부터 귀하게 자랐어. 외할아버지한테 아들만 많고 딸은 딱 한 명이라 엄청나게 예쁨 받으면서 자랐거든. 그래서 성격이 좀 강해... 하하, 나도 어렸을 땐 엄마한테 말대꾸도 못 했어! 혹시라도 엄마가 좀 듣기 불편한 말을 해도...”“걱정하지 마세요.”백인서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전 어른들께 무례하게 굴지 않아요. 게다가 어른들이 저에게 뭐라 하셔도 당연한 거죠. 저는 대들지 않을 거예요.”이미 최지용과 함께하기로 결심한 이상, 그의 집안 모두를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었다.“바보야.”최지용은 걸음을 멈추고 부드럽게 말했다.“내 말은, 혹시 엄마가 뭐라고 해도 겁내지 말라는 거야. 난 네 편이니까 내가 다 막아줄게!”“네?”“잊었어?”최지용은 백인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최씨 집안 남자들의 전통, 자기 여자는 절대 힘들게 하지 않는 거 몰라?”백인서는 미소를 지으며 최지용의 품에 살짝 기대었다. 그의 강한 심장 박동 소리가 백인서에게 엄청난 안정감을 주었다.부모님과의 만남은 명황 호텔에서 준비되었고 분위기는 범상치 않았다.백인서는 금빛 성처럼 보이는 호텔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심장이 두근거렸다. 호텔은
표아정은 입을 삐죽이며 숄을 정리한 뒤, 최지용에게 거만한 눈빛을 보냈다.그 후로 백인서는 웃음이 나오면서도 웃지 못하는 어색한 식사를 하게 되었다.음식은 매우 풍성했고 호텔 서비스도 훌륭했다.최연서도 그리 어렵게 대할 사람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표아정이었다.“미리 말해두겠어!”표아정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손에 낀 큰 카슈미르 블루 사파이어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백인서에게 고정했다.“백 아가씨, 우리 표씨 가문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그런 가문이 아니야. 함부로...”“에헴, 여보.”최연서는 가볍게 표아정에게 주의를 주었다.“최씨 가문이야, 최씨 가문...”“뭐라고?”표아정은 목소리를 한껏 높이며 외쳤다.“이 늙은이가, bad! 젊었을 때 당신이 뭐라고 했어? 나한테 처가살이한다고 했잖아? understand?”최연서는 기침을 더욱 심하게 했다.최지용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손가락 사이로 어이없다는 표정을 백인서에게 보여주었다....힘겹게 식사를 마친 후, 최지용은 백인서를 아파트에 데려다주고 다시 최씨 가문으로 돌아왔다.문을 열자마자 최연서와 표아정이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마침, 최지용도 할 얘기가 있었다.최지용이 한 발짝 들어서자마자 최연서가 최지용에게 과장되게 눈짓을 보냈다. 표정으로 표아정을 가리키며 ‘쉿’ 하라는 몸짓을 했다.최지용은 미소를 지으며 어머니 옆에 앉아 어깨를 주물렀다.표아정은 여전히 공작새처럼 자존심 가득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아들을 한 번 보더니 드물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였다.“흠, 주물러주는 솜씨가 좋네. 밖에서 많이 해봤나?”“어, 엄마...”“네가 무슨 말 할지 알아.”표아정은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그러니 돌려서 말하지 말자고! 네 백 아가씨에 대한 내 입장은 네 글자야. 절대 반대!”“엄마, 왜요?”“왜라니?”표아정은 눈살을 찌푸렸다.“너 그 아가씨 밥 먹는 거 봤지? 얼굴 잔뜩 찡그리고 웃음기 하나 없잖아. 내가 이런 며느리를 집에
최지용이 거실을 나서려다 마침 찻주전자를 들고 들어오는 최연서와 마주쳤다.아버지가 아직 말을 건네기도 전에 아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최연서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표아정의 컵에 물을 채우고는 옆에 앉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여보, 왜 그렇게 진지하게 굴어? 그 백인서 아가씨, 당신도 이미...”“이미 뭐?”표아정은 눈을 번쩍이며 최연서를 노려보았다.“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최연서는 체념하며 말했다.“내 말은, 우리 아들이랑 좀 잘 지내봐. 우리 목석같은 아들, 언제 여자를 좋아한 적 있었어? 이번에야 겨우 마음을 연 건데, 우리도 너무 따지지 말자고!”“당신은 아무것도 몰라!”표아정은 주먹으로 최연서의 팔을 살짝 쳤다.“어쨌든 나는 내 계획이 있으니까, 당신은 참견하지 마!”“흐흐.”최연서는 이미 모든 걸 이해한 듯 미소를 지었다.“당신, 사실 며느리가 들어와서 당신 자리를 뺏을까 봐 걱정하는 거지? 여보, 걱정하지 마. 우리 집에서 당신은 언제나 여왕이잖아!”“저리 가!”표아정은 말로는 최연서를 밀어냈지만, 눈빛에는 이미 살짝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최연서는 소파 옆에 앉았고 표아정은 자연스럽게 다리를 그의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최연서에게 발 마사지를 부탁했다.최연서는 미소를 지으며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표아정을 바라보았다....그날 식사 이후, 백인서는 표아정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생각해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최씨 가문 같은 곳에서 일반적인 재벌 가문조차 하찮게 여기는데, 하물며 백인서처럼 보잘것없는 출신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이대로 계속 가다간 최지용만 고생을 시키는 것이었다.백인서의 생각을 들은 강소아는 놀란 눈으로 백인서를 바라보며 말했다.“너, 설마 포기하려는 건 아니지?”“당연히 그럴 리 없죠.”백인서는 미소를 지으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눈빛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지용 씨가 먼저 나를 포기하지 않는 한, 나는 계속 그의 곁에 있을 거
그럴 리가 없는데?그날 표아정의 태도는 며느리를 맞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당장이라도 최지용과 백인서를 갈라놓으려는 것처럼 보였는데 말이다.강소아는 웃음을 터뜨리려다가 옆에서 잠든 작은 가원이를 깨울까 봐 조심했다.“후.”강소아는 살짝 한숨을 쉬며 말했다.“숙모는 뭐랄까, 군형 씨의 외할아버지랑 비슷한 분이야. 겉으로는 오만하고 냉정해 보이지만 사실 속은 엄청 따뜻한 사람이야. 숙모가 좀 까탈스럽긴 하지. 하지만 숙모가 자란 환경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백인서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웃었다.최군형의 외할아버지는 ‘남양 복어’라는 별명을 가진 분이라고 들었다.백인서는 표아정이 복어처럼 온몸에 가시를 세우고 있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그리고 표아정의 성장 환경을 생각해 보면... 군인 가문의 외동딸이니 가족들이 얼마나 아끼고 보살폈을지 당연히 이해가 갔다.최지용의 말에 따르면, 표아정은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시집을 갔고 남편 최연서 역시 다정하고 우아한 학자였다.결혼 후에도 시댁에서 극진히 아껴주었다.최지용이 어머니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라고 말하는 것도 그럴 법했다.50년 동안 한결같이 사랑받으며 살아온 인생이라니.어떤 여자는 정말로 태어날 때부터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그런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까탈스럽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사실, 백인서는 표아정이 조금 부러웠다. 만약 단 하루만이라도 표아정과 인생을 바꿔볼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할지도 모른다....표아정이 백인서에게 카페에서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다.“Afternoon에 시간 있겠지? 나와서 coffee 한잔하자고. 너랑 할 이야기가 있어.”백인서는 표아정의 영어를 들을 때마다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예의에 어긋날까 봐 억지로 참곤 했다.백인서는 약속 시간보다 10분 일찍 카페에 도착했다.창가에 앉아 무심코 바깥을 바라보자, 표아정의 포르쉐가 길가에 멈추는 게 보였다.차에서 내린 표아정은 약간 과장된 동작으로 차 열쇠를 보디가드
하지만...아들의 안목이 꽤 독특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표아정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 갑자기 외부에서 소리가 들려왔다.“최 사모님?”“어머나, 진짜 최 사모님이시네요!”“최 사모님, 오늘 기분 좋으신가 봐요. 차 마시러 나오셨네요?”표아정은 거의 목구멍에 있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백인서도 멍하니 고개를 들어보니 화려한 액세서리로 치장한 몇 명의 부인들이 다가와 표아정 주변을 에워쌌다. 그들은 입을 모아 ‘최 사모님'이라고 부르며 아부 섞인 미소를 지었다.“사모님, 이 숄 정말 멋지네요!”“최 사모님 피부가 여전히 이렇게 좋으시다니, 전 완전히 안 되겠네요! 최 사모님과 비교하면 저는 그냥 늙은 주부일 뿐이죠!”“그야 당연하죠! 최 사모님이 쓰시는 것과 당신이 쓰는 건 차원이 다르지 않겠어요? 하하하...”그들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었지만, 표아정은 분명히 건성으로 웃고 있을 뿐이었다.표아정은 성격이 직설적이라 이런 상황이 가장 불편했다. 특히 사람들과 사진을 찍을 때마다 사람들은 표아정을 가운데에 세우려고 했고 표아정은 가식적인 웃음을 지어야 했다.다른 건 다 참아도 가식적인 웃음만은 참을 수 없었다.차라리 총 맞는 것보다 괴로웠다.“최 사모님!”눈치 빠른 한 사람이 백인서를 발견하고는 눈을 번쩍이며 아첨했다.“이분이 며느님이신가요?”“어? 어...어...”표아정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아유, 며느님이 정말 예쁘네요! 사모님이 딸이 없다는 걸 우리가 아니까 그렇지, 몰랐으면 친딸인 줄 알았을 거예요!”백인서와 표아정은 서로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마주쳤다.둘 다 이런 사교술이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됐어, 됐어, 여기서 사람들 방해하지 말자고!”그들은 피식거리며 웃으며 말했다.“최 사모님, 우리 저쪽으로 가서 앉을 테니 계속 얘기 나누세요!”그들이 떠나가 표아정은 눈을 치켜뜨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그들이 돌아서며 떠나가는 순간, 작은
포르쉐는 고속으로 질주했고 경호차와 보모 차가 허겁지겁 뒤따라왔다.마침내 차는 DL 쇼핑몰 앞에 멈췄다.표아정이 사전에 연락하지 않아서 쇼핑몰에는 특별한 준비가 없었고 누군가가 표아정을 맞이하러 나오지도 않았다.백인서는 화려한 명품 매장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안 들어가고 뭐 해?”표아정은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이 매장 주얼리는 모두 한정판이야. 들어가서 마음에 드는 반지를 골라. 가격은 신경 쓰지 말고.”백인서의 눈이 커졌다.“아니, 잠시만요! 가격은 확인해야죠!”표아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래, 그렇게 해야지. 최씨 집안에서 반지 하나 살 돈이 없다고 생각하면 곤란하잖아? 가장 비싼 걸로 골라, 알았지?”“...”“됐어, 됐어. 그냥 그렇게 해!”표아정은 말하면서 돌아섰다.“넌 먼저 들어가서 반지를 고르고 있어. 난 잠시 화장실에 다녀올게.”“어머님...”백인서가 말하려는 순간, 표아정은 이미 멀리 가버렸다.백인서는 고개를 들어 매장을 바라보았다.이곳의 화려함은 백인서의 상상 이상이었다. 이곳은 다이아몬드 주얼리 매장이었는데, 매장 자체가 거대한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고 있었다.밖에서 보기만 해도 이곳의 가격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 알 수 있었다.매장은 넓었고 직원 수가 손님보다 훨씬 많았다.심지어 바닥 타일에도 금색 테두리가 박혀 있었다.백인서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최지용에게 전화를 걸까 고민했지만 표아정을 화나게 할까 봐 걱정되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용기를 내어 안으로 들어갔다.하지만 들어가자마자 백인서를 반기는 직원은 보이지 않았다.몇몇 직원들은 백인서의 수수한 차림을 보고는 응대할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백인서를 힐끗 한 번 쳐다보고 다시 무표정하게 제자리에 서 있었다.백인서는 카운터 앞으로 다가가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들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저기...”백인서는 반지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이거 한 번 껴볼 수 있을까요?”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백인서가 고개를
백인서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그 여자들이요?”“그래, 눈치 없는 그 여자들 말이야! 도대체 우리 최씨 가문이 어떻게 며느리를 소홀히 대했다고 생각하는지, 내가 꼭 보여줘야겠어!”표아정은 이를 악물고 핸들을 쥐며 말했는데 손에 들어간 힘이 너무 강해 핸들이 부러질 듯했다.백인서는 고개를 숙이며 미소를 지었다.손가락 위에 있는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는 자신의 것과는 거리가 먼 사치스러움으로 반짝였지만, 마음 한구석에 따뜻함이 번졌다.표아정은 빠르게 차를 몰았고 가는 도중에 이미 경호원에게 아까 만난 사모님들에게 연락하라고 지시했다.사모님들은 평소에 표아정과 친해지기 어려웠는데, 이번에 표아정이 직접 게임을 하자고 하자 감격하며 약속 장소에 표아정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백인서는 표아정을 따라 고급스러운 한 회장에 들어섰다.그곳은 고요하고 우아하면서도 극도의 사치스러움이 묻어나는 장소였다. 표아정을 맞이하러 나온 사람도 분명 사회적 지위가 있어 보였지만 표아정 앞에서는 여전히 경건하고 겸손한 태도를 유지했다.방에 들어가기 직전, 표아정은 발걸음을 멈추고 살짝 팔을 들어 백인서에게 신호를 보냈다.백인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손을 내밀었고 표아정은 그 손을 잡아 자신의 팔짱에 끼우더니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백인서를 흘겨보았다.“지용이가 너는 꽤 시원시원한 성격이라고 하던데? 왜 일을 이렇게 더디게 하니?”백인서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잠깐, 손가락 내밀어 보여줘!”표아정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여기까지 온 의미가 없잖아?”백인서는 표아정의 말에 따랐다.평소엔 차가운 모습으로 남을 거부하는 듯했던 백인서였지만 지금은 마치 순한 토끼처럼 표아정의 말에 따랐다.“아이고!”방에 들어서자마자 표아정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왕 사모님, 정 사모님, 이 사모님! 모두 오랜만이네요... 하하하!”“어...”사모님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어색해했다.이렇게 반갑게 맞이하는 표아정은 드물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손 사모님,
“뭐라고요? 10억 원이요?”백시연은 깜짝 놀라서 외쳤다.강소아는 슬쩍 백시연을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왜 그래? 고작 10억 가지고. 게다가 가원이에게 큰 선물을 주겠다고 네가 먼저 약속한 거잖아. 혹시 후회라도 하는 거야?”“그럴 리가!”배윤아가 옆으로 걸어오며 백시연의 어깨를 힘차게 두드렸다.“우리 인서는 분명히 선물을 줄 거야, 그렇지? 너희 둘 사이에 보석 하나쯤은 아무것도 아니잖아.”백시연의 얼굴이 단단히 굳어졌고 입술이 굳게 닫혔다.10억? 조순영에게서 받은 카드에는 고작 10억 원뿐이었다.백인서가 이때까지 이렇게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이 정도 돈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걸까?그래서 강소아가 그렇게 말한 것일까?“어머, 저 사람은 육 아가씨와 친하다던 백인서 아니야?”그때, 근처에 있던 여배우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방금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었어?”“예전에... 둘이 약속했나 봐, 백인서가 육 아가씨의 딸에게 선물을 주기로.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바뀐 것 같아!”“정말? 풉! 상류층 자매라는 것도 결국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봐! 백인서는 육 아가씨와 둘도 없는 사이처럼 보였는데. 육 아가씨가 어디를 가든 따라다녔잖아... 이제는 최씨 가문의 아들과 친해지니까, 가식적인 행동도 하기 싫어졌나 봐.”“그 선물이 10억 원짜리라고 하던데... 역시 두 사람 우정은 10억 원도 안 되는 거였어!”백시연의 얼굴은 점점 더 붉게 물들어갔다. 뒤돌아 그들에게 따지려던 찰나, 강소아가 재빠르게 백시연의 손목을 붙잡았다.“됐어, 인서야.”강소아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저 사람들은 평소에도 입만 살았어. 나중에 제대로 혼내 줄 거야.”“그래야죠, 저 사람들은 정섭 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예인이잖아요. 제대로 가르쳐야 해요!”백시연은 화를 내며 말했다.“소아 언니, 저 사람들이 이런 자리에 나온 건 정섭 엔터테인먼트를 대표해서이기도 하지만 결국 언니를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저렇게 뒤에서
권욱과 조순영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벅찬 기쁨에 눈물이 터져 나왔고 이내 서로를 끌어안은 채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권 대표님, 사모님, 정말 큰 경사입니다!”의사는 골수 검사 결과를 들고 환히 웃으며 말했다.“드디어 아가씨를 살릴 수 있게 됐습니다!”“맞아요, 정말 기쁜 일이네요.”최지용이 권욱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한심하긴, 그만 울어요!”권욱은 흐느끼면서도 반박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네 딸이 아픈 게 아니니, 넌 당연히... 당연히 이 고통을 알 리가 없지!”최지용은 기가 차 웃으며 권욱의 등을 두 번 세게 두드렸다.백인서는 마음 한편의 큰 짐을 덜어낸 듯 병실 안에 있는 권온유를 바라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그나저나.”조순영이 문득 입을 열었다.“백시연의 골수 결과는 어떻게 됐나요?”“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나왔습니다.”의사가 고개를 저었다.“대부분의 지표는 일치했지만 몇 가지 중요한 항목이 맞지 않아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정말 신기한 인연이네요.”최지용이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쌍둥이라고 해도 신체의 세포가 다를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네요.”한 명은 강인하고 선량했고 다른 한 명은 어리석고 악랄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자매라도 서로 다른 개성과 운명을 가질 수밖에 없다. 누구도 타인의 성격과 운명을 그대로 복제할 수는 없는 법이다.“그러게 말이야.”권욱은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다른 쌍둥이였다는 걸 알게 됐으니 이제 모든 진실을 밝힐 때가 된 것 같네.”...축하 연회 날, 손님들로 붐비는 연회장은 떠들썩하고 활기가 넘쳤다. 오성에서 유명한 대가문은 물론, 연예계의 반 이상이 모인 듯했다.정섭 엔터테인먼트는 업계에서 명성이 자자했기에 대상 수상 경력이 있는 배우들조차 강소아의 초대를 거절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연회장에 들어선 백시연은 평소 TV에서만 보던 유명 여배우들이 서로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광경에 기가 죽고 말았다.백시연은
차 안에서 백인서는 멍하니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함께 앉아 있던 두 남자는 서로를 힐끔거리기만 할 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조금 전 나눈 대화로 머릿속이 복잡해진 백인서는 갑작스레 쏟아진 진실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이 권씨 가문의 사생아라니.“네 어머니와 우리 아버지가 꽤 가까운 사이였던 모양이야.”“두 사람 사이에 주고받은 물건이 있었어. 바로 회중시계인데, 그걸 백시연이 가지고 온 거지.”“인서야, 너와 백시연이 쌍둥이 자매란 거 알고 있었어?”백인서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머리가 깨질 듯 욱신거렸다.어머니가 이렇게 많은 진실을 감추고 있었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인서야?”최지용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백인서의 손을 잡았다.그러자 앞좌석에 있던 권욱이 뒤를 돌아보며 싸늘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쏘아보았다.“놔라!”“뭐요?”권욱은 입을 삐죽이며 최지용이 꼭 잡은 백인서의 손을 가리켰다.참 이상했다. 평소에는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매형이 된 순간부터 그가 갑자기 거슬리기 시작했다.“인서는 좀 쉬어야 해!”권욱은 찡그리며 말했다.“손은 왜 자꾸 붙잡고 있는 거야?”최지용은 순간 멍해서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권욱을 쳐다보았다.“무슨 상관이에요?”“난 인서 오빠야! 당연히 내가 상관해야 할 일이지.”“웃기지 좀 마세요!”“너...”“그만 좀 싸울래요?”백인서가 뒤돌아 두 사람을 힐끔 쳐다봤다.머릿속이 이미 복잡할 대로 복잡한데 이 두 사람은 백인서를 편히 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최지용과 권욱은 서로를 노려보며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눈싸움을 벌였다.“온유는 아직 병원에 있어요?”백인서가 갑자기 물었다.“응...”“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요!”“뭐라고?”권욱은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백인서는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진짜 동생이라면 온유 고모가 되는 거잖아요. 아직 적합한 골수를 찾지 못했다면서요? 제가 한번 해볼게요!”권욱은 잠시
종수는 잠시 망설이더니 천천히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백인서에게 내밀었다.“통화해.”종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최 도련님의 번호는 분명 잘 기억하고 있겠지만, 굳이 조언을 하나 하자면... 먼저 육씨 가문의 아가씨에게 연락하는 게 좋을 거야.”백인서는 종수를 노려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왜냐하면 백인서도 강소아에게 먼저 연락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강소아는 위치 추적 장비를 가지고 있었기에 전화를 걸면 곧바로 이곳이 추적될 터였다.그렇게 되면 종수와 백시연은 피해 갈 수 없을 터였다.“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 않아?”종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어젯밤, 소아 아가씨가 시연이와 통화했는데 평소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던 아가씨가 시연이와 한참 동안 통화를 하더군. 내가 생각하기론 위치를 추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가장 컸어.”백인서의 표정이 점점 풀렸다.백인서는 천천히 손을 옮기고 종수가 움직이기 전에 재빨리 몸을 돌려 문 쪽으로 달려갔다. 종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듯했다.종수는 그저 가만히 백인서를 바라볼 뿐, 뒤쫓으려는 기색은 없었다. 그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백시연을 용서할 거란 기대는 하지 마세요.”백인서는 차갑게 말했다.“아저씨를 용서할 생각도 없어요! 저는 누구를 먼저 해치지 않아요. 그런데 당신들이 먼저 나타나 저를 해치려 들고선 이제 와서 자매애를 말하다니, 우습지도 않나요?”백인서는 말을 마치고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종수는 백인서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종수의 마음은 더욱 복잡했다.백인서는 저택을 벗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좁은 길을 따라 걸었다. 한참을 걸은 끝에 조용한 길 한가운데에 다다랐다. 지친 몸을 이끌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화려한 시내는 여전히 멀어 보였다.오성은 너무 넓었고 모든 곳을 다 가본 게 아니었기에 대략적인 방향만 추정할 수 있을 뿐, 휴대전화도 없어서 난감하기만 했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내던 순간, 고요한 길
종수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의 눈빛에는 깊은 씁쓸함이 서려 있었다.종수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백인서는 문밖 풍경을 바라보았다.때마침 오전의 화창한 햇살이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살랑거리고 작은 새들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모습은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다.백인서는 무의식적으로 깊은숨을 들이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종수를 바라보았다.“어서 가.”종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인서야, 내가 한 가지 부탁해도 될까?”“뭔데요?”“네 남자 친구에게 시연에 대한 얘기는 하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그렇게 해줄 수 있을까?”백인서는 미간을 찌푸렸다.종수는 한 걸음 다가서며 간절한 눈빛으로 백인서를 바라보았다.“시연이는 내가 키운 아이야. 내겐 딸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약속할게, 시연이를 데리고 이곳 오성을 떠나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결국, 저보고 용서하라는 말이군요?”“인서야, 그 아이는 네 쌍둥이 동생이야. 네가...”종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인서는 빠르게 식탁 위의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부분을 종수의 목에 단숨에 들이댔다.종수는 깜짝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급히 손을 뻗어 백인서의 손목을 잡으려 했지만 이미 목 깊숙이 차가운 위협이 스며든 후였다.백인서가 누르고 있는 곳은 동맥이 위치한 곳이었다.“백인서, 너...”“아저씨.”백인서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제가 조금만 힘을 주면, 아저씨는 여기서 생을 마감할 수도 있어요. 방금 확인했는데, 이 저택은 넓지만, 따로 감시카메라는 없더군요. 제가 아저씨를 죽이고 떠나도 아무도 알지 못할 거란 얘기예요.”종수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경찰이 너를 추적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흥!”백인서는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전 역추적 능력에는 꽤 자신 있거든요.”“백인서!”“아저씨, 전 사람을 해치고 싶진 않았어. 그런데 당신들은 왜 저를 놓아주지 않는 걸까요?”“전부 시연이 잘못이야!”
백인서는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천천히 시선을 문 쪽으로 옮겼다.종수가 방에 들어올 때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았다.신의 실력을 지나치게 믿었거나, 아니면 백인서를 단순히 어린 애로 여겨 경계를 늦췄던 게 분명했다.“어서 먹어라.”종수는 백인서를 쳐다보며 말했다.“다 먹고 나서 끝내줄게.”“네, 알겠어요.”“무섭지 않아?”“왜 제가 무서워해야 하죠?”백인서는 미소를 띠며 조용히 말했다.“겁을 내야 할 사람은... 아저씨 아닌가요.”종수는 백인서의 맑고 반짝이는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 눈빛의 날카로움은 마치 칼날처럼 심장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종수는 다시금 백홍을 떠올렸다. 한평생 은혜를 갚겠다고 맹세했는데 지금 은인의 딸을 죽이려 하고 있으니...백인서의 말이 맞았다. 겁을 내야 할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종수는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젯밤 백시연의 말에 화가 나 잠 한숨도 자지 못하다 보니 머릿속이 멍한 상태였다. 갑작스레 숨이 가빠오며 가슴이 터질 듯한 답답함이 몰려왔다. 무심코 주머니를 더듬었고 그 순간 전에 앓던 천식이 다시 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하지만 약을 가져오지 않았다.종수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물 밖으로 끌려 나온 물고기처럼 필사적으로 공기를 삼켰다.“어서... 어서...”종수는 떨리는 손으로 백인서를 가리키며 도움을 청했다.백인서는 순간적으로 멈칫하며 종수를 주시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다. 처음엔 거짓 연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인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식판을 발로 차 뒤집었다. 종수는 바닥에 쓰러져 온몸을 고통스럽게 비틀었다.백인서는 종수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어서 닫히지 않은 문을 바라보았다.지금이 탈출할 최고의 기회였다!“약...”종수는 애써 말을 이었다.“내 약이...”“배... 백인서... 부탁이야...”백인서는 이를 악물었다.“제발... 백인서, 날 좀 살려줘!”백인서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침착하게 문 쪽으로 달려가 주위를 살
종수는 무거운 표정으로 백시연을 바라보다가 TV를 켰다. 화면에는 비밀방에 갇힌 백인서의 모습이 감시 카메라에 담겨 나타났다.백인서는 어두운 방의 구석에 무릎을 감싸안고 웅크려 앉아 있었다.백인서는 머릿속으로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여기에 갇힌 지 3일째라는 결론을 내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어둡고 답답한 공간 속에서 하루하루가 1년처럼 길게 느껴졌다.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탈출할 수 있는 틈은 없었다. 혼자 힘으로는 밖을 지키고 있는 사람과 정면으로 맞설 수 없었다.백인서는 기회를 기다려야 했다.며칠 동안 종수는 정해진 시간에 맞춰 식사를 가져다주었다. 맛은 없었지만 백인서는 남김없이 깔끔하게 먹어 치웠다. 백인서는 알고 있었다. 극한의 상황일수록 절망하지 말고 조용히 몸을 숨기며 힘을 비축해야 한다는 것을. 모든 것은 탈출을 위한 준비였다.종수는 화면을 멈추더니 백시연을 향해 돌아섰다.“너... 정말 백인서를 없앨 생각이야?”“왜 이렇게 말이 많으세요!”백시연은 짜증을 내며 종수를 흘겨보았다.“너의 친자매이기 전에.”종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백인서는 절대 간단한 상대가 아니다. 쉽게 없앨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뭐라고요?”“방금 너도 봤잖아. 저런 상황에서도 잘 먹고 잘 쉬는 모습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말 모르겠니? 지금 에너지를 비축하면서 우리를 상대할 방법을 찾고 있다고!”“그러니까 더더욱 없애야죠!”백시연은 소리를 질렀다.“아저씨, 설마 백인서한테 마음 약해진 거 아니죠?”종수는 머리속이 하얘진 채 멍하니 백인서를 바라보았다.“어쨌든, 전 백인서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요!”백시연은 종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저의 엄마한테 약속했잖아요. 저를 잘 돌봐주기로. 어릴 때 저와도 약속했잖아요, 제 말이면 뭐든 다 들어두겠다고.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거예요?”“시연아...”“그만해요!”백시연은 목청을 높이며 말했다.“아저씨는 우리 엄마가 데려온 떠돌이 개일 뿐이에요. 저를 훈계할 자격
최지용은 충격에 휩싸여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그러니까...”최지용이 권욱을 바라보며 말했다.“이틀 동안 나와 함께 있던 사람이 정말 인서가 아니었단 거네요!”“그게 무슨 말이에요?”권욱도 어리둥절했다.“그 사람은 인서가 아니에요!”최지용은 흥분하며 외쳤다.“인서는 분명 지금 그 여자한테 잡혀 있을 거예요. 그 여자가 인서를 해치려 들 거예요.”“도련님, 진정 좀 하시죠. 지금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 갑니다!”최지용은 더는 말을 잇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총을 꺼내 든 채 밖으로 나가려 했다.표아정이 침착하게 최지용의 앞을 가로막았다.“지금 필요한 건 대책을 세우는 거야!”표아정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처럼 감정에 휘둘려선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어!”권욱은 머리를 긁적이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표아정은 권욱을 향해 물었다.“권 대표, 백시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백시연은 제 아버지의 사생아입니다.”지금은 이 부끄러운 가정사를 숨길 때가 아닌 것 같아 모든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하지만 수년간 찾지 않았어요. 사실 찾을 의지도 없었죠. 제 딸이 병에 걸려 골수 이식수술이 필요하기 전까지는요. 집안의 모든 친척이 골수 검사를 했지만, 적합한 사람이 없었어요... 그제야 동생을 찾게 된 겁니다.”표아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 동생은 어디서 찾았지?”“찾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남긴 단서를 따라 사람을 보내 남양에서 데려왔어요.”권욱은 낮은 목소리로 이어갔다.“하지만 돌아온 백시연은 처음부터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어요. 얼굴이 망가졌다면서 가면을 쓴 채 진짜 얼굴을 드러내길 거부했어요. 다만 몸에 지니고 있던 물건은 확실히 저의 아버지의 것이었죠.”“그다음은?”“백시연의 행동이 너무 이상해서 저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어머니는 누구야?”권욱은 단호하게 말했다.“백홍입니다.”최지용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표아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금세 실마리를 잡은 듯 말했다.
“결과가 바로 나오진 않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권욱은 마른 입술을 핥으며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넥타이를 풀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권욱은 마음 깊은 곳에서 답답함이 밀려오며 짜증이 치솟았다.권욱은 문득 검사실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술대 위에는 마취가 아직 풀리지 않아 의식이 없는 채로 누워 있는 백시연이 있었다.권욱은 갑작스레 백시연에 대한 궁금증이 피어올랐다.진짜 여동생이라면 적어도 동생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도는 봐야 하지 않을까? 혹여 얼굴에 상처가 있다면 어디가 어떻게 손상되었는지 알아야 적합한 의사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결심한 듯 권욱은 발걸음을 재촉해 수술대 앞으로 다가갔다. 권욱은 손을 들어 올리고 잠깐 주저하다가 곧 거칠게 백시연의 얼굴을 덮은 가면을 벗겨냈다.가면이 벗겨지자, 권욱의 눈동자에는 마치 폭발하는 화산처럼 충격과 경악이 번져갔다.“백... 백인서잖아?”...최지용은 초조한 기색으로 거실을 서성거리며 누군가를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표아정이 아끼는 두 명의 부하, 우일과 우민 남매가 돌아왔다. 두 사람은 전문 훈련을 받은 인물로, 뛰어난 손재주와 상황 판단력 덕분에 표아정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상황은 어땠어?”표아정이 급히 물었다.우일과 우민은 보고하기 시작했다.“계속 백 아가씨의 뒤를 밟았는데 아가씨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통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병원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에서 가면을 꺼내 쓰는 걸 보았습니다.”“가면?”최지용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네, 가면이 확실했습니다.”우민이 설명했다.“그 가면은 꽤 독특해 보였는데 금으로 만들어진 데다 보석이 박혀 있어서 꽤 값비싸 보였습니다.”최지용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인서는 가면을 가지고 있지 않아. 그런 걸 쓴 적도 없고...”“또 뭘 봤는데?”“누군가 천으로 아가씨의 입을 막은 채 강제로 끌고 갔습니다. 병원 주위를 살펴본 결과, 그들은 권욱의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