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갑자기 따뜻한 물줄기가 흘러나와 마치 실수로 소변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아!”강소아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엄마! 엄마!”강서연과 임우정이 급히 돌아서 강소아에게로 달려갔다.“무슨 일이야?”강소아는 아래를 가리켰다.임우정이 이불을 들어 확인해 보니 강소아 아래에 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양수가 터졌어!”임우정은 간호사 호출 버튼을 눌렀다.의사와 간호사들이 재빨리 달려와 확인한 뒤, 강소아를 분만실로 옮겼다.그 후의 시간은 최군형에게 불길 위에서 타들어 가는 것 같은 고통의 연속이었다.몇 번이나 분만실 문에 귀를 대고 안을 살피려 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방음이 잘 되어 있어 안에서 나는 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다.하지만 최군형은 알고 있었다. 강소아가 지금 분명히 많이 아플 거라는 것을.최군형은 의자에 앉아 두 손을 꼭 쥐고 눈가가 붉어졌다.차라리 자신이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걱정하지 마.”강서연이 조용히 최군형을 다독이며 말했다.“요즘은 무통 주사도 있으니 걱정할 거 없어. 내가 의사에게 부탁해서 준비해 두었어. 그리고 안에 있는 산부인과 의사들도 다 네 고모 친구들이야. 아주 경험이 많은 분들이니까 소유도 아기와 함께 무사할 거야.”“하지만 벌써 이렇게 오랫동안 안에서...”최군형은 초조하게 머리를 긁적였다.강서연이 웃으며 말했다.“첫 아이는 보통 시간이 걸리잖아. 나중에 아이를 더 낳게 되면, 지금보다 더 빨리 나오게 될 거야!”그 말이 끝나자마자 분만실의 자동문이 열렸다.최군형은 순식간에 앞으로 달려갔다.“제 아내는 괜찮나요?”옆에 있던 간호사들이 순간 놀라며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보통 분만실 앞에서 남자들이 가장 먼저 묻는 건 아기인데 이렇게 아내부터 묻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의사는 미소를 띠며 최군형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걱정하지 마세요. 모든 게 잘 됐습니다. 사모님께서 예쁜 딸을 낳으셨어요. 산모와 아이 모두 건강합니다!”...강소아는 병상에 누워
최군형은 잠시 멍해졌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사실 어젯밤, 백인서는 이미 돌아와 있었다. 분만실 앞에서 조용히 기다리다가 강소아와 아기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말없이 떠나갔다.강소아는 방금 아이를 낳았고 상처도 아직 아물지 않았다. 의사는 이 시기에 감정적으로 격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며 회복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경고했다.그래서 최군형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백인서도 너를 많이 생각하고 있어.”“정말로 나를 생각하고 있다면, 왜 답장 한 통도 없을까?”강소아는 약간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지용이가 말했잖아, 산골에서는 신호가 잘 안 잡혀서 답장을 보냈어도 네가 받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그렇구나.”강소아는 고개를 숙였다.갓 출산한 강소아는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다. 지금은 그저 푹 자고 싶을 뿐이었다.최군형은 강소아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부드럽게 말했다.“편히 자, 내가 나와 아기를 지키고 있을게.”강소아는 안심하고 눈을 감았다.얼마나 잤을까 강소아는 갑자기 어렴풋이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고 눈을 뜨고 싶지 않았지만,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 엄마가 된 자신에게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바로 자기 아이가 우는 것일 터였다!강소아는 재빨리 눈을 뜨고 아기 침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군형 씨, 아기 배고픈 거 아니에요?”“맞아요.”갑자기 부드럽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소아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그러나 눈을 들어보니 그 단아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강소아는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언니, 아기가 배고파하고 있어요.”백인서는 미소를 지으며 아기 침대를 밀면서 다가갔다.“아직도 아기에게 젖을 안 먹일 거예요?”“인서야...”“언니, 아기가 울고 있잖아요!”강소아는 순간 가슴이 벅차오르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강소아는 얼른 눈물을 닦아냈다. 그때 간호사가 들어와서 준비해 둔 분유를 가져와
백인서는 침대 옆에 앉아 강소아의 손을 잡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왜 남자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 걸까요? 왜 언니만 이렇게 고생해야 하죠.”“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강소아는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상처가 벌어질까 봐 참았다.“내 말 틀렸어요? 왜 모든 고통은 여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건데요.”백인서는 산골에서 교사로 일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가난한 소녀들의 모습에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언니, 내가 몇 달 동안 산속에서 지내면서 여자아이들을 보니까...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그래.”강소아가 조용히 말했다.“나한테 이야기해 줘.”“제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어서 그곳에서 아이들에게 체육을 가르쳤어요.”백인서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그런데 체육 수업을 하는데 여자아이들은 여전히 많은 제약을 받고 있더라고요.”“그곳 사람들은 생각이 보수적이라 여자아이는 공부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 아이들은 제대로 된 운동화조차 없이 형제들이 쓰던 낡은 신발을 신고 있었어요. 어떤 건 너무 작고 어떤 건 너무 커서 제대로 수업을 들을 수가 없었어요.”“심지어 어떤 여자아이들은 어릴 때 이미 결혼 상대가 정해져 있어서, 시집가면 받은 돈을 집안 남자아이들 결혼 자금으로 쓰기도 해요...”“게다가 그곳은 의료와 위생 상태도 열악해요. 어떤 여자아이가 생리를 했는데도 생리대를 구하지 못해서 옷을 더럽히면 집에 돌아가서 혼나기까지 해요. 그럴 때마다 그 사람들한테 정말 혼내주고 싶었어요!”강소아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강소아는 백인서가 말수는 적지만 정의감이 넘치는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감정이 깊은 사람이라는 것도.백인서는 어린 시절 많은 어려움을 겪었기에 다른 사람의 고통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백인서는 어렸을 때 맞고 혼났던 기억이 있어서 특히 여자아이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을 아주 미워했다.강소아는 마음이 짠해져서 백인서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그래도 다행인 건,”
“음... 아버지.”최군형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엄마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에요...”“뭐?”최군형은 진지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아버지, 아기와 너무 가까이에서 숨을 내쉬면 안 돼요. 아직 이렇게 어린데, 아버지께서 내뱉는 건 전부 이산화탄소잖아요. 아기는 신선한 산소가 필요해요. 그러니까...”“이 배은망덕한 자식!”최연준은 예전에 어머니께 들었던 말을 그대로 아들에게 돌려주었다.그날 이후로 최연준은 숨을 참는 기술을 완벽히 익혔다. 말랑 콩떡처럼 사랑스러운 손주를 볼 때마다 그는 숨 한 번 안 쉬고도 밝게 웃을 수 있게 되었다.가장 신기한 것은 손녀를 안고 잘 때였다. 아기가 잠들 때까지 숨을 참은 다음, 살며시 아기를 침대에 내려놓고 나서야 길게 숨을 내쉬었다.놀란 최군성은 멍하니 바라보다가 조용히 최군형에게 속삭였다.“이 정도면 숨도 안 쉬고 고대 무덤에 들어가도 될 것 같은데?”최군형이 웃음이 터지기 직전, 최연준의 날카로운 눈빛이 두 형제를 훑었다.작은 공주님이 잠들면 그 누구도 소리를 낼 수 없었다.집안의 고양이조차 그 침묵의 규칙을 따랐다.최군성은 발끝을 들고 조심스럽게 살금살금 방을 빠져나갔다.아직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바로 작은 공주님에게 어울리는 이름을 짓는 것이었다.최군형은 여러 이름을 고르고 골랐지만, 여전히 마음에 드는 이름을 찾지 못했다. 강소아도 여러 이름을 생각했지만 다소 온화하기만 하고 강인한 느낌이 부족하다고 느꼈다.강소아는 딸이 강서연이나 김자옥처럼 당차고 강하게 성장하기를 바랐다.이때, 육경섭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아니, 뭐가 고민이야? 우리 외손녀 이름은 내가 벌써 다 생각해 놓았어!”“뭔데요?”“소일이!”강소아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강소아가 아무 반응도 없자 육경섭은 딸이 내심 동의한 줄 알고 옆에 있는 임우정의 살벌한 눈빛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신이 나서 계속 말을 이어갔다.“넌 소유, 네 딸은 소일이! 얼마나 좋아! 나중에 더 낳게 되면 소
“음.”강소아는 최군형을 살짝 밀치며 말했다.“알겠어요.”“정말 많이 사랑해.”강소아는 더욱 활짝 웃으며 말했다.“알겠어요!”“여보, 나 있잖아...”최군형은 더 달콤한 말을 하려고 하던 그때 백인서가 마침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언니!”최군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강소아는 미소를 지으며 백인서한테 들어오라고 했고 백인서 뒤에서 몇 명이 함께 들어왔다.“권 대표님?”권욱은 고개를 끄덕였고 조순영도 활기차게 인사했다.권온유는 깡충깡충 뛰며 강소아의 침대 주변을 돌며 말했다.“아기 동생은 어디 있어요?”“잠깐만 온유야!”권욱이 급히 제지했다.“괜찮아요.”강소아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권온유에게 설명했다.“아기 동생은 옆방 아기 침대에서 자고 있어. 조금 후에 깨면 그때 같이 놀자, 응?”권온유는 기뻐하며 작은 손을 마주치며 백인서 옆으로 달려가 말했다.“이모!”권욱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며 작게 조순영을 꾸짖었다.“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데려오지 말자고. 봐봐, 말썽만 피우잖아!”“그게 무슨 상관이에요.”최군형이 부드럽게 말했다.“아이들이 원래 그렇죠! 권 대표님, 저도 이제 딸이 있는 사람입니다. 누가 자기 딸을 안 좋게 대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요!”영리한 권온유는 아빠를 향해 장난스럽게 얼굴을 찡그리고는 조순영과 백인서 뒤로 숨었다.권욱은 쓴웃음을 지으며 결국 항복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권욱은 선물을 건네며 사직서도 함께 내밀었다.“이건...”최군형과 강소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에요. 두 분이 승인해 주셨으면 합니다.”강소아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사실 강소나는 권욱이 평생 육자 그룹에 머물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권씨 가문은 대단한 가문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성에서 이름 있는 집안이었다. 권욱이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게다가 권욱은 이 몇 년간 육자 그룹을 위해 많은 공을 세웠고 회사의 기초
백인서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그 미소에는 묘한 힘이 깃들어 있었고 권욱은 그 순간 말을 잃었다.권욱은 백인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백인서의 눈매와 얼굴선이 낯설지 않았다. 오래전, 권욱이 알고 있던 고인이 된 누군가와 닮아 있었다.백인서에게 느껴지는 감정이 점점 더 묘해졌다.“백인서.”권욱이 낮게 말했다.“나 사직했어.”“네.”백인서는 고개를 끄덕였다.“방 안에서 들었어요. 정말로 육자 그룹에서 더는 일할 생각이 없나요?”“이제는 내 일을 할 때가 온 것 같아.”“그래요.”백인서는 어깨를 으쓱했다.“넌... 내가 육자 그룹에 있든 없든 신경 쓰지 않는 것 같군.”“왜 내가 신경 써야 하죠?”백인서는 고개를 기울이며 권욱을 바라보았다.“권욱 씨가 우리 언니와만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어디서 일하든 상관없어요. 하지만 육씨 가문과 문제를 일으키면, 당신이 천하 어디에 있든 내가 반드시 잡아 올 거예요.”“...”사실 권욱은 백인서에게 권씨 가문에서 운영하는 회사에서 함께 일해 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고 싶었다. 권욱은 지금 확실히 사람 손이 필요했다. 외부에서 사람을 찾는 것보다 잘 아는 사람을 찾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렇게 보니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백인서는 절대 오지 않을 거기 때문이다.백인서에게는 아무도 강소아보다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권욱은 문득 궁금해졌다. 전에 백인서가 육씨 가문의 사생아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 논리라면 백인서가 육씨 가문을 지키고 강소아를 보호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그런데 이제 밝혀진 바로는, 육경섭에게는 사생아가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백인서가 이렇게 의리를 지키는 이유는 무엇일까?그리고 왜 우리 권씨 가문에는 이런 사람 하나 없는 걸까...“아빠, 봐요!”그때, 달콤한 목소리가 권욱의 귀에 들렸다.“아기 동생이 깬 것 같아요!”권욱은 깜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최가원은 작은 공주 침대에서 조그만 손을 뻗고 작은 발을 차며 흐느적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
백인서의 몸이 순간 굳어지고 정신이 혼미해졌다.최지용이 백인서에게 부모님을 만나고 결혼하자고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예전에도 여러 번 그런 말을 했지만 그때마다 백인서는 핑계를 대며 넘겼다. 하지만 이번에는 더 이상 무슨 핑계를 대야 할지 몰랐다.“인서야.”최지용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나랑 집에 가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거야?”백인서는 입술을 깨물고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이럴 때일수록 백인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최지용은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나랑 결혼하기 싫은 거야?”백인서도 당연히 결혼하고 싶었다.하지만 입 밖에 낼 수 없었다.가끔 백인서는 자신의 이런 성격이 정말 싫었다. 마음속에만 담아두고 세상과 소통하는 걸 일부러 거부하는 듯한 이 고집스러움 말이다.최지용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백인서의 허리에 두른 손을 천천히 내려놓았다.최지용은 등을 돌렸고 다시 뒤돌아보았을 때 백인서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백인서의 눈에는 잠시 두려움이 스쳤다. 그 신중한 표정은 최지용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최지용은 가슴이 저려와서 다시 다가가 백인서를 꽉 안았다.“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최지용은 백인서의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걱정하지 마, 내가 있으니까.”백인서의 눈가가 붉어졌고 작은 손으로 최지용의 넓은 등을 가만히 쓸어내렸다....최가원은 곧 돌잔치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작은 아이는 이제 갓 태어났을 때의 주름진 모습에서 많이 자라 이목구비가 훨씬 예뻐졌다.강서연과 최연준은 매일 손녀를 지키며 온갖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젖병을 힘차게 빠는 모습마저도 칭찬의 대상이 되었다.육경섭은 작은 침대 옆에 서서 외할아버지로서 자부심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가원이는 나를 닮았어! 옛말에 삼대는 외가 쪽을 닮는다더니 얘도 외할아버지를 쏙 빼닮았네!”최연준은 육경섭을 째려보며 더는 그와 논쟁할 가치도 없다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때 임우정이 육경섭의 귀를 잡아
백인서는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있었다. 얼굴에는 살며시 홍조가 스며들었다.작은 공주님은 이미 잠들었고 최연준과 강서연은 육경섭과 임우정을 다른 자리로 안내했다. 최군형은 기지개를 켜며 서재로 가서 일을 처리할 준비를 했다.최지용은 최군형의 어깨를 툭툭 치며 눈짓을 보냈다.“왜 그러는데?”“좀 부탁할 일이 있어.”최지용은 헤헤 웃으며 말했다.“가자, 네 서재에서 얘기하자고.”“그런데...”최군형은 백인서를 바라보았다.백인서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언니랑 잠시 얘기 좀 나눌게요.”“너희 둘... 뭔가 수상한데?”최군형은 한눈에 상황을 알아차렸다.“대머리 최씨, 네가 말하려는 거랑 백인서가 내 아내에게 말하려는 게 같은 거야?”“와서 얘기해!”최지용은 최군형을 서재로 억지로 끌고 갔다.백인서는 문을 두드렸고 강소아는 마침 깨어 있었다. 백인서가 온 것을 보고 강소아는 매우 기뻐했다.“언니, 움직이지 마세요!”백인서는 서둘러 강소아를 눕히며 말했다.“아직 상처가 덜 나았잖아요!”“벌써 다 나았어!”강소아는 웃으며 말했다.“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제 조금 움직여도 되지 않겠어?”“저도 칼에 맞아 봤잖아요.”백인서는 강소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저처럼 강한 사람도 한 달은 걸렸어요. 하물며 언니는...”“인서야, 이건 다르잖아.”“그래요, 다르죠.”백인서는 씁쓸하게 웃었다.“언니의 상처는 귀여운 아기를 낳았지만, 내 상처는...”백인서는 말끝을 흐렸다. 피비린내 나는 그 이야기를 하다 보면 강소아가 겁을 먹을까 봐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언니.”백인서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제가 언니를 찾아온 이유는 상의할 게 있어서예요.”“무슨 일이야?”“지용 씨가......”백인서는 고개를 숙이며 손으로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지용 씨의 부모님을 만나러 가자고 해요.”강소아의 눈이 반짝였고 진심으로 기뻐했다.“그거 정말 좋은 소식이네! 지용 씨는 책임감 있는 남자잖아. 결혼하면 널 잘 챙겨줄 거야.
“뭐라고요? 10억 원이요?”백시연은 깜짝 놀라서 외쳤다.강소아는 슬쩍 백시연을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왜 그래? 고작 10억 가지고. 게다가 가원이에게 큰 선물을 주겠다고 네가 먼저 약속한 거잖아. 혹시 후회라도 하는 거야?”“그럴 리가!”배윤아가 옆으로 걸어오며 백시연의 어깨를 힘차게 두드렸다.“우리 인서는 분명히 선물을 줄 거야, 그렇지? 너희 둘 사이에 보석 하나쯤은 아무것도 아니잖아.”백시연의 얼굴이 단단히 굳어졌고 입술이 굳게 닫혔다.10억? 조순영에게서 받은 카드에는 고작 10억 원뿐이었다.백인서가 이때까지 이렇게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이 정도 돈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걸까?그래서 강소아가 그렇게 말한 것일까?“어머, 저 사람은 육 아가씨와 친하다던 백인서 아니야?”그때, 근처에 있던 여배우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방금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었어?”“예전에... 둘이 약속했나 봐, 백인서가 육 아가씨의 딸에게 선물을 주기로.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바뀐 것 같아!”“정말? 풉! 상류층 자매라는 것도 결국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봐! 백인서는 육 아가씨와 둘도 없는 사이처럼 보였는데. 육 아가씨가 어디를 가든 따라다녔잖아... 이제는 최씨 가문의 아들과 친해지니까, 가식적인 행동도 하기 싫어졌나 봐.”“그 선물이 10억 원짜리라고 하던데... 역시 두 사람 우정은 10억 원도 안 되는 거였어!”백시연의 얼굴은 점점 더 붉게 물들어갔다. 뒤돌아 그들에게 따지려던 찰나, 강소아가 재빠르게 백시연의 손목을 붙잡았다.“됐어, 인서야.”강소아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저 사람들은 평소에도 입만 살았어. 나중에 제대로 혼내 줄 거야.”“그래야죠, 저 사람들은 정섭 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예인이잖아요. 제대로 가르쳐야 해요!”백시연은 화를 내며 말했다.“소아 언니, 저 사람들이 이런 자리에 나온 건 정섭 엔터테인먼트를 대표해서이기도 하지만 결국 언니를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저렇게 뒤에서
권욱과 조순영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벅찬 기쁨에 눈물이 터져 나왔고 이내 서로를 끌어안은 채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권 대표님, 사모님, 정말 큰 경사입니다!”의사는 골수 검사 결과를 들고 환히 웃으며 말했다.“드디어 아가씨를 살릴 수 있게 됐습니다!”“맞아요, 정말 기쁜 일이네요.”최지용이 권욱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한심하긴, 그만 울어요!”권욱은 흐느끼면서도 반박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네 딸이 아픈 게 아니니, 넌 당연히... 당연히 이 고통을 알 리가 없지!”최지용은 기가 차 웃으며 권욱의 등을 두 번 세게 두드렸다.백인서는 마음 한편의 큰 짐을 덜어낸 듯 병실 안에 있는 권온유를 바라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그나저나.”조순영이 문득 입을 열었다.“백시연의 골수 결과는 어떻게 됐나요?”“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나왔습니다.”의사가 고개를 저었다.“대부분의 지표는 일치했지만 몇 가지 중요한 항목이 맞지 않아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정말 신기한 인연이네요.”최지용이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쌍둥이라고 해도 신체의 세포가 다를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네요.”한 명은 강인하고 선량했고 다른 한 명은 어리석고 악랄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자매라도 서로 다른 개성과 운명을 가질 수밖에 없다. 누구도 타인의 성격과 운명을 그대로 복제할 수는 없는 법이다.“그러게 말이야.”권욱은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다른 쌍둥이였다는 걸 알게 됐으니 이제 모든 진실을 밝힐 때가 된 것 같네.”...축하 연회 날, 손님들로 붐비는 연회장은 떠들썩하고 활기가 넘쳤다. 오성에서 유명한 대가문은 물론, 연예계의 반 이상이 모인 듯했다.정섭 엔터테인먼트는 업계에서 명성이 자자했기에 대상 수상 경력이 있는 배우들조차 강소아의 초대를 거절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연회장에 들어선 백시연은 평소 TV에서만 보던 유명 여배우들이 서로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광경에 기가 죽고 말았다.백시연은
차 안에서 백인서는 멍하니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함께 앉아 있던 두 남자는 서로를 힐끔거리기만 할 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조금 전 나눈 대화로 머릿속이 복잡해진 백인서는 갑작스레 쏟아진 진실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이 권씨 가문의 사생아라니.“네 어머니와 우리 아버지가 꽤 가까운 사이였던 모양이야.”“두 사람 사이에 주고받은 물건이 있었어. 바로 회중시계인데, 그걸 백시연이 가지고 온 거지.”“인서야, 너와 백시연이 쌍둥이 자매란 거 알고 있었어?”백인서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머리가 깨질 듯 욱신거렸다.어머니가 이렇게 많은 진실을 감추고 있었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인서야?”최지용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백인서의 손을 잡았다.그러자 앞좌석에 있던 권욱이 뒤를 돌아보며 싸늘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쏘아보았다.“놔라!”“뭐요?”권욱은 입을 삐죽이며 최지용이 꼭 잡은 백인서의 손을 가리켰다.참 이상했다. 평소에는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매형이 된 순간부터 그가 갑자기 거슬리기 시작했다.“인서는 좀 쉬어야 해!”권욱은 찡그리며 말했다.“손은 왜 자꾸 붙잡고 있는 거야?”최지용은 순간 멍해서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권욱을 쳐다보았다.“무슨 상관이에요?”“난 인서 오빠야! 당연히 내가 상관해야 할 일이지.”“웃기지 좀 마세요!”“너...”“그만 좀 싸울래요?”백인서가 뒤돌아 두 사람을 힐끔 쳐다봤다.머릿속이 이미 복잡할 대로 복잡한데 이 두 사람은 백인서를 편히 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최지용과 권욱은 서로를 노려보며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눈싸움을 벌였다.“온유는 아직 병원에 있어요?”백인서가 갑자기 물었다.“응...”“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요!”“뭐라고?”권욱은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백인서는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진짜 동생이라면 온유 고모가 되는 거잖아요. 아직 적합한 골수를 찾지 못했다면서요? 제가 한번 해볼게요!”권욱은 잠시
종수는 잠시 망설이더니 천천히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백인서에게 내밀었다.“통화해.”종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최 도련님의 번호는 분명 잘 기억하고 있겠지만, 굳이 조언을 하나 하자면... 먼저 육씨 가문의 아가씨에게 연락하는 게 좋을 거야.”백인서는 종수를 노려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왜냐하면 백인서도 강소아에게 먼저 연락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강소아는 위치 추적 장비를 가지고 있었기에 전화를 걸면 곧바로 이곳이 추적될 터였다.그렇게 되면 종수와 백시연은 피해 갈 수 없을 터였다.“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 않아?”종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어젯밤, 소아 아가씨가 시연이와 통화했는데 평소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던 아가씨가 시연이와 한참 동안 통화를 하더군. 내가 생각하기론 위치를 추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가장 컸어.”백인서의 표정이 점점 풀렸다.백인서는 천천히 손을 옮기고 종수가 움직이기 전에 재빨리 몸을 돌려 문 쪽으로 달려갔다. 종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듯했다.종수는 그저 가만히 백인서를 바라볼 뿐, 뒤쫓으려는 기색은 없었다. 그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백시연을 용서할 거란 기대는 하지 마세요.”백인서는 차갑게 말했다.“아저씨를 용서할 생각도 없어요! 저는 누구를 먼저 해치지 않아요. 그런데 당신들이 먼저 나타나 저를 해치려 들고선 이제 와서 자매애를 말하다니, 우습지도 않나요?”백인서는 말을 마치고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종수는 백인서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종수의 마음은 더욱 복잡했다.백인서는 저택을 벗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좁은 길을 따라 걸었다. 한참을 걸은 끝에 조용한 길 한가운데에 다다랐다. 지친 몸을 이끌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화려한 시내는 여전히 멀어 보였다.오성은 너무 넓었고 모든 곳을 다 가본 게 아니었기에 대략적인 방향만 추정할 수 있을 뿐, 휴대전화도 없어서 난감하기만 했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내던 순간, 고요한 길
종수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의 눈빛에는 깊은 씁쓸함이 서려 있었다.종수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백인서는 문밖 풍경을 바라보았다.때마침 오전의 화창한 햇살이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살랑거리고 작은 새들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모습은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다.백인서는 무의식적으로 깊은숨을 들이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종수를 바라보았다.“어서 가.”종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인서야, 내가 한 가지 부탁해도 될까?”“뭔데요?”“네 남자 친구에게 시연에 대한 얘기는 하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그렇게 해줄 수 있을까?”백인서는 미간을 찌푸렸다.종수는 한 걸음 다가서며 간절한 눈빛으로 백인서를 바라보았다.“시연이는 내가 키운 아이야. 내겐 딸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약속할게, 시연이를 데리고 이곳 오성을 떠나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결국, 저보고 용서하라는 말이군요?”“인서야, 그 아이는 네 쌍둥이 동생이야. 네가...”종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인서는 빠르게 식탁 위의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부분을 종수의 목에 단숨에 들이댔다.종수는 깜짝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급히 손을 뻗어 백인서의 손목을 잡으려 했지만 이미 목 깊숙이 차가운 위협이 스며든 후였다.백인서가 누르고 있는 곳은 동맥이 위치한 곳이었다.“백인서, 너...”“아저씨.”백인서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제가 조금만 힘을 주면, 아저씨는 여기서 생을 마감할 수도 있어요. 방금 확인했는데, 이 저택은 넓지만, 따로 감시카메라는 없더군요. 제가 아저씨를 죽이고 떠나도 아무도 알지 못할 거란 얘기예요.”종수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경찰이 너를 추적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흥!”백인서는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전 역추적 능력에는 꽤 자신 있거든요.”“백인서!”“아저씨, 전 사람을 해치고 싶진 않았어. 그런데 당신들은 왜 저를 놓아주지 않는 걸까요?”“전부 시연이 잘못이야!”
백인서는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천천히 시선을 문 쪽으로 옮겼다.종수가 방에 들어올 때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았다.신의 실력을 지나치게 믿었거나, 아니면 백인서를 단순히 어린 애로 여겨 경계를 늦췄던 게 분명했다.“어서 먹어라.”종수는 백인서를 쳐다보며 말했다.“다 먹고 나서 끝내줄게.”“네, 알겠어요.”“무섭지 않아?”“왜 제가 무서워해야 하죠?”백인서는 미소를 띠며 조용히 말했다.“겁을 내야 할 사람은... 아저씨 아닌가요.”종수는 백인서의 맑고 반짝이는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 눈빛의 날카로움은 마치 칼날처럼 심장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종수는 다시금 백홍을 떠올렸다. 한평생 은혜를 갚겠다고 맹세했는데 지금 은인의 딸을 죽이려 하고 있으니...백인서의 말이 맞았다. 겁을 내야 할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종수는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젯밤 백시연의 말에 화가 나 잠 한숨도 자지 못하다 보니 머릿속이 멍한 상태였다. 갑작스레 숨이 가빠오며 가슴이 터질 듯한 답답함이 몰려왔다. 무심코 주머니를 더듬었고 그 순간 전에 앓던 천식이 다시 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하지만 약을 가져오지 않았다.종수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물 밖으로 끌려 나온 물고기처럼 필사적으로 공기를 삼켰다.“어서... 어서...”종수는 떨리는 손으로 백인서를 가리키며 도움을 청했다.백인서는 순간적으로 멈칫하며 종수를 주시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다. 처음엔 거짓 연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인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식판을 발로 차 뒤집었다. 종수는 바닥에 쓰러져 온몸을 고통스럽게 비틀었다.백인서는 종수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어서 닫히지 않은 문을 바라보았다.지금이 탈출할 최고의 기회였다!“약...”종수는 애써 말을 이었다.“내 약이...”“배... 백인서... 부탁이야...”백인서는 이를 악물었다.“제발... 백인서, 날 좀 살려줘!”백인서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침착하게 문 쪽으로 달려가 주위를 살
종수는 무거운 표정으로 백시연을 바라보다가 TV를 켰다. 화면에는 비밀방에 갇힌 백인서의 모습이 감시 카메라에 담겨 나타났다.백인서는 어두운 방의 구석에 무릎을 감싸안고 웅크려 앉아 있었다.백인서는 머릿속으로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여기에 갇힌 지 3일째라는 결론을 내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어둡고 답답한 공간 속에서 하루하루가 1년처럼 길게 느껴졌다.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탈출할 수 있는 틈은 없었다. 혼자 힘으로는 밖을 지키고 있는 사람과 정면으로 맞설 수 없었다.백인서는 기회를 기다려야 했다.며칠 동안 종수는 정해진 시간에 맞춰 식사를 가져다주었다. 맛은 없었지만 백인서는 남김없이 깔끔하게 먹어 치웠다. 백인서는 알고 있었다. 극한의 상황일수록 절망하지 말고 조용히 몸을 숨기며 힘을 비축해야 한다는 것을. 모든 것은 탈출을 위한 준비였다.종수는 화면을 멈추더니 백시연을 향해 돌아섰다.“너... 정말 백인서를 없앨 생각이야?”“왜 이렇게 말이 많으세요!”백시연은 짜증을 내며 종수를 흘겨보았다.“너의 친자매이기 전에.”종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백인서는 절대 간단한 상대가 아니다. 쉽게 없앨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뭐라고요?”“방금 너도 봤잖아. 저런 상황에서도 잘 먹고 잘 쉬는 모습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말 모르겠니? 지금 에너지를 비축하면서 우리를 상대할 방법을 찾고 있다고!”“그러니까 더더욱 없애야죠!”백시연은 소리를 질렀다.“아저씨, 설마 백인서한테 마음 약해진 거 아니죠?”종수는 머리속이 하얘진 채 멍하니 백인서를 바라보았다.“어쨌든, 전 백인서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요!”백시연은 종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저의 엄마한테 약속했잖아요. 저를 잘 돌봐주기로. 어릴 때 저와도 약속했잖아요, 제 말이면 뭐든 다 들어두겠다고.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거예요?”“시연아...”“그만해요!”백시연은 목청을 높이며 말했다.“아저씨는 우리 엄마가 데려온 떠돌이 개일 뿐이에요. 저를 훈계할 자격
최지용은 충격에 휩싸여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그러니까...”최지용이 권욱을 바라보며 말했다.“이틀 동안 나와 함께 있던 사람이 정말 인서가 아니었단 거네요!”“그게 무슨 말이에요?”권욱도 어리둥절했다.“그 사람은 인서가 아니에요!”최지용은 흥분하며 외쳤다.“인서는 분명 지금 그 여자한테 잡혀 있을 거예요. 그 여자가 인서를 해치려 들 거예요.”“도련님, 진정 좀 하시죠. 지금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 갑니다!”최지용은 더는 말을 잇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총을 꺼내 든 채 밖으로 나가려 했다.표아정이 침착하게 최지용의 앞을 가로막았다.“지금 필요한 건 대책을 세우는 거야!”표아정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처럼 감정에 휘둘려선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어!”권욱은 머리를 긁적이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표아정은 권욱을 향해 물었다.“권 대표, 백시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백시연은 제 아버지의 사생아입니다.”지금은 이 부끄러운 가정사를 숨길 때가 아닌 것 같아 모든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하지만 수년간 찾지 않았어요. 사실 찾을 의지도 없었죠. 제 딸이 병에 걸려 골수 이식수술이 필요하기 전까지는요. 집안의 모든 친척이 골수 검사를 했지만, 적합한 사람이 없었어요... 그제야 동생을 찾게 된 겁니다.”표아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 동생은 어디서 찾았지?”“찾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남긴 단서를 따라 사람을 보내 남양에서 데려왔어요.”권욱은 낮은 목소리로 이어갔다.“하지만 돌아온 백시연은 처음부터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어요. 얼굴이 망가졌다면서 가면을 쓴 채 진짜 얼굴을 드러내길 거부했어요. 다만 몸에 지니고 있던 물건은 확실히 저의 아버지의 것이었죠.”“그다음은?”“백시연의 행동이 너무 이상해서 저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어머니는 누구야?”권욱은 단호하게 말했다.“백홍입니다.”최지용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표아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금세 실마리를 잡은 듯 말했다.
“결과가 바로 나오진 않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권욱은 마른 입술을 핥으며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넥타이를 풀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권욱은 마음 깊은 곳에서 답답함이 밀려오며 짜증이 치솟았다.권욱은 문득 검사실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술대 위에는 마취가 아직 풀리지 않아 의식이 없는 채로 누워 있는 백시연이 있었다.권욱은 갑작스레 백시연에 대한 궁금증이 피어올랐다.진짜 여동생이라면 적어도 동생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도는 봐야 하지 않을까? 혹여 얼굴에 상처가 있다면 어디가 어떻게 손상되었는지 알아야 적합한 의사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결심한 듯 권욱은 발걸음을 재촉해 수술대 앞으로 다가갔다. 권욱은 손을 들어 올리고 잠깐 주저하다가 곧 거칠게 백시연의 얼굴을 덮은 가면을 벗겨냈다.가면이 벗겨지자, 권욱의 눈동자에는 마치 폭발하는 화산처럼 충격과 경악이 번져갔다.“백... 백인서잖아?”...최지용은 초조한 기색으로 거실을 서성거리며 누군가를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표아정이 아끼는 두 명의 부하, 우일과 우민 남매가 돌아왔다. 두 사람은 전문 훈련을 받은 인물로, 뛰어난 손재주와 상황 판단력 덕분에 표아정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상황은 어땠어?”표아정이 급히 물었다.우일과 우민은 보고하기 시작했다.“계속 백 아가씨의 뒤를 밟았는데 아가씨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통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병원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에서 가면을 꺼내 쓰는 걸 보았습니다.”“가면?”최지용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네, 가면이 확실했습니다.”우민이 설명했다.“그 가면은 꽤 독특해 보였는데 금으로 만들어진 데다 보석이 박혀 있어서 꽤 값비싸 보였습니다.”최지용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인서는 가면을 가지고 있지 않아. 그런 걸 쓴 적도 없고...”“또 뭘 봤는데?”“누군가 천으로 아가씨의 입을 막은 채 강제로 끌고 갔습니다. 병원 주위를 살펴본 결과, 그들은 권욱의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