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군성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천천히 최군형의 뒤를 따라갔다.형제는 차를 타고 교외로 나섰다. 해는 이미 저물어 하늘은 짙은 푸른빛을 띠었고 붉게 물든 노을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최군형은 텐트를 설치한 뒤, 최군성을 불러 함께 저녁을 먹었다.교외는 고요했고 밤하늘엔 수많은 별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최군성은 잠시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형제 둘만이 남은 이 공간은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주었다.어릴 적, 두 형제는 남양에서 아무 걱정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고 종종 윤상 빌라의 개인 정원에서 "캠핑"을 하곤 했다.그때도 밤하늘은 별빛으로 가득했고 주위에는 반딧불이 어른거렸다.최군성의 마음은 조금씩 풀어졌고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군성아.”최군형이 낮은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지금 여기 우리밖에 없으니, 형이 너한테 솔직하게 묻고 싶어.”“응?”“너, 연우랑 계속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아?”최군성은 순간 멍해졌고 얼굴이 다시 어두워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형, 나...”최군형은 동생의 그런 모습을 보고 모든 걸 알아차렸다.“계속 갈 수 없다면, 여기서 그만둬. 이미 들인 시간이 아깝겠지만 계속 이 구멍을 메우기보다는 낫지 않겠어?”최군성도 그 이치를 이해하고 있었지만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형, 그게 소유였으면 이렇게 쉽게 말할 수 있었을까?”“그런 상황 자체가 없을 거야.”최군형은 최군성을 바라보며 말했다.“소유는 변하지 않았으니까.”최군성은 잠시 침묵했다.“난 아직도 연우를 처음 본 날이 생생해... 그때 육명진은 우리에게 소유라고 소개했지. 연우는 겁에 질린 얼굴로 다가와 차를 내주었고 그 목소리도 참 부드럽고 따뜻했어... 그런데, 왜 이렇게 변해버린 걸까?”최군형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고 잠시 후 조용히 말했다.“사람은 변하잖아.”“왜 하필 연우가 변한 거야?”최군성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형, 사실 난 연우가 조
최군성은 깜짝 놀랐다. 최군형은 미소를 지으며 동생을 데리고 위층으로 향했다.한 층에 두 세대만 있었고 그들이 갈 곳은 금수 작업실 맞은편이었다.“여긴...”최군형은 열쇠를 최군성에게 건넸다.“앞으로 당분간 여기서 지내.”“뭐라고?”“이곳은 육자 그룹에서 개발한 아파트라 품질은 확실히 보장되지!”“그걸 말하는 게 아니고 나는...”최군성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맞은편 문이 살짝 열렸다.배윤아가 붓을 손에 든 채로, 웃으며 모습을 드러냈다.최군성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 기쁨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 최군성은 배윤아의 작업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어수선한 상태였고 물감과 화판, 그림 용지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곳에 있던 아기 고양이들은 벌써 많이 자라 있었고 고양이들은 뚱한 표정으로 낯선 사람을 둥근 눈으로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최군성은 크게 웃었다. 그동안 이렇게 즐겁게 웃은 건 처음이었다.최군형은 이제 물러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짐을 동생에게 건네고 배윤아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앞으로는 군성이가 너 맞은편에 살게 될 테니, 잘 부탁한다!”아파트를 나서며 최군형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최군성을 배윤아에게 맡기는 것이 가장 좋은 결말일 것이다.하지만...최군형의 눈빛이 잠시 어두워졌다. 아직 처리되지 않은 일이 남아 있으니 완벽한 결말이라 할 수 없었다.그 생각이 스치자 최군형은 서둘러 육자 그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동혜림은 더 이상 회사에 머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판매부의 일부 고객 정보를 헐값에 팔아넘길 계획을 세웠다.어쨌든 수년간 영업을 해왔으니 동혜림에게는 우수한 고객 자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자료들은 비밀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하지만 지금 동혜림에게 중요한 건 돈이었고 무엇보다 육자 그룹에 대한 복수가 더 중요했다. 고객 자료를 유출하면 돈도 조금 벌 수 있고 육자 그룹의 평판을 망가뜨려 개인 정보 유출이라는 죄목을 안길 수 있을 터였다.동혜림은 휴일을 틈타
“아니에요...”동혜림은 몸을 떨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동혜림과 육연우는 같은 배에 탄 처지였다. 만약 동혜림이 고객 자료를 빼돌린 일이 알려지면 목격자인 육연우도 이 일에서 무사할 수 없을 것이다.이사회에 있는 영악한 늙은이들은 이 일을 빌미로 육연우를 공격할 것이고 그때가 되면 육연우는 해명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동혜림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차라리 육연우를 이 일에 끌어들이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럼, 돈을 벌어서 나누면 될 테니 말이다!“연우 아가씨.”동혜림은 마음을 다잡고 육연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말씀드리죠. 전 이제 육자 그룹에서 더 버틸 수가 없어요... 하지만 저는 억울합니다! 그래서 회사를 떠나더라도 육자 그룹이 이 업계에서 평판을 망가뜨리고 싶어요. 이 고객 자료를 팔 생각인데 조금이라도 돈을 벌 수 있으면 좋은 거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경쟁업체들이 육자 그룹이 고객 자료를 파는 회사라고 알게 될 거예요. 그럼 앞으로 육자 그룹이 좋은 파트너를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해질 겁니다?”육연우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건 불법이에요!”“연우 아가씨!”동혜림은 눈에 악독한 표정을 띠며 웃었다.“이 일, 우리가 입만 다물면 아무도 모를 거예요. 나중에 일이 터지면 사람들은 그냥 육자 그룹이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육연우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연우 아가씨, 저도 아가씨가 쉽지 않은 상황에 있는 걸 알아요.”동혜림은 설득하듯 부드럽게 말했다.“아가씨는 육 대표님의 사촌이시지만, 요즘 그 백인서이라는 여자가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잖아요. 마치 연우 아가씨를 대신하려는 것처럼요! 이걸 참을 수 있겠어요?”육연우의 주먹이 단단히 쥐어졌다.백인서의 이름이 나오자, 육연우의 화가 치밀어 올랐다.육연우의 마음에는 복수 이외에 다른 것은 들어설 여지가 없었다.사실, 육연우도 느끼고 있었다. 요즘 강소아가 백인서와 점점 가까워지고
육연우는 미소를 지으며 백인서의 자료를 조용히 제자리에 되돌려 놓았다.육연우는 고개를 돌려 동혜림에게 재촉했다.“다 끝났어요?”동혜림은 겁에 질린 채 억지로 용기를 내어 몇 가지 자료를 챙기고 컴퓨터에서 전자 파일을 찾아냈다. 두 사람은 모든 일을 서둘러 마치고 인사부를 빠르게 떠났다.육연우는 인사부 출입구의 사각지대를 잘 알고 있어, 의도적으로 CCTV를 피해 움직였다.그러나 두 사람은 몰랐다. 그 순간, 깊고 날카로운 눈동자가 화면을 응시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고 있다는 사실을.*3일 후, 육자 그룹 이사회가 평소와 다름없이 열렸다.평소 잘 출석하지 않던 육연우가 이번에는 특별히 이사회에 참석했다.최군형도 참석했다. 육연우가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최군형의 시선과 마주쳤다. 육연우는 속으로 당황했으나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 앉았다.사람들이 모두 모이자 최군형은 가볍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오늘 이사회의 주제는 육자 그룹의 미래 발전입니다. 각자 건설적인 의견이 있으시면 자유롭게 말씀해 주십시오. 최근 작은 대표님이 몸이 좋지 않으니, 저에게 말씀하셔도 똑같습니다.”이사회의 고참들은 상황을 빠르게 눈치채고, 먼저 최군형에게 아부성 발언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최상 그룹의 투자를 기대하는 발언을 했다.최군형은 그저 미소만 지으며 말없이 육연우를 바라보았다.다른 주주들이 모두 발언을 마치자, 육연우는 고개를 들고 미소를 지으며 차분히 말했다.“저는 현재 회사가 인사 문제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곳에 있을 자격조차 없으며, 오성에 남아 있을 자격도 없습니다.”최군형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최군성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육연우는 바로 사람을 시켜 주우남을 호출했다.모두가 의아해하는 가운데, 육연우는 주우남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주우남 씨는 판매부 팀장이니 부하 직원들의 인사 자료를 열람할 권한이 있죠, 그렇죠?”주우남은 잠시 당황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맞습니다.”“그럼 주우남
최군형은 옆에서 차분히 상황을 지켜보며 마치 자신과는 무관한 일인 듯 무심한 태도를 유지했다. 최군형의 차가운 무관심은 회의실에 있던 주주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주우남 씨.”육연우는 마음을 추스르고 냉소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인사부에 가서 자료를 가져오지 않으려는 건, 분명히 백인서의 인사 기록이 비어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그런 거죠, 맞죠?”주우남은 백인서를 힐끗 쳐다보며 경멸 섞인 미소를 지었다.“백인서 같은 사람, 과거에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누가 알겠어요?”육연우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백인서가 정말 결백하다면 왜 자기 부모의 이름조차 적지 않았을까요? 왜 자신의 과거를 숨기려 하는 거죠?”“백인서는 일부러 숨기고 있는 거예요! 내가 회사에 자주 오지 않지만, 한가지는 확실히 알아요. 이건 육자 그룹 규정을 어긴 거라고요!”그때 몇몇 주주들이 육연우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맞아요, 그 사람 뭔가 수상해 보였어요. 영업부 직원 맞나요?”“우리 육자 그룹은 큰 기업인데, 인사 문제는 신중해야 합니다!”“주우남 팀장님, 번거롭겠지만 그 직원의 자료를 가져와서 우리에게 보여주세요. 혹시 오해가 있을 수도 있잖아요. 우리가 자료를 보고 나면 연우 아가씨에게도 잘 설명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주우남은 최군형을 바라보았으나 최군형은 여전히 차가운 시선으로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육연우는 그 순간이 승리의 순간인 듯 기뻐하며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최군형의 휴대전화에는 이미 인사부 출입구의 감시 카메라 영상이 도착해 있었다는 사실을 육연우는 전혀 알지 못했다. 바로 며칠 전 육연우와 동혜림이 한 짓이 고스란히 담긴 영상이었다.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최군형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최군형의 날카로운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육연우 씨의 말이 맞습니다.”최군형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자 그룹에는 분명히 그런 규정이 있습니다. 직원들은 입사 시 모든 정보를 정확하게 기재해야 하며 고의로 숨기면 안 됩
최군성은 이미 며칠째 육연우와 연락하지 않았다.최군성은 점차 두 사람의 관계가 더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고, 그 사실을 차츰 받아들이게 되었다. 인연이 다했다면 그저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두는 것이 옳았다.억지로 이어가려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감정을 존중하는 방법이자 서로를 위한 마지막 배려였다.더군다나 최군성은 이제 좋아하는 일이 생겼다.최군성은 매일 배윤아와 만화를 논의하며 줄거리를 구상하고 있었다. 막힐 때면 배윤아가 최군성을 도와 인물들을 함께 그리기도 했다.최군성의 만화도 다시 연재를 시작했으며 배윤아의 도움으로 몇 가지 수정이 이루어졌고 조회수도 꾸준히 상승하고 있었다.비록 예전처럼 10만 회를 넘는 기록은 아니었지만 매일 점점 올라가는 수치를 보며 최군성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성취감을 느꼈다.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배윤아 앞에서는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배윤아는 최군성에게 두꺼운 처세술 책을 강요하지 않았고 형과 최상 그룹을 두고 경쟁하라고 부추기지도 않았다. 배윤아에게는 가족의 정과 행복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며, 베윤아에게도 자신을 아끼는 오빠가 있었다. 배윤아 역시 가문의 일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배윤아는 최군성에게 말했다.“무언가를 시작할 때는 이익과 손해를 따지지 말고, 그저 좋아한다면 용감히 나아가야 해. 꾸준히 하다 보면 좋은 결과가 나올 거야.”“그래서 너는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게 시간 낭비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지?”최군성은 배윤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배윤아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건 네가 좋아하는 거고 의미 있는 일이니까 시간을 낭비하는 게 아니지.”그 순간 최군성은 '가치관이 같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비로소 깨달았다.최군성과 배윤아는 같은 취미를 가지고 있었고 비슷한 관점과 가치관을 공유했으며 가정 환경도 비슷했다.둘 다 생계를 위해 애쓸 필요가 없었고 두 사람의 가정은 그들이 좋아하는 일을 지원해 줄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그래서 두
다음 날 두 사람은 육자 그룹 빌딩 옆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육연우는 하얀 옷을 입고 있었고 약간 수척한 모습이었다. 육연우는 최군성보다 먼저 도착해 조용히 창가에 앉아 최군성을 기다리고 있었다.이 카페는 두 사람이 예전에 자주 오던 곳이었고 이 자리 또한 두 사람의 ‘전용 좌석’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최군성이 카페에 들어서자, 창가에 앉아 있는 육연우를 보고 잠시 멍해졌다. 마치 오랜 시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육연우는 그때처럼 조심스럽게 컵을 쥐고 있었고 두려움에 찬 눈빛으로 최군성을 바라보며 큰소리 한마디 하지 못했다.최군성은 가슴이 아려왔다. 마치 뾰족한 바늘이 가슴속을 찔러 피가 배어 나오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최군성은 천천히 다가가 육연우의 맞은편에 조용히 앉았다.육연우는 최군성을 보고 잠시 멍하니 있더니 곧 아첨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미리 주문해 둔 바닐라 라테를 최군성의 앞에 밀어놓았다.“이거, 군성 씨가 좋아하는 거 맞죠.”최군성은 바닐라 라테를 잠시 바라보다가 쓴웃음을 지었다.최군성은 바닐라 라테를 좋아하지 않았다. 최군성이 좋아하는 것은 달콤한 마키아토였다.처음 육연우와 이곳에 왔을 때, 육연우가 이 음료를 시켰기에 최군성은 자신도 좋아한다고 말했을 뿐이었다.그 이후로 최군성은 한 번도 바닐라 라테를 시킨 적이 없었고 항상 마키아토만 주문했었다.그러나 육연우는 그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아니, 어쩌면 육연우는 최군성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애초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것이다.돌아보니, 이미 오래전부터 많은 것들이 드러나 있었던 셈이었다.“고마워.”최군성은 조용히 대답하고 예의상 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군성 씨, 나...”육연우는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눈가가 먼저 붉어졌다.최군성은 육연우에게 휴지를 건네며 조용히 물었다.“무슨 일이야?”“내... 내가 잘못했어요.”육연우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군성 씨, 제발 나 좀 도와줘요. 나는 이제 군성 씨밖에 없어요
육연우는 순간 멍해졌다.최군성의 반응은 육연우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육연우는 여전히 최군성이 자신에게 순종하는 어리숙한 사람일 거라고 믿고 있었다.비록 다툼이 있었고 최군성을 심하게 몰아붙였지만, 육연우는 자신이 눈물로 호소하면 최군성은 결국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했다.하지만 지금, 최군성의 눈에는 예전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육연우는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어갔다.“군성 씨,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예요? 나는 군성 씨와 함께하고 싶어요, 그리고 정말로 내가 잘못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군성 씨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데, 내가 더 소중히 여겨야 했어요...”“그래, 나는 소중한 사람이야.”최군성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너는 늘 나를 바보처럼 여겼지, 그랬잖아?”“군성 씨!”“내가 그동안 어떻게 지내왔는지 알아?”최군성은 육연우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 뭘 해도 잘못된 것 같았고, 내내 '넌 안 돼'라는 목소리가 들렸어...”“연우야, 난 밤마다 악몽을 꿨어. 꿈에서 깨고 나면 다시는 잠들 수가 없었어. 너무 지쳤는데도 잠이 오질 않았어. 나는 방에 틀어박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고 만화 연재도 중단했어.”“하지만 그동안.”최군성은 한 마디씩 힘을 주어 말했다.“하지만 넌 나한테 전화 한 통도 하지 않았어.”육연우의 표정이 달라졌다.“군성 씨, 나... 그동안 좀 바빴어요.”“바빴다고? 나한테 문자 하나 보낼 시간도 없을 정도로?”“그게 아니에요!”“연우야, 네가 사랑한 건 내가 아닐지도 몰라.”최군성의 쓴웃음은 그의 깊은 슬픔을 그대로 드러냈다.“네가 사랑한 건 부와 지위였어. 네가 진짜 원하는 건, 네가 싫어하는 사람들을 마음껏 밟아버릴 권력이었겠지... 하지만 넌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난 그냥 조용히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고 싶었을 뿐이야.”“군성 씨!”육연우는 급히 최
“뭐라고요? 10억 원이요?”백시연은 깜짝 놀라서 외쳤다.강소아는 슬쩍 백시연을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왜 그래? 고작 10억 가지고. 게다가 가원이에게 큰 선물을 주겠다고 네가 먼저 약속한 거잖아. 혹시 후회라도 하는 거야?”“그럴 리가!”배윤아가 옆으로 걸어오며 백시연의 어깨를 힘차게 두드렸다.“우리 인서는 분명히 선물을 줄 거야, 그렇지? 너희 둘 사이에 보석 하나쯤은 아무것도 아니잖아.”백시연의 얼굴이 단단히 굳어졌고 입술이 굳게 닫혔다.10억? 조순영에게서 받은 카드에는 고작 10억 원뿐이었다.백인서가 이때까지 이렇게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이 정도 돈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걸까?그래서 강소아가 그렇게 말한 것일까?“어머, 저 사람은 육 아가씨와 친하다던 백인서 아니야?”그때, 근처에 있던 여배우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방금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었어?”“예전에... 둘이 약속했나 봐, 백인서가 육 아가씨의 딸에게 선물을 주기로.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바뀐 것 같아!”“정말? 풉! 상류층 자매라는 것도 결국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봐! 백인서는 육 아가씨와 둘도 없는 사이처럼 보였는데. 육 아가씨가 어디를 가든 따라다녔잖아... 이제는 최씨 가문의 아들과 친해지니까, 가식적인 행동도 하기 싫어졌나 봐.”“그 선물이 10억 원짜리라고 하던데... 역시 두 사람 우정은 10억 원도 안 되는 거였어!”백시연의 얼굴은 점점 더 붉게 물들어갔다. 뒤돌아 그들에게 따지려던 찰나, 강소아가 재빠르게 백시연의 손목을 붙잡았다.“됐어, 인서야.”강소아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저 사람들은 평소에도 입만 살았어. 나중에 제대로 혼내 줄 거야.”“그래야죠, 저 사람들은 정섭 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예인이잖아요. 제대로 가르쳐야 해요!”백시연은 화를 내며 말했다.“소아 언니, 저 사람들이 이런 자리에 나온 건 정섭 엔터테인먼트를 대표해서이기도 하지만 결국 언니를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저렇게 뒤에서
권욱과 조순영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벅찬 기쁨에 눈물이 터져 나왔고 이내 서로를 끌어안은 채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권 대표님, 사모님, 정말 큰 경사입니다!”의사는 골수 검사 결과를 들고 환히 웃으며 말했다.“드디어 아가씨를 살릴 수 있게 됐습니다!”“맞아요, 정말 기쁜 일이네요.”최지용이 권욱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한심하긴, 그만 울어요!”권욱은 흐느끼면서도 반박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네 딸이 아픈 게 아니니, 넌 당연히... 당연히 이 고통을 알 리가 없지!”최지용은 기가 차 웃으며 권욱의 등을 두 번 세게 두드렸다.백인서는 마음 한편의 큰 짐을 덜어낸 듯 병실 안에 있는 권온유를 바라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그나저나.”조순영이 문득 입을 열었다.“백시연의 골수 결과는 어떻게 됐나요?”“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나왔습니다.”의사가 고개를 저었다.“대부분의 지표는 일치했지만 몇 가지 중요한 항목이 맞지 않아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정말 신기한 인연이네요.”최지용이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쌍둥이라고 해도 신체의 세포가 다를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네요.”한 명은 강인하고 선량했고 다른 한 명은 어리석고 악랄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자매라도 서로 다른 개성과 운명을 가질 수밖에 없다. 누구도 타인의 성격과 운명을 그대로 복제할 수는 없는 법이다.“그러게 말이야.”권욱은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다른 쌍둥이였다는 걸 알게 됐으니 이제 모든 진실을 밝힐 때가 된 것 같네.”...축하 연회 날, 손님들로 붐비는 연회장은 떠들썩하고 활기가 넘쳤다. 오성에서 유명한 대가문은 물론, 연예계의 반 이상이 모인 듯했다.정섭 엔터테인먼트는 업계에서 명성이 자자했기에 대상 수상 경력이 있는 배우들조차 강소아의 초대를 거절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연회장에 들어선 백시연은 평소 TV에서만 보던 유명 여배우들이 서로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광경에 기가 죽고 말았다.백시연은
차 안에서 백인서는 멍하니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함께 앉아 있던 두 남자는 서로를 힐끔거리기만 할 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조금 전 나눈 대화로 머릿속이 복잡해진 백인서는 갑작스레 쏟아진 진실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이 권씨 가문의 사생아라니.“네 어머니와 우리 아버지가 꽤 가까운 사이였던 모양이야.”“두 사람 사이에 주고받은 물건이 있었어. 바로 회중시계인데, 그걸 백시연이 가지고 온 거지.”“인서야, 너와 백시연이 쌍둥이 자매란 거 알고 있었어?”백인서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머리가 깨질 듯 욱신거렸다.어머니가 이렇게 많은 진실을 감추고 있었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인서야?”최지용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백인서의 손을 잡았다.그러자 앞좌석에 있던 권욱이 뒤를 돌아보며 싸늘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쏘아보았다.“놔라!”“뭐요?”권욱은 입을 삐죽이며 최지용이 꼭 잡은 백인서의 손을 가리켰다.참 이상했다. 평소에는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매형이 된 순간부터 그가 갑자기 거슬리기 시작했다.“인서는 좀 쉬어야 해!”권욱은 찡그리며 말했다.“손은 왜 자꾸 붙잡고 있는 거야?”최지용은 순간 멍해서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권욱을 쳐다보았다.“무슨 상관이에요?”“난 인서 오빠야! 당연히 내가 상관해야 할 일이지.”“웃기지 좀 마세요!”“너...”“그만 좀 싸울래요?”백인서가 뒤돌아 두 사람을 힐끔 쳐다봤다.머릿속이 이미 복잡할 대로 복잡한데 이 두 사람은 백인서를 편히 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최지용과 권욱은 서로를 노려보며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눈싸움을 벌였다.“온유는 아직 병원에 있어요?”백인서가 갑자기 물었다.“응...”“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요!”“뭐라고?”권욱은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백인서는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진짜 동생이라면 온유 고모가 되는 거잖아요. 아직 적합한 골수를 찾지 못했다면서요? 제가 한번 해볼게요!”권욱은 잠시
종수는 잠시 망설이더니 천천히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백인서에게 내밀었다.“통화해.”종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최 도련님의 번호는 분명 잘 기억하고 있겠지만, 굳이 조언을 하나 하자면... 먼저 육씨 가문의 아가씨에게 연락하는 게 좋을 거야.”백인서는 종수를 노려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왜냐하면 백인서도 강소아에게 먼저 연락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강소아는 위치 추적 장비를 가지고 있었기에 전화를 걸면 곧바로 이곳이 추적될 터였다.그렇게 되면 종수와 백시연은 피해 갈 수 없을 터였다.“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 않아?”종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어젯밤, 소아 아가씨가 시연이와 통화했는데 평소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던 아가씨가 시연이와 한참 동안 통화를 하더군. 내가 생각하기론 위치를 추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가장 컸어.”백인서의 표정이 점점 풀렸다.백인서는 천천히 손을 옮기고 종수가 움직이기 전에 재빨리 몸을 돌려 문 쪽으로 달려갔다. 종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듯했다.종수는 그저 가만히 백인서를 바라볼 뿐, 뒤쫓으려는 기색은 없었다. 그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백시연을 용서할 거란 기대는 하지 마세요.”백인서는 차갑게 말했다.“아저씨를 용서할 생각도 없어요! 저는 누구를 먼저 해치지 않아요. 그런데 당신들이 먼저 나타나 저를 해치려 들고선 이제 와서 자매애를 말하다니, 우습지도 않나요?”백인서는 말을 마치고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종수는 백인서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종수의 마음은 더욱 복잡했다.백인서는 저택을 벗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좁은 길을 따라 걸었다. 한참을 걸은 끝에 조용한 길 한가운데에 다다랐다. 지친 몸을 이끌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화려한 시내는 여전히 멀어 보였다.오성은 너무 넓었고 모든 곳을 다 가본 게 아니었기에 대략적인 방향만 추정할 수 있을 뿐, 휴대전화도 없어서 난감하기만 했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내던 순간, 고요한 길
종수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의 눈빛에는 깊은 씁쓸함이 서려 있었다.종수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백인서는 문밖 풍경을 바라보았다.때마침 오전의 화창한 햇살이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살랑거리고 작은 새들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모습은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다.백인서는 무의식적으로 깊은숨을 들이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종수를 바라보았다.“어서 가.”종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인서야, 내가 한 가지 부탁해도 될까?”“뭔데요?”“네 남자 친구에게 시연에 대한 얘기는 하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그렇게 해줄 수 있을까?”백인서는 미간을 찌푸렸다.종수는 한 걸음 다가서며 간절한 눈빛으로 백인서를 바라보았다.“시연이는 내가 키운 아이야. 내겐 딸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약속할게, 시연이를 데리고 이곳 오성을 떠나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결국, 저보고 용서하라는 말이군요?”“인서야, 그 아이는 네 쌍둥이 동생이야. 네가...”종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인서는 빠르게 식탁 위의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부분을 종수의 목에 단숨에 들이댔다.종수는 깜짝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급히 손을 뻗어 백인서의 손목을 잡으려 했지만 이미 목 깊숙이 차가운 위협이 스며든 후였다.백인서가 누르고 있는 곳은 동맥이 위치한 곳이었다.“백인서, 너...”“아저씨.”백인서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제가 조금만 힘을 주면, 아저씨는 여기서 생을 마감할 수도 있어요. 방금 확인했는데, 이 저택은 넓지만, 따로 감시카메라는 없더군요. 제가 아저씨를 죽이고 떠나도 아무도 알지 못할 거란 얘기예요.”종수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경찰이 너를 추적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흥!”백인서는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전 역추적 능력에는 꽤 자신 있거든요.”“백인서!”“아저씨, 전 사람을 해치고 싶진 않았어. 그런데 당신들은 왜 저를 놓아주지 않는 걸까요?”“전부 시연이 잘못이야!”
백인서는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천천히 시선을 문 쪽으로 옮겼다.종수가 방에 들어올 때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았다.신의 실력을 지나치게 믿었거나, 아니면 백인서를 단순히 어린 애로 여겨 경계를 늦췄던 게 분명했다.“어서 먹어라.”종수는 백인서를 쳐다보며 말했다.“다 먹고 나서 끝내줄게.”“네, 알겠어요.”“무섭지 않아?”“왜 제가 무서워해야 하죠?”백인서는 미소를 띠며 조용히 말했다.“겁을 내야 할 사람은... 아저씨 아닌가요.”종수는 백인서의 맑고 반짝이는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 눈빛의 날카로움은 마치 칼날처럼 심장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종수는 다시금 백홍을 떠올렸다. 한평생 은혜를 갚겠다고 맹세했는데 지금 은인의 딸을 죽이려 하고 있으니...백인서의 말이 맞았다. 겁을 내야 할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종수는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젯밤 백시연의 말에 화가 나 잠 한숨도 자지 못하다 보니 머릿속이 멍한 상태였다. 갑작스레 숨이 가빠오며 가슴이 터질 듯한 답답함이 몰려왔다. 무심코 주머니를 더듬었고 그 순간 전에 앓던 천식이 다시 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하지만 약을 가져오지 않았다.종수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물 밖으로 끌려 나온 물고기처럼 필사적으로 공기를 삼켰다.“어서... 어서...”종수는 떨리는 손으로 백인서를 가리키며 도움을 청했다.백인서는 순간적으로 멈칫하며 종수를 주시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다. 처음엔 거짓 연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인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식판을 발로 차 뒤집었다. 종수는 바닥에 쓰러져 온몸을 고통스럽게 비틀었다.백인서는 종수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어서 닫히지 않은 문을 바라보았다.지금이 탈출할 최고의 기회였다!“약...”종수는 애써 말을 이었다.“내 약이...”“배... 백인서... 부탁이야...”백인서는 이를 악물었다.“제발... 백인서, 날 좀 살려줘!”백인서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침착하게 문 쪽으로 달려가 주위를 살
종수는 무거운 표정으로 백시연을 바라보다가 TV를 켰다. 화면에는 비밀방에 갇힌 백인서의 모습이 감시 카메라에 담겨 나타났다.백인서는 어두운 방의 구석에 무릎을 감싸안고 웅크려 앉아 있었다.백인서는 머릿속으로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여기에 갇힌 지 3일째라는 결론을 내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어둡고 답답한 공간 속에서 하루하루가 1년처럼 길게 느껴졌다.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탈출할 수 있는 틈은 없었다. 혼자 힘으로는 밖을 지키고 있는 사람과 정면으로 맞설 수 없었다.백인서는 기회를 기다려야 했다.며칠 동안 종수는 정해진 시간에 맞춰 식사를 가져다주었다. 맛은 없었지만 백인서는 남김없이 깔끔하게 먹어 치웠다. 백인서는 알고 있었다. 극한의 상황일수록 절망하지 말고 조용히 몸을 숨기며 힘을 비축해야 한다는 것을. 모든 것은 탈출을 위한 준비였다.종수는 화면을 멈추더니 백시연을 향해 돌아섰다.“너... 정말 백인서를 없앨 생각이야?”“왜 이렇게 말이 많으세요!”백시연은 짜증을 내며 종수를 흘겨보았다.“너의 친자매이기 전에.”종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백인서는 절대 간단한 상대가 아니다. 쉽게 없앨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뭐라고요?”“방금 너도 봤잖아. 저런 상황에서도 잘 먹고 잘 쉬는 모습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말 모르겠니? 지금 에너지를 비축하면서 우리를 상대할 방법을 찾고 있다고!”“그러니까 더더욱 없애야죠!”백시연은 소리를 질렀다.“아저씨, 설마 백인서한테 마음 약해진 거 아니죠?”종수는 머리속이 하얘진 채 멍하니 백인서를 바라보았다.“어쨌든, 전 백인서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요!”백시연은 종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저의 엄마한테 약속했잖아요. 저를 잘 돌봐주기로. 어릴 때 저와도 약속했잖아요, 제 말이면 뭐든 다 들어두겠다고.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거예요?”“시연아...”“그만해요!”백시연은 목청을 높이며 말했다.“아저씨는 우리 엄마가 데려온 떠돌이 개일 뿐이에요. 저를 훈계할 자격
최지용은 충격에 휩싸여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그러니까...”최지용이 권욱을 바라보며 말했다.“이틀 동안 나와 함께 있던 사람이 정말 인서가 아니었단 거네요!”“그게 무슨 말이에요?”권욱도 어리둥절했다.“그 사람은 인서가 아니에요!”최지용은 흥분하며 외쳤다.“인서는 분명 지금 그 여자한테 잡혀 있을 거예요. 그 여자가 인서를 해치려 들 거예요.”“도련님, 진정 좀 하시죠. 지금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 갑니다!”최지용은 더는 말을 잇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총을 꺼내 든 채 밖으로 나가려 했다.표아정이 침착하게 최지용의 앞을 가로막았다.“지금 필요한 건 대책을 세우는 거야!”표아정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처럼 감정에 휘둘려선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어!”권욱은 머리를 긁적이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표아정은 권욱을 향해 물었다.“권 대표, 백시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백시연은 제 아버지의 사생아입니다.”지금은 이 부끄러운 가정사를 숨길 때가 아닌 것 같아 모든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하지만 수년간 찾지 않았어요. 사실 찾을 의지도 없었죠. 제 딸이 병에 걸려 골수 이식수술이 필요하기 전까지는요. 집안의 모든 친척이 골수 검사를 했지만, 적합한 사람이 없었어요... 그제야 동생을 찾게 된 겁니다.”표아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 동생은 어디서 찾았지?”“찾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남긴 단서를 따라 사람을 보내 남양에서 데려왔어요.”권욱은 낮은 목소리로 이어갔다.“하지만 돌아온 백시연은 처음부터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어요. 얼굴이 망가졌다면서 가면을 쓴 채 진짜 얼굴을 드러내길 거부했어요. 다만 몸에 지니고 있던 물건은 확실히 저의 아버지의 것이었죠.”“그다음은?”“백시연의 행동이 너무 이상해서 저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어머니는 누구야?”권욱은 단호하게 말했다.“백홍입니다.”최지용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표아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금세 실마리를 잡은 듯 말했다.
“결과가 바로 나오진 않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권욱은 마른 입술을 핥으며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넥타이를 풀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권욱은 마음 깊은 곳에서 답답함이 밀려오며 짜증이 치솟았다.권욱은 문득 검사실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술대 위에는 마취가 아직 풀리지 않아 의식이 없는 채로 누워 있는 백시연이 있었다.권욱은 갑작스레 백시연에 대한 궁금증이 피어올랐다.진짜 여동생이라면 적어도 동생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도는 봐야 하지 않을까? 혹여 얼굴에 상처가 있다면 어디가 어떻게 손상되었는지 알아야 적합한 의사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결심한 듯 권욱은 발걸음을 재촉해 수술대 앞으로 다가갔다. 권욱은 손을 들어 올리고 잠깐 주저하다가 곧 거칠게 백시연의 얼굴을 덮은 가면을 벗겨냈다.가면이 벗겨지자, 권욱의 눈동자에는 마치 폭발하는 화산처럼 충격과 경악이 번져갔다.“백... 백인서잖아?”...최지용은 초조한 기색으로 거실을 서성거리며 누군가를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표아정이 아끼는 두 명의 부하, 우일과 우민 남매가 돌아왔다. 두 사람은 전문 훈련을 받은 인물로, 뛰어난 손재주와 상황 판단력 덕분에 표아정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상황은 어땠어?”표아정이 급히 물었다.우일과 우민은 보고하기 시작했다.“계속 백 아가씨의 뒤를 밟았는데 아가씨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통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병원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에서 가면을 꺼내 쓰는 걸 보았습니다.”“가면?”최지용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네, 가면이 확실했습니다.”우민이 설명했다.“그 가면은 꽤 독특해 보였는데 금으로 만들어진 데다 보석이 박혀 있어서 꽤 값비싸 보였습니다.”최지용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인서는 가면을 가지고 있지 않아. 그런 걸 쓴 적도 없고...”“또 뭘 봤는데?”“누군가 천으로 아가씨의 입을 막은 채 강제로 끌고 갔습니다. 병원 주위를 살펴본 결과, 그들은 권욱의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