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군형이 침묵을 지켰다. 그 아이가 정말 소유라면, 모든 게 낯설어졌다 하더라도 어릴 적의 기억이 남아있기에 이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을 것이었다.하지만 최군성이 말한 육소유는 만사에 경계심을 곤두세운 채였다. 뭔가를 들키는 걸 무서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여보세요? 형? 듣고 있어?”“응, 듣고 있어.”최군형이 낮은 소리로 답했다. 그는 가게 문을 닫고는 문가에 서서 통화를 이어갔다.“군성아, 이 일은 네가 맡아야 할 것 같다.”최군형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전화기 저편에서 최군성의 비명이 울렸다. 최군형은 웃음을 참으며 애써 진지하게 말했다.“생각해 봐, 네가 이렇게 오래 노력했는데, 좀만 더 하면 될 거 같지 않아? 내가 간다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잖아, 얼마나 힘들어!”“꼭 그렇다고는 못하지. 나보다 형이 소유 마음에 더 들 수도 있잖아. 누가 형더러 육씨 가문 사위...”“무슨 소리야!”최군형이 낮게 말했다. 최군성은 순간 조용해졌다가 풉 하고 웃었다.“형, 왜 이렇게 돌아오기 싫어하는 거야? 강주에서 결혼이라도 하고 싶은 거야?”“너...”최군성이 말을 이었다.“정말 이렇게 동생을 희생해도 되는 거야? 그래도 되는 거야?”최군형이 익숙하게 동생의 물음을 맞받아쳤다.“우리 둘 다 그렇게 될 수는 없잖아, 한 명이 희생하고 한 명은 머리를...”“왜 희생하는 건 나고 머리 쓰는 건 형이야?”“난 어릴 적부터 너보다 총명했으니까!”“형...”“하지만 넌 나보다 잘생겼잖아! 그것도 아주 많이.”최군형이 웃으며 말했다. 최군성이 곰곰이 생각했다. 뭐 그런 것 같기도 하고.어릴 적 부모님이 형제를 데리고 나가면 사람들은 최군성을 더 귀여워했다. 차가운 표정의 최군형은 크게 환영받는 편은 아니었다.최군성이 찜찜한 듯 대답했다.“음... 그래. 그럼 나 계속해?”“응, 당연하지!”“형, 우리 친형제인 건 알지?”최군성이 이를 악물고 물었다. 최군형이 작게 웃더니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육소유 얼굴은
한참 뒤 최군형이 머리를 끄덕였다.“응, 네 말이 맞아...”그는 강씨 집안 사람들과 식사를 할 때를 떠올렸다. 강우재와 소정애, 강소준은 얼핏 보아도 한 가족이었다. 강소준의 얼굴에는 강우재와 소정애의 얼굴이 동시에 들어있었다.하지만 강소아는 아니었다. 딸은 아버지를 닮는다고 했는데, 강우재와 강소아를 보면 꼭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여보세요, 형? 뭐 하는 거야?”최군형이 한참이나 대답이 없자 최군성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에 최군형이 태연하게 대답했다.“어, 아무것도 아니야. 곧 집에 도착하니까 끊어. 일찌감치 자고.”“어차피 잠 다 깼는데 좀만 더 얘기하자! 별장 살아서 다른 사람도 없는데, 영상 통화라도 할래?”최군성이 늘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최군형이 강하게 대답했다.“됐어! 나 별장 안 살아. 그리고... 식구들 다 잠들었는데, 깨우기 싫어.”그 말에 최군성은 잠이 번뜩 깼다.“뭐? 식구들?”“어, 식구들... 그게 뭐 어때서!”최군형이 이미 집 문 앞에 도착했다. 그는 최군성의 고함을 뒤로하고 전화를 끊고는 아예 핸드폰의 전원을 꺼버렸다.최군형은 작게 웃으며 조심스럽게 집에 들어서서 2층으로 올라가 강소아를 봤다. 날이 더웠기에 강소아의 방문은 열려있었다. 최군형은 문밖에서 문틈 사이로 그녀를 훔쳐봤다. 깊이 잠든 강소아의 모습이 보이고, 머리맡에 놓인 강소아 이름이 써진 최군형 그림이 보이고,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이 보였다.최군형의 가슴이 움찔했다. 그의 입가에도 미소가 피어났다.낯선 도시에 이렇게 많은 정을 주게 될 줄 몰랐다. 그를 이곳에 남아있게 한 것이 한순간의 설렘이 될 줄도 몰랐다.......강우재는 그만 허리를 다치고 말았다. 소정애는 그를 타박하면서도 강우재의 시중을 들어야 했다. 집에는 학생 둘까지 있었기에 가게는 최군형에게 완전히 맡긴 채였다.최군형은 홀로 몇 사람의 일을 감당해냈다. 화물 운반, 진열, 장부 정리와 수금까지.게다가 가게 문을 열기 전에는 먼저 강소아를 학교까지 데
최군형이 웃음을 참았다.‘방금 말을 녹음해서 아빠한테 들려줄걸!’최연준 말고 또 누가 그렇게 살까?소정애가 웃으며 최군형을 바라보았다.“군형아! 점심으로 뭐 먹고 싶어? 만들어줄게!”“아뇨, 괜찮아요. 아줌마는 집에서 아저씨 간호하고 계세요, 전 가게에 가볼게요.”최군형이 급히 몸을 일으켜 빠르게 집 문을 나섰다. 소정애가 그의 뒤에서 외쳤다.“소아 오후에 공강이라 가게로 가라고 했어. 둘이 같이 일해!”최군형은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남아서 밥 먹으라는 소리겠거니 하고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최군형이 작게 웃으며 발길을 다그쳤다.......오후의 가게는 별 손님 없이 한산했다. 그도 오랜만에 한가한 시간을 즐겼다. 계산대에서 핸드폰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아이고, 군형이 혼자 있어?”최군형이 깜짝 놀라 들어온 사람을 바라보았다. 눈앞의 중년 여성은 조금 살이 오른 몸매에 과하게 화려한 치장을 하고 있었다. 명품 백도 그녀의 손에 들리니 짝퉁 같아 보였다. 그녀는 눈이 휘어지라 웃으며 최군형을 빤히 쳐다보았다.최군형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바로 다시 고개를 숙였다. 소정애의 파마도 이 사람의 머리 스타일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었다.여자는 최군형을 보며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군형아, 멍하니 뭐 해? 나 잊어버린 거야? 나잖아, 미자 아줌마!”최군형은 열심히 머릿속으로 “미자 아줌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생긴 사람을 봤던 것 같기도 한데, 이름이... 우미자?그 집은 이곳에서 이발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소정애와 우미자는 종종 함께 춤을 추러 다녔으나 둘 다 서로를 썩 좋아하진 않았다. 그러니까 껍데기뿐인 관계라는 것이다. 둘은 알게 모르게 서로를 경쟁상대로 의식하고 있었다.우미자에게도 딸이 있었는데, 마침 강소아의 또래였다. 하지만 그 딸은 강소아처럼 학교에 다니는 게 아니라, 평범한 기술을 배워서 평범한 월급을 받으며 평범하게 살고 있었다.그래서 우미자는 종종 소
우미자는 최군형이 흥미를 보이자 더욱 기뻐하며 말을 늘어놓았다.“너한테만 알려주는 건데... 사실 우리 모두 의심하고 있어. 소아는 훔쳐 온 아이가 아닌가 하고.”“네? 아줌마, 근거 없는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돼요! 장모님, 장인어른이 어떤 분인지는 제가 제일 잘 알아요!”“얘,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 난 차마 네가 속는 꼴 못 보겠어, 그 부부, 겉보기엔 착한 사람들 같아도 실제로 어떨지는 몰라! 지내봐야 알 거 아니겠어? 아예 근거 없는 말도 아니야. 20년 전, 그 부부한테 아이가 생기지 않아 오성의 큰 병원에 갔었어. 그런데 돌아올 때 그 아이를 안고 있었다니까! 하, 오성에 가기 전부터 이미 임신한 상태였다고 어찌나 잡아떼던지. 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다가 오성에 가서 낳은 거라고 했어. 속일 게 따로 있지... 그 아이는 적어도 한 살은 돼 보였어, 이미 걸을 줄도 알았다고. 군형아, 몇 개월 만에 걸음마를 떼는 아이를 본 적 있어?”최군형이 인상을 썼다. 저도 모르게 심장이 빨리 뛰었다. 짙은 안개 속에서 헤매는 것 같았다. 앞이 출구라는 걸 알면서도 안개에 가려져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군형아, 내 말이 맞는 것 같지 않아?”최군형은 말이 없었다. 우미자는 그의 침묵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이고는 더욱 흥분해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군형아, 이 가족을 경계해야 해! 강우재와 소정애 같은 사람이 어떻게 소아 같은 자식을 낳겠어? 그게 가능한 일이야? 그러니까, 소아는 절대 그들 친자식이 아니야. 하, 그러면 당연히 대우도 다르겠지. 지금이야 잘해준다고 하지만, 그 집엔 아들 하나가 더 있잖아! 이 가게도, 그들의 재산도 모두 아들 몫이 될 거야. 강소아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을 거야! 하지만 우리 집은 달라. 우리 집엔 외동딸 하나밖에 없거든. 나중에 우리 재산은 모두 내 딸이 가져갈 거야.”우미자는 확신했다. 우씨 집안의 이발소들은 최군형에게 엄청난 유혹이 될 거라고.하지만 최군형은 차가운 눈길로 그녀를 쏘아볼 뿐이었다.우미
최군형이 멈칫했다. 등 뒤가 서늘해졌다.여자가 서서히 다가왔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그렇지 않았다.“아이참, 군형 씨, 우리 가게에 있기엔 참 아까워요!”“그게... 무슨 말이에요?”최군형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강소아가 최군형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누구는 외동딸이라 재산을 모두 물려받을 건데! 하, 정말 좋겠어요, 그렇죠?”“이...”키가 제 가슴께밖에 안 되는 강소아 앞에서 최군형은 조금도 움직일 염을 하지 않은 채 초등학생처럼 얌전히 꾸중을 들었다. 하지만 질투하는 강소아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질투하는 강소아가 좋았다.최군형이 씩 웃었다. 그 모습이 강소아를 더욱 자극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손에 든 도시락을 꽉 쥐었다. 어찌나 힘껏 쥐었는지 손가락 끝이 하얘졌다.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갔더니 최군형이 혼자 가게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혼자 밥도 잘 챙겨 먹지 못할 최군형이 걱정돼 밥을 싸 들고 가게로 달려왔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강우재도 이 정도의 대우는 해 주지 않았다.그런데 가게 문 앞에서 뭘 봤나?우미자가 제 딸과 최군형을 이어주려고 수작 부리는 모습을 목격하고 만 것이다.어떻게 이럴 수가!강소아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이 일이 최군형 때문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이웃 아줌마들이 최군형을 자기 집으로 들이고 싶어 호시탐탐 그를 노리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하지만...그녀는 기분이 나빴다. 짜증이 났다. 어쩔 수 없이 질투하게 됐다.다른 사람은 왜 그녀의 남편을 노리는 걸까?그 아줌마들은 아직 강소아와 최군형이 가짜 결혼인 줄 몰랐기에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았다. 만약 이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녀의 집에 쳐들어와 최군형을 빼앗으려 할 것이다.최군형의 잘생긴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짜증이 났다. 잘생기긴 왜 이렇게 잘생겼어? 괜히 이목만 끌잖아!최군형은 잔뜩 토라진 강소아의 얼굴을 서서히 가까이하고는 그녀 손에 든 도시락통을 보고 살짝 웃었다.“밥 갖다주러 온 거에요?”강소아가 눈을
그날 밤 최군형은 평소처럼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갔다. 강소아는 아직 소파에 앉아 있었다. 텔레비전이 켜져 있었지만 그녀의 관심은 온통 다른 데 쏠려 있었다.최군형은 평소처럼 집에 들어와 신발을 바꿔 신고는 텅텅 빈 도시락통을 주방으로 가져가 여유롭게 씻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없는 사람 같았다. 심지어 도시락도 싹싹 비운 채였다.강소아는 입술을 깨물고 자리에 앉아 최군형이 자신을 달래러 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뒤 주방의 물소리가 끊기더니 최군형이 손을 닦으며 걸어 나와 그녀의 옆에 앉았다.강소아는 기분이 조금 풀렸다. 금방 웃음을 지으려는데, 최군형이 불쑥 말했다.“아직도 화났어요?”‘아예 멍청한 건 아니네.’강소아가 볼 부은 소리로 “네”하고 대답하고는 얼굴을 홱 돌렸다. 최군형이 목을 가다듬었다. 차갑고 날카로운 얼굴이 순간 따뜻해 보였다. 제법 진지한 모습이었다.“그... 얘기 좀 할까요?”강소아가 멍해졌다. 웃음기를 누르기 어려웠다. 머릿속은 온통 드라마에서 본 장면들뿐이었다. 여자 주인공이 화가 나 있으면 남자 주인공은 자존심 다 버리고 여자 주인공을 달랬다. 달래는 방식들은 조금씩 달랐지만 뭐 그런 건 상관없었다. 최군형은 어떻게 달랠까?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썩 낭만적인 모습은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꿀 발린 소리 몇 마디만 한다면 그걸로 만족이었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니, 행동으로 그녀의 화를 풀어줄 수도 있었다. 예를 들면...강소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귀 끝이 타는 듯 뜨거웠다. 그녀는 애써 자기 생각들을 억누르며 담담하게 말했다.“네, 좋아요. 말해봐요. 듣고 있을 거니까.”“왜 화가 났는지 알고 있어요. 미자 아줌마가 저와 말하는 걸 들었죠?”“네...”“제 판단이 맞다면, 아줌마 외동딸은 모든 재산을 상속받을 거지만 우리 집의 모든 재산은 소준 씨가 갖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겠죠. 아줌마가 저를 설득해 이 집을 떠나게 할 거로 생각했을 거고요. 맞죠?”강소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최군형은 진지한
“뭐? 못 찾았다고?”구봉남이 깜짝 놀라 물었다. 구성 그룹의 CCTV 시스템은 업계 안에서도 알아주는 수준이었다. 그들이 각종 수단을 동원해 직원들을 감시하는 것은 그룹 내부의 비밀이었다.이런 인권침해에 대해서도 많은 직원들은 감히 맞서려 하지 못했다.그런데 이런 수단이 최군형에게는 쓸모가 없어졌다니?구봉남이 진정하고는 계속해 물었다.“왜... 못 찾는 건데?”“먼저 최군형의 입사 날짜를 찾고, 그 날짜에 근거해 모든 CCTV를 뒤졌지만,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구성 그룹에 온 적이 없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가 운전하는 트럭도 조사했는데, 추적기가 고장 난 상태였습니다. 최군형은 그 차 말고는 다른 차를 운전해 본 적도 없어요. 그래서...”구봉남은 더는 못 듣겠다는 듯 낮은 소리로 으르렁댔다.“쓸데없는 놈들!”부하는 제 잘못을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푹 떨구고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참 침묵을 지키다 더듬거리며 말했다.“저... 사실은...”“사실은 뭐?”구봉남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최군형의 행적은 찾지 못했지만, 다른 사실을 알아냈습니다.”“말해.”“오성 최상 그룹의 큰아들 이름도 최군형입니다!”“그러니까, 이 최군형이 그 최군형이라고?”구봉남이 멈칫하더니 인상을 쓰고 말했다. 부하가 머쓱하게 웃었다.“그런 건 아니지만, 이름이 같으니 정말 아는 사이 아닐까 하고요!”구봉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화가 욱하고 올라온 듯 책상 위의 서류를 집어 부하에게 집어던졌다.“최군형 세 글자를 맡아두기라도 했어? 온 세상에서 한 명만 쓸 수 있는 거야?”“아닙...”“오성에 사람들이 넘쳐나는데, 그깟 동명이인 찾기가 어려워?”부하가 황급히 뛰쳐나갔다. 구봉남은 그제야 의자에 앉아 넥타이를 풀고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이것들 때문에 정말 미치겠다...전과자인 트럭 기사가, 심지어 결혼도 한 사람이, 어떻게 최상 그룹 도련님과 어깨를 나란히 한단 말인가?구봉남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냉정히
형님의 계속된 경영 실수로 인해 구성 그룹은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그가 버티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구성도 없을 터였다.하필이면 이때 음료수 문제가 터졌다. 겨우 이를 수습했더니 구자영이 또 사고를 쳤다...구봉남은 더 이상 남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싶지 않았다.“그가 정말 도련님이라면...”혼잣말을 웅얼거리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이어 그는 핸드폰을 들어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지난번 그 호텔에 방 좀 잡아줘. 그리고 무슨 수를 쓰든 강소아를 불러나와... 아, 됐다. 내가 직접 부를게.”구자영 일 때문에 강소아는 구씨 가문의 모든 사람을 경계하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가는 편이 더 좋을 것이었다.구봉남은 전화를 끊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거울을 보고 머리를 정리하며 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오성.최군성은 병원에서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힘겹게 걷고 있었다. 그는 귀와 어깨 사이에 핸드폰을 끼운 채 전화기 저편의 최군형에게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나 진짜 짜증나... 엄마 아빠는 집에서 서로에게 푹 빠져서 난 안중에도 없어. 지난번에 엄마가 달걀부침 먹고 싶다고 하니까 바로 해준 거 있지. 대여섯 개는 만들어서 골라 먹으라고 했다니까! 내가 하나만 먹자고 해도 안 줬어! 주 씨 아줌마한테 해달라고 하라면서!”최군형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주 씨 아줌마가 한 게 뭐 어때서? 우리 어릴 때부터 주 씨 아줌마가 밥 해주셨잖아.”“그거랑 그거랑 같아?”“그리고... 엄마 아빠가 애정 표현하시는 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그냥 그걸 보기가 싫어. 그래서 아이들이 갖고 노는 망치 풍선으로 한 대 때리려고 했지. 그런데 때리지도 못했어!”최군형이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최군성은 망치 풍선으로 둘을 때리려다 아빠에게 반격당한 것이었다.최연준은 오랫동안 무술을 연마한 덕에 기척을 잘 읽었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아직 예민했다.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그러니 등 뒤의 인기척을 읽었을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