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한은 못마땅했지만 결국 손을 들어 주먹을 맞부딪쳤다.마차는 느릿느릿 앞으로 나아갔고 보름이 지나서야 한양에 도착했다.한양 외곽의 별채로 보내질 거라 예상한 것과는 달리 그녀는 자신이 머물던 작은 저택에 와있었다.김단은 소한이 잠시 이곳에 머물려고 한 것이라 생각했다.그러나 이내 울음 섞인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와닿았다.“아가씨!”김단은 흠칫 놀라 황급히 마차에서 내렸다.발이 땅에 떨어지기 무섭게 작은 그림자가 그녀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어린 소녀의 여린 팔이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쌌다.“아가씨… 저는 알고 있었어요. 아가씨가 살아 계실 거라고.”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울음소리에는 그간 쌓인 깊은 서러움이 담겨 있었다.“매일같이 아가씨를 기다렸어요. 드디어 돌아오셨군요.”김단의 눈가도 순식간에 붉어졌다.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품에 안긴 숙희를 토닥여주었다.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영영 이곳에 돌아오지 않으려 했던 그녀가 마땅히 해 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그저 그렇게 서로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울었다.그때 부드럽고 따뜻한 음성이 두 사람을 감쌌다.“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 하는 건 어떻겠소?”그제야 숙희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그녀는 얼른 김단을 놓아 주고 손을 꼭 쥐었다.“큰 도련님께서 이각에게 전갈을 보냈습니다. 아가씨께서 오늘 돌아오신다고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아침 일찍부터 아가씨가 좋아하시는 설화떡과 매실주를 사 왔어요.돼지 곱창은 미처 준비하지 못했지만 걱정 마세요. 왕철에게 맡겼으니 곧 씻어서 요리해 드릴게요.”그녀는 쉴 새 없이 떠들었다.김단은 그런 숙희를 바라보며 왠지 모르게 가슴이 저릿했다.코끝이 시큰하고 또다시 눈물이 차오르려 했다.뒤따르던 소하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마치 과거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녀와 혼인 관계를 정리하기 전 그 역시 이렇게 김단을 지켜보곤 했었다.지금도 그때처럼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그저 즐겁기만 했다.하지만 뒤에서 느껴지는
김단은 그가 이곳에 다가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이곳에는 정암이 심어둔 매화나무가 서 있었다.여기는 온전히 정암의 터이자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그녀는 살짝 눈썹을 찌푸리더니 몸을 돌려 소한을 바라보았다.서로 눈이 마주쳤지만 그녀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그의 모습은 예전보다 훨씬 성숙해져 있었다.아마도 며칠 간의 고단한 여정이 그를 이렇게 바꿔버린 건지도 모르겠다.날카롭던 청년의 눈매는 한층 더 깊어졌고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청춘 시절에 볼 수 없었던 침착함이 드러나 있었다.그녀를 바라보는 눈동자도 차가운 무관심 대신 조금은 온화해진 느낌이었다.그는 여전히 소한 그 자체겠지만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김단도 많이 변해있었다.과거의 김단이었다면 소한을 마주쳤을 때 두 눈을 반짝이며 그에게 달려들었을 것이다.기쁨에 겨워하며 한 마리 나비처럼 그의 주위를 맴돌며 쉴 새 없이 재잘댔었겠지만지금의 그녀는 아무런 감정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소한은 옆에 늘어뜨렸던 손을 무의식적으로 꽉 쥐었다.그는 김단의 무심한 태도를 여러 차례나 봐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익숙해지지 못한 것 같았다.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도 그는 여전히 자신을 오라버니라고 불러주길 바랐다.그녀의 사랑을 받을 수 있기를 원했다.잠시 깊게 숨을 들이 마신 후 소한은 입을 열었다.“한 가지 꼭 전해야 할 일이 있소. 임원은 원래 진산군 댁의 적녀가 아니었소.”그러자 김단은 평온하게 그 말을 끊으며 차분하게 답했다.“알고 있습니다.”그 말에 소한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그는 김단에게 알려주고 싶었다.그들의 약혼은 여전히 유효하다고.그녀와 자신은 처음부터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었다고.만약 김단이 이를 깨닫는다면 그녀의 마음도 조금은 변하지 않을까 하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어쩌면 자기가 원하는 것만 믿으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그런데 이미 알고 있다고?소한의 눈동자 속에는 당혹감이 스쳐갔다.그는
“단이는 당신들을 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차디찬 목소리가 소하의 등 뒤에서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모두가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그리고 그곳에는 소한이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그의 얼굴은 먹구름이 드리운 듯 어두웠고 날선 눈빛에는 차가운 냉기만이 서려있었다.그가 나타난 순간 임학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소한! 또 너냐!”그는 격분하여 병사들을 뚫고 앞으로 나가려 했다.“자네가 김단을 감금했잖소! 죽음까지 몰아넣었던 게 누군데 이제 와서 또 무슨 계략을 꾸미려고 하는 것이오? 장소를 바꿔서 감금하면 다인 것이오?”진산군 또한 간절한 목소리로 얘기했다.“한아! 아니지 소 장군! 단이를 보게 해다오! 단이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니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단이는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소한의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금 울려 퍼졌다.그 순간 임가 사람들은 깜짝 놀라 숨이 멎을 뻔했다.임학은 차가운 눈으로 소한을 바라보았다.“뭐라고 했소?”심지어 소하조차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러나 이내 과거 김단이 보였던 이상한 행동들을 떠올렸다.그녀는 한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그때부터였을까?임씨 부인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뭐라고요? 단이가 알고 있다는 말입니까? 언제부터요?”“명희가 죽었을 때부터요.”소한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명희가 죽기 전 모든 것을 단이에게 말했다고 합니다.”그 순간 임학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오랫동안 머릿속에 묻어두었던 기억이 다시금 되살아나기 시작했다.그날 김단이 자신의 앞에서 말없이 흐느끼던 모습.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그때 그는 김단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모른 채 오히려 그녀를 다그쳤다.임원을 함부로 의심하지 말라고 경고까지 했었다.그 기억이 되살아나자 칼로 도려내는 듯한 고통에 휩싸였다.그녀가 모든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절망스
소한은 임학의 말을 듣자마자 속에서 불쾌함이 치밀어 올랐다.“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소? 그녀 성격에 자네가 여기서 죽을 때까지 기다린다 한들 만나 줄 거라는 보장은 없다는 걸.”그러나 이 말에 임학은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소 장군도 알고 있군요. 그녀가 어떤 성격인지.”그렇다면 왜 놓아주지 않는 거지?왜 계속 자신의 곁에 묶어두려 하는 거지?소한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졌고 등 뒤로 모은 손은 주먹을 움켜쥐었다.그러나 임학은 더 이상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그저 조용히 소하에게 고개를 숙이며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부탁드립니다.”그 말을 남긴 후 그는 천천히 한쪽으로 물러났다.기다릴 거면 문 정중앙에서 보기 흉하게 서 있을 필요는 없었다.소하는 다시 한번 손에 들린 작은 보자기를 내려다보았다.거뭇한 얼룩은 굳어진 핏자국 같아 보였다.그는 이 보자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그러나 방금 전 임학이 울음을 삼키며 이 보자기를 건넨 것을 보면 분명 그에게 소중한 물건일 것이다.그렇게 생각한 그는 작은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한이 바로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소하가 정말로 그 보자기를 김단에게 전하려 하자 소한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를 막아섰다.“단이는 이 물건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그 역시 보자기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임학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것은 아마도 과거와 얽힌 기억일 것이다.그리고 김단은 그런 것들을 원하지 않았다.소하는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몸을 돌려 소한을 바라보았다.그리고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물었다. “단이가 정말로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냐? 아니면 내가 단이를 만나는 것이 싫은 거냐?”소한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는 둘 다 원하지 않았다.소하는 그의 속내를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러나 그는 다시 한번 손에 든 보자기를 내려다보았다.“넌 이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하지도 않느냐?”그 말에 소한도 자연스럽게 보자기를 바라보았다
소하는 그녀의 표정 변화를 알아차렸다.그는 무의식적으로 손에 든 보자기를 등 뒤로 숨기며 말했다.“임학이 가져온 것이오. 낭자의 물건이니 직접 처리하는 게 맞는 것 같아 전해주려던 참이오. 원하지 않는다면...”“저한테 주세요.”김단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그녀의 얼굴에 다시금 미소가 피어올랐다.그녀는 소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소하는 잠시 망설였으나 그녀에게 보자기를 건넸다.김단은 그것을 받아 들었다.그녀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보자기를 내려다보았다.붉은 얼룩들이 찍혀 있는 그 천을 바라보는 순간 과거로 되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손 씻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그 세답방에서, 온 세상이 자신을 적대하던 그곳에서 보냈던 지옥 같은 나날들이 떠올랐다.“일부러 세답방에 남겨 둔 물건이었는데 결국 이렇게 임학 도련님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군요.”그녀는 쓴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들어 소하를 바라보았다.“오라버니, 이 안에 들어있는 게 무엇인지 아시나요?”소하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녀의 웃음이 너무도 슬프게 느껴졌다.이것을 그녀에게 건네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이었을까?김단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이건 제 과거의 어리석음과 헛된 기대입니다. 한때 이 천 위에 수없이 많은 구원의 편지를 남겼었죠. 제가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이 반드시 구하러 올 거라 믿었거든요. 하지만 저를 구하러 와주기는커녕 임원 낭자의 생일을 챙기기 바빴고 그녀를 달래주기 바빴습니다.”“도련님은 그때 조금이나마 제 생각을 하긴 했을까요?”한때 그녀는 확신했었다. 그가 절대로 자신을 잊을 리 없다고. 포기했을 리 없다고.하지만 그가 한양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며 새로운 누이를 데리고 거리를 활보할 때 그녀는 어두운 방에서 혈서로 구원의 편지를 쓰고 있었다.그 15년의 정이 결국 하나의 웃음거리로 끝나 버렸다는 것이 허무하기만 했다.지금 임학이 무슨 낯짝으로 자신을 보고 싶어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지난날 그에게 의지했던 그녀의 모습을 상기시키고
임학은 김단이 이리 빨리 나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대문이 열리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김단을 보고 깜짝 놀라더니 곧이어 눈시울이 붉혀졌다.입가에는 어설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는 천천히 김단에게 다가갔다.“네가 이리 빨리 나올 줄은 몰랐다..”“누가 주었소?”김단은 담담하게 그에게 물었다.아무 감정 없는 목소리였다.임학이 서둘러 대답했다.“류 나인께서 주셨어. 네가 세답방에서 나올 때, 깜빡하고 네게 돌려 주지 못했다고 하셨어. 그날, 관저 앞에서 나에게 그랬어. 덕빈께서 은혜를 베푸신 덕분에, 궁에서 나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말이야. 그리고 짐 정리를 하면서 이 보따리를 발견해서..”“알겠소.”김단은 임학의 말을 끊었다.하지만 그는 입을 다물지 않았다.아주 간단한 일을 길게 늘어뜨리는 자신의 모습이 이상했다.한데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이유는 알아챌 수 있었다.한참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한참을.이때, 김단이 다시 입을 열었다.“임 도령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오?”진산군 관저는 세습의 자격이 없어졌기에, 임학도 더 이상 ‘도련님’ 이 아니었다.하나 여전히 김단이 자신을 부르는 호칭은 낯설기만 하였다.임학은 자신도 모르게 울먹거리기 시작했다.애원하는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단아, 오라버니가 잘못했다. 너를 그렇게 두고 가는 것이 아니었어.”그는 말하면서 김단에게 다가갔다.“단아, 오라버니랑 같이 집에 가자구나. 오라버니가 데려다줄게, 응?”그의 손가락이 김단의 옷깃에 닿을 듯 말듯 하였다.하나 김단은 뒷걸음을 쳤다.옆에 있던 호위병이 서둘러 임학을 막았다.임학은 멈칫하며, 눈물을 흘렸다.“단아..”그와는 반대로 김단의 눈빛은 차갑기만 하였다.그녀는 임학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오라버니를 필요로 하는 것은 임단 이오. 하나, 그 임단은 이미 죽었나이다. 세답방에서 채찍으로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 때, 임 도령의 말 한마디만 바랬나이다. 불행히도 죽을 때까지 그 한 마디는
임학은 보따리를 한번에 잡지 못했다.손을 한 번 빼고, 후- 라는 소리와 함께 다시 화로에 손을 집어넣었다.그제야 천쪼가리 하나가 화로에서 나왔다.허나, 천쪼가리에는 불이 붙어있었다.곧이어 그는 바닥으로 던져서 계속 밟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은 불에 타서 사라지고 말았다.남은 천쪼가리에는 “구해줘.” 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곧이어 임학이 떨리는 손으로 천을 주웠다.화로에 손을 두 번 넣은 탓에, 손은 이미 벌겋게 변했다.손가락은 화상을 입어 하얗게 변하고 말았다.하나 그는 느끼지 못하는 듯 보였다.떨리는 손에 쥔 천을 보면서 참고 있던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김단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리고 참고 있던 말을 크게 내뱉었다.“임 도령은 어찌 제 관저 앞에서 소란을 피우시는 것이오? 그저 작은 천에 불과하지 아니헌데, 어찌 화로에 손을 넣으시는 것이오? 그날, 도령을 필요로 할 때는 어디 계셨소? 이런 소란을 피워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오? 혹여 내가 측은한 마음이 생길 것 같으시오? 똑똑히 알려주겠소, 손이 아니라 임 도령이 어느 날 시체가 되어도,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이오!”“왕철! 손님을 보내드려라!”김단은 몸을 돌려 관저 안으로 들어갔다.와중에 임학을 한번도 보지 않았다.하나 임학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천 쪼가리를 쥐며 소리 내어 울었다.결국 자신이 놓은 것이었다.자신이 제일 아끼던 누이는 ‘오라버니’라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한편, 왕철은 그 장면을 보며 난감할 따름이었다.임학의 울음소리가 점차 작아지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임 도령께서는 손에 화상을 입으셨사옵니다. 서둘러 의원을 찾으시지요, 너무 오래 방치하면 영영 쓰지 못할 수도 있나이다.”그는 이전에 발에 화상을 입고, 종아리까지 절단한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하나 임학은 움직 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이때, 소한과 소하가 관저에서 나왔다.그의 모습을 보고 어느 정도 눈치를 챈 것 같았다.두 사람은 눈살을 찌푸렸다.소하가
임학이 김단의 속을 뒤집었다는 사실을 알고, 소한도 더 이상 마당에 남지 않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당에는 사람이 많았다.그녀를 보호한다는 목적이었지만,김단에게는 그저 감금과 다를 바 없었다.하늘이 어두워지자 숙희가 김단을 위해 식사 한 상을 차렸다.김단이 숙희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한 달 사이에 네 요리 실력이 이리 늘 줄은 몰랐어.”숙희도 미소를 지었다.곧이어 순대를 집어 김단의 그릇에 올려 두었다.“드셔 보세요, 정암 종사관께서 하신 음식 같지 않습니까?”김단은 익숙한 맛에 이전의 일을 떠올렸다.순간, 짓고 있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다시 제정신을 차리고 다시 숙희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더 맛있구나.”숙희는 이어서 김단의 그릇에 다른 반찬을 집어넣었다.“아씨, 이것도 드셔 보시지요. 이것도, 이것도 제가 잘하는 반찬이옵니다!”잠시 뒤, 김단의 그릇에는 반찬이 산더미처럼 쌓였다.김단은 어찌할 수 없다는 듯이 숙희를 바라보았다.“네 아씨 입은 하나다, 어찌 그리 많이 먹을 수 있겠어? 왕철을 불러와, 같이 먹자구나.”“예!”숙희는 기뻐하며 왕철을 불렀다.김단이 식사를 하려고 한다는 사실에,왕철이 다급해졌다.“노비가 감히 아씨와 함께 식사를 한다니요.”숙희는 왕철의 어깨를 잡았다.“아씨께서 허락하셨소!”곧이어 왕철도 식사 자리에 앉았다.주인과 하인 셋이서 자리에 둘러 앉아,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김단은 조용하게 식사를 즐겼다.왕철은 여전히 고개만 숙이며 밥을 먹을 뿐이다.숙희는 김단을 흘깃 보았다.사실 그녀가 전혀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때, 밖에서 호위병이 보고를 하러 왔다.“아씨, 임 도령께서 가시지 않나이다.”곧이어 숙희는 그제야 김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호위병의 말에 김단이 눈살을 찌푸렸다.“가만히 내버려두거라."그녀는 임학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하나 다시 그를 보고 싶지는 않았다.잠시 뒤, 하인 하나가 보고를 하러 왔다.“아씨
덕빈의 그 한 대는 정말이지 강렬했다.그 탓에 김단이 전하를 알현하러 갔을 때 한쪽 뺨은 눈에 띄게 부어올라 있었다.덕빈이 김단의 뺨을 때린 일은 이미 전하의 귀에도 들어갔다.그런데 김단의 부은 얼굴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그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러졌다.“이렇게 심하게 때렸단 말이냐?”김단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별일 아닙니다. 이미 약을 발랐습니다.”하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그의 스승이 알려준 처방대로 만든 약을 사용했다면 붓기와 열기가 말끔히 사라졌을 것이다.하지만 김단은 전하의 걱정을 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부은 얼굴로 그를 만나러 왔고 약을 썼다고 거짓말을 했다.전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짐이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보았다. 손헌이 죽은 시각에 낭자는 궐 안에 있었더구나. 무엇보다 낭자같이 허약한 자가 손헌 같은 자를 해치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손헌은 어찌 되었든 한때 금군을 이끌던 총령이다.김단은 체구도 작고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않았기에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전하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덕빈이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지.”김단은 그 말속에 숨은 의도를 명확히 읽어냈다.전하는 이 일로 덕빈을 엄하게 벌할 생각이 없었다.전하 마음속에서 덕빈은 여전히 큰 존재였다.김단은 그의 뜻을 따라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덕빈마님께서 먼저 자식을 떠나보내셨고 이번에는 동생마저 잃으셨습니다. 일시적으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신 것도 이해가 됩니다. 다만 그 분노를 삭히지 못해 병이라도 얻으실까 걱정됩니다.”전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깊이 공감하였다.이때다 싶어 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전하에게 간곡히 부탁했다.“간청하옵니다 전하. 전하께서 동의하신다면 제가 덕빈마님을 찾아가 오해를 풀고 싶습니다. 그리고 겸사겸사 진맥도 해보려고 하는데 괜찮으신지요?”김단의 태도에 전하는 매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참으로 마음 넓은 아이로구나. 그런 성품을 지녔으니 최지습도 낭자를 지
김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리고 곧 이어진 건 덕빈의 날 선 고함이었다.“천한 계집년이! 대체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단 말이냐! 기아를 죽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내 동생까지 죽여?”내가 죽였다고?김단의 눈썹이 찌푸려졌다.본능적으로 서원공주를 힐끗 바라본 후 덕빈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덕빈마님, 부디 진정하세요. 이 일에는 분명히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무슨 오해!”덕빈은 날카롭게 소리치며 다시 김단의 뺨을 내리치려 했다.다행히 이번에는 김단이 몸을 뒤로 빼며 그 손을 피했다.하지만 덕빈은 포기하지 않았다.그녀가 거칠게 김단을 향해 달려들려는 순간 뒤늦게 달려온 윤이와 나인들이 덕빈을 제지했다.그러나 덕빈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손헌이 당한 죽음은 너무나도 처참하고 모욕적이었다.그건 단순한 처벌이 아니었다.손 씨 가문 전체의 자존심을 짓밟는 일이었다.몸이 붙잡혀도 그녀는 계속해서 발악했다.마치 그녀의 살갗을 찢어버리고야 말겠다는 기세였다.이 상황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서원공주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감히 중전의 침전 앞에서 난동을 부리다니요. 중전마마를 눈에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까?”“당장 덕빈을 가두거라. 이번 일은 내 직접 아버님께 아뢰어 엄벌을 청할 것이다.”“예.”나인들은 일제히 대답한 뒤 덕빈을 붙잡고 억지로 끌고 갔다.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고함소리는 여전히 귓가에서 메아리쳤다.김단의 뺨은 벌겋게 부어올랐고 화끈거리는 통증도 선명히 남아 있었다.그때 서원공주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괜찮소?”김단은 고개를 돌려 공주를 바라보았다.“공주님께서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이 정도 상처는 약만 바르면 금방 나을 겁니다.”그 말에 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김단이 집요하게 자신을 응시하자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보시오?”김단은 한숨을 내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도대체 공주님께서는 무슨 일
전하가 떠난 뒤 서원공주는 김단과 함께 중전에게 예를 올렸다.중전의 침실을 나선 그들 뒤로 윤이와 다른 나인들은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며 걷고 있었다.김단은 직감적으로 공주가 자신에게 따로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아니나 다를까 그들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서원공주는 입을 열었다.“아버지의 몸을 돌보는 일은 후궁들과는 차원이 다르오. 오늘 내가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낭자 같은 의원이 어찌 아버지의 몸을 돌볼 기회가 있겠소?”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전하를 가까이 뵙기 어려웠겠지만 자신처럼 명의의 제자라고 불리는 사람은 달랐다.그러나 그 진실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었다.김단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모두 공주님 덕분입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앞으로도 잘하시오. 아버지께서 만족해 하신다면 낭자를 어의로 만들어 줄 수도 있소.”그러고는 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는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그러고 보니 수 어의도 나이가 많지 않소? 몇 해 안에 물러나게 되면 그 자리를 낭자에게 주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오.”그녀는 마치 김단의 미래를 꽃길로 닦아주는 후원자라도 되는 양 자랑스러운 어조로 말했다.하지만 김단은 그런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사랑하는 이들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신의 곁에 있어주는 것.벼슬이나 권세 따위를 목표로 두고 있는 게 아니었다.그럼에도 겉으로는 감격한 듯 고개를 숙였다.하지만 김단의 연기를 공주가 눈치챌 리 없었다.여인으로서 관직을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직접 김단을 내의원 원장 자리까지 밀어주겠다고 나섰으니 김단이 감격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러운 듯 웃어 보였다.그녀는 김단을 바라보더니 낮고 느릿한 말투로 얘기했다.“낭자는 이제 내 사람이오. 그러니 나는 낭자를 돌봐줄 책임이 있소. 이거 하나만은 명심하시오. 말을 잘 듣는 자만이 은혜를 누릴 수 있소.”
소하의 미간에는 어느새 짙은 근심의 스며들었다.소한은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억지로 붙잡거나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의 방식은 여전히 극단적이었다.거의 다 나아가던 상처를 일부러 뜯어내어 다시 덧나게 하다니...그렇게 자신의 몸을 해쳐가며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하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한은 듣지 않을 것이다.자신의 말은 힘이 없다는 걸 이미 오래전부터 체감하고 있었다.그저 방금 전 김단이 한 말이 소한을 정신 차리게 할 수 있기를 바랐다.시간은 조용히 흘러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이날도 김단은 평소처럼 중전의 약을 들고 그녀의 처소를 찾았다.그러나 뜻밖에도 중전의 문병을 온 전하와 마주치게 되었다.전하는 중전의 곁에 앉아 나인들이 중전에게 약을 먹이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더니 김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중전의 몸은 어떠하냐? 도대체 언제쯤이면 완전히 회복된단 말이냐?”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중전마마의 기력은 지난 보름 사이 눈에 띄게 호전되었지만 중독된 세월이 워낙 오래되었기에 완전히 회복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전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해 보면 십여 년간 몸속에 쌓인 독이 하루아침에 깨끗이 나을 리 만무했다.다만 최근 소하로부터 중전에게 독을 먹인 자가 중전의 외가 친척인 맹씨 집안이라는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문득 그 생각이 떠오르자 전하의 눈썹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그 표정을 본 서원공주는 혹여 김단이 책망당할까 걱정되어 급히 입을 열었다.“아버지, 어머니의 몸은 정말로 전보다 훨씬 나아지셨어요. 제가 직접 지켜봐서 확신할 수 있습니다.”전하는 딸이 김단을 두둔하는 모습이 의외였는지 조금 놀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정말 그러하냐?”“정말입니다.”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지금 김단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니 그녀를 지켜주는 건 당연했다.“어머니뿐만 아니라 궐 안의 다른 마님들도 얼굴빛이 많이 좋아지셨어요. 그건 아버지께서 가장
소한의 가슴에 감겨 있던 붕대 위로 선홍빛 피가 점점 번져가며 그 면적을 넓히더니 이내 붕대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그 모습을 본 소하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그는 망설임 없이 소한의 팔을 붙잡아 끌며 말했다.“상처가 덧났다. 약 발라줄 테니 가만히 있거라.”하지만 소한은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노골적으로 말했다.“형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소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그는 소한이 또 김단을 귀찮게 한다는 소문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던 것이다.소한의 상처는 대부분 아물었기에 굳이 내의원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방금 그 잠깐의 실랑이로 인해 상처가 다시 벌어질 줄은 소하도 예상하지 못했다.김단은 그런 상황에 이골이 난 듯 차가운 눈빛으로 소한을 노려보다가 결국 담담하게 말했다.“앉으세요 얼른.”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약통과 붕대를 가지러 갔다.소한은 그제야 만족한 듯 조용히 의자에 앉아 상의를 벗고 탄탄하게 다져진 상체를 드러냈다.그의 눈에는 자신이 원하던 대로 김단에게 치료받을 수 있다는 기쁨과 방금 전 그녀의 약병을 깨뜨렸다는 죄책감이 동시에 얽혀있었다.김단은 말없이 다가와 그의 상처를 감싸고 있던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었다.그의 상처가 드러났을 때 김단과 소하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한아, 제정신이냐?”그 상처는 단순한 실수로 인해 벌어진 게 아니었다.누가 봐도 일부러 아물어가던 상처를 다시 찢은 흔적이었다.소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소하를 노려보았다.소하가 여기서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또 싸움이 날 게 뻔했다.김단은 아무 말 없이 붉게 벌어진 상처를 들여다보더니 묵묵히 약을 발라주기 시작했다.그녀는 끝까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소한 역시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기면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상처를 다 치료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장군이라면 자신의 몸부터 아껴야 합니다.”김단은 짧게 한마디 뱉어버리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소한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생각해 보면 참 서글픈 일이었다.한때는 자신의 전부였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그가 온갖 꾀를 부리고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야만 겨우 그녀를 볼 수 있는 꼴이라니.한때 자만심으로 빛나던 젊은 장군이 지금은 초라할 만큼 안쓰러운 모습으로 눈앞에 서 있었다.김단은 그를 향해 뭐라 질책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차라리 야멸차게 욕을 해서라도 정신 차리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조차 헛되이 들릴 만큼 이 남자의 모습은 너무 진심이었다.그때 소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앞으로… 내가 다치면 낭자가 약 발라주면 안 되겠소?”“안 됩니다.”김단은 단칼에 잘라내듯 대답했다.그녀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전 군의관이 아닙니다. 전쟁터에서 다쳤다고 가정을 해보세요. 그때도 한양까지 올라와서 저한테 치료 받으실 겁니까?”그러자 소한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낭자가 내 상처를 봐준다고만 하면 난 얼마든지 참고 버틸 수 있소.”그 말에 김단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때 마침, 문밖에서 들려온 단단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또 다쳤다고?”곧이어 문이 열리고 검은 전투복 차림을 한 소하가 당당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몸에 딱 맞게 재단된 옷자락이 날렵한 어깨선을 따라 흘러내렸고 허리춤에는 장검이 매달려 있었다.힘 있고 절도 있는 그 걸음에 방 안의 기류가 달라졌다.그를 발견한 김단은 자신도 모르게 환한 얼굴로 인사했다.“소하 도련님.”반면 소한의 얼굴은 순식간에 구겨지더니 찡그린 얼굴로 소하를 노려보며 날을 세웠다.“여긴 왜 왔습니까?”소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김단에게 인사한 뒤 소한을 바라보았다.“네가 다쳤다고 해서 말이다. 많이 다친 것이냐?”그러면서 그는 조용히 손을 뻗어 소한의 옷깃을 젖히려 했다.그러자 소한은 그 손길을 피하기 위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관심 끄세요. 전 김단한테 치료 받으러 온 겁니다.”그 말에 소하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을 열었다.“김단은 바빠 보이는데? 네 약은 형
그 두 나인이 집요하게 김단을 괴롭혔던 건 단지 개인적인 악감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그들은 명백히 공주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그 둘뿐만이 아니었다.세답방에 있던 사람들 중 그녀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 있었던가?모두가 서원공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김단을 괴롭히고 짓밟는데 앞장섰다.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와중에도 두 나인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찧으며 용서를 구했다.하지만 김단의 머릿속에는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피가 튀고 살이 찢기며 울부짖던 자신의 모습과 그녀의 고통을 즐기던 그 두 나인의 모습이 눈앞에서 다시 재현되는 듯했다.김단은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서원공주가 건넨 채찍을 건네받았다.무릎을 꿇은 두 나인을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팔을 들어 채찍을 내리쳤다.무자비하게 휘두르는 것도, 감정을 담아 퍼부은 것도 아니었다.단정하고 절도 있게 한 사람당 다섯 대만 때렸다.두 나인은 땅바닥에서 몸을 웅크린 채 울부짖었다.채찍질을 멈춘 그녀는 채찍을 다시 서원공주 앞에 조용히 내밀었다.그 얼굴엔 분노도 통쾌함도 없었다.서원공주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무언의 손짓으로 두 나인을 끌고 가라고 지시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단의 얼굴에는 억눌린 감정이 뚜렷하게 드러났다.그렇다면 분노를 터뜨리듯 채찍을 휘두를 줄 알았건만 김단은 여기서 멈췄다.예상과는 다른 그녀의 반응에 공주가 입을 열었다.“이걸로 충분한 것이오?김단은 천천히 숨을 내쉰 뒤 차분하게 말했다.“공주님께서 명하신 일인데 제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전에도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을 겁니다. 저의 원한이 깃든 사람은 저 둘이 아닙니다. 두 나인을 보는 것도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이 고통의 시작은 결국 진산군 댁과 임원 낭자입니다.”그 말에 서원공주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김단은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때는 믿지 않았다.단지 자신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뱉
“내가 준다 했으면 그냥 받으시오.”서원공주는 김단 앞으로 성큼 다가서더니 망설임 없이 비녀 위에 보요를 꽂아버렸다.금빛이 찰랑이자 세 알의 붉은 보석들이 더 눈부시게 빛났다.그 반짝임은 오히려 김단의 얼굴을 더 하얗고 뚜렷하게 만들어 주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원공주는 예상치 못한 감정을 느꼈다.김단에게 준 보요는 원래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어릴 적 아버지께서 직접 내려준 소중한 물건이었다.그녀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 장신구가 김단을 이토록 빛나게 해주니 너무나도 거슬렸다.김단의 머리 위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진 보요는 마치 원래부터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그 사실이 묘하게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공주의 체면이 있으니 이미 내어준 물건을 다시 거두어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서원공주는 얼굴에 가벼운 불쾌감을 띄운 채 말했다.“나는 공주이니 값비싼 장신구들은 많소. 낭자에게 하나 내준다고 해서 아쉬울 거 없다는 뜻이오.”김단은 이 장신구가 예전에 자신이 모욕당하며 손에 쥐었던 공예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 보요의 값은 공주에게 있어 그저 하나의 숫자에 불과할 것이다.김단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공주자가의 은혜는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성심을 다해 공주님께 보답해 드릴게요.”그 말은 김단이 의도적으로 뱉은 것이었다.오늘 먼저 손을 내민 것은 공주였으니 김단은 그저 그녀의 의도대로 반응해 주기만 하면 된다.아니나 다를까, 서원공주는 김단의 태도에 만족한 듯 얼굴에 흐뭇한 기색이 번졌다.“낭자의 의술 실력이 출중하니 내 눈여겨본 게 아니겠소? 기억해시오. 낭자만 잘한다면 나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오.”“명 받들겠습니다.”김단은 여전히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그러자 서원공주는 아무 말 없이 발길을 돌려 어화원의 안쪽 깊은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김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그렇게 시간이 조금
약 한 시진이 흐른 뒤 김단은 정성껏 달인 약그릇을 조심스레 들고 중전의 방으로 들어섰다.세자는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고 중전 곁에는 서원공주만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중전은 독으로 인해 몸이 많이 망가진 상태라 약을 마시자마자 곧 잠에 들었다.서원공주는 어머니의 이불을 다정히 여며주고 나서야 조용히 밖으로 향했다.김단 역시 자연스레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그녀가 공손히 예를 갖추고 물러나려던 찰나 서원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윤이야, 김 의원의 물건은 네가 대신 내의원으로 가져가거라. 나는 김 의원과 따로 나눌 말이 있다.”윤이는 고개를 숙이고는 김단이 들고 있던 약그릇을 받아든 뒤 조용히 자리를 떴다.그제야 서원공주는 고개를 돌려 김단을 바라보며 익숙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나와 잠깐 어화원으로 가지 않겠소?”그녀의 속내가 무엇인지 헤아릴 수 없었지만 공주의 부탁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그렇게 멀찍이 떨어진 나인들을 뒤로하고 가을이 짙게 내려앉은 어화원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가을 끝자락의 정원은 특유의 고요함과 깊은 색채로 물들어 있었다.노랗게 물든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스치고 마른 낙엽이 조용히 발끝에서 사그라들었다.서원공주는 얼마 걷지 않아 조용히 걸음을 멈췄다.“오늘 오라버니 때문에 많이 놀랐소?”김단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세자저하께서 중전마마의 병이 걱정되어 그런 것이니 이해합니다.”김단은 정중하게 대답했지만 마음은 결코 편치 않았다.그녀가 진짜 경계하고 있는 대상은 세자가 아닌 바로 눈앞에 있는 공주였다.늘 고고하고 거만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던 사람이 이토록 부드럽게 말을 걸어오고 친절을 베푸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김단은 속으로 의심하고 있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그런데 그 순간 서원공주가 갑자기 김단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그 손은 생각보다 따뜻했지만 김단의 심장은 차갑게 식어갔다.“그동안 어머니 곁을 지켜줘서 고맙소. 낭자가 아니었다면 어머니께서는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