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태하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당당하게 말했다. “엄마를 버린 그날부터 당신과 저는 아무 관계가 아니에요. 엄마가 저를 낳을 때 거의 죽을 뻔했다고요! 그때 강 대표님은 어디 계셨어요? 엄마 곁에서 끝까지 함께 버텨준 건 우리 아빠예요.”“이제 와서 제가 똑똑하고 귀엽다고 데려가겠다고요? 강 대표님, 세상 모든 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신이라도 된다고 생각해요?’ 평소에는 귀엽기만 한 어린 목소리가 지금은 단호하고 날카로운 질책으로 변해 있었다. 임혜자는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세상에. 작은 도련님이 무슨 말을...’ ‘도련님이 이대로 가만있으실 리가 없는데...’ 한편, 강상미는 멍하니 오빠를 올려다보았다. ‘와... 오빠 진짜 대단하다. 이렇게 저렇게 많은 말을 술술 할 수 있지?’ ‘내가 했으면 분명 버벅거리기나 했을 텐데...’ 강지한은 얼굴이 굳은 채 눈앞의 어린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정말 세 살짜리가 할 말인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아니야. 분명 심미연이 가르친 거겠지. 대체 나를 얼마나 미워하면 내 아들까지 이렇게 만들 수 있는 거야?’ ‘정말 냉혹한 여자군.’“도련님, 작은 도련님이 한 말은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아직 겨우 세 살짜리 아이잖아요.” 임혜자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지만 순간 강지한의 차갑게 번뜩이는 눈빛과 마주쳤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살기에 온몸이 굳어버린 그녀는 결국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강지한은 손을 뻗어 심태하의 옷깃을 움켜쥐고 이를 악물며 낮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이거 네 엄마가 가르쳐준 거냐?” 그의 눈빛이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 여자, 정말 가관이네.’그는 심미연을 찾아 제대로 따져볼 작정이었다. “아니에요. 엄마는 그런 말을 가르쳐준 적 없어요. 저는 인터넷에서 혼자 배웠어요.” 심태하는 컴퓨터를 잘 다루는 아이였다. 그는 종종 인터넷에서 ‘악덕 아버지가 아이를 빼앗는’ 장면을 봤고 그 대사를 몇 번이고 기억해
“내가 한 거면 어때? 그 여자는 진영 씨에게 약혼녀가 있는 걸 알면서도 뻔뻔하게 다가갔잖아. 우리 사이를 망쳐 놓은 건 신하린이야.”“그 여자, 죽어 마땅해.” 한석훈이 물러난 뒤 한씨 가문은 몰락했고 한유나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으며 그녀는 연구소에서 일자리를 잃었다. 그 이후로 한유나는 점점 더 신경질적이고 불안정해져 갔다. 이진영 앞에서는 예전 한씨 가문의 고상한 아가씨처럼 온순하고 점잖은 척하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그 우아함은 사라지고 본능적인 거칠음만 드러났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고 남은 건 비난과 차가운 시선뿐이었다. ‘다 잃었는데 우아함과 점잖음이 무슨 소용이야?’ 심미연은 차가운 표정으로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그걸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하린이가 건드린 게 아니라 오히려 이진영 씨가 하린이에게 매달린 걸 수도 있잖아. 넌 그냥 이진영 씨를 차지하지 못한 원망을 하린이에게 떠넘기고 있는 거야. 그게 하린이한테 공평하다고 생각해?” “그 여자가 진영 씨를 건드린 게 아니라면 왜 자꾸 만나고 다니는 거야? 그 여자가 없었다면 나는 이미 진영 씨와 부부였을 거야.”한유나는 이진영 얘기만 나오면 감정이 격해졌다. “나는 한씨 가문의 아가씨야. 학식도 있고 배경도 좋다고. 그런데 진영 씨는 그런 나와는 잠자리를 안 가지면서 이미 더럽혀진 신하린과는 계속 관계를 이어갔어. 내가 그 여자보다 못한 게 뭔데?”한유나는 모든 불행이 신하린 탓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겪은 고통이 신하린 때문에 생긴 일이라 여겼고 그로 인해 자신이 겪은 아픔만큼 신하린도 반드시 고통을 받아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건 너를 아내로 맞지 않는 이진영 씨한테나 물어봐야겠지.”심미연은 눈을 날카롭게 좁히며 차갑게 말했다. “왜 아무 죄 없는 하린이에게 그런 짓을 한 거야? 대체 왜 하린이를 건드린 거냐고!”그녀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그 어떤 말도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기세로 방안을 가득 채웠다. 한유나는 갑자기 웃
그녀는 지금 한씨 가문을 구할 수 있는 강력한 배경을 가진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다. 임지혜가 그런 남자를 소개해줄 수 있다고 했었다. 임지혜가 먼저 전화를 걸어 만남을 제안한 것은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녀는 가서 상황을 보고 괜찮다면 그 남자와 만나볼 생각이었다. 지금 한석훈과 그녀의 처지에서는 선택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한유나가 로얄하임 백화점에 도착하자 임지혜는 옷을 입어 보고 있었다. 명품 브랜드, 한 벌에 최소 수천만 원을 호가한다. 예전에 그녀도 이런 옷을 자주 샀었지만 지금은 한 벌을 사는 것조차 그녀에겐 큰 부담이 되었다. “유나야, 잠깐 앉아 있어. 두 벌 더 입어볼게.” 목소리의 주인은 키가 크고 매력적인 몸매를 가진 여자였다. 그 얼굴은 영화 속에서 걸어나온 국제적인 스타처럼 어디서 봐도 눈을 뗄 수 없는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한유나는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천천히 입어봐. 기다릴게.” 임지혜, 그녀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친구였다. 7년 전, 갑자기 경성에서 사라졌고 얼마 전 다시 돌아왔다. 그동안 그녀가 무엇을 했고 어디에 있었는지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었다. 그저 하나 분명한 건, 임지혜가 돈이 많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녀의 사회적 네트워크는 경성의 부유한 2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예전에는 학력과 배경이 있었기에 그런 돈 많고 방탕한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고 지냈다. 하지만 이제 한씨 가문이 몰락하면서 그녀는 그 세계에 발을 들이려 애썼다.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그들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어 했다. 한유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씁쓸함을 느꼈다. 그 간극이 너무나도 크게 다가왔다. 그래도 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야만 했다.혼자 있는 밤이면 모든 고통과 괴로움이 신하린 탓이라고 여겼다. 만약 신하린이 이진영에게 그렇게 끈질기게 집착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 상황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언제나 다
한유나는 급히 한 발 물러섰다. 그때, 차 문이 열리며 운전기사가 내려서 임지혜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임지혜 씨, 차에 탑승해 주세요.” 임지혜는 차 뒷좌석 문을 열고 한유나를 밀어 넣었다. “강 도련님과 먼저 인사해.” 그 후 임지혜는 조수석 문을 열고 자리에 앉았다. 한유나가 자리에 앉자 옆에 가면을 쓴 남자가 앉아 있는 걸 보았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고 무의식적으로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을 움켜잡았다. 그 남자가 너무 무서워서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 차가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 도련님, 안녕하세요. 이 분은 제 가장 친한 친구 한유나예요. 유나는 오랫동안 당신을 동경해 왔고 만나서 인사를 나누고 싶어 했어요.” 임지혜가 가면을 쓴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남자는 여전히 변함없이 차갑게 대답했다. “그렇군요.” 임지혜는 한유나에게 눈을 깜빡이며 신호를 보냈다. “유나야, 강 도련님이랑 얘기 좀 해봐.”한유나는 온몸이 굳어버린 채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는 임지혜가 자신에게 이런 남자를 소개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저 남자는 보기만 해도 그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나야, 빨리 말해. 연구소에서 있었던 일이라도 얘기해 봐.”임지혜가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며 한유나를 재촉했다. 한유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유나입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한씨 가문의 딸이고 이씨 가문의 미래 며느리죠.” 남자의 목소리는 마치 얼음 창고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차갑고 냉정했다. 그 말이 귀에 닿자 한유나는 온몸에 서늘한 기운이 퍼지는 것을 느꼈다. “저...”한유나는 입술을 깨물며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다. 4년 전, 그녀는 한씨 가문의 고상한 아가씨였다. 그때 그녀의 아버지는 경성에
남자는 지금 그 여자를 마음껏 괴롭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강지한, 왜 말이 없어? 말 좀 해봐.” 심미연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그녀가 최대한 품위를 지키려 애쓰는 것이 들렸다. “박유진과 언제 이혼할 건지, 언제 내 곁으로 돌아올 건지만 말해. 그때 너랑 아들 다시 만나게 해줄게.” 강지한의 목소리는 한층 더 가벼워지며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네 말대로라면 내가 이혼하지 않고 네 곁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아들을 영원히 못 볼 거라는 거야?” 심미연은 가슴이 뛰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만약 강지한이 눈앞에 있었다면 그녀는 그의 얼굴에 한 대 날렸을 것이다. 정말 죽어 마땅한 남자였다. “그래. 너는 어떻게 생각해?” 강지한은 담담하게 되물었다. “알았어.” 심미연은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강지한과 함께한 3년, 그녀는 강지한이 결정을 내리면 더 이상 논의의 여지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제는 한 발 물러서서 차분히 상황을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다. 강지한은 핸드폰을 들고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심미연은 예전에는 그에게 전화를 끊는 것을 두려워했지만 이제는 점점 대담해지고 있었다. 강지한은 여전히 지금의 심미연과 과거의 심미연을 비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계속해서 과거의 기억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심미연은 이미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강지한은 분명히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지만 그 고통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아이를 이용해 심미연을 다시 자신의 통제하에 두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심미연은 전화를 끊고 바로 컴퓨터를 켜 강지한의 핸드폰 위치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강지한은 서재에서 오랫동안 앉아 담배 두 갑을 피웠다. 상업계에서 냉혹한 수단을 써 온 그였지만 유독 한 여자를 상대할 때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새벽이 다가올 무렵, 심미연은 마침내 강지한의 핸드폰 위치를 추적했다. 컴퓨터를 가방에 넣고 옷을 갈아입은 후 심미연
심미연은 잠시 침묵하다가 차갑게 말했다. “승산이 100%라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자신이 유리한 상황이라 해도 완벽한 승리를 보장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만두겠습니다. 다른 변호사를 찾겠습니다.” 이진영의 목소리는 차갑고 무심했다. 심미연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결국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가 누구를 고용하든 상관없었다. 자신과 관련이 없다면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이진영은 그녀가 이렇게 쉽게 받아들일 줄 몰랐는지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심미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 너머로 들리는 신호음에 이진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심미연 씨가 이렇게 쉽게 동의하다니?’ 단 한 마디의 설득도 없었다. 만약 이다은의 이혼 사건에서 승소하면 그 변호사 비용만으로도 상당한 금액을 받을 수 있었다. 심미연이 이 사건을 놓치면 그만큼 많은 돈을 잃게 되는 셈이었다.핸드폰 벨소리가 울리며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며 급히 전화를 받았다. “지금 상황은 어때? 변호사는 찾았어?” “아니. 아직 찾고 있어.” “왜 심미연을 바꾼 거야?” “100% 승산을 확신하고 싶어서. 하나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 “이건 이혼 소송이야. 물건 사는 것도 아니고. 누가 감히 100% 승리를 보장할 수 있겠어?” 상대방은 거의 미친 듯이 그를 비난했다. “상관없어. 난 이기기만 하면 돼. 절대 질 수 없어.” “변호사 하나 소개해줄게.” “누구?” “예전에 경성에서 유명한 변호사였어. 한 번도 진 적이 없어.” “그 사람이 누구냐고? 빨리 말해.” 이진영은 점점 목소리가 높아지며 말을 끊었다. 상대방은 잠시 침묵을 지킨 뒤 무겁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진운혁.” 이진영은 그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 사람... 몇 년 전에 죽었잖아? 지금 뭐 무서운 이야기 하는 거야?” 진운혁은 예전에 경성에서 정말
화면에 여러 통의 미수신 전화가 뜬 가운데 그 중 임현의 번호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심미연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불길한 예감이 솟구치며 깊이 생각할 시간도 없이 그녀는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급하고 당황한 기색이 묻어났다. “심 변호사님...’ “임현 씨, 무슨 일이에요?” 심미연은 급하게 물었다. “심 변호사님, 마을 사람들이 저희를 가둬버렸어요. 아예 나갈 수가 없어요. 제발 와서 도와주세요.” 임현의 목소리는 마치 무거운 돌덩이가 심미연의 가슴을 짓누르는 것처럼 무겁게 다가왔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눈을 좁히며 긴장했다. “그들이 원하는 게 뭔데요? 알았다고 말하세요. 지금 당장 갈게요.” 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간신히 대답했다. 심미연은 전화를 끊고 곧바로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아들 일은 잠시 뒤로 미뤄두기로 했다. 우선 임현을 구하는 일이 급했다. 그녀는 짐을 챙기며 전화를 걸었다. “보스, 무슨 일이에요?” “사람 몇 명 모아서 나한테 와줘요. 싸움 잘하는 사람들로, 알겠죠?” “네. 걱정 마세요. 바로 준비해서 출발할게요.” 짐을 다 챙긴 심미연은 곧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때, 다른 한쪽에서는 비가 갓 내린 마을의 길에 진흙이 고여 빗방울이 은침처럼 땅을 파고들며 불규칙한 물웅덩이를 남기고 있었다. 흐릿한 하늘빛을 반사하는 웅덩이들이 곳곳에 퍼져 있었다. 임현과 동료들은 그 초라한 작은 집 안에 갇혀 있었다. 작은 창문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 있어 겨우 몇 줄기 희미한 빛이 비쳐 들어오며 안의 모습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공기는 눅눅하고 곰팡이 냄새가 진동했다. 비가 내린 후 특유의 습기와 냉기가 섞여 사람의 폐 속까지 파고들었고 그녀는 참을 수 없이 기침을 하고 싶어졌다. 밖에서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고 그 소리는 끊임없이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로 울려 퍼졌다. 전화를 끊은 후, 임현은 긴장한 몸이
심미연은 차 안에 앉아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외딴 마을로 가는 길을 어떻게 가장 빨리 수리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밖에서는 비가 장막처럼 쏟아지며 차창을 세차게 두드렸고 흐릿해진 시야 속에서 그녀는 앞으로의 여정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그때, 갑자기 급하고 약간은 당황스러운 두드리는 소리가 차 안의 고요함을 깨뜨렸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심미연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잠시 후, 박 기사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장님, 밖에... 사람 같아요...” 박 기사는 말을 하며 자꾸만 후방 거울을 힐끗거리며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산속에 늑대가 출몰한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지금 밖에 있는 것이 사람인지 늑대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히 말할 수 없는 불안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심미연은 박 기사의 말을 듣고 갑자기 고개를 들며 빗물로 가득 찬 창밖을 응시했다. 그 순간, 한 쌍의 호박빛 눈동자가 마치 밤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처럼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은 비가 내리는 장막을 뚫고 마주친 그녀와 깊은 시선을 교환했다. 그 눈은 깊고 신비로웠으며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듯한 빛을 발하며 끝없는 이야기와 비밀을 간직한 듯했다. 그는 조용히 심미연과 눈을 맞추었고 가까이 다가가지도 멀어지지도 않았다. 좁고 답답한 차 안은 숨이 막힐 듯한 침묵에 휩싸였다. 심미연은 한쪽 눈썹을 올리며 그 눈빛이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박 기사는 긴장한 채 침을 꿀꺽 삼키며 두 손으로 핸들을 꽉 잡고 언제든지 도망칠 준비가 된 듯했다.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다. 심미연은 시선을 돌려 손을 뻗어 차 문을 열었다. 빗방울이 얼굴을 스치며 시원한 기운을 전했고 이마에 흩어진 머리카락이 비에 젖었다. 그녀는 몸을 살짝 움직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타세요.” 그녀의 말투는 단호하고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 사람
“우린 서로 잘 알지도 않잖아요. 그러니까 박시훈 씨, 이런 농담은 삼가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좋은 소리는 안 나올 거예요.” 심미연의 말은 단호했고 표정에는 조금의 여지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불편하게 만든 사람에게 결코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박시훈은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화내지 마요. 농담 안 할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 살짝 겁이 났다. 정색한 심미연의 얼굴은 꽤 무서웠다. 강지한이랑 맞먹는 수준이었다.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심미연은 노골적으로 그를 내보내려는 기색을 멈추지 않았다. “저... 진짜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에요. 한 번 생각해보는 건 어때요?” 박시훈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연애도 해본 적 없고 야자 마음을 얻는 방법도 몰랐다. 그래서 더더욱 마음속 생각을 그대로 내뱉는 게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는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심미연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리고 곧장 소파에서 일어나 말했다. “이제 가세요.”그녀는 주저함 하나 없이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박시훈은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진심이었고 말 그대로 사실이였다. ‘난 능력도 있고 괜찮은 사람인데 서로 마음만 맞으면 잘될 수 있는 거 아닌가?’그렇게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사이 심미연은 이미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박시훈 씨, 조심히 가세요. 멀리는 안 갈게요.”그녀는 박시훈이 불쾌해하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가 무슨 감정을 느끼든 어떤 생각을 하든 그건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방금 전 그의 자기중심적인 말투는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으니까. 박시훈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이대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는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뭔가 씁쓸하고 아쉽고 괜히 찬물 끼얹힌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는 마음속으로
심미연은 그가 심태하까지 조사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순간적으로 본능처럼 눈앞의 남자를 다시 보게 됐다. 겉보기엔 멋대로 굴고 책임감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한량 같았지만 그의 눈빛만은 달랐다. 지나치게 날카롭고 마치 사람의 속까지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그건 결코 허투루 넘길 수 없는 눈이었다. ‘이 남자, 뭐지... 정말 이상한 사람인데.’겉모습만 보면 철없어 보이다가도 또 어떤 순간에는 의외로 능력 있어 보였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들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게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이해되지 않았던 건 그가 왜 굳이 자신을 찾아와 이런 말을 꺼내는가였따. ‘설마 진심으로 그냥... 내 정체가 궁금해서?’“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저 진짜 악의는 없어요.” 박시훈은 양손을 번쩍 들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하늘에 맹세할게요.”심미연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그래서 당신이 날 찾아온 목적이 뭐죠?”박시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진짜 이유를 말해도 돼요?” 그의 갈색 눈동자가 살짝 번쩍였고 그의 얼굴엔 순진해 보일 정도로 천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심미연은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돈 뜯어내려는 건가? 내가 그런 일에 쉽게 넘어갈 만큼 만만해 보였나.’“좋아합니다.”그가 느닷없이 말했다. “그 말 하려고 온 거예요. 좋아해도 될까요?” 심미연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박시훈의 얼굴엔 서서히 불안한 기색이 떠올랐다. 결국 그는 숨겨왔던 속마음을 한 번에 쏟아냈다. 망설일 시간 따윈 없었다. 그보다 먼저 마음을 전하지 않으면 강지한이 그녀를 데려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컸다. 심미연은 그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또박또박 물었다. “당신 지금 자기가 무슨 말 하고 있는지는 알아요?”그녀는 그가 제정신인지 의심스러웠다. 서너 번 얼굴을 마주친 게 전부였고 제대로 된 인사조차 나눈 적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나타
심미연은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전화를 받았다. “심, 심 대표님... 아까 어떤 남자분이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대표님을 찾으러 올라가셨어요.”프런트 직원의 목소리는 떨렸고 말도 더듬었다. “누구라고요?” 심미연은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장미를 들고 자신을 찾아올 만한 사람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확실히 저를 찾은 거 맞아요?” “네... 확실합니다. 제가 막으려고 했는데 그분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올라가셨어요...” 잘릴까 봐 겁이 난 프런트 직원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얼버무렸다. 그녀는 심미연이 이 거짓말을 영원히 눈치채지 않길 바랐다.심미연은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장미를 들고... 누굴까?’그때 사무실 문 밖에서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났다. 심미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조용히 말했다. “알겠어요. 일 보세요.”말을 마치기도 전에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젓고 지나갔다. ‘설마... 강지한? 다시 만날 일 없다고 말했는데 또 온 건가?’ 전화를 끊은 심미연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당신...?” 며칠 전, 하늘 하우스 앞에서 명함을 건넸던 그 남자였다.심미연은 그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전화 달라고 했었는데... 내가 깜빡했네. 근데 사무실까지 찾아올 정도면 꽤 급한 일이 있나?’ ‘자, 받아요. 이거 당신한테 주는 거예요.” 박시훈은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는 듯 장미꽃을 밀어넣으며 말했다. “할 말 있어서 왔어요.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심미연은 그가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할 말이 뭔데요?” “앉아서 얘기해요. 당신이 힘들면 안 되니까.” 박시훈은 너무 자연스럽게 그녀 옆을 지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깔끔하고 단정한 분위기의 공간. 묘하게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박시훈은
이진영은 핸드폰을 쥔 채 반쯤 감긴 눈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아무리 뒤져도 끝내 밝혀내지 못한 아버지의 비밀. ‘설마... 한석훈이 정말 뭔가 알고 있는 건가?’‘아니면 그냥 떠보는 소리일까?’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머릿속을 뒤엉켰다.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찾고 싶은 충동이 다시 치밀었지만 이진영은 고개를 돌려 이다은의 병실로 향했다. ...이노하이브 대표실. 강지한은 막 성무진에게서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문소영이 한 무리의 남자들에게 쫓기다 결국 폭행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현장은 심하게 어질러졌고 문이 잠겨 있어 그녀는 도망칠 틈조차 없었다. 결국 팔과 다리가 부러진 채 119에 실려 갔다. 강지한은 메시지를 닫고 입술을 천천히 매만졌다.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가벼운 경고’에 불과했다. 하지만 다음에도 제멋대로 날뛰면 그땐 진짜로 살아남지 못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막 서류를 집어 들려는 순간,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그가 전화를 받자 박시훈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한아, 큰일 났어!” 강지한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해.” “온지유가... 나왔어.” 박시훈은 말끝을 떨며 믿기지 않는 듯 말을 이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이 어떻게...?’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대체 누가, 무슨 수로 온지유를 꺼낸 거지?’ 강지한의 눈빛이 서서히 싸늘하게 식어갔다. “어떻게 된 거냐.” 그 말을 뱉는 순간, 심미연과 심태하가 본능처럼 떠올랐다. ‘온지유가 풀려났다고? 그럼 미연이랑 태하가 위험할 수도 있어.’‘도대체 어떤 놈이 감히 이런 짓을 벌인 거지?’ “나도 방금 들었어. 지금은 육현성 별장에 있다는 것 같아.” 박시훈은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알기에 곧장 강지한에게 알린 것이었다. “확실해?” 강지한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는 성무진을 시켜 교도소 내부를 철저히 관리하게 했었다. 온지유가 아무리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아이가 축복받지 못한 존재라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고 싶지 않았다. “안 돼.” 이진영은 단호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하더니 곧장 의자에 앉아 이다은의 창백한 손끝을 조심스레 감쌌다. 그리곤 한 톤 낮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육현성 그 자식은 아버지 자격 없어. 네가 그 인간 아이를 낳으면 평생 끌려다닐 거야. 정말 그걸 바라는 거야?” 이다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결국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육현성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를 낳는 순간, 이진영의 말처럼 그 인연은 평생 끊어낼 수 없었다. 반면 아이가 없다면 그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다은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곧 마음을 다잡은 듯 결심이 담긴 목소리가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알았어. 오빠, 지금 바로 수술 예약해줘.”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언젠가는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의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행복하게 살아가면 되는 거라고. “그래. 병실에 얌전히 있어. 어디 가지 말고. 알았지?” 이진영은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는 이미 진운혁과 연락을 마친 상태였다. 진운혁은 이다은이 재판에서 반드시 승소할 수 있도록 돕겠다 했고 육현성의 재산 절반은 가져올 수 있을 거라 자신 있게 말했다. 이진영은 믿고 있었다. 동생이 건강만 회복하고 이혼만 잘 마무리된다면 분명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육현성 같은 쓰레기는 다은이 앞에 다시는 나타나선 안 돼.’ “알겠어. 오빠, 이제 가봐.” 결정을 내린 이다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마음 한쪽이 가볍게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언젠가는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을 만날 테니까. 이진영은 병원 접수처로 향해 곧바로 수술 일정
“오빠, 나한테 이렇게 잘해줘서 정말 고마워.”온지유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눈을 반쯤 감은 채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달콤하면서도 애교가 섞여 있었다. 지금의 온지유에게 육현성은 유일한 의지처였다. 그를 잃는다면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육현성을 절대 놓쳐서는 안 됐다. ‘심미연, 기다려. 복수할 기회는 반드시 만들 거야.’“세상에 이렇게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은 오빠밖에 없어.”온지유는 그의 품에 몸을 기댄 채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유야, 그런데 만약 네가 날 배신한다면 그때는 나도 내가 어떤 짓을 할지 모르겠어.”육현성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경고했다. 그의 말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전하고 싶은 진심이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걸 수 있었다. 그 사랑은 너무 깊어서 그 자신도 놀랄 정도였다. 그래서 더더욱 만약 온지유가 그를 배신한다면 그는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았다. 그의 팔이 점점 더 세게 조여오는 걸 느낀 온지유는 잠시 두려움이 스쳤다. 그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강지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을 죽음보다 더 끔찍하게 대할 것이라는 생각에 몸이 떨렸다. 그 상상만으로도 차가운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다. “오빠, 걱정하지 마. 난 절대 오빠를 배신하지 않을 거야. 이번 생엔 오빠만 사랑할 거고 영원히 오빠 곁에 있을 거야.” 온지유는 속마음을 감추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은 여전히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앞으로 육현성 앞에선 더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조금이라도 의심을 품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날 거라는 생각에 몸이 떨렸다. “네가 날 사랑한다면 나도 너를 끝까지 사랑할 거야.” 그의 말은 무엇보다 진심이 담겨 있었다. “지유야, 이제 좀 쉬어. 나는 아래층 좀 보고 올게. 밥 먹을 때 부를게
보통이라면 그녀가 화를 내면 강지한은 한 발 물러섰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전혀 양보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핸드폰을 꺼내 성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끊기자마자 성무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문소영은 성무진을 보는 순간 얼굴이 창백해지며 공포에 휩싸였다. 이번엔 정말 끝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강지한에게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왜 이렇게까지 몰리게 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의 차갑고 무표정한 시선만이 머릿속에 반복되었다. 성무진은 그녀 앞에 서서 공손히 손짓하며 말했다. “큰 사모님, 모시겠습니다.”문소영은 강지한을 향해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눈빛을 보냈다. “강지한! 너 계속 이렇게 나를 몰아붙인다면 정말 당장 죽어버릴 거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책상 쪽으로 달려가 머리를 책상 모서리에 부딪히려 했다. 그러나 강지한은 그런 그녀의 행동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며 어두운 표정으로 단호하게 명령했다. “성 비서, 데려가.”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그는 문소영의 모습이 점점 더 불쾌하게 느껴졌다. 성무진은 빠르게 다가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실례하겠습니다. 큰 사모님.” 그 말과 함께 그는 차가운 손길로 문소영을 밖으로 끌고 나갔다. “놔! 당장 놔!” “손 떼! 지금 당장!” 문소영은 크게 외치며 저항했지만 성무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거칠게 차에 태웠다. 차에 태운 후 성무진은 팔을 놓고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문소영은 재빨리 차 문을 열려 손을 뻗었다. “큰 사모님, 죄송합니다.”성무진은 고개를 숙이며 손을 들어 그녀의 목덜미를 강하게 내리쳤다. 문소영은 그대로 기절했다. 성무진은 그녀를 차 안에 눕히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차 밖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역시 대표님을 화나게 하면 끝이 좋을 리가 없지.’‘어쩔 수 없군.’ 그 순간, 성무진은 갑자기 떠오른
도진혁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바로 대답했다. “물론이죠. 저는 진지해요.” 그렇지 않았다면 신하린 곁에 이렇게 오랜 시간 머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어제 하린이를 하늘 하우스로 데려갔어요. 한 번 들러보세요. 하린이 곁에 조금 있어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심미연은 서류봉투를 흘깃 바라본 뒤 덧붙였다. “이 서류는 제가 꼼꼼히 검토하고 나서 다시 연락드릴게요.”도진혁이 직접 합작 제안서를 들고 찾아온 이상 함부로 거절할 수는 없었다. 수익이 보장된 일이라면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 이상 놓쳐선 안 되는 법이었다. “네. 지금 바로 가보겠습니다.”도진혁은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사무실을 나섰다. 가벼운 발걸음과 함께 그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져갔다. 심미연은 그가 사라진 문 쪽을 한참 바라보다 방금 전 그의 말이 자꾸 떠올랐다. 왠지 모르게 마음 한쪽에서 조용한 불안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하린이 목에 남은 상처가 아직 그대로일 텐데...’‘진혁 씨가 그걸 보면... 혹시 이진영 씨에게 따지러 가는 건 아닐까?’강지한 사무실.성무진은 문소영을 데려다주고 서둘러 떠났다. 강지한의 얼굴엔 냉기가 서려 있었고 성무진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사무실 안에서 뭔가 큰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문소영은 익숙하다는 듯 안으로 들어섰고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본 뒤 느긋하게 쏘파에 앉았다. “비서한테 차 좀 가져오라 해. 괜찮은 차로.” 그녀는 비서부가 꽤 유능하단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웬만한 건 다 알아서 해줄 정도로. 하지만 강지한은 말없이 서랍을 열어 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와 그 봉투를 그녀의 무릎 위에 떨어뜨렸다. “직접 보시죠.”“뭘 보라는 거야?” 문소영은 그를 향해 냉정하게 시선을 던졌다. “보면 알아요.” 강지한은 담담하게 말하고는 맞은편 소파에 앉아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뭐가 들어있길래...?” 문소영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봉투를 들었다. 무
심미연은 박유진이 수년 동안 마음을 다해 사랑해온 여자였다. 그런 여자를 박유진이 쉽게 놓을 리 없었다. 조용히 그의 뒤를 따르던 비서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표님, 정말 모든 걸 걸고 계시는군요... 제발 심미연 씨가 그 진심을 외면하지 않기를...”한편, 심미연은 전화를 끊자마자 문 쪽을 향해 말했다. “들어오세요.”조심스레 열린 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도진혁이었다. 그는 마치 급히 돌아온 듯 피곤하고 바쁜 기색이 역력했다. “도 비서님...?” 심미연은 예상치 못한 사람을 보고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분명 휴가를 낸 상태였으니까. ‘그런데 왜 지금... 여기 있는 거지?’그의 뒤에서 따라 들어온 비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조용히 말했다. “심 대표님, 실례하겠습니다. 이분은 저희 도강홀딩스의 대표, 도진혁 대표님이십니다.”비서는 서류봉투를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말없이 한 걸음 물러섰다. “이 서류는 도강홀딩스와 은성 그룹이 합작할 프로젝트에 관한 제안서입니다. 먼저 검토 부탁드립니다.”심미연은 비서가 놓고 간 서류를 잠시 바라보다가 도진혁을 천천히 되돌아보며 눈썹을 살짝 올렸다. ‘도진혁 대표님...?’ ‘그렇다면 도진혁 씨가 휴가를 낸 이유는... 회사를 물려받기 위한 준비였던 건가?”그때 도진혁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최 비서, 잠깐 나가 있어. 심 대표님과 단둘이 얘기할 게 있어.” 도진혁은 정장을 완벽하게 차려입고 평소보다 더 단정하고 신경 쓴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말투와 행동은 여유롭고 예의 바르며 그에게서 흐르는 것은 전형적인 사회 엘리트의 품위였다. “네. 대표님.” 최세라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문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떠나기 전에 조심스럽게 심미연을 한 번 쳐다봤다. ‘이분이 대표님이 좋아하는 여자분인가... 정말 예쁘다. 대표님이 회사를 물려받은 이유가 이분 때문이라면 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