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하야, 엄마 여기 있어.” 그녀의 목소리는 사람들로 가득한 하원 인파 속에서 사라졌다. 심태하는 엄마를 발견하자 눈이 반짝이며 작은 발걸음으로 달려와 심미연의 품에 안겼다. 마치 세상 모든 것이 이 포옹 속에서 녹아내리는 듯했다. “엄마, 너무 보고 싶었어요.” 심미연은 허리를 굽혀 그를 안으며 따뜻하게 웃었다. “엄마도 우리 태하 너무 보고 싶었어.” “태하 어머니, 오늘 태하가 유치원에서 정말 잘했어요. 친구들도 도와주고 생활 선생님께 작은 책상도 정리해드렸답니다.” 선생님은 심미연 품에 안겨 있는 아이를 보며 칭찬의 눈빛을 보냈다. 이렇게 어린 아이가 지능도 뛰어나고 감정 조절도 잘하다니. 정말 3살 어린이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이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반의 다른 아이들이 아직 분유를 먹고 작은 울음에도 쉽게 따라 우는 경우가 많아 자주 힘겨운 상황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태하는 달랐다. 울지 않고 떼쓰지도 않았으며 작은 일도 차분하게 처리했다.평범한 장난감으로도 상상력을 발휘해 다양한 놀이를 해내는 모습을 보며 선생님들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10년 넘게 유치원에서 일한 선생님은 이런 기특한 3살 아이는 처음 봤다. 그동안 수많은 아이들을 봤지만 심태하처럼 차분하고 똑똑한 아이는 없었다. 심미연은 선생님의 칭찬을 듣고 잠시 놀랐다가 이내 아들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며 미소 지었다. “우리 태하는 정말 최고야.” 그녀는 심태하가 지능이 뛰어나 친구들 사이에서 잘 적응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지만 오히려 예상보다 더 착하고 말 잘 듣는 아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당연하죠. 내가 누구 아들인데.” 심태하는 심미연의 목을 끌어안으며 귀엽게 애교를 부렸다. 옆에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선생님은 은근히 부러워하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보기 좋은 따뜻한 장면이었다. 어쩐지 아이가 이렇게 잘 자란 이유가 모두 엄마 덕분인 것 같았다. 심미연은 웃으며 자신의 코로 아들
“먼저 약속해 주세요. 화내지 않겠다고요.” 심태하는 심미연에게 미리 주의를 주었다. 심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았어. 화 안 낼게.” 그렇지만 마음속에서 ‘이 녀석이 무슨 엉뚱한 짓이라도 했다면 내가 이 말로 태하에게 면죄부를 준 거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심태하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 마치 자신이 괜찮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듯 잠시 눈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마법처럼 책가방 깊은 곳에서 반짝이는 공주 드레스를 꺼냈다. 드레스의 치맛자락은 가볍게 휘날리며 햇빛을 받아 다양한 색깔로 반짝였다. 심미연은 그 드레스를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이거 엄마한테 주는 거야?” ‘이건 분명 여자아이에게 줄 선물 아닌가?’ 심태하는 급히 해명했다. “엄마, 이건 상미한테 줄 선물이야.” 그의 목소리에는 확고한 의지와 기대가 담겨 있었고 눈빛은 순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심미연은 그제야 예전에 심태하가 자신에게 말했던 일을 떠올리며 살며시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부드럽게 대답했다. “알았어. 바로 병원에 가자.”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심미연은 핸들을 꽉 쥐고 앞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수많은 생각들이 휘몰아쳤다. 심태하는 누구에게나 이렇게 신경 쓰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다소 차갑고 냉담한 성격을 가진 아이였다. 그런데 유독 강상미한테만 특별한 감정을 보였다. 그 이유도 없이 단순히 좋아한다는 감정이었다. 심태하는 엄마가 거절하지 않자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제 곧 강상미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떠 있었다. 병원에 도착한 심미연은 서둘러 심태하를 품에 안고 병원으로 들어갔다. 길게 뻗은 복도는 심하게 울리는 발걸음 소리와 때때로 들려오는 응급실 벨 소리로 더 짙어지며 숨이 막히는 듯했다. 의사로서 이곳에서 일한 지 2년, 심미연은 너무 많은 생과 사를 목격했다. 그래서 병원은 항상 불편했다.그때 문소영과 강지한의 모습이 정확히 그 지점에서 빛에
‘아니야. 그럴 리 없어.’ ‘혼자서 겁먹으면 안 돼.’ 문소영은 마음속의 혼란을 가라앉히고 심태하의 얼굴을 노려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강지한에게 말을 꺼냈다. “지한아, 상미가 몸 상태도 좋지 않은데 아무한테나 방해받을 순 없잖아.” 심미연은 그녀의 말 속에 숨겨진 의도를 금세 파악하고 강지한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도 이렇게 생각하는 거야?” 심미연은 자신이 선의로 행동한 것이 잘못된 것처럼 비난받는 기분이었다. “당연히 그렇지.” 문소영은 자랑스러운 듯이 말을 내뱉었다. 심미연은 더 이상 그녀와 싸울 생각이 없었고 그저 비웃듯 문소영의 창백한 얼굴을 한참 응시했다. “당신, 도대체 뭘 그렇게 걱정하는 거예요? 내가 아들과 함께 그 가짜의 모든 걸 빼앗을까 봐 두려운 거예요?” ‘상미가 억울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 ‘어쨌든 그 아이는 강지한의 딸이니까.’ “너 진짜 뻔뻔하다.” 문소영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치쳤다. ‘예전의 심미연은 그냥 당하기만 했던 사람 아닌가?’‘어떻게 이렇게 강해졌지?’강지한은 차가운 표정으로 얼굴을 굳히며 날카롭게 경고했다. “다시 한 마디 더 하시면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내가 그렇게 간절히 원해도 가질 수 없는 심미연을 이렇게 욕하다니.’‘어머니라고 해서 함부로 심미연을 욕할 수는 없어.’ 문소영은 강지한의 무자비한 경고에 순간 얼어붙어 입을 꾹 다물었다. 하나는 강지한의 성격을 너무 잘 알았기에 그를 진심으로 화나게 했다간 결코 가벼운 대가를 치르지 않을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지금의 심미연에게서 느껴지는 그 강력한 기세에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문소영이 물러서자 강지한은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끝이 심태하의 작은 얼굴에 닿을 듯했지만 그 순간 심미연은 민첩하고 단호하게 몸을 틀며 손을 피했다. 심미연의 눈빛 속에는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었다. 오직 차가운 결단력만이 가득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엄마, 예전에도 사람들이 오늘처럼 엄마한테 그랬어요?” 심태하는 심미연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애틋하게 물었다. 그는 엄마가 너무나 안쓰러웠다. 과거에 그 나쁜 아빠와 함께했을 때 엄마가 얼마나 많은 서러움을 겪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심미연은 순간 놀라 살짝 붉어진 눈으로 심태하의 얼굴을 바라보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아니야.” 사실 문소영이 그녀에게 차가운 태도를 보인 건 주로 가족 모임에서였고 평소엔 마주칠 기회조차 없었다. 문소영이 그녀를 괴롭히고 싶어도 기회가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강지한이었다. 강지한은 언제나 냉당했고 심미연은 그의 차가운 태도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시절의 자신은 정말 강했던 것 같다. 그렇게 힘든 나날들도 다 버텨냈으니까.“나중에 그 사람이 또 엄마한테 그러면 바로 경찰에 신고해요. 가만두지 말고 본때를 보여줘야죠. 엄마가 만만한 줄 알면 안 돼요.” 심태하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눈빛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 모습은 강지한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그 순간 심미연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태하가 이렇게 어린 나이에 강지한을 미워하고 있다니...’ ‘나랑 강지한 사이의 문제가 태하에게 너무 큰 상처를 준 걸까?’‘아직 어린 아이인데 이렇게 마음에 증오를 품고서 제대로 성장할 수 있을까?’ 심미연은 처음으로 자신이 잘못한 건 아닌지 깊이 반성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강지한과 진지하게 얘기할 기회를 만들어야 해.’ 비록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났지만 적어도 아이만큼은 사랑이 가득한 환경에서 자라도록 해야 한다. 그게 심태하를 위한 길이니까.“엄마, 걱정 마세요. 제가 빨리 자라서 엄마를 지켜줄게요. 누가 엄마를 괴롭히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심태하는 살짝 붉어진 심미연의 눈을 바라보며 속으로는 밥도 많이 먹고 고기고 많이 먹어 빨리 자라겠다고 다짐했다. 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말에 가슴이 아려
심미연은 심태하의 작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조용히 물었다. “태하야, 너는 상미 아빠를 싫어하면서 왜 상미는 좋아하는 거야?” 심태하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처음 봤을 때부터 지켜주고 싶었어요. 내가 좋아하는 장난감도 간식도 다 주고 싶고... 그냥 좋아요.”아직 세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는 마음속의 감정을 더 이상 말로 표현하지 못했지만 그 순수한 진심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심미연은 아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져 그저 대견하다는 듯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쩜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말을 할 수 있지?’그때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면서 심미연은 하려던 말을 꾹 삼켰다. 전화를 받자 부드럽고 상냥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미연 씨, 남편이 빠르게 회복해서 오늘 오후에 퇴원했어요. 저녁에 식사 대접하고 싶은데 시간 괜찮으세요?] 목소리의 주인은 며칠 전 심미연이 구해준 남자의 아내였다. 원래는 주말에 식사를 대접하려 했지만 일이 예상보다 빨리 진행된 모양이었다. [오늘 바쁘시면 다른 날로 조정해도 괜찮아요.] 여성이 덧붙였다. 심미연은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미소 지었다. [아니요. 오늘 괜찮아요. 장소만 알려주시면 돼요.] [네. 그럼 이만 끊을게요. 이따 뵐게요.] 전화를 끊고 심미연은 전에 조사했던 그 남자의 신분이 떠올랐다. 군부대 고위 간부로 젊은 나이에 이미 수많은 전공을 세운 인물. 이런 인연이라면 당연히 잘 관계를 맺어야 했다.“엄마, 오늘 약속 있어요? 아니면 제가 택시 타고 아빠 회사에 가서 기다릴까요?” 심태하는 배려 깊게 물었다. “엄마가 널 집에 데려다줄게. 요즘 아빠가 바빠서 시간 맞추기가 힘들어. 너도 아빠 사무실에 가면 심심할 거야.” “알겠어요.” 심미연은 아이에게 안전벨트를 채워주고 운전석에 올라 차를 몰고 집으로 향했다. 같은 시각 VIP 병실.강상미는 창백한 얼굴로 병상에 누워 있었다. 기운이 없어보이
문소영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그가 가진 차가운 얼굴에 질투가 일었다. “방금 임지혜 씨한테 전화했어. 지금 식당으로 가고 있대. 너도 지금 가는 게 어때?” 그녀의 의도는 명백했다. 강지한에게 새로운 여자를 소개하고 싶었던 것이다. 심서연은 이미 죽었고 돌아올 일은 없었다. 강상미는 엄마가 필요했다. 강지한이 차갑게 얼굴을 굳히자 문소영은 그가 거절할 것이라 확신한 듯 먼저 말을 꺼냈다. “너 전에 분명히 약속했잖아.” 그 말에 강상미가 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상미 새엄마 찾으러 가는 거예요? 저는 싫어요.” 문소영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 강상미를 더욱 강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강상미, 너는 어른들 일이 뭔지 모르면서 왜 끼어들어. 입 좀 다물어.” ‘이 아이는 그때 죽였어야 했어.’ ‘강지한에게 맡기지 말았어야 했다고.’ ‘따지고 보면 심서연이 제일 멍청해.’ ‘3년이나 강지한 옆에 있으면서 그 침대 한 번 못 차지하다니.’ ‘그렇게 쓸모없는 여자를 왜 썼을까.’ 강상미는 그 말에 겁을 먹고 눈물을 터뜨렸다. 강지한은 급히 강상미를 안아 올리고 부드럽게 달래며 말했다. “울지 마. 괜찮아. 아빠 여기 있어.” 강상미는 그의 목을 꽉 붙잡고 문소영의 시선을 피하며 눈물을 흘렸다. 강지한은 얼굴을 굳히고 차가운 눈빛으로 문소영을 쏘아보며 말했다. “다시는 여기에 발도 들이지 마세요.”강지한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비록 강상미가 친딸은 아니지만 그 아이는 그가 데려다 키운 딸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함께 지내면서 애정이 없을 리 없었다. 그런데 왜 문소영은 강상미에게 그렇게 차갑고 냉정한 태도를 보이는 것인지 그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문소영은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상미는 내 손녀야. 내가 상미를 보러 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왜 날 못 오게 하는 거야?” 그녀는 강지한이 강상미를 소중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유치원에서 더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고 혼자 외롭게 지내는 일도 없을 거야.’ “아빠, 빨리 오빠 엄마한테 전화해요.” 강상미는 작은 목소리로 강지한을 재촉했다. 아이는 이미 그들과 만날 생각에 들떠 있었다. 강지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내 심미연의 번호를 눌렀다. 그 번호는 성무진에게 부탁해서 구한 업무용 번호였다. 개인 번호는 아니었다. 전화가 울리던 중 아무도 받지 않았다. 강지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심미연이 전화를 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때 전화기 너머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상미가 태하랑 놀고 싶다고 해서 지금 네 집에 보내려고.] 그의 말투는 단호하고 거절할 여지가 없어 보였다. [저녁 약속 있어. 내 아들도 집에서 가정부가 돌보고 있고 네 딸은 몸이 안 좋다며? 집에서 쉬게 해. 무슨 일이 생기면 누가 책임져?] 심미연은 차분한 목소리로 거절했다. ‘강지한, 진짜 한심하다.’ ‘자기 딸이 아프면 자기가 돌봐야지. 왜 나에게 떠넘기려는 거야? 진짜 웃기지도 않네.’[약속 취소하고 집에서 내 딸 좀 돌봐.]강지한은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말했다. ‘여자는 집에서 남편과 자식을 돌봐야지. 왜 밖에서 나돌며 얼굴을 내밀고 다니는 건데?’ 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입술이 비틀리며 비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네 딸에겐 엄마가 있는데 왜 나한테 맡기려고 해? 나는 그저 남인데, 무슨 얼굴로 나한테 명령하는 거야?] ‘강지한,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알는 거지?’‘한마디 반박도 없으니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 줄 착각하는 모양이네.’[심미연, 너무 냉정하게 굴지 마.]강지한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며 분노가 서서히 감돌았다. ‘심미연이 내 딸을 돌보는 걸 거절한다고?’ ‘상미가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상처받을까...’“아빠, 아줌마 시간이 없으신 거예요? 그럼 저는 그냥 병실에 있을게요.” 강상미는 아주 똑똑했다. 강
강지한은 핸드폰을 손에 쥔 채 화면을 가볍게 스치며 전화를 끊었다. 그 순간 주변의 모든 소음과 혼란이 마치 사라진 듯했다. 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단단해지며 깊어졌고 품에 안은 어린 아이를 바라보며 입가에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가 스쳤다. “상미야, 아빠가 지금 오빠 엄마한테 데려다줄게. 괜찮지?” 방금 전 그는 문득 깨달았다. 심미연은 그를 거절할 수도 있고 그를 싫어할 수도 있지만 강상미에 대한 사랑만큼은 진심이었다. 강상미가 무엇을 요구하든 심미연은 결국 다 들어줄 것이다. 이제 그는 매일 딸을 핑계로 심미연을 찾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기분이 한층 나아졌다. 예전엔 심미연이 곁에 있을 때 그녀가 그저 귀찮고 피하고 싶기만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다면 아이 핑계로만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어이없으면서도 웃기게 느껴졌다. 강상미는 아빠의 말을 듣고 눈을 반짝이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 눈빛은 마치 밤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처럼 반짝였다. 작은 손은 아빠의 목을 꽉 감으며 얼굴에는 억누를 수 없는 기쁨이 가득했다. “정말요? 빨리 가요.”아이의 목소리엔 순수한 기쁨과 흥분이 묻어 있어 마치 세상 모든 것이 그 순간 빛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강지한은 딸을 더 꼭 안아주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빨리 가자.” 강상미는 아빠의 품에서 행복하게 웃으며 작은 손을 공중에 가볍게 치면서 그 순수하고 진심 어린 기쁨이 주변의 모든 공기를 감동시키는 듯 퍼져 나갔다. 바로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리며 ‘딩’하는 가벼운 소리가 울렸다. 마치 모험을 떠나려는 아빠와 딸의 여정을 위한 서곡처럼 들렸다. 강지한은 단호한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그의 걸음은 묵직하고 강인했으며 품에 안은 강상미는 더욱 꽉 껴안으며 아빠의 품에서 세상의 모든 안정을 느끼는 듯했다. 문소영은 급히 병실을 빠져나왔지만 눈앞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공기 속에는 여전히 강지한과 강상미 부녀의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아이가 축복받지 못한 존재라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고 싶지 않았다. “안 돼.” 이진영은 단호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하더니 곧장 의자에 앉아 이다은의 창백한 손끝을 조심스레 감쌌다. 그리곤 한 톤 낮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육현성 그 자식은 아버지 자격 없어. 네가 그 인간 아이를 낳으면 평생 끌려다닐 거야. 정말 그걸 바라는 거야?” 이다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결국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육현성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를 낳는 순간, 이진영의 말처럼 그 인연은 평생 끊어낼 수 없었다. 반면 아이가 없다면 그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다은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곧 마음을 다잡은 듯 결심이 담긴 목소리가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알았어. 오빠, 지금 바로 수술 예약해줘.”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언젠가는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의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행복하게 살아가면 되는 거라고. “그래. 병실에 얌전히 있어. 어디 가지 말고. 알았지?” 이진영은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는 이미 진운혁과 연락을 마친 상태였다. 진운혁은 이다은이 재판에서 반드시 승소할 수 있도록 돕겠다 했고 육현성의 재산 절반은 가져올 수 있을 거라 자신 있게 말했다. 이진영은 믿고 있었다. 동생이 건강만 회복하고 이혼만 잘 마무리된다면 분명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육현성 같은 쓰레기는 다은이 앞에 다시는 나타나선 안 돼.’ “알겠어. 오빠, 이제 가봐.” 결정을 내린 이다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마음 한쪽이 가볍게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언젠가는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을 만날 테니까. 이진영은 병원 접수처로 향해 곧바로 수술 일정
“오빠, 나한테 이렇게 잘해줘서 정말 고마워.”온지유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눈을 반쯤 감은 채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달콤하면서도 애교가 섞여 있었다. 지금의 온지유에게 육현성은 유일한 의지처였다. 그를 잃는다면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육현성을 절대 놓쳐서는 안 됐다. ‘심미연, 기다려. 복수할 기회는 반드시 만들 거야.’“세상에 이렇게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은 오빠밖에 없어.”온지유는 그의 품에 몸을 기댄 채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유야, 그런데 만약 네가 날 배신한다면 그때는 나도 내가 어떤 짓을 할지 모르겠어.”육현성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경고했다. 그의 말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전하고 싶은 진심이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걸 수 있었다. 그 사랑은 너무 깊어서 그 자신도 놀랄 정도였다. 그래서 더더욱 만약 온지유가 그를 배신한다면 그는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았다. 그의 팔이 점점 더 세게 조여오는 걸 느낀 온지유는 잠시 두려움이 스쳤다. 그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강지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을 죽음보다 더 끔찍하게 대할 것이라는 생각에 몸이 떨렸다. 그 상상만으로도 차가운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다. “오빠, 걱정하지 마. 난 절대 오빠를 배신하지 않을 거야. 이번 생엔 오빠만 사랑할 거고 영원히 오빠 곁에 있을 거야.” 온지유는 속마음을 감추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은 여전히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앞으로 육현성 앞에선 더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조금이라도 의심을 품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날 거라는 생각에 몸이 떨렸다. “네가 날 사랑한다면 나도 너를 끝까지 사랑할 거야.” 그의 말은 무엇보다 진심이 담겨 있었다. “지유야, 이제 좀 쉬어. 나는 아래층 좀 보고 올게. 밥 먹을 때 부를게
보통이라면 그녀가 화를 내면 강지한은 한 발 물러섰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전혀 양보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핸드폰을 꺼내 성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끊기자마자 성무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문소영은 성무진을 보는 순간 얼굴이 창백해지며 공포에 휩싸였다. 이번엔 정말 끝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강지한에게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왜 이렇게까지 몰리게 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의 차갑고 무표정한 시선만이 머릿속에 반복되었다. 성무진은 그녀 앞에 서서 공손히 손짓하며 말했다. “큰 사모님, 모시겠습니다.”문소영은 강지한을 향해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눈빛을 보냈다. “강지한! 너 계속 이렇게 나를 몰아붙인다면 정말 당장 죽어버릴 거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책상 쪽으로 달려가 머리를 책상 모서리에 부딪히려 했다. 그러나 강지한은 그런 그녀의 행동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며 어두운 표정으로 단호하게 명령했다. “성 비서, 데려가.”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그는 문소영의 모습이 점점 더 불쾌하게 느껴졌다. 성무진은 빠르게 다가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실례하겠습니다. 큰 사모님.” 그 말과 함께 그는 차가운 손길로 문소영을 밖으로 끌고 나갔다. “놔! 당장 놔!” “손 떼! 지금 당장!” 문소영은 크게 외치며 저항했지만 성무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거칠게 차에 태웠다. 차에 태운 후 성무진은 팔을 놓고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문소영은 재빨리 차 문을 열려 손을 뻗었다. “큰 사모님, 죄송합니다.”성무진은 고개를 숙이며 손을 들어 그녀의 목덜미를 강하게 내리쳤다. 문소영은 그대로 기절했다. 성무진은 그녀를 차 안에 눕히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차 밖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역시 대표님을 화나게 하면 끝이 좋을 리가 없지.’‘어쩔 수 없군.’ 그 순간, 성무진은 갑자기 떠오른
도진혁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바로 대답했다. “물론이죠. 저는 진지해요.” 그렇지 않았다면 신하린 곁에 이렇게 오랜 시간 머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어제 하린이를 하늘 하우스로 데려갔어요. 한 번 들러보세요. 하린이 곁에 조금 있어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심미연은 서류봉투를 흘깃 바라본 뒤 덧붙였다. “이 서류는 제가 꼼꼼히 검토하고 나서 다시 연락드릴게요.”도진혁이 직접 합작 제안서를 들고 찾아온 이상 함부로 거절할 수는 없었다. 수익이 보장된 일이라면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 이상 놓쳐선 안 되는 법이었다. “네. 지금 바로 가보겠습니다.”도진혁은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사무실을 나섰다. 가벼운 발걸음과 함께 그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져갔다. 심미연은 그가 사라진 문 쪽을 한참 바라보다 방금 전 그의 말이 자꾸 떠올랐다. 왠지 모르게 마음 한쪽에서 조용한 불안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하린이 목에 남은 상처가 아직 그대로일 텐데...’‘진혁 씨가 그걸 보면... 혹시 이진영 씨에게 따지러 가는 건 아닐까?’강지한 사무실.성무진은 문소영을 데려다주고 서둘러 떠났다. 강지한의 얼굴엔 냉기가 서려 있었고 성무진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사무실 안에서 뭔가 큰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문소영은 익숙하다는 듯 안으로 들어섰고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본 뒤 느긋하게 쏘파에 앉았다. “비서한테 차 좀 가져오라 해. 괜찮은 차로.” 그녀는 비서부가 꽤 유능하단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웬만한 건 다 알아서 해줄 정도로. 하지만 강지한은 말없이 서랍을 열어 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와 그 봉투를 그녀의 무릎 위에 떨어뜨렸다. “직접 보시죠.”“뭘 보라는 거야?” 문소영은 그를 향해 냉정하게 시선을 던졌다. “보면 알아요.” 강지한은 담담하게 말하고는 맞은편 소파에 앉아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뭐가 들어있길래...?” 문소영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봉투를 들었다. 무
심미연은 박유진이 수년 동안 마음을 다해 사랑해온 여자였다. 그런 여자를 박유진이 쉽게 놓을 리 없었다. 조용히 그의 뒤를 따르던 비서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표님, 정말 모든 걸 걸고 계시는군요... 제발 심미연 씨가 그 진심을 외면하지 않기를...”한편, 심미연은 전화를 끊자마자 문 쪽을 향해 말했다. “들어오세요.”조심스레 열린 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도진혁이었다. 그는 마치 급히 돌아온 듯 피곤하고 바쁜 기색이 역력했다. “도 비서님...?” 심미연은 예상치 못한 사람을 보고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분명 휴가를 낸 상태였으니까. ‘그런데 왜 지금... 여기 있는 거지?’그의 뒤에서 따라 들어온 비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조용히 말했다. “심 대표님, 실례하겠습니다. 이분은 저희 도강홀딩스의 대표, 도진혁 대표님이십니다.”비서는 서류봉투를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말없이 한 걸음 물러섰다. “이 서류는 도강홀딩스와 은성 그룹이 합작할 프로젝트에 관한 제안서입니다. 먼저 검토 부탁드립니다.”심미연은 비서가 놓고 간 서류를 잠시 바라보다가 도진혁을 천천히 되돌아보며 눈썹을 살짝 올렸다. ‘도진혁 대표님...?’ ‘그렇다면 도진혁 씨가 휴가를 낸 이유는... 회사를 물려받기 위한 준비였던 건가?”그때 도진혁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최 비서, 잠깐 나가 있어. 심 대표님과 단둘이 얘기할 게 있어.” 도진혁은 정장을 완벽하게 차려입고 평소보다 더 단정하고 신경 쓴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말투와 행동은 여유롭고 예의 바르며 그에게서 흐르는 것은 전형적인 사회 엘리트의 품위였다. “네. 대표님.” 최세라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문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떠나기 전에 조심스럽게 심미연을 한 번 쳐다봤다. ‘이분이 대표님이 좋아하는 여자분인가... 정말 예쁘다. 대표님이 회사를 물려받은 이유가 이분 때문이라면 이해
전화를 받자마자 박유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미연아,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오늘 실검에 너 이름이 올라서...”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짧은 한마디에도 목소리에는 슬픔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기다림 끝에 다가온 것은 예상했던 이별이었다. ‘결국 우리는 엇갈릴 운명이었던 걸까?’언젠가 마주할 결말이라 생각했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자 감정은 휘몰아쳤다.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기사를 본 뒤 그는 두 시간 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마음을 추스르고 겨우 전화를 걸었던 이유는 사실 아직 남아 있는 미련 때문이었다. 끝이라면 끝이라도 적어도 그 이유는 알고 싶었다. 심미연은 자신이 지시한 기사 내용을 떠올리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 표정에는 아무런 흔들림도 없었다. “실검에 오른 그 기사, 내가 일부러 퍼뜨린 거야.”그녀는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온지유가 나왔어. 태하가 위험해질까 봐... 그 여자를 끌어내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했어. 어쩔 수 없었어.” 온지유는 어둠 속에 숨어 있고 그녀는 그 빛 속에 서 있다. 상대는 그녀를 바라보지만 그녀는 상대의 모습을 볼 수 없다. 그 불안한 감각이 점점 가슴 속 깊이 스며들며 심태하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두려워졌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내던질 수밖에 없었다. 온지유가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결국 모습을 드러내길 바랐다. 심미연은 그 여자가 강지한을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온지유가 자신과 강지한이 다시 만났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반드시 참지 못하고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때가 바로 온지유를 붙잡을 기회가 될 것이다. 박유진은 그녀의 설명을 들은 후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그의 목소리에 힘이 조금 실렸다. “그랬구나... 다행이다. 사람 몇 명 더 붙일게. 미연아, 정말 조심해야 해. 그 여자는... 완전히 선을 넘은 사람이야.”
심미연은 신하린을 꼭 안아주고 싶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아침 식사를 이어갔다. 아침을 다 먹고 난 후 심미연은 위층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었다. 심태하도 유치원복으로 갈아입고 가방을 챙겼다. 한편, 백선영은 휠체어를 밀며 신하린을 거실로 데려왔다. “신하린 씨, 여기서 편하게 쉬세요.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네. 고마워요. 가서 일 보세요.” 백선영은 식탁 정리를 하러 주방으로 갔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어쩌다 다리를 잃은 거야...’ 그때 심미연이 옷을 갈아입고 내려왔다. 심태하도 유치원복을 입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세 살짜리 아이지만 늘 옷을 깔끔하게 입고 다녔다. 엄마를 보자마자 심태하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달려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엄마, 우리 이제 가요.” 심미연은 그런 아들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 열정적인 반응이었다. “너 유치원 가기 싫다고 하지 않았어? 근데 오늘은 왜 이렇게 가고 싶어 하는 거야?” 뭔가 이상했다. 심태하는 순간적으로 등을 꼿꼿이 펴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더 많은 걸 배워야 엄마를 잘 지켜줄 수 있지.” ‘이 녀석, 대체 어디서 이런 말을 배운 거야?’ “내가 강해지면, 아무도 우리한테 함부로 못 할 거예요.” 진지하게 말하는 아들을 보자 심미연의 눈가가 붉어졌다. ‘이 꼬맹이, 대체 어디서 이런 말을 배워 온 거야... 눈물 날 것 같네.’ 신하린은 그런 심미연을 보며 속으로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따뜻한 아들이 있다니. 진짜 부럽다...’ 심미연은 생각을 멈추고 아들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섰다. 신발을 신고 나가기 전 신하린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린아, 나 간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유치원으로 가는 길에 심미연은 심태하에게 당부했다. “낯선 사람하고 말하지 마. 그리고 모
“입 닥쳐.” 강지한이 짜증을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들이 돌아오길 제일 바랐던 사람이 바로 자신인데 그런 소리를 들으니 열이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럼 한 가지만 더 묻자.” 박시훈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전처랑 완전히 끝난 거 맞지?” ‘그렇다면 이제 자기한테도 기회가 있는 거 아닌가?’ “너, 한 마디만 더 해봐.” 강지한의 얼굴이 분노로 인해 새파래졌다. 설령 심미연이 자신과 끝난다 해도 박시훈 같은 놈을 허락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알겠어. 그럼 내가 직접 물어보러 가지 뭐.” 박시훈은 피식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강지한은 핸드폰을 쥔 채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심미연, 박유진 하나로도 모자라서 또 다른 남자까지 꼬드기고 있는 건가?’ ‘정말 남자를 끌어들이는 재주 하나는 타고났군.’ 심미연의 저택.아침 식사 도중 심미연은 재채기를 했다. “엄마, 여기.” 심미연이 재채기하자마자 심태하가 재빨리 휴지를 뽑아 건넸다. 그의 작은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엄마, 감기 걸린 거야?” 엄마가 아프면 힘들어하니까 심태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냐. 감기 안 걸렸어. 걱정 안 해도 돼.” 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에요.” 심태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표정을 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신하린은 괜히 가슴이 찡했다. ‘이런 기특한 아들을 키우는 기분은 대체 어떨까?’ ‘나도 아들 하나 낳고 싶어지네.’심미연은 사용한 휴지를 휴지통에 버리고 아들의 작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엄마는 어른이니까 혼자서도 잘할 수 있어. 태하는 엄마 걱정 안 해도 돼. 알겠지?” 다른 집 아이들은 이 나이면 그저 먹고 놀기에 바쁠 텐데 심태하는 신경 써야 할 게 너무 많았다. 그게 안쓰러워서 더더욱 마음이 아팠다. 그때 심태하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빠가 그랬어요. 남자는 여자를 챙겨줘야 하는 거라고.”
“다 말했어? 다 했으면 이제 가.” 심미연은 강지한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강지한이 찾아온 목적이야 뻔했다. 하지만 그녀가 두 번이나 그의 말에 넘어간 결과가 뭔가? 아들이 끌려갔고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 이제 더 이상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은 없었다. 그가 아무리 미안해해도 그가 아무리 후회해도 그녀에게는 더 이상 상관없는 일이었다. 강상미가 아무리 불쌍하다고 해도 결국 남의 집의 아이였다. “그럼 난 가볼게.”강지한은 심미연이 최소한 한 번쯤은 자신의 말을 들어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냉정했다. 그녀가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걸 보니 애초에 갈 생각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강지한은 순간적으로 착잡한 감정을 느꼈다. 눈앞에 어린 딸의 얼굴이 떠오르며 가슴이 아려왔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자신이 초래한 일이었다. 그는 수없이 그 모자를 상처 입혔고 이젠 그녀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심미연이 문을 닫고 들어가자 그는 무심코 문틈을 바라봤다. 잠시 스치듯 보인 것은 심태하의 밝게 웃는 얼굴이었다. 순간, 가슴이 답답했다. 그 아이가 자기와 함께 있을 때는 한 번도 그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 그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엔 오직 차가운 증오만 담겨 있었다. 조용히 문을 바라보다가 강지한은 무거운 걸음을 돌렸다. 차에 올라탄 순간, 전화가 울렸다. 화면을 확인해보니 성무진의 전화였다. “대표님, 임지혜 씨가 들어올 때 영상 찾았습니다.” “지금 당장 회사로 갈게. 사무실에서 기다려.” 그는 단숨에 차를 돌려 회사를 향해 달렸다. 도착하자마자 곧장 사무실로 향했고 들어가자마자 성무진이 대형 스크린에 영상을 띄웠다. 화면 속에서 문소영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잠시 후, 집사로 보이는 사람이 나와 문을 열어줬다. 그리고 그 순간, 어둠 속에서 한 여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조심스럽게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