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연은 항상 박유진 앞에서만 화를 냈다. 박유진이 달래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녀는 점점 더 그와 함께 있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 같았다.“다음엔 절대 안 그럴게!”박유진은 손을 들어 맹세했고 그 진지한 표정에 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아빠, 엄마, 빨리 검사나 받으러 가요. 또 사람들이 몰려들겠어요!”심태하는 박유진의 귀에 입술을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의 말을 듣고 심미연은 주변 사람들이 이미 그들을 구경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빨리 가자!”“와... 선남선녀 가족이네. 연예인인가?”“이렇게 달달하게 지내는 거 너무 보기 좋다...”“아들도 너무 잘생겼어! 나도 저렇게 잘생긴 아들을 낳고 싶어...”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박유진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심미연를 바라보며 말했다.“미연아, 너와 함께 있는 하루하루가 정말 행복한 것 같아.”‘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심미연은 얼굴이 빨개지더니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장난치지 마!”‘지금 같은 상황에서 왜 저러는지...’“엄마, 아빠가 고백하는 거 안 들려요?”심태하는 예쁜 큰 눈을 반짝이며 심미연을 쳐다봤다.‘세 살짜리 아이도 이해하는데 엄마는 왜 아직도 모르는 거지?’박유진은 빨개진 심미연의 볼과 부드러운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기를 째려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문득 이 3년 동안 매일 밤 꾸었던 꿈이 떠올랐다.꿈속에서 두 사람의 입술이 닿았다. 심미연은 팔을 그의 목에 감은 채, 그의 허벅지에 올라타 있었는데 그들의 몸은 꼭 붙어 있었다.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박유진의 이름을 불렀다.“유진 오빠...”매번 꿈에서 깨어나면 그는 멍하니 침대에 앉아 그녀가 꿈속에서 했던 말들을 떠올리곤 했다. 그 꿈을 생각하니 박유진은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오빠, 빨리 들어가자. 예약까지 했다면서 지각하면 안 되지...”그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심미연은 그를 살짝 당기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순간, 정신을 차린 박유진은 어색
“바로 앞에 있잖아요. 저기 아이를 안고 있는 남자와 손을 잡고 있는 여자가 바로 심미연을 닮았다고 하는 사람이에요! 행복해 보이지 않나요?”“빨리 가자!”한 여자가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데 그녀의 일행이 그녀를 데리고 떠났다.“방금 질문했던 남자 말이야. 좀 섬뜩해 보이지 않았어? 아무리 봐도 심미연에게 복수하러 온 거 같은데... 너 너무 자세하게 말해준 거 아니야? 심미연을 위험에 빠뜨린 거면 어떡해?”“진짜? 나 제대로 못 봤어.”“빨리 가자, 아무 말도 하지 말고...”질문을 건넸던 남자는 고개를 들어 심미연의 뒷모습을 봤다. 그의 입꼬리에 미세하게 미소가 번졌다.‘심미연, 아직 살아있네. 저 여자를 이용해서 강지한을 무너뜨려야겠어. 그럼 이노 하이브를 내 걸로 만드는 것도 시간문제지...’심미연은 왠지 온몸에 한기가 도는 걸 느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박유진의 옆으로 조금 다가갔다.그녀의 불안한 기색을 눈치챈 그는 고개를 돌려 심미연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심미연은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그냥 이상하게 한기가 돌길래...”박유진은 이마를 찡그리며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하지만 다시 자세히 보면 아무것도 없었다.‘착각인 건가? 아니면 정말 누군가가 거기에 서 있었던 걸까? 진짜 사람이라면 왜 숨고 있었을까? 도대체 누구일까?’수많은 생각이 박유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오빠, 왜 그래?”심미연은 그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고 불안하게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별거 아니야.”박유진은 시선을 돌렸다. 그는 심미연에게 말할 생각이 없었다.“방금 어떤 아저씨가 엄마에 대해서 물어봤어요. 손으로 엄마 뒷모습을 가리키면서요.”갑자기 들려오는 귀여운 목소리에 박유진은 미간을 좁혔다.그렇다면 방금 전에 그가 느낀 것도 착각이 아니라는 의미였다.심미연은 박유진을 올려다보며 물었다.“방금 뭘 본 거야?”그녀는 방원호에게 조사를 시켜야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여자 친구가 2천만 원짜리 수표를 들고 찾아온 것이었다. 그 돈으로 둘 사이의 감정을 청산하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돈 많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싶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녀는 가난한 생활을 계속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진운혁은 그 돈을 원하지 않았지만 진씨 가문 사람들은 그를 구하기 위해 몰래 돈을 받았다. 그렇게 진운혁은 수술을 받게 되었다.그렇게 진운혁의 상태는 조금씩 나아졌고 그는 자신의 노력으로 경인대 법학과에 합격하게 되었다. 졸업하고 나서도 그는 꾸준한 노력으로 유명한 변호사로 자리를 잡았다. 결혼도 했지만 아이는 없었다.심미연이 진운혁의 고향까지 찾아가서 들은 얘기는 이게 전부였다. 그동안 그녀는 그가 왜 아이를 갖지 않으려 했는지, 그가 어릴 때 만났던 여자 친구는 어디서 돈을 구한 건지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그녀는 또 그 여자의 이름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하지만 다들 그 여자의 정확한 이름은 모르는 것이었다. 다들 그녀를 연이라고 불렀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연이는 아주 예쁘장하게 생겼는데 부모님은 그녀가 어릴 때 이미 돌아가셨고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고 한다. 이젠 할머니도 이미 세상을 떠났고 고향에는 남은 가족도 없다고 했다.그렇게 심미연은 계속해서 조사할 수 없었다.“미연아, 무슨 생각해?”박유진은 그녀가 계속 멍하니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사부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어.”심미연은 생각을 정리하며 박유진을 바라보았다.“만약 오빠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면 오빠는 결혼할 거야?”박유진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만약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결혼하는 걸 원한다면 나는 다른 여자와도 결혼할 수 있어.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 일로 슬퍼하지 않길 바라거든.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어. 그게 바로 사랑 아니겠어?”“그 여자가 오빠를 선택하지 않더라도 미워하지 않을 거야?”“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그
“비밀이라서 말해줄 수 없어.”박유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차피 곧 알게 될 거니까.”그러자 심미연이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이상한 짓 하지 마. 날 놀라게 하면 하면 안 돼!”“걱정 마.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니까.”박유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약속했다.심미연이 그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자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미연아, 혹시 지금 날 심문하는 거야?”“다 왔어요!”그때, 심태하가 두 사람의 대화를 끊었다.‘엄마랑 아빠는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느라 정작 나는 신경도 쓰지 않네. 나 설마... 친아들이 아닌 건가? 어디서 주워 온 아이인 건가?’그제야 심미연은 박유진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어린이 건강검진과라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오빠가 데리고 들어가서 검사받아. 나 밖에서 좀 앉아 있을게.”박유진은 그녀의 피곤한 얼굴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그래, 푹 쉬어.”그 말을 끝으로 그는 심태하를 안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심미연은 의자에 앉자마자 길게 숨을 내쉬며 머리를 비우려 했다.모든 검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심미연은 의자에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태하야, 너 혼자 걸을 수 있겠어?”그는 자기 품에 안긴 아들에게 물었다.심태하는 작고 통통한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당연하죠. 걸을 수 있어요.”그 말을 듣고 박유진은 허리를 숙여 아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그럼 아빠 옷깃 꼭 잡고 따라와. 알겠지? 절대 길 잃으면 안 돼.”심태하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아빠, 나 세 살짜리 아기 아니거든요? 엄마랑 아빠가 없어도 절대 길을 잃지 않아요!”그 말에 박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알겠어.”순간, 그는 심태하가 보통 아이와는 다르다는 걸 또 한 번 깨달았다. 그는 쉽게 남들에게 속지 않았다. 그래서 심태하가 스스로 원하지 않는 이상 그를 데려가는 건 불가능했다.“아빠, 얼른 가서 엄마를 안아요!”심태하는 조그맣게 속삭이며 그를 재촉했
“좀 더 자도 돼. 이번엔 절대 몰래 안 할게.”박유진은 심미연이 온종일 일 때문에 바삐 보내고 또 때로는 한밤중까지 사건 자료를 정리하는 걸 알기에 안쓰러웠다.그녀가 몇 년간 직접 법정에 서진 않았지만 중요한 사건마다 직접 나서서 증거를 수집했고 마지막 변론까지도 모든 걸 챙겨줬다.그 덕분에 임현은 몇 년 사이에 명실상부한 스타 변호사로 되었다. 전부 심미연이 도와준 덕분이었다.그녀는 임현을 데리고 승소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커리어도 쌓았다. 그래서 인지 최근 몇 년 동안 수많은 남자가 그녀 곁을 맴돌았다.“오빠, 요즘 왜 이렇게 나한테 찰싹 붙어 있어? 태하보다 더 심하네...”“그야 미연이가 너무 멋있는 사람이니까. 네 주변에도 능력 좋은 사람들이 많잖아. 내가 이렇게 붙어 있지 않으면 네가 혹시라도 다른 사람한테 갈까 봐 그래.”박유진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지만 속으로는 늘 불안했다.심미연이 그만큼 대단한 사람이었기에 그는 언제든지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오빠는 대체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 심미연을 바라보면 박유진은 그녀가 여전히 어린 소녀인 것 같았다. 아들이 벌써 세 살이나 되었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앳된 소녀 같아 보였다.박유진은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지었다.‘어떻게 생각 안 할 수 있겠어..’그들은 벌써 3년을 넘는 시간 동안 함께했지만 스킨십은 여전히 손을 잡고 가벼운 키스를 하는 수준에서 멈춰 있었다. 심미연이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박유진은 그녀를 데리고 심리 상담도 받으러 가고 치료도 받으러 갔었다. 약도 먹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그는 그녀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고 억지로 강요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 때까지 말이다.전에 진성에 있을 때부터 박유진은 심미연의 곁을 지켰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천천히 기다릴 수 있었다. 하
“오빠, 나 보러 왔구나!”병상에 누워 있던 강상미는 심태하를 보자 기쁜 듯이 벌떡 일어나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심태하는 심서연의 손을 뿌리치고 병상 앞으로 걸어갔다.짧은 다리의 세 살배기 꼬마는 두 손으로 병상을 잡고 몇 번이나 발을 동동 구르며 올라가려 했지만 결국에는 실패하자 약간 낙담한 듯했다.“됐어, 그냥 이렇게 말하자!”심태하가 병상에 누워 있던 강상미를 향해 이렇게 말하자 강상미가 눈을 깜빡이며 곁에 있던 강지한을 바라보며 말했다.“아빠, 오빠를 올려줘.”심태하를 본 강지한 충격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기에 강상미의 말도 듣지 못했다.옆에 있는 심서연은 화가 나면서도 두려웠다. 화장실 문 앞에서 끌고 온 아이가 강상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왜 깨닫지 못했을까?이 세상에서 강상미와 똑같이 생긴 아이는 강상미의 오빠뿐이다!그런데 이 아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은 심미연도 돌아왔다는 뜻일까?만약 심미연이 돌아왔다면 그녀가 강씨 가문에서 쫓겨나는 것은 시간문제가 아닌가?여기까지 생각한 심서연은 순간 몸살이 난 듯했다.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똑똑한 강지한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순간 심서연은 머릿속에 수많은 가능성을 생각했다.강상미는 두 사람이 멍하니 있는 것을 보고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아빠, 내 말 안 들려?! 무슨 생각하는데!”강상미의 높은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강지한은 딸의 얼굴을 바라보며 쉰 목소리로 물었다.“상미야, 왜 그래?”남자아이와 상미가 똑같이 생겼다. 설마 두 아이가 쌍둥이일까?이 아이가 집에 가서 부모님께 말하면 아이의 부모가 찾으러 오지 않을까?그러면 상미는 그의 곁을 떠나야 하는 것이 아닌가?강상미를 떠나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강지한은 너무 괴로워 가슴이 아팠다.“아빠, 빨리 오빠를 침대 위로 올려 달라니까! 뭐 하는 거야? 내 말도 안 듣고!”강지한의 귀여움을 받으며 자란 강상미인지라 강지한을 향한 말투가 조금 건방졌다.심서연은 강상미의 말투에 혹시라도 강지한이 화
그녀는 강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고 강상미의 엄마가 되기 위해 강지한 부녀에게 필사적으로 아부했다.3년 동안 실수 없이 잘 위장했지만 심태하의 한 마디에 추악한 모습이 드러났다.이때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잡자 살을 에는 듯한 통증이 전해졌다.잠시 멍해졌던 그녀는 남자의 차가운 눈빛과 마주친 순간 깜짝 놀라 속으로 ‘큰일 났다’라고 외쳤다.방금 이 자식을 때리려 할 때 분명 흉악한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강지한이 이걸 똑똑히 보고 있었던 걸까?큰일 났다! 어떻게든 수습해야 한다!손으로 허벅지를 세게 꼬집으니 아파서 바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로 가득 찬 눈으로 강지한을 바라보는 심서연은 눈물이 속눈썹에 매달려 있어 아주 애처로워 보였다.“지한 씨, 상미가 걱정돼서 그랬어요. 다른 뜻은 없어요. 이 손 놓아줄래요?”목소리를 낮추어 말하는 그녀의 말투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사납고 거친 사람이 강씨 가문에 들어가기 위해 자신을 나약한 백합꽃처럼 둔갑을 했으니 그야말로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그제야 손을 놓은 강지한은 차가운 눈빛으로 엄숙하게 말했다.“오늘부터 상미 가까이에 가지 마요! 그리고 당장 나가요!”심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강상미에게 접근하지 못한다면 강지한과 어울릴 기회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겠는가!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다!여기까지 생각한 심서연은 진짜로 슬퍼서 눈물을 흘리며 울기 시작했다.“지한 씨, 난 상미 엄마잖아요. 상미 곁에 가지 못하면 정말 슬플 거예요!”겉으로는 이렇게 말했지만 이 녀석 때문에 현모양처 이미지를 망친 것을 생각하면 너무 화가 나 기회가 생기면 반드시 복수하리라 다짐했다.강지한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명의를 찾았으니 상미도 곧 수술을 받을 거예요. 전문 간병인을 불러 돌보게 할 테니까 오지 않아도 돼요!”심서연이 말을 하려 하자 강지한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정말로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고 싶다면 위층에 있는 아버지나 돌봐요.”그녀를 꿰뚫어 보는 듯한 강지한의 눈빛
딸의 말을 들은 강지한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아무나 네 엄마가 될 수는 없어! 상미는 아빠만 있으면 돼!”심태하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아니면 우리 엄마 수양딸이 되는 것은 어때? 그러면 내 여동생이 되는 거니까 앞으로 내가 놀아줄게!”강지한이 심태하의 얼굴을 바라봤다.예전에 강상미가 자신을 닮았다는 것을 느꼈을 때 친구가 말하길 아이는 키우는 사람을 닮는다고 했다. 그때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 개의치 않았다.밖에서 데려온 아이라 자신과는 혈연관계가 없겠지만 계속 키웠기에 자신을 닮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마치 심미연이 떠난 후 흐리멍덩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며 진실을 찾으려 하지 않았을 때처럼 말이다.진실을 알게 되면 진짜로 절망에 빠져나오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이 순간 갑자기 깨달았다. 자신이 찾으려 하지 않았던 진실 속에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마치... 상미의 출생의 비밀처럼! 심미연의 죽음도 마찬가지이다.눈앞에 있는 남자아이의 부모는 누구이며 강상미와 자신은 어떤 관계일까?이런 의문점들을 연결해보면 언젠가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바로 이때 노크 소리가 들리자 강지한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들어오세요!”문이 열리자 익숙한 방원호의 얼굴에 심태하는 서둘러 강상미에게 손을 흔들었다.“여동생, 나 간다!”말을 마친 심태하는 방원호에게 달려갔다.다리가 짧은 녀석이지만 달리기는 매우 빨랐다.강지한이 방원호를 바라보며 물었다.“그쪽이 아이의 부모인가요?”방원호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제가 아이의 부모입니다.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여기 어른이 다른 아이로 착각해 데려온 거예요. 사과해야 할 사람은 저입니다. 죄송합니다.”강지한의 기분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았다. 조금 전과 지금 이 순간, 마음이 너무나도 요동쳤기 때문이다.아이의 부모가 상상한 것과는 달랐지만 아이가 상미가 똑같이 생긴 것에 대해서는 박시훈에게 부탁해 잘 조사해봐야 할 일이다.방원호는 허리를 굽혀 심태하를
“지한 씨가 날 사랑하는 거 너 예전부터 알고 있었잖아? 그땐 잘만 참더니 지금은 왜 못 참아?” 온지유는 심미연의 말에 단번에 반응했다. 두 사람이 강지한의 말을 오해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늘도 내 편이야. 이건 기회야.’ 오늘 이 자리에서 심미연을 완전히 무너뜨려야 했다. ‘지한 씨랑 재혼? 웃기고 있네.’ 온지유의 도발에 심미연은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강지한이 온지유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뼛속까지 아끼고 감쌌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 기억은 어제 일처럼 눈앞에 그려졌다. “예전엔 내가 눈이 멀었지. 하지만 지금은 눈이 멀쩡해. 그러니까 이제는 참을 이유도 없어.” 심미연은 담담히 웃으며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손끝에 머릿결이 살짝 감겼고 그 모습은 어딘가 치명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참아줄 때 당장 꺼져.” 예전엔 강지한을 사랑했기에 온갖 수모를 참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와 아무런 관계도 아닌 남이었고 더 이상 스스로를 억누를 이유가 없었다. 심미연은 최소한의 예의는 지켰다. 하지만 온지유가 계속 도발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든 누구도 그녀를 탓할 순 없었다. 박시훈은 그런 심미연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가 사랑한 여자는 역시 달랐다. 머리카락 한 올 넘기는 그 동작조차도 치명적으로 보였다. 예전엔 사랑밖에 모르는 사람들을 비웃었던 그였지만 지금의 자신은 그보다 훨씬 심각했다. 문제는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상태하는 것. ‘이제는 미연 씨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하지...?’ 박시훈의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졌다. 온지유는 심미연의 여유로운 태도에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몇 년 만에 마주한 심미연, 분위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예전 같았다면 강지한 이름만 꺼내도 감정이 흔들렸을 텐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오늘의 목적이 실패로 끝날 수도 있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심
심미연은 그제야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봤다. 한눈에 봐도 나오기 전에 꽤나 공을 들여 꾸미고 온 티가 났다. 하지만 얼굴 위엔 파운데이션이 지나치게 두텁게 발라져 있었다. 마치 밀가루를 덕지덕지 얹은 듯 자연스러움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지한 씨가 내가 안에서 고생하는 거 못 본다고... 날 꺼내줬어.” 온지유는 등을 곧게 펴고 얼굴 가득 자부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심미연, 지한 씨랑 재혼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 그 말을 들은 박시훈은 머릿속이 멍해졌다. ‘지금 뭐라고 한 거야?’‘강지한이 직접 저 여자를 꺼냈다고?’ 그는 불과 얼마 전, 온지유가 출고했다는 사실을 강지한에게 직접 보고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결국 바보는 자신이었던 것 같았다. 심미연의 눈동자가 조용히 온지유의 얼굴에 닿았다. 그녀의 입가에 떠오른 건 비웃음처럼 느껴지는 섬세한 곡선. “그래?” 낮고 담담한 목소리. 마치 스스로에게 확인하듯 속을 들키지 않는 말투였다. 온지유가 풀려났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심미연은 문득 의심했다. ‘혹시... 강지한이 뒤에서 손을 쓴 건 아닐까?’ 이제 이렇게 사실로 마주하니 심장이 조용히 찌릿하고 아려왔다. 그녀는 과거, 온지유를 감옥에 보내기 위해 모든 걸 걸었다. 그 여자가 평생 거기서 썩기를 바랐다. 하지만 겨우 4년. 너무도 빠른 재등장이었다. ‘강지한... 온지유한테 진심이긴 진심이었나 보네.’심미연의 눈빛에 눌린 온지유는 순간 몸이 움찔했다. 왠지 모르게 불안한 기운이 덮쳐왔고 두 손을 꽉 움켜쥔 채 허리를 더 곧게 세웠다. “그럼.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든가.” 그녀의 말은 당당했지만 박시훈이 보내는 미묘한 시선이 계속해서 거슬렸다. ‘혹시... 이 남자, 뭐라도 눈치 챈 건 아니겠지?’‘아냐. 아닐 거야. 괜한 걱정 하지 말자.’하지만 박시훈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그는 몰래 강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실 여부를 직접 확인
‘왜? 심미연을 보호하려고?’박시훈은 주저 없이 그녀에게 다가섰다. 바짝 다가온 그는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알고 싶다면 알려줄게요. 미연 씨를 짝사랑하고 있어요. 고백했다가 차였고요.”심미연에게 거절당한 건 그에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했기에 오히려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다. 숨기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온지유의 표정은 단숨에 일그러졌다. “그럴 리 없어요. 당신 지한 씨 친구라면서요? 심미연이 지한 씨한테 몇 번이나 안겼는지도 모르는 거예요?”그녀의 목소리는 날카롭게 갈라졌고 시선엔 뚜렷한 분노가 일렁였다. ‘심미연이 뭐라고... 도대체 왜 다들 심미연만 좋아하는데?’어디서든 누구 앞에서든 심미연이 있는 자리는 늘 그녀가 시선의 중심이 되었다.마치 그게 너무도 당연한 일인 양. 온지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지한이랑 미연 씨는 이미 이혼했어요.”박시훈은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미연 씨를 좋아하는 게 뭐가 문제예요?”심미연에게 거절당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 순간, 박시훈은 가슴 깊은 곳이 조용히, 그러나 깊게 미어오는 걸 느꼈다. 그는 말을 잇지 못한 채 시선을 잠시 내리깔았다. 온지유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직감했다. 어딘가 모르게 등줄기로 서늘한 기운이 흘렀다. ‘심미연 같은 중고품이 이렇게 인기 많다고?’‘아니야... 뭔가 잘못된 거야. 말도 안 돼.’“딩.”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심미연이 걸어 나왔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청아했고 단아했다. 말없이 걸어 나오는 짧은 그 순간마저 도도하게 빛나는 존재감으로 공간을 압도했다. 그건 단순한 외모가 아니었다. 그녀의 내면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절제된 기품, 고요하지만 단단한 아우라. 심미연이라는 사람. 그 존재 자체가 아름다움이었다.박시훈은 본능적으로 숨을 죽였다. 자신의 숨소리조차 그녀에게 방해가 될까 두려운 듯 조심스
강지한의 목소리는 다소 불쾌하게 들리는 듯했다. “무슨 일이야?” 어조가 단호하고 차가웠다. 듣자마자 기분이 썩 좋지 않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박시훈은 더는 망설일 여유도 없이 다급히 말했다. “온지유가 지금 은성 빌딩 로비로 들어갔어. 혹시라도 둘이 마주치면 싸움이라도 날까 봐... 너 빨리 와봐.” 숨도 제대로 못 고르고 내뱉은 말이었다. 급하게 말하다 목이 막힌 박시훈은 헛기침을 한 번 했다. “너 먼저 막고 있어. 나 바로 갈게.” 강지한의 목소리엔 드물게 초조한 기색이 스쳤다. 박시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세월이 이렇게 흘렀는데도 강지한은 온지유한테 여전히 똑같네. 참 미련한 놈이지.’ 하지만 그가 온지유를 막으라고 했으니 일단 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온지유가 정말로 위층까지 올라가서 둘이 마주칠 수도 있었다. 그건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박시훈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급히 그녀에게 달려갔다. 지금 당장 막아야 했다. 안 그러면 강지한에게 또 한 소리 들을 게 뻔했다. 온지유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마침 그녀와 눈이 마주친 건 박시훈이었다. “저한테 하신 말씀이세요? 절 아세요?” 온지유는 낯선 남자의 시선이 불편했다. 그를 전혀 본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자신을 아는 듯한 태도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강지한이랑 아는 사이면 당신도 알죠.”박시훈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는 온지유를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딘지 얄밉고 교활한 구석이 느껴졌다. ‘강지한이 눈이 정말 많이 멀었지. 저런 여잘 좋다고...’“지한 씨 친구라고요? 근데 전 왜 처음 보죠?” 온지유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강지한과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고 그의 주변 인물들도 대부분 익숙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처음이었다. ‘도대체 누구지?’ “지금 알면 됐죠. 그리고 지한이가 방금 전화했어요. 당신한테
“우린 서로 잘 알지도 않잖아요. 그러니까 박시훈 씨, 이런 농담은 삼가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좋은 소리는 안 나올 거예요.” 심미연의 말은 단호했고 표정에는 조금의 여지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불편하게 만든 사람에게 결코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박시훈은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화내지 마요. 농담 안 할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 살짝 겁이 났다. 정색한 심미연의 얼굴은 꽤 무서웠다. 강지한이랑 맞먹는 수준이었다.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심미연은 노골적으로 그를 내보내려는 기색을 멈추지 않았다. “저... 진짜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에요. 한 번 생각해보는 건 어때요?” 박시훈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연애도 해본 적 없고 야자 마음을 얻는 방법도 몰랐다. 그래서 더더욱 마음속 생각을 그대로 내뱉는 게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는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심미연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리고 곧장 소파에서 일어나 말했다. “이제 가세요.”그녀는 주저함 하나 없이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박시훈은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진심이었고 말 그대로 사실이였다. ‘난 능력도 있고 괜찮은 사람인데 서로 마음만 맞으면 잘될 수 있는 거 아닌가?’그렇게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사이 심미연은 이미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박시훈 씨, 조심히 가세요. 멀리는 안 갈게요.”그녀는 박시훈이 불쾌해하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가 무슨 감정을 느끼든 어떤 생각을 하든 그건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방금 전 그의 자기중심적인 말투는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으니까. 박시훈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이대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는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뭔가 씁쓸하고 아쉽고 괜히 찬물 끼얹힌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는 마음속으로
심미연은 그가 심태하까지 조사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순간적으로 본능처럼 눈앞의 남자를 다시 보게 됐다. 겉보기엔 멋대로 굴고 책임감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한량 같았지만 그의 눈빛만은 달랐다. 지나치게 날카롭고 마치 사람의 속까지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그건 결코 허투루 넘길 수 없는 눈이었다. ‘이 남자, 뭐지... 정말 이상한 사람인데.’겉모습만 보면 철없어 보이다가도 또 어떤 순간에는 의외로 능력 있어 보였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들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게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이해되지 않았던 건 그가 왜 굳이 자신을 찾아와 이런 말을 꺼내는가였따. ‘설마 진심으로 그냥... 내 정체가 궁금해서?’“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저 진짜 악의는 없어요.” 박시훈은 양손을 번쩍 들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하늘에 맹세할게요.”심미연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그래서 당신이 날 찾아온 목적이 뭐죠?”박시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진짜 이유를 말해도 돼요?” 그의 갈색 눈동자가 살짝 번쩍였고 그의 얼굴엔 순진해 보일 정도로 천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심미연은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돈 뜯어내려는 건가? 내가 그런 일에 쉽게 넘어갈 만큼 만만해 보였나.’“좋아합니다.”그가 느닷없이 말했다. “그 말 하려고 온 거예요. 좋아해도 될까요?” 심미연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박시훈의 얼굴엔 서서히 불안한 기색이 떠올랐다. 결국 그는 숨겨왔던 속마음을 한 번에 쏟아냈다. 망설일 시간 따윈 없었다. 그보다 먼저 마음을 전하지 않으면 강지한이 그녀를 데려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컸다. 심미연은 그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또박또박 물었다. “당신 지금 자기가 무슨 말 하고 있는지는 알아요?”그녀는 그가 제정신인지 의심스러웠다. 서너 번 얼굴을 마주친 게 전부였고 제대로 된 인사조차 나눈 적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나타
심미연은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전화를 받았다. “심, 심 대표님... 아까 어떤 남자분이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대표님을 찾으러 올라가셨어요.”프런트 직원의 목소리는 떨렸고 말도 더듬었다. “누구라고요?” 심미연은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장미를 들고 자신을 찾아올 만한 사람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확실히 저를 찾은 거 맞아요?” “네... 확실합니다. 제가 막으려고 했는데 그분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올라가셨어요...” 잘릴까 봐 겁이 난 프런트 직원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얼버무렸다. 그녀는 심미연이 이 거짓말을 영원히 눈치채지 않길 바랐다.심미연은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장미를 들고... 누굴까?’그때 사무실 문 밖에서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났다. 심미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조용히 말했다. “알겠어요. 일 보세요.”말을 마치기도 전에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젓고 지나갔다. ‘설마... 강지한? 다시 만날 일 없다고 말했는데 또 온 건가?’ 전화를 끊은 심미연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당신...?” 며칠 전, 하늘 하우스 앞에서 명함을 건넸던 그 남자였다.심미연은 그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전화 달라고 했었는데... 내가 깜빡했네. 근데 사무실까지 찾아올 정도면 꽤 급한 일이 있나?’ ‘자, 받아요. 이거 당신한테 주는 거예요.” 박시훈은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는 듯 장미꽃을 밀어넣으며 말했다. “할 말 있어서 왔어요.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심미연은 그가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할 말이 뭔데요?” “앉아서 얘기해요. 당신이 힘들면 안 되니까.” 박시훈은 너무 자연스럽게 그녀 옆을 지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깔끔하고 단정한 분위기의 공간. 묘하게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박시훈은
이진영은 핸드폰을 쥔 채 반쯤 감긴 눈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아무리 뒤져도 끝내 밝혀내지 못한 아버지의 비밀. ‘설마... 한석훈이 정말 뭔가 알고 있는 건가?’‘아니면 그냥 떠보는 소리일까?’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머릿속을 뒤엉켰다.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찾고 싶은 충동이 다시 치밀었지만 이진영은 고개를 돌려 이다은의 병실로 향했다. ...이노하이브 대표실. 강지한은 막 성무진에게서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문소영이 한 무리의 남자들에게 쫓기다 결국 폭행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현장은 심하게 어질러졌고 문이 잠겨 있어 그녀는 도망칠 틈조차 없었다. 결국 팔과 다리가 부러진 채 119에 실려 갔다. 강지한은 메시지를 닫고 입술을 천천히 매만졌다.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가벼운 경고’에 불과했다. 하지만 다음에도 제멋대로 날뛰면 그땐 진짜로 살아남지 못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막 서류를 집어 들려는 순간,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그가 전화를 받자 박시훈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한아, 큰일 났어!” 강지한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해.” “온지유가... 나왔어.” 박시훈은 말끝을 떨며 믿기지 않는 듯 말을 이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이 어떻게...?’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대체 누가, 무슨 수로 온지유를 꺼낸 거지?’ 강지한의 눈빛이 서서히 싸늘하게 식어갔다. “어떻게 된 거냐.” 그 말을 뱉는 순간, 심미연과 심태하가 본능처럼 떠올랐다. ‘온지유가 풀려났다고? 그럼 미연이랑 태하가 위험할 수도 있어.’‘도대체 어떤 놈이 감히 이런 짓을 벌인 거지?’ “나도 방금 들었어. 지금은 육현성 별장에 있다는 것 같아.” 박시훈은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알기에 곧장 강지한에게 알린 것이었다. “확실해?” 강지한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는 성무진을 시켜 교도소 내부를 철저히 관리하게 했었다. 온지유가 아무리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아이가 축복받지 못한 존재라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고 싶지 않았다. “안 돼.” 이진영은 단호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하더니 곧장 의자에 앉아 이다은의 창백한 손끝을 조심스레 감쌌다. 그리곤 한 톤 낮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육현성 그 자식은 아버지 자격 없어. 네가 그 인간 아이를 낳으면 평생 끌려다닐 거야. 정말 그걸 바라는 거야?” 이다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결국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육현성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를 낳는 순간, 이진영의 말처럼 그 인연은 평생 끊어낼 수 없었다. 반면 아이가 없다면 그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다은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곧 마음을 다잡은 듯 결심이 담긴 목소리가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알았어. 오빠, 지금 바로 수술 예약해줘.”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언젠가는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의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행복하게 살아가면 되는 거라고. “그래. 병실에 얌전히 있어. 어디 가지 말고. 알았지?” 이진영은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는 이미 진운혁과 연락을 마친 상태였다. 진운혁은 이다은이 재판에서 반드시 승소할 수 있도록 돕겠다 했고 육현성의 재산 절반은 가져올 수 있을 거라 자신 있게 말했다. 이진영은 믿고 있었다. 동생이 건강만 회복하고 이혼만 잘 마무리된다면 분명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육현성 같은 쓰레기는 다은이 앞에 다시는 나타나선 안 돼.’ “알겠어. 오빠, 이제 가봐.” 결정을 내린 이다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마음 한쪽이 가볍게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언젠가는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을 만날 테니까. 이진영은 병원 접수처로 향해 곧바로 수술 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