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자 모든 사람이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이혜정, 온세은 그리고 최하준이 그러했다.다들 송유주가 이 파티에 올 자격이 없다는 둥, 보기 딱하다는 둥, 심지어 내쫓겠다고 말했지만 사실 이 파티의 실제 주인은 영가람이었다.영가람이 송유주를 원한다면 그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송유주는 이런 장소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춤도 즐기지 않았지만 저 세 사람을 골탕 먹이기 위해 사람들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으며 영가람과 함께 걸었다.영가람은 젠틀하게 손을 잡고 짧게 손등에 키스했다.“유주 씨, 제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송유주는 영가람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제가 실수로 발을 밟을지도 몰라요.”“그럼 너무 세게 밟지는 말아주세요.”송유주는 영가람이 왼쪽 다리를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던 기억이 떠올라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방금 상황은 잊어주세요.”“최대한 노력해 볼게요.”두 사람은 호흡을 맞춰 춤을 췄고 다른 사람들도 짝을 찾아 함께 춤을 췄다. 이혜정과 최하준이 파트너로 되었으며 점점 송유정과 영가람이 있는 쪽으로 붙어왔다.“가람아, 오늘 내 생일인데 나랑 같이 출래?”이혜정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영가람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내가 이 큰 집을 빌려주고 파티도 하게 해줬는데 춤까지 같이 춰야 해?”“그냥 춤만 추는 거잖아. 내 체면을 봐서라도...”이혜정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내가 왜 네 체면을 봐줘야 하는 거지?”“그럼, 왜 유주랑은 춤을 추는 건데? 유주가 대체 뭐라고!”“유주 씨는 내가 초대한 소중한 손님인데 어떻게 비길 수가 있겠어?”이혜정은 아예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고 최하준마저 버려둔 채로 씩씩거리며 자리를 떠났다.최하준은 두 사람을 보며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가람아, 내가 유주랑 춤춰도 될까?”영가람은 송유주에게 물었다.“유주 씨 생각은 어떠세요?”그러자 송유주는 냉소를 터뜨렸다.“제가 감히요?”“그러니까요. 무려 최씨 가문 둘째 도련님이신데 말이에요.”
서해연은 미소를 지었다.“네. 도련님께서 유주 씨가 원하는 대로 해드리라고 했어요.”이튿날, 이혜정이 초대한 손님들은 하나둘 섬을 떠나기 시작했다.그날 오후, 이혜정은 다른 사람들과 바닷가 파라솔 아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송유주가 방에서 나오자 송유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송유주는 이혜정이 이젠 작별 인사를 하는 줄 알고 걸어갔는데 알고 보니 본인에게 남자 친구를 소개해 주려는 것이었다.“유주야, 여긴 내 동생 이재정. 대학 다닐 때 만난 적 있지?”송유주는 이재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이재정이 자신을 노골적으로 훑는 시선에 기분이 불쾌해졌다.“유주야, 우리 재정이가 오랫동안 유주 너 좋아하고 있었대. 그런데 하준이랑 사귀는 걸 보며 마음을 꾹꾹 누르다가 이젠 헤어졌으니 대시하려는 것 같아.”온세은의 말에 송유주는 헛웃음이 나갔다. 다들 미치지 않고서 송유주에게 남자 친구를 소개해 줄 리가 없었다.“누나는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요. 아직도 너무 예뻐요.”이재정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송유주의 곁으로 다가와 자리로 이끌려고 했다.송유주는 빠르게 손길에서 벗어나며 말했다.“내 몸에 손대지 마.”이재정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누나는 다 좋은데 우리 사귀면 성격부터 고쳐야겠어요.”“허, 꿈 깨.”그리고 몸을 돌려서 자리를 떠나려는데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매달 1000만원씩 줄게요. 그 정도면 충분하죠?”송유주는 인상을 팍 찌푸렸으며 제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모든 사람을 훑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최하준을 향해 물었다.“하준 씨, 저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난 이해가 하나도 가지 않는데 하준 씨는 이해가 돼요?”최하준이 얼굴을 굳힌 채로 말했다.“일부러 가람이한테 접근한 이유가 바로 그거 아니야?”“무슨 이유인데요?”“너 모르는 척 연기하지 마. 너 그냥 돈 많은 사람 애인하며 편하게 살고 싶은 거잖아. 가람이는 취향이라는 게 있으니 너 따위를 마음에 들어 할 리는 없지
“해연 씨, 미쳤어요?”이혜정은 서해연을 향해 소리 질렀다.“지금 두 눈 똑바로 뜨고 봐요. 감히 해연 씨 같은 도우미가 우리한테 밉보여서 될 것 같아요?”“그쪽이 누구인지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아요. 그런데 이렇게 무리 지어 한 사람 괴롭히는 건 용납 못해요!”서해연은 빗자루를 휘휘 저으며 경계를 했다.이혜정은 화가 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제가 당장 가람이한테 전화해서 그쪽 자르라고 할 거예요!”“얼마든지 그러세요! 도련님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지금 뭐라고!”온세은은 머리를 뒤로 쓸어내리며 여전히 선심 쓴다는 말투로 말했다.“그래. 좋은 마음으로 그러는 건데 싫다면 어쩔 수 없지.”“어쩔 수 없다고요?”송유주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이번 일 절대 그렇게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그리고 송유주는 바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네 사람이 저를 성희롱하고 있어 신고하려고 합니다.”송유주가 정말 경찰에 신고를 할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온세은 무리는 깜짝 놀랐다.“유주야, 너 미쳤어?”이혜정이 큰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당황한 온세은도 최하준을 향해 말했다.“하준아, 빨리 말려봐. 경찰 출동하면 안돼!”최하준도 송유주가 이렇게 나올 거라 예상하지 못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정말 일 크게 만들 생각이야? 다시 전화 걸어 출동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송유주는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해연 씨가 나서지 않았다면 내가 무슨 일을 겪었을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아요! 내가 일을 크게 만든 게 아니라 여기 있는 사람들이 일을 벌인 거라 생각 안 해요?”“내가 그렇게 될 때까지 가만히 내버려뒀겠어?”최하준은 시선도 마주하지 못하며 말했다.“하준 씨, 지금 이 사태에 그딴 걸 말이라고 해요? 저 사람들보다 하준 씨가 가장 역겨워요!”최하준은 고개를 번쩍 쳐들어 송유주를 바라봤고 송유주의 얼굴에서 원망과 분노를 읽었다.“유주야, 너 정말 웃긴다. 우린 그냥 친구 소개해 주려고 한 거
“나도 미안해. 앞으로 다시 그러지 않을게. 이번 한 번만 봐줘.”이혜정도 말을 보탰다.송유주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나도 참다 참다 이렇게 나온 거야. 모두 너희들이 날 몰아붙여서 그런 거라고!”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도착했고 사건 전말과 서해연의 증언까지 듣고 녹화 영상을 챙겨 네 사람을 데리고 갔다.그들이 떠나고 송유주는 바로 육효은에게 전화를 걸어 온세은 무리가 경찰 수사를 받게 된 사실을 폭로할 방법을 물었다.상황을 전해 들은 육효은은 욕을 한참 퍼붓더니 송유주더러 자신이 다 생각이 있으니 안심하라고 말했다.통화를 종료하고 서해연은 뜨끈한 만둣국을 내왔다.“유주 씨, 며칠 더 섬에서 지내세요. 여기 재밌는 곳 많아요.”송유주는 먼저 서해연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이렇게 말했다.“그동안 많은 신세를 졌는데 더 실례를 범하지는 않을게요.”“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세요. 우린 이제 한 가족이 될 사이인데요.”“네?”“아, 그게 한 가족처럼 가깝게 지낼 사이라고요.”송유주는 웃음을 터뜨렸다.“비록 영씨 가문은 가람 씨밖에 만나지 못했는데 가문 사람들 모두 좋은 사람이라는 게 느껴져요.”“당연하죠. 영씨 가문이 연성시에서 제일 큰 가문이고 명불상실 재벌가이긴 하지만 늘 겸손하고 바르게 지내려고 하고 있어요.”서해연의 만류에도 송유주는 오후 시간이 되자 섬을 떠났다.그린 파워로 돌아오자 육효은이 진작 집안에서 송유주를 기다리고 있었다.“유주야, 네 사람 기사 봤어? 벌써 인기 검색어 난리야.”육효은은 핸드폰을 보다가 흥분한 목소리로 송유주를 향해 말했다.송유주는 가까이 다가가 기사를 확인했다.온세은과 약혼남 동시에 경찰서 출동? 구속으로 의심.“댓글 좀 확인해 봐. 뭐 성매매냐, 살인 교사냐, 종교냐 난리법석이야. 네티즌들 상상력 하나는 좋다니까.”송유주는 천천히 댓글을 읽었다.“세은 씨와 혜정이 엔터에서는 해명 기사 안 낸 거야?”“지금은 기껏해야 루머인데 해명 기사까지 내면 기정사실이 되는 거잖아. 그
최하준은 굳은 얼굴로 송유주를 쳐다봤다. 아마도 송유주가 감히 그렇게 나오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대신 온세은이 오서영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저랑 하준이가 곧 결혼할 거라 생각하니 받아들일 수가 없어 그런 거예요. 어머님, 그냥 우리가 봐줘요.”송유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벌어질 일은 그들이 자초한 것이었다.“말끝마다 최씨 가문, 최씨 가문, 그러시는데 저 뱃속 핏줄이 정말 하준 씨 아이라는 게 확실해요?”송유주는 그들에게 폭탄을 던져버렸고 최하준이 바로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유주, 너 그 입 다물어!”온세은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오서영은 두 눈을 부릅뜨더니 손으로 뒷목을 움켜쥐었다.“그딴 것도 말이라고 너 지금...”송유주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요즘 인터넷 확인 안 하셨어요? 이희성 씨와 스캔들 났던 걸 설마 모르셨던 건 아니죠?”“그 입 다물라고 했지!”최하준은 또 버럭 소리를 질렀고 목에 핏줄이 섰다.“왜, 왜 그렇게 날 모함하는 거야? 정말 너무해.”온세은은 눈물을 글썽였고 오서영이 한 발 나서며 말했다.“너, 당장 이리로 와. 내가 오늘 그 입 찢어버릴 테니까!”“세상에 세 사람이 우르르 모여와 한 사람 괴롭히는 것 좀 보세요!”육효은은 핸드폰을 꺼내 들고 동영상 촬영을 했다.“이따가 또 새로운 인기 검색어 등장하겠는걸요?”아침 기사도 아직 따끈따끈한데 또 새로운 기사를 만들 수는 없었다. 그러자 온세은이 빠르게 오서영을 이끌고 집으로 향했다.“흥, 내가 봐준다!”송유주는 멀어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이렇게 외쳤다.“최씨 가문을 위해서 하는 말인데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도 유전자 검사는 충분히 가능하대요!”옆집으로 들어간 세 사람은 행여나 다른 사람이 따라 들어올까 대문까지 꽁꽁 닫고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섰다. 육효은은 그제야 핸드폰을 내려두고 깔깔 웃었다.“참 웃기는 사람들이야!”육효은은 한참 웃다가 송유
B팀도 C팀과 촬영 현장이 가까웠고, 누가 소문을 낸 건지 모르지만 B팀에서도 몰래 건네와 송유주의 차를 마시는 사람이 있었다. 촬영 현장이 어느새 친구 모임처럼 변질되었지만 촬영 효율을 더 높였기에 감독님도 모르는 척해줬다.“내가 너한테 매니저 일 부탁했던 건 사실 무서워서 그랬어.”육효은은 송유주 옆으로 다가와 말을 꺼냈다.“무서웠다고?”송유주는 차를 끓이다가 육효은을 슬쩍 바라봤다.“나 결혼 전 작품 할 때 엄청 유명한 여배우가 있었는데 그렇게 신인 배우들 괴롭혔다? 그런데 그 괴롭힘 대상이 주로 나였어.”“네 성격에 그걸 참았어?”“그 사람 뒤를 봐주는 사람도 있고 정말 교묘하게 사람 괴롭혀서 나도 기진맥진했어. 그 작품만 끝내면 결혼하고 은퇴할 까 진지하게 고민할 정도였다니까. 그리고 이번 작품 시작하면서 또 그런 사람이 있을 까봐 너무 걱정돼.”“지금 보면 스태프랑 다른 배우들도 다 괜찮아 보여.”“이게 다 네 덕분이야. 네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랑 친하게 지낼 수 있었어. 네 체면을 봐서 내가 실수를 해도 이해해 주고 도와주는 거라고.”송유주는 차를 끓여 육효은에게 한잔 건넸다.“시작이 좋으니까 그런 생각 말고 열심히 촬영에 임해. 내가 여기 있으니까 무슨 일 생기면 내가 도울게.”“유주야, 네가 있어 참 좋아.”육효은은 송유주를 끌어안으며 말했다.“최하준이 널 떠난 건 이번 생에서 가장 큰 실수일 거야.”“그 사람 이름도 꺼내지 마. 역겨우니까.”C팀 촬영은 무사히 진행되었으나 A팀은 여러 가지 문제로 하마터면 촬영 중단이 될뻔했었다.유대한이 송유주를 찾아 말했다.“A팀 단체로 속열 문제로 탈이 많다는데 심 감독님한테 유주 씨 찻방 얘기를 했더니 내일 속열 내리는 차로 따로 준비해 달라고 하시네요.”송유주는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유대한은 빠르게 두 손을 모아 감사 인사를 전했다.“우리 효은 씨한테 이렇게 좋은 매니저가 있으니 효은 씨도 곧 승승장구할 거예요.”송유주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가 뭘
이혜정의 말이 끝나고 차를 마시려고 다가오던 배우와 스태프들이 주춤거렸다. 심지어 텀블러에 담아간 차를 쏟아붓는 사람도 있었다.송유주는 많은 사람의 시선 속에 고스란히 노출되었고 마치 빨가벗고 심판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지금 뱉은 말 책임질 수 있어요?”그 목소리는 등 뒤로 들려왔고 고개를 돌리자 굳은 얼굴의 신유정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신유정은 노란색 한복 차림이었고 그 위로는 은색 비단을 걸쳤으며 예쁘게 정돈된 머리에서 정말 조선 시대 명문가 부인 같은 우아한 분위기가 느껴졌다.그러나 촬영 복장 위로 또 검은색 양털 코트를 걸치고 텀블러를 들고 있는 모습이 현대 버전 카리스마 넘치는 보스 같기도 했다.신유정은 곧장 송유주 옆으로 다가왔고 시선은 이혜정에게 고정되었다.“선배님, 오, 오셨어요?”이혜정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다시 물어볼게요. 방금 뱉은 말 책임질 수 있어요?”신유정이 차가운 목소리로 묻자 이혜정은 말을 더듬었다.“제, 제가 뭐라고 했던가요?”신유정은 시선을 돌리며 냉소를 터뜨렸다.이혜정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애써 여유로운 척하며 말했다.“아, 선배님은 모르셨나 본데 유주 씨가 바로 가람이 새 애인이에요.”“그래요?”“가람이는 그냥 가벼운 사이라 생각하는 것 같은데 유주 씨는 진심으로 보이던데요? 유주 씨가 정말 남자 잘 꼬시거든요.”“그래서 직접 그걸 목격한 건가요?”“네?”“그게 아니라면 지금 루머 퍼뜨리는 거네요.”이혜정은 잔뜩 당황해서 고개를 저었다.“저는 그, 그냥 해본 말이에요.”“허. 지금 그냥 해본 말이 이분의 명성을 더럽힐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사람이 왜 그렇게 가벼워요?”이혜정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비록 신유정이 선배이긴 했으나 그동안 서로 친절하게 대하며 한 번도 얼굴 붉힌 적은 없었다. 그런데 신유정이 송유주를 위해 이혜정을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한소리하고 있었다.“명예 훼손으로 고소당하고 싶지 않으면 지금 당장 유주 씨한테 사과하세요!”신
“우리 가람이 평판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저렇게 함부로 루머를 퍼뜨리는 건 말이 안 되죠.”‘역시 영가람 때문에 나서준 거였어. 괜히 오해할 뻔했네.’“차 한 잔 드릴까요?”신유정은 자신이 우린 차를 들고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좋죠.”신유정의 짙은 다크써클을 보며 송유주는 요즘 잠자리는 어떤지 물었다.“사실 요즘 잠을 많이 설쳐요. 작은 소리에도 깨고 다시 잠드는 게 그렇게 어렵더라고요.”신유정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수면 부족으로 자꾸 머리가 아파져 왔다.“젊었을 땐 촬영 때문에 불규칙한 생활을 했고 그 뒤로 수면 장애가 있었어요. 촬영이 끝나도 수면 리듬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더라고요.”송유주는 신유정에게 수면에 도움이 되는 차로 골라 따랐다.“여기에 있는 성분이 수면에 도움이 될 겁니다. 한 번 마셔보세요.”신유정은 한 모금 마시더니 은은하게 감도는 약초 향이 꽤 마음에 들었다.“입맛에 맞네요. 끝나고 따로 더 챙겨줄 수 있어요?”“당연하죠!”신유정은 다른 사람들도 불러 모으며 말했다.“다들 와서 마셔봐요. 정말 맛이 좋아요!”대선배 신유정의 부름에 다들 외면하지 못하고 이곳으로 몰려왔다.송유주가 서둘러 차를 따르려고 하자 신유정이 송유주의 손을 잡아당겨 앉히며 말했다.“마시고 싶은 사람은 직접 따라서 마시라고 해요. 유주 씨가 뭐 직원도 아니고.”그때, 심재혁이 대기실에서 나왔고 신유정이 부르자 서둘러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유주 씨, 감독님한테 속열 가라앉히는 차로 부탁해요.”송유주는 서둘러 차를 따라 심재혁에게 건넸고 한 모금 마시던 심재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스태프를 시켜 자신의 텀블러를 가지고 오게 했다.“유주 씨, 잘 좀 부탁드려요. 요즘 날씨 때문에 다들 컨디션이 안 좋아요. C팀에서 좋은 차를 대접해 컨디션 조절을 해준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A팀까지 모셔오게 됐어요. 저희도 많이 급해서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다 시도하려 하고 있어요.”“아무거나 시도한다니요? 이분 병
신태호의 말에 따르면 송준수는 시도 때도 없이 버럭하는 게 습관이어서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한다.진미선도 행여나 그녀가 오해할까 봐 재빨리 말을 덧붙였고 송준수가 노총각이어서 결혼 얘기만 들으면 흥분한다고 했다. 어쨌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니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는 게 결론이었다.유민욱의 식당을 나서며 신태호는 그가 따온 대추를 전부 챙겼다.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햇볕이 잘 드는 방에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 책을 읽으며 해가 지기 전 마지막 햇살을 즐겼다.원래는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으나 신태호에게 갑작스러운 약속이 잡혔다.“프로젝트 협력에 관한 일인데, 기회를 줄지 말지 고민 중이에요.”송유주는 업무에 관련된 일이라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얼마 후 신태호가 집을 나서자 육효은이 허종수 가게에 술 마시러 가자며 전화를 걸어왔다.“지난번에 날 버리고 갔잖아.”송유주는 서운한 티를 냈다.“그때는 너무 많이 마셔서 정신이 없었어. 너한테 연락한다는 걸 깜빡하고 혼자 가버렸지 뭐야.”육효은은 차분하게 설명했다.“나 오늘 힘들어.”“네가 너무 보고 싶어.”“알았어. 내가 그쪽으로 갈게.”그들이 술집에 도착했을 때 아직 영업을 시작한 상태는 아니었다. 가게 전체가 어두운 와중에 룸 하나에 이상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유주야, 여기.”육효은은 바에 앉아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고 송유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갔다.“오늘 영업 안 하는 날이야?”육효은은 유일하게 불이 켜진 룸을 가리키며 말했다.“종수가 그러는데 오늘 밤에 엄청 중요한 손님이 온대. 그래서 오픈을 안 했나 봐.”송유주는 육효은의 옆에 앉았다.“그럼 종수 씨도 저 안에 있는 거야?”“종수뿐만 아니라 임우빈도 있어.”육효은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최하준도 있고.”그 이름을 듣는 순간 송유주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나도 몰랐어. 그 인간이 여기에 있는 줄은.”육효은은 다급하게 말했다.“됐어. 신경 쓰고 싶지 않아.”송유주는 얼굴이 빨
“태호가 집안일 안 해요?”“아니요. 자주 도와줘요.”송유주가 말한 건 예전이었다. 최하준과 만나고 있을 때 모든 집안일은 그녀의 몫이었다.“남자는 버릇을 들이면 안 돼요.”진미선은 테이블을 깔끔하게 치우고선 송유주에게 다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태호가 요리를 엄청 잘해요. 앞으로 밥해달라고 해요.”“짬뽕을 해줬는데 너무 맛있었어요.”“그렇죠? 예전에 여기서 요리사로 일했거든요.”이때 갑자기 뭔가가 떠오른 송유주는 대뜸 물었다.“만두 빚을 줄도 알아요?”“당연하죠.”진미선은 신태호가 방학에 외국에서 돌아오면 늘 식당에 와서 일손을 도왔다고 한다. 만두가 히트 메뉴였는데 유민욱은 줄곧 그 맛을 내지 못했기에 신태호가 개학할 때마다 연성대 학생들에게 욕을 먹었다고 한다.“정말 태호 씨가 빚었던 만두였네요.”송유주는 정말 인연이라는 게 있는 건가 싶었다.“아참, 가게에서 일한 사람 중에 단발머리가 있었어요?”무심코 꺼낸 말이었지만 진미선은 곧바로 안색이 어두워졌다.“안소희를 알아요?”“이름 소희였어요? 아는 사이는 아니고, 예전에 만두를 주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분이 배달을 왔거든요.”“그랬군요. 저는 태호가 유주 씨에게 얘기한 줄 알았어요.”말을 이어가던 진미선은 대뜸 한숨을 내쉬었다.“그 애는 이미 세상을 떠났어요.”진미선은 안소희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듯했고, 송유주도 더 묻지 않았다.얼마 후, 신태호와 유민욱이 돌아왔고 그들의 뒤에는 건장한 체구의 남성이 한 명 더 있었다. 세 사람은 얼굴에 상처가 있었지만 모두 웃고 있었다.신태호는 주머니에 뭔가를 넣고 있었는데 송유주를 보자마자 달려왔다.“유주 씨 주려고 대추를 따왔어요. 엄청 달아요.”송유주는 앞으로 다가가 그의 주머니에 잔뜩 들어있는 대추를 보았다. 하나하나 호두만큼 컸고 빨갛게 익은 게 탐스러웠다.유민욱은 손에 들고 있던 철판을 옆으로 던지더니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신태호를 가리켰다.“이 자식이 얼마나 꼴불견인지 알아요? 사람을 때려
송유주는 신태호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가 문까지 따라갔다. 유민욱이 앞치마도 벗지 않고 철판은 손에 든 채 돌진하는 모습에 그녀는 더욱 걱정이 밀려왔다.반면 진미선은 이런 상황이 익숙하듯 수빈이를 품에 안고 목청껏 소리쳤다.“민욱 씨, 싸우고 나면 얼른 돌아와요. 나 혼자서 하기에는 너무 바빠요.”송유주는 자연스레 수빈이를 안더니 진미선에게 얼른 가서 일 보라고 했다.“준수가 운송팀을 운영하고 있는데 일이 별로 없을 때는 다른 화물 차량과 서로 다투기도 해요. 심각한 일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아요.”진미선의 말에 송유주는 오히려 더 걱정되었다.“민욱 씨가 혼자 갔다면 저도 걱정했을 거예요. 그런데 오늘은 태호가 있어서 마음이 놓여요. 태호는 선을 지키는 사람이라서 일을 크게 만들지 않을 거예요.”송유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때 수빈이가 지루한지 그녀의 품에서 끙끙거리기 시작했다.“수빈이랑 밖에서 놀고 있을게요.”진미선은 손님의 부르자 재빨리 대답하고선 송유주를 보며 물었다.“음식 준비 다 했어요.”“태호 씨가 돌아오면 같이 먹을게요.”“알겠어요.”그 말을 끝으로 진미선은 서둘러 손님맞이를 했다.송유주는 수빈이를 안고 산책했는데 여전히 활기가 넘치는 골목에는 온갖 종류의 물건들이 팔리고 있었다.끝까지 쭉 걸어서 올라가자 연성대가 나왔다. 곧이어 연성대의 축구장과 도서관이 보였고 도서관 바로 왼쪽에 의대가 있었다.“야야.”수빈은 축구장에서 누군가 공 차는 걸 보고선 흥분해서 펄쩍펄쩍 뛰었다.송유주는 아이가 더 잘 볼 수 있게 번쩍 안아 올렸다.점심시간이라 그런지 배달 음식을 가지러 나오는 학생이 많았다.송유주는 만두를 좋아했던 기숙사 룸메이트가 떠올랐다. 그 집은 전화로 주문하면 불과 10분 만에 도착했다.배달을 시키고 갑자기 약속이 잡힐 때면 룸메이트에게 처리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송유주는 최하준이 배달 음식을 안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독학하여 요리를 배웠고 매일 그의 자취방을 오가며 음식을 해줬다.의대생이라 학
다른 두 의사는 감당할 용기가 없다고 하여 마지못해 송유주가 집도했다.수술은 6, 7시간 동안 진행되었고 정말 기적적으로 산모와 아이 모두 지켜냈다.진미선은 수빈과 함께 종종 병원을 방문했기에 아이는 송유주를 잘 따르는 편이었다. 수빈은 송유주를 알아본 듯 안아달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팔을 뻗었다.“진짜 너무하네. 내가 누군지 잊었어?”신태호는 수빈이의 작은 얼굴을 비틀었지만 녀석은 집요하게 송유주의 품으로 달려들었다.아이를 안은 송유주는 자연스레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태호 씨도 아이를 많이 좋아하나 봐요.”“그런 편이죠.”송유주는 흐뭇하게 웃었다.“우리도 낳을까요?”“언젠가는 낳겠죠?”두 사람은 아이와 함께 놀다가 식당으로 향했다.주방에서 요리하던 유민욱은 시간을 내어 그들에게 다가와 축하 인사를 전했다.“먹고 싶은 거 다 시켜. 오늘은 형이 쏠게.”신태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그럴 줄 알고 돈 안 챙겨왔어.”“하여튼 누굴 닮았는지 입만 살았다니까.”두 사람은 사이가 매우 돈독해 보였다. 다만 수염이 덥수룩한 식당 사장과 신태호는 아무리 생각해도 교집합이 없었기에 어떻게 친해진 건지 궁금했다.신태호는 수빈을 진미선에게 넘겨주고선 송유주와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다.어수선한 아래층과 달리 2층은 훨씬 깔끔했다.“형네 가족이 사는 곳이야. 여기에 내 방도 있어.”신태호는 송유주를 데리고 안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깨끗하게 정돈된 방이 모습을 드러냈고 싱글 침대 하나와 큰 책장 하나가 전부일 정도로 작았다. 책장에는 책이 가득 쌓여있었다.벽에는 농구 포스터가 붙어있었고 선반에는 다양한 레이싱 카 모델이 놓여 있어 한눈에 봐도 남자아이의 방이었다.“중학교 때 가출한 나를 민욱이 형이 키워줬어요. 그때부터 형을 따랐죠.”그 시절을 떠올린 신태호의 눈에는 웃음이 가득했다.“나, 민욱이 형, 송준수, 그리고 규만이 형까지. 우리 넷은 열몇 살에 만나서 하루 멀다시피 사고를 치는 나날을 보냈어요. 배가 고픈 것 외에
이때 앞치마를 두른 여성이 나왔다. 그녀는 한 손에 생후 6, 7개월 된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에 맥주병을 들고선 주방을 향해 목청껏 외쳤다.“4번 테이블 골뱅이 무침 하나.”그녀는 손님에게 맥주를 건네고선 병따개를 챙겨줬다.“오래 기다리셨을 텐데 죄송해요. 너무 바빠서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이따가 서비스 많이 챙겨드릴게요.”이곳의 손님들은 대부분 학생이거나 근처 주민이었기에 다들 서로 아는 사이였다. 학생들로 가득 찬 테이블은 주방 이모를 언니라고 부르며 너스레를 떨었고 덕분에 식당은 웃음소리가 가득했다.아이를 안고 있던 여성은 학생들과 얘기하다가 고개를 돌렸고 송유주와 눈이 마주친 순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어머, 송 의사님. 여긴 웬일이에요.”여성은 아이를 안은 채로 달려왔다.“오기 전에 미리 연락이라도 하시지 그랬어요. 그럼 골목 입구까지 마중 나갔을 텐데.”손을 내밀던 그녀는 아차 싶은 듯 서둘러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그러자 송유주는 재빨리 손을 잡고 웃으며 말했다.“별말씀을요.”“얼른 이쪽으로 앉아요. 우리 남편이 끝내주게 잘하는 음식이 있는데, 오늘 제대로 대접할게요.”진미선은 신태호를 보지 못한 듯 송유주의 손을 잡고선 안으로 들어갔다.“형수, 내가 이렇게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었어요?”신태호는 어이가 없었다.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진미선은 그제야 신태호를 발견했다.“어머, 언제 귀국했어?”“어제 왔어요. 그리고...”신태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미선은 자연스레 아이를 건네줬다.“난 송 의사님 대접해야 하니까 수빈이 좀 보고 있어. 아참, 두 사람 소개해 줄게.”그녀는 신태호를 가리키며 송유주에게 소개했다.“이름은 신태호. 대기업 다녀서 돈 엄청 많이 벌어요. 잘생겼죠? TV에 나오는 연예인 뺨치는 얼굴이라니까.”그 후 송유주를 가리키며 신태호에게 소개했다.“이분은 해진 병원 의사 선생님이자 나랑 수빈이를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야. 송 의사님이 아니었다면 아무도 그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을 거야. 정
“다른 사람한테 지는 건 싫단 말이야. 정 안되면 섬으로...”송유주를 발견한 온세은은 곧바로 분노를 가라앉히더니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유주야, 공교롭게 여기서 만나네. 아참, 나랑 하준이 결혼식장 관련해서 논의 중인데 네가 의견 좀 줄래?”송유주는 피식 웃었다.“좋아요.”“혹시 해운 성당이라고 들어봤어?”송유주는 일부러 과장된 표정을 지었다.“당연히 들어봤죠. 그쪽 약혼자가 제 남자 친구였을 때 성당에서 결혼식 올리는 게 로망이라고 제가 수십차례 얘기했거든요. 그런 곳에서 결혼하면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잖아요.”그러고선 부러워하며 말을 이었다.“설마 그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려고요? 예약하기 엄청 힘든 곳이라던데...”온세은은 송유주의 부러움을 한껏 즐겼다.“맞아. 우린 해운 성당에서 식을 올릴 거야. 너도 꼭 참석했으면 좋겠다.”“그럴게요.”송유주의 대답에 기분이 좋아진 온세은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최하준을 바라봤다.“그럼 해운 성당으로 결정하자.”최하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송유주를 바라봤다. 곧이어 그녀의 목에 난 붉은 자국이 눈에 들어왔고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설마 남자 친구 생겼어?”송유주는 어이가 없었다.“생기든 말든 참견할 바가 아니잖아요.”“난 네가 양아치 같은 놈을 만날까 봐 걱정돼서 그래.”“걱정할 만도 하죠. 지훈 씨 같은 쓰레기를 8년이나 만났으니.”그 말을 끝으로 송유주는 차갑게 돌아서서 집으로 걸어갔다.집에 돌아오니 마침 신태호가 위층에서 내려왔다. 청바지에 회색 후드를 입고 나오자 고귀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이제 막 캠퍼스에서 나온 대학생처럼 풋풋했다.그는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전부 매력적이었다.“오늘은 우리 둘 다 대학생 같네요.”신태호는 그녀의 옷차림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대학생이요?”송유주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대학생들이 좋아하는 곳으로 가볼까요?”신태호는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려 신발장에 앉혔다. 송유주가 놀라서 어깨에 손을 얹자
신태호는 자신의 복근을 가리킨 다음 얼굴을 가리켰다.“입구에 앉아서 동상인 척 연기만 해도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걸요?”송유주는 상상만 해도 그 장면이 웃긴지 입을 가리고 웃었다.“웃어서 미안해요. 예전에 고생을 많이 했나 봐요?”송유주는 애써 웃음을 참고 안쓰러운 척 연기했다.그러자 신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많이 힘들었어요.”“다행히 지금은 이겨냈네요?”“그런 셈이죠.”송유주는 고개를 숙여 짬뽕을 한 입 더 먹었다.“양이 너무 많아서 다 못 먹을 것 같아요.”“많이 먹어요.”그녀는 끝내 다 먹지 못하고 잔뜩 남겼다. 부엌으로 가서 버리려던 찰나 신태호가 다가와 한입에 먹어 치웠다.“우리 오늘 뭐 해요?”송유주는 신태호를 도와 주방을 정리했다.예전에는 요리하고 주방 치우고 설거지하는 것까지 전부 혼자 했는데 이제는 신태호가 대부분의 일을 하고 있었다.“오늘은 혼인 신고하러 갈 거예요.”송유주는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오늘요?”신태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웃음을 지었다.“결혼하기로 동의한 순간부터 유주 씨는 평생 나랑 함께해야 할 운명이었어요.”주방을 정리한 후 두 사람은 위층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었다.신태호는 흰 셔츠로 갈아입고 옷방에서 나왔다. 깔끔하면서도 고급스러운 그 모습은 왕자님이 따로 없었다. 검은색 정장까지 입으니 순식간에 진중함과 카리스마가 더해졌다.송유주가 넋을 잃은 채로 바라보자 그는 또다시 키스를 퍼부었고 어느새 두 사람은 침대로 향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송유주는 재빨리 발을 뺐고 한참이 지나서야 신태호는 그녀를 놓아주었다.곧이어 흰색 원피스로 갈아입고 나온 송유주는 거울 앞으로 걸어가 화장하기 시작했다. 평소 화장하는 걸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신태호의 옆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좀 더 화려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신태호가 미리 예약한 덕분에 두 사람은 도착하자마자 수속을 밟기 시작했다. 혼인신고서가 나온 순간 송유주의 마음도 안정되었다.오늘부로 그녀는 신태호와 법적인
정신을 잃은 채로 잠이 든 송유주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신태호는 이미 일어난 듯 옆에 없었다. 온몸이 산산조각 난 것처럼 아팠던 그녀는 애써 팔을 지탱하여 일어났고 순간 이불이 흘러내렸다. 아무것도 거치지 않은 몸에는 어젯밤의 흔적이 빨갛게 남아있었고 송유주는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신태호는 그녀의 잠옷과 속옷을 침대 머리맡에 놓았다. 여전히 어색한 이런 상황을 적응하며 그녀는 욕실로 들어가 씻고 나왔다.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신태호가 스피커폰으로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제이슨 씨, 우리가 얼마나 이 일에 진심인지 알잖아요. 그렇지 않았다면 인수 계획을 여러 번 수정하는 데 협조했을까요?”송유주가 내려왔을 때 그는 상의 탈의한 채 주방에서 요리하고 있었다. 넓은 어깨와 가는 허리는 매혹적이었고 등에는 잔근육이 가득해 탄탄했다.그동안 머릿속으로 상상한 신태호라는 사람과 많이 달랐다. 정장 차림에 점잖고 우아한 이미지인 줄 알았으나 현실은 그녀의 상상과 정반대였다.이때 핸드폰 너머로 분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진심이라고요? 그럼 이렇게 관건적인 순간에 귀국하지 않았겠죠. 협상은 없었던 일로 하죠.”“저 결혼해요.”“결혼이 수백억에 달하는 인수 건보다 더 중요한가요?”“당연하죠.”“태호 씨, 우리에게 시간이 별로 없다는걸 잘 아시잖아요.”“기다릴 수 있으면 기다려요. 그 일은 결혼하고 나서 다시 얘기합시다.”“그럴 시간이 없다니까요?”“죄송하게 됐네요. 그럼 다음에 다시 협력할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솔직히 이러는 건 깡패짓이나 다름없잖아요.”“제이슨 씨, 말이 지나치네요.”상대방은 숨을 가다듬으며 화를 억눌렀다.“지난번 회의에서 내놓은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면 상황이 달라질까요?”“좋아요. 그럼 지금 당장 시애틀에 있는 지사로 가서 계약서에 서명하시면 됩니다. 제 비서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거든요.”“이봐요.”상대방은 분노에 이를 갈았지만 결국 무기력하게 꼬리를 낮췄다.“참... 어이가 없어서 할
별장 입구가 코앞에 있는 걸 확인한 송유주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별장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어느새 그녀의 뒤에 그 남자가 나타났다.송유주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 남자는 쫓아왔다.“원하는 게 뭐예요?”송유주는 돌아서서 그에게 물었다.별장 지역의 가로등은 매우 밝았고 이번에는 그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무서운 상황인 건 맞지만 그녀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눈앞에 나타난 남자의 얼굴은 환상적이었다.잘생겼다는 표현보다는 아름답다는 말이 더 적절했다.그윽한 눈빛과 오똑한 콧날, 붉은 입술에 도자기처럼 하얀 피부가 더해지니 아름다움은 배가 되었다. 화려한 외모보다 더욱 숨 막히는 건 그의 아우라였다. 입꼬리를 올린채 뚫어져라 쳐다보는 행동이 경박해 보였지만 이마저도 포스에 압도되어 고귀해 보였다.다만 이렇게 잘생긴 사람이 스토커라니 조금 아쉬울 뿐이다.“여긴 우리 집이에요. 아까 도와준 걸 생각해서 신고는 안 할 테니까 얼른 가요.”송유주가 경계하듯 뒤로 물러서자 남자는 한 발 더 가까이 갔다.“이봐요.”남자는 순식간에 그녀를 안았다.그러고선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송유주의 혼란스러운 눈빛을 마주 보며 검지를 들어 올렸고 곧이어 잠금장치가 풀리며 문이 열렸다.송유주는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넋을 잃은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그러자 남자는 몸을 숙여 그녀를 벽에 밀어붙였다.“내가 누군지 알겠어요?”“신... 태호 씨?”송유주는 반신반의하며 물었다.그러자 남자는 피식 웃었다.“유주 씨, 저예요.”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송유주는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시애틀에 있다면서요? 어떻게...”“일이 생각보다 일찍 마무리됐어요. 유주 씨에게 서프라이즈를 주고 싶었어요.”“그게...”‘이 사람이 신태호라고? 내가 생각하는 신태호는 온화하고 우아한 신사였는데?’신태호는 웃으며 그녀를 껴안고 집으로 들어갔다.“집에 있는 줄 알고 바로 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