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나는 최욱현의 헤드폰에 대해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하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후 F 국 왕실은 내 손에 넘어왔고 최욱현은 왕족이니 어느 정도는 그를 감싸줘야 했다.나는 생각을 정리한 후 조심스럽게 최욱현을 변호했다.“네게 그런 장면을 보게 한 건 분명 그의 잘못이야. 그리고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의 상태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확실히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아... 하지만 내가 아는 욱현이는 나쁜 사람은 아니야. 그저 사랑이 부족하고 가족애에 대한 갈망이 큰 것 같아.”내가 최욱현 편을 드는 것을 보고 담현아는 표정을 풀고 해명했다.“나 사실 진짜 최욱현한테 화난 건 아니에요. 그냥 아저씨 얼굴 보기가 힘들어서 그래요.”담현아의 걱정은 확실히 문제였다.해결하지 않으면 그녀는 계속 고정재를 피할 것이었다.나는 차를 반쯤 마시고 나서야 담현아에게 물었다. “지난번에 임신했냐고 물었을 때 왜 그렇게 급한 게 아니라고 했어? 두 사람 아직 그 선도 넘지 못했으면서. 정재 씨의 성격이... 음, 좀 소극적이긴 하지. 지훈 씨랑 비슷해. 그러니 네가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할 수 있겠어?”최희연이 핵심을 짚었다.“임신하고 싶대?”나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맞춰봐!”나와 최희연은 오랜 친구 사이라 평소에도 농담을 자주 주고받았지만 아직 경험이 없는 담현아는 얼굴이 새빨개졌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 앞에서 그런 이야기 좀 하지 말아요...”담현아는 문득 말을 멈추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나 아직 순수한 소녀라고요! 내 앞에서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담현아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언니들이랑 더 이상 못 있겠어요!”차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채 담현아는 황급히 카페를 나섰다. 나는 시선을 돌려 최희연과 마주 보고 웃으며 말했다.“애가 놀라서 도망갔네.”최희연이 내 말을 정정하며 말했다.“열아홉 살이면 애가 아니지!”최희연이 무슨 말을 더하려는데 담현아가 다시 카페 안으로 들어
예지한과 한민영은 절친이라 예지한은 한민영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근데 나도 당한 만큼 돌려줬어요.”예지한은 다시 한번 진심으로 말했다.“정말 고마워요.”“괜찮아요. 하나 씨는 여기 일주일만 더 있을 건데 한민영한테 들키면 분명히 못 버티고 여기서 미리 떠날 거잖아요.”내가 말했다.“저, 사실 두 달 더 있으려고요.”나는 의아하게 물었다.“갑자기 왜 생각을 바꿨어요?”“며칠 전에 집에 연락했는데 예 씨 가문 쪽 일은 아직 잘 돌아가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두 달 더 시간을 달라고 했어요.”예지한은 집에 돌아가기 싫어하는 티가 역력했다. 그녀는 반항심도 강한 아이였다.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두 달이나 더 있겠다고 하겠는가.“그건 하나 씨가 알아서 결정할 일이에요.”예지한은 고개를 끄덕이고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녀가 위층으로 올라가자마자 한민영과 주민솔이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를 본 한민영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연수아, 너 여기서 뭐해?”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너랑 상관없잖아.”내 말투에 한민영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 그녀는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진짜 재수 없어. 차 한잔 마시려고 해도 만나다니...”그녀는 말하다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물었다.“정우 씨도 여기 있어?”그녀가 내 앞에서 현정우를 언급한 것은 처음이었다.원래 대답해 줄 생각이 없었지만 현정우가 그녀를 좋아하는 걸 생각해서 사실대로 말해 주었다.“밖에 차에 있어.”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민영은 뒤돌아서 카페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주민솔은 순간 당황한 듯 카페 문 앞에 서서 어쩔 줄 몰라 했다.결국 최희연이 차분한 목소리로 주민솔에게 말했다.“주민솔 씨, 여긴 내 가게예요. 죄송하지만 나가 주시죠.”최희연의 말에 주민솔은 그제야 당당하게 말했다.“아, 최희연 씨 가게였어요? 몰랐네요. 나는 집에 가서 유겸이를 만나야 해서요. 방금 전화 왔는데 저녁 같이 먹자고 하더라고요!”주민솔은 돌아
진유겸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나랑 상관없으면 누구랑 상관있는데?”최희연은 잠시 생각하더니 비수처럼 날카로운 말을 던졌다.“유겸 씨, 난 이제 왕자현의 아내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걱정은 자현 씨가 해줄 텐데 전남편인 당신이 웬 참견이에요?”최희연의 말은 진유겸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욱하는 성격에 차가운 성격까지 더해진 진유겸은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분위기가 싸해졌다. 담현아가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려고 말했다.“내 말이 맞죠? 진유겸은 이제 언니한테 잘해 줄 수밖에 없어요. 언니를 놓치기 싫을 테니까.”최희연은 한숨을 쉬며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사실 전에는 복수하려고 했는데 그 사람이 약한 모습을 보이니까... 이제는 복수고 뭐고 다 필요 없어. 난 그냥 운성에서 조용히 살고 싶어.”담현아는 정곡을 찌르며 말했다.“언니가 왕자현 씨랑 결혼한 게 진유겸에게는 가장 큰 복수예요. 언니 마음은 이미 다른 사람 거고 진유겸은 이제 언니 인생에 아무것도 아니니까.”내가 웃으며 물었다.“어쩜 그렇게 다 알아?”담현아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제가 좀 똑똑하잖아요.”“그럼 두 사람 이야기하고 있어. 난 먼저 가볼게!”최희연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했고 눈빛에는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나는 무심코 물었다.“집에 누구 기다리는 사람 있어?”최희연은 장난스럽게 말했다.“맞춰봐!”나는 웃으며 물었다.“설마 왕자현 씨가 운성에 온 거야?”최희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응, 곧 도착해. 마중 나가야지!”나는 농담으로 말했다.“그렇다면 소인은 굳이 일어나서 왕 부인을 배웅하지 않겠습니다.”“석 부인과 고부인, 저는 이만 물러갈게요!”이제 우리 셋 모두 아줌마 대열에 합류했다.최희연이 가고 나자 담현아가 물었다.“언제 정식으로 승진했대요?”“일주일 전에 혼인 신고했지.”“이야, 우리 이제 다 유부녀네요!”담현아는 여전히 유부녀라는 신분이 어색한 모양이었다.나이도 어린 데다 나와 최희연은 재혼이었으니
막 집에 들어가려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운성 지역 번호였다. 이 시간에 누구지? 나는 잠깐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새언니, 저 민영이에요.”...병원에 도착하니 고현성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넘어지면서 다친 상처였고 잘생긴 얼굴에도 몇 군데 긁힌 자국이 있었다.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영에게 물었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고민영의 눈은 울어서 퉁퉁 부어 있었다.“나도 전에 정재 오빠한테 살짝 말했어요. 시간 되면 현성 오빠를 데리고 새언니를 만나러 가자고. 현성 오빠가 가장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결국 새언니니까요. 근데 정재 오빠는 새언니가 이제 새 삶을 시작했으니 방해하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현성 오빠한테도 매일같이 그 말을 해요. 새언니는 이미 그의 아내가 아니라고, 그러니 정신 차리라고. 그런데도 현성 오빠는 믿지 않고 그 충격에 몇 번이나 정신을 잃었어요. 하지만 정재 오빠는 그런 오빠를 모른 척했어요. 오늘 낮에도 아주 심한 말을 했는데 오늘따라 조용하더라고요. 그러다 밤에 갑자기 사라져서 찾아보니 골목에 쓰러져 있었어요. 온몸이 상처투성이였고 맥박도 거의 잡히지 않았어요. 방금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도 새언니 이름만 부르기에 너무 안쓰러워서 새언니에게 전화한 거예요!”고민영은 질문 하나에 열 마디를 하는 스타일이었다.병실 문 앞에 서서 고현성을 보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고민영에게 물었다.“의사 선생님은 뭐라고 하셨어요? 많이 다쳤대요? 요즘 정신 상태는 어때요?”“외상은 좀 있지만 심한 건 아니래요. 보기엔 좀 안쓰럽지만... 그래도 오빠 정신 상태는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어요.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회복 가능성이 높다고 하셨는데 꾸준히 치료는 받아야 한대요. 정재 오빠가 매일 집으로 와서 현성 오빠 옆을 지켜주고 있고 정재 오빠가 없을 때는 제가 오빠를 돌보고 있고요.”그렇게 옆에서 지키고 있었는데도 고현성을 잃어버리다니, 참 어이가 없었다. 나는 더 이상 묻지
담현아랑 같이 카페에서 나왔는데 벌써 집에 갔다니. 나는 생각하다가 문자를 보냈다.[한민영의 사촌 동생이야. 복수해주고 싶지만 나는 이제 지훈 씨의 아내라 정재 씨한테 부탁해야 할 것 같아.]나는 병원 복도에서 담현아의 답장을 기다렸다. 역시나 그녀는 나를 이해했다.[언니는 조심해야겠지만 나는 그럴 필요 없어요. 우리 시동생을 괴롭힌 사람들을 그냥 둘 순 없죠. 병원에서 기다려요. 같이 어떻게 할지 얘기해요.][응, 병원에서 기다릴게.]나는 답장을 보냈다.곧 고정재가 담현아랑 같이 병원에 올 것이다.이번 일은 담현아가 나서야 하고 나는 그냥 담현아 옆에 있어 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한참을 고민하다가 나는 석지훈에게도 조심스럽게 연락을 해 두었다.[나 오늘 좀 늦을 거예요.][어.]석지훈의 답장이 왔다.이 남자는 내가 무엇을 하는지 절대 묻지 않았다. 항상 나를 믿어주니까.[고현성이 맞았는데 담현아가 시동생 일이라고 나서서 나도 같이 가게 됐어요...]나는 미리 얘기를 꺼냈다.한씨 가문 사람들을 상대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한민영의 사촌 동생을 때린다면 한씨 가문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그러니 결국엔 석지훈도 알게 될 것이었다.그러니 미리 말해 두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다.적어도 숨기는 건 없다는 걸 알려야 했으니까.석지훈이 답했다.[잘했어, 보고 잘하네.]석지훈은 똑똑한 남자니까 내가 고현성을 위해 복수해주려는 마음도 어느 정도 눈치챘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담현아와 함께 가는 것을 허락할 리 만무했다.그러나 그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보고를 잘했다며 칭찬해 주었다.그 순간 깨달았다. 석지훈은 내가 고현성에게 무엇을 하든 개의치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일찍이 누구에게나 과거는 있다며 나의 과거를 존중한다고 말했었다. 그가 진정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그에게 숨기는 것이 있느냐 없느냐였다.이번에 나는 숨김없이 모든 것을 털어놓았기에 그는 노여워하지 않았다.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인
마치 곧 사라질 환영이라도 되는 듯 고현성의 얼굴은 온통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득했다.나는 단호하게 말했다.“나 수아 맞아요.”그 순간, 고현성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고 표정은 갑자기 아이처럼 환해졌다. 얼굴의 상처가 일그러질 정도로 웃었지만 그는 아픔은 느끼지 못하는 듯 그저 나만 바라보았다.나는 알고 있었다. 그가 나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그의 삶에 나 하나만 남은 것처럼 그는 나를 간절히 원했고 내가 그의 곁으로 돌아와 밤낮없이 함께하기를 원했다.하지만 우리는 이미 남남이었다.그럼에도 그의 마음속에는 기대와 확신이 가득했다.그는 나를 그의 아내이고 그의 여자라고 믿고 있었다.그런 그를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매 순간이 고통이었다.고현성은 한참 웃더니 말했다.“다들 네가 내 아내가 아니라고 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넌 내 아내가 맞는데! 수아야, 너는 평생 내 아내야!”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미친 사람에게 설명해 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화제를 돌렸다.“어떻게 다친 거예요?”그 말에 고현성은 조심스럽게 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내 사진이었다. 얼룩덜룩 더러워지고 핏자국까지 묻어 내 얼굴조차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고현성의 피였다.그는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사진을 들고 너를 찾아다녔어. 하지만 찾을 수가 없었어. 몇몇 사람들이 사진을 보여달라고 해서 거절했더니 너와 무슨 관계냐고 묻는 거야. 그래서 아내라고 했더니 믿지 않았어. 아무도 바보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면서. 특히 석씨 가문의 가주는 날 좋아할 리가 없다잖아. 그들은 그 여자에겐 남자가 있다면서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을 거라고 했어. 그리고는 사진을 빼앗으려고 했지. 난 필사적으로 지켰어. 잃어버릴 수는 없었으니까. 수아야, 난 널 잃어버린 적 없어. 넌 영원히 내...”차마 그의 말을 끝까지 들을 수 없었다. 나는 가슴이 너무 아파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병실을 나왔다. 고현성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손
고정재는 담현아를 꼬맹이라고 부드럽게 불렀다.담현아는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여기서 기다릴게요.”나는 고정재와 함께 복도 반대편으로 갔다. 그는 고현성의 병실 쪽을 흘끗 보며 말했다.“정신이 불안정해서 난폭한 시간이 많지만 상태는 호전되고 있어.”고정재는 눈을 가늘게 뜨며 약간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현성이는 계속 이렇게 지낼 수는 없으니 고 회장께서 결혼을 시키려고 하셔.”나는 놀라서 물었다.“결혼이요?”지금 고현성의 상태로 누가 결혼하겠다고 나선단 말인가.“어. 현성이를 감화시킬 사람을 찾아서 서로 감정을 키우게 하려는 거야. 쉽게 말하면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새로운 흥미를 키워서 너를 잊게 하려는 거지. 어차피 너희들 사이는... 수아야, 현성이가 이렇게 된 걸 보니 마음이 너무 아파. 한때는 그렇게 강인했던 사람이었는데...”나는 고정재의 마음을 이해했다. 나도 똑같은 심정으로 마음이 아팠으니까. 하지만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나는 고정재에게 물었다.“고 회장님께서는 어느 집 따님을 찾으셨어요?”“유씨 가문 사람이야. 유 회장님과 같은 항렬이지. 현성이보다 항렬은 높지만 나이는 젊어. 중요한 건 그 여자가 현성이와 결혼하는 데 동의했다는 거야. 조금도 싫어하지 않고 말이지. 예전 같으면 고 회장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겠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야.”유서정의 아버지와 같은 항렬이라니.그렇다면 유서정의 아버지의 여동생이란 말인가?그런데 유씨 가문에서 이 결혼을 허락할까?나는 핵심을 짚어 물었다.“나이는 몇 살이죠?”“스물여덟. 현성이보다 다섯 살 어려.”고현성은 연말이면 서른네 살이 된다. 눈앞의 고정재도 마찬가지였다. 어찌 보면 두 형제의 나이는 좀 많은 편이었다.하지만 마흔은 남자의 황금기라고 하지 않던가.아직 마흔까지는 시간이 있었다.나는 다시 물었다.“아... 그럼 유씨 가문에서는 왜 동의했대요?”고정재는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그녀는 유씨 가문의 사생아야. 명문가의 아가씨
고정재는 웃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순간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고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여자아이는 부드럽게 대해야 해요.”고정재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부드럽게 웃었다.“알았어. 적당히 할 테니 걱정 마.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현아가 좀 이따가 뭘 하려는지 알겠어. 내 예상이 맞다면 너랑 같이 가는 거겠지? 더 깊이 추측해 보면 현정의 복수를 하러 가는 거고.”고정재의 추측은 정확했다. 그는 정말 무서울 정도로 날카로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담현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나는 호기심에 물었다.“현아에 대해 조사해 보신 적 있어요?”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아니. 현아가 직접 말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어.”나는 웃으며 말했다.“그건 어려울 거예요. 현아는 그런 일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거든요. 물론 정재 씨에게 큰 영향을 주는 건 아니지만 알고 나면 진짜 현아가 어떤 아인지 알 수 있을 거예요.”진짜 담현아는 사심 없고 명예욕도 없는 아이였다.고정재는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알았어. 이따 일을 조심히 처리해. 세상이 뒤집히고 난리가 나도 상관없지만 너희 둘이 다치는 건 안 돼. 알겠지?”고정재는 우리가 사고를 치러 간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말리지도 않았고 뭘 하러 가는지 묻지도 않았다. 단지 우리 둘의 안전만 걱정했다. 이런 남자는 세상에 흔치 않았다.“알겠어요. 그럼 저는 현아에게 가볼게요.”나는 담현아에게 가서 손목을 잡았다. 담현아는 다가오는 고정재를 보고 무의식적으로 거짓말을 했다.“저 배고파요. 수아 언니랑 뭐 좀 먹고 이따 다시 올게요.”나는 할 말을 잃고 고정재를 쳐다보았다. 그는 담현아의 말에 굳이 반박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스럽다는 듯 미소 지으며 물었다.“그래, 돈은 가져왔어?”담현아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네. 있어요!”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마자 고현성의 불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형, 수아는 어디 갔어?”고정재가 대답했다.“너무 늦
이 경악하는 목소리는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석지훈의 머리에서 악마 머리띠를 벗겨내고 돌아서며 웃었다.“하! 태웅 오빠도 여기서 놀고 있었어요?”원태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맨날 정색하고 차가운 지훈이 형이 악마 뿔 머리띠라니, 진짜 귀엽다.”석지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점점 버릇없어지는구나.”말에 담긴 협박을 알아챈 원태웅은 재빨리 잘못을 빌었다.“잘못했어. 난 태림이 그 녀석한테 가봐야겠다. 두 사람 데이트 방해 안 할게. 근데 형 이런 모습 보니까 진짜 인간적이야.”석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뭐야? 아직도 손에 못 넣었어?”원태웅은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아이고, 형.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봐!”원태웅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흰 셔츠를 입은 문태림이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잔뜩 짜증 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 같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사람은 뭐예요?”두 남자가 놀이공원에 있는 게 좀 수상했다.석지훈은 원태웅의 비밀을 바로 털어놓았다.“둘이 썸씽 같은 건데, 몇 년째 아웅다웅하면서도 관계를 정확히 안 정했어.”나는 놀라서 말했다.“태웅 오빠가 게이!”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호기심에 재빨리 물었다.“다른 비밀은 없어요? 오빠는 완전 정보통 같아요. 두 사람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말했잖아. 다들 나한테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고.”그들의 속마음이 석지훈에게는 그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혹시 창피해서 화났어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하게 물었다.“어?”“태웅 오빠에게 냉정한 모습 말고 다른 모습 들켜서요.”“상관없어. 우리 관람차 타러 가자.”석지훈은 내 손을 꼭 잡고 사건 현장을 벗어났다. 우리는 표를 사고 관람차에 올라탔다. 이 높이에서 바라보는 운성의 야경은 너무나 아름다워 기분이 좋아졌다.내가 석지훈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뺨에 얼굴을
석지훈은 가볍게 웃었다.“정말 자기애가 너무 심하다니까.”나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또 물었다.“나한테 주는 게 아니에요?”석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뒤따라가서 물었다.“뭐하려고요?”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글쎄? 우리 사모님은 뭐가 먹고 싶을까?”나는 주방에 들어가 석지훈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배 안 고파요. 얼른 나랑 얘기 좀 해요.”석지훈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데이트하고 싶다면서.”“지금 데이트 아니에요?”“우리 사모님 눈에는 이게 데이트인가 보네...”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우리 이따가 어디 가요?”“밥 먹고 놀이공원에 갈 거야.”나는 기뻐하면서 물었다.“오빠, 놀이공원 가봤어요?”석지훈은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날 보면서 얘기했다.“장난치지 마.”나는 석지훈의 팔을 놓아주었다.석지훈은 얼른 요리를 시작했다. 열심히 집중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석지훈의 부상 때문에 우리는 간이 적게 된 요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나는 석지훈이 만드는 모든 음식을 좋아했다. 음식의 맛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말이다.전에는 항상 내가 고현성을 위해 요리하는 거였다.그래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밥을 먹은 후 석지훈은 운전대를 잡고 나를 데리고 시 중심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갔다.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젊은 커플들이었다. 나와 석지훈은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누볐다.어두운 녹색 코트를 입은 석지훈은 오늘따라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반짝이는 악마 머리띠를 샀다.머리띠를 한 후, 내가 물었다.“예뻐요?”석지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나는 손을 들고 물었다.“오빠도 같이할 거죠?”석지훈이 악마 머리띠를 쓴다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석지훈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의 대답이었다.나는 석지훈에게 악마
“나도 진실은 잘 몰라. 그래서 함부로 얘기할 수 없어. 하지만 진서준의 죽음이 왕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해. 진유겸이 알아냈거든. 하지만 그걸 최희연이 알면 버티지 못할까 봐 알려주지 않은 거야.”만약 왕자현이 최희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최희연은 유일한 희망을 잃고 그대로 사라지려고 할 것이다.나는 그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럼 어떡해요?”“사람을 시켜서 이 일의 진실을 알아보게 할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아내기 전에는 꼭 비밀을 지켜야 해. 희연 씨가 이 일을 발견하게 해서는 안 돼.”“만약 진실이...”석지훈이 되물었다.“그게 중요한가?”나는 멍해졌다. 그럼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얘기했다.“윤아야, 만약 정말 진유겸의 말대로 왕자현이 이 모든 것을 저질렀다고 해도 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야. 희연 씨에게는 왕자현이 진실보다 더욱 중요하니까.”최희연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진실이 아닌 왕자현이다.왕자현은 최희연의 유일한 희망이다.그래서 진유겸이 이 비밀을 까밝히지 않은 것이었다.진유겸이 이것까지 생각해 주다니.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알겠어요.”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하지만 왕자현은... 왜 최희연을 속인 거지?“그래, 배고파?”석지훈이 수영장에서 나왔다. 나는 익숙한 듯 석지훈의 팔을 안고 얘기했다.“아니요. 오늘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석지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는데?”“서오가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제가 담현아한테 부탁했거든요. 하지만 이걸 엄마한테 들키면 안 돼요. 아, 그리고 오늘 시혁 오빠한테 이연 씨의 병에 대해 알려줬어요. 하지만 한민수의 전여친 일은 처리하기 어렵네요.”석지훈은 서오의 일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별장 안의 방으로 데려가면서 넌지시 물을 뿐이었다.“한민수의 전여친? 혹시 엄슬기라는 사람 말이야?”석지훈이 한민수의 전여친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나
석지훈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진유겸은 석지훈의 말을 듣고 더욱 골치 아파했다.깊은 한숨을 내뱉은 진유겸이 얘기했다.“최희연은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정신이 불안정해.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몰라. 그런 최희연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왕자현인데, 내가 진실을 알려줬다가 최희연이 정말... 정말 무너지면 어떡해.”최희연은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않았다.자살까지 생각한 사람이니까 말이다.석지훈이 옆에서 얘기했다.“왕자현에게 의지하는 사람이니, 네가 만약 왕자현을 빼돌린다면 희연 씨 상황도 악화될 거야.”“그냥 거짓말 속에서 살라고 해.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왕자현은 정말 최희연을 사랑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야.”석지훈이 물었다.“너는?”“응?”“너는 그렇게 떠나보낼 수 있어?”진유겸은 석지훈의 질문에 피식 웃고 대답했다.“나를 뼛속까지 싫어하는 사람이야. 이번 생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내가 잘못해서 그래.”“내가 예전에 너한테 경고했잖아.”한층 더 차가워진 봄바람이 불었다.진유겸은 몸을 일으키면서 얘기했다.“지금 와서 얘기해봤자 소용없어. 지훈아. 난 운성을 떠날 거야. 왕자현과 마주치면 또 피튀기는 전쟁이 시작될 거니까 말이야.”진유겸의 말을 들어보면 왕자현은 여전히 운성에 있는 것 같았다.최희연은 왕자현이 아이스랜드에 있다고 했는데...석지훈은 진유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진유겸을 석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얘기했다.“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도 꽤 오래됐지? 서로 죽고 죽이고 싸우고 화해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너라도 성공해서 다행이다. 나는... 완전히 실패야. 네 말을 잘 들을 걸 그랬어.”석지훈은 몸을 약간 틀어 진유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얘기했다.“내가 말릴 때 넌 한 번도 듣지 않았어. 사실 우리는 많이 닮았어. 하지만 시작점이 달랐지. 나는 항상 내가 석씨 가
나는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문자를 보냈다.연시혁은 바로 답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별장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나는 밤바람을 맞으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송이연의 일로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나는 문자 속에서 똑똑히 얘기했다.송이연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고 말이다.“지금 운성에 도착했어.”그렇게 말하는 연시혁의 목소리는 약간 젖어있는 것 같았다.“수아야, 이제 어떡해?”하지만 그렇게 물어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오빠, 그냥 옆에 같이 있어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부담스러워 할 거야.”연시혁의 울먹임을 들으면서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수아야, 나 죽을 것 같아.”차는 바닷가에 멈춰 섰다. 나는 연시혁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절벽 위의 호화로운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석지훈이 아침에 별장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이 별장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별장 근처로 걸어갔다.300미터쯤 남았을 때, 나는 별장의 수영장에 두 남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은 수영장 끝에 앉아있었고 한 명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서 있었다.서 있는 사람은 바로 석지훈이었다.나는 단번에 그의 뒷모습을 알아보았다.하지만 앉아있는 건...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걸 버리고 여길 떠날 거야.”진유겸의 목소리였다.“희연 씨는 네가 준 것들에 대해 흥미가 없을걸?”진유겸이 최희연에게 뭘 준다고?나는 갑자기 진유겸이 나한테 준 서류가 생각났다.“희연이가 원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왕자현이 미친개처럼 내 뒤를 쫓고 있어. 상처는 장난 아니지. 그래도 왕자현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왕자현이 진유겸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왕자현은 보기엔 부드러워도 사실을 아
다소 친하지 않은 오빠 말이다.예지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좋은 남자가 있다면 소개해줘요. 난 결혼하고 싶어요.”나는 웃으면서 얘기했다.“이제 나이가 몇이라고 그래요.”“빨리 결혼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예지한은 그저 담현아보다 한 살 정도 많아 보였다.나는 일부러 예지한을 떠보려 말했다.“피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맞아요. 그러니까 얼른 남자친구를 찾아야겠어요.”예지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물었다.“소개해줄 사람 있어요?”“소개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죠.”예지한이 실망한 듯 얘기했다.“그렇게 어려워요?”그리고 묵묵히 계속 일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최희연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자현 씨가 아이스랜드로 갔어.”왕자현이 갑자기 아이스랜드로 갔다니?지금 아이스랜드로 가는 게 최희연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알 텐데...최희연은 왕자현이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나는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급한 일이 있으셨나 봐?”“잘 모르겠어.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아서. 아마 처리할 일이 있는 모양이야. 어젯밤에 떠났는데 여태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최희연은 내 말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쓸데없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자현 씨가 떠나니까 마음이 복잡하고 기분이 이상해.”담현아가 물었다.“왜 복잡해요?”“요즘 꿈에서 자꾸만 진유경이 나와.”“...”카페에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원래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서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생겼어. 좀 도와줄...”나는 어머니의 말을 끊고 얘기했다.“그 일에 대해서 이미 들었어요. 민수 오빠가 연락했거든요. 아까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는데 서오를 노리고 있는 건 현성 씨와 유희진 검사예요. 한 명
유희진이 고현성의 약혼녀라니.나는 어젯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리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시윤을 때리고 있었다.그럼 그때 이미 날 알아봤을 텐데...게다가 그 여자는 그때도 고현성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여자는 악의 하나 없이 이 사건을 받겠다고 했다.하지만 유희진은 유씨 가문 사람 같지 않았다.오히려 유서정보다 더욱 고급스러웠다.하지만 유서정이 더 예쁘긴 했다.유희진에게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흘러내렸다.그런 카리스마는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아마 오랜 시간 검사를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담현아가 설명했다.“고현성 씨는 정신을 차려보니 약혼녀가 생긴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나는 담현아를 보면서 물었다.“무슨 뜻이야?”“고현성 씨는 이 결혼을 수긍하지 않았지만 또 혼약을 깨트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유희진 검사를 방패막이로 쓰고 있는 느낌이에요.”“그럼 유희진 검사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렇지 않아 하더라고요. 그 사람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그날 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린 이유는 분명 고현성 씨 때문인데, 고현성 씨 앞에서는 차갑게 구니까 말이에요.”“차갑게 군다고?”“아저씨가 알려줬는데 두 사람은 거의 연락하지 않는대요. 오늘도 서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결국 서오의 일로 엮인 거래요.”유희진이 서오를 주시하고 있는 건 분명 고현성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유희진이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거지?신비스러운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유희진은 본인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에요. 유서경처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요.”“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가자. 일단 희연이를 만나러 가자. 아마 카페에 있을 거야. 아마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걸?”최희연을 떠올리면 저번의 일이 생각났다.마음속 상처가 잘 치유됐을련지. 걱정되었다.그 사건이 일어난 후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나는 담현아와
어머니한테는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들키면 어머니는 마음 아파할 게 분명하니까. 나를 탓하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으시겠지.내 머릿속에서 문득 한 단어가 스쳐 갔다.“경찰서에 간 거야?”“선배를 보러 갔어요. 그러다가 본 거예요. 선배의 사건이 엄청 어려운가 봐요. 무죄판결이 나기 어려울 정도래요.”“유희진 씨는 뭐라고 하셨어?”“아직 조사 중이래요.”담현아는 말을 마친 후 나한테 또 물었다.“수아 언니, 처음은 피가 나요?”“갑자기 그건 왜?”“어젯밤에... 그런데 피가 안 났어요.”“피가 안 날 수도 있어.”아니, 잠깐만담현아와 고정재가...?나는 속으로 기뻐했다.“그럼 다행이네요. 어제 피가 안 나서 아저씨가 저를 엄청 위로해줬거든요. 이것 때문에 기분도 안 좋았어요.”나는 고정재가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마치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사랑을 속삭이는 석지훈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남자는 참 신기한 동물이다. 평소에는 차갑고 도도해 보여도 운명적인 그 상대를 만나면 입안의 사탕처럼 달달하게 구니까 말이다.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좋네.”담현아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뭐가요?”“우리 모두 사랑받고 있잖아.”전에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적어도 지금은 사랑받고 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건강하고 귀여운 아들과 딸도 있고.“나는 인생이 그냥 다 쉬웠어요.”담현아가 만족한 듯 얘기했다.“사업도 문제없었고 모든 일에 걸림돌이 없었어요. 만난 남자도... 너무 좋은 사람이고요. 태어나서부터 유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부럽네.”“하하, 자랑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이런 삶에 감사하다는 거지. 이제 경찰서로 갈까요?”“지금 경찰서로 가면 내 어머니랑 마주치는 거 아니야?”“그러면 먼저 어머님께 연락해봐요.”내가 어머니한테 연락하려는데 조민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서오가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있다고 말이다. “까다로운 일이야.”난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물어본 거예요. 거기 외전에 썼잖아요. 날 예쁘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오빠의 의견이 궁금했어요.”나는 석지훈의 반응이 궁금했다.석지훈은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서 얘기했다.“이제 좀 졸리네. 너도 얼른 자. 내일 다시 얘기하자.”“...”석지훈이 새벽에 먼저 일어났다. 나는 멍한 상태로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서는 두 의사가 석지훈을 치료해주고 있었다.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석지훈의 상처를 확인했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치료를 받은 후 석지훈은 나더러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송이연이 아래층에 있었기에 석지훈은 아래층에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하긴 익숙하지 않으니 그럴 법도 하다.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 한 잔을 따랐다. 이때 마침 원태웅이 전화 와서 억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내 트위터 계정, 결국 사라졌어!”난 의아해하면서 물었다.“해결한 거 아니었어요?”“형이 아침에 트위터를 다운 받았나봐. 그리고 내 계정이 있는 걸 보고 또 윤승민한테 전화를 걸었다. 윤승민도 놀라서 얼른 처리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결국... 심지어 윤승민은 근무 태도 불량으로 월급까지 깎였다. 하지만 공식계정은 아직 남아있어!”“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그러게. 내 트위터 계정을 삭제할 생각은 했지만 공식계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봐.”석지훈은 그저 원태웅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나?나는 윤승민에게 문자를 보내 물었다. 그러자 윤승민이 대답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아직 공식계정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대감 트위터만 먼저 삭제했습니다.]윤승민이 일부러 공식계정을 지우지 않은 것이었다.[고마워요, 윤 비서님.]그리고 생각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깎인 월급은 함승윤 씨한테 얘기해서 더 얹어드리라고 할게요. 그리고 3개월 치 보너스도 드릴게요.]나는 기쁜 마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가 석지훈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그리고 물을 마시는 석지훈의 모습을 물끄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