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석지훈의 말을 듣는 것이 옳았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되었다.나는 담현아의 일을 고정재에게 문자로 보냈고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그에게서 답장이 왔다.“알겠어. 고마워, 꼬마 아가씨.”담현아는 고정재의 아내였고 고정재가 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기에 나는 더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최욱현에게 다시 문자를 보냈다.[담현아는 내 친구니까 다치게 하지 마.]최욱현이 답장했다.[그 여자는 입이 가벼워서 귀에 거슬리는 말만 늘어놓던데 내가 멋대로 하든 말든 그 여자랑 무슨 상관이야?]최욱현은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였다.[부탁이야, 현아를 다치게 하지 말아줘.]최욱현이 또 답장했다.[응, 그냥 겁만 살짝 줄 거야.]최욱현의 답장을 받은 나는 그제야 시름이 놓였다. 그때 석지훈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아직도 헬기 앞에 서 있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윤아야, 더 지체하다간 늦어.”나는 핸드폰을 넣고 석지훈을 따라가며 물었다.“뭐가 늦어진다는 거예요?”석지훈은 내 손을 잡고 그대로 차에 올라탔다. 석지훈은 차에서 내내 석씨 가문의 그 두 반지를 만지작거렸다.마치 반지에 애착이라도 가는 것 같은 모양이었다.오늘의 석지훈은 평소와 달리 어딘가 이상했다.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뭘 만지는 거예요?”“여기 반지 하나가 부족해서 말이야.”그 순간 나는 석지훈은 은근히 약혼반지를 암시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나는 머쓱해서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석지훈의 말을 받아주었다.“난 두 개나 꼈는걸요.”석지훈은 작게 미소를 짓더니 내게 물었다.“내 팔찌 예뻐?”아까까지 반지를 말하다가 또 갑자기 팔찌를 말하는 석지훈에 나는 조금 어리둥절했지만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다.“예뻐요.”“이건 내가 15년 전에 산 거야. 그때 난 첫 월급을 받았는데 목숨 걸고 번 돈치고는 그다지 많지 않았어, 20만도 채 안 됐으니까 말이야. 난 그 돈으로 팔찌 한 쌍을 샀어. 네가 좋다면 너에게 남은 하나를 줄게.
석지훈의 입에서 석씨 부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그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마치 끝없는 유혹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그러다가도 문득 지금이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주저하며 물었다.“어떻게 석씨 부인이 되는데요?”석지훈은 내 손목의 팔찌를 살살 어루만지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대답했다.“나랑 같이 아일랜드로 가서 결혼증을 발급받자.”석지훈과 결혼하는 것은 내가 오랫동안 꿈꿔온 것이었다.나는 석씨 부인이 되어 석지훈의 명실상부한 아내가 되고 싶었고 그렇게 되면 유진도 더는 그 말로 나를 막지 않을 것이며 심지어는 당당하게 석지훈의 세상에 발을 들일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보아도 적절한 시기는 아니었다.나는 석지훈에게 다시 한번 알려주었다.“하지만 오빠의 어머니는...”석지훈은 나를 바라보더니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버렸다.“그럼 네가 동의한 거로 알고 있을게.”“...”나는 그의 의견을 물어봤을 뿐 동의한 게 아니었다.나는 뭐라도 말을 하고 싶었지만 석지훈의 자상한 얼굴을 보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석지훈이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건 아침에 맨션에 있을 때부터 눈치챈 사실이었다. 석지훈은 다정하게 나에게 왜 웃냐고 물었고 자상하게 내가 예쁘다고 해줬으며 평소에는 잘 입지도 않는 비즈니스 가죽 재킷을 갈아입었다.게다가 별로 값이 가지도 않는 롤렉스 서브마리너 그린을 찼다.나는 석지훈의 손을 잡아다 물었다.“왜 이걸 찬 거예요?”석지훈은 나와 깍지를 낀 손을 바라보며 말했다.“8년 전에 너희 아버지한테서 석씨 가문을 물려받을 때 너희 아버지께서 나한테 주신 선물이야. 그리고 이건 자신이 아버지한테서 석씨 가문을 물려받을 때 받았던 시계라고 말해주셨어. 일종의 계승 같은 거지.”내가 롤렉스 서브마리너 그린을 천천히 어루만지며 무언가 말하려던 참에 석지훈이 또 먼저 입을 열었다.“너희 아버지는... 적어도 내가 살아온 27년 동안
나는 석지훈과 함께 혼인신고를 하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함승윤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함 집사님께서 왜 여기 계세요?”함승윤은 웃으며 설명해주었다.“석 대표님께 필요한 서류들을 전달해주러 왔습니다.”함승윤은 석지훈에게 서류를 전달하고는 얼른 윤 비서 옆에 가서 섰다. 그리고 나는 함승윤이 가져온 서류가 무엇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석지훈은 앞장서서 혼인신고를 하러 갔고 나는 선 자리에 서서 그런 석지훈의 뒷모습을 가리키며 윤 비서에게 물었다.“오빠가 왜 말을 안 하는 거죠?”석지훈은 차에서 내려 서부터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윤 비서는 속닥거리며 나에게 알려주었다.“석 대표님은 긴장하셔서 그런 겁니다.”석지훈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윤승민.”석지훈은 그저 윤 비서의 이름을 작게 부른 것뿐인데 윤 비서는 깜짝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나는 재빨리 석지훈을 따라가 그의 팔짱을 꼈다.석지훈은 나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물었다.“너 생각 잘해야 한다?”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석지훈이 준비한 것이고 프러포즈도 하지 않았을뿐더러 내 의견은 묻지도 않고 덜컥 혼인신고부터 하러 왔으니 이제 와서 마음을 바꾼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석지훈은 내가 싫다고 해도 기세로 밀어붙일 사람이었다.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결혼은 내가 꿈꿔온 것이기에 조금의 거부감도 들지 않았다.나는 굳은 얼굴로 석지훈에게 물었다.“나한테 석씨 부인이 되어달라고 한 걸 후회하는 거예요?”나는 일부러 딱딱한 말투로 말했고 내 말을 들은 석지훈은 슬며시 웃고는 나를 데리고 진짜 혼인신고를 하러 들어갔다. 그리고 혼인신고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머리가 멍해져서 살짝 믿어지지 않기도 했다.들어가서부터 나오기까지 20분도 채 걸리지 않았으니 얼떨떨한 게 어쩌면 정상이기도 했다.게다가 손에 들린 분홍색 쪽지를 보니 더욱 기분이 이상했다.그 쪽지에는 우리가 정식으로 부부가 됐음을 축복하는 글이 적혀있었다.「존경하는 신사, 부인에게: 저
나는 원래 울고 있지 않았고 단지 눈이 시려서 울고 싶은 것뿐이었다. 하지만 석지훈의 말에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고 넋이 나간 채로 석지훈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윤 비서와 함승윤도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눈물을 흘린다는 게 점점 머쓱해져 애꿎은 석지훈만 탓했다.“오빠랑 무슨 상관인데요, 난 그냥 이렇게 오빠한테 팔려가는 것 같아서 속상해서 그래요!”마음이 아픈 것도 아니었고 행복해서였다.나는 지금이 너무 행복해서 당장이라도 엉엉 울고 싶었다.하지만 우는 건 둘째치고 윤 비서와 함승윤 앞에서 나를 이런 식으로 놀리는 석지훈이 살짝은 괘씸해졌다.그 사람들이 사적으로 얼마나 많은 가십을 주고받는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내가 무엇을 하든 간에 놀린 적이라곤 없던 석지훈이었는데 그런 그가 갑자기 나를 이렇게 놀린 것이다.석지훈은 목소리를 살짝 높이며 되물었다.“팔려가?”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그럼 아니에요? 난 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오빠, 우리가 정말 부부가 된 거예요?”석지훈은 아까보다는 차가워진 말투로 대답했다.“아직은 아니야.”나는 충격에 말을 더듬었다.“설마 전 아직 석씨 부인이 아닌 거예요?”어리둥절한 내 모습을 본 석지훈은 무의식적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설명해주었다.“국내의 법은 우리가 직접 결혼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서 대사관에서 등기해야 해. 하지만 아일랜드의 법은 또 대사관을 인정하지 않아서 우린 귀국해서 또 등기해야 해. 귀국해서 등기를 마치면 넌 진짜 석씨 부인이 되는 거야.”나는 석지훈의 말이 다소 복잡해서 이해를 잘하진 못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곧장 석지훈을 따라 비행기를 타고 운성시로 돌아가기로 했다.하지만 정작 아이들은 데리고 가지 않을 것 같아 석지훈에게 아이들을 데려가자고 제안하니 석지훈이 내게 본인의 계획을 말해주었다.“윤민이네는 여기로 오려면 서너 시간은 걸려. 오는데 지칠 것 같아서 너희 비서한테 부탁해서 두 아이는 본가로 데려가라고 했어. 그리고 우
언제 잃을지 모를 불안 속에서 살았다니?!나는 순간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늘 자리 잡고 있던 불안을 마주했다. 항상 무언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나의 두려움을 석지훈이 제대로 보아낸 것이다.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두려움과 불안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무의식적으로 자꾸 튀어나왔다.나는 아차 싶어 석지훈에게 사과를 했다.“미안해요, 그냥 한번 해본 말이었어요.”“괜찮아. 앞으로는 내가 너와 함께할 거야.”결혼 후의 석지훈은 점점 더 입에 꿀 발린 소리를 하는데 도가 터 가는 것 같았다.전에 알던 차갑던 석지훈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석지훈에게 요즘에 제대로 쉬지 못한 거 아니냐고 묻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응, 살짝 피곤하네.”그 말에 나는 또 마음이 아파져서 얼른 휴식을 권했다.“그럼 좀 자요.”석지훈은 쥐고 있던 목걸이를 옆에 내려놓았다. 손목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차고 있던 롤렉스 서브마리너 그린은 없고 까르띠에 팔찌만 있었다.석지훈은 정장을 벗어 침대 옆에 두고 옷장에서 짙은 보라색 실크 가운을 들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씻고 나온 석지훈은 아까보다 훨씬 더 개운해 보였다.석지훈은 내 옆에 서서 말했다.“졸려?”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전 방금 깼어요.”나는 졸리지 않았지만 석지훈은 기어코 나를 침대로 끌어당겼다.석지훈이 나를 품 안에 가둔 탓에 꼼짝없이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기대게 되었고 일정한 그의 심장박동 소리를 듣다 보니 다시 졸음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수술하고 난 뒤로 전보다 훨씬 쉽게 피곤해지는 것 같았다.몸이 아주 조금만 힘들어도 피곤해지기 일쑤였다.그렇게 다시 눈 떴을 때 본 광경은 나보다 먼저 깬 석지훈이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책을 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책은 예전에 보던 「F국 중위 여인」이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석지훈의 팔을 잡으며 물었다.“지금 몇 시예요?”내 말에 핸드폰 화면을 확인한 석지훈이 대답했다.“다섯 시야.”“저녁 식사 시간이 다
나는 석지훈을 보며 해사하게 웃으며 일부러 얇은 목소리로 소녀처럼 애교를 잔뜩 부리며 말했다.“여보가 나 좀 안아줘요.”석지훈은 그늘이 진 얼굴로 중얼거렸다.“네가 먼저 건드린 거야.”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 석지훈을 빤히 바라보았다.“네?”“아가야.”낮게 깔린 석지훈의 목소리는 상상 이상으로 매력적이었다.초면인 목소리에 나는 순간 사고회로가 정지되어 버벅거렸다.“뭐라고요?”이어서 들려오는 석지훈의 목소리는 어딘가 살짝 급해 보였다.“여보라고 불러볼래?”여전히 어리둥절한 나를 두고 석지훈은 다시 나를 재촉하는 듯 말끝을 올렸다.“응?”어딘가 묘한 느낌에 나는 다급히 두 글자를 뱉었다.“여보.”...우리가 다시 침대에서 일어났을 땐 이미 저녁 일곱 시였다.나는 다급히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우리가 집에 가서 밥을 먹을 거라는 말을 들은 어머니는 웃으며 말했다.“우리도 방금 밥을 먹으려던 참이었는데, 다행히 마침 네가 전화를 해줬구나! 그럼 내가 음식을 몇 개 더 해놓을게. 너희들이 거의 다 도착할 때쯤이면 비슷하게 다 완성될 것 같아.”여보...속으로 계속 여보라는 말을 되뇌다 보니 확실히 석지훈이 눈이 돌아갈 만한 호칭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석지훈은 한 번도 나를 여보라고 불러준 적이 없었고 계속 석씨 부인으로만 불러왔다.나는 별장으로 가는 길 내내 아까의 장면을 떠올렸다. 정말이지 생각하면 할수록 얼굴이 뜨거워졌고 심장은 계속 쿵쾅댔다.별장 입구에 도착하자 윤 비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윤 비서는 우리를 발견하고 발 옆에 놔두었던 선물들을 들고 우리에게로 다가와 석지훈에게 보고했다.“석 대표님, 제가 사모님 어머님께서 어떤 취향인지 몰라 선물로 보건품과 비취 팔찌를 샀습니다. 그리고 아버님의 선물로는 담배와 술을 샀습니다.”윤 비서는 자연스럽게 나를 사모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윤 비서는 눈치가 빨랐다. 이번 일은 윤 비서와 따로 만나서 격려를 해주고 석지훈에게 윤 비서의 월급 인상에 대해 논의
석지훈이 갑자기 아빠를 ‘아버님’이라고 부르는 데다 깍듯하게 어른 대하는 태도를 보이니 부모님은 물론 나까지 어리둥절했다. 석지훈이 무슨 생각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아빠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자네, 이게...”그러다가 금세 함박웃음을 지으며 재치있게 물었다.“설마 자네, 우리 수아하고 혼인신고 했나?”석지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하게 말했다.“얼마 전 아일랜드에서 혼인신고를 하고 국내에서도 절차를 마쳤습니다. 양국에서 모두 인정되는 혼인신고서이고 수아와 100년 기한의 혼인 계약을 했습니다.”부모님 앞에서 그는 나를 수아라고 불렀다.아빠는 무식한 사람이 아니었고 오히려 우리 가족 중 학력이 가장 높았다. 젊었을 때 그는 금융과 법학을 복수 전공했었다.학력이 낮더라도 상식적으로 아일랜드의 혼인법이 어떤지는 알고 있었다. 아빠는 석지훈을 더욱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자네와 수아의 결혼은 내 평생소원이었네. 둘이 결혼해서 정식 부부가 되고 아직 출생신고도 안 한 아이들도 호적에 올리고... 그리고 수아의 결혼식은 내 손으로 직접 해주고 싶었는데 이제야 마음이 놓이네!”아빠가 석지훈에게 바쁜지 묻는 순간, 나는 아빠가 이 이야기를 꺼낼 거라고 예상했다. 엄마가 얼마 전에 아빠가 내 결혼 문제로 노심초사한다고 했었기 때문이다.그리고 지난번 석지훈이 아빠를 ‘아저씨’라고 부른 것이 아빠 마음에 걸렸던 것 같았다.하지만 그때 석지훈이 잘못한 것은 없었다.그런데도 엄마는 몇 번이나 나에게 석지훈에게 다음에 아빠를 만나면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일러주라고 했다.하지만 난 이 문제에 대해 석지훈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예의를 중시하는 그는 모든 일을 신중하게 생각하고 계획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빠의 걱정거리, 엄마의 염려까지 그는 이미 다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일에 굳이 나설 필요가 없었다.과묵한 석지훈은 아빠의 긴 이야기를 듣고 핵심만 짚어서 대답했다.“아버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아일랜드에서 혼인신고하고 나서 난 분명 안 울었는데 오빠는 내가 울었다고 했잖아요. 원래 안 울었는데 오빠 말 때문에 결국 울음이 터져서 윤 비서랑 함 집사한테 웃음거리가 됐다고요.”내 말에 석지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당연하죠. 난 꽤 앙심 깊은 사람이거든요!”석지훈이 갑자기 나를 불렀다.“윤아야.”나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대답했다.“네?”“그날 네가 억지로 눈물 참는 모습이 더 못생겼어.”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내가 말이 없자 그는 차분하게 물었다.“화났어?”나는 그의 말투를 따라 대답했다.“절대 없어요.”“우리 사모님이 또 거짓말이네.”나는 정말 화나지 않았다. 뭐 그런 걸로 화를 내겠는가?석지훈도 내가 화난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그저 장난을 치고 싶었을 뿐이었다....아이들과 잠깐 시간을 보낸 후, 나는 석지훈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집에 돌아온 석지훈은 서재에서 업무를 보느라 바빴다.그때 담현아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최욱현 그 개자식 진짜 나쁜 놈이에요.]담현아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건 드문 일이었다.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문자를 보냈다.[최근에 무슨 일 있었어?]담현아는 화난 표정의 이모티콘과 함께 문자를 보냈다.[만나서 얘기해요.]담현아는 당장 만나자는 듯했지만 서재의 석지훈 생각에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시간도 꽤 늦은 데다 담현아가 저렇게까지 화를 내는 걸 보니 뭔가 심각한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나는 석지훈에게 줄 커피를 타서 서재로 들어갔다. 그는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말했다.“우리 사모님, 할 말이 있나 보네?”이제는 나를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웠다.나는 커피를 그의 앞에 내려놓고 다정하게 그의 목을 껴안으며 달달하게 물었다.“오빠, 언제까지 일할 거예요?”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물었다.“왜?”“현아가 급하게 만나자고 하는데...”내가 말했다.“알았어. 조심해서 다녀와.”석지훈은 허락했다.나
이 경악하는 목소리는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석지훈의 머리에서 악마 머리띠를 벗겨내고 돌아서며 웃었다.“하! 태웅 오빠도 여기서 놀고 있었어요?”원태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맨날 정색하고 차가운 지훈이 형이 악마 뿔 머리띠라니, 진짜 귀엽다.”석지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점점 버릇없어지는구나.”말에 담긴 협박을 알아챈 원태웅은 재빨리 잘못을 빌었다.“잘못했어. 난 태림이 그 녀석한테 가봐야겠다. 두 사람 데이트 방해 안 할게. 근데 형 이런 모습 보니까 진짜 인간적이야.”석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뭐야? 아직도 손에 못 넣었어?”원태웅은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아이고, 형.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봐!”원태웅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흰 셔츠를 입은 문태림이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잔뜩 짜증 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 같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사람은 뭐예요?”두 남자가 놀이공원에 있는 게 좀 수상했다.석지훈은 원태웅의 비밀을 바로 털어놓았다.“둘이 썸씽 같은 건데, 몇 년째 아웅다웅하면서도 관계를 정확히 안 정했어.”나는 놀라서 말했다.“태웅 오빠가 게이!”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호기심에 재빨리 물었다.“다른 비밀은 없어요? 오빠는 완전 정보통 같아요. 두 사람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말했잖아. 다들 나한테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고.”그들의 속마음이 석지훈에게는 그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혹시 창피해서 화났어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하게 물었다.“어?”“태웅 오빠에게 냉정한 모습 말고 다른 모습 들켜서요.”“상관없어. 우리 관람차 타러 가자.”석지훈은 내 손을 꼭 잡고 사건 현장을 벗어났다. 우리는 표를 사고 관람차에 올라탔다. 이 높이에서 바라보는 운성의 야경은 너무나 아름다워 기분이 좋아졌다.내가 석지훈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뺨에 얼굴을
석지훈은 가볍게 웃었다.“정말 자기애가 너무 심하다니까.”나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또 물었다.“나한테 주는 게 아니에요?”석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뒤따라가서 물었다.“뭐하려고요?”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글쎄? 우리 사모님은 뭐가 먹고 싶을까?”나는 주방에 들어가 석지훈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배 안 고파요. 얼른 나랑 얘기 좀 해요.”석지훈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데이트하고 싶다면서.”“지금 데이트 아니에요?”“우리 사모님 눈에는 이게 데이트인가 보네...”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우리 이따가 어디 가요?”“밥 먹고 놀이공원에 갈 거야.”나는 기뻐하면서 물었다.“오빠, 놀이공원 가봤어요?”석지훈은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날 보면서 얘기했다.“장난치지 마.”나는 석지훈의 팔을 놓아주었다.석지훈은 얼른 요리를 시작했다. 열심히 집중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석지훈의 부상 때문에 우리는 간이 적게 된 요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나는 석지훈이 만드는 모든 음식을 좋아했다. 음식의 맛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말이다.전에는 항상 내가 고현성을 위해 요리하는 거였다.그래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밥을 먹은 후 석지훈은 운전대를 잡고 나를 데리고 시 중심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갔다.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젊은 커플들이었다. 나와 석지훈은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누볐다.어두운 녹색 코트를 입은 석지훈은 오늘따라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반짝이는 악마 머리띠를 샀다.머리띠를 한 후, 내가 물었다.“예뻐요?”석지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나는 손을 들고 물었다.“오빠도 같이할 거죠?”석지훈이 악마 머리띠를 쓴다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석지훈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의 대답이었다.나는 석지훈에게 악마
“나도 진실은 잘 몰라. 그래서 함부로 얘기할 수 없어. 하지만 진서준의 죽음이 왕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해. 진유겸이 알아냈거든. 하지만 그걸 최희연이 알면 버티지 못할까 봐 알려주지 않은 거야.”만약 왕자현이 최희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최희연은 유일한 희망을 잃고 그대로 사라지려고 할 것이다.나는 그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럼 어떡해요?”“사람을 시켜서 이 일의 진실을 알아보게 할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아내기 전에는 꼭 비밀을 지켜야 해. 희연 씨가 이 일을 발견하게 해서는 안 돼.”“만약 진실이...”석지훈이 되물었다.“그게 중요한가?”나는 멍해졌다. 그럼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얘기했다.“윤아야, 만약 정말 진유겸의 말대로 왕자현이 이 모든 것을 저질렀다고 해도 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야. 희연 씨에게는 왕자현이 진실보다 더욱 중요하니까.”최희연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진실이 아닌 왕자현이다.왕자현은 최희연의 유일한 희망이다.그래서 진유겸이 이 비밀을 까밝히지 않은 것이었다.진유겸이 이것까지 생각해 주다니.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알겠어요.”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하지만 왕자현은... 왜 최희연을 속인 거지?“그래, 배고파?”석지훈이 수영장에서 나왔다. 나는 익숙한 듯 석지훈의 팔을 안고 얘기했다.“아니요. 오늘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석지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는데?”“서오가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제가 담현아한테 부탁했거든요. 하지만 이걸 엄마한테 들키면 안 돼요. 아, 그리고 오늘 시혁 오빠한테 이연 씨의 병에 대해 알려줬어요. 하지만 한민수의 전여친 일은 처리하기 어렵네요.”석지훈은 서오의 일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별장 안의 방으로 데려가면서 넌지시 물을 뿐이었다.“한민수의 전여친? 혹시 엄슬기라는 사람 말이야?”석지훈이 한민수의 전여친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나
석지훈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진유겸은 석지훈의 말을 듣고 더욱 골치 아파했다.깊은 한숨을 내뱉은 진유겸이 얘기했다.“최희연은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정신이 불안정해.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몰라. 그런 최희연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왕자현인데, 내가 진실을 알려줬다가 최희연이 정말... 정말 무너지면 어떡해.”최희연은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않았다.자살까지 생각한 사람이니까 말이다.석지훈이 옆에서 얘기했다.“왕자현에게 의지하는 사람이니, 네가 만약 왕자현을 빼돌린다면 희연 씨 상황도 악화될 거야.”“그냥 거짓말 속에서 살라고 해.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왕자현은 정말 최희연을 사랑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야.”석지훈이 물었다.“너는?”“응?”“너는 그렇게 떠나보낼 수 있어?”진유겸은 석지훈의 질문에 피식 웃고 대답했다.“나를 뼛속까지 싫어하는 사람이야. 이번 생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내가 잘못해서 그래.”“내가 예전에 너한테 경고했잖아.”한층 더 차가워진 봄바람이 불었다.진유겸은 몸을 일으키면서 얘기했다.“지금 와서 얘기해봤자 소용없어. 지훈아. 난 운성을 떠날 거야. 왕자현과 마주치면 또 피튀기는 전쟁이 시작될 거니까 말이야.”진유겸의 말을 들어보면 왕자현은 여전히 운성에 있는 것 같았다.최희연은 왕자현이 아이스랜드에 있다고 했는데...석지훈은 진유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진유겸을 석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얘기했다.“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도 꽤 오래됐지? 서로 죽고 죽이고 싸우고 화해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너라도 성공해서 다행이다. 나는... 완전히 실패야. 네 말을 잘 들을 걸 그랬어.”석지훈은 몸을 약간 틀어 진유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얘기했다.“내가 말릴 때 넌 한 번도 듣지 않았어. 사실 우리는 많이 닮았어. 하지만 시작점이 달랐지. 나는 항상 내가 석씨 가
나는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문자를 보냈다.연시혁은 바로 답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별장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나는 밤바람을 맞으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송이연의 일로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나는 문자 속에서 똑똑히 얘기했다.송이연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고 말이다.“지금 운성에 도착했어.”그렇게 말하는 연시혁의 목소리는 약간 젖어있는 것 같았다.“수아야, 이제 어떡해?”하지만 그렇게 물어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오빠, 그냥 옆에 같이 있어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부담스러워 할 거야.”연시혁의 울먹임을 들으면서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수아야, 나 죽을 것 같아.”차는 바닷가에 멈춰 섰다. 나는 연시혁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절벽 위의 호화로운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석지훈이 아침에 별장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이 별장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별장 근처로 걸어갔다.300미터쯤 남았을 때, 나는 별장의 수영장에 두 남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은 수영장 끝에 앉아있었고 한 명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서 있었다.서 있는 사람은 바로 석지훈이었다.나는 단번에 그의 뒷모습을 알아보았다.하지만 앉아있는 건...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걸 버리고 여길 떠날 거야.”진유겸의 목소리였다.“희연 씨는 네가 준 것들에 대해 흥미가 없을걸?”진유겸이 최희연에게 뭘 준다고?나는 갑자기 진유겸이 나한테 준 서류가 생각났다.“희연이가 원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왕자현이 미친개처럼 내 뒤를 쫓고 있어. 상처는 장난 아니지. 그래도 왕자현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왕자현이 진유겸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왕자현은 보기엔 부드러워도 사실을 아
다소 친하지 않은 오빠 말이다.예지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좋은 남자가 있다면 소개해줘요. 난 결혼하고 싶어요.”나는 웃으면서 얘기했다.“이제 나이가 몇이라고 그래요.”“빨리 결혼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예지한은 그저 담현아보다 한 살 정도 많아 보였다.나는 일부러 예지한을 떠보려 말했다.“피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맞아요. 그러니까 얼른 남자친구를 찾아야겠어요.”예지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물었다.“소개해줄 사람 있어요?”“소개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죠.”예지한이 실망한 듯 얘기했다.“그렇게 어려워요?”그리고 묵묵히 계속 일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최희연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자현 씨가 아이스랜드로 갔어.”왕자현이 갑자기 아이스랜드로 갔다니?지금 아이스랜드로 가는 게 최희연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알 텐데...최희연은 왕자현이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나는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급한 일이 있으셨나 봐?”“잘 모르겠어.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아서. 아마 처리할 일이 있는 모양이야. 어젯밤에 떠났는데 여태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최희연은 내 말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쓸데없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자현 씨가 떠나니까 마음이 복잡하고 기분이 이상해.”담현아가 물었다.“왜 복잡해요?”“요즘 꿈에서 자꾸만 진유경이 나와.”“...”카페에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원래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서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생겼어. 좀 도와줄...”나는 어머니의 말을 끊고 얘기했다.“그 일에 대해서 이미 들었어요. 민수 오빠가 연락했거든요. 아까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는데 서오를 노리고 있는 건 현성 씨와 유희진 검사예요. 한 명
유희진이 고현성의 약혼녀라니.나는 어젯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리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시윤을 때리고 있었다.그럼 그때 이미 날 알아봤을 텐데...게다가 그 여자는 그때도 고현성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여자는 악의 하나 없이 이 사건을 받겠다고 했다.하지만 유희진은 유씨 가문 사람 같지 않았다.오히려 유서정보다 더욱 고급스러웠다.하지만 유서정이 더 예쁘긴 했다.유희진에게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흘러내렸다.그런 카리스마는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아마 오랜 시간 검사를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담현아가 설명했다.“고현성 씨는 정신을 차려보니 약혼녀가 생긴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나는 담현아를 보면서 물었다.“무슨 뜻이야?”“고현성 씨는 이 결혼을 수긍하지 않았지만 또 혼약을 깨트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유희진 검사를 방패막이로 쓰고 있는 느낌이에요.”“그럼 유희진 검사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렇지 않아 하더라고요. 그 사람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그날 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린 이유는 분명 고현성 씨 때문인데, 고현성 씨 앞에서는 차갑게 구니까 말이에요.”“차갑게 군다고?”“아저씨가 알려줬는데 두 사람은 거의 연락하지 않는대요. 오늘도 서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결국 서오의 일로 엮인 거래요.”유희진이 서오를 주시하고 있는 건 분명 고현성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유희진이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거지?신비스러운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유희진은 본인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에요. 유서경처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요.”“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가자. 일단 희연이를 만나러 가자. 아마 카페에 있을 거야. 아마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걸?”최희연을 떠올리면 저번의 일이 생각났다.마음속 상처가 잘 치유됐을련지. 걱정되었다.그 사건이 일어난 후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나는 담현아와
어머니한테는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들키면 어머니는 마음 아파할 게 분명하니까. 나를 탓하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으시겠지.내 머릿속에서 문득 한 단어가 스쳐 갔다.“경찰서에 간 거야?”“선배를 보러 갔어요. 그러다가 본 거예요. 선배의 사건이 엄청 어려운가 봐요. 무죄판결이 나기 어려울 정도래요.”“유희진 씨는 뭐라고 하셨어?”“아직 조사 중이래요.”담현아는 말을 마친 후 나한테 또 물었다.“수아 언니, 처음은 피가 나요?”“갑자기 그건 왜?”“어젯밤에... 그런데 피가 안 났어요.”“피가 안 날 수도 있어.”아니, 잠깐만담현아와 고정재가...?나는 속으로 기뻐했다.“그럼 다행이네요. 어제 피가 안 나서 아저씨가 저를 엄청 위로해줬거든요. 이것 때문에 기분도 안 좋았어요.”나는 고정재가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마치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사랑을 속삭이는 석지훈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남자는 참 신기한 동물이다. 평소에는 차갑고 도도해 보여도 운명적인 그 상대를 만나면 입안의 사탕처럼 달달하게 구니까 말이다.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좋네.”담현아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뭐가요?”“우리 모두 사랑받고 있잖아.”전에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적어도 지금은 사랑받고 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건강하고 귀여운 아들과 딸도 있고.“나는 인생이 그냥 다 쉬웠어요.”담현아가 만족한 듯 얘기했다.“사업도 문제없었고 모든 일에 걸림돌이 없었어요. 만난 남자도... 너무 좋은 사람이고요. 태어나서부터 유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부럽네.”“하하, 자랑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이런 삶에 감사하다는 거지. 이제 경찰서로 갈까요?”“지금 경찰서로 가면 내 어머니랑 마주치는 거 아니야?”“그러면 먼저 어머님께 연락해봐요.”내가 어머니한테 연락하려는데 조민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서오가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있다고 말이다. “까다로운 일이야.”난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물어본 거예요. 거기 외전에 썼잖아요. 날 예쁘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오빠의 의견이 궁금했어요.”나는 석지훈의 반응이 궁금했다.석지훈은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서 얘기했다.“이제 좀 졸리네. 너도 얼른 자. 내일 다시 얘기하자.”“...”석지훈이 새벽에 먼저 일어났다. 나는 멍한 상태로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서는 두 의사가 석지훈을 치료해주고 있었다.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석지훈의 상처를 확인했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치료를 받은 후 석지훈은 나더러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송이연이 아래층에 있었기에 석지훈은 아래층에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하긴 익숙하지 않으니 그럴 법도 하다.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 한 잔을 따랐다. 이때 마침 원태웅이 전화 와서 억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내 트위터 계정, 결국 사라졌어!”난 의아해하면서 물었다.“해결한 거 아니었어요?”“형이 아침에 트위터를 다운 받았나봐. 그리고 내 계정이 있는 걸 보고 또 윤승민한테 전화를 걸었다. 윤승민도 놀라서 얼른 처리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결국... 심지어 윤승민은 근무 태도 불량으로 월급까지 깎였다. 하지만 공식계정은 아직 남아있어!”“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그러게. 내 트위터 계정을 삭제할 생각은 했지만 공식계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봐.”석지훈은 그저 원태웅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나?나는 윤승민에게 문자를 보내 물었다. 그러자 윤승민이 대답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아직 공식계정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대감 트위터만 먼저 삭제했습니다.]윤승민이 일부러 공식계정을 지우지 않은 것이었다.[고마워요, 윤 비서님.]그리고 생각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깎인 월급은 함승윤 씨한테 얘기해서 더 얹어드리라고 할게요. 그리고 3개월 치 보너스도 드릴게요.]나는 기쁜 마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가 석지훈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그리고 물을 마시는 석지훈의 모습을 물끄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