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겸은 경혜의 감정을 돌볼 겨를이 없었고, 그 죽을 먹으려 하지 않았다.그는 기분이 좋지 않아 일을 다 처리한 다음 컴퓨터를 껐다.이때, 도겸은 탁자 옆에 죽 한 그릇이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쌀을 아주 잘 삶아 한 그릇 가득 담았는데, 안에는 각종 약재가 들어 있었다.‘서연희보다 잘 만들었군.’도겸은 확실히 배가 좀 고팠다. 죽을 들어올렸을 때 아직 따뜻한 것을 발견하고, 그는 간단하게 좀 먹으려 했다.그러나 죽을 입에 넣은 순간, 그는 멈칫했다.‘이 맛은...’도겸은 고개를 숙이더니 표정이 갑자기 복잡해졌다.‘똑같아. 정은이가 예전에 만들었던 죽과 맛이 똑같잖아.’도겸은 저도 모르게 멍을 때리더니 심지어 정은이 아직 곁에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아래층으로 내려갈 때, 경혜는 아직 가지 않았다.그녀는 소파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는데, 불빛에 조용하고 우아하며, 담담하고 평온한 느낌을 내뿜고 있었다.발자국 소리를 들었는지 경혜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평온했던 두 눈은 도겸을 본 순간 감정이 일렁였고, 은근히 놀라움을 드러냈지만 얼른 애써 숨겼다.“일 다 끝냈어요?” 경혜는 책을 한쪽에 놓고 일어나서 웃으며 물었다.도겸은 가볍게 응답한 다음 무심코 한마디 물었다.“그 죽, 네가 끓인 거야?”“맞아요. 내가 끓였어요. 왜요? 입맛에 안 맞는 거예요?”“수고했어. 처음으로 만든 거야?”“예전에 집에서 죽을 끓여본 적이 있지만, 간단한 흰죽이나 야채죽을 끓였어요. 오늘처럼 이렇게 많은 식재료를 넣어서 끓이는 건 처음이에요. 좀 번거롭지만 그 약재들은 위에 좋으니 꾸준히 마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도겸은 눈빛이 싸늘해졌다.“누구한테서 배웠어?”“저기요.” 경혜는 웃으며 책장을 가리켰다.“이 위에 많은 식단이 있잖아요. 마침 위에 좋은 죽을 어떻게 끓이는지에 관한 책이 있길래 따라서 만든 거예요. 맛은 어때요? 다 먹었어요?”도겸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경혜는 눈치 있게 작별을 고했다.떠날
“부탁은 무슨. 좋아하는 차 종류 있어?”정은은 특별한 요구가 없었다.“그냥 쉽게 운전할 수 있으면 돼요.”“그럼 승용차가 좋을 거야. 승차감과 조종성 모두 SUV보다 좋거든. 다만 공간이 많이 좁을 거야. 가족 여행 이런 걸 고려하지 않고 단지 편리하게 출퇴근을 하고 싶다면, 승용차는 확실히 좋은 선택이야.”“좋아요.” 정은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브랜드는?” 남자가 다시 물었다. “선호하는 브랜드 있어?”“아니요.” 정은은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난 G국의 차를 좋아해요.”재석은 눈썹을 치켜올렸다.‘그건 나도 마찬가지인데.’“그럼 예산은?”“얼마든 상관없어요.”두 사람은 먼저 근처에 있는 폭스바겐 매장에 들어섰다.문에 들어서자마자 점원이 웃으며 맞이했다.“두 분은 어떤 차를 보고 싶으세요? 제가 두 분께 소개해 드릴 수 있습니다.”재석이 말했다.“기름을 절약하고 운전하기 쉬운 승용차요. 추천 좀 해주실래요?”“그럼 이건 어떠신가요...”점원은 그들을 데리고 한 부스로 갔다.“이건 올해 새로 나온 신형 티구안 L인데, 공간이 클 뿐만 아니라 외관도 패기가 넘칩니다...”재석은 눈썹을 찡그렸다.정은도 영문을 몰랐다.승용차를 원하다고 했지만, 점원은 오히려 SUV를 보여줬다.뒤에 또 몇 대를 추천했는데, 예외 없이 모두 SUV였다.재석은 입을 열어 주의를 주었다.“저기, 저희는 승용차를 원하는데.”“SUV가 승용차보다 더 멋있지 않습니까? 신분과 지위가 있는 남자들은 모두 SUV를 선택하잖습니까. 이 전조등, 이 엔진 좀 보세요...”재석은 그의 말을 끊었다.“제가 운전하는 것이 아니라 여사님이 운전하는 거예요.”“아이고, 그래도 한 가정에서 대부분 남자가 운전을 하지 않습니까? 여자한테 사준다고 해놓고 결국 운전하는 건 다 우리 남자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남자가 좋아하는...”재석은 어이가 없어 고개를 돌려 정은을 보았다.“다른 매장으로 갈까?”“네! 나도 벌써 가고 싶었어요.”이 점원은 그야
정은이 차를 고를 때, 재석은 말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줄곧 그녀의 곁에 있어줬고, 만약 정은이 어떤 문제를 홀시했다면, 재석은 또 적시에 입을 열어 일깨워주었다.‘일반 친구가 이 정도까지 도울 수 있다고?’게다가 문에 들어서면서부터 남자의 눈빛은 줄곧 정은에게 떨어졌다. 눈에 비친 집중과 애정은 도저히 가짜 같지가 않았다.‘내가 전에 만났던 신혼부부들과 똑같잖아? 신혼이 아니더라도 커플인 게 틀림없어!’그래서 점원이 그런 질문을 했던 것이다.정은은 이런 오해를 직면한 게 처음이 아니었다. 그녀는 재석의 표정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아 그저 손을 흔들었다.“그런 거 아니에요.”점원은 얼른 사과했다.재석은 말을 하지 않았고, 정은을 바라보는 눈빛은 여전히 부드러웠다.점원은 영문을 몰랐다.‘이래도 커플이 아니라고?’...길 건너편에서, 이미윤은 쇼핑하러 나왔는데 갑자기 차를 정비해야 한다는 생각에 차 매장에 들렀다.매장에서 나올 때 뜻밖에도 아는 사람을 보았다니.그녀는 모자를 들더니 눈을 깜빡이며 다시 한번 확인했다.‘역시, 서원이 아들 재석이잖아!’재석의 옆에는 한 여자가 서 있었는데, 이미윤은 그 여자의 옆모습이 아주 낯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대체 어디에서 본 적이 있는지에 대해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눈알을 굴리며 이미윤은 핸드폰을 꺼내 두 사람의 뒷모습을 찍었다. 그리고 곧바로 강서원에게 보냈다.[서원아, 이거 재석 맞지?][얘 여자친구 사귀었어?]...미용실에서, 강서원은 이 문자를 보고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마스크팩이 몸에 떨어져도 상관하지 않았다.그녀는 즉시 이미윤에게 구체적인 위치를 물었다.상대방은 빠르게 주소를 보냈다.“강 부인, 지금 무슨 일 생겼어요?” 같이 온 몇 명의 귀부인은 강서원 때문에 놀라 잇달아 입을 열어 물었다.“괜찮아요.”강서원은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작은 문제가 좀 생겨서요.”만약 그녀가 이 말을 할 때 이를 갈지 않았다면, 귀부인들은 바로 믿었을 것이다.강서원은 담요를
이때 이미윤은 무슨 생각이 났는지 핸드폰을 들고 그 몇 장의 사진을 클릭했다.‘방금 재석이와 함께 있던 그 여자애... 얼마 전에 백화점에서 우리 현빈이와 함께 쇼핑하며 신발을 고르던 그 여자애와 많이 닮은 것 같은데?!’이미윤은 고개를 젓더니 이런 생각이 터무니없다고 느꼈다.‘내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제일 잘 알지. 여태껏 다른 여자를 가지고 놀았으니 어떻게 여자에게 당할 수 있겠어? 말도 안돼... 절대 아닐 거야... 그냥 내가 잘못 본 거야.’...차를 뽑고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갔다.아파트 지하주차장이 없기 때문에 길 건너편 주차장에 세워야 했다.정은은 차를 샀기 때문에 재석은 그녀에게 주차장에 자리 하나 예약하라고 제안했다.주자장 책임자를 찾아 가격을 협상하고, 또 계약을 체결하니 시간은 이미 한 시간 뒤였다.재석은 정은을 데려다 주고서야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뜨거운 물을 끓이려고 할 때, 누군가 문을 쾅쾅 두드렸다.그는 주전자를 내려놓고 문을 열었는데, 그 사람이 뜻밖에도 강서원인 것을 보고 눈썹을 치켜세웠다.“어머니께서 여긴 어쩐 일이시죠?”“왜? 난 오면 안 되는 거야? 너 집에 다른 사람 숨겼어? 아니면 무슨 비밀이라도 있어? 내가 알면 안 되는 거야?”강서원은 말하면서 재석을 밀치더니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뭐라도 발견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집에 정말 재석 혼자밖에 없을 줄이야.재석은 이런 강서원을 보며 바로 깨달았다.“어머니, 오늘 도대체 뭐 하러 오셨어요?” 그는 말투가 갑자기 무거워지더니 왠지 모를 압박감을 주었다.강서원은 몸이 굳어졌고,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에헴! 요 며칠 많이 추워졌잖아. 난 네가 자신을 잘 돌보지 못할까 봐 걱정이 돼서 찾아온 거야.”말하면서 강서원은 거실 한가운데로 걸어가더니 내색하지 않고 집안을 훑어보기 시작했다.거실은 깨끗했고 여자가 남긴 흔적이 조금도 없었다.식탁 위의 컵도 모두 하나밖에 없었는데, 립스틱 자국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욕실 안의 수건조차도
강서원은 정은도 이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와 재석이 뜻밖에도 이웃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어쩐지 집에 여자가 다녀온 흔적이 없더라니... 이렇게 가까운 이상, 언제 어디서나 동거할 수 있잖아. 심지어 문을 열고 이 여자의 집에 와서 데이트를 할 수 있고. 그러니 또 무슨 단서가 있겠어?’여기까지 생각하자, 강서원은 정은을 살펴보았다.위에서 아래로, 머리부터 발까지.강서원이 마음의 준비가 좀 있었다면, 정은은 그야말로 깜짝 놀랐다.재석 집에서 나온 이 여사는 바로 전에 그녀의 다례 수업을 듣고, 심지어 복도에서 우연히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던 귀부인이었다.‘선배님과 무슨 사이이시지?’바로 이때, 재석이 방에서 쫓아나왔다.“어머니, 가방 깜박하셨어요.”‘어! 어머니?!’정은은 의혹을 느꼈다.세 사람 모두 침묵했고, 분위기는 갑자기 이상해지기 시작했다.정은은 강서원의 시선이 까다롭고 경계에 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강서원도 눈앞의 이 여자애가 자신을 그리 존경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이 때문에 강서원은 마음속으로 약간의 불만을 느꼈지만, 표정에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재석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그는 강서원과 정은이 이미 아는 사이란 것을 몰랐지만, 이렇게 만난 이상, 주동적으로 두 사람을 소개하기 시작했다.“어머니, 이쪽은 제 이웃이자 친구인 소정은이에요.”“정은아, 이분은 내 어머니셔.”강서원은 아들의 말을 듣고 담담하게 정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은 더욱 까다로워졌다.정은은 차분하게 웃으며. 태연자약하게 인사했다.“안녕하세요.”그리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강서원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내 아들과 함께 하고 싶은 이상, 미래의 시어머니인 나한테 아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인사 한 마디만 하면 다냐고? 예쁜 말 좀 하면 안 돼? 다정한 행동은? 그래, 이것들 다 그렇다 쳐도, 나한테 웃어야 하는 거 아니야?’그러나 정은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인사할 때 입가가 약
재석은 그게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도 문을 닫으려 했기 때문이다.“아니... 이게 뭐하는 짓이야?” 강서원은 문고리를 덥석 잡았다.재석은 영문을 몰랐다.“지금 집에 돌아가시려는 거 아니었어요?”“나 아직 안 갔는데 왜 문을 닫아?!”강서원은 아주 큰 목소리로 말했는데, 재석에게 질문하고 있는지, 아니면 정은에게 불만을 표시하고 있는지 몰랐다.재석은 어리둥절했다.“이미 밖으로 나오셨잖아요? 문을 닫지 않으면 집안이 싸늘해질 거예요.”강서원은 말문이 막혔다.“돌아가는 길에 기사님에게 좀 천천히 운전하라고 하세요. 최근에 눈이 와서 길이 많이 미끄러우니까요.”말을 마치고 가방을 그녀에게 건네준 다음, 재석은 문을 닫고 집으로 들어갔다.강서원은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두 사람 어쩜 이리도 버릇이 없는 거야! 내 아들은 더 심하잖아! 아이고, 내가 괜히 이 아이를 낳았어!’...정은은 발이 다 나았지만, 만일을 대비해서 병원에 가서 재검사를 받으려 했다.가방을 정리하고 문을 나서자마자 재석을 만났다.“어디 가?”“재검사 좀 받으려고요.”두 사람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가 길을 건넜고, 정은은 주차장에 가서 차를 운전했다.방금 뽑은 차라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거리를 나올 때 하마터면 옆에 있는 차와 긁힐 뻔했다.다행히 재석이 제때에 일깨워주었다.어제 차를 사고 돌아올 때, 정은은 잠시 운전한 다음, 재석이 운전했다. 주차장에 들어와 차를 세우는 것도 재석이 도와주었다.정은은 운전석에 앉아 어색하게 코를 만졌다.“난 운전면허를 딴 후 별로 운전해 본 적이 없어서요.”재석은 서둘러 자신의 차를 잠그며 돌아서 조수석 문을 열었다.정은은 영문을 몰랐다.“너 지금 운전에 그리 숙련되지 않으니, 혼자 운전하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아. 내가 너와 함께 병원에 가 줄게. 네 코치해줄 겸 말이야.”정은은 정말 마음이 움직였다.혼자서 운전하는 것은 확실히 마음이 든든하지 않았고, 만약 누군가 옆에서 지켜보고
“근골을 다쳤으니 적어도 3개월 이상 휴양하셔야 돼요. 비록 뼈를 다치지 않았지만, 발목을 삐었잖아요.”“지금은 이미 부기가 가라앉았지만, 안의 근육이며 근막은 여전히 영향을 좀 받았을 거예요. 아주 긴 회복 과정이 필요하니까 오직 시간에 맡길 수밖에 없어요.”재석은 생각에 잠겼다.“한의학에 의지하는 건요?”“그럴 시간이 있으시면 당연히 좋죠. 그러나 그것도 보조 작용일 뿐이고, 제일 좋기는 휴양을 하셔야 돼요.”병원을 나서자, 재석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나랑 어디 좀 가자.”“네?”20분 후, 차가 길가에 세워졌다.재석은 정은을 데리고 길을 건너 작은 골목으로 들어갔다.두 사람은 이리저리 빙빙 돌다가 결국 고풍스러운 한의원 앞에 멈춰 섰다.“한의원이요?” 정은은 고개를 들어 무슨 나무로 만들었는지 모르는 간판을 보았다. 까맣지만 아주 밝은 간판이 높이 걸려 있었다.재석은 익숙하게 안으로 들어섰다.“노 선생님?”불렀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노 선생님, 계세요?”“그래...”커튼을 젖히자, 안방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나왔다. 수염이 길고,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으며 앞치마까지 매고 있었다. 티비에서 나오는 한의사와 똑같았다.“이 자식, 왜 이제야 날 보러 온 거야? 들어오자마자 호들갑을 떨다니. 뒤뜰에서 약을 찧고 있었는데도 네 목소리가 들렸어! 어? 오늘은 혼자 온 게 아니네? 여자아이까지 데리고 왔다니?!”어르신은 눈에서 빛을 발했다.재석은 재빨리 두 사람을 소개했다.정은은 그제야 어르신의 성이 노 씨이고, 연세가 이미 90세이며, 제일병원에서 영광스럽게 퇴직한 후, 심심해서 이 작은 골목에 한의원을 차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곳에 와서 병을 보려면 돈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었다.어르신은 일주일에 3일만 진료를 하는데, 매일 오전밖에 나오지 않았다.지금 이미 오후 2시였고, 진료를 중단했기 때문에 이렇게 조용했던 것이다.오전에 오면 골목은 사람들로 북적였다.“젊은 아가씨,
침을 놓을 때, 노동일은 큰 손을 휘두르며 천을 폈고, 안에 크기가 다른 은침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정은은 두피가 저렸다.“시, 시작한 거예요?”“음.”“어디를 찔러야 하는 거죠?”노동일은 정은의 머리를 가리켰다.“여기.”정은은 영문을 몰랐다.“발목을 다쳤는데 왜 머리를 찌르는 거죠?”그녀는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호기심을 느꼈기 때문이다.“상처를 누르자마자 아픈 이유는 멍이 흩어지지 않기 때문이야. 그러나 머리에는 몇 군데의 큰 혈자리가 있어 근육을 풀 수 있지. 이렇게 이해하면 돼,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중앙 제어 시스템을 치료하는 거지.”그리고 뇌가 바로 이 중앙 제어 시스템이었다.“준비됐나? 그럼 시작한다...”노동일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바늘을 뽑았다.정은은 무서워서 무언가를 잡으려고 했다.마침 이때 재석은 자신의 손을 건네주었고, 그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단번에 잡았다.“긴장 풀어, 겁먹지 마, 금방 다 될 거야.” 노동일의 목소리는 가벼워서 사람의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정은은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감았다.그녀가 조심스럽게 통증을 기다리고 있을 때, 머리는 마치 개미에게 물린 것처럼 따끔했다. 한순간의 아픔이 지나가자, 다른 이상은 없었다.“좋아, 첫 번째 침을 이미 놓았어.”정은이 눈을 뜨려고 하자 노동일은 얼른 막았다.“급해하지 마. 아직 몇 개 더 남았으니까 지금 움직일 수 없어.”정은은 이 말을 듣고, 이상한 느낌을 꾹 참으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다른 감각이 무척 예민해졌다.정은은 약간 긴장하여 주먹을 쥐고 싶었지만, 남자의 따뜻한 손을 꽉 잡았다. 이어서 귓가에 노동일의 자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긴장하지 마, 그래, 그렇지... 사실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무섭지 안존하?”어르신의 목소리는 정은의 긴장된 정서를 완화시켰고, 곧 그녀는 마음이 편해졌다.“아직 심하게 움직일 수는 없지만, 천천히 눈을 뜰 수 있어.”정은은 속눈썹을 가볍게 떨었고, 눈
처음엔 진영매도 스마트폰으로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웠다.‘아이고... 또 오타네... 이걸 또 지우고 다시... 에구구...’속도도 느리고, 자꾸 엉뚱한 단어가 입력돼서 정말 진땀을 뺐다.하지만 어느 날, 자판 옆에 있는 마이크 버튼을 눌러봤고, ‘음성 입력' 기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모든 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어머, 말만 하면 글자가 나오네? 이거 진짜 신기하네...’그 뒤로 점점 익숙해지면서 진영매는 ‘두부 단톡방’을 직접 관리하게 되었고, 주문 확인도 척척 해냈다.그러던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서 택배 보관소를 운영하는 이웃 아주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언니도 공동구매 한번 해보는 거 어때요? 요즘 동네 맘카페나 톡방에서 다 그걸로 부수입을 벌어요.”“공동구매요?”“네, 단톡방에 링크만 올리면 되는데, 그 링크로 누가 주문하면 언니한테 수수료가 떨어져요. 요즘 그런 플랫폼이 많아요.”그 말에 진영매는 ‘일단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작은 물건 몇 개부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무작정 링크만 던져놓는 식으로 하지는 않았다.직접 샀다. 직접 써봤다. 직접 먹어봤다.그리고 진심 담긴 후기를 함께 적어 올렸다.[이건 제가 직접 삶아봤는데, 식감도 쫄깃하고 가격도 괜찮아요. 혹시 필요하신 분만 구매하시고, 안 맞을 것 같으면 굳이 안 사셔도 돼요.]‘괜히 민폐 되기 싫으니까... 무조건 좋다고는 못 하지.’그런데 이렇게 정성껏 올린 글이 톡방 안에서 반응이 꽤 좋았다.처음엔 몇 개, 그러다 열 개, 스무 개... 요즘은 많을 땐 하루에 백 개 넘는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하루 수익만 몇만 원 되는 날이 생기자, 남봉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니... 진짜? 당신 하루 종일 집에 앉아서 그렇게 번 거야?”그는 아침마다 두유를 끓이고, 비지 짜고, 순두부 포장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단지 세 군데씩 배달을 돌곤 했다.‘점심엔 다시 나가 광장에 작은 천막을 치고 두부 요리 판매, 해 질 무렵에야 집에
어느새 정은이 실험실에서 지낸 지 거의 2주가 되었다. 이번 집중 실험은 처음 계획대로라면 이틀 정도 일찍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불꽃 열정 모드로 돌입했다.“정은 언니! 우리 이참에 2차 실험안도 다 밀어붙여요! 타이밍 완벽하잖아요! 이왕 하는 김에 끝까지 가보자고요!”진일은 별로 상관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어차피 난 어제도 오늘도 실험실에서 잘 운명인데... 집에서 자나 여기서 자나... 거기서 거기지 뭐.’서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민지 편. 민지가 하자고 하면, 그냥 했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뭐.정은은 그런 셋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 그렇게, 예정보다 이틀 더 실험실에 갇혀 살며 2차 실험안까지 초안 작업을 마무리했다.민지의 슬로건은 이랬다.“오세요! 같이 말아봐요! 끝없는 연구의 늪!”그리고 마침내 모든 걸 정리한 날.“정은 언니! 헤헤. 저요... 연차 쓸게요! 푹 쉬어야겠어요!”‘뭐야, 이 모든 열정의 뿌리는 결국... 편하게 놀기 위한 전주곡이었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승인.”오후엔 서준이 조용히 다가왔다.“누나...”“혹시 너도 연차 쓰려고?”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둘이 같이...? 이건 무슨 흐름이지?’그렇다면 정은은 결단을 내렸다.“그냥 모두 이틀씩 쉬자. 다들 수고했으니까.”‘일도 일이지만, 쉬는 것도 중요하지. 그래야 오래 가지.’특히, 실험복을 벗지도 않고 앉아 있는 진일을 보며 정은은 단호히 말했다.“진일 선배는 특히 금지! 쉬는 날에 실험실 들어오면, 바로 벌금이에요!”진일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벌금...? 아니, 요즘은 연차 쓰라고 협박하는... 그런 시대인가...?”정은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일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그럼... 집에 좀 다녀올게. 이맘때쯤이면 우리 집은 옥수수 수확 시즌이라... 도와야 하거든, 헤헤.
정은은 순간 멈칫했다.“조 교수님? 그분이 여길 다녀가셨어?”“네, 두 시쯤 오셨던 것 같아요. 한참이나 언니를 기다리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니까 한 시간 넘게 앉아 계시다가 10분 전에 그냥 가셨어요.”‘10분 전...?’정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돌아오기 직전...’“언니, 조 교수님... 요즘 스트레스가 좀 많으신 것 같지 않아요? 혹시 다른 실험실에 새로운 과제라도 시작한 걸까요? 지난번 과제 마무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새로운 시작이라니... 진짜 무서워요, 그 열정...”정은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그런 생각이 들어?”“그게... 오늘 조 교수님 상태가 좀 이상했어요. 뭐랄까... 눈 밑 다크서클이 거의 좀비 수준...? 적어도 이틀은 연달아 밤을 새우신 것 같았어요.” “게다가 표정도 되게 딱딱하고... 그냥 누가 봐도 기분 안 좋아 보이는 그런... 음... 미간 주름으로 모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그랬구나.’정은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뭐, 늘 바쁘시잖아.”정은은 애써 담담하게 넘기려 했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복잡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민지는 입을 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근데 진짜... 이상하게 느껴졌단 말이지...’‘그냥 피곤해 보인 게 아니라, 뭔가... 속이 무너진 느낌?’...한편, 재석은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몰다가 주차장에 도착했다.그리고 차를 멈춰 세우자,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정은이는 오늘 차를 가져갔었네.’‘그럼... 차를 가져갔으면서, 왜 장은혁 차를 타고 왔지?’입술이 아주 얇게 다물어졌다.표정 하나 없이, 그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건 사람은 진욱이었다.[나, 어제 분명히 퇴근 전에 분석 리포트를 너한테 넘겼었잖아? 그런데 지금 보니 없어졌어. 어디 간 거지?] 재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기본적인 실수는 애초에 그
은혁은 뭔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낯설면서도, 묘하게 두근거리는 느낌. ‘이런 게 설렘인가...?’“은혁 씨, 고마워요.”멀리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넨 정은은 조용히 걸어가며 귀걸이를 착용했다. “정... 정은 씨!”그 순간, 정은이 멈춰 서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네? 무슨 일 있어요?”은혁은 당황해서 말이 꼬였다.“저, 그게...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식사 한번...” “아니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시간 되실 때... 제가 꼭 한번 대접하고 싶어서...”정은은 순간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식사요...? 왜요?”“그게...”은혁은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잽싸게 핑계를 떠올렸다.“아! 제 사촌 여동생이요, 예전에 정은 씨가 보내준 시험 대비 정리자료를 되게 잘 봤다고...”“꼭 밥 한번 사드리라고... 신신당부해서요! 감사 인사 겸해서요!”정은은 시선을 실험실 방향으로 돌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죄송해요. 오늘은 당장 들어가서 실험해야 해요... 그리고 요즘은 계속 이 안에서 지내느라, 언제 시간이 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은혁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정은은 살짝 웃으며 말을 끊었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정은은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해 실험실로 들어갔다.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혁. 문 옆에 붙어 있는 간판을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무한 실험실?”차로 돌아온 은혁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무한 실험실... 설립, 소정은, 연구 성과...]‘정은 씨... 서비대 대학원을 나왔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였다고?’논문 게재 수, 영향력 지수, 직접 설립한 실험실, 정부 과제 주도...은혁은 화면을 스크롤 하며, 점점 입꼬리가 올라갔다.‘이 정도면... 그냥 똑똑한 수준이 아니네. 완전 대단하잖아...’그렇게 넋을 놓고 화면을 보고 있던 찰나, 갑작스러운 경적이 들렸다. 빵!까맣
명주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들켰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0.1% 더 양보할게요. 이게 정말 마지막 양보입니다.”정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0.3이요. 저도 그게 최선이에요.”명주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정은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알맞게 비워진 컵.“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정말로 가려는 발걸음이었다.명주는 예상치 못한 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 잠깐만요! 가격이라는 게... 원래 대화하면서 맞춰가는 거잖아요!”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잡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0.3이 괜찮으시다면 바로 계약서 쓰시고,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이 분위기, 진짜다... 장난 아니네, 이 사람...’명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은이 진짜 나갈 기세라는 걸 느끼자,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요. 그렇게 하죠.”정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계약 성사네요.”서류는 빠르게 정리됐다.두 사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비 납품 일정과 설치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조율했다.완벽한 비즈니스 매듭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려던 정은은 명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 씨!”“혹시...사람들한테 ‘심리 꿰뚫는 거 잘한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명주는 씁쓸하게 웃었다.“사실, 장비를 오늘 꼭 팔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은 씨는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태도로 딱 버티시더라고요. 그걸 알아챘을 땐... 이미 계약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어요. 하하...” 정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요.”“거짓말.”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대신,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뭔데요?”정은은 돌아서며 미소를 흘렸다. “먼저 진
‘아니지. 정은 언니 원래 저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잖아... 으앙, 괜히 비교돼!’“무슨 생각 그렇게 골똘히 해?”정은이 웃으며 말했다.“나도 사람이야, 쇳덩이는 아니란 뜻이지. 급하지도 않은 일정인데 밤새우는 게 뭐 그렇게 재밌겠어.” “맞아요! 근데 언니는...”“너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것뿐이야.”민지는 안도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장난스럽게 물었다.“그 ‘조금’이... 얼마나 조금인데요?”“음...”정은은 손목시계를 슬쩍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두 시간.”민지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하... 내가 묻지 말아야 할 걸 물었네.’ 바로 그때, 건너편 검사용 실험실 문이 열리며 서준이 샘플 봉투와 리포트를 들고나왔다.“서, 서준아... 언제 일어났어...?”민지는 거의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서준은 솔직하게 답했다.“6시. 왜?”민지의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갔다.‘나만 8시까지 잤네. 이럴 거면 알람은 왜 맞췄냐고... 으악...!!!’그렇게 오전 내내, 민지는 그 열등감을 원동력 삼아 평소보다 세 배는 빠르게, 집중력도 세 배로 끌어 올렸다.그리고 드디어 점심시간.민지는 실험대에서 털썩 내려와 길게 숨을 내쉬었다.같이 집중 근무에 들어간 팀원이 많으니, 정은은 미리 모두의 하루 세 끼 도시락을 예약해 두었다. 밥 짓고 반찬 할 시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식자재가 가득한 냉장고를 털어 요리할 사람조차 없었으니 말이다.민지는 반찬을 한 입 먹고는 입안에서 퍼지는 고급스러운 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헐, 이거 SAMES 거다... 가격 꽤 나가는데...”남진일은 뭐가 뭔지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와, 밥 진짜 맛있다. 이거 쌀도 좀 다르지 않아? 완전 길고 쫀쫀한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일은 밥을 세 그릇이나 비웠다. 물 한 잔 마시고는 말없이 실험실 쪽으로 다시 들어갔다.그걸 멍하니 보고 있던 민지.‘왜 다들 이렇게 힘들게 살아...? 쉴 땐 좀 쉬라고!!
장마가 시작되자, 날씨는 마치 기분이라도 있는 듯 변덕을 부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햇살 좋던 하늘은 오늘 아침부터 부슬비로 젖어 있었다.재석은 우산을 챙기지 못한 채 귀가했다. 집에 도착했을 땐 옷이 이미 흠뻑 젖어 있었기에, 그대로 샤워실로 향했다.뜨거운 물로 몸을 데운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다가, 휑한 침대를 바라보며 손을 멈췄다.며칠 전, 침구를 몽땅 세탁기에 돌려버리고 새로운 걸 깔지 않은 채로 며칠 밤을 그냥 잤다.그는 말없이 장롱에서 깨끗한 시트를 꺼내어, 이불까지 정돈했다.‘그날 정은이가 그랬지... 아버님이 장조림이랑 김치까지 챙겨주셨다고. 가지러 오라고 했었는데...’그때, 재석은 머리를 말렸고, 내복을 갈아입은 후 맞은편 정은의 집 앞으로 향했다. “정은아, 안에 있어?”“정은아...?”대답은 없었다.재석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9시였다.‘평소 같으면 실험실에서 돌아왔을 시간인데...’그 후로 두 시간. 재석은 몸은 집 안에 있었지만, 신경은 늘 현관 쪽에 쏠려 있었다.작은 인기척만 나도 바로 고개를 들어 도어락을 확인하고, 고양이처럼 조용히 현관문 앞에 섰다.하지만 그 누구도, 정은은 아니었다.새벽 1시. 정은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오늘도 실험실에서 자려나...’재석은 조용히 불을 끄고 침실로 향했다.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는 기분이었다.‘뭐랄까... 괜히 허전하네.’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건 단순한 우연이겠거니,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실험실로 출근했다.그날 저녁. 재석은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조용히 이어폰을 꽂고 야간 러닝을 나섰다.8시부터 10시까지. 아파트 단지 아래 골목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그 사이, 정은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재석은 또다시 시간을 더 보냈다.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기다리는 동안, 몇몇 이웃들과 마주쳤다.“조 교수님, 오늘도 러닝하세요?”“운동을 정말 꾸준히 하시네요. 올해에는
정은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어 재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선배님, 아빠가 장조림을 잔뜩 가져왔어요. 선배님 것도 있는데, 언제 집에 계세요? 가져다드릴게요.]사진도 함께 첨부했다. 반찬 봉투, 가지런히 담긴 장조림, 그리고 열무김치 세 통.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아버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줘... 근데 요즘은 계속 실험실에서 지내야 할 것 같아.]‘휴... 병원 간 건 아니구나.’정은은 마음을 놓고는, 바로 다음 메시지를 보냈다.[공기 샘플 분석 결과 나왔어요.]그리고 곧바로 분석 리포트 파일도 함께 전송했다. 하지만 이번엔 곧장 답장이 오지 않았다.정은은 씻고 오기로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화면에 메시지 알림이 떠 있었다. 10분 전 도착한 메시지.정은은 손에 수건을 쥔 채 그대로 메시지를 열었다.[경찰 측 보고서랑 거의 일치해. 환각이나 각성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어.]‘그래... 그래서 미제 처리된 거구나.’M시 경찰은 결국 사건을 입건하지 않았다. 재석이 수아를 바로 해고하지 않고 며칠을 기다린 건, 바로 이 수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만약 정식 수사가 들어갔다면, 이수아가 마주할 건 단순한 징계가 아니었겠지.’정은은 머리를 닦다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잠깐 말씀드릴 게 있어요.]얼마 지나지 않아 재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정은은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전화를 받았다.“그 약, 기존에 유통되던 제품이 아닌 것 같아요. 성분이 사라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기기에서도 검출이 안 될 정도라면...”“제작한 사람도, 유통한 사람도 단순하지 않을 거예요. 인맥이나 자금력이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요... 선배님, 조심하셔야 해요.”[응. 알겠어.]말이 끝난 후, 찰나의 정적. 전화 속 숨소리만이 고요하게 들렸다.“선배님...”정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요즘... 아예 집에 안 들어가세요?”그는 몇 초간 침묵하더니, 짧게 대답했다.[응...]‘그냥
5월 말, 이미숙은 원작 소설 영화 제작 발표회 참석차 J시에 왔다. 주말 일정이라 남편 소진헌도 함께였고, 겸사겸사 정은에게 나눠 줄 장조림 한가득과 직접 담근 김치 여섯 통도 챙겨왔다.“완전 유기농! 방부제 제로! 아, 조 교수 것도 좀 나눠줘. 혼자 다 먹지 말고.”말을 끝내기 무섭게, 소진헌은 또 바람처럼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바빴고, 떠날 땐 미련도 없었다.이번 일정은 주최 측에서 식사며 숙소까지 전부 제공했는데, 행사 장소가 이춘재 집에서 거리가 좀 있었던 탓에 소진헌 부부는 호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그래도 짬을 내어, 오후 한나절을 이춘재, 봉수진 부부와 보내며 오랜만에 가족끼리 저녁 한 끼는 함께했다.이춘재와 봉수진은 딸이 바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사위는... 뭐, 그냥 딸을 따라다니느라 바쁜 걸로 치부하고 이해해 줬다.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두 노인도 L시로 내려갈 텐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당에 굳이 소진헌 부부를 집에 머물라고 붙잡고 싶지도 않았다. 정은은 아버지의 익숙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밑에 놓인 장조림 봉투를 내려다봤다.‘이걸 내가 다 먹을 순 없지.’정은은 장조림 반 정도를 덜어, 다른 봉투에 담았고, 김치도 세 통 넣었다. ‘재석 선배님 오면 같이 주자.’하지만 밤 11시가 넘은 시각, 그녀가 이미 논문 세 편을 다 읽을 때까지도 맞은편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정은은 혹시나 놓쳤나 싶어 직접 문 앞으로 가서 노크했다.“선배님, 집에 계세요?”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역시... 또 실험실에서 밤샘 중이겠지.’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요즘 정은도 실험실에서 자는 날이 부쩍 늘었고, 남진일은 아예 실험실을 제 집처럼 쓰고 있었다.민지는 심지어 진지하게 조언까지 했다.“진일 선배, 옷장 두 개 더 넣고, 정은 언니가 냄비랑 밥그릇만 좀 들고 오면 그냥 자기 집 완성인 거 알죠?”‘진짜 그렇게 될까 봐 무서울 정도라니까.’며칠 지나지 않아, 진일은 정말로 중고 옷장을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