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인은 온종일 남편과 함께 월세를 받으러 나가는 것 외에 집에서 관리를 받았으니 남들보다 젊고 아름답고 유행한 것도 당연했다.민지가 입을 열자, 임수인은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자, 아빠, 엄마, 소개해 드릴게요. 내 동창이자 함께 싸운 전우들이에요!”정은은 하정남이 나타날 때부터 그를 관찰하고 있었다.그는 이 실험실의 자금 문제를 쉽게 해결해준 사람이었다.이곳의 절반 이상의 벽돌을 모두 그의 돈으로 산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정은이 인사했다.“아버님 어머님, 안녕하세요.”서준도 인사를 했다.“아버님 안녕하세요, 어머님 정말 젊으세요...”‘서준이 왜 그래...’ 정은은 참지 못하고 서준을 힐끗 보았다.“그래! 안녕, 하하하!” 하정남은 바로 열정적으로 두 사람과 악수를 했다.“넌 민지의 정은 언니! 넌 쮼이! 하하... 민지한테서 너희들 얘기 자주 들었는데, 오늘 드디어 이렇게 만나는구나! 나도 준비한게 얼마 없지만, 내 성의이니 잘 받아.”말을 마치자 하정남은 직접 패딩에서 돈봉투 두 개를 꺼냈다.심지어 아주 두꺼웠다.그리고 정은과 서준에게 하나씩 나눠줬다.정은, 서준이 거절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하정남은 큰 손을 흔들었다.“거절하지 마. 어른이 주면 그냥 고맙다고 받아!”두 사람은 눈을 마주쳤다.“고마워요, 아버님.”“그래, 그래야지!”이때 갑자기 누군가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렸다.“이야! 벌써 손님이 도착한 거야? 난 내가 제일 먼저 온 줄 알았는데!”정은은 얼른 가서 맞이했다.“성 교수님!”성달수는 실험실 대문 앞으로 오더니, 고개를 들어 우뚝 솟은 5층짜리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안에 들어가서 구경을 하고 싶었다.하지만 그 전에.“내가 친구 몇 명 데리고 왔는데. 정은아, 괜찮겠지?”말이 막 끝나자 차 몇 대가 달려왔다.2분 후에 한 무리의 늙은 교수들이 차에서 내렸다.가지런한 검은색 패딩에 양쪽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하며 온몸에서 교수님의 기질을 풍기고 있었다.정은은 놀라서 눈을
내리자마자 5층 높이의 건물이 한눈에 들어왔다.보기에는 매우 새 건물인 것 같았는데, 사방을 내다보면 황토가 아니면 공사장이었다.송지혜가 물었다.“누가 실험실을 여기에 세울까요? 쳇, 소정은도 참, 굳이 이런 곳을 찾아 우리를 속이려 하다니.”백두강은 원래 당황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더욱 담담해졌다.‘흥, 애들의 장난일 뿐. 이렇게 하면 학교의 관심을 끌 수 있을 줄 알았어? 허, 순진하긴!’송지혜가 말했다.“가요. 볼 것도 없네요. 괜히 시간만 낭비하고 헛걸음쳤네.”일행이 차를 타고 떠나려 할 때.“어? 두강이니?” 멀지 않은 곳에서 한 노인이 웃으며 백두강을 향해 손짓했다.백두강은 눈을 부릅뜨더니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주 교수님?! 여긴 어쩐 일로 오신 거예요?!”주정민은 서비대학교 IT대학의 권위자로, 이미 은퇴한 지 오래다.20년 전, 백두강은 대학에서 그의 과목을 선택했고, 후에 또 학교에 남으며 두 사람은 사생으로부터 동료로 변해 줄곧 사이가 좋았다.지난주에 백두강은 주정민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기도 했다.“여기가 추우시다고 열대에 가셨잖아요? 그런데 왜...”주정민은 담담하게 웃었다.“거기서 지내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J시에서 평생 지냈으니, 다른 곳에 있는 게 많이 불편하군.”“여기 오신 이유가?”“아, 달수가 구경 좀 시켜준다고 했거든, 그래서 같이 왔어.”“구경이요? 무슨 구경을 말씀하시는 거죠?”“실험실 커팅식.”백두강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학생들끼리 장난친 것일 뿐인데, 어떻게 교수님까지 부르신 거죠? 학생들도 정말 철이 없군요...”그는 정은이 청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뜻밖에도 주 교수님을 초청하다니, 내가 오히려 소정은을 얕잡아보았군!’“이렇게 소란을 피웠으니 이따가 어떻게 수습할지 정말 무르겠군요... 아마도 교수님인 우리가 처리를 해줘야 할 것 같은데...”백두강은 말하면서 고개를 저었고, 동시에 다시 사방을 둘러보았다.확실히 황량하고 다른 사람을 보지 못했다.주정민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눈빛은 경악으로 가득 찼다.귓가에 갑자기 정은이 했던 말이 울렸다.“인생에는 항상 기복이 있는 법이지. 사람이라면 다 운이 나쁠 때가 있는 거 아니겠어? 그러나 너희들도 조심해, 앞으로 무슨 일이 들이닥칠지 모르니까.”지예는 얼른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당황하여 얼른 송지혜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이모, 소정은 정말 실험실을 지었어요, 이제 어떡하죠?! 총장님도 아셨으니 우리가 한 일들이 설마...”너무 놀란 나머지, 지예는 호칭을 바꾸는 것조차 잊었다. “입 닥쳐!” 송지혜는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우리 뭘 했는데? 우리는 아무것도 안 했어! 말 조심해!”재민과 진일만이 이 건물을 진지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눈빛은 더욱 번쩍였다.“진일 형, 5층으로 된 실험실은 얼마나 넓을까요?”진일은 가슴을 안으며 감탄을 하고 있을 뿐, 그리 놀라지 않았다.‘역시 정은이 답네. 한다면 최선을 다하는 이런 정신.’“이따가 들어가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재민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그래도 돼요? 우리는 초청장을 받지 못했잖아요...”이곳에 올 수 있었던 것도 단지 백두강의 초청장 덕분이었다.진일은 웃으며 말했다.“누가 없다고 했어?”재민은 멍해졌다.“그, 그게 무슨 뜻이죠? 설마 제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겠죠?”진일이 외투 지퍼를 열더니, 주머니에 넣은 빨간 봉투를 드러냈다.“형! 대박이에요!”“쉿, 조용히 해.”재민은 흥분을 억눌렀지만 심장은 쿵쾅쿵쾅 뛰었다.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정은이 준 거예요?”“음.”“두 사람 친해요?”진일은 진지하게 생각했다.“사실 친분이 별로 없어.”“그럼 왜?” 재민은 깜짝 놀랐다.“아마도... 우리더러 구경을 하라고 부른 것 같은데?”바로 이때.“어머, 부학장님 오셨네요, 정말 귀한 손님이시네요!” 오미선은 웃으며 맞이했다.백두강은 마지못해 웃음을 지었다.“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렇게 많은 권위자 앞에서 제가 어찌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안녕하세요, 저희는 서비대의 사진작가와 기자입니다. 현장보도를 해도 될까요?”정은은 오미선과 눈을 마주쳤다.“그럼요.” 정은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그런데 누가 불렀는지 물어봐도 될까요?”“생명과학대학의 백두강 부학장님이요. 이 대학의 학생들이 스스로 실험실을 짓고, 또 총장님을 초청했다며 저희를 일부러 불러 보도하게 했습니다.”“아, 백 부학장님 정말 신경을 써주셨네요.”백두강은 지금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싶었다.기자가 실험실에 관한 몇 가지 질문을 한 후 갑자기 물었다.“왜 총장님을 보지 못한 거죠?”말이 끝나자마자 송영한과 한중기가 도착했다.“오 교수, 정말 축하해요.” 송영한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웃으며 축하했다.그가 오늘 왜 왔든, 이미 충분히 자신의 예의를 표시했다.한중은 그리 침착하지 않았다.그는 먼저 5층 높이의 작은 건물을 보더니, 또 현장에 있던 하객 라인업에 깜짝 놀랐다.반응을 할 때, 송영한은 이미 웃으며 정은과 이야기하고 있었다.“역시 오 교수의 학생답군. 정말 훌륭한 인재를 두었어. 총장으로서 난 학생들이 끊임없이 성장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제일 좋다고 생각해!”“방금 오 교수의 말에 의하면, 이 실험실은 네가 혼자서 계획한 것이라며? 정말 대단한 학생이야.”송영한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정은은 오히려 민지와 서준을 앞으로 끌어당겼다.“총장님, 그 말씀은이 정확하지 않습니다. 실험실은 우리 세 사람이 함께 계획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대단한 게 아니라 저희가 해낸 것입니다.”“하하... 그래, 너희들이 대단하구나!”민지와 서준은 앞에 설 때 어리둥절해졌다. 정은의 동작이 너무 빨라 그들은 전혀 반응하지 못했다.송영한과 한중기가 떠나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러 갔을 때, 민지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정, 정은 언니, 방금 학장님이 저를 칭찬한 거 맞죠?”“응.”“세상에, 꿈 꾸는 것만 같아요.”그것은 송영한, 서비대학교 1인자, 가장 유명한 학장이었
“정은의 팀이 교외에서 스스로 실험실을 지은 이유가, 학교에 있던 실험실이 소방 정돈 시정서를 받았기 때문이라며?”‘소방정돈’이라는 말을 듣자, 백두강은 가슴이 찔렸다.그의 뒤에 있던 송지혜 역시 두피가 저려왔다.진호와 지예, 서정 세 사람은 더욱 벙어리로 변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백두강은 억지로 입을 열었다.“네, 그런 일이 있었어요...”“이 안에 무슨 속사정이 있는 거 아니야?”“이, 이건...”백두강은 눈알을 마구 굴렸다.“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구, 구체적인 상황을 다시 조사하고 확인해야...”“몰라? 넌 생명과학대학의 부학장으로서, 전교에서 유일하게 시정 지시를 받은 실험실에 대해 모른다고? 그 시 소방 쪽은 누가 책임지고 소통을 한 거야?”“시정 방안은 또 누가 확정한 거지? 관련 상황을 제대로 알렸어? 당사자에게 어떻게 설명할 건데? 이건 네가 부학장으로서 잘 이해하고 독촉해서 완성해야 하는 거 아닌가?”송영한이 한마디 할 때마다 백두강은 고개를 푹 숙였다.마지막에 이르러 그는 마치 사죄하는 것 같았다.한중기는 옆에서 구경을 하더니 유유히 입을 열었다.“백 부학장의 이 표현을 보니, 그 안에 다른 속사정이 있는 것 같긴 하네요.”송영한은 눈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사정이 있는 이상, 보고서를 제출해. 그리고 이번 일은 오 교수에게도 결과를 알려. 오 교수의 학생이 쫓겨났고, 뜻밖에도 스스로 돈을 들여 실험실을 건설해야 했다니.”“모르는 사람이 보면 우리 서비대학교 학생들이 능력이 있다고 칭찬하겠지만, 아는 사람은 전국 최고의 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실험실 한 칸을 제공하는 이런 작은 일도 할 수 없다고 비난을 할 거야!”“생명과학대학은 요 몇 년 동안 국가의 경비, 학교 측 경비를 가지고 학술 성과를 얼마 내지 않았는데, 사고가 오히려 하나둘씩 이어지다니. 그동안 너무 편하게 지낸 것 같아. 어떤 사람들은 뿌리부터 썩기 시작했어.”송영한은 말을 마치고 떠났지만 백두강은 온몸에 식은땀을 흘려 하마터면 허리를
송지혜가 입을 열자, 모두의 주의력을 이끄는데 성공했다.“뭐하는 거야?!” 백두강은 그녀가 못된 짓을 하려는 것을 알아차린 듯 송지혜를 잡아당기려 했다.송지혜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백두강을 보지도 않고 오직 정은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왜 말을 안 해? 대답할 수 없는 거야?!”“그럼 너희들의 이 실험실은 정규 수속이 없고, 불법 건설에 속한다는 거잖아!”정은은 웃음이 나왔고, 민지와 서준도 웃었다.“너, 너희들 왜 웃어?!” 송지혜는 당황했다. 민지가 말했다.“다행히 정은 언니가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미리 예상했어요. 실험실이 완공되면 분명 누군가 질투해서 문제를 제기할 거라고 해서, 저희에게 모든 절차를 철저히 준비하라고 당부했거든요. 송 교수님, 어떤 서류를 확인하고 싶으신가요? 바로 가져다드릴게요.” “ 제7조에 따르면, 3급 또는 4급 실험실, 혹은 3급이나 4급 이동식 실험실을 신축, 개축, 증축하려면 환경영향평가 보고서를 작성하고, 정해진 절차에 따라 국가환경청에 보고해 심사와 승인을 받아야 하지. 너희는 이 절차를 다 밟았어?”송지혜는 미소를 지었다.‘정말 내가 호락호락한 줄 알아?’이 새로운 규정은 지난해 3월에야 하달된 것인데, 바로 생물실험실의 수량을 통제하여 환경에 부담을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통제를 했으니 또 어떻게 쉽게 통과할 수 있겠는가?올해 초, 연성대학교 생물대학의 임상화 교수도 독립 실험실을 신청하려고 했는데, 보고가 제출되자마자 학교 측에서 잠시 연기하라고 설득했다.3개월을 기다리다가 가까스로 학교 측이 서명을 하겠다고 했지만, 또 절차에 따라 신청 보고서를 더 높은 부서에 제출해야 했다. 그 결과, 신청서는 감감무소식이었다.반년이나 기다렸는데도 소식이 없었다.임상화는 사람을 찾아 여러 번 부탁을 하고서야 자신의 보고서가 건네지자마자 부결되었다는 것을 알아냈다.임상화는 아직 단념하지 않았고, 올해도 계속 신청할 생각이었다...송지혜는 그녀와 관계가
교육 채널, 국내 학술지, 과학 주간지, 생물 연구소... 모두 정규인 동시에 유명한 매체들이었다.심지어 J시 뉴스의 기자들도 여기에 있었다.백두강은 이 장면에 놀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정은도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민지와 서준을 바라보더니 의혹을 드러냈다.서준은 손을 흔들었고, 민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럼... 누구일까?’기사에 극도로 예민한 기자들은 즉시 마이크를 송지혜 앞으로 내밀더니 던진 문제도 무척 날카로웠다.“방금 소정은 학생이 말한 CPRT 사건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소방 시정의 경과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겠습니까?”“이런 일로 다른 연구팀을 괴롭히고 배척하신 겁니까?”“학생들을 난처하게 하고, 악의적으로 모함한 게 사실입니까?”“이 중에 교수님 사이의 원한이 얽혀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학생들은 그저 고래 싸움에 등 터진 새우 아닙니까?”...송지혜는 마이크와 카메라에 둘러싸였고, 한 무리의 사람들은 그녀를 구석으로 몰아넣었다.“저... 그, 그만 좀 찍어요!”말로 지려 하지 않던 사람이 그 자리에서 말문이 막혀 온전한 말도 하지 못했다.지예는 이 상황을 보고 얼른 가서 도와주려 했다.그러나 많은 기자와 촬영기자가 현장에 있어서, 지예는 전혀 비집고 들어갈 수 없었다. 그녀는 다급한 마음에 계속 중얼거렸다.“다 내 잘못이야... 나, 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도 일부러 이런 게 아니란 말이야... 흑흑흑... 이모...”백두강은 옆에서 이 말을 듣고 즉시 지예를 잡아당겼다.“너 방금 뭐라고 했어? 네가 잘못했다고?!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지예는 호통을 듣고 그만 멍해졌다.“저, 저는 단지 두 언론의 SNS 계정에 문자를 보냈을 뿐이에요. 와서 이번 일을 보도하라고...”그러나 기자들이 왔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우르르 모일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그들은 정은이 허풍을 떤 게 아니라 정말 실험실을 지을 줄은 더욱 생각지도 못했다.“누가 이
이런 화려한 세리머니에 많은 사람들은 놀라움에 저마다 고개를 쳐들고 구경하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정은은 생각을 하다 현빈을 향해 걸어갔다.현빈은 그런 정은을 보며 놀란 듯했다.“고마워요.” 정은은 현빈의 앞에 멈추며 진지하게 말했다.“그 기자들도 심 대표님이 초청한 거죠?”“부학장님 쪽에서 두 언론에 연락했어. 아마도 너희들이 실험실을 지을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말이야.”“이를 통해 일을 크게 만들려고 했지만, 총장님이 나선 덕분에 그러지 못한 거야. 나도 단지 부학장님을 도와 일을 좀 더 크게 만들고 싶었던 거고. 그래야 당할 때 제대로 당하는 게 아니겠어?”현빈은 다른 한 중요한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그는 전에 백두강에게 경고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백두강은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그럼 내가 수단을 좀 썼다고 탓하면 안 되지. 어떤 사람은 매를 맞지 않으면 아픈 줄 모른다니깐.’‘만약 맞아도 아픈 줄 모른다면, 그건 충분히 얻어맞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하지.’멀지 않은 곳에서, 성달수는 박수를 치면서 오미선의 어깨를 밀쳤다.“이제 안심하겠지? 정은이는 남의 괴로움을 가만히 당하는 아이가 아니야. 생각이 아주 많다고. 실험실을 짓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바로 그렇게 했잖아. 초청장 받았을 때 나 정말 놀라 자빠질 뻔했어!”오미선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정은이는 확실히 줏대가 있어. 반격할 줄도 알고...”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나보다 훨씬 낫지.”성달수는 오미선이 자괴감을 느낀 것을 알아차리고 얼른 입을 열었다.“어허, 아무리 강해도 그것은 우리가 가르친 학생이야. 강한 장군 밑에 약한 병사가 없다고, 우리 둘도 꽤 훌륭한 교수님이잖아!”오미선은 눈을 부라렸다.“난 성 교수처럼 낯가죽이 두꺼운 사람이 아니야.”공연이 끝나자, 시간이 다 된 것 같다고 생각한 정은은 오미선을 청하여 실험실의 이름을 짓게 했다.민지와 서준은 하나는 탁자를 옮기고 하나는 종이와 붓을 가져왔다.오미선은 책상 앞에
“은혁아, 우리 먼저 가볼게.”은혁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려던 찰나, 정은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은혁 씨, 같이 식사하시죠? 어차피 저도 아직 안 먹었는데요.”“마침 예약도 해뒀으니까 괜찮다면 같이 가요.”“정, 정말요?! 괜찮을까요?”은혁은 말끝이 떨릴 정도로 들뜬 기색이었다.수민은 표정으로 정은에게 물었다. ‘진심이야?’정은은 눈빛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수민은 한숨 쉬듯 웃으며 말했다.“좋지 뭐... 사람 하나 늘어난다고 달라질 거 없잖아. 같이 가자.”은혁은 기뻐서 입꼬리를 다 못 내렸다. ‘정말 같이 가는 거야...? 나 지금 약간... 꿈꾸는 거 아냐?’...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직원이 안내한 자리로 세 사람이 들어갔다. 따로 마련된 룸이라 분위기도 아늑했다.음식이 나오기 전, 은혁이 갑자기 말했다.“기다리는 김에... 작은 마술 하나 보여드릴까요?”수민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마술도 해? 그러고 보니, 정은이 외할머니 생신 때도 뭐 하나 보여줬었지.”“이번엔 새로 배운 거예요.” 은혁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그럼 해봐, 해봐!” 수민은 벌써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 준비 완료 상태로 들고 있었다.“도구 필요해?” 그녀가 묻자, 은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옆 캐비닛에서 종이 티슈 한 팩을 꺼냈다.그중 다섯 장을 쏙쏙 뽑아냈다. 마침 티슈에 프린트된 꽃무늬가 하나하나 다 달랐다.그는 정은을 향해 말했다.“정은 씨, 가장 마음에 드는 거 하나 골라주세요.”정은은 망설이지 않고 무심하게 한 장을 집어 들었다.은혁은 그걸 받아 조심스럽게 반으로 접고 말했다.“잘 봐요.”다시 펴서 말한 뒤, 조용히 티슈를 손안에서 뭉쳤다. 그리고 그 주먹을 천천히 펴자 손안에는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선물이에요.”은혁은 웃으며 그 꽃을 정은에게 건넸다.“진짜 꽃이에요?”정은은 놀란 듯 꽃을 받았다. 손에 올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봤다.‘이거... 어떻게 한 거지?’수민은 슬쩍 핸
“안녕하세요.”정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은혁은 일행과의 대화를 뚝 끊고 곧장 정은 앞까지 다가왔다.“머리하러 왔어요?”“네.”“그... 저번에 식사 한번 하자고 했던 거 기억하죠? 혹시 오늘은 시간 괜찮으세요?”정은은 짧게 대답했다.“친구랑 같이 왔어요. 죄송해요.”그 순간 수민이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장난기 가득한 미소로 손을 흔들었다.“하이! 은혁 도련님?”“수민이?! 혹시 정은 씨랑 같이 왔어?”수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내가 바로 그 친구.”“와! 그럼 다 아는 사이네! 머리 끝나고 다 같이 밥 어때? 내가 쏠게!”수민은 눈을 살짝 굴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근데 나 들러리 아니야? 밥 사고 싶은 상대는 따로 있잖아.”은혁은 순간 말이 막혀 멋쩍게 웃었다.“그, 그게... 다 친구잖아. 다 같이 보면 좋은 거지 뭐... 하하...”그 말이 끝나자 수민은 슬쩍 정은 쪽을 힐끔 바라봤다.‘갈까? 아니면 거절할까?’정은은 아주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그걸 본 수민은 곧장 말투를 바꿨다.“나 아직 염색 더 남았거든. 게다가 이미 예약해 둔 식당도 있어서 미안. 다음에 보자!”은혁은 서둘러 말했다.“아, 괜찮아! 나 기다릴 수 있어. 같이 식당 가면 되잖아!”그러자 수민이 한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고개를 저었다.“노노!! 오늘은 걸스 나잇. 남자는 입장 금지, 알겠어?”“그렇구나...”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그럼... 다음에 따로 할게.”수민은 환하게 웃었다.“그래, 다음에 봐.”여기까지면 끝인 줄 알았는데, 은혁이 예상 밖의 행동을 했다.그는 정은이 옆 소파에 툭 앉은 거였다.“정은 씨... 옆에 좀 앉아도 괜찮죠?”“네.”그가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날 제가 데려다드린 곳, 정은 씨 실험실이었죠?” “맞아요.”“저 사실 대학 시절 전공이 재료공학이었어요. 생명과학과는 다르지만, 교차하는 영역도 좀 있죠. 논문 읽다 보면 은근 연결되더라고요.” ‘어...? 이 사람
재석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그 어떤 것도 할 자격이 없지.’그 틈을 타 정은이 다시 입을 열었다.“저는 좀 더 기다려야 해서요. 선배님 먼저 차 가져가세요.”“그래.”재석은 무언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말을 붙일 이유가 없었다.그렇게 조용히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그 사람... 누구일까?’...정은은 길가에 조용히 서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5분쯤 지난 후, 골목 입구로 노란색 페라리가 굉음을 내며 등장했다. 엔진 소리만으로도 차주의 성격이 상상되는 차였다.운전석 창문이 슥 내려가더니, 조수민이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휘파람을 불었다.“우리 공주님! 탑승하시죠!”정은은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간다! 간다!”차에 올라 조수석에 앉은 정은은 안전벨트를 매며 슬쩍 물었다. “또 바꿨어? 차?”“아냐, 고동건 그놈 차야.”“오...”“뭐야 그 ‘오’는? 뭔가 의미심장했어.”수민이 의심 가득한 눈으로 흘겨봤다.정은은 시크하게 말했다.“그냥 ‘오’ 한 거야. 더는 묻지 말고, 운전이나 해. 묻는 순간부터 의미 없어져. 너도 알잖아.”“와... 너 요즘 말투 진짜, 우리 오빠랑 똑 닮았어. 점점 꼬인다, 꼬여.”정은은 잠시 말을 멈추다 살짝 고개를 돌렸다.‘재석 선배...?’하지만 금세 아무렇지 않은 듯 차 안엔 음악이 흘러나왔다. 마침 흘러나오던 노래를 들은 수민은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다음 곡으로 넘겼다.[말 못 하는 그 말알게 해줘야 했는데그렇게 쉬운 몇 마디왜 난 못했을까...]‘무슨 가사야 이건?’그리고 이어진 곡...[기대하던 너의 붙잡음은 없고결국 넘겨준 그녀그럼 넌 뭐야 사랑한다면서도 기다리지 말라니 됐어, 넌 계속 그렇게 물러서더라...]수민은 박자에 맞춰 고개를 까딱이며 따라 불렀다. 리듬에 맞춰 어깨까지 들썩거리자, 정은은 곧장 안전벨트를 꽉 잡았다.“야야야, 운전 중이야. 진지하게 좀 몰아.”“앗, 네네, 죄송... 요즘 정신이 잠깐씩
“이제야 좀 낫네.”민지는 전화를 끊었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걸렸다.‘이상하네...’예전 같으면 둘이 만나기로 한 날엔 늘 서준이 먼저 도착해 있었고, 자기가 좋아하는 밀크티며, 선호하는 과자까지 미리 챙겨놨었다.‘오늘은 어딘가 좀... 다르네.’그리고 서준이 도착하고 나서, 민지의 그 낌새는 더욱 확실해졌다.그녀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서준을 바라봤다.“너 기분 안 좋아?”“아니...”“거짓말! 완전히 삐졌잖아. 누가 너 속상하게 했어?”서준은 잠시 말없이 민지를 똑바로 바라봤다.그 시선에 민지의 가슴이 순간 ‘쿵’ 하고 내려앉았다.“뭐야, 왜 그렇게 봐...?”서준은 이내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기분 안 나빠.”“아니거든? 엄청 나빠 보이거든?!”“안 나쁘다니까.”“거짓말! 완전 티 나! 눈, 코, 입, 눈썹, 머리카락, 속눈썹... 다 티 난다니까! 그리고 오늘은 밀크티도 안 사 왔잖아!”서준은 입을 삐죽 내밀며 작게 중얼거렸다.“다른 사람이랑 밥 먹고 왔는데... 밀크티까지 마시면 배 안 터지냐...”“어...?”“어어어어어????”민지는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잠깐만, 너 오늘 오전에 나랑 진일 선배랑 밥 먹는 거 본 거야?!”“흥.”서준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홱 돌렸다.민지의 눈이 살짝 커지더니, 입꼬리를 얄밉게 올리며 말했다.“야, 내 말 좀 들어봐. 그게 말이야... 전일 선배가 고향 내려가기 전에 일부러 시간 비워서 밥 사준 거야. 그것도 선배 어머니가 챙겨준 거라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거절해?”서준은 작게 투덜거렸다.“근데 넌 말도 안 했잖아.”목소리는 작았지만 억울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하, 내가 뭐라고 말해야 하지... 그냥 보고 싶었을 뿐인데.’민지는 잠시 멈칫하다가, 말투를 조금 낮췄다.“중요한 일도 아니고, 우리 일정이랑도 안 겹쳤고...”“그리고... 너도 안 물어봤잖아. 그러니까... 내가 먼저 말해야 하는 줄은 몰랐지.”그 말에 서준은
처음엔 진영매도 스마트폰으로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웠다.‘아이고... 또 오타네... 이걸 또 지우고 다시... 에구구...’속도도 느리고, 자꾸 엉뚱한 단어가 입력돼서 정말 진땀을 뺐다.하지만 어느 날, 자판 옆에 있는 마이크 버튼을 눌러봤고, ‘음성 입력' 기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모든 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어머, 말만 하면 글자가 나오네? 이거 진짜 신기하네...’그 뒤로 점점 익숙해지면서 진영매는 ‘두부 단톡방’을 직접 관리하게 되었고, 주문 확인도 척척 해냈다.그러던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서 택배 보관소를 운영하는 이웃 아주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언니도 공동구매 한번 해보는 거 어때요? 요즘 동네 맘카페나 톡방에서 다 그걸로 부수입을 벌어요.”“공동구매요?”“네, 단톡방에 링크만 올리면 되는데, 그 링크로 누가 주문하면 언니한테 수수료가 떨어져요. 요즘 그런 플랫폼이 많아요.”그 말에 진영매는 ‘일단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작은 물건 몇 개부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무작정 링크만 던져놓는 식으로 하지는 않았다.직접 샀다. 직접 써봤다. 직접 먹어봤다.그리고 진심 담긴 후기를 함께 적어 올렸다.[이건 제가 직접 삶아봤는데, 식감도 쫄깃하고 가격도 괜찮아요. 혹시 필요하신 분만 구매하시고, 안 맞을 것 같으면 굳이 안 사셔도 돼요.]‘괜히 민폐 되기 싫으니까... 무조건 좋다고는 못 하지.’그런데 이렇게 정성껏 올린 글이 톡방 안에서 반응이 꽤 좋았다.처음엔 몇 개, 그러다 열 개, 스무 개... 요즘은 많을 땐 하루에 백 개 넘는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하루 수익만 몇만 원 되는 날이 생기자, 남봉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니... 진짜? 당신 하루 종일 집에 앉아서 그렇게 번 거야?”그는 아침마다 두유를 끓이고, 비지 짜고, 순두부 포장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단지 세 군데씩 배달을 돌곤 했다.‘점심엔 다시 나가 광장에 작은 천막을 치고 두부 요리 판매, 해 질 무렵에야 집에
어느새 정은이 실험실에서 지낸 지 거의 2주가 되었다. 이번 집중 실험은 처음 계획대로라면 이틀 정도 일찍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불꽃 열정 모드로 돌입했다.“정은 언니! 우리 이참에 2차 실험안도 다 밀어붙여요! 타이밍 완벽하잖아요! 이왕 하는 김에 끝까지 가보자고요!”진일은 별로 상관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어차피 난 어제도 오늘도 실험실에서 잘 운명인데... 집에서 자나 여기서 자나... 거기서 거기지 뭐.’서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민지 편. 민지가 하자고 하면, 그냥 했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뭐.정은은 그런 셋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 그렇게, 예정보다 이틀 더 실험실에 갇혀 살며 2차 실험안까지 초안 작업을 마무리했다.민지의 슬로건은 이랬다.“오세요! 같이 말아봐요! 끝없는 연구의 늪!”그리고 마침내 모든 걸 정리한 날.“정은 언니! 헤헤. 저요... 연차 쓸게요! 푹 쉬어야겠어요!”‘뭐야, 이 모든 열정의 뿌리는 결국... 편하게 놀기 위한 전주곡이었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승인.”오후엔 서준이 조용히 다가왔다.“누나...”“혹시 너도 연차 쓰려고?”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둘이 같이...? 이건 무슨 흐름이지?’그렇다면 정은은 결단을 내렸다.“그냥 모두 이틀씩 쉬자. 다들 수고했으니까.”‘일도 일이지만, 쉬는 것도 중요하지. 그래야 오래 가지.’특히, 실험복을 벗지도 않고 앉아 있는 진일을 보며 정은은 단호히 말했다.“진일 선배는 특히 금지! 쉬는 날에 실험실 들어오면, 바로 벌금이에요!”진일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벌금...? 아니, 요즘은 연차 쓰라고 협박하는... 그런 시대인가...?”정은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일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그럼... 집에 좀 다녀올게. 이맘때쯤이면 우리 집은 옥수수 수확 시즌이라... 도와야 하거든, 헤헤.
정은은 순간 멈칫했다.“조 교수님? 그분이 여길 다녀가셨어?”“네, 두 시쯤 오셨던 것 같아요. 한참이나 언니를 기다리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니까 한 시간 넘게 앉아 계시다가 10분 전에 그냥 가셨어요.”‘10분 전...?’정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돌아오기 직전...’“언니, 조 교수님... 요즘 스트레스가 좀 많으신 것 같지 않아요? 혹시 다른 실험실에 새로운 과제라도 시작한 걸까요? 지난번 과제 마무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새로운 시작이라니... 진짜 무서워요, 그 열정...”정은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그런 생각이 들어?”“그게... 오늘 조 교수님 상태가 좀 이상했어요. 뭐랄까... 눈 밑 다크서클이 거의 좀비 수준...? 적어도 이틀은 연달아 밤을 새우신 것 같았어요.” “게다가 표정도 되게 딱딱하고... 그냥 누가 봐도 기분 안 좋아 보이는 그런... 음... 미간 주름으로 모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그랬구나.’정은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뭐, 늘 바쁘시잖아.”정은은 애써 담담하게 넘기려 했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복잡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민지는 입을 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근데 진짜... 이상하게 느껴졌단 말이지...’‘그냥 피곤해 보인 게 아니라, 뭔가... 속이 무너진 느낌?’...한편, 재석은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몰다가 주차장에 도착했다.그리고 차를 멈춰 세우자,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정은이는 오늘 차를 가져갔었네.’‘그럼... 차를 가져갔으면서, 왜 장은혁 차를 타고 왔지?’입술이 아주 얇게 다물어졌다.표정 하나 없이, 그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건 사람은 진욱이었다.[나, 어제 분명히 퇴근 전에 분석 리포트를 너한테 넘겼었잖아? 그런데 지금 보니 없어졌어. 어디 간 거지?] 재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기본적인 실수는 애초에 그
은혁은 뭔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낯설면서도, 묘하게 두근거리는 느낌. ‘이런 게 설렘인가...?’“은혁 씨, 고마워요.”멀리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넨 정은은 조용히 걸어가며 귀걸이를 착용했다. “정... 정은 씨!”그 순간, 정은이 멈춰 서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네? 무슨 일 있어요?”은혁은 당황해서 말이 꼬였다.“저, 그게...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식사 한번...” “아니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시간 되실 때... 제가 꼭 한번 대접하고 싶어서...”정은은 순간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식사요...? 왜요?”“그게...”은혁은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잽싸게 핑계를 떠올렸다.“아! 제 사촌 여동생이요, 예전에 정은 씨가 보내준 시험 대비 정리자료를 되게 잘 봤다고...”“꼭 밥 한번 사드리라고... 신신당부해서요! 감사 인사 겸해서요!”정은은 시선을 실험실 방향으로 돌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죄송해요. 오늘은 당장 들어가서 실험해야 해요... 그리고 요즘은 계속 이 안에서 지내느라, 언제 시간이 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은혁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정은은 살짝 웃으며 말을 끊었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정은은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해 실험실로 들어갔다.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혁. 문 옆에 붙어 있는 간판을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무한 실험실?”차로 돌아온 은혁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무한 실험실... 설립, 소정은, 연구 성과...]‘정은 씨... 서비대 대학원을 나왔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였다고?’논문 게재 수, 영향력 지수, 직접 설립한 실험실, 정부 과제 주도...은혁은 화면을 스크롤 하며, 점점 입꼬리가 올라갔다.‘이 정도면... 그냥 똑똑한 수준이 아니네. 완전 대단하잖아...’그렇게 넋을 놓고 화면을 보고 있던 찰나, 갑작스러운 경적이 들렸다. 빵!까맣
명주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들켰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0.1% 더 양보할게요. 이게 정말 마지막 양보입니다.”정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0.3이요. 저도 그게 최선이에요.”명주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정은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알맞게 비워진 컵.“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정말로 가려는 발걸음이었다.명주는 예상치 못한 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 잠깐만요! 가격이라는 게... 원래 대화하면서 맞춰가는 거잖아요!”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잡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0.3이 괜찮으시다면 바로 계약서 쓰시고,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이 분위기, 진짜다... 장난 아니네, 이 사람...’명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은이 진짜 나갈 기세라는 걸 느끼자,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요. 그렇게 하죠.”정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계약 성사네요.”서류는 빠르게 정리됐다.두 사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비 납품 일정과 설치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조율했다.완벽한 비즈니스 매듭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려던 정은은 명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 씨!”“혹시...사람들한테 ‘심리 꿰뚫는 거 잘한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명주는 씁쓸하게 웃었다.“사실, 장비를 오늘 꼭 팔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은 씨는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태도로 딱 버티시더라고요. 그걸 알아챘을 땐... 이미 계약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어요. 하하...” 정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요.”“거짓말.”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대신,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뭔데요?”정은은 돌아서며 미소를 흘렸다. “먼저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