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실험실 시정은 사실이고 진도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그래서 따질 필요가 없었다.그녀가 다시 앉자, 마침 강서정이 바로 옆에 앉아 있었다.서정은 참지 못하고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소정은, 너도 이렇게 당하는 날이 있다니.”“인생에는 항상 기복이 있는 법이지. 사람이라면 다 운이 나쁠 때가 있는 거 아니겠어? 그러나 너희들도 조심해, 앞으로 무슨 일이 들이닥칠지 모르니까.”“뻔뻔하긴!”정은은 앞을 쳐다보며 얼굴에 노기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서정은 정은의 담담한 모습을 보며 엄청 화가 났다.“넌 송 교수님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젊었을 때의 오 교수님이라면 모를까. 하지만 그 교수님은 이미 늙으셔서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 넌 그런 교수님의 학생이 되었으니, 세력도 없고 그저 괴롭힘을 당할 수밖에 없겠지.”“당초에 내가 너와 그렇게 싸우며 오미선 교수님의 학생이 되고 싶었는데, 결국 네가 이겼고, 내가 졌잖아. 그러나 지금 일이 또 이렇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어? 그래서 한 번 이겼다고 해서 평생 이긴 것은 아니야. 졌다고 해서 앞으로 줄곧 지는 것도 아니고. 너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겠지?” 서정은 득의양양하게 말했다.‘대학원 시험에서 일등을 하면 또 뭐가 어때서? 면접 시험을 잘 봤다고 또 뭐가 달라지는데? 스스로 돈을 내서 CPTR을 샀지만, 결국 실험실을 사용할 수 없는 지경으로 전락했잖아?’“소정은, 넌 우리 오빠와 헤어진 후에 어째서 상황이 점점 더 나빠졌니? 대학원에 붙으면 아주 잘난 거라 생각했던 거야? 우리 오빠가 널 안중에 둘 줄 알았어? 우리 엄마가 너라는 며느리를 놓친 것을 후회하게 할 수 있을 줄 알았냐고? 꿈이나 깨!”정은은 웃으며 눈가에 웃음기가 가득했고, 엄청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네 말의 뜻인 즉... 내가 대학원 시험에서 확실히 성공을 거둔 거잖아. 네 오빠는 확실히 내 성적에 놀랐고, 네 어머니도 나란 며느리를 놓친 것을 후회하고 계시지, 맞지?”“너..
백두강이 입을 열었다.“각 팀 다 보고했겠지? 다른 신고할 사항은 없는 건가?”관례에 따라 각 팀은 보고가 끝난 후, 대학원 회의에서 신고 사항을 발표해야 했다.물론 작은 일은 보고할 필요가 없었는데, 인사 변동, 제명과 같은 큰일만 보고하면 됐다.공평과 공정을 표시하기 위해 감찰팀 대표가 대중 앞에서 신고서를 낭독해야 했다.평소에 이 코너는 생략하면 됐다.신고할 내용이 없으니까.백두강은 오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무대에 앉아 있던 감찰팀 대표가 일어설 줄이야.“한 가지가 있습니다.”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백두강조차도 놀라서 눈썹을 찌푸렸다.“구체적인 사항은 소정은의 연구팀이 교외에 자체로 실험실을 건설할 것을 신청한 것에 관한 고지서입니다. 저희측은 이미 접수했으며 관련 수속을 심사하고 있고, 진도를 제때에 대학원측 및 학교측에 보고할 것입니다.”이 말은 마치 돌이 호수에 떨어진 것처럼 파문을 일으켰다.“자체로 실험실을 건설한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나 잘못 들은 거 아니죠?”“누가 실험실을 짓는 거지? 학교 측이 연합하여 설립한 연구 작업실인가? 그래도 실험실이라고 할 수는 없는데...”“중점 못 들었어? 이건 고지서지 신청서가 아니야. 다시 말해서, 소정은의 팀은 이미 실행을 하기 시작했단 거야. 이번 신고도 절차에 따라 학교에 고지하는 의무를 이행했을 뿐이라고.”“헐... 그동안 들은 소식들 어쩜 이렇게 신기한 거지? 전에 어떤 사람이 혼자 돈을 내서 CPRT 한 대를 샀다고 하던데, 지금 뜻밖에도 혼자 실험실을 지으려는 사람이 있다니?! 실험실이 무슨 농사야? 짓고 싶으면 짓게?”“음... CPRT를 구매한 사람과 자체 실험실을 건설하려는 사람이 같은 사람일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뭐?!”...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그리고 송지혜 팀은 이미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진호는 망연자실하게 말했다.“방, 방금 뭐라고 했어?”지예는 중얼거렸다.“그럴 리가...”서정조차도 두 눈을
현장에서 안색이 가장 안 좋은 사람은 그래도 송지혜였다.‘스스로 실험실을 세우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송지혜는 멍해졌고, 자신의 귀를 의심했으며 마지막에는 냉소를 지었다.‘혼자 실험실을 짓겠다고? 말이 쉽지, 그게 정말 마음대로 될 것 같아?’ ‘돈을 얼마나 써야 하는지는 차치하고라도, 땅과 심사비준만 해도 까다로워서 소정은은 절대로 따낼 수 없어.’예전에 학교가 오미선의 편을 들어줬을 때, 송지혜도 나름 고생을 했다.학생도 없지, 자원도 없지, 학교도 송지혜를 철저히 외면하며 무시했다.가장 힘들 때 송지혜는 억울함을 참으며 심지어 학교를 떠나 스스로 실험실을 지으려 했다.그때 가서 성적을 내면, 학교도 다시 찾아와서 그녀에게 부탁할 것이다.그러나 송지혜는 가장 억울할 때만 이런 생각을 했을 뿐, 전혀 실천을 하지 않았다.너무 어려우니까.밖에서 아무 공터 하나 찾아 벽돌로 쌓으면 바로 실험실을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국가와 사회가 인정하는 실험실은 부지선정에 엄격한 요구가 있을 뿐만 아니라, 건축에도 명확한 규정이 있으며, 또 관련 부문의 심사비준을 거쳐야 한다.“풉...”“이모... 앗! 교수님, 왜 웃으세요?” 지예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그 사람들이 주제넘은 생각을 해서 말이야. 평소에 이런 장난을 쳐도 그만이지만, 뜻밖에도 대학원에 신고를 했다니. 큰소리 치다가 자빠질지도 몰라.”“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지예는 조심스럽게 떠보았다.“허, 넌 스스로 실험실을 짓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알아? 신고 고지서일 뿐, 다 지은 것도 아닌데, 이렇게 놀랄 필요가 있겠어?”신고는 신고였고, 짓는데 시간이 얼마 필요한지, 어떻게 지을지, 마지막에 인정받을 수 있을지는 모두 미지수였다.‘놀랄 게 뭐가 있다고?’“이런 방식으로 자존심을 세우려 하는 것 좀 봐. 정말 웃기고 불쌍해.”“그들이 실험실을 짓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세요?”송지혜는 턱을 살짝 들고 냉소를 지었다.“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지예는 바로 웃음을
1개월 23일에 걸쳐 20억 원 이상의 예산이 투입된 첨단 지능형 시스템과 두 단계의 생물안전등급 체계를 갖춘 실험실이 마침내 이번 겨울 세 번째 눈이 멈춘 후 완공되었다. 인훈은 자신의 팀을 데리고 실험실 지능시스템의 마지막 테스트를 진행했다.이와 함께 현빈의 명의로 된 과학기술회사가 해외를 통해 구매한 각종 실험기기도 속속 도착했다.민지와 서준은 요 며칠 바빠서 죽을 지경이었다.인훈과 스마트 시스템 조작 방법을 익혀야 하는 것 외에, 기기를 점검하고 공간을 배치해야 했다.실험대며 정수기며 모두 두 사람이 직접 안착시켰다.수업, 식사,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나머지 시간은 거의 여기에서 보냈다.서준네.“서준아, 또 나가려고?”“네, 할머니!”“오늘은 토요일이잖아? 수업도 없는데 왜 자꾸 밖으로 뛰쳐나가는 거야? 너 여자친구 사귀었어?!” 할머니는 흥분을 금치 못했다.“아니에요!”“그럼 뭐 하러 가는 건데?”“중요한 일이 하나 있어요! 할머니, 저 먼저 갈게요.”말을 마친 후, 서준은 가방을 들고 목도리를 두르며 성큼성큼 집을 나섰다.할머니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어린아이한테 무슨 큰일이 있겠어?”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고 차를 마시던 할아버지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서준이 실험실로 달려갈 때, 민지도 택시를 탔다.“기사님, 교외로 가주세요, 감사합니다!”“그곳은 공사장인데, 아가씨 혼자 뭐 하러 가려고?”민지는 표정이 숙연해지더니 또박또박 말이었다.“엄청 중요한 일이에요.”도중에 그녀는 하정남의 전화를 받았다.“네, 아빠.”[넌 내가 보고 싶지도 않니? 난 보고 싶어 죽겠는데?]“나도 아빠 보고 싶어요. 쪽쪽!”민지가 뽀뽀를 하자, 하정남은 기분이 좋아졌다.그러나 입으로는 여전히 원망했다.[보고 싶으면서도 나한테 연락도 없고! 흥! 누구를 속이는 거야?]“아빠, 나 요즘 바빠서 그래요. 정신없이 바빴단 말이에요!”[뭐가 바빠? 아빠한테 말 할 수 있어?]“곧 알게 될 거예요! 정말이에요!”[나한테도
첫 번째로 초청장을 처음 받은 사람은 하정남이었다.택배로 부쳤기 때문에 민지는 이틀 전에 초청장을 자신의 고향으로 보냈다.택배원의 전화를 받았을 때, 하정남은 어리둥절해졌다.‘집사람리 또 인터넷 쇼핑을 한 거야? 그런데 왜 내 전화를 남겼지? 설마... 에르메스를 샀는데 착불로 부친 건 아니겠지?!’“이 사람이 정말!”옆에서 쑥뜸을 하고 있던 민지 어머니는 영문을 몰랐다.하정남은 쿵쿵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가 택배를 받고, 또 쿵쿵거리며 위층으로 뛰어올라갔다.보낸 사람을 보니, 뜻밖에도 그의 딸이었다.하정남은 희색이 만면했다.“누구 택배예요?” 민지 어머니는 쑥을 들고 물었다.온 거실에 쑥 냄새가 가득했다.하정남은 맨손으로 택배를 뜯었다.“우리 민지.”“응?” 임수인은 얼른 다가왔다.“민지가 뭘 보냈어요? 왜 서류봉투죠? 계산서 아니에요?”하정남은 멈칫했다.“설마, 그럴 리가? 얼마 전에 금방 3천만 원 줬는데!”이 얘길 꺼내자, 임수인은 화를 냈다.“3천만 원을 달라했다고 바로 줘요? 앞으로 국고를 달라고 한다면, 그것까지 훔쳐서 줄 거예요?! 평소에 내가 가방을 몇 개 사면 반년 동안 잔소리를 하다니. 지난달에 내가 차를 바꾸겠다고 해도 허락하지 않았잖아요. 그런데 민지가 말 한마디만 하면 바로 줘요? 민지도 내가 낳은 딸이잖아요!”“이 돈 가지고 뭘 했는지 누가 알겠어요? 남들과 나쁜 짓을 배우는 것도 두렵지 않나 봐요!”“민지가 말했잖아, 실험실을 짓겠다고!”임수인은 콧방귀를 뀌었다.“실험실이요? 당신은 그걸 믿는 거예요! 전국 최고의 대학교에서 실험실 한 칸을 못 내주는 거예요 뭐예요? 왜 민지가 자신의 돈을 써서 새것을 지어야 하냐고요? 맨날 돈을 많이 줘서 무슨 사고라도 쳤겠죠!”“어제 뉴스를 봤는데, 재벌 2세의 대학생들이 매년 클럽에 가서 수십억을 쓴다잖아요. 이상한 남자와 엮이면 어떡하려고. 당신은 민지에게 이렇게 많은 돈을 줬으니, 나중에 남자에게 속으면 어쩌려고요?”“하긴, 내가 당신에게 아들을
하정남은 초청장을 임수인에게 건네주었다.“자, 당신이 봐.”임수인은 초대장을 받더니 잠시 멍해졌다.“정말 실험실을 지었구나...”“우리 딸이 아들보다 못한 게 뭐가 있어?! 흥! 앞으로 이런 말은 절대 우리 민지 앞에서 하면 안 돼... 뒤에서 해도 안 돼, 들었어?”임수인은 입을 삐죽거렸다.“내가 지금 말하고 있잖아!”“알았어요! 딸을 참 소중히도 여기고 있네요! 내가 뭘 말했다고 그래요!”하정남은 그제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알면 됐어.”...부부는 이날 오후 짐을 챙겨 공항으로 출발했다.마을 어귀를 지날 때, 사람들이 물었다.“아저씨, 또 바다낚시 가시려고요?”“이번에는 바다낚시 대신 J시에 갈 거야.”“이야, 왜 이렇게 멀리 가시는 건데요?”“우리 딸 보러.”“무슨 일 생겼어요?”“아주 큰일을 해냈거든!”...같은 날, 학교와 대학 측도 초청장을 받았다.총장이 물었다.“생명과학대학의 학생이 스스로 실험실을 지었는데, 곧 커팅식을 열 거라고?”그는 이 말을 할 때, 멍한 표정으로 부총장을 바라보았다.부총장은 잠시 멈칫했다.“어... 저도 방금 얻은 소식이라서요. 전에 생명과학대학에서 보고한 적이 없거든요.”“소정은... 얼마 전에 Science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한 그 학생 아니야?”“네, 맞아요.”“스스로 실험실을 지었다고?” 총장은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부총장은 긴장한 나머지 땀을 닦았다.“학생들의 자발적인 행동일 거예요. 장난에 불과하니, 무슨 소란도 일으킬 수 없을 것 같은데...”“오미선 교수가 자신의 학생을 대신해서 초청장을 우리에게 보냈는데, 그게 아직도 장난이라고 생각해?”총장은 확실히 남다른 안목과 남들보다 넓은 마음을 가졌다.“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요? 실험실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지을 수 있겠어요?”“학교 관리자로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문제는 따로 있지 않은가? 왜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무료로 실험실을 제공하는 상황에서 소정은의 팀이 학교 밖에서 실험실을 지었을까?
“앉아.” 백두강은 차갑게 말했다.“부학장님, 내 말 못 들었어요? 바쁘니까 지금 여기서 수다 떨 시간이...”“앉으라고 했잖아, 귀가 먹은 거야?! 굳이 날 째려보면서 나와 말을 해야 편한 거야?! 네가 뭔데?! 체면을 좀 봐줬다고 감히 내 머리 위로 올라타?! 애초에 누가 널 도와줬는지 잊지 마! 또 누가 매년 너를 위해 자원을 쟁취하고 있는데?!”“그렇지 않으면, 너의 그 보잘것없는 성적으로 오미선에게서 경비를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해?! 넌 너무 배불리 먹어서 이 주인에게 대들고 있구나!”송지혜는 쏟아지는 욕설에 멍해졌다.“아, 아니 왜...”백두강은 여태껏 그녀에게 이렇게 크게 화를 낸 적이 없었다.“다시 말하지만, 앉으라고!”송지혜는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고 얌전히 의자를 당겨 앉았다.“무슨 일이시죠?” 심지어 말투까지 조심스러웠다.백두강은 냉소를 하며 손에 든 초청장을 그녀의 얼굴에 던졌다.“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낯짝이 있긴 한 거야?! 네가 직접 봐!”송지혜는 초청장에 얻어맞았지만,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의혹을 느끼며 초청장을 주운 뒤, 송지혜는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커팅식이요?! 어떻게 이럴 수가?!”“왜 불가능하겠어? 학장님이 방금 가져와서 내 앞에 던진 거야. 총장님도 이미 받았다고! 이게 거짓이 될 수 있겠어?!”“소정은이 총장님에게 이 일을 일러바쳤다고요?! 정, 정말...”송지혜는 지금 당황스러운 마음을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아마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학교 측이 이 일을 알고 있었으니, 그렇게 쉽게 넘어가지 못할 것이다.“아무튼.”송지혜는 숨을 깊이 들이쉬며 이를 악물었다.“전 소정은이 정말 실험실을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마도 우리 모두를 놀리는 수단에 불과하겠죠. 우리가 당황해지도록.”백두강도 분명히 이 견해에 동의했다.“지금 학교 측은 이미 이 일을 알고 있어. 그러니 총장님이 직접 소정은 팀이 억지를 부린다는 것을 확인해야만 우리가 무사할 거야. 그렇지 않으면
밤이 되자, 달빛이 휘영청 밝았고,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정은은 실험실 대문으로 걸어간 다음, 뒤를 바라보았다.“구름아, 불 꺼.”“정은아,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기계 소리가 울렸다.정은은 머리를 들었다.“얼굴 식별에 성공했습니다. 불을 끄겠습니다.”말이 떨어지자, 실험실 전체의 불빛이 일제히 꺼지더니 순식간에 어둠에 빠졌다.정은이 떠나자 문이 자동으로 닫히고 바로 잠겼다.‘스마트 실험실이라... 정말 너무 좋네!’정은은 차를 부르려 했지만, 문득 길가에 주차된 포르쉐 차 문이 열린 것을 발견했다. 현빈이 안에서 내려왔다.정은은 깜짝 놀랐다.“왜 아직도 가지 않은 거예요?”오후에 현빈이 와서 실험 기구의 상황에 대해 물었다.원래 전화로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지만, 현빈은 기어코 현장에 오려 했다.“너의 새 실험실이 궁금해서.”이것을 언급하자, 정은의 눈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고, 흥미진진하게 그를 데리고 참관하기 시작했다.그렇게 한 시간이 걸렸다.정은에게 다른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현빈은 먼저 작별을 고했다.정은은 현빈이 벌써 떠났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아니었다.“널 기다리고 있었지.”“사실 그럴 필요 없는데, 난...”정은은 분명하게 말하고 싶었다.그러나 남자는 전혀 듣지 않고 그녀의 말을 끊었다.“일단 타. 시간도 늦었잖아.”“고마워요.”현빈은 미소를 지었다.“그래. 앞으로 내가 듣기 좋아하는 말만 하자.”말하면서 직접 그녀를 위해 조수석 문을 열었다.가는 길에서.“방금 그 지능형 로봇의 이름이 무엇이라고 했지?”“구름이요.”“누가 지었어?”“우리 오빠요.”“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구름을 타고 승승장구하라는 의미로 지은 거예요.”“소 사장에게 이런 실력이 좀 있는 줄 몰랐는데...”정은은 핸드폰을 들었다.“녹음해서 우리 오빠에게 보낼 거예요.”“그래, 난 지금 소 사장을 칭찬하고 있는데. 방금 녹음하지 못했지? 내가 다시 한번 말할까?”이 세상에 현빈보다 더 뻔뻔한 사
“은혁아, 우리 먼저 가볼게.”은혁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려던 찰나, 정은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은혁 씨, 같이 식사하시죠? 어차피 저도 아직 안 먹었는데요.”“마침 예약도 해뒀으니까 괜찮다면 같이 가요.”“정, 정말요?! 괜찮을까요?”은혁은 말끝이 떨릴 정도로 들뜬 기색이었다.수민은 표정으로 정은에게 물었다. ‘진심이야?’정은은 눈빛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수민은 한숨 쉬듯 웃으며 말했다.“좋지 뭐... 사람 하나 늘어난다고 달라질 거 없잖아. 같이 가자.”은혁은 기뻐서 입꼬리를 다 못 내렸다. ‘정말 같이 가는 거야...? 나 지금 약간... 꿈꾸는 거 아냐?’...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직원이 안내한 자리로 세 사람이 들어갔다. 따로 마련된 룸이라 분위기도 아늑했다.음식이 나오기 전, 은혁이 갑자기 말했다.“기다리는 김에... 작은 마술 하나 보여드릴까요?”수민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마술도 해? 그러고 보니, 정은이 외할머니 생신 때도 뭐 하나 보여줬었지.”“이번엔 새로 배운 거예요.” 은혁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그럼 해봐, 해봐!” 수민은 벌써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 준비 완료 상태로 들고 있었다.“도구 필요해?” 그녀가 묻자, 은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옆 캐비닛에서 종이 티슈 한 팩을 꺼냈다.그중 다섯 장을 쏙쏙 뽑아냈다. 마침 티슈에 프린트된 꽃무늬가 하나하나 다 달랐다.그는 정은을 향해 말했다.“정은 씨, 가장 마음에 드는 거 하나 골라주세요.”정은은 망설이지 않고 무심하게 한 장을 집어 들었다.은혁은 그걸 받아 조심스럽게 반으로 접고 말했다.“잘 봐요.”다시 펴서 말한 뒤, 조용히 티슈를 손안에서 뭉쳤다. 그리고 그 주먹을 천천히 펴자 손안에는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선물이에요.”은혁은 웃으며 그 꽃을 정은에게 건넸다.“진짜 꽃이에요?”정은은 놀란 듯 꽃을 받았다. 손에 올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봤다.‘이거... 어떻게 한 거지?’수민은 슬쩍 핸
“안녕하세요.”정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은혁은 일행과의 대화를 뚝 끊고 곧장 정은 앞까지 다가왔다.“머리하러 왔어요?”“네.”“그... 저번에 식사 한번 하자고 했던 거 기억하죠? 혹시 오늘은 시간 괜찮으세요?”정은은 짧게 대답했다.“친구랑 같이 왔어요. 죄송해요.”그 순간 수민이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장난기 가득한 미소로 손을 흔들었다.“하이! 은혁 도련님?”“수민이?! 혹시 정은 씨랑 같이 왔어?”수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내가 바로 그 친구.”“와! 그럼 다 아는 사이네! 머리 끝나고 다 같이 밥 어때? 내가 쏠게!”수민은 눈을 살짝 굴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근데 나 들러리 아니야? 밥 사고 싶은 상대는 따로 있잖아.”은혁은 순간 말이 막혀 멋쩍게 웃었다.“그, 그게... 다 친구잖아. 다 같이 보면 좋은 거지 뭐... 하하...”그 말이 끝나자 수민은 슬쩍 정은 쪽을 힐끔 바라봤다.‘갈까? 아니면 거절할까?’정은은 아주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그걸 본 수민은 곧장 말투를 바꿨다.“나 아직 염색 더 남았거든. 게다가 이미 예약해 둔 식당도 있어서 미안. 다음에 보자!”은혁은 서둘러 말했다.“아, 괜찮아! 나 기다릴 수 있어. 같이 식당 가면 되잖아!”그러자 수민이 한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고개를 저었다.“노노!! 오늘은 걸스 나잇. 남자는 입장 금지, 알겠어?”“그렇구나...”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그럼... 다음에 따로 할게.”수민은 환하게 웃었다.“그래, 다음에 봐.”여기까지면 끝인 줄 알았는데, 은혁이 예상 밖의 행동을 했다.그는 정은이 옆 소파에 툭 앉은 거였다.“정은 씨... 옆에 좀 앉아도 괜찮죠?”“네.”그가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날 제가 데려다드린 곳, 정은 씨 실험실이었죠?” “맞아요.”“저 사실 대학 시절 전공이 재료공학이었어요. 생명과학과는 다르지만, 교차하는 영역도 좀 있죠. 논문 읽다 보면 은근 연결되더라고요.” ‘어...? 이 사람
재석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그 어떤 것도 할 자격이 없지.’그 틈을 타 정은이 다시 입을 열었다.“저는 좀 더 기다려야 해서요. 선배님 먼저 차 가져가세요.”“그래.”재석은 무언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말을 붙일 이유가 없었다.그렇게 조용히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그 사람... 누구일까?’...정은은 길가에 조용히 서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5분쯤 지난 후, 골목 입구로 노란색 페라리가 굉음을 내며 등장했다. 엔진 소리만으로도 차주의 성격이 상상되는 차였다.운전석 창문이 슥 내려가더니, 조수민이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휘파람을 불었다.“우리 공주님! 탑승하시죠!”정은은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간다! 간다!”차에 올라 조수석에 앉은 정은은 안전벨트를 매며 슬쩍 물었다. “또 바꿨어? 차?”“아냐, 고동건 그놈 차야.”“오...”“뭐야 그 ‘오’는? 뭔가 의미심장했어.”수민이 의심 가득한 눈으로 흘겨봤다.정은은 시크하게 말했다.“그냥 ‘오’ 한 거야. 더는 묻지 말고, 운전이나 해. 묻는 순간부터 의미 없어져. 너도 알잖아.”“와... 너 요즘 말투 진짜, 우리 오빠랑 똑 닮았어. 점점 꼬인다, 꼬여.”정은은 잠시 말을 멈추다 살짝 고개를 돌렸다.‘재석 선배...?’하지만 금세 아무렇지 않은 듯 차 안엔 음악이 흘러나왔다. 마침 흘러나오던 노래를 들은 수민은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다음 곡으로 넘겼다.[말 못 하는 그 말알게 해줘야 했는데그렇게 쉬운 몇 마디왜 난 못했을까...]‘무슨 가사야 이건?’그리고 이어진 곡...[기대하던 너의 붙잡음은 없고결국 넘겨준 그녀그럼 넌 뭐야 사랑한다면서도 기다리지 말라니 됐어, 넌 계속 그렇게 물러서더라...]수민은 박자에 맞춰 고개를 까딱이며 따라 불렀다. 리듬에 맞춰 어깨까지 들썩거리자, 정은은 곧장 안전벨트를 꽉 잡았다.“야야야, 운전 중이야. 진지하게 좀 몰아.”“앗, 네네, 죄송... 요즘 정신이 잠깐씩
“이제야 좀 낫네.”민지는 전화를 끊었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걸렸다.‘이상하네...’예전 같으면 둘이 만나기로 한 날엔 늘 서준이 먼저 도착해 있었고, 자기가 좋아하는 밀크티며, 선호하는 과자까지 미리 챙겨놨었다.‘오늘은 어딘가 좀... 다르네.’그리고 서준이 도착하고 나서, 민지의 그 낌새는 더욱 확실해졌다.그녀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서준을 바라봤다.“너 기분 안 좋아?”“아니...”“거짓말! 완전히 삐졌잖아. 누가 너 속상하게 했어?”서준은 잠시 말없이 민지를 똑바로 바라봤다.그 시선에 민지의 가슴이 순간 ‘쿵’ 하고 내려앉았다.“뭐야, 왜 그렇게 봐...?”서준은 이내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기분 안 나빠.”“아니거든? 엄청 나빠 보이거든?!”“안 나쁘다니까.”“거짓말! 완전 티 나! 눈, 코, 입, 눈썹, 머리카락, 속눈썹... 다 티 난다니까! 그리고 오늘은 밀크티도 안 사 왔잖아!”서준은 입을 삐죽 내밀며 작게 중얼거렸다.“다른 사람이랑 밥 먹고 왔는데... 밀크티까지 마시면 배 안 터지냐...”“어...?”“어어어어어????”민지는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잠깐만, 너 오늘 오전에 나랑 진일 선배랑 밥 먹는 거 본 거야?!”“흥.”서준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홱 돌렸다.민지의 눈이 살짝 커지더니, 입꼬리를 얄밉게 올리며 말했다.“야, 내 말 좀 들어봐. 그게 말이야... 전일 선배가 고향 내려가기 전에 일부러 시간 비워서 밥 사준 거야. 그것도 선배 어머니가 챙겨준 거라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거절해?”서준은 작게 투덜거렸다.“근데 넌 말도 안 했잖아.”목소리는 작았지만 억울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하, 내가 뭐라고 말해야 하지... 그냥 보고 싶었을 뿐인데.’민지는 잠시 멈칫하다가, 말투를 조금 낮췄다.“중요한 일도 아니고, 우리 일정이랑도 안 겹쳤고...”“그리고... 너도 안 물어봤잖아. 그러니까... 내가 먼저 말해야 하는 줄은 몰랐지.”그 말에 서준은
처음엔 진영매도 스마트폰으로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웠다.‘아이고... 또 오타네... 이걸 또 지우고 다시... 에구구...’속도도 느리고, 자꾸 엉뚱한 단어가 입력돼서 정말 진땀을 뺐다.하지만 어느 날, 자판 옆에 있는 마이크 버튼을 눌러봤고, ‘음성 입력' 기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모든 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어머, 말만 하면 글자가 나오네? 이거 진짜 신기하네...’그 뒤로 점점 익숙해지면서 진영매는 ‘두부 단톡방’을 직접 관리하게 되었고, 주문 확인도 척척 해냈다.그러던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서 택배 보관소를 운영하는 이웃 아주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언니도 공동구매 한번 해보는 거 어때요? 요즘 동네 맘카페나 톡방에서 다 그걸로 부수입을 벌어요.”“공동구매요?”“네, 단톡방에 링크만 올리면 되는데, 그 링크로 누가 주문하면 언니한테 수수료가 떨어져요. 요즘 그런 플랫폼이 많아요.”그 말에 진영매는 ‘일단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작은 물건 몇 개부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무작정 링크만 던져놓는 식으로 하지는 않았다.직접 샀다. 직접 써봤다. 직접 먹어봤다.그리고 진심 담긴 후기를 함께 적어 올렸다.[이건 제가 직접 삶아봤는데, 식감도 쫄깃하고 가격도 괜찮아요. 혹시 필요하신 분만 구매하시고, 안 맞을 것 같으면 굳이 안 사셔도 돼요.]‘괜히 민폐 되기 싫으니까... 무조건 좋다고는 못 하지.’그런데 이렇게 정성껏 올린 글이 톡방 안에서 반응이 꽤 좋았다.처음엔 몇 개, 그러다 열 개, 스무 개... 요즘은 많을 땐 하루에 백 개 넘는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하루 수익만 몇만 원 되는 날이 생기자, 남봉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니... 진짜? 당신 하루 종일 집에 앉아서 그렇게 번 거야?”그는 아침마다 두유를 끓이고, 비지 짜고, 순두부 포장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단지 세 군데씩 배달을 돌곤 했다.‘점심엔 다시 나가 광장에 작은 천막을 치고 두부 요리 판매, 해 질 무렵에야 집에
어느새 정은이 실험실에서 지낸 지 거의 2주가 되었다. 이번 집중 실험은 처음 계획대로라면 이틀 정도 일찍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불꽃 열정 모드로 돌입했다.“정은 언니! 우리 이참에 2차 실험안도 다 밀어붙여요! 타이밍 완벽하잖아요! 이왕 하는 김에 끝까지 가보자고요!”진일은 별로 상관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어차피 난 어제도 오늘도 실험실에서 잘 운명인데... 집에서 자나 여기서 자나... 거기서 거기지 뭐.’서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민지 편. 민지가 하자고 하면, 그냥 했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뭐.정은은 그런 셋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 그렇게, 예정보다 이틀 더 실험실에 갇혀 살며 2차 실험안까지 초안 작업을 마무리했다.민지의 슬로건은 이랬다.“오세요! 같이 말아봐요! 끝없는 연구의 늪!”그리고 마침내 모든 걸 정리한 날.“정은 언니! 헤헤. 저요... 연차 쓸게요! 푹 쉬어야겠어요!”‘뭐야, 이 모든 열정의 뿌리는 결국... 편하게 놀기 위한 전주곡이었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승인.”오후엔 서준이 조용히 다가왔다.“누나...”“혹시 너도 연차 쓰려고?”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둘이 같이...? 이건 무슨 흐름이지?’그렇다면 정은은 결단을 내렸다.“그냥 모두 이틀씩 쉬자. 다들 수고했으니까.”‘일도 일이지만, 쉬는 것도 중요하지. 그래야 오래 가지.’특히, 실험복을 벗지도 않고 앉아 있는 진일을 보며 정은은 단호히 말했다.“진일 선배는 특히 금지! 쉬는 날에 실험실 들어오면, 바로 벌금이에요!”진일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벌금...? 아니, 요즘은 연차 쓰라고 협박하는... 그런 시대인가...?”정은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일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그럼... 집에 좀 다녀올게. 이맘때쯤이면 우리 집은 옥수수 수확 시즌이라... 도와야 하거든, 헤헤.
정은은 순간 멈칫했다.“조 교수님? 그분이 여길 다녀가셨어?”“네, 두 시쯤 오셨던 것 같아요. 한참이나 언니를 기다리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니까 한 시간 넘게 앉아 계시다가 10분 전에 그냥 가셨어요.”‘10분 전...?’정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돌아오기 직전...’“언니, 조 교수님... 요즘 스트레스가 좀 많으신 것 같지 않아요? 혹시 다른 실험실에 새로운 과제라도 시작한 걸까요? 지난번 과제 마무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새로운 시작이라니... 진짜 무서워요, 그 열정...”정은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그런 생각이 들어?”“그게... 오늘 조 교수님 상태가 좀 이상했어요. 뭐랄까... 눈 밑 다크서클이 거의 좀비 수준...? 적어도 이틀은 연달아 밤을 새우신 것 같았어요.” “게다가 표정도 되게 딱딱하고... 그냥 누가 봐도 기분 안 좋아 보이는 그런... 음... 미간 주름으로 모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그랬구나.’정은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뭐, 늘 바쁘시잖아.”정은은 애써 담담하게 넘기려 했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복잡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민지는 입을 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근데 진짜... 이상하게 느껴졌단 말이지...’‘그냥 피곤해 보인 게 아니라, 뭔가... 속이 무너진 느낌?’...한편, 재석은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몰다가 주차장에 도착했다.그리고 차를 멈춰 세우자,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정은이는 오늘 차를 가져갔었네.’‘그럼... 차를 가져갔으면서, 왜 장은혁 차를 타고 왔지?’입술이 아주 얇게 다물어졌다.표정 하나 없이, 그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건 사람은 진욱이었다.[나, 어제 분명히 퇴근 전에 분석 리포트를 너한테 넘겼었잖아? 그런데 지금 보니 없어졌어. 어디 간 거지?] 재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기본적인 실수는 애초에 그
은혁은 뭔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낯설면서도, 묘하게 두근거리는 느낌. ‘이런 게 설렘인가...?’“은혁 씨, 고마워요.”멀리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넨 정은은 조용히 걸어가며 귀걸이를 착용했다. “정... 정은 씨!”그 순간, 정은이 멈춰 서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네? 무슨 일 있어요?”은혁은 당황해서 말이 꼬였다.“저, 그게...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식사 한번...” “아니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시간 되실 때... 제가 꼭 한번 대접하고 싶어서...”정은은 순간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식사요...? 왜요?”“그게...”은혁은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잽싸게 핑계를 떠올렸다.“아! 제 사촌 여동생이요, 예전에 정은 씨가 보내준 시험 대비 정리자료를 되게 잘 봤다고...”“꼭 밥 한번 사드리라고... 신신당부해서요! 감사 인사 겸해서요!”정은은 시선을 실험실 방향으로 돌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죄송해요. 오늘은 당장 들어가서 실험해야 해요... 그리고 요즘은 계속 이 안에서 지내느라, 언제 시간이 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은혁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정은은 살짝 웃으며 말을 끊었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정은은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해 실험실로 들어갔다.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혁. 문 옆에 붙어 있는 간판을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무한 실험실?”차로 돌아온 은혁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무한 실험실... 설립, 소정은, 연구 성과...]‘정은 씨... 서비대 대학원을 나왔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였다고?’논문 게재 수, 영향력 지수, 직접 설립한 실험실, 정부 과제 주도...은혁은 화면을 스크롤 하며, 점점 입꼬리가 올라갔다.‘이 정도면... 그냥 똑똑한 수준이 아니네. 완전 대단하잖아...’그렇게 넋을 놓고 화면을 보고 있던 찰나, 갑작스러운 경적이 들렸다. 빵!까맣
명주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들켰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0.1% 더 양보할게요. 이게 정말 마지막 양보입니다.”정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0.3이요. 저도 그게 최선이에요.”명주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정은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알맞게 비워진 컵.“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정말로 가려는 발걸음이었다.명주는 예상치 못한 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 잠깐만요! 가격이라는 게... 원래 대화하면서 맞춰가는 거잖아요!”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잡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0.3이 괜찮으시다면 바로 계약서 쓰시고,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이 분위기, 진짜다... 장난 아니네, 이 사람...’명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은이 진짜 나갈 기세라는 걸 느끼자,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요. 그렇게 하죠.”정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계약 성사네요.”서류는 빠르게 정리됐다.두 사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비 납품 일정과 설치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조율했다.완벽한 비즈니스 매듭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려던 정은은 명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 씨!”“혹시...사람들한테 ‘심리 꿰뚫는 거 잘한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명주는 씁쓸하게 웃었다.“사실, 장비를 오늘 꼭 팔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은 씨는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태도로 딱 버티시더라고요. 그걸 알아챘을 땐... 이미 계약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어요. 하하...” 정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요.”“거짓말.”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대신,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뭔데요?”정은은 돌아서며 미소를 흘렸다. “먼저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