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실험실 시정은 사실이고 진도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그래서 따질 필요가 없었다.그녀가 다시 앉자, 마침 강서정이 바로 옆에 앉아 있었다.서정은 참지 못하고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소정은, 너도 이렇게 당하는 날이 있다니.”“인생에는 항상 기복이 있는 법이지. 사람이라면 다 운이 나쁠 때가 있는 거 아니겠어? 그러나 너희들도 조심해, 앞으로 무슨 일이 들이닥칠지 모르니까.”“뻔뻔하긴!”정은은 앞을 쳐다보며 얼굴에 노기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서정은 정은의 담담한 모습을 보며 엄청 화가 났다.“넌 송 교수님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젊었을 때의 오 교수님이라면 모를까. 하지만 그 교수님은 이미 늙으셔서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 넌 그런 교수님의 학생이 되었으니, 세력도 없고 그저 괴롭힘을 당할 수밖에 없겠지.”“당초에 내가 너와 그렇게 싸우며 오미선 교수님의 학생이 되고 싶었는데, 결국 네가 이겼고, 내가 졌잖아. 그러나 지금 일이 또 이렇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어? 그래서 한 번 이겼다고 해서 평생 이긴 것은 아니야. 졌다고 해서 앞으로 줄곧 지는 것도 아니고. 너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겠지?” 서정은 득의양양하게 말했다.‘대학원 시험에서 일등을 하면 또 뭐가 어때서? 면접 시험을 잘 봤다고 또 뭐가 달라지는데? 스스로 돈을 내서 CPTR을 샀지만, 결국 실험실을 사용할 수 없는 지경으로 전락했잖아?’“소정은, 넌 우리 오빠와 헤어진 후에 어째서 상황이 점점 더 나빠졌니? 대학원에 붙으면 아주 잘난 거라 생각했던 거야? 우리 오빠가 널 안중에 둘 줄 알았어? 우리 엄마가 너라는 며느리를 놓친 것을 후회하게 할 수 있을 줄 알았냐고? 꿈이나 깨!”정은은 웃으며 눈가에 웃음기가 가득했고, 엄청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네 말의 뜻인 즉... 내가 대학원 시험에서 확실히 성공을 거둔 거잖아. 네 오빠는 확실히 내 성적에 놀랐고, 네 어머니도 나란 며느리를 놓친 것을 후회하고 계시지, 맞지?”“너..
알만한 사람들은 소정은이 강도겸을 미친 듯이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사랑은 자신의 생활도, 공간도 없이, 하루 24시간 강도겸을 중심으로 돌아갔다.매번 이별 후 사흘이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와 재회를 청했다. 누구나 이별이라는 말을 할 수 있지만, 정은은 절대 그러지 않았다. 도겸이 새로운 연인을 안고 들어올 때, 방안은 오묘한 정적이 5초간 흘렀다. 그러자 정은은 귤을 까던 손을 멈추고 말했다.“왜 다들 말이 없어? 나를 왜 봐?”“정은아.” 친구들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도겸은 아무렇지 않게 여자를 안고 소파에 앉았다. 노골적이고도 태연했다.“생일 축하해, 선우야.”정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일인 선우를 생각하며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싶지 않았다.“화장실 좀 다녀올게.”문을 닫을 때, 정은은 안에서 이미 대화가 시작된 것을 들었다.“형, 정은이 여기 있잖아요. 미리 얘기했는데 왜 여자를 데려왔어요?”“맞아! 도겸아, 이번에는 너무했어.”“신경 쓰지 마.” 도겸은 여자의 허리를 매만지며 담배를 피웠다. 흰 연기 속에서 미소 짓는 모습이 마치 세상을 게임처럼 여기는 방탕한 사람 같았다. 남은 대화는 문이 닫혀서 정은은 듣지 못했다. 정은은 침착하게 화장실에서 나와 화장을 고치며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았다.“정말 비참하군.”비참한 삶. 정은은 깊이 심호흡하며 결심했지만, 방으로 돌아와 문을 열었을 때, 정은은 참을 수 없이 문손잡이를 꽉 쥐었다. 도겸은 여자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있었고, 타액이 두 사람 사이에서 티슈를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주변 사람들은 웃으며 소란을 피웠다.“역시 도겸이네! 제대로 놀 줄 알아!”“분위기 끝내주네, 한 번 더!”정은의 문손잡이를 잡은 손이 떨렸다. 이 사람이 자신이 6년간 사랑한 남자라니. 지금, 이 순간 그저 헛웃음만이 났다.“야, 그만해.” 누군가가 작게 경고하며 문 쪽을 가리키자, 모두가 일제히 그쪽을 보았다.“정은, 돌아왔네? 이거 다 장난이야, 신경
식탁 쪽.“왜 죽이 없죠?”“보양식 죽 말이죠?”“보양식 죽?”“네, 정은 아가씨가 자주 끓여준, 찹쌀과 표고버섯, 황태, 대추를 함께 끓인 그 죽 말씀하시는 거죠?”“아이고, 그거 준비하려면 표고버섯, 황태랑 대추만이라 해도 전날에 준비를 해놔야 해요.”“그리고 불 조절이 특히 중요해요. 저는 정은 아가씨처럼 인내심이 없어서 계속 불을 볼 수 없어요. 제대로 끓여내지 못해요.”“그럼 고기 소스 좀 가져다줘요.”“그래요. 도련님.”“맛이 이상한데요?” 도겸은 병을 훑어보았다. “포장도 다르네요.”“도련님이 자주 먹던 그건 이미 다 먹어서 이제는 이거밖에 없어요.”“나중에 마트 가서 두 병 사다 놔요.”“못 구해요.”왕순자는 약간 난처하게 웃었다. “그것도 정은 아가씨가 직접 만든 거라서, 저는 못 해요.”쿵! 도겸은 깜짝 놀랐다.“음? 도련님, 식사 안 하세요?”“네.”왕순자는 도겸이 계단을 올라가는 뒷모습을 보며 당황했다. ‘갑자기 왜 화를 내시는 거지?’...“게으름뱅이! 일어나!”정은은 몸을 뒤척이며 눈을 뜨지 않았다. “시끄러워, 조금만 더 잘래.”조수민은 화장을 마치고 가방을 고르고 있었다. “곧 8시야, 너 강도겸한테 아침 안 해줘도 돼?”예전에도 정은은 가끔 외박하곤 했지만, 새벽에는 돌아갔다. 도겸의 속을 위해 보양식 죽을 끓이기 위해서였다. 수민은 그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겸이 다친 것도 아니고, 휴대폰으로 배달을 시키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정말 사람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해 쓸데없는 습관이었다.수민이 계속해서 부르자 정은은 잠결에 손을 흔들었다. “안 해줘도 돼, 헤어졌어.”“오, 이번에는 며칠 동안 헤어지려고?”수민의 말에 정은은 할 말을 잃었다.“그래, 그럼 더 자. 아침 식사는 탁자 위에 있어. 나는 일하러 간다. 그리고 나 저녁 약속이 있어서 저녁은 준비하지 마.”“됐다. 너 어차피 다시 돌아갈 거지? 그럼 나갈 때 베란다 창문 좀 닫아줘.”정은
“자리 찾기 힘든가? 내가 나가서 도와줄까요? 음?”도겸의 어두운 표정을 눈치챈 선우는 뒤늦게 깨달았다. “어... 형, 누나... 아직 안 돌아왔어요?” 이미 3시간이 넘었고 도겸은 두 손을 펼치며 어깨를 으쓱했다. “뭘 돌아와? 이별이 장난이야?” 그 말을 마치고 도겸은 선우를 지나 소파에 앉았고, 선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진짜 헤어진 거야?’하지만 곧 선우는 머리를 흔들며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도겸이라면 이별을 말한 뒤 다시는 붙잡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지만, 정은은 그렇지 않았다. 세상 모든 여자가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어도, 정은은 그렇지 않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도겸아, 왜 혼자야?” 고동건이 재미있는 듯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 “네가 내기한 3시간은 이미 지났고, 하루가 다 갔어.”그러자 도겸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내기에서 졌으니 벌칙을 받아야지. 벌칙은 뭐야?”진심으로 하는 말에 동건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오늘은 다른 거 해보자. 술 마시는 거 말고.”“뭔데?”“정은이한테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과를 하는 거지.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사랑해.’ 라고.”동건의 말에 주변 사람들은 곧바로 웃음을 터뜨렸고 선우는 도겸의 전화로 정은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차단된 건가?’ 도겸은 잠시 멍해졌다. 사람들은 웃음을 멈추고 서로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선우는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돌려주며 말했다. “그... 아마도 진짜 전화를 받을 수 없는 걸 거예요. 정은 누나가 형을 차단할 리가 없잖아요.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선우는 말하며 자신도 민망해졌고 동건은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어쩌면 정은이 이번에는 진짜일지도 몰라.”그러자 도겸은 코웃음을 쳤다. “이별이 진짜지 그럼 가짜야? 이별이 무슨 애들 장난이야? 이런 내기 다시는 하지 말자. 앞으로 누가 소정은에 대한 말을 꺼내면, 친구로 지낼 수 없을
어젯밤엔 술을 꽤 많이 마셨다. 새벽이 되자 선우가 또 한잔하자고 했고, 강도겸은 운전기사가 이끌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이미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침대에 쓰러져 바로 잠에 빠질 것 같았지만, 억지로 정신을 차려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하며 그는 문득 중얼거렸다.‘이젠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구나.’몽롱한 상태에서 도겸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눈을 뜨자, 위에서 끊어질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으으...” 도겸은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쥐며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났다.“속 쓰려! 소정은!”그 이름이 입에서 나오는 순간, 도겸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 생각해 보니 정은은 참 대단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끈질기게 버텼던 그녀였다.‘좋아.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보자. 근데… 약은 어디에 뒀지?’도겸은 거실로 나가 약을 찾기 시작했다. 모든 서랍을 뒤져보았지만, 약상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그는 왕순자에게 전화를 걸었다.[위장약을 찾으시는 건가요? 약상자에 넣어둔 걸로 알고 있어요.]도겸은 이마에 핏줄이 뛰는 것을 느끼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약상자가 어디에 있죠?”[옷장 서랍 안에 있어요. 정은 아가씨가 도련님이 술을 마신 후 아침이면 위가 아플 걸 알고 쉽게 찾을 수 있게 두었다고 하더라고요. 여보세요? 도련님? 아직 듣고 계시죠? 전화 끊으신 건 아니죠?]도겸은 옷장으로 가 서랍을 열었다. 거기에는 자주 먹던 위장약이 다섯 통이나 들어 있었다. 약을 삼키고 나니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서랍을 닫으려는 순간, 도겸은 갑자기 멈춰 섰다. 서랍 속에 보석과 명품 가방은 여전히 있었지만, 정은의 모든 신분증, 여권, 학위증, 졸업증 등은 온데간데없었다. 게다가 구석에 쌓여 있던 캐리어 중 하나도 사라져 있었다. 그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좋아, 좋네, 좋아...”도겸은 같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역시 너무 자유롭게 둬도 안 돼. 자유를 줄수록 더 고집을 부리니까.’
“형, 무슨 일이에요?”선우는 술을 홀짝이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도겸을 보곤 슬그머니 동건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도겸의 어두운 얼굴에 분위기는 한층 무거워졌다. 원래 활기찼던 이곳의 공기도 잠잠해졌다.“누구한테 차단당해서 그런 거겠지.”동건은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말을 던졌다. 도겸의 얼굴은 그 말에 더욱 어두워졌다.쾅! 도겸은 술잔을 유리 테이블에 세게 내려놓으며 짜증스럽게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그의 눈에 폭력적인 기운이 어른거렸다.“다시는 걔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잖아. 말을 못 알아들어?”동건은 어깨를 으쓱하며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험악해진 분위기에 노래하던 사람도 입을 다물었고, 주변 사람들도 어색한 침묵에 휩싸였다.선우는 목구멍에 걸린 술을 삼키며, 정은 누나가 정말로 결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빈은 술에 약간 취해 정신을 차리며 선우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은이 돌아왔어?”선우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할 용기가 없어 두루뭉술하게 말했다.“모르겠어요.”현빈은 선우의 말을 듣고 정은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짐작했다.바텐더가 다섯 병의 술을 가져오자, 누군가가 용감하게 제안했다.“진실 게임 할래요?”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분위기를 띄우려 노력했다.“좋아, 나 그거 제일 좋아해.”이때 한 여자가 막 들어왔다. “안나 이쪽으로 와, 마침 형 옆에 자리가 비었어.”안나는 자연스럽게 도겸 옆에 앉았다. 그녀는 이 클럽의 에이스였고, 도겸과도 익숙한 사이였다.“강 대표님.”도겸은 갑자기 흥미를 잃은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너희끼리 놀아, 난 먼저 간다.”남겨진 사람들은 당황했고, 오늘 밤의 분위기를 깨뜨린 듯한 안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술집을 나온 도겸에게 운전기사가 어디로 갈지 물었다. 브랜디 두 잔을 마신 후, 도겸은 어지러움을 느꼈고 텅 빈 집을 떠올렸다.“회사로 가죠.”“강 대표님?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오셨
“당시의 충동적이고 불합리했던 행동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해야 해. 그건 내가 교수님에게 빚진 거야.”수민은 술잔을 들고 있던 손이 떨렸다. 정은의 말이 목에 걸려 숨이 막힐 듯 두 번이나 기침을 했다. 도망치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제발 나 좀 살려줘, 정은아.”정은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너도 알잖아. 나 대학 때 유일하게 재수강한 과목이 오미선 교수님의 수업이었어. 교수님 앞에서는 난 늘 작아지기만 했고, 그분이 무서워서 도망치고만 싶었어.”수민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게다가, 나는 교수님 눈에도 띄지 않는 투명인간 같은 존재였어. 교수님은 나를 기억도 못 하실 거야. 미안하지만, 너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거 같지 않아.”정은은 수민의 마음을 이해한 듯,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수민의 눈에 빛이 반짝였다.“하지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아주 적절한 사람이 있어.”정은은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응? 누구?”“너 내 사촌 오빠인 조재석, 기억나지?”정은은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기억하지.”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셨다.“물론 기억하지. 국내 최연소 물리학과 교수, 그리고 ‘네이쳐’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젊은 과학자 10인 중 1위였잖아. 오미선 교수님 밑에서 생명과학을 공부하며 수많은 논문을 발표하고 생물학계에서 천재로 주목받았던 사람이지. 그런 사람이 전과해 물리학을 공부하게 된 것도 큰 화제였고. 결국, 사람은 무엇을 하든 성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무엇이든 잘할 수 있는 법이야.”현재 재석은 국제 물리학계에서 권위자가 되었다. 정은은 재석과 같은 학교 출신이지만, 다른 시기에 입학한 후배였다. 입학하자마자 재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나중에 수민을 통해 재석이 수민의 사촌 오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재석은 몇 년 동안 해외 물리학 연구소에서 일하다가 3개월 전에 귀국했다.수민은 자랑스럽다는 듯
가까이 다가가니, 도겸은 정은의 예쁜 웨이브 머리가 곧게 펴지고, 그토록 좋아했던 그녀의 머리색이 검은색으로 염색된 것을 발견했다. 화장도 하지 않았고, 하이힐 대신 단순한 하얀 티셔츠 하나만 걸친 채 아주 캐주얼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눈은 예전보다 더 빛나 보였다. 이별의 어두운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만약 이게 연기라면, 도겸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은이 연기를 정말 잘한다고. 너무 잘해서, 자신을 화나게 한다고. 정은은 도겸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표정은 도겸이 화를 내기 직전의 전조였다.“히하!” 도겸은 비웃으며 말했다.“그런데, 네 안목은 별로인 것 같아. 내 옆에 그렇게 오래 있었는데, 보는 눈이 좀 더 높아야 하지 않겠어? 아무나 데리고 다니면, 내 체면이 말이 아니잖아?”“체면?” 정은은 슬픔이 살짝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지만, 도겸은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정은이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더욱 화가 났다. 이 감정이 점점 그의 영역 의식으로 다가왔다. 정은은 이미 그의 영역 안에 속한 사람이었고, 지금은 필요 없다 해도, 다른 사람의 침범은 용납할 수 없었다.“난 할 일이 있어서 가야 해.” 정은은 도겸이 계속 말하는 것을 듣고 싶지 않았다.“가? 어디로 갈 건데? 조수민의 아파트? 그게 네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야. 이번에는 각종 증서들이랑 신분증도 챙겨갔던데. 좋아, 한번 해보자는 거지?”정은은 마음이 아팠다. 도겸의 성격이 나쁘다는 것, 심지어 폭력적이라는 것을 이미 익숙하게 받아들였지만, 이런 말을 직접 들으면 여전히 상처받을 수밖에 없었다. 도겸은 그녀의 행동을 단순한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정은은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추스르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먼저, 저분은 내가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만난 것뿐이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더러운 관계가 아니야.”“그리고, 우리는 이미 헤어졌어.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네 문제야.”이때, 정은이 불러
정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실험실 시정은 사실이고 진도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그래서 따질 필요가 없었다.그녀가 다시 앉자, 마침 강서정이 바로 옆에 앉아 있었다.서정은 참지 못하고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소정은, 너도 이렇게 당하는 날이 있다니.”“인생에는 항상 기복이 있는 법이지. 사람이라면 다 운이 나쁠 때가 있는 거 아니겠어? 그러나 너희들도 조심해, 앞으로 무슨 일이 들이닥칠지 모르니까.”“뻔뻔하긴!”정은은 앞을 쳐다보며 얼굴에 노기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서정은 정은의 담담한 모습을 보며 엄청 화가 났다.“넌 송 교수님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젊었을 때의 오 교수님이라면 모를까. 하지만 그 교수님은 이미 늙으셔서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 넌 그런 교수님의 학생이 되었으니, 세력도 없고 그저 괴롭힘을 당할 수밖에 없겠지.”“당초에 내가 너와 그렇게 싸우며 오미선 교수님의 학생이 되고 싶었는데, 결국 네가 이겼고, 내가 졌잖아. 그러나 지금 일이 또 이렇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어? 그래서 한 번 이겼다고 해서 평생 이긴 것은 아니야. 졌다고 해서 앞으로 줄곧 지는 것도 아니고. 너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겠지?” 서정은 득의양양하게 말했다.‘대학원 시험에서 일등을 하면 또 뭐가 어때서? 면접 시험을 잘 봤다고 또 뭐가 달라지는데? 스스로 돈을 내서 CPTR을 샀지만, 결국 실험실을 사용할 수 없는 지경으로 전락했잖아?’“소정은, 넌 우리 오빠와 헤어진 후에 어째서 상황이 점점 더 나빠졌니? 대학원에 붙으면 아주 잘난 거라 생각했던 거야? 우리 오빠가 널 안중에 둘 줄 알았어? 우리 엄마가 너라는 며느리를 놓친 것을 후회하게 할 수 있을 줄 알았냐고? 꿈이나 깨!”정은은 웃으며 눈가에 웃음기가 가득했고, 엄청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네 말의 뜻인 즉... 내가 대학원 시험에서 확실히 성공을 거둔 거잖아. 네 오빠는 확실히 내 성적에 놀랐고, 네 어머니도 나란 며느리를 놓친 것을 후회하고 계시지, 맞지?”“너..
12월 말, J시는 겨울에 들어선 후 두 번째 눈을 맞이했다.이번 눈은 첫눈보다 더 많이 내렸고, 이틀 연속 내렸기에 J시 전체가 하얀 눈으로 뒤덮였다.이른 아침, 정은은 미안함을 안고 재석의 집 문을 두드렸다.“선배님...” 정은은 작은 소리로 말했다.재석은 잠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여전히 헝클어져 있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가슴이 조여졌다.“무슨 일이야?!”“그런 거 아니에요!” 시간이 확실히 이르고 너무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에 정은은 더욱 미안해지더니 또 좀 부끄러워했다.“나 때문에 깬 거죠?”“아니야, 원래 일어날 시간이거든. 무슨 볼일이라도 있어?”“지난번에 그 눈놀이 도구 말인데요... 아직 있어요?”재석은 멍해졌다.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눈은 확실히 그쳤다.“이렇게 일찍 내려가서 눈놀이를 할 거야?” 재석은 생각을 한 다음 입을 열었다.정은은 두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네! 일찍 내려가야 밟힌 흔적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깨끗하잖아요.”재석은 웃음을 금치 못했다.“꼭 어린아이 같아.”“눈놀이에 어른과 아이가 있나요? 놀고 싶으면 노는 거죠.”“잠깐만 기다려.”말이 끝나자 재석은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통 하나를 들고 나왔다.안에는 전에 둔 오리, 공룡, 곰돌이 그리고 삽 등이 있었다.“고마워요 선배님! 나 지금 바로 내려갈게요!” 정은은 통을 받고 몸을 돌려 재빨리 아래층으로 뛰어내려갔다.10분 뒤, 단정하게 차려입은 재석이 아래층에 나타났다.정은은 한 무리의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었다. 하얀 패딩, 크고 빨간 모자, 주위의 눈과 하얗게 어우러지는 동시에 오직 그 빨간색만 선명하고 눈부셨다.“선배님! 이리 와요.”정은이 재석을 향해 웃었다.재석은 손을 흔들었다.“너희들끼리 놀아.”정은은 가볍게 흥얼거리며 몸을 돌려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무엇을 파헤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벌떡 일어서서 무언가를 세게 던졌다.손바닥만 한 눈덩이가 재석을 향해 날
인훈은 말을 하지 못했다.정은이 입을 열었다.“심 대표님, 이제 손 놓아도 돼요.”현빈은 웃으며 마치 그제야 알아차린 듯, 놓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어깨를 꽉 껴안았다.섬세하고 얇은 어깨는 패딩을 사이에 두고도 여전히 뼈를 만질 수 있었다.여자의 몸에서 나는 은은하고 그윽한 향기도 현빈의 콧구멍으로 파고들었다.현빈은 온몸이 오그라들었다.그러나 다음 순간, 정은은 몸을 돌려 현빈에게서 유연하게 벗어났다.현빈은 반응이 빨랐는데, 정은이 도망가는 것을 보고 긴 팔을 뻗어 다시 그녀를 잡아당겼다.한 사람은 달리고 다른 한 사람은 따라갔다.하나는 도망가고 다른 하나는 쫓아갔다.정은은 화가 났다.“심현빈 씨! 작작 좀 하면 안 돼요?!”남자는 눈가에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좋아, 드디어 날 심 대표님이라고 부르지 않네.”...두 사람이 밀당을 하는 사이, 재석은 멀지 않은 가로등 아래에 서 있었고, 손에 종이주머니를 들고 있었다.불빛 때문인지, 그의 반쪽 얼굴이 그늘 속에 숨어 있어서 지금 표정을 분명하게 볼 수 없었다.“선배님?” 정은은 바로 재석을 발견했다.가만히 서 있던 남자가 걸음을 들어 다가오더니 정은의 목에 있는 남자 목도리에 시선이 떨어졌다.인훈은 자신의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것이 아니었다.현빈은 코트에 양복을 입고 있었지만, 목도리를 하지 않았다.“조 교수님!” 인훈은 웃으며 인사를 했다.“여기서 만났다니, 정말 공교롭네요!”“공교롭긴요. 일부러 찾아온 거예요.”“네?”재석은 주머니에 든 목도리를 꺼내 앞으로 다가갔고, 정은의 목에 있는 남자 목도리를 벗긴 다음 현빈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정은 자신의 목도리를 둘러주었다.“방금 이웃 대학교 문 앞에서 네 두 친구를 만났는데, 너에게 목도리를 돌려주려고 했던 거야. 나도 마침 오는 길이라 대신 너한테 주겠다고 했어. 두 사람 야식을 먹으러 가는 길이었거든.”“고마워요, 선배님! 또 귀찮게 했네요.”정은은 목도리 안으로 움츠러
가로등 아래에서, 정은 그들은 걸으면서 계속 말을 했다.찬바람이 쌩쌩 불자, 내쉬는 숨결은 순식간에 안개가 되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정은아, 밀크티 마실래? 오빠가 쏠게.”인훈은 흰 이빨을 드러냈다.정은이 말을 하려고 할 때, 갑자기 한 남자가 그녀 앞에 와서 멈추었다.세 사람의 의혹을 맞이하며 그 사람은 마술사처럼 뒤에서 장미꽃 한 다발을 꺼내 정은에 건네주었다.“안, 안녕! 난 이 학교 대학원 3학년의 학생이야. 그, 그동안 널 주목해 왔어... 이 꽃은 너에게 줄게. 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그, 그리고, 우리 서로 연락처를 교환할 수 있을까? 널 처음 봤을 때 난 너에게 첫눈에 반했거든. 매우 갑작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 나 자신도 불가사의하다고 생각하지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도무지 막을 수가 없었어. 나에게 기회를 줬으면 좋겠어...”이 늦은 시간에, 그것도 학교 밖에서 이런 일에 부딪쳤다니.정은은 가게에서 나올 때, 오늘 마침내 ‘우연히’ 도겸과 경혜를 만나지 못한 것을 다행으로 여겼지만, 뜻밖에도 남의 고백을 받았다니.인훈은 반응하여 가장 먼저 현빈의 표정을 살폈다.‘이야, 완전 열받은 표정이네. 어쩔 수 없지, 우리 정은이가 이렇게 인기가 많은 것도 당연하잖아? 밥을 먹으러 나오다가 고백까지 받다니. 헤헤...’정은은 앞에 있는 꽃을 보며 한순간 침묵했다.“꽃은 정말 예뻐요...”남자는 바로 웃으며 눈에서 빛이 났다.“그럼 받...”“하지만 난 받을 수 없어요, 미안해요.”“왜, 왜?”“우선, 나는 그쪽을 모르고, 우리도 친한 사이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아무 이유없이 나에게 꽃을 주다니, 난 그 꽃을 받을 자격이 없어요.”“자격 같은 거 필요 없어.”남자는 다급히 설명하려 했다.“이거 그냥 너에게 주는 거야.”“그럼 더 받으면 안 되죠. 장미는 사랑을 대표하고, 오늘 내가 이 꽃을 받으면 그게 무슨 뜻인지 누구나 다 알잖아요. 미안해요.”“이게 아니라, 내가 너에게 꽃을 선물한 것
“다 심 대표님의 그 두 공사팀 덕분이야...”원래 그들은 기초 토목 건설을 책임졌지만, 인훈은 곧 자신이 상대방의 실력을 얕잡아 봤다는 것을 발견했다.기초 토목 건설을 제외하고, 이 사람들은 인테리어, 자재 감식까지 훌륭했다.그래서 토지 건설이 완료된 후, 인훈은 당분간 공사팀을 돌려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이어서 공사팀으로 하여금 내부 인테리어와 스마트 배치 제어까지 완성하게 했다.“심 대표님, 무슨 문제 없죠?”정은은 이 말을 듣고 인훈과 함께 현빈을 바라보았다.현빈은 정은의 눈빛을 마주하며 살짝 웃었다.“당연히 없죠.”정은이 입을 열기만 하면, 현빈은 더 많은 사람을 불러올 수 있었다.“고마워요, 심 대표님!”“현빈 오빠라 불러.”‘또 시작이네.’인훈이 말했다.“헤헤... 현빈 형 고마워요.”현빈은 깜짝 놀랐다.다 먹자, 인훈은 계산하려고 했다.현빈은 이미 먼저 일어나 계산대로 걸어갔다.“사장님, 계산이요.”“심 대표님, 식사 끝나셨어요? 오늘 꽃등심 맛은 어때요?”현빈은 고개를 돌려 정은을 보았다.“맛 어때?”사장님은 빙그레 웃으며 정은을 바라보았다.정은은 사실대로 말했다.“맛있어요.”“그럼 됐어요! 최근 이 요리가 얼마나 잘 팔리는지, 저희 예전의 간판 메뉴보다 더 잘 팔리고 있어요. 장사도 많이 좋아졌고요. 말하자면 심 대표님의 소중한 제안 덕분이기도 하죠.”현빈은 돈을 지불하고 핸드폰을 거뒀다.“정은이 덕분이죠.”사장님은 더욱 환하게 웃으며, 애매한 눈빛으로 정은과 현빈을 바라보았다.“그럼요! 다 고맙죠!”문을 나서자, 찬바람은 옷 안으로 파고들어갔다.정은은 재빨리 패딩 지퍼를 당겼지만 여전히 참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다음 순간, 현빈은 자신의 목도리를 벗어 그녀의 목에 둘렀다.정은은 멈칫하더니 얼른 벗으려 했다.“아니에요, 지퍼를 높게 당기면 바람을 막을 수 있어요...”그러나 현빈은 듣지 않았다.“그냥 두르고 있어.”...이웃 대학교 문 앞에서, 민지와 서준은 실험실에서 떠
정은은 오미선을 위로한 다음 또 직접 그녀의 몸을 닦아주었다. 마지막에는 링거를 다 맞아야 퇴원할 수 있다고 신신당부했다.떠나기 전에 정은은 또 박애영을 한쪽으로 불렀다.“전 이미 교수님과 얘기를 마쳤으니, 내일 요양원에서 차를 보낼 거예요. 밖에 있는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박애영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그래도 정은이 너밖에 없구나! 나도 말렸지만 효과가 없었어. 네가 나서니 바로 해결됐잖아. 안심해, 교수님을 잘 돌볼 테니까!”“그럼 수고 많으세요.”“수고는 무슨...”정은이 간 후, 박애영은 문을 밀고 병실로 들어갔다.오미선은 그녀의 뒤를 쳐다보았다.“정은이 갔어?”“네, 갔어요. 가기 전에 특별히 저에게 교수님 잘 챙겨드리라고 했어요. 정은이도 정말 정성을 다했어요.”오미선은 고개를 끄덕였다.“정은이는 참 좋은 아이지. 다 내가 쓸모없어서 그래. 늙어서 아이들을 위해 자원을 쟁취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송지혜의 괴롭힘을 받게 하다니.”“절대로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정은은 교수님을 탓한 적이 없어요. 하물며 정은이도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없는 아이가 아니잖아요. 해결할 방법이 있다고 한 이상, 틀림없이 계획이 있을 거예요.”“정은이는 해결할 방법이 있지만, 나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순 없지...”박애영은 흠칫 놀랐다.“핸드폰 줘. 전화 한 통 좀 할게.”...시간은 쏜살같이 지나며 어느덧 또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날 시간이 되었다.세 사람은 여전히 학교 밖의 그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현빈은 제일 먼저 도착했는데, 미리 음식을 시켰다.인훈과 정은은 하나는 공사장에서 왔고, 다른 하나는 실험실에서 왔으며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오빠!”“어, 정은아, 넌 왜 목도리도 안 하고 나왔어? 안 추워?”“목도리를 실험실에 두고 왔어. 괜찮아. 지퍼를 당기면 얼굴을 다 가릴 수 있거든.”식당에 들어간 두 사람은 단번에 현빈을 보았다.양복 차림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다른 사람들보다 꼿꼿했고, 어깨가 넓어서
“그래서 어제 아침에 도대체 누구의 전화를 받으셨어요? 화가 나서 병원에 입원하셨다니.”“흥!”정은도 서두르지 않았다.“제가 한 번 맞춰볼게요... 학장님은 아닐 텐데. 줄곧 이런 사소한 일들을 상관하지 않으셨잖아요. 그럼 백 부총장님? 그런데 최근 스폰서의 고소로 방금 처벌을 받았다고 들었어요. 오랫동안 꼬리를 숨기셔야 할 텐데...”여기까지 말하자 정은은 잠시 멈추더니 눈알을 굴렸다.“이 두 사람을 모두 배제한다면, 생명과학대학에서 교수님을 이렇게 도발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송지혜 교수님일 뿐이겠죠?”이 이름을 듣자마자 오미선은 눈을 부릅떴다.“그 사람 언급하지 마!”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이런 심심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도 그 교수님밖에 없는 것 같네요.”“심심해? 만약 송지혜가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속고 있겠지! 나한테 어떻게 실험실이 소방대 시정 요구를 받았다는 이렇게 큰 일을 속일 수가 있니?!”“속이지 않으면요? 교수님께서 먼 M국에서 날아와 학원 측, 심지어 학교 측을 찾아가서 따지는 것을 지켜보라고요? 그러다 결국 저희의 실험실이 확실히 소방 규정에 맞지 않아 시정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발견하실 거예요. 이 시정이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빠르면 2, 3개월, 느리면 1년 정도 걸릴 거고요.”“이쪽도 똑같이 처벌하고, 저쪽은 교수님이 이유 없이 세미나를 결석하고, 자의로 팀을 떠난 일로 학교 측의 문책을 받으시라는 거예요?”“이번 일로 누가 가장 이득을 보겠어요? 당연히 송지혜 교수님 아니겠어요?”오미선은 화가 나서 되려 웃음이 나왔다.“그럼 나란 교수님은 조금도 쓸모가 없겠구나?”정은은 경탄하며 천천히 말했다.“그거 알고 계세요? 이번 소방검사는 시에서 조직한 것이었어요. 만약 일반적인 교내 검사일 뿐이라면, 저도 두말없이 교수님에게 전화를 걸어 직접 사람을 찾아 평정하게 하라고 했을 거예요.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지 않아요. 시 소방대가 주도하고 학교 측은 협조만 하면 됐거든요.”오
“왜? 왜 날 이렇게 보는 건데?”“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선배님이 참 좋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서요.”‘진짜 엄청 좋은 사람이야.’“가자, 이렇게 서 있으면 안 추워?” 재석이 웃었다.정은은 손을 비비며 대답했다.“좀 춥네요.”...또 토요일이 찾아왔다.정은은 일찍 일어나 샌드위치를 만든 다음, 또 두유를 마셨다.재석이 외출할 시간에 맞춰, 정은은 샌드위치와 두유를 봉지에 담아서 그에게 건네주었다.“아침밥이야?”“네!”“마침 안 먹었는데. 고마워.”재석은 실험실에 가려고 했고, 정은도 가려고 했지만 먼저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싶었다.바닥을 다 닦기도 전에 핸드폰이 울렸다.“여보세요?”[정은아! 나 애영 아주머니야! 얼른 병원에 와서 오 교수님 좀 보러 와...]병실에서.정은은 황급히 문을 밀고 들어왔다.“교수님?!”오미선은 병상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었고, 박애영은 옆에서 초조하게 머리채를 붙잡고 있었다.정은을 보고서야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정은아, 왜 이제야 왔어!”“아주머니, 이게 무슨 일이에요? 교수님이랑 같이 요양하러 갔잖아요?”매년 서비대학교는 외지에 나가 요양하는 정원이 있었는데, 교직원 복지라고 할 수 있었다.대선배인 오미선은 이미 명단에 있었지만, 예년처럼 그녀는 스스로 포기했다.올해도 정은이 말렸던 것이다. 학교에 아무 일도 없고, 자신이 민지와 서준을 데리고 있으니 문제가 생기지 않을 거라고. 게다가 시일내에 아무런 중요한 세미나도 없었기에 오미선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 동의했다.“그래, 어제 출발했어야 했는데, 아침에 교수님이 전화를 받으신 거야. 누가 전화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어차피 전화를 받고 나서 교수님이 쓰러지셨는데, 난 재빨리 병원으로 데려다준 거야.”“의사 선생님은 뭐래요?”“너무 흥분해서 그런 거래. 이틀 동안 입원해서 관찰을 받아야 하는데, 오늘 아침, 교수님이 퇴원하시겠다고 난리를 부리신 거야. 난 교수님에게 남은 두 링거를 다 맞고
기사는 차를 몰고 온 다음, 길가에 천천히 멈추었다.“사모님.”강서원은 차에 올라탄 다음, 실망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집으로 가요.”차가 떠나는 순간, 재석과 정은은 쇼핑백을 들고 길을 건너고 있었다.그들은 마침 어깨를 스쳤다.재석이 말했다.“그냥 다 줘.”말하면서 그는 정은에게서 쇼핑백을 받았다.정은도 거절하지 않았다.왜냐하면,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확실히 좀 무거웠다.두 사람이 골목 어귀로 걸어가자, 재석이 갑자기 물었다.“요즘 이웃 대학에서 잘 적응하고 있는 거야?”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실험실은 설비가 완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아주 넓어요. 마 교수님도 엄청 친절하시고, 그 선배님들도 아주 다정해요. 소모품을 수령할 때, 꼭 우리를 도와 기록해 줬거든요.”그러나 이 소모품들도 다 정은이 견적서에 따라 돈을 지불했던 것이다.원래 실험실을 무료로 빌려 쓰는 것 자체가 쑥스러웠으니, 또 어떻게 공짜로 남의 소모품을 쓰겠는가?재석은 멈칫하더니 계속 물었다.“무슨 문제 없어?”정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최근 실험이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한동안 밀렸던 진도도 점점 따라잡고 있었다. 전공 과목에서도 정은은 크게 어려움 없이 따라가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지난번 수행평가에서 ‘A+’를 받지 못하고 ‘A’에 그친 것이 아쉬웠지만, 그것은 시험 문제에 오류가 있어 반 전체가 만점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머릿속에서 최근의 큰일을 모두 한 번 생각한 다음, 정은은 고개를 저으며 없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이때, 그녀는 갑자기 무엇을 떠올렸다.“지금 망설이고 있잖아. 학교 식당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정은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그걸 어떻게 알았어요?!”“오늘 오전에 참석한 회의에서 마 교수님을 만났거든.”정은은 마음이 다급해지더니 이어서 미안함을 드러냈다.“미안해요, 뜻밖에도 마 교수님께서 그 소란을 듣게 되실 줄이야. 선배님에게 다 말한 거예요?”말을 마치자, 정은은 고개를 푹 숙였다.부끄럽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