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의 익숙한 모든 것이 아이러니로 가득했다.‘왜? 내가 왜 그때 그런 말을 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마치 내가 뭔가에 홀린 것 같아! 내 마음대로 지껄이며 정은이 당시의 고통과 절망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어.’이 1년 동안 정은은 이미 학교에 들어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지만, 도겸은 여전히 이 룸에 갇혔다.나갈 수도 없고, 나갈 생각도 없었다.도겸은 술잔을 세게 쥐더니,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헤어지자고 했을 때는 그렇게 단호했지만, 지금은 후회해 죽을 지경이었다.선우는 이 상황을 보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말릴 수도 없는 이상, 아이고, 모르겠다...’“자, 형, 같이 마셔요.”얼마 지나지 않아, 도겸은 잔뜩 취했다.선우는 차로 그를 별장에 데려다주었다.도중에 도겸은 두 눈을 꼭 감고 계속 소리쳤다.“정, 정은아... 날 버리지 마라...”선우는 마음이 아팠다.‘나도 두 사람이 사귀는 것을 줄곧 지켜본 셈이지. 그렇게 행복한 두 사람이 어째서 오늘 이 지경으로 되었을까?’선우는 도겸을 침실에 눕힌 다음, 이대로 떠나는 게 마음이 좀 걸렸다.생각하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했다.“네, 이모님, 본가로 가신 거예요? 지금 도겸이 형 별장에 한 번 오시면 안 돼요?”왕순자는 말문이 막혔다.‘지금 금방 잠들었는데!’30분 후, 왕순자는 졸린 몸을 이끌고 나타났다.선우는 담배를 두 대나 피웠는데, 왕순자를 보자마자 눈빛이 번쩍였다.“아이고 이모님, 드디어 오셨네요!”왕순자는 침대를 힐끗 쳐다보며 어이가 없었다.“왜 또 취하신 거예요?”‘나 좀 조용히 살 게 할 수는 없는 거야?’선우는 어색해서 가볍게 기침했다.“그 뭐지... 오늘 형 기분이 좋지 않아서 좀 많이 마셨으니, 이모님이 잘 좀 돌봐 주세요.”말을 마치자, 선우는 줄행랑을 쳤다.“잠깐만요.”“네?”“방에 쓰레기통이 있잖아요.”선우는 영문을 몰랐다.“알아요, 왜요?”“그럼 다음에 담배꽁초 좀 함부로 버리지 마세요! 제가 다
“정은아... 네가 아직도 화가 나 있다는 거 알아... 그런데 어떻게 자신을 이모님과 비교할 수가 있니? 정은아... 넌 이모님보다 훨씬 좋아... 그러니 그런 말 하지 마...”‘아니... 내가 뭐? 왜 비교할 수 없는 거야? 내가 뭘 어쨌다는 거야?!’“정은아...”“정은, 정은, 그 놈의 정은! 정은은 무슨!”말하면서 왕순자는 손바닥으로 도겸의 머리를 쳤다.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반응하자, 그녀는 깜짝 놀랐지만 잠시 후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이렇게 때리니, 마치 무슨 스위치라도 눌렀는지 도겸은 즉시 손을 놓았다.왕순자는 바로 도망을 갔다.자신의 작은 방으로 돌아가자, 왕순자는 또 분노와 걱정에 침대에서 뒤척이기 시작했다. ‘오늘 밤은 본가로 돌아갈 수가 없을 것 같군. 아이고, 정은 아가씨는 정말 돌아오고 싶지 않으신 건가? 그럼 앞으로 누가 저 미친 도련님을 단속하지? 미치겠네.’가까스로 잠이 들었는데, 한밤중에 왕순자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그녀는 억지로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간 다음, 또 가볍게 안방 방문을 열었다.‘쯧, 어쩔 수 없지 뭐, 내가 가정부잖아...’그러나 다음 순간, 악취가 확 풍겨오더니 왕순자는 하마터면 토를 할 뻔했다.그리고 방 안을 살펴보자, 바닥에 구토물이 가득 있었다.그러나 장본인은 아주 편하게 자고 있었다.‘정말이지, 하나님, 차라리 저를 죽이세요!’...이튿날, 도겸은 아침 일찍 일어났다.그는 깔끔하게 수염을 깎고 양복을 입고 내려왔는데, 어젯밤의 주정뱅이와 전혀 딴판이었다.왕순자는 이미 죽을 다 끓였다.그녀가 부지런한 것이 아니라, 도겸이 매번 술에 취할 때마다 아침에 일어나면 죽을 좀 끓여달라고 시켰기 때문이다.이번에 왕순자는 미리 준비를 했다.죽을 안방으로 가져가려던 참에 도겸이 위층에서 내려왔다.“도련님, 외출하시려고요? 죽 좀 끓였는데, 마시고 가세요.”도겸은 그 죽을 보더니 잠시 넋을 잃었다. 곧이어 그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평온하게 말했다.“배 안 고파요. 그
거리를 두고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은, 정은에게도, 도겸에게도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정은은 서류와 펜을 거두었는데, 남자가 갑자기 중얼거렸다.“하지만 난 널 여전히 친구로 생각할 거야...”정은은 바로 떠났다.도겸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냉정하게 시선을 거두었다.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씁쓸함이 혀끝에서 퍼졌지만, 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엄지손가락으로 컵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시선은 맞은편 정은이 마셨던 커피에 떨어졌다.‘정은이는 줄곧 우유를 탄 커피를 좋아했기 때문에 커피가 그리 쓰지 않을 거야.’도겸은 정은의 커피를 들고 가볍게 한 입 맛보았다.아니나 다를까, 그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그들은 6일, 6개월이 아닌 6년을 함께 지냈다.‘6년을 함께 했는데, 내가 너에 대해 잘 모를 것 같아? 아니, 난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아, 다 안다고! 그렇다면...’도겸은 실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난 절대로 포기할 수 없어. 정은아, 넌 내 여자일 수밖에 없어. 지금은 아니지만, 앞으로는 다시 내 여자로 될 거야!’도겸은 남은 커피를 천천히 마셨다. 전에 그는 아메리카노를 좋아했지만, 정은은 좋아하지 않았다. ‘이 참에 바꾸는 게 좋지 않을까? 사실 하나도 안 어려워. 심현빈을 보면 알잖아. 그 자식이 왜 정은의 배척을 당하지 않았겠어? 자신을 숨길 줄 알고, 엄살 부릴 줄 아니까. 내색하지 않고, 무심한 척하며 정은의 생활에 스며드는 거지. 교활한 자식.’봄날의 비는 가늘고 잔잔해서 존재감이 없어 보이지만 토양을 미친 듯이 적시며 감정을 돋아나게 할 수 있었다.현빈은 내색하지 않고 일부러 물러서는 척을 했기에, 정은은 압력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 자연히 경각성을 늦추며 그가 접근하도록 내버려둘 것이다.‘심현빈도 할 수 있다면, 난 왜 못할까?’어젯밤에 도겸은 확실히 취했다. 하지만 깨어나는 것도 한순간이었다.그 순간, 도겸은 갑자기 납득했다.정은을 다시 되찾으려면 조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몇 번 만났지만, 그렇다고 말을 걸 만큼 친하지 않았다.그러나 경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매우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괜찮아요? 어제... 교문 앞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앉아 있었는데. 감기에 걸리지 않았죠?”도겸은 여전히 침묵하며 말할 의욕이 없었다.경혜도 개의치 않고 혼자 계속 중얼거렸다.“그쪽도 커피 마시러 왔어요? 여기 커피 꽤 괜찮아요. 근처의 다른 커피숍에 비해 확실히 더 맛있거든요. 난 다른 맛을 시도해 보았는데...”“지금 이 가게의 간판인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시고 있는 거죠? 맛은 고소하지만 약간 씁쓸해서 케이크와 같이 먹으면 딱이에요.”도겸은 여자의 부드럽고 듣기 좋은 목소리를 듣고, 눈빛이 갑자기 흥미진진해졌다. 그리고 입가에 서서히 의미심장한 미소가 나타났다.경혜는 남자의 눈빛에 등골이 오싹했지만 여전히 미소를 유지해야 했다.“날, 날 왜 그렇게 보는 거예요? 내 얼굴에 뭐 더러운 거 묻었어요?”말하면서 경혜는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이때 도겸이 입을 열었다.“너 나한테 관심 있지?”그는 많은 여자를 만나봤기에, 경혜의 이런 눈빛이 낯설지 않았다.비록 그녀는 애써 숨기며 별로 개의치 않는 척했지만, 여전히 도겸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경혜는 도겸이 이렇게 직접적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직접 자신의 비밀을 말했던 것이다.그녀는 머리가 새하얘지더니 얼굴이 빨개지는 동시에 목소리도 점점 작아졌다.“그, 그렇게 티가 났나요? 바로 알아차렸다니...”‘바로 인정을 했어!’도겸은 이런 여자를 너무 많이 봐왔다. 예쁘고, 섹시하고, 매력이 넘치는 여자들.그는 갑자기 흥미를 잃었다.도겸은 무심코 컵의 가장자리를 매만지며 얼음처럼 차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그럼 너도 잘 알 거야. 나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경혜는 전혀 놀라지 않고 오히려 고개를 끄덕였다.“난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주 오래 전부터 이 일을 알고 있었어요. 소정은과 난 모두 같은 전공을 선
경혜는 자신이 승낙하면 그들의 사이가 거래 사이로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이건 아예 내가 원하는 게 아니잖아. 하지만 거절하면... 이 남자가 바로 일어나서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떠날 거야.’‘이것은 아마도 내가 이 남자에게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 거야!’“좋아요, 그 제안, 받아들일게요.”경헤는 일부러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어차피 가짜잖아요. 게다가 나도 돈을 좀 벌 수 있고.”‘지금은 가짜겠지만, 미래의 일은 누가 알겠어? 나에게 시간만 준다면...’도겸은 눈을 반쯤 드리우고 있었고, 얼굴에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좋아, 그럼 이따 내가 비서에게 계약서를 보내라고 할 테니까, 넌 그냥 사인하면 돼.”계약서로 똑똑히 써야 분쟁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이것도 도겸이 서연희에게서 얻은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경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그러나 마음은 덜컹 내려앉았다.‘보아하니 정말 나와 얽히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 여자가 자신에게 매달리는 것도 아주 두려워하는 것 같아.’“그럼 이제 번호 추가해도 되는 거예요? 언제든지 연락할 수 있으니까요.”경혜는 대범하게 핸드폰을 꺼냈다.도겸은 가볍게 응답하며 그녀의 번호를 추가했다.경혜는 또 도겸의 톡을 추가했는데, 그의 프로필 사진이 한 폭의 산수화인 것을 발견했다. 파도가 일렁이는 동시에 은은한 물안개가 피어올랐고, 안개 속에서 웅장한 산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마음이 통한 건가요? 당신의 프로필 사진에 물이 있고, 내 프로필 사진에 구름이 있는데.”“물과 구름이 뭐?”경혜는 멈칫했다.“다 풍경이잖아요.”도겸은 그녀를 바로잡았다.“내 프로필 사진은 물이 아니야.”“네?”“물안개야.”경혜는 어색하게 웃었다.“그렇군요... 나 방금 주의하지 않았어요...”도겸의 손끝은 가볍게 프로필 사진을 어루만졌다.“‘정겨운 산과 물이 붓 끝에 머물고, 은빛 물안개가 그림 속에 피어나네.’ 정은의 이름으로 지어진 이행시야.”경혜는 웃음이 안 나왔
“그럼 왜 매일 달리는 거예요?” ‘매일 아침 저녁으로 달리다니, 마라톤에 나가려는 건가?’재석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만약 자세히 분별한다면, 재석은 약간 마음이 찔렸다.정은은 또 물었다.“요즘 실험실은 바쁘지 않은 거예요?”“응, 대부분 전 교수에게 맡겼거든.”지금도 실험실에서 낑낑거리며 열심히 일하는 진욱은 재채기를 멈추지 않았다.“에취! 에취! 조 교수, 정말 나만 괴롭히는 거야 뭐야!”재석은 정은에게 물었다.“아침 먹었어?”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먹었어요, 선배님은요?”“나도, 오늘 다른 일정 있어?”정은은 생각해 보았다.“집에 가서 몇 편의 논문 좀 봐야 하는 것 외에 다른 일 없어요.”“어제 Y시의 친구가 표고버섯 한 상자 부쳤는데, 네가 가져가서 먹어.”표고버섯은 정말 좋은 물건이었다.“왜 나에게 주는 거예요? 선배님은요?”재석은 웃음을 금치 못했다.“난 평소에 집에서 밥을 하지 않잖아. 버섯을 오래 두면 쉽게 상할 거야. 그러니 너에게 주는 게 가장 좋아.”“그래요, 그럼 잘 먹을게요!”두 사람은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다.후에 정은은 재석의 집에 갔는데, 큰 거품박스 하나가 문 뒤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열어보니 안에 각종 버섯이 있었는데, 표고버섯이며 느타리버섯, 송이버섯 등이 있었다.전국의 버섯을 모두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모든 버섯은 종류 별로 한 봉지씩 진공 포장이 되었다.그래서 장거리 운송을 거쳐 또 하루를 놔둬도 보기에 여전히 싱싱했다.정은은 그야말로 보물을 얻은 것 같았다.“선배님, 시중에서 구하기 어려운 버섯인데, 정말 나에게 주는 거예요?”재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말했다.“가져가, 다 가져가.”“네. 그럼 저녁에 버섯전골 해먹어야겠네요!”말하면서 정은은 상자를 안고 만족해하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는데, 재석에게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오후 5시, 재석은 시간을 맞추며 와서 정은을 도와주었다.주방에 들어가 보니, 정은은 이미 각종 버섯을 깨끗이 씻어
그릇은 두 사람이 함께 씻었고, 주방도 두 사람이 함께 치웠다.마지막으로 함께 외출을 하며 쓰레기를 버렸다.정은은 패딩을 입고 쓰레기를 들고 나갔다.재석도 집에 가서 두 포대의 쓰레기를 들고 나왔다.“선배님, 쓰레기를 안 버린 지 얼마나 됐어요?”“이주 정도?”“선배님이 이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다행히도 모두 포장함, 비닐 봉지들이었고 남은 음식찌꺼기나 과일껍질 같은 것은 없었다.“가자.”아래층으로 내려갈 때, 두 사람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이미 쓰레기를 버리고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그렇게 네 사람이 딱 마주쳤다.“조 교수랑 정은이 너도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거야?”“네.” 재석은 고개를 끄덕였다.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정은을 바라보았다.“오늘 또 무슨 맛있는 걸 한 거야? 아래층에서도 아주 향기가 죽여주던데!”“버섯전골이요.”“어머! 조 교수가 어제 받은 그 버섯 맞지?”어제 재석이 택배를 받을 때, 마침 채소를 사서 돌아오는 할머니를 만났는데, 그녀에게 버섯을 보존하는 방법에 대해 물었다.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할머니는 더욱 환하게 웃었다.“두 사람 하나는 식재료를 제공하고, 다른 하나는 음식을 책임지니 이웃이 된 것도 다 운명이지! 이렇게 친해졌으니 차라리 함께 하는 게 더 좋지 않겠어!”옛날 사람들은 시원시원하고 대담했다.정은은 처음에는 반응하지 못하다가, 재석의 기침소리를 듣고서야 갑자기 정신을 차리며 재빨리 손을 흔들었다.“아니에요, 지금 오해를...”할머니는 즉시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끊었다.“설명할 필요 없어, 그럴 필요 없어. 너희들이 좋으면 되지! 가자 영감, 집에 가야지!”“그래...” 할아버지는 웃으며 대답했다.“당신도 참, 늘 허튼소리를 하기 좋아한다니깐. 정은이 얼굴이 다 빨개졌잖아.”“내가 무슨 허튼소리를 했다는 거야? 그 당시에 우리도 하나는 위층, 하나는 아래층에서 살다가 알게 되었잖아? 그때 사회가 이렇게 개방되지 않아서, 우리는 2년
정은은 줄곧 재석이 향수를 쓰는지 안 쓰는지가 궁금했다.그러나 이 문제는 좀 예민해서 잠시 마음속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정은은 어색하게 웃었다.“고마워요, 선배님. 외출할 때 목도리 챙기는 것을 잊어버렸어요...”사실 잊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귀찮았던 것이다.쓰레기를 버리고 바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이 정도면 목도리를 안 둘러도 상관없을 거라 생각했다.재석은 정말 정은의 속마음을 몰랐을까?다만 간파하지 않았을 뿐, 묵묵히 자신의 목도리를 그녀에게 주었다.“방금 임 교수님과 장 교수님이 왜 아이를 가지지 않으셨냐고 물었지? 원하지 않은 게 아니라 임 교수님의 몸이 좋지 않아서 그래.”그 시대의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는 사형을 선고받은 범인과 다름없었다.장 교수의 집안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두 사람이 이혼하도록 강요했다.임 교수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더 이상 매달리고 싶지 않아 스스로 악인이 되려고 이혼을 제기했다.그러나 장 교수는 한사코 동의하지 않았다.“후에 장 교수님이 그 당시의 아내를 되찾기 위해서 집안과 관계를 끊고 임 교수님을 찾아가셨다고 들었어.”“아무튼 20년 동안 집안사람들과 왕래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가족들도 서서히 이 현실을 받아들였고, 다시 연락하기 시작한 거야. 하지만 사이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야.”임 교수는 본래 고아였다. 장 교수도 그녀를 위해 자신을 고아로 만들었다.이때부터 그들의 인생은 서로뿐이었다.정은은 이 말을 듣고 눈시울을 붉혔다.“그 시절은 정말 로맨틱한 것 같아요. 비록 발달하진 않지만, 일생동안 딱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있으니까요.”그녀는 앞을 바라보았다. 재석은 그런 정은을 바라보았다.여자는 풍경을 보고 있었고, 동시에 다른 사람의 풍경으로 되기도 했다.정은은 한숨을 내쉬었다. 숨은 흰 안개로 되어 마치 응결된 이슬과 같았다.그녀는 중얼거렸다.“올해 눈이 올지 모르겠네...”작년은 눈송이만 조금 날렸는데, 땅에 떨어지자마자 바로 물이 되어 전혀 쌓이지 않았다.재작
처음엔 진영매도 스마트폰으로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웠다.‘아이고... 또 오타네... 이걸 또 지우고 다시... 에구구...’속도도 느리고, 자꾸 엉뚱한 단어가 입력돼서 정말 진땀을 뺐다.하지만 어느 날, 자판 옆에 있는 마이크 버튼을 눌러봤고, ‘음성 입력' 기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모든 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어머, 말만 하면 글자가 나오네? 이거 진짜 신기하네...’그 뒤로 점점 익숙해지면서 진영매는 ‘두부 단톡방’을 직접 관리하게 되었고, 주문 확인도 척척 해냈다.그러던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서 택배 보관소를 운영하는 이웃 아주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언니도 공동구매 한번 해보는 거 어때요? 요즘 동네 맘카페나 톡방에서 다 그걸로 부수입을 벌어요.”“공동구매요?”“네, 단톡방에 링크만 올리면 되는데, 그 링크로 누가 주문하면 언니한테 수수료가 떨어져요. 요즘 그런 플랫폼이 많아요.”그 말에 진영매는 ‘일단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작은 물건 몇 개부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무작정 링크만 던져놓는 식으로 하지는 않았다.직접 샀다. 직접 써봤다. 직접 먹어봤다.그리고 진심 담긴 후기를 함께 적어 올렸다.[이건 제가 직접 삶아봤는데, 식감도 쫄깃하고 가격도 괜찮아요. 혹시 필요하신 분만 구매하시고, 안 맞을 것 같으면 굳이 안 사셔도 돼요.]‘괜히 민폐 되기 싫으니까... 무조건 좋다고는 못 하지.’그런데 이렇게 정성껏 올린 글이 톡방 안에서 반응이 꽤 좋았다.처음엔 몇 개, 그러다 열 개, 스무 개... 요즘은 많을 땐 하루에 백 개 넘는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하루 수익만 몇만 원 되는 날이 생기자, 남봉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니... 진짜? 당신 하루 종일 집에 앉아서 그렇게 번 거야?”그는 아침마다 두유를 끓이고, 비지 짜고, 순두부 포장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단지 세 군데씩 배달을 돌곤 했다.‘점심엔 다시 나가 광장에 작은 천막을 치고 두부 요리 판매, 해 질 무렵에야 집에
어느새 정은이 실험실에서 지낸 지 거의 2주가 되었다. 이번 집중 실험은 처음 계획대로라면 이틀 정도 일찍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불꽃 열정 모드로 돌입했다.“정은 언니! 우리 이참에 2차 실험안도 다 밀어붙여요! 타이밍 완벽하잖아요! 이왕 하는 김에 끝까지 가보자고요!”진일은 별로 상관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어차피 난 어제도 오늘도 실험실에서 잘 운명인데... 집에서 자나 여기서 자나... 거기서 거기지 뭐.’서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민지 편. 민지가 하자고 하면, 그냥 했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뭐.정은은 그런 셋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 그렇게, 예정보다 이틀 더 실험실에 갇혀 살며 2차 실험안까지 초안 작업을 마무리했다.민지의 슬로건은 이랬다.“오세요! 같이 말아봐요! 끝없는 연구의 늪!”그리고 마침내 모든 걸 정리한 날.“정은 언니! 헤헤. 저요... 연차 쓸게요! 푹 쉬어야겠어요!”‘뭐야, 이 모든 열정의 뿌리는 결국... 편하게 놀기 위한 전주곡이었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승인.”오후엔 서준이 조용히 다가왔다.“누나...”“혹시 너도 연차 쓰려고?”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둘이 같이...? 이건 무슨 흐름이지?’그렇다면 정은은 결단을 내렸다.“그냥 모두 이틀씩 쉬자. 다들 수고했으니까.”‘일도 일이지만, 쉬는 것도 중요하지. 그래야 오래 가지.’특히, 실험복을 벗지도 않고 앉아 있는 진일을 보며 정은은 단호히 말했다.“진일 선배는 특히 금지! 쉬는 날에 실험실 들어오면, 바로 벌금이에요!”진일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벌금...? 아니, 요즘은 연차 쓰라고 협박하는... 그런 시대인가...?”정은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일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그럼... 집에 좀 다녀올게. 이맘때쯤이면 우리 집은 옥수수 수확 시즌이라... 도와야 하거든, 헤헤.
정은은 순간 멈칫했다.“조 교수님? 그분이 여길 다녀가셨어?”“네, 두 시쯤 오셨던 것 같아요. 한참이나 언니를 기다리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니까 한 시간 넘게 앉아 계시다가 10분 전에 그냥 가셨어요.”‘10분 전...?’정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돌아오기 직전...’“언니, 조 교수님... 요즘 스트레스가 좀 많으신 것 같지 않아요? 혹시 다른 실험실에 새로운 과제라도 시작한 걸까요? 지난번 과제 마무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새로운 시작이라니... 진짜 무서워요, 그 열정...”정은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그런 생각이 들어?”“그게... 오늘 조 교수님 상태가 좀 이상했어요. 뭐랄까... 눈 밑 다크서클이 거의 좀비 수준...? 적어도 이틀은 연달아 밤을 새우신 것 같았어요.” “게다가 표정도 되게 딱딱하고... 그냥 누가 봐도 기분 안 좋아 보이는 그런... 음... 미간 주름으로 모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그랬구나.’정은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뭐, 늘 바쁘시잖아.”정은은 애써 담담하게 넘기려 했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복잡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민지는 입을 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근데 진짜... 이상하게 느껴졌단 말이지...’‘그냥 피곤해 보인 게 아니라, 뭔가... 속이 무너진 느낌?’...한편, 재석은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몰다가 주차장에 도착했다.그리고 차를 멈춰 세우자,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정은이는 오늘 차를 가져갔었네.’‘그럼... 차를 가져갔으면서, 왜 장은혁 차를 타고 왔지?’입술이 아주 얇게 다물어졌다.표정 하나 없이, 그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건 사람은 진욱이었다.[나, 어제 분명히 퇴근 전에 분석 리포트를 너한테 넘겼었잖아? 그런데 지금 보니 없어졌어. 어디 간 거지?] 재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기본적인 실수는 애초에 그
은혁은 뭔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낯설면서도, 묘하게 두근거리는 느낌. ‘이런 게 설렘인가...?’“은혁 씨, 고마워요.”멀리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넨 정은은 조용히 걸어가며 귀걸이를 착용했다. “정... 정은 씨!”그 순간, 정은이 멈춰 서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네? 무슨 일 있어요?”은혁은 당황해서 말이 꼬였다.“저, 그게...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식사 한번...” “아니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시간 되실 때... 제가 꼭 한번 대접하고 싶어서...”정은은 순간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식사요...? 왜요?”“그게...”은혁은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잽싸게 핑계를 떠올렸다.“아! 제 사촌 여동생이요, 예전에 정은 씨가 보내준 시험 대비 정리자료를 되게 잘 봤다고...”“꼭 밥 한번 사드리라고... 신신당부해서요! 감사 인사 겸해서요!”정은은 시선을 실험실 방향으로 돌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죄송해요. 오늘은 당장 들어가서 실험해야 해요... 그리고 요즘은 계속 이 안에서 지내느라, 언제 시간이 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은혁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정은은 살짝 웃으며 말을 끊었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정은은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해 실험실로 들어갔다.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혁. 문 옆에 붙어 있는 간판을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무한 실험실?”차로 돌아온 은혁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무한 실험실... 설립, 소정은, 연구 성과...]‘정은 씨... 서비대 대학원을 나왔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였다고?’논문 게재 수, 영향력 지수, 직접 설립한 실험실, 정부 과제 주도...은혁은 화면을 스크롤 하며, 점점 입꼬리가 올라갔다.‘이 정도면... 그냥 똑똑한 수준이 아니네. 완전 대단하잖아...’그렇게 넋을 놓고 화면을 보고 있던 찰나, 갑작스러운 경적이 들렸다. 빵!까맣
명주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들켰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0.1% 더 양보할게요. 이게 정말 마지막 양보입니다.”정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0.3이요. 저도 그게 최선이에요.”명주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정은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알맞게 비워진 컵.“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정말로 가려는 발걸음이었다.명주는 예상치 못한 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 잠깐만요! 가격이라는 게... 원래 대화하면서 맞춰가는 거잖아요!”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잡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0.3이 괜찮으시다면 바로 계약서 쓰시고,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이 분위기, 진짜다... 장난 아니네, 이 사람...’명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은이 진짜 나갈 기세라는 걸 느끼자,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요. 그렇게 하죠.”정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계약 성사네요.”서류는 빠르게 정리됐다.두 사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비 납품 일정과 설치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조율했다.완벽한 비즈니스 매듭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려던 정은은 명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 씨!”“혹시...사람들한테 ‘심리 꿰뚫는 거 잘한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명주는 씁쓸하게 웃었다.“사실, 장비를 오늘 꼭 팔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은 씨는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태도로 딱 버티시더라고요. 그걸 알아챘을 땐... 이미 계약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어요. 하하...” 정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요.”“거짓말.”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대신,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뭔데요?”정은은 돌아서며 미소를 흘렸다. “먼저 진
‘아니지. 정은 언니 원래 저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잖아... 으앙, 괜히 비교돼!’“무슨 생각 그렇게 골똘히 해?”정은이 웃으며 말했다.“나도 사람이야, 쇳덩이는 아니란 뜻이지. 급하지도 않은 일정인데 밤새우는 게 뭐 그렇게 재밌겠어.” “맞아요! 근데 언니는...”“너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것뿐이야.”민지는 안도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장난스럽게 물었다.“그 ‘조금’이... 얼마나 조금인데요?”“음...”정은은 손목시계를 슬쩍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두 시간.”민지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하... 내가 묻지 말아야 할 걸 물었네.’ 바로 그때, 건너편 검사용 실험실 문이 열리며 서준이 샘플 봉투와 리포트를 들고나왔다.“서, 서준아... 언제 일어났어...?”민지는 거의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서준은 솔직하게 답했다.“6시. 왜?”민지의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갔다.‘나만 8시까지 잤네. 이럴 거면 알람은 왜 맞췄냐고... 으악...!!!’그렇게 오전 내내, 민지는 그 열등감을 원동력 삼아 평소보다 세 배는 빠르게, 집중력도 세 배로 끌어 올렸다.그리고 드디어 점심시간.민지는 실험대에서 털썩 내려와 길게 숨을 내쉬었다.같이 집중 근무에 들어간 팀원이 많으니, 정은은 미리 모두의 하루 세 끼 도시락을 예약해 두었다. 밥 짓고 반찬 할 시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식자재가 가득한 냉장고를 털어 요리할 사람조차 없었으니 말이다.민지는 반찬을 한 입 먹고는 입안에서 퍼지는 고급스러운 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헐, 이거 SAMES 거다... 가격 꽤 나가는데...”남진일은 뭐가 뭔지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와, 밥 진짜 맛있다. 이거 쌀도 좀 다르지 않아? 완전 길고 쫀쫀한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일은 밥을 세 그릇이나 비웠다. 물 한 잔 마시고는 말없이 실험실 쪽으로 다시 들어갔다.그걸 멍하니 보고 있던 민지.‘왜 다들 이렇게 힘들게 살아...? 쉴 땐 좀 쉬라고!!
장마가 시작되자, 날씨는 마치 기분이라도 있는 듯 변덕을 부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햇살 좋던 하늘은 오늘 아침부터 부슬비로 젖어 있었다.재석은 우산을 챙기지 못한 채 귀가했다. 집에 도착했을 땐 옷이 이미 흠뻑 젖어 있었기에, 그대로 샤워실로 향했다.뜨거운 물로 몸을 데운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다가, 휑한 침대를 바라보며 손을 멈췄다.며칠 전, 침구를 몽땅 세탁기에 돌려버리고 새로운 걸 깔지 않은 채로 며칠 밤을 그냥 잤다.그는 말없이 장롱에서 깨끗한 시트를 꺼내어, 이불까지 정돈했다.‘그날 정은이가 그랬지... 아버님이 장조림이랑 김치까지 챙겨주셨다고. 가지러 오라고 했었는데...’그때, 재석은 머리를 말렸고, 내복을 갈아입은 후 맞은편 정은의 집 앞으로 향했다. “정은아, 안에 있어?”“정은아...?”대답은 없었다.재석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9시였다.‘평소 같으면 실험실에서 돌아왔을 시간인데...’그 후로 두 시간. 재석은 몸은 집 안에 있었지만, 신경은 늘 현관 쪽에 쏠려 있었다.작은 인기척만 나도 바로 고개를 들어 도어락을 확인하고, 고양이처럼 조용히 현관문 앞에 섰다.하지만 그 누구도, 정은은 아니었다.새벽 1시. 정은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오늘도 실험실에서 자려나...’재석은 조용히 불을 끄고 침실로 향했다.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는 기분이었다.‘뭐랄까... 괜히 허전하네.’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건 단순한 우연이겠거니,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실험실로 출근했다.그날 저녁. 재석은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조용히 이어폰을 꽂고 야간 러닝을 나섰다.8시부터 10시까지. 아파트 단지 아래 골목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그 사이, 정은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재석은 또다시 시간을 더 보냈다.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기다리는 동안, 몇몇 이웃들과 마주쳤다.“조 교수님, 오늘도 러닝하세요?”“운동을 정말 꾸준히 하시네요. 올해에는
정은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어 재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선배님, 아빠가 장조림을 잔뜩 가져왔어요. 선배님 것도 있는데, 언제 집에 계세요? 가져다드릴게요.]사진도 함께 첨부했다. 반찬 봉투, 가지런히 담긴 장조림, 그리고 열무김치 세 통.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아버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줘... 근데 요즘은 계속 실험실에서 지내야 할 것 같아.]‘휴... 병원 간 건 아니구나.’정은은 마음을 놓고는, 바로 다음 메시지를 보냈다.[공기 샘플 분석 결과 나왔어요.]그리고 곧바로 분석 리포트 파일도 함께 전송했다. 하지만 이번엔 곧장 답장이 오지 않았다.정은은 씻고 오기로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화면에 메시지 알림이 떠 있었다. 10분 전 도착한 메시지.정은은 손에 수건을 쥔 채 그대로 메시지를 열었다.[경찰 측 보고서랑 거의 일치해. 환각이나 각성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어.]‘그래... 그래서 미제 처리된 거구나.’M시 경찰은 결국 사건을 입건하지 않았다. 재석이 수아를 바로 해고하지 않고 며칠을 기다린 건, 바로 이 수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만약 정식 수사가 들어갔다면, 이수아가 마주할 건 단순한 징계가 아니었겠지.’정은은 머리를 닦다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잠깐 말씀드릴 게 있어요.]얼마 지나지 않아 재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정은은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전화를 받았다.“그 약, 기존에 유통되던 제품이 아닌 것 같아요. 성분이 사라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기기에서도 검출이 안 될 정도라면...”“제작한 사람도, 유통한 사람도 단순하지 않을 거예요. 인맥이나 자금력이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요... 선배님, 조심하셔야 해요.”[응. 알겠어.]말이 끝난 후, 찰나의 정적. 전화 속 숨소리만이 고요하게 들렸다.“선배님...”정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요즘... 아예 집에 안 들어가세요?”그는 몇 초간 침묵하더니, 짧게 대답했다.[응...]‘그냥
5월 말, 이미숙은 원작 소설 영화 제작 발표회 참석차 J시에 왔다. 주말 일정이라 남편 소진헌도 함께였고, 겸사겸사 정은에게 나눠 줄 장조림 한가득과 직접 담근 김치 여섯 통도 챙겨왔다.“완전 유기농! 방부제 제로! 아, 조 교수 것도 좀 나눠줘. 혼자 다 먹지 말고.”말을 끝내기 무섭게, 소진헌은 또 바람처럼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바빴고, 떠날 땐 미련도 없었다.이번 일정은 주최 측에서 식사며 숙소까지 전부 제공했는데, 행사 장소가 이춘재 집에서 거리가 좀 있었던 탓에 소진헌 부부는 호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그래도 짬을 내어, 오후 한나절을 이춘재, 봉수진 부부와 보내며 오랜만에 가족끼리 저녁 한 끼는 함께했다.이춘재와 봉수진은 딸이 바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사위는... 뭐, 그냥 딸을 따라다니느라 바쁜 걸로 치부하고 이해해 줬다.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두 노인도 L시로 내려갈 텐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당에 굳이 소진헌 부부를 집에 머물라고 붙잡고 싶지도 않았다. 정은은 아버지의 익숙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밑에 놓인 장조림 봉투를 내려다봤다.‘이걸 내가 다 먹을 순 없지.’정은은 장조림 반 정도를 덜어, 다른 봉투에 담았고, 김치도 세 통 넣었다. ‘재석 선배님 오면 같이 주자.’하지만 밤 11시가 넘은 시각, 그녀가 이미 논문 세 편을 다 읽을 때까지도 맞은편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정은은 혹시나 놓쳤나 싶어 직접 문 앞으로 가서 노크했다.“선배님, 집에 계세요?”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역시... 또 실험실에서 밤샘 중이겠지.’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요즘 정은도 실험실에서 자는 날이 부쩍 늘었고, 남진일은 아예 실험실을 제 집처럼 쓰고 있었다.민지는 심지어 진지하게 조언까지 했다.“진일 선배, 옷장 두 개 더 넣고, 정은 언니가 냄비랑 밥그릇만 좀 들고 오면 그냥 자기 집 완성인 거 알죠?”‘진짜 그렇게 될까 봐 무서울 정도라니까.’며칠 지나지 않아, 진일은 정말로 중고 옷장을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