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마치고, 정은은 학교로 들어갔다.도겸은 제자리에 서서 쓴웃음을 지었다.“나도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너에게 있어 난 그렇게도 형편이 없는 건가...”정은은 먼저 수업하러 갔다.수업이 끝난 후, 그녀는 민지, 서준과 함께 실험실에 갔다.5일 후면 그들은 실험실을 학교에게 돌려줘야 했다.그들은 마감 기한 전에 제1단계의 실험 데이터를 완성하고 싶었다.그러나 세 사람이 실험실에 왔을 때,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청소부 몇 명이 물건을 옮기고 있었다.민지가 말했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누가 이 실험실에 들어오라고 했죠? 이건 저희의 물건인데, 어디로 옮기시려는 거예요?!”그들도 당초에 이 실험실을 장식하느라 엄청난 신경을 썼다.물건도 함께 사고, 청소도 함께 하고. 그들은 이곳을 자신의 집으로 여겼다.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사람들이 들어와서 두말없이 물건을 옮기다니, 누가 가만히 있으려 하겠는가?아무튼 민지는 제대로 화가 났다.“내려놓으세요! 내려놓으라고요!”청소부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영문을 몰랐다.그들도 억울했다.“학교에서 물건을 옮기라는 통지가 내려왔거든요.”정은은 그나마 냉정했다.“누가 통지를 했는지 알려줄 수 있나요?”“송지혜 교수님이요. 이 실험실이 소방 점검을 통과하지 못했다고 하시면서, 후속 시정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옮길 수 있는 물건을 모두 옮기라고 하셨어요.”“또 그 빌어먹을 송 교수님이야!” 민지는 이를 갈았다.“아직 5일이나 남았는데, 잠시도 기다릴 수 없이 기어코 우리를 쫓아내고 싶은 거야!”‘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밉살스러운 사람이 있을 수 있지? 이런 사람이 교수님으로 될 자격이 있는 건가?’청소부는 머리를 긁적였다.“미안해요, 학생들. 우리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요. 그냥 위에서 시킨대로 할 수밖에 없거든요.”정은은 그들을 난처하게 하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곧 점심 시간이 다 되어 가니 얼른 식사부터 하세요. 오후에 다시 이야기하죠.”“그래
“아악!” 진호는 발을 안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그리고 뛰면서 꽥꽥거렸다.정은은 일부러 놀란 표정을 지었다.“정말 미안해. 방금 손이 좀 미끄러워서. 하지만 넌 낯가죽이 두꺼우니 이런 일로 다치진 않을 거야, 안 그래?”민지도 몸을 돌려 책상 하나를 안았다.그렇다, 그녀는 책상 하나를 맨손으로 들었다.뚱뚱해도 나름 장점이 있었는데 바로 힘이 센 것이었다.진호는 멍하니 민지를 바라보았다. “너, 너 뭐 하려는 거야?”“물건 옮기고 있잖아.”말을 마치면서 바로 진호를 향해 던졌다.진호는 아픈 발조차 돌보지 못하고 바로 옆으로 피했다. 다음 순간, 책상은 그가 방금 서 있던 곳에 떨어졌다.빨리 피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지금쯤 이미 기절했을 것이다.“너, 너희들...”‘감히 물건을 던지다니? 어쩜 이렇게 비겁한 거야!’“미안, 좀 지나갈게.”줄곧 입을 열지 않던 서준은 재빨리 그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진호의 다른 한쪽의 발을 세게 밟았다.“아, 미안! 오늘 급하게 나오느라 안경을 깜박했네. 나 방금 무슨 쓰레기를 밟은 거야?”민지는 정색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 쓰레기는 회수할 수 있지만, 네가 밟은 그 물건은 쓰레기만도 못해. 회수해도 더러워서 받을 사람이 없으니까.”“너희들 정말 하나같이 사납군! 오늘 이 물건들 다 옮겨야 해. 그렇지 않으면 청소부 불러서 전부 옮기라고 할 거야!”진호는 말을 마치자 세 사람을 호되게 노려보더니 몸을 돌렸다.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 뒷모습은 당황과 두려움으로 가득했다.민지는 배를 안고 크게 웃었다.“야, 능력 있으면 가지 마! 돌아와, 나 아직 물건을 다 옮기지 못했단 말이야!”웃고 나니 기분은 또 순식간에 가라앉았다.“아직 5일 남은 줄 알았는데, 이제 하루도 안 남았다니.”서준도 안색이 어두웠다.“정말 괘씸해!”정은은 생각을 하더니 구석에 가서 어디론가에 전화를 했다.“선배님, 나 좀 도와주면 안 돼요?”...점심을 먹은 후, 청소부들이 다시 돌아왔다.하지만 이
“낮에는 운동할 시간이 없으니 저녁에 좀 더 뛰어야지.”정은은 제자리에 서서 재석이 올라오길 기다렸고, 두 사람은 함께 올라갔다.“오늘 선배님이 도와준 덕분에 우리도 바로 쫓겨나지 않았어요.”그러나 재석은 오히려 손을 흔들었다.“우리 사이에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어. 5일이면 충분한 거야? 부족하면 내가 다시 학교에게 연락해서 시간을 좀 더 달라고 할게...”“이미 충분해요.”이번 문제는 시 소방국과 관련이 된 데다가 시정지시서까지 발부되었기에 정은 그들도 규정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이런 상황에서 총장이 나서도 수습할 방법이 없었다.조만간 이사를 가야 하는 이상, 굳이 재석을 난처하게 할 필요가 더 있겠는가?‘선배님은 이미 날 여러 번 도왔어.’두 사람이 동행하면 시간은 항상 빨리 지나갔다. 분명히 몇 마디 말도 하지 않았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7층까지 올라갔다.“선배님, 잘 자요. 내일 봐요.” 정은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재석은 웃으며 대답했다.“그래, 내일 보자.”정은이 문을 닫고 나서야 그도 따라서 닫았다.서재에 들어간 재석은 컴퓨터 앞에 앉았고, 화면이 켜지자 진욱의 문자가 ‘분출’되었다.[너 어디 갔어? 왜 얘기하다가 문자를 씹는 건데?][설마 또 조깅하러 건 아니겠지?][아니... 너 오늘 밤 몇 번이나 내려갔잖아? 대체 왜 그래?][조 교수? 귀신에 빙의라도 된 거야?][헐! 정말 달리기를 하러 갔다니. 길가에 무슨 금덩어리라도 있는 줄 알겠다.][오늘 밤 정말 수상해. 밤에 달리기를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있어도, 하룻밤에 몇 번이나 나가서 달리기를 하는 사람은 정말 본 적이 없어.][너 혼자 좀 봐, 7시부터 10시까지 몇 번이나 내려간 거야?!][됐어... 데이터는 그냥 나 혼자 맞출게. 널 기다린 내가 바보지!]다급한 진욱은 마지막에 포기를 하며 묵묵히 일하러 갔다.재석은 방금 여자애가 혼자 복도에 서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노란 등불이 몸에 떨어지자, 유난히 가냘파 보였다.‘
토요일, 이틀 동안 내리던 비가 마침내 그쳤다.쏟아지는 겨울비에 J시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졌다.무더운 여름은 가고, 뼛속으로 파고드는 추위와 싸늘한 바람이 찾아왔다.정은은 두꺼운 패딩과 모자, 목도리로 자신을 꽁꽁 싸맸다.도겸은 이미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이렇게 추운 날, 그는 차를 골목 맞은편의 길가에 세워놓고 스스로 아파트 아래에 가서 기다렸다.지나가는 행인들은 저도 모르게 도겸을 힐끔 바라보았다.그러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오직 문을 바라보며 경건함이 경지에 이르렀다.재석은 실험실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밖에 나오자마자 그는 도겸을 보았다.물론 도겸도 재석을 보았다.눈이 마주치자, 두 남자의 눈빛은 모두 적의를 드러냈다.재석은 도겸에 대해 호감이 없었고, 심지어 현빈조차 도겸보다 낫다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 별장에 가서 책을 옮길 때, 도겸이 정은에게 했던 일을 생각하면...재석의 눈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강 대표님은 아침에 금방 온 거예요, 아니면 어젯밤에 가지 않은 거예요?”도겸은 차갑게 웃었다.“교수님은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자꾸 문제를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 같네요. 금방 왔든, 아니면 밤새 안 갔든, 이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도겸은 웃으며 또박또박 말했다.“정은이가 내 데이트 요청을 받아들였다는 거예요. 오늘 우리 함께 외출할 거예요.”재석은 바로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정은이 최근 실험실의 일을 위해 분주히 돌아다녔던 것을 떠올리니, 양자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재석은 생각을 멈추며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정은이 이번 만남에 동의한 이상, 다 자신의 생각이 있겠죠.”‘데이트'는 바로 ‘만남’으로 되었다.누가 방금 교수님이 말을 잘 못한다고 무시했을까?“남자라면, 가난할 수도 있고 못생길 수도 있지만, 매너가 없어서는 절대로 안 돼요.”도겸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그게 무슨 뜻이죠?”“여성을 존중하고, 그녀들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그때 두 사람은 함께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정은은 자신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도겸은 원래 화가 치밀어 올랐다.재벌 집 도련님인 그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남을 기다리게 한 적은 있어도 남을 기다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소녀가 미안한 표정으로 계속 사과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 화는 뜻밖에도 이렇게 가라앉았다.촤악-철저히 가라앉았다.“그때 넌 너무 바빴지. 그 후에 데이트를 할 때도 거의 내가 먼저 도착한 후에 음식을 주문해서 네가 오기를 기다렸잖아. 가장 오래 기다렸을 때가... 오미선 교수님이 널 데리고 세미나에 참가한 그때인 것 같은데.”“주최 측이 임시로 진행을 고쳤기에 세미나가 두 시간 지연되어 끝났어. 네가 도착했을 때, 레스토랑은 이미 문을 닫았고.”정은은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을 지었지만, 눈빛은 저도 모르게 부드러워졌다.두 사람은 그때 처음으로 말다툼을 벌였다.그리고 도겸이 먼저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했다.“또 한 번은 네가 오미선 교수님과 표본을 채집해야 한다며 바로 출장을 갔잖아, 나한테 미리 알려주지도 않고.”“난 바보처럼 학교로 달려가서 널 기다렸는데, 오전 내내 기다렸지만 널 보지 못했어...”도겸은 계속 말을 했지만 정은은 시종 침묵을 지켰다.“정은아, 그때의 일들 아직 기억하니?”“지나간 일은 벌써 잊은지 오래야.”도겸은 정은의 싸늘한 태도에 상처를 받지 않고 오히려 웃기 시작했다.“괜찮아, 다 기억할 거야.”몸소 겪은 일을 어찌 그리 쉽게 잊을 수 있겠는가?잊은 척하며 인정하려 하지 않을 뿐이었다.30분 후, 차는 교외의 한 영국식 정원에서 멈췄다.도겸은 손을 뻗었다.“내리자, 정은아.”정은은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 차에서 내렸다.남자도 화를 내지 않고 웃으며 눈앞의 정원을 바라보았다.“여기 기억나?”정은은 기억하고 싶지 않았지만 기억력이 너무 좋았다.이 정원은 사실 와인 창고였다.한 모임의 카드 게임에 동건이 도겸에게 졌던 것이다.도겸은 친구들과
도겸이 갑자기 정원에 나타났던 것이다.정은이 기뻐서 달려들기도 전에, 도겸은 직접 명령을 내렸고, 한 무리의 경호원들이 즉시 정원으로 뛰어들었다.그녀가 그동안 정성껏 가꾼 꽃까지 뿌리째 뽑았다.“그러게 누가 심으래! 나한테 꽃을 살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대체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전화도 받지 않고, 문자에 답장도 하지 않고! 다 이 화초 때문인 거지? 다 뽑아버려!”30분도 안 되는 시간에 푸릇푸릇하던 꽃밭은 너덜너덜해졌다.정은이 이주 동안 기울인 심혈은 이렇게 수포로 돌아갔다.정은은 그 경호원들이 들이닥쳤을 때부터 철저히 멍해졌다.도겸이 명령을 내리는 순간, 경호원들은 폭력적으로 푸른 기운이 감도는 정원을 파괴했는데, 정은은 그저 옆에서 멍하니 지켜보았다그러나 이 모든 것은 천재지변이 아니라 인위로 한 짓이었다.두 사람은 사상 최대의 말다툼을 벌였다.도겸이 말했다.“넌 꽃을 심고, 휴가를 보내고, 여유롭게 즐길 시간은 있고, 내 전화를 받을 시간이 없는 거야?”“난 너한테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모든 경비를 동원하여 J시 전체를 뒤질 뻔했는데, 이게 뭐야?”“여기에 숨어서 꽃을 심고 있었다니?! 소정은, 난 네 학업보다 중요하지 않고, 우리의 감정은 네 미래보다 중요하지 않은 거지?”“그래, 나도 네 꿈을 존중했어. 그래서 매번 데이트할 때도 내가 먼저 도착해서 네가 오기를 기다렸어.”“빠를 때는 십여 분, 길 때는 몇 시간, 난 한 번도 널 버리고 간 적이 없잖아!”“그런데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난 내가 네 학업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건 인정해. 그러나 지금 이 꽃 때문에 내 문자를 씹다니?!”“소정은, 넌 날 전혀 사랑하지 않아!”...“소정은, 나를 먼저 생각할 순 없는 거야?”...“내가 외국에서 일주일 더 머물겠다고 말했을 때, 난 네가 화를 내지 않더라도 적어도 실망은 할 줄 알았어. 그러나 네가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고!”...“정은아, 나한테 좀 더 신경 써
정은은 너무 담담해서 마치 이 모든 것이 그녀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 같았다.도겸은 마음이 답답했다. 뭔가를 꽉 쥐고 싶을수록 그것이 점점 더 빨리 사라지는 것 같았다.전에 도겸은 사람들 시켜 정은이 힘들게 심은 꽃을 뽑으라고 했는데, 지금 그는 정은에게 향기롭고 여러 종류의 아름다운 꽃을 가득 심은 정원을 돌려주었다.하지만 정은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괜찮아, 네가 싫다면 우리 다른 곳에 가자.”“아니야, 난 이곳이 좋아.” 정은은 도겸을 똑바로 쳐다보며 당당하게 말했다.“이 꽃들은 정말 예뻐. 이것은 단지 아름다움을 향한 내 감상일 뿐이야. 하지만 만약 이것이 네가 나를 만회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고, 이 꽃들이 네가 목적을 달성하는 도구가 된다면, 그건 이 아름다운 사물들을 저버리는 거야. 난 그런 느낌을 좋아하지 않아.”도겸은 중얼거렸다.“난 단지 전의 잘못에 대해 사과하고 싶었을 뿐이야.”“너도 예전의 일이라고 했잖아. 지나간 이상 더 고민할 필요가 없어. 넌 많은 신경을 쓰면서 이렇게 예쁜 꽃을 심었으니, 난 네가 내 취향으로 좋고 나쁨을 따지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이 꽃들을 좋아하고 감상했으면 좋겠어.”“마치 네 인생처럼 말이야. 일을 통해 즐거움과 기쁨, 그리고 자유와 편안함을 느껴야지, 돌이켜서는 안 될 감정을 만회하기 위해 엉망으로 만들면 안 되잖아. 도겸아,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이고, 각자 인생의 목표가 있어.”“따라서 서로 다른 전진 방향을 가지고 있지. 예전에는 우리가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갔지만, 지금은 이미 갈라졌어. 다시 만나도 서로의 안부에 대해 물어볼 순 있지만, 미래에 계속 함께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면 안 돼.”“어쩌면, 어쩌면 말이야, 우리는 모두 더 좋은 사람을 만났 수 있을지도 몰라. 과거를 내려놓고 떳떳하게 모든 것이 가능한 미래를 기대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 아니겠어?”1년만에 도겸은 마침내 자신이 그리워하던 ‘도겸아’란 호칭을 들을 수 있었다.그러나 지금, 도겸은 조금도
이건 도겸 같지가 않았다.“하지만 6시간 후면 오늘은 끝난 셈인데.”“응. 매 순간 너와 함께 지내고 싶지만, 겨울에 넌 꼭 낮잠을 좀 자야 했잖아. 그렇지 않으면 오후에 졸릴 거야.”정은은 잠시 침묵했다.“그럼 나 혼자 방 하나 쓸 거야.”남자는 웃으며 눈빛이 씁쓸해졌다.“원래 그럴 계획이었어. 난 그렇게 파렴치한 사람이 아니야.”정은은 동의하지 않았다.그의 눈빛은 더욱 씁쓸해졌다.“그때 별장에서는 네가 책을 옮기고 바로 떠나길래 너무 화가 나서 그랬어. 나도 왜 그런 일을 했는지 모르겠어... 후에 나도 내가 왜 이성을 잃고 그런 짓을 했는지 생각해 봤어...”“하나는 네가 며칠이나 사라져서 네가 너무 보고 싶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너에게 겁을 주면 네가 다시 내게 돌아올 줄 알았어...”도겸을 바라보는 정은의 눈빛은 그야말로 복잡했다.이해하지 못했지만 은근히 그를 동정하고 있었다.그렇다, 동정.사랑조차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앞으로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성장할 수 있었다.그리고 정은은 단지 그의 시작점에 불과했다.‘그래도 다행이야, 시작점일 뿐이라서.’정은은 가정부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아가씨, 바로 이 방입니다. 들어오세요.”익숙한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정은이 그때 주워 온 꽃병조차 창턱에 놓여 있었다.이 방이 바로 정은이 여름방학 때 묵었던 방이었다.“그럼 얼른 쉬세요. 무슨 일 있으시면 언제든지 절 부르시면 됩니다.”“네, 감사합니다.”가정부는 나가면서 가볍게 문을 닫았다.정은은 40분 동안 잠을 잤다.아래층으로 내려갈 때, 도겸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눈앞에 마시지 않은 차 한 잔이 놓여 있었고, 눈빛은 마치 무슨 생각을 하고 듯 초점을 잃었다.회전 계단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서야 그는 갑자기 정신을 차렸고, 다음 순간 약간 긴장해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정은아, 일어났어? 방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 당장 사람...”“아니야.” 정은은 그의 말을
정은은 우선 비를 피할 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천둥 날씨에 나무 밑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은 상식이었다.번개가 치는 순간, 하늘이 밝아졌고, 정은은 멀지 않은 곳에 1미터 정도 되는 암석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안에 움푹 들어간 부분은 천연적인 구멍을 형성했다.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었다.비는 점점 더 크게 쏟아졌고, 콩알만 한 빗방울이 몸에 떨어지니 정은은 심지어 통증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재촉하여 대체적인 방위를 향해 달려갔다.곧 도착할 때, 정은은 갑자기 발이 미끄러지더니 몸은 중심을 잃고 앞으로 기울였다.이곳은 마침 비탈길이었다. 정은은 넘어진 후 또 앞으로 구르면서 전혀 일어설 수 없었다. 그녀는 얼른 손으로 머리와 얼굴을 감쌌다.유일하게 다행스러운 것은 경사면에 어떤 식물을 심었기 때문에 촉감이 잔디밭과 유사하여 일정한 완충 작용을 했다. 게다가 비에 젖은 흙도 상대적으로 푹신했다.그렇게 정은은 언덕 밑으로 떨어져서야 마침내 멈출 수 있었다.그녀는 온몸이 아프고 눈빛은 초점을 잃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반응을 할 수 있었다.그러나 이때, 온몸이 흠뻑 젖은 채로 온통 어둠뿐인 곳에 있으니, 정은은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망연함을 느꼈다.그러나 정은은 곧 이성을 되찾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냉정해지려 했다.정은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옆의 잡초와 나무줄기를 잡고 몸을 받쳤다. 그러나 일어나자마자 발목에서 심한 통증이 전해왔다.그녀는 얼른 쪼그리고 앉아 검사했다. 휴대폰 스크린의 미약한 빛을 빌어 정은은 엄청 부은 자신의 복사뼈를 보았다.다행히 피가 나지 않았다.그녀는 또 한번 움직여 보았다. 비록 아프지만 그래도 움직일 수 있었다.‘골절은 아닌데. 아마도 좀 삔 것 같아.’정은은 가볍게 한숨을 돌렸다. 이어서 그녀는 또 가방속의 씨앗을 검사했다. 배낭은 이미 진흙으로 가득했고, 안의 물품은 모두 어느 정도 파손되었지만 다행히 씨앗은 무사했다.그녀는 한숨을 돌리
그것은 넓은 합등숲이었다.“너희들 얼른 와 봐, 앞에 아주 큰 합등숲이 있어!”정은은 신이 나서 고개를 돌렸는데, 민지와 서준은 이 소식을 듣고 즉시 달려왔다.합등은 매우 유명한 콩류로, 원산지는 W국이며, 후에 이곳으로 도입되어 별명이 강을 건너는 용, 소 눈알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계곡이나 산비탈의 혼합 삼림에서 자라며, 큰 교목에 의거하여 생존한다.서준은 고개를 들어 이 합등숲을 바라보았다. 굵은 가지와 줄기가 감겨 있었고, 뿌리와 줄기는 50미터 떨어진 수원까지 뻗을 수 있었다. 이 숲을 가로지르니 마치 거대한 구렁이와 같았다.그는 먼저 감탄을 한 다음 바로 기뻐했다.“합등의 과실은 길이가 1미터에 달해 약으로 쓸 수 있고, 소장도 할 수 있어요. 시중에서도 가격이 싸지 않아 희귀식물이라고 할 수 있죠.”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이 합등숲은 아주 커서, 그 과실을 찾기에 쉽지 않을 거야. 해가 곧 질 것 같으니 우리 세 사람 따로 찾아보자. 6시 정각에 여기서 합류할까?”민지와 서준은 모두 이의가 없었다.밀림이 커서 길을 잃을까 봐 정은은 미리 기호를 표시했고, 십자 모양을 세 사람의 기호로 정했다.그 후 세 사람은 각각 다른 갈림길로 들어가 과실을 찾았다.합등 과실은 외형이 납작하고 씨앗이 안에 싸여 있으며, 원형에 가까운 암갈색 식물로,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정은은 수원에서 서쪽으로 나아가다가 숲속의 빛이 완전히 사라질 때에야 마침내 씨앗 하나를 찾았다.그러나 아쉽게도 씨앗을 품은 과실은 아주 완전하고 아름다웠지만, 너무 크고 길어 대충 봐도 1미터 남짓했다. 그러니 정은은 전혀 옮길 수가 없었다.시중에 있는 합등 과실은 소장품으로 거래되는데, 그 가격은 씨앗보다 훨씬 비쌌다.그러니 자연히 더욱 희귀했다.날이 이미 어두워지자, 정은은 기호를 따라 되돌아갔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지만 중도에 두 개의 연결된 밀림을 지나가며, 그녀는 기호가 뜻밖에도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했다.아무리 믿고 싶지 않더라도 지
서준은 말문이 막혔다.정은이 말했다.“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희귀 식물을 한번 찾아보자.”만점 받기 싫은 사람이 또 어딨겠는가?“그래요! 사실 100점이든 80점이든 상관없어요. 난 언니와 쮼과 함께 놀러 가고 싶거든요.”세 사람은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출발했다.희귀식물은 고정된 리스트가 없어, 주관 문제에 해당하며 공인된 흔하지 않은 식물이면 된다.그러나 이번에는 그렇게 순조롭지 못했다.어둠의 장막이 내리자, 민지는 피곤해서 숨을 헐떡였다.“우리... 거의 십여 개의 구역을 돌아다니지 않았어? 희귀식물의 잎조차 보지 못했잖아. 대체 언제까지 찾아야 하지? 나 너무 배고파, 밥 먹고 싶어...”최근 서준은 민지를 끌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달리기를 했다. 칼로리를 많이 소모해서인지 아니면 기타 어떤 이유 때문인지 민지는 자신이 툭하면 배가 고프다는 것을 발견했다.지금 두 다리가 나른해져서 정말 걸을 수가 없었다.정은도 힘들었다.그러나 앞의 두 작은 구역만 더 탐색하면, 이 큰 구역을 끝낼 수 있었기에, 내일이면 여기에 오지 않아도 됐다. 그리고 시간도 충분했다.“우리 좀만 더 버티자.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A구역의 마지막 두 구역을 다 탐색할 수 있을 거야. 자, 승리가 바로 코앞에 있어.”“두 개밖에 안 남았어요?”“응.”“그럼 저 쉬지 않을래요. 같이 가요! 이제 딱 마지막 한걸음밖에 안 남았으니, 이때 포기하면 저 정말 후회할지도 몰라요. 얼른 가요!”말하면서 민지는 일어나려고 했다.“급하지 않아.”정은은 얼른 민지를 붙잡았다.“2분만 더 쉬자. 그리고 물 마시고 음식 좀 더 챙겨 먹어.”“네!” 민지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릴 뻔했다.“정은 언니밖에 없는 것 같아요.”말하면서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정은과 서준은 그런 민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그러나 잠시 앉아 있다가, 민지는 수상함을 발견했다.“점점 더워지는 것 같지 않아요?”정은이 사방을 둘러보더니 확실히 이상함을 감지했다.여기의 식물은 작황이 보
옆에는 까불고 있는 신진호가 주전자를 들고 있었고, 그의 뒤에는 큰 가방을 든 탁재운이 있었다.정은은 시선을 뗐다.그녀는 경혜와 별로 친하지 않았다.“정은 언니!” 민지가 멀리서 달려오며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민지는 큰 여행용 가방을 메고 있었는데, 불룩해서 보기만 해도 무거웠다.선크림, 모기약, 모자, 물... 물론 빼놓을 수 없는 간식도 있었다.“엄청 많이 준비했으니까 이따가 같이 먹어요.”“그래.”“어? 서준이는요? 아직 안 왔어요?”지각할까 봐 민지는 종종걸음으로 달려왔고, 겨우 5분 앞당겨 도착했다.그녀보다 일찍 도착한 서준은 어이가 없었다.“내가 너보다 더 늦을 것 같아? 그게 말이 돼?”민지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나보다 2분 일찍 도착한 게 뭐가 대단하다고? 난 다시 잠들었을 뿐이야. 그런데... 두 사람 가방은 왜 다 그렇게 작지?”정은은 말할 것도 없고, 서준조차도 작은 여행가방 하나만 메고 있었다. 그것도 안이 텅 빈 것 같아 전혀 무게가 없어 보였다.“이번에 갈 그 식물기지는 시설 같은 게 잘 갖춰져 있다고 해서 필수품만 챙겨왔어.”정은이 설명했다.서준도 마찬가지였다.‘그래서 나만 큰 가방을 멘 거야? 거의 간식만 담은 가방을?’8시, 교수님은 인원수를 체크했고, 모두 도착한 것을 확인한 후, 일일이 줄을 서서 버스에 올랐다. 이번 목적지는 교외에 위치한 식물기지로서 약 100킬로미터였고, 운전만 해도 3시간이 걸렸다.차에서, 민지는 정은과 함께 앉았고 서준은 뒤쪽에 있었다.도중에 반산길을 지나야 하는데 신호가 좋지 않아 핸드폰을 놀지 못했다. 그래서 서준은 아예 킨들을 꺼내 논문을 보았다.민지는 성격이 좋아서 다른 사람들과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남들과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정은은 별다른 일이 없어 턱을 짚은 채 길가의 풍경을 감상했다.이른 아침, 들쑥날쑥한 산봉우리가 하나둘씩 이어져 있었고, 겨울은 날이 매우 늦게 밝아서, 출발한지 한참 되어서야 날이 밝아졌
잠든 추억이 다시 깨어났다.조각난 기억이 스치자, 이미윤은 절망적이고 눈물을 머금은 두 눈을 떠올렸고, 그것은 여러 차례 자신의 꿈에 나타났다.그녀는 목이 쉬었다.“이미숙이 납치된 것은 우리 가문을 겨냥한 나쁜 사람들 때문인데,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거지? 내가 이미숙과 같이 외출해서?” “그 여자가 실종된 것을 다 내 탓으로 돌리는 것이 공평하다고 생각해? 진작에 이럴 줄 알았다면, 난 차라리 내가 납치를 당했으면 좋겠어. 그럼 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지금 날 엄청 그리워하시겠지?”이미윤은 마치 어떤 추억에 잠긴 듯 멍을 때리며 눈물만 뚝뚝 흘렸다. 심지어 자신을 원망하기까지 했다.현빈은 자신의 어머니가 이렇게 우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봉수진이 최근 에 푹 빠진 것을 떠올리며, 그는 이미윤에게 말했다.“할머니는 최근 이라는 추리 소설을 엄청 좋아하셔요. 작가의 사인, 특히 인사말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엄청 기뻐하실 거예요.”이미윤의 표정이 다시 밝아지자, 현빈은 무언가를 떠올리며 다시 주의를 주었다.“할머니의 성격을 잘 알고 계시잖아요. 천천히 다가가는 것이 좋을 거예요. 사인 받은 책을 구하신 다음, 먼저 저에게 통지하세요. 그때 가서 제가 다 안배할 테니까...”그렇지 않으면 이미윤은 일을 망칠 수도 있었다.“그래, 알았어.” ‘그냥 책 하나일 뿐이잖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건 문제도 아니지.’현빈은 희망을 잔뜩 품은 이미윤을 보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할 말은 다 했으니 남은 건 시간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이때 비서의 전화가 걸려왔다. 처리해야 할 긴급서류가 있다고 해서 현빈은 회사로 달려갔다.이미윤은 집사를 찾아와 신신당부했다.“작가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요. 어차피 책 제목을 이미 알고 있을 거 아니에요. 최근에 새로 나온 추리 소설이니, 얼마를 쓰든, 무슨 방법을 쓰든 꼭 구해야 해요!”“방금 도련님께서는 작가님의 인사말을 받는 게 더 좋을 거라고 하셨는
젊었을 때 사고를 안 쳐본 재벌 2세가 어디 있을까?그러나 놀아도 되지만 절대로 여자에게 빠질 수는 없었다.이미윤도 말을 직설적으로 하기가 불편했고,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는 건 더욱 말이 안 됐기 때문에, 그녀는 은근히 일깨워줄 수밖에 없었다.“남녀 방면의 일은 너도 좀 주의해. 경험이 풍부하다고 해서 여자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마. 그러나 제대로 다칠지도 몰라.”현빈은 영문을 몰랐다.“어머니,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은 거죠?”이미윤은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아 화제를 돌렸다.“며칠 전에 내가 닥터 성에게 연락했는데, 네 할머니의 눈과 몸이 많이 호전되었다고 하더라. 시간 좀 잡아줘. 나도 어르신들 만나고 싶으니까.”닥터 성은 심씨 가문이 투자한 병원의 유명한 안과 과장이며 봉수진을 다년간 치료해온 주치의이기도 했다.이미윤은 미리 병원에 인사를 한 적이 있는데, 봉수진의 몸이 호전되면 즉시 전화로 자신에게 통지하라 했다.“전에 네 할머니가 몸이 안 좋으셔서 자극을 받으면 안 된다며 당분간 만나지 말라고 했잖아. 지금 의사도 상태가 많이 좋아지셨다고 했으니 날 막을 이유가 또 뭐가 있어?”이미윤은 현빈을 보면서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벌써 알아차린 것 같다.현빈은 말이 막혔지만 그래도 완곡하게 주의를 주었다.“할머니는 호전되셨지만 정신상태는 여전히 매우 안 좋지 않아요. 일단 자극을 받으시면 쉽게 악화될 수 있으니 될수록 방해를 하지 않는 게...”“자신의 딸을 만나는 것일 뿐, 무슨 자극을 받을 수 있겠어?”현빈은 이미 조심스럽게 표현을 했지만, 이미윤은 여전히 노발대발했다.“나는 네 할머니의 딸, 유일한 딸이라고! 수십 년이나 지났는데, 두 분은 왜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시는 거지?!”“어머니...”“내가 보기에, 네 할머니는 눈이 멀었을 뿐만 아니라 마음도 멀었어! 그동안 누가 곁에서 두 분 챙겨줬는데? 또 누가 두 분을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병원을 찾아줬는데? 그런데 그 결과는?!”이미윤은 이를 갈며
“어머니!” 재석은 강서원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이미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알고 있었다.“제가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지금은 이런 것들을 고려할 마음이 없다고.”강서원은 꾹 참더니 잠시 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너 여자친구 생겼지?”재석은 멈칫하다가 머릿속은 저도 모르게 정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아니요.”강서원은 믿지 않았다.“그럼 네 손에 들고 있는 그 양복은 어떻게 된 거야? 너 혼자 사러 갔어?”재석은 고개를 숙이고 손에 든 쇼핑백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이게 양복인 줄은 또 어떻게 아셨어요?”강서원은 가슴이 찔렸다.“그 로고가 얼마나 선명한데. 그 집은 양복만 만들었으니 또 뭐 다른 게 있겠어? 이제 내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겠니?”재석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친구와 함께 골랐어요.”“친구? 남자야 여자야? 어떤 친구인데?” 강서원은 계속해서 물었다.“어머니, 오늘 단지 이런 걸 물어보기 위해서 저를 부르신 건가요?” 재석은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일 없으면 저 먼저 실험실로 돌아갈게요.”강서원은 한참 동안 재석을 살펴보았지만, 그는 표정관리를 완벽하게 하여 조금의 허점도 드러내지 않았다.강서원이 또 무슨 말을 하려 할 때, 조기봉은 갑자기 찻잔을 내려놓았다.“당신도 이제 그만 좀 해. 재석이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데, 그래도 당신의 전화 한 통 때문에 바로 달려왔잖아. 그런데 또 뭐가 불만인 거야?”강서원도 너무 몰아붙이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렇다고 그 얄미운 계집애가 계속 뻔뻔하게 우리 재석이 곁에 남게 할 수는 없잖아? 정말 안달이 나네!’...심씨 가문에서.이미윤 역시 아들을 집으로 불렀는데, 강서원에 비해 그녀는 그렇게 당황하지 않았다.완곡하게 떠볼 필요 없이 이미윤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너 요즘 만나는 애 바꿨어?”‘여자친구’가 아닌 아무런 호칭도 없는 ‘만나는 애’였다.현빈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왜 갑자기 제 사생활에 관심
이때 정은은 다른 진열대에 놓인 케이크에 매료되어, 두 남자가 기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재석은 계산을 마치고 고개를 돌리자, 정은이 한 케이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5층으로 된 케이크에 한층마다 정교한 피규어를 놓았다.“예뻐?”“네.”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너무 정교하게 잘 만들었어요.”그리고 2층을 가리키며 말했다.“선배님, 이 안경 쓰고 눈살을 찌푸리는 피규어 말이에요, 선배님과 닮지 않았나요?”재석은 한동안 자세히 보더니 진지하게 말했다.“아니. 내가 언제 자주 눈살을 찌푸렸지?”“눈살을 찌푸렸지만, 선배 자신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도 있잖아요? 예를 들면 지금이요.”재석은 멍하니 있다가 문득 장난치다 들킨 어린아이처럼 궁핍하고 마음이 찔렸다.“하하...”정은은 웃음을 터뜨렸다.“선배님 정말 귀엽네요.”세 사람이 케이크 가게를 막 나서자, 재석의 핸드폰이 울렸다.“네, 어머니.”[재석아, 집에 한번 돌아와.]강서원의 목소리는 심각하고 엄숙했다.“무슨 일이세요?”[돌아와서 얘기하자.]“네.”통화를 마치자, 재석은 집에 무슨 일 생겼을까 봐 걱정했다.“미안, 집에 일이 좀 있어서 먼저 갈게.”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려 했고, 마침 현빈도 누군가의 전화를 받았다.“네, 알겠어요.”전화를 끊자, 현빈은 재석을 바라보았다.“공교롭게도 저희 집에도 일이 좀 생겼네요. 하지만 그전에 전 먼저 정은을 집에 데려다줄 테니, 교수님은 얼른 일 보러 가세요.”정은은 얼른 손을 흔들었다.“아니에요, 두 분 다 얼른 가서 일 봐요!”재석은 무슨 말을 하려다 말았다.정은은 재빨리 말했다.“정말 그럴 필요 없어요. 어차피 걸어서 10분이면 도착할 텐데, 아무도 데려다줄 필요가 없단 말이에요.”말이 끝나자 정은은 다시 고개를 돌려 현빈을 보았다.“심 대표님도 빨리 가요. 중요한 일 그르치면 안 되잖아요.”현빈과 재석은 눈을 마주치며 누구도 지려 하지 않았다.결국 정은의 재촉으로
다 먹은 뒤, 이미윤은 계산하러 갔다.두 사람 모두 얼마 먹지 않아서 음식은 아직 많이 남았다.이쪽의 두 어머니는 수심이 가득했지만, 그쪽의 현빈과 재석은 각기 수확을 얻었다.하나는 양복을, 하나는 구두를 샀기에 모두 기분이 좋았다.현빈이 말했다.“앞에 밀크티 가게 있는데, 뭐 마실래?”재석도 같은 시간에 입을 열었다.“그 케이크 가게가 엄청 유명한데...”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말했고, 서로를 힐끗 보더니 적의를 드러냈다.“정은아, 우리 같이 밀크티 사러 갈래?”“들어가서 한번 볼래?”두 남자는 모두 그녀를 간절히 바라보고 있었다.‘뭐야, 왜 또 이래!’“그냥 각자 사러 가세요. 난 화장실에 가고 싶으니까요.”현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그리고 재석을 바라보며 물었다.“교수님은 밀크티를 마시고 싶지 않으시겠죠?”“만약 심 대표님이 사는 거라면 한 잔 마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그래요.” 현빈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은근히 이를 갈고 있었다.“그리고 보답으로 내가 심 대표님에게 케이크를 사줄게요.”이 말을 듣자, 현빈은 더욱 화가 났다.두 사람은 각자 줄을 섰다.정은이 화장실에서 나올 때, 현빈은 양손에 밀크티 한 잔씩 들고 있었고, 탁자 위에 한 잔 남아 혼자 들 수 없었다.그는 종업원에게 포장해 달라고 부탁하려 했다.정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내가 들게요.”두 사람은 말하면서 케이크 가게로 갔다.“서원아? 서원아?!”“응? 뭐라고?”“뭘 그렇게 넋 놓고 보는 거야? 불러도 대답을 안 하다니.” 이미윤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았는데 케이크 가게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강서원은 손을 흔들었다.“아무것도 아니야.”말은 그렇게 했지만 안색은 매우 좋지 않았다.‘그 여자아이, 뜻밖에도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니. 심지어 웃고 떠들며 함께 밀크티까지 마시면서 쇼핑을 하고 있어! 그건 커플끼리 하는 일 아니야?!’비록 그 남자의 뒷모습만 밖에 보지 못했지만, 옷차림과 기질만 보아도 조건이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