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각.하예정은 연예 기사가 뜬 걸 보고 나서 한참 침묵한 후 친구에게 말했다.“신분이 달라지니 사소한 일도 바로 연예 기사에 오르네.”전씨 일가 사모님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연예 기사에 실렸다.심효진은 이런 가십거리 기사들을 진작 봐와서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태윤 씨는 관성 상업계의 거물 전태윤 도련님이잖아. 너랑 너희 시어머님 평소에 딱히 접촉이 없었고 네가 또 최근에 이모님과 함께 각종 행사에 참석해서 다들 오해한 거겠지. 전에 한 사모님이 너희 시어머님께 전화해서 네가 오지랖 넓게 남 일에 참견이라고 며느리 단속 잘하라고 말한 거 너도 기억나지? 그 사람들 네가 시어머니한테 구박받길 원하고 있을 거야. 갑부 전씨 일가에 시집간 네가 엄청 부럽겠지. 정남 씨가 그러는데 전 씨 할머니랑 너희 시어머님이 집안에서 가장 위엄 있대. 한 분은 어르신이고 또 한 분은 현재 안방마님이시니 전 씨 일가에선 그 두 분이 모든 주도권을 차지하고 계신대.”“전 씨 할머니가 널 얼마나 예뻐하시는지는 더 말할 것도 없지. 내가 볼 땐 자기 손주들보다 널 더 예뻐하시는 것 같아. 게다가 넌 할머니가 태윤 씨한테 소개해 준 신붓감이잖아. 할머니의 은혜를 대신 갚는 거라면서 태윤 씨더러 너랑 결혼하라고 부추겼다면서. 결국 할머니가 널 전씨 일가에 발 들이게 한 거야. 그러니까 널 예뻐하는 것도 당연한 거지. 할머니 앞에서 이간질하는 건 전혀 불가능한 일이야. 할머니는 내가 본 어르신 중에 가장 현명한 분이셔. 항상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모든 걸 결정하시고 또 결국 다 할머니 결정대로 좋은 결실을 보잖아.”심효진은 소정남이란 남친이 생긴 이후로 현재 핫이슈를 거의 빼놓지 않고 장악하고 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가십거리는 전씨 일가 사모님인 하예정보다 훨씬 더 많을 지경이다.하예정은 애초에 남 일에 관심 없어 관성의 수많은 소식들을 심효진을 통해 엿듣는다.심효진은 친구에게 계속 분석해 주었다.“할머니를 배제하니 다들 너희 시어머니로 타깃을 바꾼 거야. 너희 시
하예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전태윤에게 걸려 온 전화인 걸 보더니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역시 양반은 못 되네.”심효진은 그런 그녀를 구박했다.“행복한 줄 알아. 태윤 씨 얼마나 바쁜 사람인데 짬짬이 너한테 연락하는 것 봐. 진짜 널 아끼고 있다는 증거야. 물론 우리 정남 씨도 뒤처지진 않지만, 어머, 아직 우리까진 아니지. 나한테 프러포즈한 건 아니니까.”하예정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여보, 나 가는 길이야. 십 분만 기다려. 금방 도착해.”“이리로 온다고요?”하예정은 남편이 왜 갑자기 오는지 몰라 살짝 당황했지만 곧장 알아챘다. 유전자확인 검사 결과서를 가지러 가야 하는데 전태윤이 함께 가주겠다고 했다.시간을 보니 어느덧 오후 두 시 반이었고 한창 전태윤의 근무 시간이었다.그는 막중한 업무를 뒤로한 채 그녀와 함께 결과서를 가지러 가기로 했다. 하예정과 관련된 일이라면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그에게 전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누군가에게 이토록 사랑받는다는 건 달콤한 캔디보다 더 사르르 녹아내리는 법이다.“나 혼자 가면 되는데, 당신 일하느라 바쁘잖아요.”전태윤이 전화기 너머로 대답했다.“괜찮아, 금방이면 되는데 뭘.”“기다릴게요.”“그래.”하예정은 휴대폰에 대고 뽀뽀했고 고스란히 듣고 있던 전태윤은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여보, 나한테 뽀뽀해야지 휴대폰에 대고 하면 어떡해.”하예정은 웃으며 전화를 끊은 후 심효진에게 말했다.“우리 이이는 너희 그이보다 달래기 어렵다니까.”하예정은 휴대폰에 대고 뽀뽀하는 걸 심효진한테 배웠다.애초엔 제법 잘 먹혀서 전태윤을 싱글벙글하게 했는데 이젠 썩 소용이 없다. 그는 진짜 뽀뽀를 원하고 있다.심효진이 웃으며 말했다.“태윤 씨가 얻은 게 많고 더 달콤한 것들을 맛보았으니까 당연히 원하는 게 점점 더 많아질 거 아니야.”하예정의 얼굴이 저도 몰래 빨갛게 물들었다.“너랑 정남 씨는 대체 언제쯤 결혼할 건데?”그녀는 화제를 돌렸다.“내심 기대하고 있단 말이야.”하예정과
십 분 후.하예정은 경적을 듣고 친구에게 몇 마디 당부한 후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을 챙기고 카운터를 돌아 밖으로 나갔다.몇 걸음 가다가 다시 돌아오더니 가방을 챙기면서 말했다.“태윤 씨가 선물한 가방 깜빡할 뻔했네. 본인이 준 가방을 안 들고 다니면 또 뭐라 할 거야.”심효진이 웃으며 말했다.“행복한 줄 알아.”하예정은 전태윤이 선물한 명품 백을 들고 서점을 나왔고 두 명의 경호원은 도련님이 경호팀을 거느리고 사모님을 모시러 온 걸 보더니 눈치껏 더는 뒤 따라오지 않았다.차에서 내린 전태윤은 한 손에 꽃다발을 들고 다른 손으로 그녀를 위해 차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가까이 다가가 아내에게 꽃다발을 건넸다.“여보, 선물이야.”“고마워요, 남편.”하예정은 꽃다발을 받고 활짝 웃으며 그의 볼에 입 맞추고 나서야 차 안에 들어갔다.전태윤은 뽀뽀한 곳을 어루만지며 눈웃음을 짓더니 잇따라 차에 탔다.“여보, 오후 디저트로 두 박스 챙겨왔어. 먹어 얼른.”전태윤은 디저트 두 박스도 그녀에게 건넸다.하예정은 웃으며 박스를 건네받고 남편을 칭찬했다.“우리 여보 점점 더 자상해지네요.”그녀는 가까이 다가가 재빨리 또 한 번 뽀뽀하고는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죽을 만큼 사랑해요.”전태윤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똑같이 귓가에 속삭였다.“나도 죽을 만큼 사랑해.”조수석에 앉은 강일구는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도련님... 솔로인 저도 신경 좀 써주시면 안 될까요?’종일 도련님과 사모님의 알콩달콩한 모습만 보고 있자니 강일구를 비롯한 미혼의 동료들마저 연애하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하예정은 꽃다발을 옆에 내려놓고 디저트 박스를 열었다.“함께 드실래요?”“여보 먹어. 난 디저트를 별로 안 좋아해. 당신이 직접 해주는 거면 모를까.”그가 안 좋아하는 걸 잘 알기에 하예정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그의 사랑스러운 눈빛 속에서 그녀는 맛있게 디저트를 먹었다.“우리 할아버지랑 다들 지금 어느 호텔에 묵고 있는지 알아요? 결과서 받으면 바로 찾
“뭐라고 적혔어?”전태윤은 아직 결과서를 확인하지 못했고 하예정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바삐 돌아치는 모습만 지켜볼 뿐이었다. 정색한 그녀의 표정에 괜히 장인어른이 친자가 아닌 건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결과서에 아빠랑 할아버지는 혈연관계가 있다고 적혔어요. 친자가 맞는다는 거죠.”“진짜였네... 다들 너희 가족을 너무 표독스럽게 대해서 난 또 친자가 아닌 줄 알았어.”하예정은 남편을 바라보며 실소를 터트렸다.“왠지 당신은 우리 아빠가 친자가 아니길 더 바라는 것 같네요.”전태윤은 겸연쩍게 말했다.“그 사람들이 너무 무자비하게 나왔잖아. 아버님이 마치 친자식이 아닌 것처럼 말이야. 친자식임에도 이렇게 하는 건 진짜 너무 슬픈 일이야.”“나랑 언니는 그래서 마음이 상할 대로 상했어요. 아마 이번 생은 그 인간들과 화해할 일이 없을 거예요.”하예정은 결과서를 가방에 넣었다. 언니가 답장이 없는 걸 보니 수면 보충 중인 듯싶었다.하루 토스트 장사가 잘되어 돈을 버는 것도 사실이지만 힘에 부치는 것도 면치 못한다. 아침 장사는 일찍 일어나는 게 필수라 하예진은 매일 점심을 먹고 나서 오후가 되면 우빈이를 데리고 잠시 눈을 붙인다.저녁 무렵에 깨어나 간단하게 저녁을 차려 먹고 또다시 다음 날 아침 장사를 위해 식자재를 구매하고 모든 세팅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토스트에 필요한 식자재만 준비하려 해도 많은 시간이 소모된다. 하예정은 짬짬이 언니를 도와 식자재를 마련하여 냉장고에 넣어둔다. 그렇게 하면 다음 날 바로 꺼내서 토스트를 만들 수 있으니까.전태윤은 하 영감 일행이 현재 묶은 모텔을 알고 있어 하예정과 함께 경호팀을 거느리고 그리로 향했다.하지문만 모텔에 없었고 하 영감 부자 3인과 장손 하지명은 전부 안에 있었다.네 사람은 침대에 앉아 고스톱을 치다가 노크 소리에 하지명이 패를 손에 든 채로 나가서 문을 열어주었다.“누구세요?”“나야, 예정이.”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하 씨네 가족은 전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하지명이 문을 열자
하예정이 말했다.“내가 시켰거든요. 지문이더러 할아버지 머리카락 뽑아오라고 했어요.”“뭐야? 너 미쳤어? 내 머리카락으로 뭐 하려고? 지철이 녀석도 왜 네 말을 고분고분 듣는 건데? 너 혹시 지철이한테 돈이라도 쥐여줬냐?”사촌들에겐 돈을 주면서 할아버지한테는 일전 한 푼도 안 주다니, 손녀를 키워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본인이 잘돼도 할아버지한테 효도하는 법이 없으니까.“할아버지가 마을 사람들에게 우리 아빠가 친자식이 아니라고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닌다던데, 아빠는 돌아가신 지 십여 년도 더 돼서 친아비의 무자비한 만행을 막을 순 없지만 난 아니에요. 아빠 딸로서 반드시 우리 아빠를 위해 제대로 반박해 나설 거예요. 아빠가 남기신 유산은 상속법에 따라 할머니, 할아버지도 일정 부분은 물려받을 수 있어요. 소송을 걸든 협상을 하든 결과는 다 똑같아요. 할머니, 할아버지가 탐욕만 안 부렸어도 일을 오늘 이 지경까지 몰아가진 않았을 거예요.”하예정은 유전자 검사 결과서를 꺼냈다.“지철이를 시켜서 할아버지 머리카락을 뽑아오라고 한 건 유전자확인 검사를 하기 위해서였어요. 아빠는 더 이상 할아버지와 유전자확인 검사를 받을 순 없지만 이걸 어쩌죠? 나랑 할아버지의 유전자확인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혈연관계가 99퍼센트래요. 이제 막 나온 결과서라 아주 따끈따끈해요. 우리 두 사람은 혈연관계가 있다고요. 할아버지는 몰라도 괜찮아요. 이 집안 손주들이 잘 알 테니까 큰손주더러 이 검사 결과를 제대로 설명해 보라고 하세요.”하 씨네 가족들은 말문이 턱 막혔다.“이래도 우리 아빠가 친자가 아니라고 우기실 거예요? 엄마, 아빠는 살아계실 때 두 분께 그토록 효도했는데 양심도 없나 봐요? 어쩜 이렇게까지 무자비하게 나올 수 있어요? 우리 가족 소유의 집과 땅을 둘째 손자한테 주고 싶어서 우리 아빠가 친자식이 아니란 말까지 입밖에 내뱉고 다니는 거냐고요? 실은 나 아빠가 당신들 친자식이 아니길 바랐어요. 그럼 뭔가 이해라도 되지. 당신들 우리 아빠한테, 나랑 언니한테 정
하지명은 할아버지를 설득하고 하예정 자매와 함께 하유의 부동산 문제를 협상하기로 했다.“그래.”하예정도 바로 허락했다.그녀도 협상으로 해결되길 바랐다. 소송까지 가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까.한 시간 후.전태윤이 관성 호텔의 어느 한 룸을 예약해 양측의 협상 자리를 마련해주었다.하예진은 우빈이를 데리고 왔다.하 영감도 하지문을 호텔로 불러왔다. 하유의 집을 차지하려고 이토록 애쓰는 것도 실은 다 하지문에게 물려주기 위해서였다. 하 영감은 줄곧 둘째 손자를 제일 예뻐하고 사사건건 하지문과 의논한다.하예정이 사촌 동생을 이용해 먼저 할아버지와 유전자확인 검사를 받았으니 그들이 계속 난리를 피워도 제 얼굴에 먹칠하는 꼴만 된다는 걸 하지문은 잘 알고 있다.하소진도 애초에 하예정처럼 성형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사촌 여동생의 모습으로 변하고 말았다...그녀를 하예정 대신 전씨 일가의 사모님으로 만들려던 작전도 수포가 되었다.전씨 일가 앞에서 하 씨네 가족은 아무리 인원수가 많아도 상대가 손 한 번 튕기면 처참하게 무너진다. 게다가 전씨 일가도 사람이 꽤 많은 편이다.전씨 일가의 도련님들은 하나같이 훌륭하여 관성에서 높은 신분을 자랑하다 보니 하 씨네 가족들이 목을 젖히고 우러러봐야 할 지경이다.그들은 썩 내키지 않아 하예정 자매를 끝까지 괴롭히려 했지만 결국 굴욕만 자초했다. 하예정 자매가 막강한 조력자를 두고 있는 지금, 설사 그런 뒷배가 없다고 해도 그녀들 성격상 고소를 해서라도 집을 돌려받을 것이다.이번 일은 애초에 하 씨네 가족들이 진 게임이다.“예진아, 예정아, 너희는 인제 다들 도시에 발붙여서 나름 잘 나가잖아. 앞으로 하 씨네 마을에 돌아와서 지낼 일이 거의 없을 테니 너희 엄마, 아빠가 남겨주신 집과 땅을 우리에게 파는 건 어때?”하지명이 먼저 입을 열었다.“팔기 싫으면 할머니, 할아버지 몫으로 돈 좀 챙겨드려. 그럼 두 분도 상속 포기하실 거야. 집과 땅은 전부 너희 두 자매 소유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그
하 씨네 가족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서로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하지명이 먼저 질문을 건넸다.“예정아, 너랑 예진이가 의논해서 금액을 정하고 집과 땅을 우리한테 팔아.”“우리가 금액을 정하면 당신들이 돈 낼 거야 아니면 두 분한테 받아낼 속셈이야?”하지명이 말했다.“할머니, 할아버지가 지낼 곳이니 당연히 두 분이 돈을 내야지. 다만 할머니가 아프신 이후로 두 분 적금도 얼마 남지 않았을 거야. 뒤에 있는 치료비용은 전부 우리가 부담했거든. 두 분 큰돈은 선뜻 내놓지 못하실 거야. 일단 차용증 쓰게 하고 돈 생기는 대로 갚으면 안 될까? 모자란 부분은 먼저 빚지는 거로 하고...”“빚진 돈은 누가 갚아?”하예진이 불쑥 물었다.“두 분은 연세가 많으셔서 수입도 없는데 무슨 돈으로 집을 사?”하지명은 아무 말도 없었다.하 영감은 손자, 손녀의 말을 듣더니 살짝 화난 듯 두 아들을 나무랐다.“너희가 돈 모아서 저 집 사들여. 하유 몫은 나랑 너희들 엄마가 그동안 그 집을 차지하고 지낸 거로 퉁 쳐.”하 영감의 큰아들과 둘째 아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아버지, 우린 지금 일자리가 없어 수입이 끊겼어요. 자식들한테 기대서 겨우 사는데 무슨 돈으로 집을 사겠어요?”하 영감이 두 손자를 쳐다봤고 하지명이 먼저 말했다.“할아버지는 셋째 삼촌네 집과 땅을 지문이한테 주기로 하셨잖아요. 진짜 사실 생각이면 지문이더러 돈 내고 사라고 해요. 그 집 지문이가 물려받아도 우린 아무 의견 없어요.”이에 하지문이 반박했다.“난 읍내에 집 한 채 있어서 살 곳 있어. 할아버지가 재산이 있으면 내가 나눠 갖는 거고 없으면 나도 이 돈 못 내. 할아버지 아들은 우리 아빠이지 내가 아니야. 집을 사고 노후를 책임진다고 해도 손자인 내가 감당할 일이 아니라고.”제일 아끼던 손자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하 영감은 화나서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하예진 자매는 고향 친척들이 파렴치한 건 알지만 또 한 번 쇼킹할 따름이었다.하지문은 자신이 무례한 줄도 모르고 계속
“100에서 120만 좌우야.”하예정은 두 명의 큰아버지와 사촌오빠들에게 물었다.“다들 의의 있어요? 없으면 할아버지 말씀대로 할게요. 내가 사람 시켜서 계약서 작성하고 공인인증까지 받아올게요. 그럼 앞으로 우리 부모님이 남겨주신 집은 두 분과 아무런 연관이 없을 거예요. 두 분 나오기 싫으시면 당신들이 매달 집세와 수도세, 전기세를 우리한테 바쳐요. 우린 이미 줄 만큼 다 줬어요. 당신들의 이득을 볼 생각 없으니 당신들도 우리한테 이득 볼 거란 생각은 접어요.”이때 전태윤이 하예정에게 다가와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우선 부동산 명의부터 바꿔. 비록 등기부 등본에 아버님 명의로 되어 있지만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아있는 한 두 분이 상속을 포기하겠다고 사인해야 너랑 처형도 온전히 물려받을 수 있어.”두 자매 명의로 옮기면 앞으로 더는 이 인간들과 실랑이를 벌일 필요가 없다.하예정이 머리를 끄덕였다.하 씨네 가족도 아무 의견이 없었고 하지명이 선뜻 대답했다.“그래, 예정아. 네 말대로 우선 할머니, 할아버지가 차지하는 몫만큼 사들이고 앞으로 두 분 너희 집에서 지내게 해드려. 집세랑 수도세, 전기세는 우리가 낼 거야. 다만 우리도 먼저 집에 돌아가서 넷째네랑 상의해야 해.”“너랑 예진이 내일 협의서 들고 마을로 와. 이장 일행도 불러서 증인이 돼주어야지.”“네.”하예진이 흔쾌히 허락했다.더는 실랑이를 벌이지 않고 소란도 피우지 않으며 부모님이 남겨주신 유산을 협상하여 해결하는 건 두 자매에게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협상을 마친 후 하 씨네 가족들은 부랴부랴 집에 돌아갔다. 하 영감은 호텔을 나서고 고개 돌려 하예정 자매를 한참 쳐다보더니 굳게 다문 입술이 살짝 움직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그들이 다 떠난 후 하예진은 아들의 손을 잡고 동생 부부에게 말했다.“예정아, 제부, 나랑 우빈이는 이만 가봐야겠어요.”“언니, 내가 바래다줄게.”하예진이 웃으며 답했다.“괜찮아, 나 스쿠터 타고 왔어.”“언니도 이젠 차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