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애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양진아가 이선화의 체면조차 봐주지 않을 줄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추월과 하선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재빨리 다가가 춘애를 잡았다. 두 사람은 양진아에게 사죄하며 춘애를 양옆에서 붙들었다.“작은 마님, 마님께서 쇤네들을 작은 마님께 주셨으니 모두 작은 마님의 사람들입니다. 춘애가 이곳의 규율을 익히도록 쇤네가 잘 가르치겠습니다.”“지금 당장 춘애를 데리고 나가겠습니다.”양진아는 노비와 다투고 싶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들이 춘애를 데리고 나가도록 내버려 두었다.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후 시온이 참다못해 물었다.“작은 마님, 저 천한 것이 왜 우리 별채에 들어온 것입니까? 쟤가 바로 그날 밤 나리께서 내쫓은 년이란 말입니다. 설마 마님께서 저년을 나리의 첩으로 주신 것입니까? 작은 마님, 저년을 꼭 내쫓아야 합니다.”양진아가 웃음을 터트리더니 안절부절못하는 시온을 보면서 말했다.“넌 어찌 네 서방이 첩을 들인 것을 보고 질투하는 사람처럼 행동하느냐. 안심하거라. 나중에 너한테만 한결같이 마음을 주는 사내를 찾아주겠다. 절대로 속상하게 하지 않을 거다.”전생에 시온과 경혜는 그녀에게 충성을 다했고 결국 그녀를 지키다가 죽었다. 이번 생에 두 사람에게 꼭 잘해주겠다고 마음먹었다.시온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발을 동동 구르면서 말했다.“작은 마님, 지금 그런 농담이나 할 때입니까? 설마 정말로 첩을 들이려는 건 아니시지요?”“왜 안 되는데?”양진아가 피식 웃었다.“나와 서방님의 혼사는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으니 나에게 한결같기를 바라지 않아. 그저 정실부인으로 존중해주기만 한다면 첩을 두든 말든 상관없다.”양진아는 임우진이 첩을 들인다면 그녀가 먼저 아이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이 아이가 있어야만 정실부인의 자리를 굳건히 지킬 수 있으니까.시온이 다급하게 말했다.“작은 마님, 쇤네가 보기에 나리께서는 춘애한테 마음이 없습니다. 게다가 제후 나리께서도 첩을 들이지 않
양진아는 시온과 함께 서둘러 방을 나섰다. 임우진이 서실 문 앞에 서서 마당에 무릎을 꿇은 채 벌벌 떠는 춘애를 화가 난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주변에 많은 계집종들이 서 있었는데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었다.‘화난 건가?’양진아는 임우진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웃었다.“서방님, 혹시 춘애가 서방님 심기를 건드렸습니까? 잘못한 것이 있다면 고치도록 하면 될 텐데 어찌 이리 크게 화를 내십니까?”임우진의 시선이 양진아에게로 향했다. 분노가 담긴 그의 눈빛에 양진아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얼른 시선을 피했다.임우진이 양진아를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당장 어머니께 다시 돌려보내서 어머니더러 잘 가르치시라고 해. 만약 사내가 필요하다면 다른 곳에 시집보내든 알아서 하시라고 하고. 아무튼 다신 내 눈에 띄지 않도록 해.”임우진의 말에 무릎을 꿇고 있던 춘애는 몸을 더욱 심하게 떨었다.양진아가 당황해하며 말했다.“서방님, 춘애는 어머님께서 보낸 몸종입니다. 어머님께서 이미...”“어머니께서 주시는 거면 다 받아?”임우진이 더욱 화를 내면서 양진아의 말을 가로챘다.“그렇게 내가 다른 여인을 품에 안았으면 좋겠어?”양진아를 어찌나 무섭게 노려보는지 눈에서 불이라도 뿜어나올 것 같았다.그는 진심으로 양진아에게 묻고 싶었다. 정말로 그의 옆에 다른 여인이 있기를 바라는지, 고정수를 잊지 못해서 그를 이렇게 대하는 건 아닌지 말이다.“혁수야.”임우진은 애써 분노를 억누르며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쟤를 본채로 끌고 가서 어머니께 전해. 내 일에는 쓸데없이 신경 쓰지 마시라고.”“알겠습니다.”남혁수는 바닥에 주저앉은 춘애를 보고는 씩 웃더니 가차 없이 끌어냈다.“잠깐.”깜짝 놀란 양진아가 급히 막아섰다. 남혁수에게 저렇게 끌려간다면 그녀가 중간에서 고자질하고 모자 사이를 이간질했다고 시어머니가 오해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좋은 날이 없을 것이다.“왜? 넌 참 현명한 부인이야. 혼인한 지 사흘밖에 안 됐는데 벌써 나한테 첩을
결국 참다못한 시온이 방 안에 계집종이 없는 걸 보고는 양진아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씨, 마님께서 혹시 화나신 건 아니겠지요?”‘어떻게 사람을 한 시진이나 기다리게 할 수 있어? 이건 그냥 며느리를 못살게 구는 거잖아.’양진아는 시온에게 손짓하며 조용히 하라고 했다.한 시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밖에서 기다리게 한 것도 아니었고 앉아서 차도 마실 수 있었다.예전에 김경자에게서 규율을 배울 땐 하루 종일 서 있어야 했다.김경자가 잠들면 옆에서 지켰고 김경자가 식사하면 음식을 집어주었다. 하루 종일 녹초가 되도록 김경자에게 시달렸지만 결국 돌아오는 건 고정수의 냉대뿐이었다.지금 이선화는 그녀를 내버려 두고 있기에 괴롭힘과는 거리가 멀었다.안방, 이선화는 침상에 기대앉아 눈을 반쯤 감고 나지막이 물었다.“아직 있느냐?”윤 어멈이 부채질을 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직 있습니다. 게다가 짜증이라곤 전혀 내지 않고 있어요. 아무리 봐도 작은 마님은 성격이 물렀어요. 춘애가 마님 곁에 있던 몸종이라 내쫓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흥. 쟤는 충분히 하고도 남을 사람이다. 다만 다른 사람한테 밉보이고 싶지 않을 뿐이지.”이선화는 화가 채 풀리지 않았는지 말투도 퉁명스러웠다.“조금 더 내버려 두어라. 진심으로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질투하지 않을 리 없다. 지아비한테 첩을 들여준다는 건 쟤 마음속에 우진이가 없다는 뜻이야.”그녀는 어제 있었던 일을 이미 알고 있었다. 양진아가 하마터면 모자 관계를 이간질할 뻔해서 화가 나긴 했지만 양진아의 마음에 아들이 없다는 게 더 화가 났다.그렇게 반 시진이 더 지나서야 윤 어멈이 나와 양진아를 안으로 안내했다.문안 인사를 마친 후 이선화는 양진아를 앉히지 않고 바로 본론을 말했다.“어제 우진이가 화를 내고 나간 다음에 들어와서 밥은 먹었느냐? 잠은 잘 잤고?”이건 양진아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그녀는 시어머니가 임우진이 돌아오지 않은 것을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는
순간 멍해진 양진아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누가 누구 집에 혼수를 요구하러 갔다고?”시온이 목소리를 낮췄다.“외사촌 아씨의 시어머니 말입니다. 혼수를 요구하러 안씨 가문에 갔대요.”양진아는 그다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김경자의 인색하고 돈만 밝히는 뻔뻔한 성격을 생각하면 그런 짓을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하지만 경혜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가득했다.“어떻게 사돈한테 가서 혼수를 요구할 수 있어? 그분은 망신당하는 게 두렵지도 않은가? 고 귀공은 왜 또 그냥 내버려 두는지 이해가 안 가.”“초설이가 그러는데 고 귀공은 아직 어르신이 혼수를 요구하러 안씨 가문에 간 걸 모른대. 알게 됐을 때 고씨 가문 마님은 이미 혼수를 싣고 나갔어.”경혜가 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안씨 가문에서 줬단 말이야?”시온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양진아의 눈치를 살피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양진아가 웃으며 말했다.“어머니께서 준 것이겠지.”그러자 시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성을 냈다.“고씨 가문 마님은 원래 혼수를 요구하러 양씨 가문으로 오려 했었습니다. 우리가 그분 며느리의 혼수를 빼앗았다고 했는데 큰 마님께서 내쫓으셨고 하마터면 관아까지 움직일 뻔했답니다. 고씨 가문 마님은 얻어갈 수 없다는 걸 알고 나서야 안씨 가문으로 갔고 나중에 마님께서 따라가셨습니다. 초설이가 마님을 모시는 연지한테서 들었는데 마님께서 은 3천 냥을 줘서 고씨 가문 마님을 돌려보냈다고 합니다.”“얼마?”경혜는 큰 충격을 받은 듯 말했다.“우리 아씨가 시집갈 때 마님께서는 30냥도 주기 아까워하셨는데 외사촌 아씨한테 3천 냥을 주셨다고?”그 말에 모두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고 양진아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몇 년 동안 어머니가 꽤 많은 돈을 모아뒀구나. 그 돈을 전부 빼내야겠어. 안씨 가문에 보태지 못하도록.’“요즘 저택에 다른 일도 있었느냐?”시온이 계속 말했다.“셋째 도련님께서 앞쪽 별채로 옮기는 걸 보고 외사촌 도련님이 셋째 도련님
다음 날 아침 일찍 양진아는 본채로 가서 문안 인사를 한 다음 이선화에게 친정에 다녀오겠다고 말했다.이번에 그녀가 데려간 사람은 시온과 하선이었다.양씨 가문에 도착한 양진아는 먼저 본채로 가서 할머니께 문안 인사를 드렸다.양진아의 뒤를 따르던 시온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씨, 먼저 본채로 가시면 마님께서 또 뭐라 혼내실 겁니다.”양진아는 눈썹을 치켜올리고 시온의 손을 토닥이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서쪽 별채에 가서 네가 예전에 친하게 지냈던 벗들과 얘기 좀 나누고 있거라.”시온은 알겠다고 하고 막 떠나려다가 다시 돌아서서 물었다.“그럼 마님께서 쇤네한테 아씨에 대해 물으면 뭐라 대답할까요?”양진아는 입꼬리를 올리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어머니께서는 지금쯤 서쪽 별채에 계시지 않으니 안심하고 가거라.”양진아의 뒤를 따르던 하선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규율에 따르면 친정에 인사하러 갔을 때 가장 높은 어른에게 문안 인사를 하는 게 당연한데 시온이 왜 이렇게 묻는 거지? 게다가 이 시간이면 마님은 며느리로서 시어머니 옆에서 시중을 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하선은 속으로는 의아해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티도 내지 않고 양진아를 따라 본채로 들어갔다.두 사람이 본채에 들어가자마자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큰 아가, 이 차가 왜 이렇게 뜨겁냐? 날 데 죽이려는 것이냐?”이어서 조금 억울한 듯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님, 제가 마셔봤는데 뜨겁지 않았습니다.”“내가 마시느냐, 네가 마시느냐?”그 소란에 양진아는 눈웃음을 지으면서 하선과 함께 문 앞으로 걸어갔다.문 앞을 지키던 계집종이 양진아를 보고 급히 말했다.“큰 마님, 큰 아씨께서 오셨습니다.”방 안의 소리가 뚝 그치더니 이어서 장춘연이 웃으면서 양진아를 맞이했다.“큰 아씨, 어제 큰 마님께서 큰 아씨가 오늘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아침 일찍부터 기다리셨습니다.”양진아는 문지방을 넘어서자마자 어머니가 최영옥의 옆에 서 있는 걸 보았다.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방법
이 자리에 있는 여인들은 양호석의 생각을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최영옥은 며칠 전에 있었던 매질이 생각나서 웃음을 머금고 양호석을 격려했다.“호석이는 정말 착한 아이구나. 네 큰형과 둘째 형이 공부를 잘하니 형들에게 배우도록 해라. 양언규, 양성규, 너희는 서원에서 동생을 잘 돌봐야 한다.”“네, 할머니.”양언규는 예의 바른 소년이었다. 양진아의 눈치를 슬쩍 살피고는 공손하게 대답했다.양성규는 성격이 활발했다. 예전에 최영옥 앞에만 서면 응석을 부렸지만 오늘은 장난도 전혀 치지 않고 고분고분 대답했다.어린애들이 조용하고 얌전히 있자 최영옥과 한수경은 양진아를 쳐다보았다.양진아는 동생을 한 번 때렸을 뿐인데 영향력이 이렇게까지 클 줄은 몰랐다. 그녀는 멋쩍은 얼굴로 계집종에게서 상자 세 개를 받은 다음 동생들에게 건네주었다.“양언규, 양성규, 양호석, 이건 벼루 세 개다. 누나가 너희에게 주는 선물이니 열심히 공부해서 나중에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받도록 해라.”세 아이는 선물을 받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감사합니다, 누님.”양진아는 양호석의 앞으로 걸어가더니 가슴에서 옥패를 꺼내 양호석에게 걸어주며 다정하게 말했다.“호석아, 오늘은 네가 처음 서원에 가는 날이야. 이 옥패에 너에 대한 누이의 기대가 담겨있어. 또한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대도 담겨있으니까 꼭 열심히 공부해야 해.”양호석은 고개를 숙여 옥패를 내려다보았다. 서원에 가는 것에 대한 불만이 조금 줄어들긴 했지만 말 그대로 아주 조금이었다.양호석은 예전에 양진아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던 날들이 그리웠다.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시집간 후에 갑자기 간섭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는데 말이다.후에 어머니에게 항의했었는데 어머니가 할머니를 찾아갔다가 혼만 나고 돌아왔다. 양호석은 앞쪽 별채로 옮기고 싶지 않았지만 아무리 저항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어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런 날들이 대체 언제쯤 끝난단 말인가.양진아는 양호석이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양진아는 그대로 얼어붙었고 최영옥의 안색이 말이 아니게 어두워졌다. 한수경도 잔뜩 굳은 얼굴로 귀걸이를 뺐고 어린아이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들고 있던 상자를 내려다보던 양진아는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렸다.만약 안혜선이 양호석을 조금이라도 걱정했다면 한수경에게 잘 보이려고 이리 애를 쓸 필요가 있겠는가?하지만 안혜선의 눈에는 좋은 것만 보였고 그녀가 왜 이렇게 하는지는 생각하려 하지도 않았다.양진아는 상자를 도로 거두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농담도 참. 작은어머니가 왜 남입니까? 절 딸로 인정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이 선물도 원치 않으시겠네요.”그러고는 휙 돌아섰다. 그런데 안혜선이 그녀가 들고 있던 상자를 빼앗았다.“너는 애가 대체 왜 그래? 농담한 걸 가지고 이리 진지하게 받아들여서야 원. 작은어머니한테도 그리 좋은 걸 줬는데 나한테 박하게 굴 리가 있겠어?”안혜선의 모습에 최영옥뿐만 아니라 8살인 양호석조차도 어이없어했다. 양호석은 처음으로 어머니가 부끄럽다고 생각했다.안혜선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평범한 모양의 금비녀가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한수경의 것보다 귀하지 않았다.안혜선의 표정이 확 일그러지더니 상자 뚜껑을 닫고 양진아를 매섭게 쏘아보았다.“이것도 선물이라고 줘? 누가 네 친어미인지 모르겠구나.”그사이 양진아는 최영옥에게 선물을 건네고 있었는데 그 말을 듣고는 가볍게 웃었다.“선물을 주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일 뿐입니다. 귀걸이는 작은어머니께 어울려서 드린 거고 어머니께서는 금을 좋아하시니 금비녀를 드린 것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다시 돌려주세요.”안혜선은 머뭇거리다가 상자를 움켜쥐었다.“흥. 듣기 좋은 말만 하는구나. 내가 언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느냐? 내게 준 선물이 동서한테 준 선물보다 귀하지 않다고 했지.”“어머니, 선물은 돈으로 가치를 매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안혜선이 눈을 희번덕거렸다.‘말은 참 번지르르하게 잘
안혜선의 말에 방 안의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양진아는 밀려오는 고통과 무력감에 이를 악물었다.손녀의 무력감을 알아챈 최영옥이 미간을 찌푸렸다. 한수경은 눈치 빠르게 아이들을 먼저 내보내라고 했다.최영옥은 양진아의 손을 토닥이면서 진정하라고 했다. 그녀가 입을 열려는데 양진아가 먼저 말했다.“어머니, 인삼황기환이 너무 귀해서 저도 딱 한 상자밖에 얻지 못했습니다. 할머니께서 몸이 안 좋으셔서 할머니께 드린 거고요. 그리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사죄는...”양진아의 눈빛이 차가워졌고 목소리마저 서늘해졌다.“제후 저택과의 혼사를 정한 사람이 누군지 잊으셨습니까?”안혜선은 멈칫하다가 마지못해 말했다.“없으면 없는 것이지, 왜 이렇게 화를 내느냐. 진아 너 성격이 점점 사나워지는구나. 며칠 후에 네 큰 외숙모 생신이니 잊지 말고 가서 축하해드려라.”최영옥을 부축하여 밖으로 나가던 양진아는 그 말에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그녀의 큰 외숙모는 아직 마흔도 되지 않았지만 생일을 떠들썩하게 보내는 걸 좋아했다.양진아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염려하지 마십시오, 어머니. 큰 외숙모가 장수하시고 복을 누리시도록 큰 선물을 준비하겠습니다.”안혜선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아무도 그녀의 기분을 신경 쓰지 않았다.안혜선이 또다시 다른 사람을 난처하게 할까 봐 최영옥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식사했다. 최영옥이 아무 말이 없으니 다른 사람들도 입을 다물었다.재빨리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양진아는 아이들을 서원으로 데려다주려고 했다.“할머니, 이미 시어머니께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호석이를 서원에 데려다주겠다고요.”최영옥이 고개를 끄덕였다.“가보거라.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사람을 시켜서 알려야 한다.”양진아는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양진아가 떠나자 안혜선은 안절부절못하면서 계속 밖을 내다보았다.최영옥은 얼굴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몸에 벌레라도 붙어서 간지럽느냐?”명문가 출신인 최영옥은 평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사람들은 모두 여느 때보다 정색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지금 그들 앞에 서 있는 양진아는 애초에 호락호락하던 아씨가 아니었다.시집을 가서 진국후 저택이라는 든든한 뒷배를 차지하게 되었으니까.한편 안정미는 여전히 내키지 않아 불만을 토로했다.“지금 우릴 협박해? 우린 다 한 가족이야. 고모도 우리한테 엄청 잘해주시고. 대체 언니는 왜 그렇게 못하는 거야?”양진아가 실소를 터트렸다.“네 말대로라면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닌 양씨 일가에 있어야겠네?”“너...”“됐다!”박정숙은 안정미를 째려보고 다시 양진아에게 시선을 옮겼다.“진아 말이 맞아. 하지만 이제 성균이가 잡혔으니 우리 모두 단합해서 어떻게든 구해내야지. 진아 너도 이번 일을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양진아는 시선을 올리고 할머니께 답했다.“저는 단지 새색시일 뿐이니 책임지고 싶어도 그럴만한 능력이 못 돼요. 추월이가 돌아오거든 상세한 정황을 묻는 게 더 나을 겁니다.”다들 마땅한 방법이 없기에 초조한 마음으로 추월을 기다려야만 했다.안혜선은 자꾸 양진아만 흘겨봤다. 하루빨리 임우진의 마음을 사로잡고 제후 저택을 손에 넣으라고 쉴 새 없이 딸을 설득하려는 어머니였다.양진아가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더니 그녀는 심지어 딸에게 손까지 댈 기세였다. 다만 이때 청연, 청하가 바로 가로막았다.안혜선이 분노가 폭발하려 할 때 양진아가 차분하게 말했다.“어머니, 이 두 아이 모두 제후 저택 사람입니다. 제가 저택에서 쫓겨나길 원치 않으신다면 얼른 그 입 좀 다물어요.”안혜선은 놀란 기색이 역력하더니 끝내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그녀는 단지 딸아이가 친정에 보탬이 되길 바랄 뿐 제후 저택에서 쫓겨나는 건 원치 않았다.다만 그녀는 왜 양씨 일가의 상황이 특별하다는 걸 생각지 못했을까? 만약 양씨 일가에서 안혜선이 이렇게 못 미더운 사람이란 걸 알았다면 양 태부와 최영옥 모두 애초에 그녀를 남겨두지 않았을 것이다. 두 아이가 어머니를 여의게
박정숙은 슬픈 척하면서 눈가에 음모와 계략이 잔뜩 드러났다. 이 모습을 본 양진아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전에 대체 얼마나 멍청했으면 외할머니가 날 엄청 아껴주신다고 여긴 걸까?’다만 그녀는 전혀 티내지 않고 재빨리 다가가서 박정숙을 부축했다.“할머니, 괜찮으세요? 외숙모는 왜 울고 계세요? 어머니는 어디 가셨죠?”“진아야, 얼른 나 좀 구해줘.”이때 하진경이 불쑥 양진아에게 덮쳐들었다.“네 서방한테 말해서 외삼촌 좀 구해달란 말이다.”“...”양진아는 아무 말도 안 했다.“그 입 다물지 못할까! 관아가 무슨 진국후 저택에서 여는 줄 알아? 구하고 싶다면 구하게?”박정숙이 냉큼 쏘아붙였다.물론 그녀도 하진경과 똑같은 생각이지만 곧이곧대로 입밖에 내뱉을 순 없었다.“진아야, 방금 한 무리 위병들이 와서 네 삼촌을 잡아갔어. 우진이가 능력이 좋잖아. 어서 우진이더러 네 삼촌이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아보게 해줄래? 그래야 우리도 대안을 세우지!”양진아는 곧장 대답했다.“예, 할머니, 걱정 마세요. 지금 바로 사람 보낼게요.”“추월아, 혁수 찾아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해.”“예, 마님!”추월이 나간 후 양진아는 박정숙을 부축해서 일으켰다.“남혁수는 서방님을 모시는 가장 든든한 사람이에요. 분명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낼 거니까 숙모도 그만 울어요. 이번 일은 제가 꼭 책임지고 알아봐 줄게요.”양진아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박정숙은 문득 그런 그녀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여졌다. 양진아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안 변했지만 예전처럼 그리 쉽게 통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그녀가 실눈을 뜨고 사색에 잠겨있을 때 하인이 달려와서 안정미가 왔다고 전해드렸다.안정미는 아직 아버지가 잡혀간 줄 모른 채 침울한 집안 분위기에 흐느끼는 어머니까지 살펴보더니 다짜고짜 양진아를 질책했다.“언니는 꼭 어머니 생신날까지 이렇게 괴롭혀야겠어? 사람들이 언니를 불효녀라고 삿대질할까 봐 두렵지도 않은가 봐?”“아니면 진국후
안순자는 허겁지겁 본채로 달려갔다.그 시각 안씨 일가 어르신 박정숙은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있었는데 짙은 보라색 비단의 옷을 입고 같은 색상의 장식용 머리띠를 두른 채 근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실로 위엄이 넘치는 분위기였다.안순자가 홀로 어두운 표정으로 들어오자 박정숙이 물었다.“왜 혼자 오는 것이야? 진아는?”“그게... 큰 아씨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뭐라고?”박정숙이 탁자를 내리쳤다.“누가 돌려보낸 거야?”“다름이 아니라 아씨께서 정문이 닫혀있다고 그냥 가버리셨습니다. 게다가 함께 온 계집종이 돌아가서 제후 부인께 알리겠다고 했어요. 안씨 일가에서 큰 아씨를 능멸한다고요...”“뭐?”이때 안성균의 부인 하진경이 버럭 화를 냈다.“그냥 돌려보내면 어떡하란 말이냐? 걔가 가면 내 생일은 어쩌라는 거야?”박정숙이 옆에 앉은 안혜선을 보더니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너는 대체 딸을 어떻게 가르쳤길래 이 모양 이 꼴이니? 이제 하다 하다 내 앞에서까지 으름장을 놓으려고 해?”“정미 혼수를 거둬간 걸 네가 다시 돌려받았다니 뭐라 더 따지지 않았는데 오늘 또 보거라. 외숙모 생신연에 참석하라는 것도 이렇게 연신 거절하고 있잖느냐.”“네 눈엔 이 어미가 있긴 해? 우리 안씨 일가가 있긴 하냔 말이다!”안혜선이 황급히 대답했다.“어머니, 지금 당장 가서 이년을 따끔하게 혼내고 이리로 데려와서 사과하게 하겠습니다!”그제야 박정숙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계집종 두 명을 진아한테 보내거라. 그리고 양씨 일가에서 따라온 그 계집종들은 싹 다 돌려보내.”“오늘 그 계집종들이 이간질해서 이 사달이 난 거잖아. 어이가 없어서 원!”“예, 어머니.”다만 안혜선이 문 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문 지킴이가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왔다.“큰일 났어요! 관아에서 나리를 잡아갔습니다!”“뭐라고?”안혜선은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누굴 잡아가?”“나리요! 나리께서 금방 잡혀갔습니다.”문 지킴이는 거의 울상이 되었다.“위병들이 다짜고짜 대문을 부수고
임우진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대체 이건 무슨 말이야? 누가 진아 앞에서 뭐라고 말한 게야?”요 이틀 관아에 일이 바빠서 거의 매일 심야에 돌아오는 임우진은 양진아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줄곧 서실에서 지냈다.그러나 지난번 호되게 겁을 준 이후로 아무도 감히 그에게 가까이하지 못한다.설마 누가 또 그가 서실에서 쉬는 걸 보고 양진아를 화나게 하려고 일부러 꼼수를 부린 걸까?임우진이 오해하자 남혁수는 재빨리 해명했다.“아니요, 다름이 아니라 마님께서...”그는 양진아가 어떻게 안성균을 처리할지에 대해 낱낱이 전해드렸다.“마님의 이 방법은 저로서도 생각해낼 만한데 나중에 안성균이 알게 된다면...”“그야말로 야비한... 아니, 현명한 수단입니다!”임우진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자 남혁수는 얼른 태세를 바꿨다.임우진은 그를 힐긋 째려봤다.“얼른 가서 임 청지기더러 진아한테 무녀를 두 명 붙여두라고 하거라.”남혁수는 실로 어이없을 따름이었다.‘나리, 마님께서 언젠가 똑같은 수법을 나리께 쓸 거란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무예를 습득한 노비는 다소 구하기 어려웠다. 제후 저택이라 할지언정 무녀를 구하느라면 며칠은 걸릴 것이다. 하지만 임태원은 3일도 채 안 돼서 양진아에게 무녀를 보내드렸다.양진아는 마침 안씨 일가로 가려던 참인데 청지기가 보내온 두 명의 무녀를 보더니 기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고맙구나.”안 그래도 어멈을 몇 명 데리고 갈까 고민하던 참인데 마침 무녀를 보내왔으니 너무 다행이었다. 양진아의 어머니부터 시작해서 외할머니까지 다들 막무가내인 사람들이고 큰외숙모는 덩치 큰 체구에 인성이 나쁘기로 소문났다.전에 계집종을 데리고 갔을 때 감히 찍소리도 못 냈는데 이번엔 무녀라서 한시름을 놓았다.임태원이 그녀에게 답했다.“나리께서 친히 분부하신 일입니다. 마님이 걱정되어 무녀를 보내드린 겁니다. 마음에 안 든다면 제가 또 가서 물색해볼게요.”‘임우진이었어?’‘요즘 쭉 바쁜 것 같던데 보양식이라도 만들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임우진은 다음날 바로 남혁수를 양진아에게 보냈다.양진아는 앞쪽 별채에서 남혁수를 만난 후 바로 그에게 안씨 일가를 조사하라고 분부했다.“우리 외삼촌 안성균은 공부에서 하급 관리로 일하고 있다. 너는 가서 그자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법도를 어긴 일이 있는지 조사해 보거라. 하나도 빠짐없이 인증, 좌증 전부 조사해내야 할 것이야.”남혁수는 충격에 휩싸인 채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이때 양진아가 눈썹을 치켰다.“무슨 문제라도 있느냐?”“아닙니다! 분부 받들겠습니다.”그는 놀란 마음을 달래고 공손하게 대답했다.“반드시 이른 시일 내로 조사를 마치겠습니다.”양진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보냈다.남혁수는 임우진의 지시를 받은 터라 아주 열심히 나섰다. 양진아가 임우진의 마음속에서 어떤 비중을 차지하는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아니까.3일도 채 안 될 사이에 그는 안씨 일가에 관한 모든 일을 낱낱이 조사하여 양진아에게 보고했다.양진아가 문서를 꼼꼼하게 훑어보았고 남혁수가 옆에서 설명을 이어갔다.“마님, 안성균의 만행은 전부 여기에 적혀있습니다. 대부분 나쁜 성분의 물건을 좋은 물건으로 눈속임해서 거래했고 본인이 직접 도맡은 처사를 두 번씩이나 사고를 냈습니다. 상관은 그자가 양씨 일가에서 추천한 사람이라고 최대한 체면을 봐준 것 같습니다.”“그자의 동료들도 찾아가 보았는데 다들 그자와 함께 일하길 꺼렸지만 안씨 일가의 체면을 보고 참아온 것 같더라고요.”그는 말하다가 불현듯 양진아가 안씨 일가를 언급할 때 표정이 떠올라 한마디 덧붙였다.“사실 이것들은 다 큰 문제가 아닙니다. 단속만 잘한다면 큰 사고는 면할 테지요.”이에 양진아가 시큰둥하게 쏘아붙였다.“안성균의 성격에 큰 사고를 빚을 일이 없다는 말이냐?”남혁수는 목을 움츠리고 감히 말을 내뱉지 못했다.“사람 한 명 보내서 안성균의 만행을 적발하고 체포한 뒤 내 소식을 기다리거라. 잘 들어! 이번 일은 제후 저택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임우진이 처가에 손을 댄 일이 알려지기라도 하
“들라 하라!”임우진은 곧장 한마디 더 보탰다.“앞으론 마님의 부탁이라면 제때 나에게 알려야 한다.”“예, 나리!”하선은 밖에서 반나절이나 기다렸다. 임우진이 양진아 때문에 화나서 일부러 그녀를 밖에 세워둔 줄 알았는데 모사 두 분이 서실에서 걸어 나왔다.‘내가 괜한 오해를 했네!’서실 안에서 임우진은 하선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일이더냐?”하선은 분명 마님께 남혁수를 빌려오라는 분부를 받았지만 이토록 중요한 일은 반드시 나리께서 직접 마님을 찾아가 상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녀는 공손한 말투로 말했다.“마님께서 찾으십니다, 나리.”“무슨 일로?”임우진이 눈썹을 치켰다.“그건 잘 모르겠습니다.”“알겠다. 지금 바로 간다고 전하거라.”하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인사를 올린 후 자리를 물러났다.한편 임우진은 마음이 살짝 복잡해졌다.‘설마 내가 화난 걸 알고 달래주려는 거야?’‘이번엔 절대 쉽게 용서치 않아!’그는 양진아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정성껏 일정을 짜놓았지만 결국 고정수의 소식 때문에 모든 게 물거품이 되었다. 여기까지만 생각해도 마음이 한없이 식어갈 따름이었다.임우진은 격하게 갈등하다가 마침내 뒤쪽 별채로 갔다.그 시각 양진아는 하선의 말을 듣고 멍하니 넋을 놓았다. 임우진이 설마 남혁수를 빌려주기 싫어서 이러는 걸까?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임우진은 이렇게까지 속 좁은 남자가 아니니까. 고정수를 조사해보라고 해도 거절, 남혁수를 빌려서 안씨 일가를 조사해보려고 해도 거절하는 게 과연 무슨 경우란 말인가?한창 생각에 잠겨있을 때 문 앞에 있던 계집종이 청아한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인사를 올렸다. 양진아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임우진은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걸상에 앉았다.“그래, 무슨 일로 부른 것이냐?”양진아는 잠시 침묵했다. 일부러 이러는 건지 아니면 정말 남혁수를 빌려주기 싫어서인지 몰라서 마지못해 질문을 건넸다.“서방님, 남 호위를 잠시 제게 빌려줄 수 있나요?”임우진의 안
양진아는 고씨 일가에서 발생한 일을 전혀 모른 채 안씨 일가에서 보낸 청첩장을 받고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이때 경혜가 옆에서 살갑게 말했다.“이건 청지기가 보내온 거라 큰 마님은 몰라요.”“모르시길 다행이지. 내가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잖아!”양진아는 화나서 청첩장을 내팽개쳤다.“제 주제를 알아야지, 어딜 감히 나더러 같잖은 관원 부인의 생신연에 참석하라고 하는 것이야? 뻔뻔스러운 것!”청찹장에는 양진아더러 외숙모의 생신연에 참석하라고 초대하는 내용이었다.청지기가 중도에 가로채길 다행이지 본채까지 넘어갔더라면 그녀는 시어머니께 무슨 오해를 받을지 모른다. 이제 슬슬 주제 넘치게 머리 꼭대기로 기어오른다고 여길 수도 있다.“노여움 푸세요, 마님. 그럼 이 초대에는 응하시겠습니까?”“가야지! 아주 푸짐한 선물도 해드릴 거야!”양진아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그녀가 안씨 일가를 한방에 기선제압하지 않으면 이 사람들은 아마 안혜선을 쥐락펴락하듯 그녀도 쉽게 조종할 수 있을 거로 여길지 모른다.문제를 해결하려면 한방에 급소를 찔러야 한다. 안씨 일가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 자가 바로 3대 독자 안현조이지만 실세는 양진아의 큰외삼촌 안성균이다.안성균은 현재 공부에서 하급 관리로 일하고 있어서 벌어들인 은냥으론 겨우 생계유지를 하는 처지였다. 부귀영화를 누리는 건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그래서 안씨 일가는 양씨 일가의 피를 쪽쪽 빨아먹고 있다.하지만 욕망이란 골짜기는 메우기가 어려운 법이고 안성균 그 인간은 술과 여자, 도박 어느 하나 손을 대지 않은 게 없다. 양진아가 전생에 들었다시피 안성균이 벌어들인 돈은 죄다 더러운 돈이라고 했다.여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뭔가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 하선을 불러왔다.“서방님이 돌아왔는지 가보거라. 만약 돌아왔으면 내가 혁수를 잠시 빌리고 싶다고 전하거라.”하선이 분부대로 나가서 알아보았더니 제후 나리가 이미 돌아온 상태였다.나리께서 서실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마당으로 향했다.
“제가 생각이 짧아서 서방님을 난처하게 했군요.”양진아가 먼저 사과했다.그녀가 조바심 때문에, 전생의 일들이 떠올라서 추태를 부리고 말았다.이번 생은 임우진과 혼인했으니 전생과는 확연히 다른 길을 걸을 것이다.‘양씨 일가와 안씨 일가를 완전히 떼어놓을 거야!’안정미와 고정수가 아무리 그녀를 해치고 그녀의 집안까지 해치려 해도 전생처럼 쉽게 해낼 수는 없다.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저택까지 돌아갔다. 저택에 도착한 후 임우진은 곧게 서원으로 향했다.양진아는 그제야 알아챘다. 이 남자가 삐졌다는 것을 말이다.‘내가 뭘 잘못했지? 고정수 한번 조사해달라고 한 게 전부인데? 나도 다 저택과 친정을 위해서 그런 거잖아. 대체 내가 무슨 사심을 부렸다고 이러는 거야?’양진아는 어리둥절한 채 하선에게 질문을 건넸다.“혹시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한 게야?”하선과 추월은 양진아의 시중을 드는 요 며칠 동안 애초의 조심스러웠던 태도서부터 이제 여유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마님의 성격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었다.마님은 제후 나리에 대한 감정이 그다지 깊어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서방님보다 시어머니를 더 중히 여기는 것 같았다.마님은 제후 나리와 서로 공경하는 부부로 지내고 싶어 하지만 제후 나리가 얼마나 거만한 사람인가?수많은 부잣집 따님들의 연모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마님과의 혼약을 지키고 단 한 번도 파혼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그런 제후 나리의 마음도 몰라주고 마님께서 무심한 태도로 임하고 심지어 하루가 멀다 하게 고 귀공을 언급하고 있으니 기분이 언짢아질 수밖에 없었다.다만 이런 것들은 계집종인 그녀가 말할 자격이 없다.하선은 고개를 푹 떨구고 공손하게 말했다.“소인은 모르겠습니다. 본채로 가시겠습니까, 마님?”양진아는 머리를 끄덕이고 이 일을 뒤로 한 채 본채로 향했다.그 시각 안정미는 백미가 문 앞에서 계집종과 함께 겨우 마차를 한 대 불러왔다.그녀는 고씨 저택으로 돌아간 게 아니라 양씨 일가로 향했다.서쪽
“왜 그렇게 웃는 것이야?”양진아는 고개를 내젓고 임우진과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한편 두 여자를 따라 나온 안정미는 모두에게 버림받았다. 정나현은 마차를 타고 떠나갔고 양진아도 딱히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안정미는 결국 백미가 문 앞에 덩그러니 남게 됐다.안달이 났던지 그녀가 대뜸 양진아를 향해 소리 질렀다.“언니, 잠깐만! 나 좀 실어줘!”다만 양진아는 뒤돌아보지 않고 마차에 올랐다.안정미는 원망 어린 눈빛으로 몇 걸음 나아갔다.“언니...”“안 낭자가 기억력이 안 좋다면 내가 대신 안씨 저택에서 했던 말을 되새겨줄 수도 있소.”임우진이 고개를 돌리고 그녀에게 차갑게 쏘아붙였다.“나는 여자를 안 때린다고 한 적이 없거늘.”순간 안정미는 사색이 되어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진국후 저택의 마차가 멀어져가는 걸 묵묵히 지켜봐야만 했다.마차 안에서 임우진은 기분이 언짢은 양진아를 바라보며 물었다.“혹 저자 때문에 기분이 나쁜 것이냐?”이에 양진아가 머리를 흔들었다.“아니요. 저는 단지 나현 군주가 왜 정미랑 가깝게 지내는지가 의문입니다.”정빈 대군은 황제와 이복형제 사이이고 둘은 어려서부터 태후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자라온지라 유독 돈독한 정을 쌓고 있다.정빈 대군은 황제의 왕위계승에 중요한 역할을 했기에 당연히 황제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고 초월적인 지위를 갖고 있다.하지만 안씨 일가와 정빈 대군 저택의 문벌은 천지 차별이다. 바로 이 때문에 양진아가 몹시 의아한 것이다.전생에도 안정미와 나현 군주가 이토록 가깝게 지냈을까?아쉽게도 전생에 양진아는 고씨 일가에 갇혀서 외부 소식을 접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리하여 환생했지만 딱히 유용한 정보를 얻지는 못했다.“여태껏 몰랐느냐? 고정수는 정빈 대군의 길을 걷고 있어. 지금 호부 금부사에서 사관 직을 맡고 있지.”임우진이 담담하게 말했다.“고정수는 나름 유능한 인재이고 정빈 대군 또한 예의 바르고 고결한 성품을 지녀서 고정수를 중히 여기고 있단다. 그러니 나현 군주가 안정미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