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준혁과 송지음이 만난다는 사실은 빠르게 화인 그룹에 퍼지게 되었다.신유리는 이제 더 이상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았다. 그녀는 매일 5분 일찍 출발하며 평범한 직원들처럼 공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었다.다른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송지음이 지금 출퇴근을 서준혁과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오늘 아침에 그녀는 교통사고를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신유리는 평소보다 조금 늦게 출근하게 됐다. 꼭대기에 도착하자, 그녀는 마침 송지음과 서준혁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송지음은 서준혁의 팔짱을 끼고 있었고, 발랄하고 귀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신유리를 마주친 그 순간, 그녀는 당황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내 더 아름답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신유리에 인사를 했다. “유리 언니, 좋은 아침이에요.”신유리는 송지음이 서준혁의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을 보며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좋은 아침.”송지음은 그제야 자신이 아직도 서준혁의 팔짱을 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혀를 내밀더니 바로 손을 놓으며 장난스러운 말투로 서준혁을 쳐다보았다. “유리 언니가 봐버렸어요. 이제 어떡해요?”서준혁은 눈썹을 들썩이며 신유리를 쳐다보았다. “보고 싶으면 보라 그래.”신유리는 꽁냥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고, 하이힐이 매끈한 바닥과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멀리 떨어졌음에도 여전히 애교 가득한 송지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준혁 씨.”하지만 점심때가 되었을 때, 송지음은 좋지 않은 얼굴로 서준혁 사무실에서 나왔다. 그녀는 신유리의 앞에 멈춰서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유리 언니, 서 대표님이 찾으세요.”신유리는 서준혁이 자기를 무슨 일로 찾는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서준혁이 대부분의 일들을 전부 송지음에게 넘겨버렸으니까.꼼짝도 않는 그녀의 모습에 송지음은 참지 못하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서 대표님이 기다리고 있어요.”신유리는 클라이언트의 메일에 답장하고
신유리가 서씨 저택에 도착했을 때 저녁 식사는 막 시작되고 있었다.그녀는 들고 온 선물을 하인에게 건네주며 이미 자리에 앉아있는 서준혁을 쳐다보기 시작했다.서준혁은 고개를 숙인 채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인기척에도 그는 단지 눈만 까딱할 뿐이었다.서창범은 무척이나 엄숙했다. 그는 인상을 쓰며 그녀에게 말했다. “왜 이제 왔어. 준혁이는 너 안 온다고 하더라.”“차가 좀 막혀서요. 아저씨, 생신 축하드려요.” 신유리의 얼굴에는 아무런 빈틈도 없었다. 그녀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서준혁의 옆에 남은 빈자리에 앉았다.앉자마자 그녀는 서준혁과 송지음이 연락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그 모습에 순간 그녀의 눈빛이 얼어버렸다.서준혁은 그녀의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핸드폰을 다시 책상 위로 엎어놓았다.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더니 두 사람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네가 안 올 줄 알았어.”“네가 지하 주차장에서 기다리라고 했잖아.” 그녀가 대답했다.그 말에 서준혁은 잠시 멈칫했다. “까먹었어.”그의 말투는 무척이나 담담했다. “비 올 것 같아서, 먼저 지음이 집에 데려다줬어. 어차피 너도 차 있으니까.”“내 문자에 답장 안 했잖아.” 신유리는 시선을 내리깔며 눈 속에 담긴 생각을 숨겨버렸다.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단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손에 힘이 들어갈 뿐이었다. “전화도 안 받아서 난 너한테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어.”송지음을 집에 데려다줬구나.서창범의 생일, 저택에는 많은 친척들이 찾아왔다. 하정숙은 손님 응대하는 게 바빠서 신유리의 트집을 잡을 시간이 없었고, 신유리도 당연히 먼저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았다.누군가 서준혁의 혼사에 관심을 가지는 말에, 하정숙은 그제야 딱히 내키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신유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무심하게 한마디 내뱉었다. “쟤? 아직 멀었어. 결혼식장 들어가기 전에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친척은 이 상황이 조금 의아했다. “두 사람, 만난 지 꽤 오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말이었다. 신유리가 팔찌를 질려한다는 건지, 서준혁이 신유리를 질려한다는 건지 말하기 어려웠다.떠날 때, 서창범은 하정숙과 함께 대문에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서준혁은 단번에 신유리의 차를 보게 되었다. “안 데려다줘도 되지? 마침 저녁에 일이 있어서.”애초에 서준혁의 차를 타고 이곳에 온 것도 아니었다. 신유리는 입술을 오므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송지음 만나러?”“응.” 서준혁은 고개를 숙이더니 핸드폰을 확인했다. “생리가 앞당겨져서 케이크가 먹고 싶데.”그의 말에 신유리가 대답했다. “정말 관심이 엄청나네.”서준혁은 눈썹을 들썩였다. “너한테도 부족하지는 않았어.”맞는 말이다.솔직히 말하면 신유리가 서준혁을 따라다닌 몇 년 동안, 그는 그녀에게 무척이나 통이 컸다.신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서창범이랑 인사를 하고는 혼자 차를 몰아 저택을 떠났다.다음날 회사에서 송지음을 만나게 됐을 때, 그녀의 목에는 다이아 목걸이가 걸려있었다.신유리는 눈썰미가 좋았다. 그녀는 그 목걸이가 서준혁이 좋아하는 브랜드의 신상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점심시간, 신유리는 물을 받기 위해 탕비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안에서 전해지는 말소리를 듣게 되었다.송지음의 말랑하고 귀여운 목소리가 특히 더 잘 들렸다. “다들 장난치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어떡해요.”“게다가.” 조금 고민이 섞인 말투였다. “유리 언니가 알면 엄청 화내겠죠?”신유리의 이름에 주위 사람들은 더 이상 그녀를 놀리지 않았다. 신유리는 화인에서 꽤 좋은 평판을 가지고 있었다.신유리는 문 앞에서 잠깐 서 있더니, 이내 커피를 사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오후, 그녀는 평소처럼 출근했고 프로젝트팀은 신유리에게 자료 하나를 올려다 주었다.자료를 확인하던 신유리의 이마는 점점 더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결국 서류를 다시 덮으며 말했다. “도표가 너무 난잡하네요. 다시 하세요.”
신유리는 잠시 멈칫하더니 가방을 내려놓고, 외투를 벗었다. 그녀의 말투는 평소와 똑같았다. “송지음 대신 말 전해주러 왔어?”그것 말고는 서준혁이 이곳에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서준혁은 고개를 들더니 대답도 없이 그녀에게 물었다. “왜 이제 와?”신유리는 송지음의 도표를 고치는 것 때문에 평소보다 반 시간이나 늦게 퇴근했다.그녀는 몸에 있는 차가운 기운을 떨쳐내기 위해 따뜻한 물을 한 잔 받았다.서준혁은 여전히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소파에 앉아 긴 다리를 편하게 늘어놓으며 마치 이 집의 주인이라도 된 듯 나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신유리가 입을 열었다. “야근 좀 했어. 밖에 비도 오고 그래서 좀 늦어졌지 뭐.”“너 송지음 마음에 안들지.” 서준혁은 눈썹을 들썩였다. 확신이 가득한 말투였다.신유리는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순간 몸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녀는 송지음 얘기에 별로 흥미가 없었다. “네 마음에 들면 되는 거 아니야? 내 태도가 중요한가?”그녀의 말투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신유리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다른 볼일 더 있어?”그때, 탁자에 올려놓은 서준혁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고개를 숙여 핸드폰을 확인하더니 다시 고개를 들었다.서준혁은 평온한 눈동자로 신유리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바로 자신의 눈빛을 거두었다.그는 탁자에 올려놓은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에 답장을 하고는 다시 시선을 한 줌이 안 되는 신유리의 가녀린 허리에 멈추었다. 그는 풉하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무슨 일 때문인 것 같은데?”성인 사이에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 마음이 통하는 게 있었다. 게다가 두 사람은 몇 년 동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단지 신유리가 오늘 밤 집중을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창밖의 빗소리를 들으며 멍을 때리고 있었다.그 모습에 서준혁은 그녀의 허리를 꼬집으며 입가에 입을 맞추었다. 낮은 목소리가 마치 그녀를 달래주고 있는 것 같았다. “유리야, 협조 좀 해줘.”서준
신유리는 고개를 숙인 채로 서준혁의 말에 대답했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말라는 뜻이야. 그럴 필요 없으니까.”서준혁은 펜을 들어 시원시원하게 사인을 했고 이내 서류를 여자에게 건네주었다. 그의 얼굴에는 쓸데없는 표정이 전혀 없었다. “그래. 네가 걔한테 설명해 줘.”신유리는 그의 말에 응답하고는 서류를 들고 사무실을 나서려고 했다. 그때, 서준혁의 손에 들려 있던 펜이 멈칫했다. 그는 신유리를 불러세웠다.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송지음보고 오라고 해.”그 말에 신유리의 발걸음이 멈칫했고, 서준혁은 차갑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넌 이제 오지 마.”서준혁이 송지음한테 무슨 말을 한 건지, 다음날 신유리가 송지음을 다시 만났을 때 그녀의 얼굴에는 다시 웃음이 가득 차 있었다.서준혁의 팔짱을 끼며 그녀에게 인사하는 송지음의 눈빛에도 어제의 의심이 사라져 있었다.아직 어려서인지 송지음은 감정이라는 것을 숨길 줄 몰랐다. 마침 동기들끼리 서로 연애 문제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고, 다들 서로를 조금씩 놀리고 있었다.송지음과 서준혁의 일은 온 회사에 퍼지게 되었다. 신유리가 자리에 있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은근히 장난 몇 마디를 던지고 있었다.어제 서준혁에게서 다짐을 받은 건지, 송지음은 예전처럼 신유리를 피하고 꺼려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그 화제를 이어 신유리에게 말을 걸었다.“유리 언니, 남자 친구 생긴 거예요?”그 말에 마우스를 클릭하던 신유리의 손이 멈칫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송지음을 쳐다보았다. “서준혁이 그랬어?”“아니요.” 송지음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다시 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대표님은 언니 사생활이라고 했어요. 근데 왠지 그럴 것 같아서요.”송지음의 눈빛은 무척이나 솔직했다. 아무래도 신유리의 몸에 남은 흔적이 사라지진 않았으니까.신유리는 잠시 고개를 숙이더니, 곧이어 고개를 들어 담담한 눈빛으로 송지음을 쳐다보았다.그녀의 눈빛에는 떠보는 듯한 감정과 긴장감이 역력했다. 혹시라도 자기가 듣고 싶은 대답을 듣지 못하게 될까 걱
송지음은 고개를 숙이며 수줍음과 두려움이 섞인 말투로 말했다.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옆에 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야유하기 시작했다. “준혁아, 왜 그래. 왜 이렇게 잡혀 살아?”그 말에 서준혁은 무심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흑요석이 담긴 듯한 눈동자로 송지음을 쳐다보았다. 그의 말투는 조금 나른했다. “어리잖아. 내가 많이 아껴줘야지.”야유는 점점 더 커졌다. 그때, 누군가가 질문했다. “난 준혁이가 신유리 같은 스타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순식간에 룸은 조용해졌고, 송지음의 얼굴에 걸려있던 웃음도 그대로 얼어버렸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서준혁을 쳐다보았다.서준혁의 얼굴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는 나른하고 게으른 모습으로 눈을 깜빡이더니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좋아한 적 없어. 걔가 굳이 따라다닌 거야.”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방금 입을 연 사람이 바로 말을 보태었다. “그러게 말이야. 몇 년 지기 친구지만, 준혁이가 여자 때문에 전화까지 바꾼 건 이번이 처음이야. 제수씨, 당신이 준혁이한테 유일한 존재에요.”그 말에 서준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누구보고 제수씨래? 선 넘지 마.”웃고 떠들며 한바탕 소란이 지난 후, 갑자기 누군가 입을 열었다. “맞다, 연우진도 이따 온다던데. 준혁아, 우진이 귀국한 거 알고 있었어?”송지음은 궁금했는지 조용히 서준혁에게 물었다. “연우진이 누구예요?”서준혁은 가볍게 대답했다. “아무도 아니야. 그냥 친구.”송지음은 고분고분하게 대답하고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친구라고 말하는 서준혁의 안색이 별로 좋지는 않았다.송지음은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이 말하는 착한 여자로 살았다. 그녀가 제일 잘하는 짓이 바로 착한 척하는 것이었다.하지만.그녀는 옆에 앉아있는 서준혁을 몰래 훔쳐보았다. 심장 박동은 또 제멋대로 빨라지기 시작했다.그녀의 조건은 사실 서준혁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옆에는 신유리처럼 훌륭한 여자도 있었다.하지만 신유리 생각을 할 때마
서준혁의 시선은 신유리의 몸에 멈추었다. 그녀는 태연하게 말했다. “오는 길에 차가 망가졌어.”그녀는 서준혁이 건넨 술잔을 들며 무심하게 말했다. “술 마시고 싶은 거면 내가 대신 마셔줄게.”“대신 마셔준다고?” 서준혁은 말꼬리를 잡으며 검은 눈동자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의 맡투는 조금 나른했다. “둘이 무슨 사이길래 신 비서가 대신한다는 거야?”그 말에 신유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서준혁의 말투에는 불쾌함이 가득했다.마침 그때, 줄곧 아무 말 없던 송지음이 갑자기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연우진 씨, 설마 그쪽이 유리 언니 남자 친구예요?”신유리는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그녀는 차가운 눈빛으로 송지음을 쳐다보았다. 막 입을 열려는 그때, 서준혁의 가벼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런 거야?”그는 깊은 눈동자로 신유리를 쳐다보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유리 곤란하게 하지 마.” 연우진은 여전히 다정했다. 그의 얼굴에는 봄바람 같은 웃음이 걸려있었다.“그냥 친구야.” 그가 신유리 대신 상황을 무마했다.연우진이 나서자 다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입을 다물었다.신유리는 몸을 일으키더니 사람들에게 말 한마디를 하고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연우진과 만나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다. 그는 방금 출장에서 돌아왔고, 파티가 있다며 같이 가겠냐고 그녀에게 물었다.그의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신유리를 그를 따라왔다. 그가 말한 파티가 서준혁네 파티일 줄은 정말 몰랐다.그녀는 복잡한 마음으로 손을 씻었다. 그녀는 밖에 잠깐 앉아 있다 연우진에게 먼저 간다고 문자를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국 화장실 문을 나서자마자 누군가의 의해 가로막히게 되었다.서준혁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로 핸드폰 화면을 보고 있었고, 신유리가 나오자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연우진이랑 다시 잘해볼 생각이야?”연우진이 신유리를 맘에 두고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서준혁 무리에서 그나마 신유리가 대화를
신유리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럴게.”송지음은 서준혁을 다시 게임으로 끌고 갔고, 그도 그런 그녀를 따랐다. 그는 신유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바를 나선 후, 신유리는 고개를 돌려 연우진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아까는 고마웠어.”연우진의 말투는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나한테 무슨 예의를 차려. 집에 데려다줄게.”“됐어…” 신유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우진이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는 하늘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 나갔다. “오늘 밤에 폭우 내린데. 여자 혼자는 너무 위험해.”흔치 않은 그의 강압적인 태도에 신유리도 거절하기가 애매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연우진의 차에 올라탔다.연우진은 선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는 신유리를 집에 데려다준 후,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바로 자리를 떠났다.신유리는 그의 외투를 들고 있었다. 그 옷은 오후 차가 견인될 때 실수로 옷이 더러워져 연우진이 빌려준 것이었다.깨끗하게 씻은 후에 그에게 다시 돌려줄 생각이었다.저녁 내내 비가 부슬부슬 내리더니, 한밤중이 되자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천둥 번개가 싫었던 신유리는 미리 창문을 닫아버렸다.단지 새벽 2시가 되었을 때, 도어락 소리가 유난히 더 선명하게 들릴 뿐이었다.그녀는 아직 잠에 들지 않았다. 울려 퍼지는 소리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고, 그녀는 이내 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서준혁은 이미 외투를 벗었다. 그는 소파에 앉아 자연스럽게 본인이 마실 물을 따르고 있었다.그의 몸에는 여전히 바깥의 차가운 한기가 묻어있었다. 그 모습에 신유리는 잠시 멈칫했다. “왜 왔어?”서준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컵을 내려놓았다. 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손을 뻗어 셔츠 단추를 풀며 자신의 아름다운 몸을 드러냈다.곧이어 그는 아무렇게나 벨트를 벗었고, 바지 단추도 마음대로 널브러지게 했다.그는 그제야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갈아입을 옷 좀 가져다줘. 샤워할 거야.”신유리의 집에 서준혁의 옷이 있긴 했다. 모두 그가 예전에 두고 간 옷들이었다. 신유리
태송백은 신연을 향해 내리치려 했다.태지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신연을 밀어내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태송백은 태지연을 보더니 급하게 행동을 멈췄다.그러나 이미 큰 힘을 실은 탓에 갑자기 멈추려 해도 늦었다. 그는 급히 방향을 틀었지만 결국 태지연의 어깨에 맞았다.뼈가 부딪히는 고통에 태지연은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팔을 타고 내려오는 통증에 그녀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더니 옆으로 쓰러지며 머리를 부딪혔다. 곧이어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바닥에는 유리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신연이 반응했을 때 태지연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쥐 죽은 듯 고요한 방 안에는 태지연의 신음소리만 울려 퍼졌다.“아파...”신연의 눈에는 깊고 검은 파도가 일었다. 그는 태지연의 곁에 무릎을 꿇은 채 다급하게 소리쳤다.“성한빈, 당장 구급차 불러! 지금 당장!”그는 태지연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다칠까 봐 두려웠다.신연은 이내 고개를 들어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태송백을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태송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다가왔다.“태지연... 지연아...”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아까의 광기 어린 얼굴은 온데간데없어진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태지연은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태송백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오빠... 내 말부터 들어줄래?”태송백은 숨을 죽이며 말했다.“그래, 네 말 들을게. 오빠가 나빴어. 오빠가 미안해... 지연아, 나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알아. 오빠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오빠는 항상 나를 제일 아껴줬잖아.”태지연은 여전히 고통에 시달린 채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갔지만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낮게 말했다.“오빠, 난 신연 편을 들고 싶은 게 아니었어. 그저 엄마 아빠가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야. 우리 가족이 다시
태송백은 한층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연을 노려봤다. 한참 후에야 이를 악문 채 말을 내뱉었다.“뒤에서 숨고만 있다가 부하들만 짖게 놔두더니 이제야 직접 나선 거냐? 나한테 기회를 준다고? 신연, 너 진짜 죽을 때까지 정신 못 차리는구나?”태송백은 태지연을 흘겨보며 비웃음을 흘렸다.“너 내 동생을 완전히 속였잖아. 지금도 태지연이 여기까지 와서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고.”태송백의 말은 가시처럼 날카롭게 태지연의 가슴에 박혔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며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오빠, 제발 진정 좀 해요.”“태지연, 넌 입 다물어. 계속해서 그 새끼 편을 들면 넌 더 이상 내 여동생도 태씨 가문의 딸도 아니야!”태송백은 격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우리 태씨 가문이 이 꼴이 된 건 전부 그 새끼 때문이야! 아버지께서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데다 나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숨어 다녀야 하지. 내가 밖에서 무슨 꼴을 당하는지 알기나 해? 모든 게 다 저 새끼 때문이라고.”“엄마는 창녀에 아빠는 손님이고. 참, 너도 신유리 알지? 걘 얼마나 똑똑한지 저 새끼랑 상종도 안 해. 너 혼자 보물인 양 여기고 있는 거야.”태송백은 쌓여 있던 울분을 쏟아냈다. 둘 사이의 갈등은 이미 단순히 말로 풀 수 있는 정도가 아닌 자존심 문제였다.그는 반드시 신연에게 자신이 당한 굴욕을 몇 배로 돌려주겠다고 결심했다.태송백은 한 마디 한 마디에 독설을 내뱉었다.“태지연, 넌 더럽지 않냐?”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듯 제자리 굳어버린 채 태송백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오빠, 그만해요... 제발 그만 말하세요.”그녀는 차마 신연을 돌아볼 용기도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목이 바싹 말라오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신연 앞을 막아서며 무시해 버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치 나무 말뚝에 묶인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태송백의 독설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악의 어린 말들이 허공에 울려 퍼지
성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둘째 도련님께서 문이 열릴 때마다... 전에 우리 쪽 사람들이 다친 적도 있었습니다.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신연은 바닥에 부서진 유리 조각들을 흘겨보더니 무표정으로 말했다.“아직도 부술 게 남아있어?”성한빈은 순간 안색이 굳어졌다.태지연은 그들의 대화를 신경 쓰지도 못한 채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잠시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어? 오빠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신연은 눈을 내리깔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약속하듯 말했다.“아무것도 안 할게. 믿어줘, 응?”“아직 불안정할 텐데. 너희 둘만 남겨둘 수 없어.”“걱정 마.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그래도 내 오빠잖아. 어렸을 때부터 나를 가장 아껴주던 사람이야.”태지연은 신연을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물건을 너한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나야말로 누구보다도 이 일이 빨리 끝나길 바라고 있어.”“우리도 빨리 예전으로 돌아가자. 아무리 예전처럼 되지 못하더라도 이 일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태지연의 목소리는 다소 지친 듯했다.“연아, 나 정말 너무 힘들어.”신연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 지나서야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한번 얘기해 봐.”태지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신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근데 나가진 않을 거야. 보다시피 최근 태송백 상태가 불안정해. 단둘이 두는 건 불안해서 안 되겠어. 여기서 기다릴게.”현관에서는 안쪽 상황을 볼 수 없었다.그녀는 신연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걸 알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안쪽은 더 엉망이었다. 바닥에는 온갖 유리 파편들과 장식품들이 흩어져 있었다.태송백은 원래 성격이 좋지 않은 편인데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녀는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해 가며 간신히 거실까지 다가갔다. 순간 태송백의 격앙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내가 나가라고
다음 날 아침, 신연은 평소처럼 아침을 준비해 두었다.테이블 위에는 더 이상 초콜릿케이크가 보이지 않았고 신연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그는 우유 한 잔을 따라 식탁 위에 놓더니 입을 열었다.“얼른 씻고 아침 먹어. 나 오늘은 일이 있어서 점심에 못 올 거야. 점심은 호텔에서 보내줄 거야.”태지연은 순간 마음이 움찔하며 신연에게 물었다.“회사? 아니면 어디?”신연은 동작을 멈추더니 속눈썹을 내리깐 채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응, 회사.”“연아.”태지연은 의자 등받이를 꽉 잡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어젯밤 한 말은 전부 진심이야. 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절대 용서 못 해.”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라앉았고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신연은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지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나중에 내가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조금 이기적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어젯밤에 들은 말로만 신연이 정확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태도를 봐서는 만약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태송백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태지연은 손에 힘을 풀더니 힘겹게 신연 곁으로 다가갔다.“연아, 원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대신 찾아줄게.”순간 신연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목젖을 울렁이며 태지연을 내려다보았다.“내가 물건을 찾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태지연은 잠시 멈췄다가 대답했다.“오빠가 말했어. 자기 손에 너한테 아주 중요한 게 있다고. 연아... 내가 찾아줄게. 내 오빠잖아, 내가 말해볼게.”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고 목소리도 다소 잠겨 있었다.순간 머릿속이 약간 혼란스러워졌다.신연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태지연은 말을 마치고 신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신연은 눈을 내리깐 채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일으켜 세웠다.“네가 좋아하는 케이크 사 왔어. 얼른 먹어봐.”태지연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신연을 쳐다보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되레 단단히 잡혔다.신연은 식탁 앞으로 가서 조심스레 케이크 상자를 열고는 라즈베리 초콜릿케이크를 꺼냈다.태지연이 가장 좋아하는 가게의 케이크였다. 평소에도 그녀는 신연한테 퇴근길에 케이크를 사 오라고 조르기도 했었다.하지만 그녀는 가장 즐겨 먹던 케이크를 보면서도 전혀 입맛이 돌지 않았다.그녀는 태송백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오빠가...”그러나 신연이 바로 말을 끊어버렸다. “케이크 가게 주인이 또 둘째를 낳았대. 너도 기억하더라. 시간 되면 한번 들르라고 하길래 내가 대신 대답했어.”“신연...”“맛 좀 봐.”신연은 케이크를 그녀 앞에 건네며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태지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지금 먹고 싶지 않아. 연아, 다시는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러니까 솔직하게 대답해 줘. 네가 오빠를 데려갔어?”태지연의 말이 끝나자 거실에는 침묵만이 흘렀다.신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이것뿐이야?”태지연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뱉어냈다. “대답해.”신연은 말했다. “일단 케이크부터 먹어봐.”태지연은 움직이지 않고 애써 차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녀는 이 상황에 점점 지쳐갔다.순간 가족과 신연 사이에서 고민하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연과 가족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길 바랐다.하지만 그녀는 이제야 그토록 바라던 작은 소망이 애초에 이룰 수 없는 꿈이었음을 깨달았다.신연과 태씨 가문은 이미 끊어진 실처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사이였다.모두가 이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직 그녀만이 되돌릴 수 있다는
태은정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그녀를 지치게 했다.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연아, 신연이 송백을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고 있어?”태지연은 잠시 멍해 있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언니, 왜 항상 무슨 일만 생기면 내가 무조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마치 사람들이 모든 걸 나에게 털어놓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태지연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사실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유일하게 그녀뿐이었는데 말이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태은정은 멈칫하더니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태지연을 한참 바라보더니 갑자기 반응하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피곤한 듯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그래.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미안해. 지연아, 내가 너무 급했나 봐.”태은정은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눈썹을 만지작거렸는데 이는 태은정이 곤란할 때 나오는 작은 습관이었다.태지연은 고개를 저었다.“방금 신연이 오빠를 데려갔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태은정은 지금도 상황이 엉망진창이라고 느꼈다. 태송백은 이미 이틀째 연락 두절인 상태였고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닿지 않았다.전혜린과 태성민은 신연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태지연과도 연락이 닿지 않다 보니 한편으로는 부모님을 달래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태송백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연락을 돌려야 했다.게다가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문제까지 해결해야 했다. 그녀는 외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도 이렇게 바쁜 적이 없었다.태은정은 한숨을 내쉬며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럼 신연이 요즘 뭐 하고 있는지는 알아?”태지연은 대답했다.“대부분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리고 나머지 시간엔 회사에 있을 거야.”그녀는 잠시 멈춘 후 덧붙였다.“근데 나도 확신할 수 없어. 보통 자세한 건 나한테 말하지 않
태지연은 마땅한 핑계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신연은 그녀에 대해 잘 알다 못해 속마음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였다.태지연은 눈물을 흘리며 처량한 모습으로 바라봤다.“왜겠어? 연아, 네가 생각해 봐.”“우리 아빠는 지금 병원에 있고 엄마랑 오빠는 널 원수처럼 대하는데 도대체 내가 어떡해야 하는 건데?”“누굴 탓해야 할까? 내 의사를 물어본 사람은 있어? 나도 모르겠어. 일이 왜 이 지경까지 되어버렸는지...”다들 그녀가 당연히 자신의 편에 서야 할 뿐만아니라 자신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의사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태지연은 바닥에 다리를 웅크리고 앉은 채 서로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녀의 가족을 해치려는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때 그녀를 아껴주던 부모와 오빠조차 이제는 그녀를 이용하려고만 했다.모두 그녀를 속이면서 정작 그녀한테는 진심을 다하라고 요구했다.태지연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왜 내가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일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거야?”“날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날 속이는데 왜 난 그걸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야? 난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진실만을 원할 뿐이야. 그게 다야.”“이렇게 간단한 일조차 해줄 수 없는 거야?”“왜? 내가 바보 같아? 난 그냥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인데 왜 너희는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그녀의 눈물은 순식간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를 무릎에 묻은 채 어깨가 떨릴 정도로 흐느꼈다.진실이 그녀 앞에 명백히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그들은 태지연이 절망에 빠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계속해서 속이려고만 했다.무언의 눈물에서 작게 흐느끼다 마지막에는 이를 악문 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태지연은 자신이 고집하는 게 과연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입술이 터져 피비린내가 느껴질 때까지 입술을 깨물었다.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신연은 그녀의
신연은 언제나 태지연에게 다정하게 대했다.그의 눈빛은 차분했고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하지만 태지연은 마치 약점을 찔린 듯 몸이 굳어버린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신연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지나치게 평온한 시선이 되레 태지연의 마음을 한껏 졸여왔다.“왜?”신연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연아, 너도 그 계약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거지?”“착하지, 그만 돌려줘.”신연은 아이를 타이르듯 다정하게 말했다. “너한테 있는 거 알아.”“...없어.”태지연은 점점 눈빛이 흐려지더니 힘겹게 입을 뗐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계약서라니, 난 모르는 일이야.”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그제야 의지와는 다르게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을 진정시켰다.그녀는 오빠가 신연을 해치지 않기를 바랐고 마찬가지로 신연이 오빠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태지연은 누구에게도 그 계약서를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며 모든 생각을 숨기려 했다.신연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나 거짓말하는 거 제일 싫어해.”태지연은 순간 몸이 굳었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 “나 아니야...”“정말이야?”신연이 다시 물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응.””그럼 이게 뭔지 설명해 줄 수 있겠어?”신연은 말을 마치고 서랍에서 약병과 약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그녀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전에 침대 옆 서랍에 숨겨둔 비타민 약병과 피임약이었다.최근에 산 피임약을 아직 비타민 약병에 넣을 시간이 없었다. 태송백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깜빡 잊고 있었다.신연은 순간적으로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말해 봐. 집에 왜 이런 약이 있는 거야?”그녀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신연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잠긴 목소리로 변명했
태지연은 눈앞이 흐려진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계속 걸어갔다.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직 신연만이 떠올랐다.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가정에서 자랐을까? 신연이 그렇게 말하기를 꺼렸던 그의 가정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더군다나 신기철이 진정 신연에게 미안하다면 왜 그에게 한 번도 어떤 보상을 하지 않았을까?모두가 신연이 차갑다고 말했지만 태지연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연은 단지 그녀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신을 지켜준 소년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 역시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그녀는 고등학교 뒤편 작은 정원에 항상 떠돌이 고양이들이 많았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신연이 작은 난간에 기댄 채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나누어주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새끼 고양이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항상 신연 주위에 모여서는 그의 다리를 비볐다.그는 분명 귀찮아하는 표정이 있었지만 고양이들을 밀어내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새끼 고양이가 그의 발치에서 잠드는 것도 허락했다. 동물들의 감각은 예리한 법이다. 그들은 항상 신연을 잘 따랐다.그런 신연의 모습이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애써 억눌렀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녀가 사랑했던 신연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다....갑자기 손목이 세차게 잡히며 태지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눈앞의 상황이 서서히 선명해지며 뒤에서 태은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야?”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까지 와 있었다. 방금 태은정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환자를 밀고 지나가던 간호사랑 부딪힐 뻔했다.그녀는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태은정은 그녀를 흘겨보더니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데려갔다.차에 타고 나서야 태지연은 정신을 차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고마워.”“고맙긴. 내가 네 언니인데.”태은정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