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리는 속눈썹을 내리깔고 잠시 있다가 전화를 받았다. 할아버지의 간절한 목소리가 바로 들려왔다. “유리야, 너 지금도 밖이냐?”신유리는 밖에 억수로 쏟아지는 큰비를 바라보면서 할아버지의 말투에 담긴 관심을 알아차리고 잠시 침묵하고 나서 대답했다. “네. 아직 밖에 있어요.”“너 어디냐? 내가 준혁이더러 너 데리러 가라고 할게. 이렇게 큰비에 운전하지 말거라. 위험해.”할아버지는 즉시 말을 받았다. 신유리는 입귀를 실룩였다. 그녀는 할아버지에게 지금 서준혁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눈가로 무심코 스쳐보니 서준혁은 무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눈동자는 온통 냉소로 차 있었다.신유리는 번쩍 놀라 고개를 돌리며 할아버지에게 서준혁이 데리러 올 필요가 없다고 말하려는데 할아버지의 맹렬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옆에서 또 류 사부님이 그에게 약을 가져다주는 기척도 들려왔다. 신유리는 금세 미간을 찌푸렸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할아버지는 낮은 소리로 기침하며 허약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괜찮다. 유리야, 비가 너무 많이 오니 조심하거라. 그 나쁜 놈과 화내지 말고.”할아버지는 말하기도 힘들어했다. 신유리는 더 말하고 싶었지만 류 사부님이 급급히 전화를 끊었다. 신유리는 눈을 들어 서준혁의 마뜩잖은 시선과 마주했다. 그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앞에서는 철이 든 척 말을 잘 듣던데 넌 피곤하지도 않아?”그의 검은 동공에 차가움이 얇게 깔렸다. “꼭 이렇게 해야 되겠어? 모든 사람들이 너에게 구걸해야 기뻐?”신유리는 원래 할아버지 때문에 잠깐 망설였던 것마저 순식간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녀는 안색도 변하지 않은 채 서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 나한테 뭘 구걸했는데? 서준혁, 넌 항상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지.”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맑은 눈은 가게의 따뜻한 색조의 불빛 아래에서 얼마간 부드러워 보였다. 신유리는 조롱하듯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재미
경희영의 말은 관심으로 넘쳤다. 송지음은 그를 보며 얼굴에 황당함이 스쳐 갔다.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저 저를 여동생으로 생각한다고 하지 않았어요?”경희영은 얼굴에 쓸쓸함이 넘쳤다. 그는 상처받은 표정으로 송지음을 빤히 바라보았다. “네가 원한다면.”말을 마치고 그는 손을 뻗어 송지음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말투에는 마음 아프고 실망의 빛이 역력했다.“방금 한 말은 너무 충동적이었어. 없던 일로 해줘.”송지음은 입술을 깨물고 눈을 내리깐 채 짧게 대답했다. 그러나 경희영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는 손길은 피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있어서 경희영의 계산적이고 의도적인 눈빛을 보아내지 못했다. 신유리는 백화점에서 한 시간 넘어 기다렸지만 빗줄기는 아직도 작아지지 않았다. 되려 다시 세졌다.그녀는 반 시간 전부터 모바일 택시 앱으로 택시를 잡고 있었지만 주문받는 차가 한 대도 없었다. 각 상가가 문을 닫기 시작하자 카페직원도 두 번이나 와서 퇴근해야 한다고 전했다. 시간을 보니 어느새 11시가 돼갔다. 곧 백화점도 문 닫을 시간이었다. 그녀는 카페에서 우산 한 자루를 빌려 백화점을 나섰다. 원래 내비게이션에 따라 근처 호텔을 잡으려 했지만 비가 생각보다 너무 세게 내리고 있었다. 금방 백화점을 나서 우산을 펼치자마자 큰비가 우산에 구멍이라도 뚫을 기세로 억수로 쏟아져 내렸다. 신유리는 한 손으로는 우산을 쓰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마치 뒤집힐 것 같았다. 땅에 고인 물도 좀 깊은지라 신유리는 발을 내딛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고인 물은 이미 그녀의 발등을 넘었다. 차량 경적소리는 억수로 퍼붓는 빗속에서 그다지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신유리 앞에 멈춰 섰다. 신유리는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후퇴했다. 차창이 내려지더니 서준혁의 차가운 옆태가 드러났다. 그의 목소리는 빗소리에 얼마간이 씻겨졌다. “타.”신유리는 우산을 받쳐 들고 물었다. “어떻게 왔어?”“할아
어르신의 어조에는 얼마간의 명령이 들어있었다. 서준혁은 무거운 눈빛으로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해명했다. “저 바빠요.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요.”“내가 아침밥을 먹으라고 한 것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냐?”어르신의 얼굴색은 단번에 어두워졌다. 그의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 이내 불쾌감이 어렸다. 신유리는 손을 씻고 느릿느릿 식탁 앞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류 사부님을 도와 수저를 세팅했다. 어르신과 서준혁 사이의 일에 그녀는 끼어들 자격도 없었고 딱히 무슨 말을 할지도 몰랐다.서준혁의 얼굴에 피곤함이 가득 차 있었고 깊고 그윽한 동공은 고요해지더니 결국 식탁에 마주 앉았다. 할아버지는 안색이 조금 나아졌다. 그는 윗자리에 앉았고 서준혁과 신유리는 그의 옆에 마주하고 앉았다. 신유리 앞에는 제비집이 놓여있었는데 할아버지께서 입을 열었다. “여자애들이 많이 먹으면 미용에 좋다더라.”신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할아버지의 관심에 감사를 드렸다. 서준혁은 옆에서 할아버지의 냉대를 받고 있었다. 그 역시도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밥 먹고 있었다. 아침 식사 시간 별다른 교류는 없었다. 할아버지께서 여러 화제를 꺼내도 서준혁과 신유리는 눈치껏 말을 돌리곤 했다. 밤새 내리던 비는 그제야 조금 약해졌다가 다시 더 세게 내리는 추세였다. 서준혁은 조급해 보일 정도로 급하게 외출했다.원래 신유리도 가려고 했는데 할아버지께서 바깥 날씨를 보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직도 많이 흐렸다. 좀 개이면 떠나거라.”신유리는 거절하려고 했지만 할아버지께서 탄식하는 소리에 멈칫했다. “유리야, 이 늙은이가 많이 귀찮게 굴었지. 이제 몇 년이 더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제일 걱정되는 게 준혁이다. 성격이 집요해서 한곳으로 파고들기 좋아하는 데다가 충고도 듣지 않으니.”신유리는 눈을 내리깔고 대꾸하지 않았다. 어르신께서 돌아온 며칠 동안 의도가 너무 뚜렷했다. 여전히 그녀와 서준혁을 다시 이어주려고 한다. 웃어른인지라 신유리는 너무 무정하게 말하지는 못하고 낮
송지음의 눈에서 분출된 강렬한 원한을 경희영은 모두 눈여겨보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조금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모르는 척하며 송지음을 관심했다. “왜 갑자기 안색이 안 좋아?”그는 손을 뻗어 송지음의 이마에 올렸다. “또 열이 나는 거 아니야?”갑자기 가까이 다가오자 그의 향수 냄새가 순식간에 송지음을 감싸왔다. 그녀는 멍하니 경희영을 바라보며 괜히 센 척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난 괜찮아.”경희영은 더욱 안쓰러운 얼굴로 자연스레 송지음을 품에 끌어안으며 다정하게 위로했다. “바보야, 기분 나쁘면 나한테 말해야지. 말 못 할 게 뭐가 있어.”송지음은 손에 핸드폰을 쥔 채 천천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낯선 남자의 뜨거운 숨결은 순식간에 그녀를 정신 차리게 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경희영을 밀어내자 그는 되려 그녀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송지음은 잠시 몸부림치는 척 하더니 아예 품에 안긴 채 낮은 소리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신유리는 인화 그룹에서 나온 후 곧바로 별장으로 향했다. 별장에는 임아중만 남아있었고 모두 공사 현장으로 가고 없었다. 비가 오더라도 일을 서둘러야 했다. 신유리는 임아중과 안사를 나눈 후 서재로 돌아가 일을 처리하려고 했다. 필경 어젯밤 채리영쪽에서 새로운 요구를 추가했으니 말이다. 임아중은 소파에 앉아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눈꺼풀을 치켜들더니 신유리에게 물었다. “어젯밤에 호텔에서 잤어?”신유리는 흠칫 놀란 채 가슴이 두근거렸다. “왜?”“이신이 그러는데 어제 비가 너무 세서 네가 호텔에서 하룻밤 묵었다던데. 난 어제 너랑 얘기 나누고 싶었거든.”임아중은 의아해서 물었다.“왜? 어젯밤 호텔에 묵은 거 아니었어?”신유리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호텔에 있었어.”임아중은 짧게 대꾸했고 신유리는 이내 몸을 돌려 서재로 갔다. 신유리가 한참 일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폭우는 이미 약해져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때마침 이신도 돌아왔고 임아중은 큰 테이블 한가득
주국병은 특유의 악랄한 표정을 하고 비웃음 섞인 눈빛으로 신유리를 쳐다보며 누런 이빨을 내비추며 말을 했다.“네가 나를 고소하지 않겠다고만 하면 내가 모든 증거를 다 줄게, 그리고 여우같은 여자가 네 엄마를 세뇌시킨게 한 두 번이 아니잖아?”주국병은 일부로 목소리를 내리깔며 엄숙한 분위기를 잡으려고 애쓰며 말을 이어갔다.“어때? 꽤나 솔깃한 제안이지?”신유리는 평온하고도 묵묵한 태도로 그를 쳐다보았다.이연지의 동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주국병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하지만 신유리가 맨 먼저 주국병을 찾아오지 않은 제일 큰 이유는 바로 주국병이 교활하고도 악한 인간이라 제대로 된 말들을 하지 않을 것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신유리가 말없이 주국병을 빤히 쳐다보았고 주국병은 그런 신유리가 두렵지도 않은지 여전히 말을 하고 있었다.“어차피 물건은 내 손에 있어, 네가 허락 하던 안 하던 그건 네 맘 대로지.”교도소에서 나오는 순간까지도 신유리의 안색은 변하지 않았고 옆에 있던 연우진이 조심스레 물었다.“주국병 그 사람이 말한 거... 정말 생각 없어?”“없어. 있어서도 안 되고.”신유리가 단호하게 대답했다.외할아버지를 돌아가시게 만든 사람도, 실제로 몹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것도 주국병이기에 송지음의 증거 하나를 얻자고 살인자를 풀어줄 생각은 1도 없는 신유리였다.그리고 특히 주국병의 말은 별로 믿을 수가 없다는 것도 알기에 섣불리 행동해서도 안 된다.연우진이 단호한 그녀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화주제를 바꾸기 위해 신유리를 데리고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서준혁씨 할아버지가 오셨대, 듣기론 다음 주에 서씨 집안에서 할아버님 생신도 같이 보낸다고 하던데?”“너는 갈 거야?”연우진이 신유리를 바라보며 천천히 물었다.이 업계사람들은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또한 볼품없이 적어도 무조건 다 만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서씨 집안과 연씨 집안 사이도 아주 좋기에 연락도 꾸준히 하는 사이었다.그러기에 연우진은
서준혁과 송지음이 신유리 때문에 심하게 다퉜다는 사실은 빠르게 소문이 퍼졌다.필경 송지음이 비서실로 돌아왔을 때 안색은 매우 안 좋았기 때문이다.그저 영화를 보듯이 흥미진진해 하는 사람들의 눈빛은 송지음으로 하여금 화가 나고도 속상하게 하였다.그녀는 서준혁이 끝까지 신유리를 감싸는 모습에 두 사람 사이가 평범하지만은 않다는 경희영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너무 복잡해진 송지음은 생각하면 할수록 서운함이 물 밀 듯 밀려와 눈물을 참기가 힘들었고 그러던 와중 책상위에 놓인 핸드폰이 울렸다.[지음씨, 점심 같이 먹을까요? 내 친구가 레스토랑 오픈했다는데 꽤 맛있을 거예요. 지음씨 데리고 가고 싶어서...]경희영에게 보내온 문자였다.송지음은 약간 망설이는 듯싶더니 바로 답장을 보냈다.[좋아요.]신유리는 화인에서 일을 하지 않아도 양예슬이라는 “스피커”가 있기에 송지음의 상황을 하나도 빠짐없이 알고 있었다.서준혁과 송지음은 여전히 냉전 중 이었지만 서준혁은 아랑곳 않고 부산으로 출장을 나갔고 그 때문인지 송지음은 매일 굳은 표정으로 출퇴근을 하더니 조퇴와 지각횟수가 더욱 많아졌다.[요즘 지음씨 혼자 막 나대는 거죠. 회사가 진짜 자기 집 인 것 마냥 행동하고... 근데 저번에 송지음이랑 어떤 남자가 같이 영화 보는 모습을 오청아씨가 봤대요! 재밌죠?]신유리는 양예슬이 보내온 문자들에 대충 답장을 해주고는 바로 업무에 몰두했다.서준혁의 할아버지는 아침부터 전화를 걸어 그녀더러 저녁에 일찍 오라고 당부했다.서씨 가문에서는 특별히 할아버지를 위한 생일파티를 준비했기에 신유리는 매우 성대할 줄 알았지만 서창범은 오직 서씨 가문과 사이가 좋은 몇몇 친구들만 초대하여 아주 소소했다.생일파티 장소는 화려한 장식들로 둘러싸인 야외에서 하였고 가을이 다가오고 있는 탓인지 날씨는 조금 쌀쌀했다.신유리는 연우진과 함께 약속장소로 도착하였고 연씨 가문과 서씨 가문은 듣던대로 사이가 몹시 좋아보였다.할아버지는 일찍부터 유원장과 함께
서준혁의 말에는 조롱이 섞여있었고 그걸 들은 신유리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신유리는 확실히 할아버지가 치마에 그려진 아이리스 꽃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더 자세히 말하자면 할아버지가 아닌 서준혁의 할머니가 좋아하셨던 꽃이다.전에 할아버지는 화원에 아이리스 꽃을 가득 직접 심었고 그중 일부분은 신유리가 할아버지를 도와 같이 하였다.그러기에 임아중이 이 스타일을 추천했을 때 군말 없이 바로 허락했던 것이다.하지만 한 가지 서준혁이 잘 못 말한 점이 있었다.신유리는 평온한 표정을 하고 서준혁을 쳐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렇게 신경 쓰실 거면 왜 할아버님 대신 그 선물을 도로 가져가지 않는 건가요?”그녀의 물음에 서준혁의 눈빛이 조금 흔들리는 듯싶더니 담담한 말투로 대답했다.“저랑 무슨 상관이 있는 겁니까?”서준혁은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몸을 돌려 파티가 진행되고 있는 안으로 향했고 그가 도착한 것을 발견한 할아버지의 표정은 점차 풀려갔다.할아버지는 서준혁의 브로치인 아이리스 꽃 장식을 보고 멍하니 있다가 얼굴에 온정을 띠더니 말을 했다“문희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네 할미가 너를 얼마나 예뻐했는데.”서준혁은 고개를 숙인 채 할아버지 말만 듣고 있을 뿐이었다.신유리가 들어오자 파티가 곧 시작되려고 하는 분위기였고 할아버지는 제일 앞자리에 앉아 신유리를 보고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유리야, 여기 와서 앉으렴.”할아버지의 주위를 쓱 둘러본 신유리는 하정숙과 서창범은 할아버지의 오른쪽에, 왼쪽엔 서준혁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마침 그의 옆자리 하나가 비어있었다.[아... 좋은 자리는 아닌데.]할아버지의 말에도 침묵을 유지하던 신유리는 연우진을 발견하고는 말을 꺼냈다.“괜찮아요, 저 여기 앉으면 돼요.”그녀의 대답에 할아버지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는 물었다.“밥 한 끼조차 나랑 같이 먹기 싫은 게냐?”신유리는 그 말에 잠시 굳었다가 이어 대답을 하려는 순간 서준혁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려댔다.서
신유리의 말에 서준혁의 눈빛은 마치 그녀를 비웃듯이 변해갔고 웃음을 참지 못하며 대답했다.“아니, 정말 자기 자신을 이 집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그의 말소리는 큰소리가 아니었지만 신유리를 내리까려는 의미는 아주 그득하게 담겨있었다.신유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을 유치하며 서준혁에게 말했다.“전 그냥 불필요한 위험한 일은 굳이 하지 않고 피하셨으면 좋겠는 마음에 그런 거예요.”서준혁이 송지음을 데리고 이곳에 올 거였으면 신유리에게는 살짝 귀띔을 해줘야했다. 그래야 그녀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피해주며 송지음의 자리를 뺏지 않고 이렇게 어색하고 흐린 분위기마저 조성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위험? 무슨 위험인지 똑똑히 말해 봐요.”서준혁이 물었다.그는 고개를 들어 신유리를 쳐다보았고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싸늘하게 만들었다.서준혁은 살짝 망설이더니 결심이라도 한 사람마냥 다시 물었다.“신유리씨는 자기 자신이 제가 피해야 할 위험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나 봅니다?”그는 입 꼬리를 치켜 올리며 물었고 신유리를 바라보는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신유리씨 다른 건 몰라도 자신감 하나는 인정합니다.”가만히 듣고 있던 신유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 옆에 있던 할아버지의 기침소리가 들려왔다.할아버지는 잔뜩 찡그린 표정을 하고 서준혁을 쳐다보며 소리쳤다.“개 같은 놈! 유리는 내가 직접 초대한 사람이다. 그렇게 마음에 안 든다면 네가 꺼지 거라. 그리고 네가 데려온 그 비서도 같이 말이다.”그는 기침을 콜록콜록하면서도 서준혁에게 노발대발하며 외쳤다.할아버지는 서준혁이 자신의 생일파티에 송지음을 데려온 것에 대해 정말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모양이다.서준혁은 할아버지의 밑에서 자랐던 터라 할아버지가 화를 내자 머리를 수그린 채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가만히 앉아있는 신유리를 할아버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해주며 말했다.“유리야, 걱정하지마라. 이 새끼가 널 괴롭히기라도 한다면 내가 너 대신 아주
태송백은 신연을 향해 내리치려 했다.태지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신연을 밀어내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태송백은 태지연을 보더니 급하게 행동을 멈췄다.그러나 이미 큰 힘을 실은 탓에 갑자기 멈추려 해도 늦었다. 그는 급히 방향을 틀었지만 결국 태지연의 어깨에 맞았다.뼈가 부딪히는 고통에 태지연은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팔을 타고 내려오는 통증에 그녀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더니 옆으로 쓰러지며 머리를 부딪혔다. 곧이어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바닥에는 유리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신연이 반응했을 때 태지연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쥐 죽은 듯 고요한 방 안에는 태지연의 신음소리만 울려 퍼졌다.“아파...”신연의 눈에는 깊고 검은 파도가 일었다. 그는 태지연의 곁에 무릎을 꿇은 채 다급하게 소리쳤다.“성한빈, 당장 구급차 불러! 지금 당장!”그는 태지연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다칠까 봐 두려웠다.신연은 이내 고개를 들어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태송백을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태송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다가왔다.“태지연... 지연아...”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아까의 광기 어린 얼굴은 온데간데없어진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태지연은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태송백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오빠... 내 말부터 들어줄래?”태송백은 숨을 죽이며 말했다.“그래, 네 말 들을게. 오빠가 나빴어. 오빠가 미안해... 지연아, 나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알아. 오빠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오빠는 항상 나를 제일 아껴줬잖아.”태지연은 여전히 고통에 시달린 채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갔지만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낮게 말했다.“오빠, 난 신연 편을 들고 싶은 게 아니었어. 그저 엄마 아빠가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야. 우리 가족이 다시
태송백은 한층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연을 노려봤다. 한참 후에야 이를 악문 채 말을 내뱉었다.“뒤에서 숨고만 있다가 부하들만 짖게 놔두더니 이제야 직접 나선 거냐? 나한테 기회를 준다고? 신연, 너 진짜 죽을 때까지 정신 못 차리는구나?”태송백은 태지연을 흘겨보며 비웃음을 흘렸다.“너 내 동생을 완전히 속였잖아. 지금도 태지연이 여기까지 와서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고.”태송백의 말은 가시처럼 날카롭게 태지연의 가슴에 박혔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며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오빠, 제발 진정 좀 해요.”“태지연, 넌 입 다물어. 계속해서 그 새끼 편을 들면 넌 더 이상 내 여동생도 태씨 가문의 딸도 아니야!”태송백은 격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우리 태씨 가문이 이 꼴이 된 건 전부 그 새끼 때문이야! 아버지께서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데다 나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숨어 다녀야 하지. 내가 밖에서 무슨 꼴을 당하는지 알기나 해? 모든 게 다 저 새끼 때문이라고.”“엄마는 창녀에 아빠는 손님이고. 참, 너도 신유리 알지? 걘 얼마나 똑똑한지 저 새끼랑 상종도 안 해. 너 혼자 보물인 양 여기고 있는 거야.”태송백은 쌓여 있던 울분을 쏟아냈다. 둘 사이의 갈등은 이미 단순히 말로 풀 수 있는 정도가 아닌 자존심 문제였다.그는 반드시 신연에게 자신이 당한 굴욕을 몇 배로 돌려주겠다고 결심했다.태송백은 한 마디 한 마디에 독설을 내뱉었다.“태지연, 넌 더럽지 않냐?”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듯 제자리 굳어버린 채 태송백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오빠, 그만해요... 제발 그만 말하세요.”그녀는 차마 신연을 돌아볼 용기도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목이 바싹 말라오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신연 앞을 막아서며 무시해 버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치 나무 말뚝에 묶인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태송백의 독설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악의 어린 말들이 허공에 울려 퍼지
성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둘째 도련님께서 문이 열릴 때마다... 전에 우리 쪽 사람들이 다친 적도 있었습니다.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신연은 바닥에 부서진 유리 조각들을 흘겨보더니 무표정으로 말했다.“아직도 부술 게 남아있어?”성한빈은 순간 안색이 굳어졌다.태지연은 그들의 대화를 신경 쓰지도 못한 채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잠시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어? 오빠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신연은 눈을 내리깔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약속하듯 말했다.“아무것도 안 할게. 믿어줘, 응?”“아직 불안정할 텐데. 너희 둘만 남겨둘 수 없어.”“걱정 마.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그래도 내 오빠잖아. 어렸을 때부터 나를 가장 아껴주던 사람이야.”태지연은 신연을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물건을 너한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나야말로 누구보다도 이 일이 빨리 끝나길 바라고 있어.”“우리도 빨리 예전으로 돌아가자. 아무리 예전처럼 되지 못하더라도 이 일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태지연의 목소리는 다소 지친 듯했다.“연아, 나 정말 너무 힘들어.”신연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 지나서야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한번 얘기해 봐.”태지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신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근데 나가진 않을 거야. 보다시피 최근 태송백 상태가 불안정해. 단둘이 두는 건 불안해서 안 되겠어. 여기서 기다릴게.”현관에서는 안쪽 상황을 볼 수 없었다.그녀는 신연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걸 알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안쪽은 더 엉망이었다. 바닥에는 온갖 유리 파편들과 장식품들이 흩어져 있었다.태송백은 원래 성격이 좋지 않은 편인데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녀는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해 가며 간신히 거실까지 다가갔다. 순간 태송백의 격앙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내가 나가라고
다음 날 아침, 신연은 평소처럼 아침을 준비해 두었다.테이블 위에는 더 이상 초콜릿케이크가 보이지 않았고 신연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그는 우유 한 잔을 따라 식탁 위에 놓더니 입을 열었다.“얼른 씻고 아침 먹어. 나 오늘은 일이 있어서 점심에 못 올 거야. 점심은 호텔에서 보내줄 거야.”태지연은 순간 마음이 움찔하며 신연에게 물었다.“회사? 아니면 어디?”신연은 동작을 멈추더니 속눈썹을 내리깐 채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응, 회사.”“연아.”태지연은 의자 등받이를 꽉 잡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어젯밤 한 말은 전부 진심이야. 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절대 용서 못 해.”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라앉았고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신연은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지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나중에 내가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조금 이기적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어젯밤에 들은 말로만 신연이 정확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태도를 봐서는 만약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태송백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태지연은 손에 힘을 풀더니 힘겹게 신연 곁으로 다가갔다.“연아, 원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대신 찾아줄게.”순간 신연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목젖을 울렁이며 태지연을 내려다보았다.“내가 물건을 찾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태지연은 잠시 멈췄다가 대답했다.“오빠가 말했어. 자기 손에 너한테 아주 중요한 게 있다고. 연아... 내가 찾아줄게. 내 오빠잖아, 내가 말해볼게.”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고 목소리도 다소 잠겨 있었다.순간 머릿속이 약간 혼란스러워졌다.신연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태지연은 말을 마치고 신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신연은 눈을 내리깐 채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일으켜 세웠다.“네가 좋아하는 케이크 사 왔어. 얼른 먹어봐.”태지연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신연을 쳐다보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되레 단단히 잡혔다.신연은 식탁 앞으로 가서 조심스레 케이크 상자를 열고는 라즈베리 초콜릿케이크를 꺼냈다.태지연이 가장 좋아하는 가게의 케이크였다. 평소에도 그녀는 신연한테 퇴근길에 케이크를 사 오라고 조르기도 했었다.하지만 그녀는 가장 즐겨 먹던 케이크를 보면서도 전혀 입맛이 돌지 않았다.그녀는 태송백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오빠가...”그러나 신연이 바로 말을 끊어버렸다. “케이크 가게 주인이 또 둘째를 낳았대. 너도 기억하더라. 시간 되면 한번 들르라고 하길래 내가 대신 대답했어.”“신연...”“맛 좀 봐.”신연은 케이크를 그녀 앞에 건네며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태지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지금 먹고 싶지 않아. 연아, 다시는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러니까 솔직하게 대답해 줘. 네가 오빠를 데려갔어?”태지연의 말이 끝나자 거실에는 침묵만이 흘렀다.신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이것뿐이야?”태지연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뱉어냈다. “대답해.”신연은 말했다. “일단 케이크부터 먹어봐.”태지연은 움직이지 않고 애써 차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녀는 이 상황에 점점 지쳐갔다.순간 가족과 신연 사이에서 고민하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연과 가족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길 바랐다.하지만 그녀는 이제야 그토록 바라던 작은 소망이 애초에 이룰 수 없는 꿈이었음을 깨달았다.신연과 태씨 가문은 이미 끊어진 실처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사이였다.모두가 이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직 그녀만이 되돌릴 수 있다는
태은정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그녀를 지치게 했다.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연아, 신연이 송백을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고 있어?”태지연은 잠시 멍해 있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언니, 왜 항상 무슨 일만 생기면 내가 무조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마치 사람들이 모든 걸 나에게 털어놓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태지연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사실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유일하게 그녀뿐이었는데 말이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태은정은 멈칫하더니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태지연을 한참 바라보더니 갑자기 반응하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피곤한 듯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그래.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미안해. 지연아, 내가 너무 급했나 봐.”태은정은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눈썹을 만지작거렸는데 이는 태은정이 곤란할 때 나오는 작은 습관이었다.태지연은 고개를 저었다.“방금 신연이 오빠를 데려갔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태은정은 지금도 상황이 엉망진창이라고 느꼈다. 태송백은 이미 이틀째 연락 두절인 상태였고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닿지 않았다.전혜린과 태성민은 신연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태지연과도 연락이 닿지 않다 보니 한편으로는 부모님을 달래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태송백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연락을 돌려야 했다.게다가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문제까지 해결해야 했다. 그녀는 외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도 이렇게 바쁜 적이 없었다.태은정은 한숨을 내쉬며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럼 신연이 요즘 뭐 하고 있는지는 알아?”태지연은 대답했다.“대부분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리고 나머지 시간엔 회사에 있을 거야.”그녀는 잠시 멈춘 후 덧붙였다.“근데 나도 확신할 수 없어. 보통 자세한 건 나한테 말하지 않
태지연은 마땅한 핑계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신연은 그녀에 대해 잘 알다 못해 속마음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였다.태지연은 눈물을 흘리며 처량한 모습으로 바라봤다.“왜겠어? 연아, 네가 생각해 봐.”“우리 아빠는 지금 병원에 있고 엄마랑 오빠는 널 원수처럼 대하는데 도대체 내가 어떡해야 하는 건데?”“누굴 탓해야 할까? 내 의사를 물어본 사람은 있어? 나도 모르겠어. 일이 왜 이 지경까지 되어버렸는지...”다들 그녀가 당연히 자신의 편에 서야 할 뿐만아니라 자신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의사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태지연은 바닥에 다리를 웅크리고 앉은 채 서로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녀의 가족을 해치려는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때 그녀를 아껴주던 부모와 오빠조차 이제는 그녀를 이용하려고만 했다.모두 그녀를 속이면서 정작 그녀한테는 진심을 다하라고 요구했다.태지연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왜 내가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일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거야?”“날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날 속이는데 왜 난 그걸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야? 난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진실만을 원할 뿐이야. 그게 다야.”“이렇게 간단한 일조차 해줄 수 없는 거야?”“왜? 내가 바보 같아? 난 그냥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인데 왜 너희는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그녀의 눈물은 순식간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를 무릎에 묻은 채 어깨가 떨릴 정도로 흐느꼈다.진실이 그녀 앞에 명백히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그들은 태지연이 절망에 빠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계속해서 속이려고만 했다.무언의 눈물에서 작게 흐느끼다 마지막에는 이를 악문 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태지연은 자신이 고집하는 게 과연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입술이 터져 피비린내가 느껴질 때까지 입술을 깨물었다.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신연은 그녀의
신연은 언제나 태지연에게 다정하게 대했다.그의 눈빛은 차분했고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하지만 태지연은 마치 약점을 찔린 듯 몸이 굳어버린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신연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지나치게 평온한 시선이 되레 태지연의 마음을 한껏 졸여왔다.“왜?”신연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연아, 너도 그 계약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거지?”“착하지, 그만 돌려줘.”신연은 아이를 타이르듯 다정하게 말했다. “너한테 있는 거 알아.”“...없어.”태지연은 점점 눈빛이 흐려지더니 힘겹게 입을 뗐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계약서라니, 난 모르는 일이야.”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그제야 의지와는 다르게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을 진정시켰다.그녀는 오빠가 신연을 해치지 않기를 바랐고 마찬가지로 신연이 오빠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태지연은 누구에게도 그 계약서를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며 모든 생각을 숨기려 했다.신연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나 거짓말하는 거 제일 싫어해.”태지연은 순간 몸이 굳었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 “나 아니야...”“정말이야?”신연이 다시 물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응.””그럼 이게 뭔지 설명해 줄 수 있겠어?”신연은 말을 마치고 서랍에서 약병과 약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그녀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전에 침대 옆 서랍에 숨겨둔 비타민 약병과 피임약이었다.최근에 산 피임약을 아직 비타민 약병에 넣을 시간이 없었다. 태송백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깜빡 잊고 있었다.신연은 순간적으로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말해 봐. 집에 왜 이런 약이 있는 거야?”그녀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신연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잠긴 목소리로 변명했
태지연은 눈앞이 흐려진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계속 걸어갔다.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직 신연만이 떠올랐다.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가정에서 자랐을까? 신연이 그렇게 말하기를 꺼렸던 그의 가정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더군다나 신기철이 진정 신연에게 미안하다면 왜 그에게 한 번도 어떤 보상을 하지 않았을까?모두가 신연이 차갑다고 말했지만 태지연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연은 단지 그녀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신을 지켜준 소년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 역시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그녀는 고등학교 뒤편 작은 정원에 항상 떠돌이 고양이들이 많았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신연이 작은 난간에 기댄 채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나누어주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새끼 고양이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항상 신연 주위에 모여서는 그의 다리를 비볐다.그는 분명 귀찮아하는 표정이 있었지만 고양이들을 밀어내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새끼 고양이가 그의 발치에서 잠드는 것도 허락했다. 동물들의 감각은 예리한 법이다. 그들은 항상 신연을 잘 따랐다.그런 신연의 모습이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애써 억눌렀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녀가 사랑했던 신연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다....갑자기 손목이 세차게 잡히며 태지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눈앞의 상황이 서서히 선명해지며 뒤에서 태은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야?”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까지 와 있었다. 방금 태은정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환자를 밀고 지나가던 간호사랑 부딪힐 뻔했다.그녀는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태은정은 그녀를 흘겨보더니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데려갔다.차에 타고 나서야 태지연은 정신을 차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고마워.”“고맙긴. 내가 네 언니인데.”태은정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