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리와 서준혁의 첫 만남은 아이러니했다.외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신유리는 매일 병원에서 시간을 보냈다.대학에 갓 입학한 소녀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허둥지둥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외할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드리려 했다.사고를 낸 운동자는 질질 끌며 보상금을 주지 않았다. 외할아버지는 교사였지만 모아둔 돈은 별로 없었다. 외할아버지는 신유리가 대학에 다닐 비용을 일찍이 마련해 두셨기에 남은 돈이 별로 없었다.병원비도 계속 내지 않을 수 없었고 외할아버지는 수술 후 몸이 허약해진 상태라 몸조리도 필요한 상태였다.신유리는 매일 수업이 끝난 후에 아르바이트하러 다녔지만 그렇게 큰돈을 모으기 힘들었다.그녀는 기계처럼 매일 5시간만 휴식을 취했다.그런 탓인지 장시간의 긴장으로 신경이 유난히 예민해져 있었다.폭우가 내리는 그날 그녀는 육중한 인형복을 입고 비를 피하다가 건장한 청년과 부딪쳤다.그녀는 무의식중에 뒤로 물러섰다. 사과의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담담한 눈빛의 그와 눈이 마주쳤다.그 후 그의 눈빛이 종종 신유리의 머릿속에 떠올랐다.그녀는 그때의 감정을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의 눈동자에 그날의 음침함이 모두 녹아든 것 같았다. 그런 그의 눈동자가 바람처럼 그녀에게 불어왔다.그녀는 회상을 멈추고 고개를 숙인 채 긴장했다.그 당시 불어왔던 맑은 바람이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신유리는 여전히 뒷좌석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을 켜자마자 임아중에게서 온 카톡을 봤다. 임아중에게 답장을 마치니 지사에 도착했다.회사 앞 화단 옆에 양아치들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지사 관계자가 말했다."저 사람들이에요. 매일 여기서 저렇게 죽치고 있어요. 경찰이 오면 도망가고 잡혀도 금방 풀려나서 다시 와요."뻔뻔스럽게 이곳에서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신유리는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저 사람들 모두 주국병이 데려온 사람들인가요?"서준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강희성이 난감해하며 말했다."네. 확실히 주국
아직 도착하기도 전에 서준혁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옆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송지음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신유리에게 속삭였다. “유리 언니, 급하면 먼저 가셔도 돼요. 제가 이따가 오빠랑 같이 갈게요.”신유리는 그녀의 속셈을 알아채고 무표정으로 돌아섰다.송지음은 그녀가 떠나자 그제서야 작은 목소리로 옆에 있던 강희성에게 해명했다.“미미가 아무래도 유리 언니 동생인데 언니가 아무리 화가 나도 마음속으로 엄청 걱정할거에요. 언니를 먼저 보내는 게 맞죠.”강희성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긴, 그렇네요.”송지음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전 여기서 오빠를 기다릴게요.”강희성은 문득 상황을 알아채고 이마를 툭 치며 말했다.“전 먼저 유리 씨와 함께 병원으로 가는 게 좋겠어요. 괜히 커플 옆에서 염장질이나 당하는 게 아니라.”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돌렸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가는 내내 중얼거렸다.‘준혁이 여자 친구 질투가 심하네. 유리 씨를 보내면 그만이지, 나까지 보내려 하다니.’신유리가 먼저 병원에 도착하고 강희성도 이내 뒤따라왔다.그는 신유리와 인사를 나누고 먼저 사무실로 갔고 신유리는 홀로 병실로 향했다.미미는 또 링거를 맞고 있었고 손바닥만 한 얼굴에는 핏기 하나 없이 입술도 메마르다 못해 각질이 굳어져 있었다. 넓은 환자복은 마치 마대 같았다.그녀는 위를 보더니 웃으며 물었다.“오늘 컨디션은 어때? 아픈 곳은 없고?”미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없어.”신유리는 미미 앞에서 이연지라는 이름 세글자도 꺼내지 않았고 미미도 얌전하게 엄마를 찾지 않았다.다만 그들도 결국엔 친한 사이가 아니다 보니 별로 할 말이 없었다.미미는 어젯밤에 일어난 모든 일을 신유리에게 알렸고 오늘 다시 과묵한 모습으로 돌아왔다.신유리는 그녀 곁에 잠시 있다가 일어났다.“의사한테 물어볼게.”미미의 병세로 봐서는 병원에 장기간 입원해야 할 상황이었다. 비록 신유리는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어떤 일은 분명하게 물어봐야 했다.다
“유리 언니, 저 말이 너무 많았죠? 죄송해요.”귓가에 송지음의 목소리가 다시 맴돌자 신유리의 생각을 끊었다.신유리는 턱을 치켜올렸다가 이내 덤덤하게 말했다.“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다 해버렸는데 많고 적고가 뭐가 중요하겠어?” 송지음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쳐 갔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서준혁을 찾았다.서준혁은 그녀를 보지 않고 오히려 병상 옆 캐비닛에서 미미의 진단서를 집어 들더니 두 페이지를 넘겼다가 다시 갖다 놓았다.그한테서 풍기는 차가운 분위기는 사람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미미는 이불 속에 몸을 웅크린 채 그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잠시 후, 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신유리를 바라보았다. 별 감정이 없이 그저 조용히 바라보고 있으니 유달리 의미심장해 보였다.신유리는 멈칫하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서준혁의 시선을 맞받으며 입을 열었다.“대표님께서도 혹시 제가 여동생과 어떻게 지내는지 가르쳐 주고 싶으신 건가?”대표님 세 글자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신유리는 지금 마음이 편치 않았다.송지음은 연약해 보이지만 실은 말에 가시가 들어있었다.하지만 신유리는 아직 증거가 없었다.쯧. 신유리는 표정 하나 변함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눈빛은 평소보다 더 차가워 보였다.서준혁은 거의 잠겨가는 목소리로 덤덤하게 말했다.“내가 가르쳐준 게 그뿐이야?”신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내 서준혁의 비웃음 소리가 또 들려왔다.“그런데 네가 그대로 한 게 뭐가 있지?”“주국병이 벌인 난장판을 처리하기 위해 너를 합정에 불렀는데 오히려 일을 만들어?”서준혁의 새까만 눈동자에는 신유리의 얼굴이 비쳤다. 그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네 집안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마치 전 세계 사람들이 너한테 죄지은 것 같아? 신유리, 너무 너를 높게 보는 거 아니야?”그는 느릿하게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었다. 마치 특권자의 고고한 자태를 내뿜는 것 같았다.신유리는 이 분위기가 숨 막혔다.눈치 빠른 서준혁은 신유리와 송지음의 짧은
그녀의 겁에 질린 모습에 그 몇몇 양아치들은 실실 웃어댔다. “뭐가 무서워, 친구로 사귀자는 건데. 아저씨가 예뻐해 줄게.”송지음은 앞에 있는 그들의 추잡하고 능글맞은 모습에 무서웠지만 역겨움을 참지 못하고 정색해서 말했다.“전 남자 친구가 있어요. 당신들이 감히 나를 건드리기라도 한다면 제 남자 친구는 절대로 당신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방금 그녀를 잡아 왔던 양아치가 비웃었다. “그럼 네 남자 친구보고 오라고 해. 되려 누가 누구를 가만두지 않는지 봐야겠어.”송지음은 너무 무서운 나머지 신유리를 꽉 잡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유난히 힘이 들어가서 신유리는 아팠다.신유리는 이런 것도 신경 쓸 겨를 없이 한 손으로 송지음을 잡았다. 원래 그녀더러 더는 그 사람들의 화를 돋구지 말고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다. 그런데 송지음은 오히려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더니 말했다. “지금 남자 친구를 부를 테니 딱 기다려.”다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바쁘게 손에 들렸던 핸드폰은 그들에 의해 바닥에 떨어졌다. 양아치들은 사납게 웃으며 말했다. “불러서 뭐 하려고? 네가 어떻게 놀아주는지 보여주려고?”이 사람들은 모두 양아치들인지라 이런 법을 어기고 규율을 어지럽히는 일 따위는 닥치는 대로 했다. 그들은 손을 뻗어 송지음의 소매를 잡더니 힘을 주자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송지음은 비명을 지르며 양아치들을 발로 차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힘이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 양아치들의 몸에 발길이 닿지도 않았으며 되려 그들의 손에 잡혀 오른팔 소매가 완전히 찢겨졌다. 새하얀 팔이 드러나자 양아치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송지음은 놀라고 두려워 발버둥을 쳐댔다. 그녀는 애원이 가득한 눈길로 신유리를 바라보았다. “유리 언니, 빨리 그들보고 멈추라고 하세요!”신유리는 양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어찌 그들을 멈추게 할 수 있겠는가?하지만 그녀도 그들이 송지음을 함부로 굴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신유리는 송지음을 자신의 뒤로 숨기며 차가
갑자기 발생한 사건 때문에 송지음은 결국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녀의 몸에는 그들이 옷을 찢을 때 부주의로 난 상처들이 있었다. 새하얀 피부에는 여러 갈래의 붉은 흔적들이 있었다.신유리는 이 상황에 그녀를 두고 떠날 수 없었다. 신유리는 응급실로 따라갔다. 진료실은 문이 닫혀 있었고 서준혁이 송지음과 함께 안에 있었다. 신유리 역시 아까 부딪쳤던 곳이 아파 났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몸을 돌리려 하자 옆에 있던 강희성이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어디 가세요?”신유리는 자신의 팔을 움직이며 말했다. “골과요.”강희성은 그녀가 팔을 다친 사실을 몰랐다.“유리 씨도 다쳤어요? 아깐 왜 말 안 했어요?”신유리는 눈을 내리깔았다. ‘방금 그녀가 어떻게 말하겠는가?’‘또 누구한테 말하겠는가?’송지음은 울먹이기 바빴고 서준혁은 걱정하느라 급했고 그녀가 말하든 말하지 않든 달라질게 뭐가 있는가.강희성은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저와 준혁이 병원을 막 나갔을 때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들렸습니다. 준혁의 안색이 놀라울 정도로 어두워졌었어요.”신유리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지금 내가 그 사람들을 시켰다고고 생각하는 건가요?”강희성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비껴갔다. “딱히 그런 건 아니에요.”그가 그렇게 생각하느냐 안 하느냐는 이미 분명해졌다. 신유리는 마음속으로 자조했다. ‘그런 것이다.’강희성도 이미 그녀에 대한 서준혁의 의심을 보아내지 않았는가.진료실의 문이 열리며 신유리의 생각이 끊겼다. 강희성이 한발 앞서 물었다. “어떻게 됐어? 괜찮아?”송지음의 몸에는 서준혁의 옷이 걸쳐있었고 얼굴은 창백했다. 확연히 금방 지나치게 놀란 모습이었다. 그녀는 머리를 흔들더니 신유리를 바라보았다. 신유리의 냉정한 시선을 마주치자 멈칫하더니 고개를 숙였다.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강희성은 신유리와 서준혁을 번갈아 보더니 말했다. “일이 없으면 좋은 거지 뭐. 모두 안심해도 되겠어. 그럼 유리 씨는...“그
병원 복도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송지음은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서준혁의 무표정한 얼굴에 본능적으로 두려워졌다. 그녀는 아직 서준혁이 이렇게 화가 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온몸에 냉기가 심해서 보기만 해도 감히 접근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방금 신유리가 했던 말이 생각나자 마음속으로 참지 못하고 이를 악물며 입을 열려고 했다. “오빠.”서준혁은 표정이 굳은 채 매서운 눈빛으로 바라보자 그녀는 갑자기 말이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화내지 마.”서준혁은 눈에서 날카로움을 조금도 거두지 않은 채 고개만 작게 끄덕이며 무겁게 말했다. “의사가 너더러 CT 찍으라고 했으니 어서 가봐.”송지음은 서준혁의 시선을 받으며 가슴을 졸인 채 이를 악물고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CT 찍으러 갔다. 그녀가 멀리 간 뒤에야 강희성은 말하고 싶은 것을 참으며 서준혁을 바라보자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할 말이 있으면 해.”강희성은 말했다. “방금 유리 씨한테 너무 심하게 말한 거 아니야?”서준혁의 가차 없는 말투에 억울해하는 신유리를 보며 강희성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유리 씨도 다쳤어. 그녀가 계속 팔을 감싸고 있는 것을 보니 아마 많이 괴로운 것 같아. 그런데 너까지 그렇게 심한 말을 하다니...”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준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마음 아파?”강희성은 연신 손사래를 쳤다. “아니, 난 그냥 객관적으로 말했을 뿐이야.”“아무도 너의 객관적 의견이 필요하지 않아.”서준혁은 얼굴에 차가운 표정을 지은 채 입술을 오므리고 있었다. 그의 현재 심경의 괴로운 정도를 드러내고 있었다. 경찰 쪽 결과는 저녁에 나왔다. 그 사람들은 합정의 양아치들로 주국병과 관계가 아주 좋았다. 그중 한 명은 주국병과 카드놀이를 할 때 몇십만을 땄지만 주국병은 갚지 않았다. 후에 전화를 걸어 재촉하자 주국병은 성남시에 돈
“전에 미래그룹에서 보내준 건데요, 안에 내용 몇 가지가 좀 이상해보여요. 어디가 이상하다고 딱 집어 말은 못하겠지만 틀린 건 확실해요.”허경천은 핸드폰을 꺼내 찍어준 사진들을 신유리에게 보여주며 말을 이어갔다.“여기 제가 표시한데 말이에요.”“계약서를 저한테 직접 보여주셔도 돼요.”신유리는 굳게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그녀의 말에 허경천은 자신의 머리를 툭툭 때리며 대답했다.“아! 제가 잊었네요. 원래는 유리씨가 안 돌아오면 바로 카톡으로 보내주려고 했는데...”그는 대답을 마치고는 바로 계약서를 가지러 위층으로 올라갔다.“아침 먼저 드시죠. 우유 아니면 커피?”이신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허경천은 금방 계약서를 가지고 내려왔고 신유리에게 건네주기도 전에 이신이 먼저 말했다.“아침 먼저 드시고 일합시다.”이신의 말대로 아침을 다 먹자마자 신유리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려댔다.이석민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는데 발신자를 확인한 신유리의 표정은 약간 굳었다.한동안 망설이던 신유리가 전화를 받았고 이석민은 예의바른 말투로 인사말을 전했다.“유리씨, 저예요.”“무슨 일인데요?”어제 일로 아직 이석민에게 화가 나 있는 신유리의 목소리는 아주 까칠했다.그녀의 태도에 조금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던 이석민이 말을 이어갔다.“오늘 오전에 화인으로 오셔서 회의 하나 참가하시죠. 화인 쪽에서 일의 진도와 재료, 장소 등 많은 문제를 검사하겠다고 하네요.”화인은 이번 합작의 대투자자라 당연히 이런 것을 검사할 자격이 충분했다.신유리는 이석민의 말에 알았다고 대답해주고는 인차 전화를 끊어버렸다.화인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서준혁이 생각나는 그녀였지만 그의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기분이 좋지 않아졌다.“화인에서 걸려온 전화예요?”이신이 물었다.신유리의 굳었던 표정이 조금씩 풀려가며 말했다.“재료 문제들로 회의 좀 하겠다고 하네요.”“정말 짜증나게 하네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렇게 아무 때나 회의라니... 회의해서도 아무런 의미 없는 의견들만
현장으로 가야하는 신유리는 내려오자마자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전 서대표님이랑 같은 차에는 안 앉을게요. 별로 썩 좋은 선택은 아니잖아요. 서대표님도 주소를 아시니까 걱정은 안할게요. 그럼 현장에서 봐요.”말을 마친 신유리는 서준혁이 대답하기도 전에 뒤돌아 떠나버렸다.신유리의 일처리는 깔끔하고도 신속하기에 멀리 서있는 서준혁은 표정이 더욱 굳어져만 갔다.이석민은 기사님과 연락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서준혁의 굳은 표정에 놀라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그 시각, 현장으로 가던 신유리는 연우진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고 수화기 너머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다소 다운돼 보였다.“유리야, 주국병과 이연지 두 사람 곧 법정에서 재판 받을 거야. 준비하고 있어.”주국병과 이연지가 저지른 범죄들은 결코 적지만은 않았는데 몇 년 전 주국병이 저지른 일들마저 화가 난 신유리가 모조리 까발린 상황이었다.연우진의 말에 신유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만히 있는 모습이었다. 주국병이 저지른 범죄들의 후과는 불 보듯 뻔할테니까.이연지는 공범 이였고 똑같은 가해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다 자기들이 자초한 일이지 뭐.]신유리는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을 쳐다보며 대답했다.“때가 되면 증거들을 내보낼 거야. 주국병이 살인도 했다는 걸 내가 밝힐 거야.”그녀는 전에 미미가 했었던 말들을 모조리 기억하고 있었다.주국병이 할아버지를 구타한 것은 물론 호흡기까지 빼버렸다는 사실을 말이다.하지만-신유리는 두 눈을 깜빡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난 이연지 그 사람을 한 번 더 만나고 싶어. 물어볼게 있어서.”연우진은 그쪽 상황을 다 알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신유리가 현장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준혁의 마이바흐가 뒤따라 들어왔다.그녀는 싫은 내색도 내지 않고 서준혁을 데리고 현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이랑과 함께 일하고 있던 어느 한 청년은 신유리와 서준혁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손에 일들을 다 내려놓고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반장님이
태송백은 신연을 향해 내리치려 했다.태지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신연을 밀어내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태송백은 태지연을 보더니 급하게 행동을 멈췄다.그러나 이미 큰 힘을 실은 탓에 갑자기 멈추려 해도 늦었다. 그는 급히 방향을 틀었지만 결국 태지연의 어깨에 맞았다.뼈가 부딪히는 고통에 태지연은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팔을 타고 내려오는 통증에 그녀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더니 옆으로 쓰러지며 머리를 부딪혔다. 곧이어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바닥에는 유리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신연이 반응했을 때 태지연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쥐 죽은 듯 고요한 방 안에는 태지연의 신음소리만 울려 퍼졌다.“아파...”신연의 눈에는 깊고 검은 파도가 일었다. 그는 태지연의 곁에 무릎을 꿇은 채 다급하게 소리쳤다.“성한빈, 당장 구급차 불러! 지금 당장!”그는 태지연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다칠까 봐 두려웠다.신연은 이내 고개를 들어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태송백을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태송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다가왔다.“태지연... 지연아...”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아까의 광기 어린 얼굴은 온데간데없어진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태지연은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태송백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오빠... 내 말부터 들어줄래?”태송백은 숨을 죽이며 말했다.“그래, 네 말 들을게. 오빠가 나빴어. 오빠가 미안해... 지연아, 나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알아. 오빠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오빠는 항상 나를 제일 아껴줬잖아.”태지연은 여전히 고통에 시달린 채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갔지만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낮게 말했다.“오빠, 난 신연 편을 들고 싶은 게 아니었어. 그저 엄마 아빠가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야. 우리 가족이 다시
태송백은 한층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연을 노려봤다. 한참 후에야 이를 악문 채 말을 내뱉었다.“뒤에서 숨고만 있다가 부하들만 짖게 놔두더니 이제야 직접 나선 거냐? 나한테 기회를 준다고? 신연, 너 진짜 죽을 때까지 정신 못 차리는구나?”태송백은 태지연을 흘겨보며 비웃음을 흘렸다.“너 내 동생을 완전히 속였잖아. 지금도 태지연이 여기까지 와서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고.”태송백의 말은 가시처럼 날카롭게 태지연의 가슴에 박혔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며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오빠, 제발 진정 좀 해요.”“태지연, 넌 입 다물어. 계속해서 그 새끼 편을 들면 넌 더 이상 내 여동생도 태씨 가문의 딸도 아니야!”태송백은 격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우리 태씨 가문이 이 꼴이 된 건 전부 그 새끼 때문이야! 아버지께서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데다 나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숨어 다녀야 하지. 내가 밖에서 무슨 꼴을 당하는지 알기나 해? 모든 게 다 저 새끼 때문이라고.”“엄마는 창녀에 아빠는 손님이고. 참, 너도 신유리 알지? 걘 얼마나 똑똑한지 저 새끼랑 상종도 안 해. 너 혼자 보물인 양 여기고 있는 거야.”태송백은 쌓여 있던 울분을 쏟아냈다. 둘 사이의 갈등은 이미 단순히 말로 풀 수 있는 정도가 아닌 자존심 문제였다.그는 반드시 신연에게 자신이 당한 굴욕을 몇 배로 돌려주겠다고 결심했다.태송백은 한 마디 한 마디에 독설을 내뱉었다.“태지연, 넌 더럽지 않냐?”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듯 제자리 굳어버린 채 태송백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오빠, 그만해요... 제발 그만 말하세요.”그녀는 차마 신연을 돌아볼 용기도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목이 바싹 말라오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신연 앞을 막아서며 무시해 버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치 나무 말뚝에 묶인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태송백의 독설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악의 어린 말들이 허공에 울려 퍼지
성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둘째 도련님께서 문이 열릴 때마다... 전에 우리 쪽 사람들이 다친 적도 있었습니다.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신연은 바닥에 부서진 유리 조각들을 흘겨보더니 무표정으로 말했다.“아직도 부술 게 남아있어?”성한빈은 순간 안색이 굳어졌다.태지연은 그들의 대화를 신경 쓰지도 못한 채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잠시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어? 오빠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신연은 눈을 내리깔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약속하듯 말했다.“아무것도 안 할게. 믿어줘, 응?”“아직 불안정할 텐데. 너희 둘만 남겨둘 수 없어.”“걱정 마.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그래도 내 오빠잖아. 어렸을 때부터 나를 가장 아껴주던 사람이야.”태지연은 신연을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물건을 너한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나야말로 누구보다도 이 일이 빨리 끝나길 바라고 있어.”“우리도 빨리 예전으로 돌아가자. 아무리 예전처럼 되지 못하더라도 이 일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태지연의 목소리는 다소 지친 듯했다.“연아, 나 정말 너무 힘들어.”신연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 지나서야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한번 얘기해 봐.”태지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신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근데 나가진 않을 거야. 보다시피 최근 태송백 상태가 불안정해. 단둘이 두는 건 불안해서 안 되겠어. 여기서 기다릴게.”현관에서는 안쪽 상황을 볼 수 없었다.그녀는 신연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걸 알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안쪽은 더 엉망이었다. 바닥에는 온갖 유리 파편들과 장식품들이 흩어져 있었다.태송백은 원래 성격이 좋지 않은 편인데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녀는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해 가며 간신히 거실까지 다가갔다. 순간 태송백의 격앙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내가 나가라고
다음 날 아침, 신연은 평소처럼 아침을 준비해 두었다.테이블 위에는 더 이상 초콜릿케이크가 보이지 않았고 신연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그는 우유 한 잔을 따라 식탁 위에 놓더니 입을 열었다.“얼른 씻고 아침 먹어. 나 오늘은 일이 있어서 점심에 못 올 거야. 점심은 호텔에서 보내줄 거야.”태지연은 순간 마음이 움찔하며 신연에게 물었다.“회사? 아니면 어디?”신연은 동작을 멈추더니 속눈썹을 내리깐 채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응, 회사.”“연아.”태지연은 의자 등받이를 꽉 잡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어젯밤 한 말은 전부 진심이야. 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절대 용서 못 해.”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라앉았고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신연은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지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나중에 내가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조금 이기적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어젯밤에 들은 말로만 신연이 정확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태도를 봐서는 만약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태송백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태지연은 손에 힘을 풀더니 힘겹게 신연 곁으로 다가갔다.“연아, 원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대신 찾아줄게.”순간 신연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목젖을 울렁이며 태지연을 내려다보았다.“내가 물건을 찾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태지연은 잠시 멈췄다가 대답했다.“오빠가 말했어. 자기 손에 너한테 아주 중요한 게 있다고. 연아... 내가 찾아줄게. 내 오빠잖아, 내가 말해볼게.”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고 목소리도 다소 잠겨 있었다.순간 머릿속이 약간 혼란스러워졌다.신연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태지연은 말을 마치고 신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신연은 눈을 내리깐 채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일으켜 세웠다.“네가 좋아하는 케이크 사 왔어. 얼른 먹어봐.”태지연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신연을 쳐다보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되레 단단히 잡혔다.신연은 식탁 앞으로 가서 조심스레 케이크 상자를 열고는 라즈베리 초콜릿케이크를 꺼냈다.태지연이 가장 좋아하는 가게의 케이크였다. 평소에도 그녀는 신연한테 퇴근길에 케이크를 사 오라고 조르기도 했었다.하지만 그녀는 가장 즐겨 먹던 케이크를 보면서도 전혀 입맛이 돌지 않았다.그녀는 태송백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오빠가...”그러나 신연이 바로 말을 끊어버렸다. “케이크 가게 주인이 또 둘째를 낳았대. 너도 기억하더라. 시간 되면 한번 들르라고 하길래 내가 대신 대답했어.”“신연...”“맛 좀 봐.”신연은 케이크를 그녀 앞에 건네며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태지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지금 먹고 싶지 않아. 연아, 다시는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러니까 솔직하게 대답해 줘. 네가 오빠를 데려갔어?”태지연의 말이 끝나자 거실에는 침묵만이 흘렀다.신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이것뿐이야?”태지연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뱉어냈다. “대답해.”신연은 말했다. “일단 케이크부터 먹어봐.”태지연은 움직이지 않고 애써 차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녀는 이 상황에 점점 지쳐갔다.순간 가족과 신연 사이에서 고민하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연과 가족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길 바랐다.하지만 그녀는 이제야 그토록 바라던 작은 소망이 애초에 이룰 수 없는 꿈이었음을 깨달았다.신연과 태씨 가문은 이미 끊어진 실처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사이였다.모두가 이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직 그녀만이 되돌릴 수 있다는
태은정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그녀를 지치게 했다.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연아, 신연이 송백을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고 있어?”태지연은 잠시 멍해 있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언니, 왜 항상 무슨 일만 생기면 내가 무조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마치 사람들이 모든 걸 나에게 털어놓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태지연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사실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유일하게 그녀뿐이었는데 말이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태은정은 멈칫하더니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태지연을 한참 바라보더니 갑자기 반응하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피곤한 듯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그래.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미안해. 지연아, 내가 너무 급했나 봐.”태은정은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눈썹을 만지작거렸는데 이는 태은정이 곤란할 때 나오는 작은 습관이었다.태지연은 고개를 저었다.“방금 신연이 오빠를 데려갔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태은정은 지금도 상황이 엉망진창이라고 느꼈다. 태송백은 이미 이틀째 연락 두절인 상태였고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닿지 않았다.전혜린과 태성민은 신연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태지연과도 연락이 닿지 않다 보니 한편으로는 부모님을 달래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태송백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연락을 돌려야 했다.게다가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문제까지 해결해야 했다. 그녀는 외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도 이렇게 바쁜 적이 없었다.태은정은 한숨을 내쉬며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럼 신연이 요즘 뭐 하고 있는지는 알아?”태지연은 대답했다.“대부분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리고 나머지 시간엔 회사에 있을 거야.”그녀는 잠시 멈춘 후 덧붙였다.“근데 나도 확신할 수 없어. 보통 자세한 건 나한테 말하지 않
태지연은 마땅한 핑계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신연은 그녀에 대해 잘 알다 못해 속마음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였다.태지연은 눈물을 흘리며 처량한 모습으로 바라봤다.“왜겠어? 연아, 네가 생각해 봐.”“우리 아빠는 지금 병원에 있고 엄마랑 오빠는 널 원수처럼 대하는데 도대체 내가 어떡해야 하는 건데?”“누굴 탓해야 할까? 내 의사를 물어본 사람은 있어? 나도 모르겠어. 일이 왜 이 지경까지 되어버렸는지...”다들 그녀가 당연히 자신의 편에 서야 할 뿐만아니라 자신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의사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태지연은 바닥에 다리를 웅크리고 앉은 채 서로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녀의 가족을 해치려는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때 그녀를 아껴주던 부모와 오빠조차 이제는 그녀를 이용하려고만 했다.모두 그녀를 속이면서 정작 그녀한테는 진심을 다하라고 요구했다.태지연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왜 내가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일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거야?”“날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날 속이는데 왜 난 그걸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야? 난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진실만을 원할 뿐이야. 그게 다야.”“이렇게 간단한 일조차 해줄 수 없는 거야?”“왜? 내가 바보 같아? 난 그냥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인데 왜 너희는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그녀의 눈물은 순식간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를 무릎에 묻은 채 어깨가 떨릴 정도로 흐느꼈다.진실이 그녀 앞에 명백히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그들은 태지연이 절망에 빠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계속해서 속이려고만 했다.무언의 눈물에서 작게 흐느끼다 마지막에는 이를 악문 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태지연은 자신이 고집하는 게 과연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입술이 터져 피비린내가 느껴질 때까지 입술을 깨물었다.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신연은 그녀의
신연은 언제나 태지연에게 다정하게 대했다.그의 눈빛은 차분했고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하지만 태지연은 마치 약점을 찔린 듯 몸이 굳어버린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신연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지나치게 평온한 시선이 되레 태지연의 마음을 한껏 졸여왔다.“왜?”신연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연아, 너도 그 계약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거지?”“착하지, 그만 돌려줘.”신연은 아이를 타이르듯 다정하게 말했다. “너한테 있는 거 알아.”“...없어.”태지연은 점점 눈빛이 흐려지더니 힘겹게 입을 뗐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계약서라니, 난 모르는 일이야.”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그제야 의지와는 다르게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을 진정시켰다.그녀는 오빠가 신연을 해치지 않기를 바랐고 마찬가지로 신연이 오빠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태지연은 누구에게도 그 계약서를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며 모든 생각을 숨기려 했다.신연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나 거짓말하는 거 제일 싫어해.”태지연은 순간 몸이 굳었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 “나 아니야...”“정말이야?”신연이 다시 물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응.””그럼 이게 뭔지 설명해 줄 수 있겠어?”신연은 말을 마치고 서랍에서 약병과 약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그녀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전에 침대 옆 서랍에 숨겨둔 비타민 약병과 피임약이었다.최근에 산 피임약을 아직 비타민 약병에 넣을 시간이 없었다. 태송백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깜빡 잊고 있었다.신연은 순간적으로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말해 봐. 집에 왜 이런 약이 있는 거야?”그녀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신연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잠긴 목소리로 변명했
태지연은 눈앞이 흐려진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계속 걸어갔다.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직 신연만이 떠올랐다.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가정에서 자랐을까? 신연이 그렇게 말하기를 꺼렸던 그의 가정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더군다나 신기철이 진정 신연에게 미안하다면 왜 그에게 한 번도 어떤 보상을 하지 않았을까?모두가 신연이 차갑다고 말했지만 태지연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연은 단지 그녀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신을 지켜준 소년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 역시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그녀는 고등학교 뒤편 작은 정원에 항상 떠돌이 고양이들이 많았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신연이 작은 난간에 기댄 채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나누어주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새끼 고양이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항상 신연 주위에 모여서는 그의 다리를 비볐다.그는 분명 귀찮아하는 표정이 있었지만 고양이들을 밀어내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새끼 고양이가 그의 발치에서 잠드는 것도 허락했다. 동물들의 감각은 예리한 법이다. 그들은 항상 신연을 잘 따랐다.그런 신연의 모습이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애써 억눌렀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녀가 사랑했던 신연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다....갑자기 손목이 세차게 잡히며 태지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눈앞의 상황이 서서히 선명해지며 뒤에서 태은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야?”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까지 와 있었다. 방금 태은정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환자를 밀고 지나가던 간호사랑 부딪힐 뻔했다.그녀는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태은정은 그녀를 흘겨보더니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데려갔다.차에 타고 나서야 태지연은 정신을 차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고마워.”“고맙긴. 내가 네 언니인데.”태은정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