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다른 경호원들을 물려줘. 전처럼 채린 씨만 곁에 있게 해줘. 솔직히 매번 내 뒤에 여러 명이 따라다니는 거, 나 불편해.”임유진은 그 상황이 꼭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안 돼.”강지혁이 단호하게 거절했다.“왜? 왜 안 되는데?”“뭐가 됐든 안 돼. 넌 지금 경호가 필요한 몸이야. 그러니까 사람 물리는 건 안 돼.”강지혁은 김재호 일도 그렇고 진세령이 탈옥한 일도 그렇고 아직 임유진에게는 그 어떤 것도 얘기할 생각이 없었다.불안의 근원 중 어떤 것은 단지 그의 의심과 추측에 불과하니까. 그러니 앞으로 일주일 정도밖에 남지 않은 출산 예정일까지는 그녀가 불안해할 만한 그 어떤 빌미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 마음이 임유진에게는 전달이 되지 않았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이러는 게 결국에는 자신을 향한 불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우리 사이에 믿음이 고작 그거밖에 안 돼?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어떻게 하면 떠나지 않겠다는 내 말을 믿어줄래?”그녀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강지혁은 마치 임유진의 내면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려는 듯 그녀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럼 나한테 키스해 봐.”“뭐?”갑작스러운 요구에 임유진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나한테 키스하라고. 네가 먼저 나한테 입을 맞추면 그때는 네가 떠나지 않을 거라는 거 믿어줄게.”강지혁은 단지 살과 살이 맞닿는 느낌을 원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마음의 안정감을 원했다. 그녀를 믿어도 된다는, 그녀의 사랑이 진심이라고 확신할만한 안정감을 원했다.그의 사랑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커지고 부풀어지기만 하는데 임유진은 꼭 아닌 것 같아서, 임유진은 언제든지 그를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서.실제로 임유진이 결혼을 승낙한 것도 이미 생겨버린 아이들과 병원에 누워있는 한지영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 때문에 임유진은 어쩔 수 없게 그의 곁에 있게 된 것이었다.그래서 강지혁은 마음속으로 늘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아무
임유진의 몸은 마치 로봇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굳어있었고 움직임 하나하나가 뻣뻣하기 그지없었다.하지만 그녀는 그럼에도 뒤꿈치까지 들고 강지혁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어느새 무척이나 가까워져 있었고 그 덕에 길게 뻗은 그의 속눈썹과 그의 검은색 눈동자가 바로 코앞에서 보였다.이제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가면 입술이 맞닿게 된다.서로의 입술이 맞닿으면 강지혁도 그녀가 떠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믿을 것이다.강지혁은 아마 모르겠지만 임유진은 생각보다 그를 더 사랑하고 있었고 놓치고 싶지 않아 했다.자신을 향한 강지혁의 사랑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애정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물론 과거의 진실로 마음에 고통이 일고 아주 조금은 그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사실 고통받은 거로 따지면 강지혁도 그녀 못지않다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다시 함께 한 뒤로 강지혁은 거의 틈만 나면 그녀에게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해달라는 말을 했으니까.아마 강지혁은 그때부터 늘 불안해 왔는지도 모른다.그래서 임유진은 그에게 안정감을 주고 싶었다. 그걸 증명할 방법이 신체적인 접촉밖에 없다고 해도 그녀는 기꺼이 그를 위해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임유진은 뻣뻣하게 굳은 몸을 조금 더 밀착시키며 서서히 얼굴을 강지혁의 얼굴 가까이 가져갔다.이제 남은 거리는 고작 2cm, 강지혁의 숨결이 전달되어 오며 그의 얼굴이 점점 더 가까이 보였다.임유진은 눈을 질끈 감고 그저 입만 맞추면 된다고, 그러면 괜한 오해 같은 건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심장이 쿵쿵 뛰고 드디어 강지혁의 입술과 맞닿은 순간, 그녀의 몸이 움찔 떨리더니 이내 뭘 느낄 새도 없이 강지혁의 몸에서 멀리 떨어져 나갔다.임유진은 뒤로 빠르게 한걸음 물러선 후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그대로 화장실로 뛰쳐 갔다.그러고는 변기를 잡고 토하기 시작했다.“웩... 웩!”얼마나 세게 토를 한 건지 그녀는 아침에 먹었던 것을 전부 다 토해버렸다.그렇게 얼마나 토를
...강지혁은 방에서 나온 뒤에야 옆에 늘어진 손을 꽉 말아쥐었다.아까 임유진이 그의 팔을 잡고 먼저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얼굴이 가까이했을 때 그는 긴장감에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고 기대감에 마음이 잔뜩 부풀어 올랐다.하지만 그가 마지막에 맛본 건 또 한 번의 실망감뿐이었다.믿음을 주려고 노력은 한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스스로의 몸은 속일 수 없었다. 그녀의 몸은 여전히 그를 밀어내고 있었다. 여전히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그렇다는 건 그녀가 그를 진정으로 용서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하지만 뭐가 됐든 임유진은 그에게 거짓말이라도 사랑한다고 해줬고 용서하겠다는 말도 해줬다. 닿는 걸 거부하면서도 그를 안심시켜주기 위해 열심히 닿으려고 했다.그러니 그거로 된 거다.어차피 두 사람에게는 아직 시간은 많으니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다 제거하고 아이까지 무사히 출산한 후 다시 차근차근 관계를 쌓아 나아가면 된다.강지혁은 밖에 있는 이모님과 경호원에게 다가와 임유진의 상황에 관해 몇 마디 당부를 건넸다.그런데 그때 고이준이 다급하게 들어오더니 강지혁의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대표님!”강지혁은 그의 다급한 태도에 사람들을 다 물린 후 고이준을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일이야?”“드디어 김재호를 찾았습니다.”고이준의 말에 강지혁의 몸이 흠칫했다.“어디서 찾았지?”“회장님 산소에 있더라고요. 저희 애들을 발견하고 바로 도망가려고 했지만 다행히 무사히 잘 잡아뒀습니다. 현재 묘원 옆의 오두막에 있는데 지금 바로 만나러 가시겠습니까?”“그래. 노인네가 대체 어떤 지시를 내렸는지 한번 들어봐야지.”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사실 김재호를 잡은 건 좋지만 이제껏 꼭꼭 숨어있다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이 영 석연치 않았다. 게다가 진세령의 탈옥 사건도 신경이 쓰이고 말이다.강지혁은 진세령의 탈옥에 김재호가 크게 엮여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가지.”강지혁이 아래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고이준도 바로 그의 뒤를 따랐다.
“피고 임유진, 음주 운전으로 피해자 진애령을 사망에 이르게 하였으므로 징역 3년에 처한다!”“유진아, 미안한데, 그 일 때문에 우리 부모님이 널 반대하셔. 탓하고 싶으면 그 사고를 저지른 널 탓해. 그러게 왜 하필이면 진애령을 쳐 죽이냐고.”“진애령은 진화 그룹 큰딸이자 강지혁의 약혼녀였어. 너 강지혁 몰라? S시에 있는 그 누구도 감히 그를 건드릴 수 없어. 그런데 왜 하필이면……, 우리 그만하자. 우리 집안까지 화를 입게 할 수는 없어.”“임유진 씨, 죄송하지만 당신은 이미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으므로 아무리 좋은 경력을 갖고 있더라도 채용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그 사건과 연루된 지라, 자격증이 있다고 할지라도…… 어려울 겁니다. 죄송합니다.”“네가 무슨 낯짝으로 집에 기어들어 와? 그 일로 우리 집안이 얼마나 곤욕을 치렀는지 알기나 해? 네 동생은 여주인공으로 데뷔할 수 있었는데, 너 하나 때문에 무산됐다고! 넌 네 여동생의 앞길을 망쳤어. 당장 이 집에서 나가! 난 너 같은 범죄자를 딸로 둔 적 없어!”……유진은 꽁꽁 얼어붙은 손을 비볐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1월의 밤이었다.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그녀의 살과 뼈를 파고들었다.노란 형광색의 환경미화원 복장을 입고 있는 유진의 청초한 얼굴은 찬바람을 맞아 어느새 붉게 물들었다. 예쁘고 맑은 두 눈 아래에 오뚝한 코와 빨간 입술, 긴 머리를 대충 질끈 묶어 올린 그녀의 모습은 온갖 풍파를 겪은 여성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그녀의 얼굴만 보면 아마 갓 대학을 졸업한 사회 초년생 정도로 볼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젊음의 활기 대신 사회의 모든 풍파를 겪은 듯한 체념과 무기력함이 담겨 있었다.유진은 3년의 옥살이로 거칠거칠해진 자기 손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본래 새하얗고 보드라웠던 그녀의 손은 온데간데없었다.손에 감각이 돌아온 그녀는 계속해서 빗자루를 들고 길을 쓸다가 돌연 그녀의 시선은 길 건너편의 검은 실루엣에 멈췄다.이른 아침, 그녀가 이 거리를 청소할 때
“혹시 갈 곳이 없으면 저랑 같이 갈래요?”임유진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유진은 자기가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충동적으로 낯선 남자를 집에 데려오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어쩌면 이 남자가 아무런 공격성이 없어 보여서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이 남자가 감옥에 있을 때의 자신과 너무 닮아서일 수도 있다.그도 아마 그녀와 똑같이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열심히 살아보려 발버둥 치고 있는 그녀에 반해, 그는 세상에 아무런 미련도 없는 것 같았다.“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괜찮으시다면 바닥에서 주무시겠어요? 이불 깔아 드릴게요.”유진은 침묵을 유지하는 상대에게 새 수건과 새 칫솔을 꺼내 건네주었다.“욕실은 저쪽이에요. 남자 옷이 없어서……, 최대한 옷이 젖지 않게 조심하세요.”남자가 욕실에 들어가자 유진은 바닥에 이부자리를 깔고 여분의 이불을 꺼냈다.그녀가 살고 있는 그리 집은 크지 않은 원룸이다. 기껏해야 5평 남짓한 크기에 따로 주방도 없이 달랑 화장실 하나 있는 게 다였다. 때문에 평소에 요리를 해 먹을 때면 구비해 둔 인덕션을 사용하곤 했다.남자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 여전히 같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머리는 물에 젖어있었다.유진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수건 하나를 꺼내 들고 몸을 일으켰다.“허리 좀 숙여 봐요.”남자는 허리를 숙이는 대신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물기를 닦아드리려고요. 머리가 너무 축축하잖아요, 안 말리면 감기 걸리기 십상이에요. 다른 뜻은 없어요.”여전히 유진을 빤히 쳐다보던 남자는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지금 나 걱정하는 거예요?”서늘한 목소리였지만 이상하리만치 듣기 좋았다.“네.”유진은 눈을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제가 당신을 데려온 이상 걱정하는 건 당연하잖아요.”속눈썹이 살짝 떨리던 그는 이내 천천히 몸을 숙였다.그제야 유진은 수건을 그의 머리에 덮고 담담히 물기를 털어주었다.“이름이 뭐예요?”오랜 침묵 끝에 그의 입에서
임유진은 입술을 오므리며 대답했다.“네, 원해요.”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좋아요.”이건 그녀가 처음 보는 남자의 미소였다. 매우 옅고 희미한 미소였지만 매우 아름다웠다.……출근해야 하는 유진은 그에게 5천원을 건네며 밥을 챙겨 먹으라고 했다.혁이 유진의 집에서 나오자 이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는 그를 보고 공손히 인사했다.“대표님.”“가자.”강지혁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검은색 벤츠에 올라탄 지혁은 손에 쥐고 있던 5천 원짜리 지폐를 한참이나 바라봤다.‘오랜만에 용돈을 받아보네. 그것도 5천원을.’그는 생각할수록 웃음이 새어 나왔다.“강 대표님, 어제 대표님과 같이 있던 여성분은 환경위생과의 계약직 직원입니다. 한 달 전부터 이곳에서 월세로 지내고 계시고, 2달 전에 출소하신 걸로 확인됩니다.”오랫동안 지혁의 개인 비서였던 고이준이 차에 오르기 바쁘게 보고하기 시작했다.“감옥?”“네. 이름은 임유진, 3년 전 음주 운전으로 진애령 씨를 죽인 장본인이자 소민준의 전 여자친구입니다. 그때 그 일로 3년 동안 징역을 살았고 변호사 자격까지 취소당했습니다.”이준은 지혁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지혁은 매년 이맘때면 남루한 차림으로 노숙자인 양 거리에 앉아있곤 했다.이는 지혁의 이상한 취미이자 꺼내면 안 될 금기에도 가깝다. 누구도 감히 묻지 못하는 금기.심지어 그의 곁에서 오랜 세월 함께 해온 이준마저 자기의 대표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몰랐다. 이건 어느 순간부터 그의 루틴이자 꼭 치러야 할 의식이었다. 이미 모두가 우러러보는 선망의 대상일지 언정 매년 이 행동은 반복됐다.추운 겨울밤, 지혁은 홀로 거리에 머물렀다.이준이 할 수 있는 일은 멀지 않은 곳에 차를 세우고 하루 종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밤 11시 35분만 되면 다시 그가 알던 강 대표님으로 돌아올 지혁을.하지만 모든 일에 예외가 있듯이, 어젯밤은 이변이 일어났다. 낯선 여자가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건 것이었다. 게다가
임유라의 낯빛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리고 옆에서 듣고 있던 임정호는 망설임도 없이 임유진의 뺨을 때렸다.“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니? 네가 사고로 사람을 죽여 감옥에 간 거로 우리 집 체면이 얼마나 깎였는지 알아? 네 인생 망쳤다고 동생 앞날도 망칠 셈이야?”임정호의 눈에는 유진에 대한 원망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가 유진 덕에 서씨 집안과 인연을 맺게 되었을 때 친구들과 친척들 사이에서 많은 부러움과 질투를 샀지만, 그 일이 있고 나서 그 부러움은 모두 비아냥으로 변했고 우쭐대던 그도 체면이 완전히 깎여버렸다.유진의 한쪽 뺨은 이미 붉게 부어올랐지만, 눈빛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차분했다.“어머니 제사 때문에 왔는데, 보아하니 이곳에서 제사를 지낼 필요는 없는 것 같네요. 앞으로 이 집에 다시는 발 들일 일 없을 겁니다.”말을 마친 유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집을 나섰다. 이 ‘집’에는 이제 그녀의 자리가 없었다.……유진이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왔을 때, 방 안은 캄캄했다. 불을 켠 뒤 그녀를 맞이하는 건 그저 쓸쓸한 적막감뿐이었다.5평 남짓한 방은 아무도 없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혁이 씨는 간 건가? 결국 또 혼자구나.’유진은 문득 공허함을 느꼈다.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문을 닫으려고 몸을 살짝 돌렸을 때, 자신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그림자에 멍해졌다.‘혁이 씨잖아!’그는 여전히 어제와 똑같은 남루한 옷차림으로 봉투 하나를 들고 있었다. 두꺼운 앞머리가 얼굴을 반 정도 가려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유진은 그 앞머리에 가려진 얼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있다.‘이런 사람이…… 정말 노숙자라고?’그녀는 아무런 친분도 없고 어떤 사람인지조차 모르는 그를 받아들인 것이 얼마나 충동적이고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다.어쩌면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었을지도 모른다.“나 왔어요.”차갑고 무심한 목소리였지만 그녀에겐 그저 듣기 좋은 빗소리와 같았다.
“그야…….”임유진은 손에 들고 있던 한 입 남은 찐빵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맛은 생각보다 별로였다. 예전 같았으면 맛없다고 투정 부렸을 테지만, 지금 그녀에게 맛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배를 채우면 되는 거였다.“우리는 많이 닮았으니까? 이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발버둥 치고 있는 사람이잖아. 어쩌면 그 누구도 우리를 원하지 않을 거고, 관심을 주지 않을 테지만, 적어도 우리는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말을 마친 그녀는 강지혁을 향해 살짝 미소 지었다. 희망과 기대 속에 김장감도 섞여 있었다.“그런가? 하긴, 우리가 비슷한 부류긴 하지…….”진혁은 나지막이 중얼거렸지만, 그의 눈은 마치 덫에 걸린 동물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진혁에게는 하루하루가 지루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가질 수 있는 그에게 삶은 아무런 재미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유진의 말은 꽤 흥미로운 게임으로 다가왔다.“누나.”그는 유진이 그토록 바라던 단어를 입 밖으로 꺼냈다.순간, 유진의 미소는 봄에 핀 꽃들처럼 화사하게 피어났다.……저녁을 먹고 난 뒤, 유진은 지혁을 데리고 야시장으로 가, 그가 입을 옷을 샀다. 분명 세일하는 싼 옷을 골랐지만 금액은 10만원을 훌쩍 넘었다.하지만 유진은 뿌듯한 마음으로 지혁에게 새 패딩을 입혀줬다.“따뜻하지?”“응.”지혁은 담담하게 대답하며 자신과 머리 하나 정도 차이가 나는 아담한 유진을 바라봤다.“사실 안 사줘도 돼. 원래 있던 옷으로도 충분해.”“충분해도 새 옷을 입을 순 있잖아. 물론 돈이 없어서 많이는 못 사주지만, 적어도 너한테 옷 한 벌 정도는 사줄 수 있거든?”“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줘?”진혁은 나지막이 물었다.“그야 내가 네 누나니까.”유진은 싱긋 웃으며 지혁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우연히 닿은 차가운 그의 손에 유진은 양손으로 감싸 입김을 불어주며 이리저리 비벼댔다.“손이 너무 차가운데? 이렇게 문지르다 보면 좀 따뜻해질 거야.”스스럼없는 여자의 행동에 지혁은 약간 굳어버렸고
...강지혁은 방에서 나온 뒤에야 옆에 늘어진 손을 꽉 말아쥐었다.아까 임유진이 그의 팔을 잡고 먼저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얼굴이 가까이했을 때 그는 긴장감에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고 기대감에 마음이 잔뜩 부풀어 올랐다.하지만 그가 마지막에 맛본 건 또 한 번의 실망감뿐이었다.믿음을 주려고 노력은 한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스스로의 몸은 속일 수 없었다. 그녀의 몸은 여전히 그를 밀어내고 있었다. 여전히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그렇다는 건 그녀가 그를 진정으로 용서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하지만 뭐가 됐든 임유진은 그에게 거짓말이라도 사랑한다고 해줬고 용서하겠다는 말도 해줬다. 닿는 걸 거부하면서도 그를 안심시켜주기 위해 열심히 닿으려고 했다.그러니 그거로 된 거다.어차피 두 사람에게는 아직 시간은 많으니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다 제거하고 아이까지 무사히 출산한 후 다시 차근차근 관계를 쌓아 나아가면 된다.강지혁은 밖에 있는 이모님과 경호원에게 다가와 임유진의 상황에 관해 몇 마디 당부를 건넸다.그런데 그때 고이준이 다급하게 들어오더니 강지혁의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대표님!”강지혁은 그의 다급한 태도에 사람들을 다 물린 후 고이준을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일이야?”“드디어 김재호를 찾았습니다.”고이준의 말에 강지혁의 몸이 흠칫했다.“어디서 찾았지?”“회장님 산소에 있더라고요. 저희 애들을 발견하고 바로 도망가려고 했지만 다행히 무사히 잘 잡아뒀습니다. 현재 묘원 옆의 오두막에 있는데 지금 바로 만나러 가시겠습니까?”“그래. 노인네가 대체 어떤 지시를 내렸는지 한번 들어봐야지.”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사실 김재호를 잡은 건 좋지만 이제껏 꼭꼭 숨어있다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이 영 석연치 않았다. 게다가 진세령의 탈옥 사건도 신경이 쓰이고 말이다.강지혁은 진세령의 탈옥에 김재호가 크게 엮여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가지.”강지혁이 아래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고이준도 바로 그의 뒤를 따랐다.
임유진의 몸은 마치 로봇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굳어있었고 움직임 하나하나가 뻣뻣하기 그지없었다.하지만 그녀는 그럼에도 뒤꿈치까지 들고 강지혁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어느새 무척이나 가까워져 있었고 그 덕에 길게 뻗은 그의 속눈썹과 그의 검은색 눈동자가 바로 코앞에서 보였다.이제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가면 입술이 맞닿게 된다.서로의 입술이 맞닿으면 강지혁도 그녀가 떠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믿을 것이다.강지혁은 아마 모르겠지만 임유진은 생각보다 그를 더 사랑하고 있었고 놓치고 싶지 않아 했다.자신을 향한 강지혁의 사랑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애정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물론 과거의 진실로 마음에 고통이 일고 아주 조금은 그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사실 고통받은 거로 따지면 강지혁도 그녀 못지않다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다시 함께 한 뒤로 강지혁은 거의 틈만 나면 그녀에게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해달라는 말을 했으니까.아마 강지혁은 그때부터 늘 불안해 왔는지도 모른다.그래서 임유진은 그에게 안정감을 주고 싶었다. 그걸 증명할 방법이 신체적인 접촉밖에 없다고 해도 그녀는 기꺼이 그를 위해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임유진은 뻣뻣하게 굳은 몸을 조금 더 밀착시키며 서서히 얼굴을 강지혁의 얼굴 가까이 가져갔다.이제 남은 거리는 고작 2cm, 강지혁의 숨결이 전달되어 오며 그의 얼굴이 점점 더 가까이 보였다.임유진은 눈을 질끈 감고 그저 입만 맞추면 된다고, 그러면 괜한 오해 같은 건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심장이 쿵쿵 뛰고 드디어 강지혁의 입술과 맞닿은 순간, 그녀의 몸이 움찔 떨리더니 이내 뭘 느낄 새도 없이 강지혁의 몸에서 멀리 떨어져 나갔다.임유진은 뒤로 빠르게 한걸음 물러선 후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그대로 화장실로 뛰쳐 갔다.그러고는 변기를 잡고 토하기 시작했다.“웩... 웩!”얼마나 세게 토를 한 건지 그녀는 아침에 먹었던 것을 전부 다 토해버렸다.그렇게 얼마나 토를
“그럼 다른 경호원들을 물려줘. 전처럼 채린 씨만 곁에 있게 해줘. 솔직히 매번 내 뒤에 여러 명이 따라다니는 거, 나 불편해.”임유진은 그 상황이 꼭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안 돼.”강지혁이 단호하게 거절했다.“왜? 왜 안 되는데?”“뭐가 됐든 안 돼. 넌 지금 경호가 필요한 몸이야. 그러니까 사람 물리는 건 안 돼.”강지혁은 김재호 일도 그렇고 진세령이 탈옥한 일도 그렇고 아직 임유진에게는 그 어떤 것도 얘기할 생각이 없었다.불안의 근원 중 어떤 것은 단지 그의 의심과 추측에 불과하니까. 그러니 앞으로 일주일 정도밖에 남지 않은 출산 예정일까지는 그녀가 불안해할 만한 그 어떤 빌미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 마음이 임유진에게는 전달이 되지 않았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이러는 게 결국에는 자신을 향한 불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우리 사이에 믿음이 고작 그거밖에 안 돼?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어떻게 하면 떠나지 않겠다는 내 말을 믿어줄래?”그녀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강지혁은 마치 임유진의 내면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려는 듯 그녀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럼 나한테 키스해 봐.”“뭐?”갑작스러운 요구에 임유진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나한테 키스하라고. 네가 먼저 나한테 입을 맞추면 그때는 네가 떠나지 않을 거라는 거 믿어줄게.”강지혁은 단지 살과 살이 맞닿는 느낌을 원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마음의 안정감을 원했다. 그녀를 믿어도 된다는, 그녀의 사랑이 진심이라고 확신할만한 안정감을 원했다.그의 사랑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커지고 부풀어지기만 하는데 임유진은 꼭 아닌 것 같아서, 임유진은 언제든지 그를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서.실제로 임유진이 결혼을 승낙한 것도 이미 생겨버린 아이들과 병원에 누워있는 한지영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 때문에 임유진은 어쩔 수 없게 그의 곁에 있게 된 것이었다.그래서 강지혁은 마음속으로 늘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아무
강지혁은 샤워를 마친 후 가운으로 갈아입고 거울 앞으로 가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물방울이 머리카락에서부터 떨어져 그의 볼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얼굴 전체를 뒤덮은 물방울들은 꼭 그의 눈물 같기도 했다.“할아버지가 얘기한 그 날은 절대 오지 않을 거예요. 유진이는 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했고 나도 아버지처럼 목숨을 끊을 생각 없어요. 나와 유진이는 곧 태어날 아이들과 함께 평생 잘 살 거예요.”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속에는 견고한 다짐이 섞여 있었다....그 뒤로 며칠간 임유진과 강지혁은 거의 저택에만 있다시피 했다.임유진은 간혹 심심하거나 할 때 한지영과 탁유미에게 전화를 해 무료함을 달랬다.한지영과 탁유미는 임유진과 강지혁의 사이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것을 듣고 잘 됐다며 기뻐해 주었다.탁유미는 두 사람 사이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은 바가 없지만 뭐가 됐든 잘 해결됐다고 하니 기분이 좋았다.그리고 다 알고 있는 한지영은 다시 임유진에게 전화를 걸어 조심스럽게 물었다.“정말 내려놓기로 한 거야? 괜찮겠어?”그녀는 임유진의 당시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사람이라 임유진이 감방에서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받은 것과 괴롭힘에 지쳐 하마터면 자살 직전까지 내몰렸다는 것까지 전부 다 알고 있기에 아무래도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응. 한번 노력해보려고. 진심이야.”임유진의 말에 한지영은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됐다.“그럼 다행이고. 참, 엄마랑 아빠가 명절 겸 너희 두 사람을 집으로 초대하고 싶다는데 시간 괜찮아? 나 구해줘서 고맙다고 꼭 한번 맛있는 거 먹이고 싶으시대.”“고마운 거로 따지면 내가 더 고맙지. 네가 아니었으면 난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지도 못했을 테니까.”임유진은 한지영에게만큼은 뭘 줘도 아깝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지영의 집으로 가는 날짜를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임유진은 휴대폰을 내려놓은 후 마침 이쪽으로 걸어오는 강지혁을 향해 말했다.“방금 지영이랑 통화했는데 내일 우리더러 자기
다만 전과 다른 게 있다면 한 침대에서 자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임유진이 씻고 나왔을 때 강지혁은 소파로 향하며 말했다.“나는 소파에서 잘게. 내가 침대에서 자야 네가 편할 거야.”강지혁은 그녀가 그로 인해 또다시 토를 하고 반응을 일으킬까 봐 자진해서 소파에서 자겠다고 했다.다음날.임유진은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조심스럽게 윗몸을 일으켰다. 앞을 바라보니 강지혁은 소파에 누운 채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다.이에 그녀는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와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이상한 일이었다.강지혁은 단 한 번도 그녀보다 늦게 눈을 뜬 적이 없었으니까. 게다가 지금은 아침 9시였다.‘아직도 잔다고?’임유진은 의문을 품으며 조용히 강지혁의 잠 자는 얼굴을 바라보았다.어제도 느꼈지만 그는 확실히 살이 빠져 있었다. 잠자는 모습에서도 살이 빠진 게 확 티가 날 정도였다.게다가 잠을 제대로 못 잔 건지 그의 눈 밑에는 옅은 다크서클도 있었다.그때 강지혁의 미간이 꿈틀거리더니 평온했던 얼굴이 순식간에 두려움에 잠식되고 식은땀까지 흘리기 시작했다.“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절대...”강지혁의 입이 살짝 열리며 이런 말들이 튀어나왔다.“뭐가 그럴 리 없는데?”임유진은 그의 상태에 조금 당황한 듯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의 볼을 매만졌다.하지만 그와 살이 맞닿는 순간 그녀의 몸은 또다시 급속도로 굳어지기 시작했다.‘대체 뭐가 문제인 건데! 내가 내려놓겠다잖아. 과거 같은 거 이제는 잊어보겠다잖아! 그런데 왜 아직도 이런 반응이냐고!’임유진은 몸이 점점 차가워지자 결국 손을 거두어들이고 큰소리로 강지혁을 향해 외쳤다.“혁아, 혁아! 일어나봐!”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던 걸까? 강지혁의 눈이 갑자기 번쩍 떠졌다.절망으로 가득 잠겨있던 그의 눈동자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고서야 정신을 차린 듯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대체 꿈에서 뭘 봤길래 이래?”임유진이 호흡을 가다듬는 강지혁을 바라보며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야.”강지혁은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잖아. 그러니 이제는 내려놓고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지영이 말대로 이제는 앞만 보며 행복하게 살려고.”임유진은 심호흡을 한번 내쉰 후 자신 안의 갈등과 모순들을 하나둘 내려놓고 드디어 요 며칠 줄곧 고민했던 말을 그에게 전했다.“혁아, 널 용서할게. 그리고 널 떠나지 않을게. 그때 너한테 했던 약속, 지킬게.”그녀는 결정을 내렸다.이 말이 입 밖으로 나왔을 때 임유진의 몸은 마치 그때의 고통을 기억하라는 듯 그녀에게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머리가 맑아졌다.어쩌면 임유진은 그간 그녀를 괴롭혔던 것들을 전부 다 내려놔야만 진정한 행복을 얻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야만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 함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임유진은 강지혁을 이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지금 그를 놓쳐버린다면 평생 후회와 지금보다 더 큰 고통 속에서 살게 될 거라는 걸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강지혁은 떨리는 입술을 서서히 벌리며 물었다.“정말... 정말 날 용서해줄 거야? 정말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응, 영원히 네 곁에 있을게.”강지혁의 어머니도 그를 떠났고 강지혁의 아버지도 그를 떠났고 이제는 강지혁의 할아버지마저 그를 떠났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임유진은 평생 강지혁과 함께 즐겁게 살고 싶었다.강지혁은 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유진아...”그는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쏟아내며 그녀의 이름만 계속해서 불러댔다.임유진은 탁자 위에 있는 티슈를 들어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울지 마. 다 용서할 테니까 울지 마...”“응. 안 울게. 나 안 울어...”강지혁은 울지 말라는 그녀의 말에 애써 눈물을 참아보며 빨개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우는 강지혁의 모습은 정말 흔치 않은데 오늘 그는 그녀의 앞에서 두 번이나 펑펑 울어댔다.일전 병원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를 이렇게 울보로 만들 수 있는 건 오직 임유진
강지혁은 임유진의 말에 마치 이제야 생기가 돌아오는 듯 눈을 반짝이더니 입꼬리를 아주 예쁘게 위로 말아 올렸다.“정말 내가 보고 싶었어? 정말...?”강지혁은 감격에 찬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며 눈물까지 글썽였다.임유진은 생각보다 더 큰 그의 반응에 순간 심장이 움찔거렸다. 고작 보고 싶었다는 그 한마디가 그에게는 눈물까지 글썽일 일이었나?강지혁이 자신을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건 그녀 역시 잘 알고 있는 일이다.그리고 그녀 역시 강지혁 못지않게 그를 사랑하고 있다.“밥 먹어. 음식 다 식겠다. 식으면 맛없어.”“응, 그럴게. 오늘이 우리가 함께 보내는 첫 설날이지만 앞으로는 이런 날들이 끝도 없이 많을 거야. 우리는 앞으로 계속 함께 있을 거야. 내 말이 맞아?”강지혁은 조금 긴장과 기대감이 뒤섞인 얼굴로 질문을 빙자한 자신의 바람을 얘기했다.임유진은 그가 원하는 답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응. 앞으로는 매년 이렇게 함께 있을 거야.”그녀의 이 한마디로 그의 바람과 기대가 완전히 충족되었다.그때 강지혁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그의 볼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는 울고 있었다. 하지만 입꼬리는 기쁜 듯 여전히 위로 올라가 있었다.그 웃음이 꼭 따뜻한 햇볕과도 같아 임유진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우는 모습에 괜히 가슴이 찌릿하며 마음이 아파 났다....강지혁이 갑자기 울어버리는 바람에 거의 2시간이 지나서야 식사가 끝이 났다.“이따 설날 특집으로 하는 예능을 볼 건데 같이 볼래?”임유진이 물었다.그러고 보면 설날 특집으로 하는 예능 프로를 안 본 지도 꽤 오래되었다.어릴 때까지만 해도 외할머니 품에 안겨 늘 함께 예능 프로를 봤었는데 아버지와 함께 도시로 가게 된 뒤로는 설날 특집으로 나오는 예능 프로든 설 특선 영화든 하나도 관심이 없어졌다.설날만 되면 티비 시청 권한은 언제나 임유라에게 있었으니까. 임유진은 진정한 가족 같은 임정호와 방미령, 그리고 임유라 사이
“언제부터 자고 있었습니까?”강지혁이 물었다.“주무신 지 1시간 정도 됐을 거예요.”이모님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에게 곁을 양보했다.강지혁은 허리를 숙이며 한쪽 무릎을 꿇더니 손을 들어 임유진의 볼을 부드럽게 매만졌다.그는 그녀가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가 됐을 때만 그녀를 만질 수 있다. 또다시 그녀가 거부반응을 일으키며 토해서는 안 되니까.이모님은 강지혁의 행동을 보더니 저도 모르게 짧게 소리를 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사실 그녀는 강지혁이 그 대신으로 고용한 사람이라 그간 강지혁의 얼굴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말이 사모님이지 임유진을 그저 엉겁결에 강지혁의 아이를 임신해 이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꿰찬 별 볼 일 없는 여자라고 생각했었다. 강지혁이 그녀를 사랑할 거라고는 아주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하지만 이렇게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마치 조금만 건드려도 깨지는 유리구슬이라도 되는 것처럼 임유진을 조심스럽게 매만지고 또 꿀이 떨어질 것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보는 이 행동은 누가 봐도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행동이었다.그때 임유진의 속눈썹이 움찔 떨리더니 이내 그녀가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임유진은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보이는 강지혁의 얼굴에 몽롱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혁아...”강지혁은 그 말에 마치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아이처럼 서둘러 손을 거두어들였다.“미안, 내가 깨웠지? 졸리면 더 자도 돼.”“안 잘래. 지금 자면 저녁에 잘 수 없을 테니까.”임유진은 눈을 비비적거리며 일어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강지혁은 얼른 그녀를 부축하려다가 뭔가 생각난 듯 뻗은 손을 다시 거두어들이더니 이모님더러 부축하라고 했다.“세수하고 나와. 그동안 식탁 세팅하고 있을 테니까.”“응.”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배가 커진 탓에 소파에서 일어서는 것도 시간이 한참이나 걸렸다.세수를 다 하고 식탁 쪽으로 걸어가자 강지혁이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앉은 채 고개를
임유진이 먼저 식사 제안을 해왔다는 건 그를 용서할 마음이 생겼다는 뜻이 틀림없었다.똑똑.그때 누군가가 조금은 조급하게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들어와.”허락이 떨어지자 고이준이 빠르게 안으로 들어와 보고했다.“대표님, 진세령이 탈옥했습니다!”그 말에 강지혁의 얼굴이 순식간에 다시 어두워졌다. 그는 고이준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경찰들 말로는 오늘 새벽 3시경에 탈옥했다고 합니다. CCTV는 누군가에 의해 지워졌고요. 그래서 현재 상황으로는 누가 진세령을 도와준 건지 파악하기 어렵습니다.”고이준의 말에 강지혁은 주먹을 꽉 말아쥐며 머릿속으로 사람들을 한번 훑어 내려갔다.진씨 가문일까? 아니면 소씨 가문?진세령은 연예인이었으니까 뒷배가 있는 사생팬이 그녀를 꺼내줬을 수도 있다.만약 그것도 아니면...“진씨 가문과 소씨 가문 인간들한테 사람을 붙여. 수상한 낌새가 포착되면 바로 나한테 보고하고. 그리고 최대한 빨리 김재호를 찾아내!”강지혁은 김재호가 꼭 시한폭탄 같았다. 그래서 그 시한폭탄이 엉뚱한 곳에서 터지기 전에 하루빨리 찾고 싶었다.김재호의 실종이 정말 강문철의 지시와 연관이 있는 건지, 만약 있다고 하면 그 지시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김재호를 찾아내야만 알 수 있다....드디어 설 전날이 되고 임유진은 드디어 강지혁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강지혁은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기고 회색 스리피스 정장에 검은색 코트를 입었다. 조금 핼쑥해진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것 나름대로 또 분위기 있고 멋있어 보였다.하지만 다 좋은데 두르고 있는 목도리와 장갑은 지금 그의 패션과 많이 동떨어져 있었다.임유진은 그가 하고 있는 목도리와 털장갑이 1년 전 자신이 그를 위해 뜬 것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당시 그녀는 오래된 스웨터의 올을 다 풀고 그것으로 그의 목도리와 장갑을 만들었다.“왜? 왜 그렇게 빤히 봐?”강지혁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부드럽게 물었다.“아... 그냥 음.. 네가 그 목도리랑 장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