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강지혁이 다가와 뒤에서 임유진을 감싸며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만약 그 어느 날 내가 너한테 큰 잘못을 저질러서 방금 이경빈이 그랬던 것처럼 울어버리면 너는 어떡할 거야? 용서해줄 거야?”임유진은 그 말에 실소를 터트렸다.“무슨 소리야. 갑자기 그런 가정을 왜 해. 그리고 네가 나한테 잘못할 질을 할 리가 없잖아.”“그냥 만약에... 만약에 내가 그러면 어떡할 거야?”강지혁은 고개를 살짝 들어 입술로 그녀의 귓불을 간지럽혔다.그는 임유진을 너무나도 많이 사랑해 그녀가 너무나도 무서웠다.임유진은 그의 뜨거운 숨결과 입술 촉감이 그대로 전해져 저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그녀는 진지한 얘기 중에 은근히 스킨십을 해오는 그가 괘씸한데도 또 그게 너무나도 유혹적이라 괜히 심술이 나 몸을 돌리고 그를 노려보았다.“용서해줄 거야? 아니면 탁유미 씨처럼 더 이상...”강지혁은 ‘더 이상 나와 엮이고 싶어 하지 않아 할 거야?’라는 말을 하려다가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나면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아 결국 입을 다물었다.이딴 사소한 것을 신경 쓸 정도로 그는 임유진과 관련된 일이면 늘 이렇게 겁쟁이가 되고 만다.임유진은 강지혁의 눈빛을 마주 보고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아련해졌다.임신하고 난 뒤 모성애가 폭발하기라도 한 건지 귀가 축 처진 강아지 같은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찡해 나며 당장이라도 끌어안아 주고 싶었다.“못 살아 진짜. 너 이러다 나중에 아주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바로 울겠다? 그래도 아빠가 될 사람인데 그렇게 쉽게 눈물을 보이면 안 되지.”임유진은 두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매만지며 다정한 목소리로 얘기했다.“하지만 만약 네가 정말 이경빈처럼 그렇게 울어버린다면 나는 아마... 매우 속상해할 거야. 어쩌면 그때는 네가 무슨 짓을 하든 간에 다 용서해주겠다고 할지도 모르지.”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그녀의 손을 잡고 손바닥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응, 꼭 용서해줘야 해. 약속한 거야.”
“나는 더 이상 이경빈과 엮이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간이식 수술을 받는다고 해서 결과가 좋을 거라는 보장도 없고요. 알아보니 실패한 사례들이 꽤 많더라고요.”탁유미가 담담하게 말했다.사실 1기나 2기 정도였으면 간이식 수술을 생각해봤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녀는 발견 당시 벌써 3기였고 몸도 하루가 다르게 나빠져 가고 있었기에 수술에 대한 큰 희망을 품을 수가 없었다.“혁이한테 부탁해서 이쪽으로 제일 유명한 교수님을 찾아올게요. 분명히 성공할 수 있을 거예요!”임유진이 다급하게 말하자 탁유미가 가볍게 웃었다.“유진 씨, 고마워요. 하지만 이제는 됐어요. 나는 나머지 몇 개월을 병상 위에서 보내고 싶지 않아요. 만약 수술하게 되면 계속 병원에만 있게 되잖아요.”“하지만...!”“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시간을 큰 의미 없는 수술에 쓰고 싶지 않아요.”탁유미의 몸은 지금 이 순간에도 빠르게 나빠지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탁유미였다.그래서 그녀는 무의미한 노력을 하고 싶지 않았다.임유진은 죽음을 받아들인 것 같은 탁유미를 빤히 바라보았다.탁유미가 이토록 쉽게 포기하는 건 수술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경빈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언니한테는 윤이도 있고 아주머니도 있잖아요. 언니가 이대로 포기해버리면 두 사람은 어떡해요? 남게 될 사람도 생각해야죠.”“유진 씨,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어요. 마지막 몇 개월을 수술 하나에 의존하는 거, 나는 못 해요.”그 말에 임유진은 고개를 푹 숙였다.탁유미가 현재 어떤 마음인지 사실 이해를 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수술이 백 퍼센트 성공적으로 끝난다는 보장도 없고 설사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해도 재발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으며 후유증 같은 것도 생길 수 있으니까.임유진이 떠난 후 김수영이 다가와 말했다.“유미야, 그냥 이경빈이 간을 기증한다고 할 때 받는 게 어때? 그러면 살 수 있는 희망이라도 생기잖아.”방금 임유진과 탁유미의 대화로 김수영은 일전 간
탁유미는 깨끗이 청소를 마친 후 슬슬 윤이를 데리러 갈 시간이 되자 김수영에게 얘기한 후 곧바로 집을 나섰다.탁유미가 밖으로 나온 순간, 멀지 않은 곳에 정차된 차량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몰래 따라붙기 시작했다.이경빈은 잔뜩 마른 탁유미의 뒷모습을 보며 가슴이 욱신거려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탁유미는 그가 눈앞에 나타나는 걸 좋아하지 않기에 이경빈은 이런 식으로밖에 그녀를 지켜볼 수 없었다.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어떻게 하면 그녀가 간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알지 못했다.“유미 언니는 이미 마음을 굳힌 것 같아요. 아마 당분간은 그 결정을 돌리는 게 쉽지 않겠죠. 하지만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언제든지 언니한테 간을 기증할 수 있게 준비해줘요. 이경빈 씨가 언니를 정말 사랑하는 거라면요.”며칠 전 임유진이 건넨 이 말에 이경빈은 바로 술을 끊었고 간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엄격하게 식단관리도 하고 몸 관리도 했다.이경빈은 탁유미가 유치원 앞에 멈춰서자 이내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유치원 앞에는 그녀 말고 다른 학부모들도 기다리고 있었다.그중에서 그녀는 유독 더 말라보였고 얼굴은 가뜩이나 작은데 병세로 인해 더 수척해 보였다.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옷만큼은 무척이나 단정하고 또 깔끔했다.탁유미는 아무리 아파도 윤이를 데려올 때만큼은 늘 자신의 겉모습을 신경 썼다.화려하게 치장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타인이 윤이를 낮잡아 보지는 못하게 최대한 깔끔하게 자신을 꾸몄다.이경빈은 그녀의 생각을 눈치채고는 조금 웃기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쓸쓸하기도 했다.자신의 아들을 낮잡아 볼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지만 그런 빌미를 만들어 준 사람은 결과적으로 그였으니까.만약 당시 탁유미를 감옥으로 보내지 않았으면 윤이가 감옥에서 태어나는 일도 없었을 거고 청력을 잃게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윤이는 누구보다 풍족한 생활을 누렸을 것이다.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유치원 문이 열리고 아이들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학
“그건 그쪽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탁유미는 말을 마친 후 이곳에서 벗어나려는 듯 윤이의 손을 꽉 잡았다.여기서 더 언쟁을 높이게 되면 일이 더 커질 뿐만이 아니라 윤이도 겁을 먹을 테니까.그런데 그때 여자가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나는 내 아들을 형을 살고 나온 전과자의 자식과 같은 유치원을 다니게 하고 싶지 않아. 범죄를 저지른 부모 아래에서 얼마나 정상적인 아이가 나오겠어? 범죄도 유전이야!”그녀의 목적은 아주 간단했다. 주변 학부모들의 이목을 이쪽으로 집중시켜 탁유미를 곤란하게 하려는 것이었다.탁유미는 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분노 어린 눈빛으로 여자를 노려보았다.“말 가려서 해. 나이를 그만큼 먹었으면 어른답게 행동해야지. 아이들 앞에서 이게 지금 무슨 짓이야? 그리고 우리 윤이는 당신이 멋대로 판단해도 될 애가 아니야. 당장 내 아들한테 사과해!”여자는 탁유미의 기세에 눌려 흠칫하더니 이내 다시 정신을 차리고 소리를 질렀다.“사과하라고? 당신 아들한테? 내가 왜? 뭐, 사과하지 않으면 이번에는 나를 밀어버리게? 또 콩밥 먹게 해줘?!”탁유미는 그녀의 말에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눈앞에 있는 여자는 정말 그녀의 아픈 구석을 칼로 난도질하듯 후벼팠다.탁유미는 손을 부들부들 떨더니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제대로 대응하지 않으면 윤이에게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을 것 같아 마음을 다잡고 여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사과하지 않으면 당신 고소할 거야.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지 상관없어. 당신이 우리 애한테 사과할 때까지 나는 끝까지 갈 테니까!”갈 땐 가더라도 윤이가 앞으로 괴롭힘당하지 않게는 해줘야만 한다.엄마로서 좋은 건 못 해줘도 이것만큼은 해줘야 한다.“고소? 하하하! 감방살이하고 나온 주제에 어디서 고소를 들먹여?”하지만 여자는 가소롭게 웃으며 탁유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그때 뒤에서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당장 사과하지 않으면 내일 바로 소장 받게 될 거야. 그리고
만약 이경빈이 정말 탁유미 모자를 위해 뭔가를 하게 되면 여자의 집안은 아마 뭘 할 수 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남편이 제아무리 대기업 과장이라고 해도 이경빈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일 테니까.원래는 다른 학부모들의 시선을 끌어 탁유미가 스스로 아이의 유치원을 옮기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경빈이 등장한 지금 그 시선에 난감해진 건 오히려 자기 자신이었다.여자는 창피하기도 하고 또 이가 갈리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사과의 말을 건넸다.“죄, 죄송해요. 아까는 말 헛나온 거예요.”“사과는 내가 아닌 내 아들한테 해야지. 그리고...”이경빈은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아이 엄마한테도.”그는 자신과 탁유미 사이를 뭐라고 얘기하면 좋을지 몰랐다.여자는 그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지금은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현명하다고 판단해 얼른 탁유미와 윤이에게도 사과를 했다.“미안해요. 내가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됐었는데... 아줌마가 미안해. 다시는 그런 말 안 할 테니까 용서해줘.”여자는 말을 마친 후 아들의 손을 잡고 빠르게 뛰어갔다.탁유미는 고개를 숙여 윤이에게 말했다.“이제 가자. 할머니가 집에서 기다리겠다.”“엄마, 사생아가 뭐예요?”그때 윤이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했다.이에 탁유미는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옆에 있던 이경빈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이경빈은 탁유미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앞으로 한발 다가가 자신이 대답했다.“윤아, 미안해. 다 아빠 잘못이야. 넌 절대 사생아가 아니야. 아빠의 유일한 아들이야.”윤이는 그의 대답에 조그마한 입술을 깨물며 그를 노려보았다.지난번 이경빈이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자신을 적대시하는 아들의 태도에 이경빈은 저도 모르게 또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윤아...”“엄마, 우리 이만 집으로 가요.”윤이는 고개를 홱 돌리며 이경빈의 시선을 피했다.윤이의 존재를 부정했던 말과 탁유미에게 상처를 줬던 말을 그렇게도
탁유미는 이경빈의 말에 별다른 감흥이 없는 듯 평온한 얼굴로 물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야? 그럼 비켜. 이만 집으로 가야 하니까.”“내 얼굴 보고 싶지 않다는 거 알아. 그래서 나도... 최대한 네 앞에 나타나지 않으려고 했어. 하지만 나를 거부하지는 말아줘. 아니, 최소한 내 간만은 거부하지 말아줘. 너 계속 이대로 수술하지 않으면 그때는 정말...”“입 다물어!”탁유미는 이경빈의 말을 자르며 잔뜩 긴장한 얼굴로 윤이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자신이 아프다는 걸 윤이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평소 약을 먹을 때도 일부러 윤이가 없을 때를 봐가면서 먹었다.이제 남은 시간도 얼마 없는데 그 시간 동안 윤이의 걱정스러운 눈빛만 보는 건 사양이었다. 이경빈은 탁유미의 표정에 그제야 이 일은 아직 윤이에게는 비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엄마 아파요? 수술해야 해요?”윤이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아니, 엄마 너무 건강한데? 아빠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거야.”타이밍도 참 얄궂게 이 말이 내뱉어진 다음 순간 탁유미는 또다시 간이 아파 나기 시작했다.탁유미는 고통을 참으며 다시 윤이 손을 잡았다.‘빨리 집으로 가서 약을 먹어야 해.’“자, 빨리 가자.”탁유미는 애써 고통을 참으며 발걸음을 옮겼다.하지만 그때 이경빈의 큰손이 다가와 그녀의 팔을 덥석 잡았다.“너 지금 또 아픈 거지?”다급한 그의 질문에 탁유미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이거 놔.”“대답해. 너 지금 또 진통 시작된 거지?!”이경빈은 그녀의 진통이 빈번하게 일어날수록 그녀의 몸이 점점 더 유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안 되겠다. 지금 당장 나랑 병원 가자!”“이경빈, 쓸데없는 짓 하지 마! 병원은 무슨, 나는...”탁유미는 이경빈에게 쏘아붙이려다가 진통이 심해져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윤이는 이경빈이 탁유미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는 것을 보며 지난번 이경빈이 자신을 떼어내고 탁유미를 억지로 데려간 것이 생각났다.그 일이 있고 난 뒤 다시 만난 탁
이경빈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그대로 탁유미를 안아 들고 윤이에게 말했다.“지금 당장 엄마 데리고 병원으로 갈 거야. 윤이도 엄마 아픈 거 싫지?”윤이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경빈을 따라 차량 쪽으로 달려갔다.차 문이 열린 후 이경빈은 탁유미를 조수석에 내려놓았고 윤이는 아무 말 없이 서둘러 뒷좌석에 올라탔다.아이는 시트에 편히 등을 기대는 것이 아닌 몸을 앞으로 하며 잔뜩 긴장한 얼굴로 탁유미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조금만 참아요.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들이 엄마 구해줄 거예요. 그러면 하나도 안 아플 거예요!”탁유미는 그 말에 남은 힘을 끌어다 애써 웃어 보였다. 아들의 걱정 가득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엄마는 괜찮아... 조금만 있으면 금방 괜찮아져.”모자의 대화에 이경빈은 가슴이 미어져 서둘러 시동을 걸고 병원으로 향했다.가는 길 그는 혹여 아픈 소리를 내면 윤이가 걱정할까 봐 이를 꽉 깨물고 참는 그녀를 보며 문득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그날 탁유미는 그와 나란히 걷던 도중 울퉁불퉁한 바닥에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분명히 아플 텐데도 그녀는 괜찮다며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서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시 걸었다.그러다 날이 어두워지고 집에 거의 도착할 때쯤 그녀의 발걸음은 티가 나게 느려졌고 이에 이상함은 여긴 이경빈은 그녀의 발을 힐끔 봤다가 그제야 퍼렇게 멍든 그녀의 발목을 발견했다.“바보야? 왜 아프다고 말을 안 해?”이경빈의 추궁에 탁유미는 그의 눈빛을 피하며 우물쭈물 답했다.“아프다 그러면 또 걱정할 거잖아. 그리고 솔직히 이 정도는 집에 가서 약 바르면 금방 나아.”탁유미는 늘 이랬다. 늘 이렇게 자기보다는 옆에 사람을 더 위하며 자기가 받는 고통은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버렸다.그녀는 그런 여자였다.이경빈은 차량이 빨간 불에 멈출 틈을 타 티슈를 꺼내 탁유미의 땀을 닦아주었다.많이 아픈 건지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땀 범벅이 되었고 고통을 참느라 이빨에게 혹사당한 입술은 빨갛
“피고 임유진, 음주 운전으로 피해자 진애령을 사망에 이르게 하였으므로 징역 3년에 처한다!”“유진아, 미안한데, 그 일 때문에 우리 부모님이 널 반대하셔. 탓하고 싶으면 그 사고를 저지른 널 탓해. 그러게 왜 하필이면 진애령을 쳐 죽이냐고.”“진애령은 진화 그룹 큰딸이자 강지혁의 약혼녀였어. 너 강지혁 몰라? S시에 있는 그 누구도 감히 그를 건드릴 수 없어. 그런데 왜 하필이면……, 우리 그만하자. 우리 집안까지 화를 입게 할 수는 없어.”“임유진 씨, 죄송하지만 당신은 이미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으므로 아무리 좋은 경력을 갖고 있더라도 채용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그 사건과 연루된 지라, 자격증이 있다고 할지라도…… 어려울 겁니다. 죄송합니다.”“네가 무슨 낯짝으로 집에 기어들어 와? 그 일로 우리 집안이 얼마나 곤욕을 치렀는지 알기나 해? 네 동생은 여주인공으로 데뷔할 수 있었는데, 너 하나 때문에 무산됐다고! 넌 네 여동생의 앞길을 망쳤어. 당장 이 집에서 나가! 난 너 같은 범죄자를 딸로 둔 적 없어!”……유진은 꽁꽁 얼어붙은 손을 비볐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1월의 밤이었다.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그녀의 살과 뼈를 파고들었다.노란 형광색의 환경미화원 복장을 입고 있는 유진의 청초한 얼굴은 찬바람을 맞아 어느새 붉게 물들었다. 예쁘고 맑은 두 눈 아래에 오뚝한 코와 빨간 입술, 긴 머리를 대충 질끈 묶어 올린 그녀의 모습은 온갖 풍파를 겪은 여성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그녀의 얼굴만 보면 아마 갓 대학을 졸업한 사회 초년생 정도로 볼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젊음의 활기 대신 사회의 모든 풍파를 겪은 듯한 체념과 무기력함이 담겨 있었다.유진은 3년의 옥살이로 거칠거칠해진 자기 손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본래 새하얗고 보드라웠던 그녀의 손은 온데간데없었다.손에 감각이 돌아온 그녀는 계속해서 빗자루를 들고 길을 쓸다가 돌연 그녀의 시선은 길 건너편의 검은 실루엣에 멈췄다.이른 아침, 그녀가 이 거리를 청소할 때
이경빈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그대로 탁유미를 안아 들고 윤이에게 말했다.“지금 당장 엄마 데리고 병원으로 갈 거야. 윤이도 엄마 아픈 거 싫지?”윤이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경빈을 따라 차량 쪽으로 달려갔다.차 문이 열린 후 이경빈은 탁유미를 조수석에 내려놓았고 윤이는 아무 말 없이 서둘러 뒷좌석에 올라탔다.아이는 시트에 편히 등을 기대는 것이 아닌 몸을 앞으로 하며 잔뜩 긴장한 얼굴로 탁유미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조금만 참아요.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들이 엄마 구해줄 거예요. 그러면 하나도 안 아플 거예요!”탁유미는 그 말에 남은 힘을 끌어다 애써 웃어 보였다. 아들의 걱정 가득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엄마는 괜찮아... 조금만 있으면 금방 괜찮아져.”모자의 대화에 이경빈은 가슴이 미어져 서둘러 시동을 걸고 병원으로 향했다.가는 길 그는 혹여 아픈 소리를 내면 윤이가 걱정할까 봐 이를 꽉 깨물고 참는 그녀를 보며 문득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그날 탁유미는 그와 나란히 걷던 도중 울퉁불퉁한 바닥에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분명히 아플 텐데도 그녀는 괜찮다며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서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시 걸었다.그러다 날이 어두워지고 집에 거의 도착할 때쯤 그녀의 발걸음은 티가 나게 느려졌고 이에 이상함은 여긴 이경빈은 그녀의 발을 힐끔 봤다가 그제야 퍼렇게 멍든 그녀의 발목을 발견했다.“바보야? 왜 아프다고 말을 안 해?”이경빈의 추궁에 탁유미는 그의 눈빛을 피하며 우물쭈물 답했다.“아프다 그러면 또 걱정할 거잖아. 그리고 솔직히 이 정도는 집에 가서 약 바르면 금방 나아.”탁유미는 늘 이랬다. 늘 이렇게 자기보다는 옆에 사람을 더 위하며 자기가 받는 고통은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버렸다.그녀는 그런 여자였다.이경빈은 차량이 빨간 불에 멈출 틈을 타 티슈를 꺼내 탁유미의 땀을 닦아주었다.많이 아픈 건지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땀 범벅이 되었고 고통을 참느라 이빨에게 혹사당한 입술은 빨갛
탁유미는 이경빈의 말에 별다른 감흥이 없는 듯 평온한 얼굴로 물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야? 그럼 비켜. 이만 집으로 가야 하니까.”“내 얼굴 보고 싶지 않다는 거 알아. 그래서 나도... 최대한 네 앞에 나타나지 않으려고 했어. 하지만 나를 거부하지는 말아줘. 아니, 최소한 내 간만은 거부하지 말아줘. 너 계속 이대로 수술하지 않으면 그때는 정말...”“입 다물어!”탁유미는 이경빈의 말을 자르며 잔뜩 긴장한 얼굴로 윤이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자신이 아프다는 걸 윤이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평소 약을 먹을 때도 일부러 윤이가 없을 때를 봐가면서 먹었다.이제 남은 시간도 얼마 없는데 그 시간 동안 윤이의 걱정스러운 눈빛만 보는 건 사양이었다. 이경빈은 탁유미의 표정에 그제야 이 일은 아직 윤이에게는 비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엄마 아파요? 수술해야 해요?”윤이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아니, 엄마 너무 건강한데? 아빠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거야.”타이밍도 참 얄궂게 이 말이 내뱉어진 다음 순간 탁유미는 또다시 간이 아파 나기 시작했다.탁유미는 고통을 참으며 다시 윤이 손을 잡았다.‘빨리 집으로 가서 약을 먹어야 해.’“자, 빨리 가자.”탁유미는 애써 고통을 참으며 발걸음을 옮겼다.하지만 그때 이경빈의 큰손이 다가와 그녀의 팔을 덥석 잡았다.“너 지금 또 아픈 거지?”다급한 그의 질문에 탁유미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이거 놔.”“대답해. 너 지금 또 진통 시작된 거지?!”이경빈은 그녀의 진통이 빈번하게 일어날수록 그녀의 몸이 점점 더 유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안 되겠다. 지금 당장 나랑 병원 가자!”“이경빈, 쓸데없는 짓 하지 마! 병원은 무슨, 나는...”탁유미는 이경빈에게 쏘아붙이려다가 진통이 심해져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윤이는 이경빈이 탁유미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는 것을 보며 지난번 이경빈이 자신을 떼어내고 탁유미를 억지로 데려간 것이 생각났다.그 일이 있고 난 뒤 다시 만난 탁
만약 이경빈이 정말 탁유미 모자를 위해 뭔가를 하게 되면 여자의 집안은 아마 뭘 할 수 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남편이 제아무리 대기업 과장이라고 해도 이경빈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일 테니까.원래는 다른 학부모들의 시선을 끌어 탁유미가 스스로 아이의 유치원을 옮기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경빈이 등장한 지금 그 시선에 난감해진 건 오히려 자기 자신이었다.여자는 창피하기도 하고 또 이가 갈리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사과의 말을 건넸다.“죄, 죄송해요. 아까는 말 헛나온 거예요.”“사과는 내가 아닌 내 아들한테 해야지. 그리고...”이경빈은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아이 엄마한테도.”그는 자신과 탁유미 사이를 뭐라고 얘기하면 좋을지 몰랐다.여자는 그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지금은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현명하다고 판단해 얼른 탁유미와 윤이에게도 사과를 했다.“미안해요. 내가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됐었는데... 아줌마가 미안해. 다시는 그런 말 안 할 테니까 용서해줘.”여자는 말을 마친 후 아들의 손을 잡고 빠르게 뛰어갔다.탁유미는 고개를 숙여 윤이에게 말했다.“이제 가자. 할머니가 집에서 기다리겠다.”“엄마, 사생아가 뭐예요?”그때 윤이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했다.이에 탁유미는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옆에 있던 이경빈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이경빈은 탁유미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앞으로 한발 다가가 자신이 대답했다.“윤아, 미안해. 다 아빠 잘못이야. 넌 절대 사생아가 아니야. 아빠의 유일한 아들이야.”윤이는 그의 대답에 조그마한 입술을 깨물며 그를 노려보았다.지난번 이경빈이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자신을 적대시하는 아들의 태도에 이경빈은 저도 모르게 또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윤아...”“엄마, 우리 이만 집으로 가요.”윤이는 고개를 홱 돌리며 이경빈의 시선을 피했다.윤이의 존재를 부정했던 말과 탁유미에게 상처를 줬던 말을 그렇게도
“그건 그쪽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탁유미는 말을 마친 후 이곳에서 벗어나려는 듯 윤이의 손을 꽉 잡았다.여기서 더 언쟁을 높이게 되면 일이 더 커질 뿐만이 아니라 윤이도 겁을 먹을 테니까.그런데 그때 여자가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나는 내 아들을 형을 살고 나온 전과자의 자식과 같은 유치원을 다니게 하고 싶지 않아. 범죄를 저지른 부모 아래에서 얼마나 정상적인 아이가 나오겠어? 범죄도 유전이야!”그녀의 목적은 아주 간단했다. 주변 학부모들의 이목을 이쪽으로 집중시켜 탁유미를 곤란하게 하려는 것이었다.탁유미는 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분노 어린 눈빛으로 여자를 노려보았다.“말 가려서 해. 나이를 그만큼 먹었으면 어른답게 행동해야지. 아이들 앞에서 이게 지금 무슨 짓이야? 그리고 우리 윤이는 당신이 멋대로 판단해도 될 애가 아니야. 당장 내 아들한테 사과해!”여자는 탁유미의 기세에 눌려 흠칫하더니 이내 다시 정신을 차리고 소리를 질렀다.“사과하라고? 당신 아들한테? 내가 왜? 뭐, 사과하지 않으면 이번에는 나를 밀어버리게? 또 콩밥 먹게 해줘?!”탁유미는 그녀의 말에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눈앞에 있는 여자는 정말 그녀의 아픈 구석을 칼로 난도질하듯 후벼팠다.탁유미는 손을 부들부들 떨더니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제대로 대응하지 않으면 윤이에게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을 것 같아 마음을 다잡고 여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사과하지 않으면 당신 고소할 거야.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지 상관없어. 당신이 우리 애한테 사과할 때까지 나는 끝까지 갈 테니까!”갈 땐 가더라도 윤이가 앞으로 괴롭힘당하지 않게는 해줘야만 한다.엄마로서 좋은 건 못 해줘도 이것만큼은 해줘야 한다.“고소? 하하하! 감방살이하고 나온 주제에 어디서 고소를 들먹여?”하지만 여자는 가소롭게 웃으며 탁유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그때 뒤에서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당장 사과하지 않으면 내일 바로 소장 받게 될 거야. 그리고
탁유미는 깨끗이 청소를 마친 후 슬슬 윤이를 데리러 갈 시간이 되자 김수영에게 얘기한 후 곧바로 집을 나섰다.탁유미가 밖으로 나온 순간, 멀지 않은 곳에 정차된 차량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몰래 따라붙기 시작했다.이경빈은 잔뜩 마른 탁유미의 뒷모습을 보며 가슴이 욱신거려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탁유미는 그가 눈앞에 나타나는 걸 좋아하지 않기에 이경빈은 이런 식으로밖에 그녀를 지켜볼 수 없었다.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어떻게 하면 그녀가 간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알지 못했다.“유미 언니는 이미 마음을 굳힌 것 같아요. 아마 당분간은 그 결정을 돌리는 게 쉽지 않겠죠. 하지만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언제든지 언니한테 간을 기증할 수 있게 준비해줘요. 이경빈 씨가 언니를 정말 사랑하는 거라면요.”며칠 전 임유진이 건넨 이 말에 이경빈은 바로 술을 끊었고 간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엄격하게 식단관리도 하고 몸 관리도 했다.이경빈은 탁유미가 유치원 앞에 멈춰서자 이내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유치원 앞에는 그녀 말고 다른 학부모들도 기다리고 있었다.그중에서 그녀는 유독 더 말라보였고 얼굴은 가뜩이나 작은데 병세로 인해 더 수척해 보였다.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옷만큼은 무척이나 단정하고 또 깔끔했다.탁유미는 아무리 아파도 윤이를 데려올 때만큼은 늘 자신의 겉모습을 신경 썼다.화려하게 치장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타인이 윤이를 낮잡아 보지는 못하게 최대한 깔끔하게 자신을 꾸몄다.이경빈은 그녀의 생각을 눈치채고는 조금 웃기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쓸쓸하기도 했다.자신의 아들을 낮잡아 볼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지만 그런 빌미를 만들어 준 사람은 결과적으로 그였으니까.만약 당시 탁유미를 감옥으로 보내지 않았으면 윤이가 감옥에서 태어나는 일도 없었을 거고 청력을 잃게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윤이는 누구보다 풍족한 생활을 누렸을 것이다.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유치원 문이 열리고 아이들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학
“나는 더 이상 이경빈과 엮이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간이식 수술을 받는다고 해서 결과가 좋을 거라는 보장도 없고요. 알아보니 실패한 사례들이 꽤 많더라고요.”탁유미가 담담하게 말했다.사실 1기나 2기 정도였으면 간이식 수술을 생각해봤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녀는 발견 당시 벌써 3기였고 몸도 하루가 다르게 나빠져 가고 있었기에 수술에 대한 큰 희망을 품을 수가 없었다.“혁이한테 부탁해서 이쪽으로 제일 유명한 교수님을 찾아올게요. 분명히 성공할 수 있을 거예요!”임유진이 다급하게 말하자 탁유미가 가볍게 웃었다.“유진 씨, 고마워요. 하지만 이제는 됐어요. 나는 나머지 몇 개월을 병상 위에서 보내고 싶지 않아요. 만약 수술하게 되면 계속 병원에만 있게 되잖아요.”“하지만...!”“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시간을 큰 의미 없는 수술에 쓰고 싶지 않아요.”탁유미의 몸은 지금 이 순간에도 빠르게 나빠지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탁유미였다.그래서 그녀는 무의미한 노력을 하고 싶지 않았다.임유진은 죽음을 받아들인 것 같은 탁유미를 빤히 바라보았다.탁유미가 이토록 쉽게 포기하는 건 수술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경빈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언니한테는 윤이도 있고 아주머니도 있잖아요. 언니가 이대로 포기해버리면 두 사람은 어떡해요? 남게 될 사람도 생각해야죠.”“유진 씨,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어요. 마지막 몇 개월을 수술 하나에 의존하는 거, 나는 못 해요.”그 말에 임유진은 고개를 푹 숙였다.탁유미가 현재 어떤 마음인지 사실 이해를 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수술이 백 퍼센트 성공적으로 끝난다는 보장도 없고 설사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해도 재발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으며 후유증 같은 것도 생길 수 있으니까.임유진이 떠난 후 김수영이 다가와 말했다.“유미야, 그냥 이경빈이 간을 기증한다고 할 때 받는 게 어때? 그러면 살 수 있는 희망이라도 생기잖아.”방금 임유진과 탁유미의 대화로 김수영은 일전 간
그때 강지혁이 다가와 뒤에서 임유진을 감싸며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만약 그 어느 날 내가 너한테 큰 잘못을 저질러서 방금 이경빈이 그랬던 것처럼 울어버리면 너는 어떡할 거야? 용서해줄 거야?”임유진은 그 말에 실소를 터트렸다.“무슨 소리야. 갑자기 그런 가정을 왜 해. 그리고 네가 나한테 잘못할 질을 할 리가 없잖아.”“그냥 만약에... 만약에 내가 그러면 어떡할 거야?”강지혁은 고개를 살짝 들어 입술로 그녀의 귓불을 간지럽혔다.그는 임유진을 너무나도 많이 사랑해 그녀가 너무나도 무서웠다.임유진은 그의 뜨거운 숨결과 입술 촉감이 그대로 전해져 저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그녀는 진지한 얘기 중에 은근히 스킨십을 해오는 그가 괘씸한데도 또 그게 너무나도 유혹적이라 괜히 심술이 나 몸을 돌리고 그를 노려보았다.“용서해줄 거야? 아니면 탁유미 씨처럼 더 이상...”강지혁은 ‘더 이상 나와 엮이고 싶어 하지 않아 할 거야?’라는 말을 하려다가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나면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아 결국 입을 다물었다.이딴 사소한 것을 신경 쓸 정도로 그는 임유진과 관련된 일이면 늘 이렇게 겁쟁이가 되고 만다.임유진은 강지혁의 눈빛을 마주 보고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아련해졌다.임신하고 난 뒤 모성애가 폭발하기라도 한 건지 귀가 축 처진 강아지 같은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찡해 나며 당장이라도 끌어안아 주고 싶었다.“못 살아 진짜. 너 이러다 나중에 아주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바로 울겠다? 그래도 아빠가 될 사람인데 그렇게 쉽게 눈물을 보이면 안 되지.”임유진은 두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매만지며 다정한 목소리로 얘기했다.“하지만 만약 네가 정말 이경빈처럼 그렇게 울어버린다면 나는 아마... 매우 속상해할 거야. 어쩌면 그때는 네가 무슨 짓을 하든 간에 다 용서해주겠다고 할지도 모르지.”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그녀의 손을 잡고 손바닥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응, 꼭 용서해줘야 해. 약속한 거야.”
이경빈은 갑자기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하지만 웃고 있다기에는 눈이 너무 슬퍼 보였다.“부럽네. 서로 옆에 딱 붙어 있잖아. 반면에 나랑 유미는...”강지혁은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이경빈은 잔뜩 취한 눈빛으로 강지혁을 바라보다 다시 임유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임유진 씨는 유미 친구잖아... 그러니까 말해줘. 내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유미가 내 간 기증을 받아들이고 수술을 받게 할 수 있는지...”임유진은 그의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네? 언니가 수술을 안 하겠대요? 아니, 이경빈 씨한테 간 기증을 안 받겠다고 했어요?”이경빈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나한테 뭔가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달갑지 않고 더 이상 나랑은 엮이기 싫다고 했어... 이대로라면 얼마 안가 죽는데도... 그래도 내 간은 싫대.”그는 탁유미가 살기를 원하고 있다. 용서는 둘째치고 일단 그녀가 목숨은 부지하기를 바라고 있다.그 말에 임유진의 얼굴이 한순간에 어두워졌다.탁유미가 살 방법은 현재로서는 간이식 수술밖에 없다. 그런데 거절이라니...임유진은 생각도 못 한 전개에 고민에 빠졌다.“뭐라고 말 좀 해봐. 임유진 씨 똑똑하잖아. 어떻게 하면 유미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지 얘기 좀 해보라고!”이경빈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임유진을 간절하게 바라보았다.임유진은 그런 그가 안쓰럽기도 하고 또 그의 꼴이 화가 나기도 했다.“그러게 조금만 더 일찍 언니를 향한 마음을 깨닫지 그랬어요. 아니면 감옥에 보낸 것으로 복수를 끝냈으면 두 번 다시 찾지 말던가 왜 다시 나타나서 또 언니한테 상처를 줘요!”“그래... 내 탓이야... 내가... 내가 다 잘못했어. 내가 등신이라 내 마음을 인정하지 않았어...”이경빈은 주먹을 말아쥐더니 이내 자신의 가슴팍을 퍽퍽 두드리기 시작했다.“날 증오한다고 했어... 유미가... 유미가...”이윽고 그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하더니 몇 초도 안 돼 얼굴 전체가 눈물로 뒤덮였다.지
“이경빈 씨가요?”임유진은 깜짝 놀라며 10시가 넘어가는 시계를 바라보았다.이 시간에 여기까지 찾아왔다고? 그것도 술에 취해서?“지금 바로 내려갈게요.”임유진은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잠깐.”그러자 강지혁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내가 만나고 올 테니까 넌 여기 있어.”“아니, 내가 만나는 게 나을 것 같아. 갑자기 찾아온 걸 보면 분명히 언니 일일 테니까.”임유진의 단호함에 강지혁은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집사를 향해 말했다.“금방 내려갈 테니까 일단 안으로 들여.”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외투부터 걸쳐. 그리고 슬리퍼도 신고.”강지혁은 말을 마친 후 한쪽 무릎을 꿇으며 임유진의 다리를 들어 슬리퍼를 신겨주었다.집사는 침실을 떠나기 전 그 모습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이 세상에 강지혁을 무릎 꿇릴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임유진밖에 없을 것이다.예로부터 강씨 집안 사람들은 극도로 비정하거나 극도로 감성적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강문철은 비정하다 못해 한여름에도 녹지 않을 얼음장 같은 사람이었고 그의 아들인 강선우는 지독한 낭만파로 사랑에 목을 맨 사람이었다.그리고 강지혁은 두 사람 중 하필이면 강선우를 닮았고 강선우처럼 한 여자를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집사는 강문철이 젊었을 때부터 이 집에서 집사로 일했던 사람이라 강지혁은 강선우의 전철을 따르지 않고 임유진과 깨가 쏟아질 만큼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임유진은 고개를 숙인 채 슬리퍼를 신겨주는 강지혁을 보며 마음이 따뜻해졌다.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가족이 아닌 강지혁에게서 느끼게 될 줄은 정말 생각도 못 했다.임유진은 가만히 구경하다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강지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이에 강지혁은 손을 잠깐 멈추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사람을 녹일 것 같은 그의 눈빛과 마주하니 어쩐지 세상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왜?”강지혁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