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효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또 한참 쳐다보더니 결국 아무 말 없이 위층으로 올라갔다.사진에 관한 일은 모두가 약속한 듯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다.하지만 송재이는 그들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주현아나 민효연이나 다들 그녀를 문란하고 천박한 년으로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한편 그들은 설영준에 대해 이런 편견이 없다.남자는 당연히 풍류가 넘치고 기개가 있지만 여자는 음탕하고 천박하다는 오명을 뒤집어써야 한다!이 사회가 원래 여자에 대한 편견이 많고 많은 법이다.송재이는 이런 불공평함을 바꿀 수 없으니 그저 묵묵히 참고 살아야 했다.그녀는 참 운이 안 따라주는 사람이다.분명 설영준을 피하고 싶었는데 하필이면 또다시 이 악순환에 휘말려 들었다.민효연이 제 딸의 약혼자와 불분명한 관계를 이어가는 과외교사를 바로 해고할 줄 알았는데 송재이는 의외로 그런 통보를 받지 못했다.연우의 생일이 지난 후 송재이는 더 이상 민효연의 집에서 주현아를 보지 못했다.그때 눈치챘다. 민효연과 주현아는 모녀 사이지만 둘은 썩 친해 보이지 않았다....송재이는 설영준의 집에서 3년 동안 설도영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선생과 제자의 관계를 떠나 그녀는 이 아이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다고 생각했고 설영준의 집을 떠난 이후로 이 아이와 따로 더 연락한 적도 없었다.문득 걸려온 설도영의 전화에 송재이는 마냥 놀라울 따름이었다.그래도 결국 전화를 받았다.“선생님, 저 친구랑 싸워서 지금 병원에 있어요...”설도영이 말을 더듬거렸다.전화기 너머로 아이는 가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가족들한테 감히 알릴 용기가 없어요. 선생님이 이리로 와주실 수 없나요? 감사의 뜻으로 제가 나중에 밥 한 끼 사드릴게요.”“...”송재이는 말문이 막혔다.거절하고 싶은데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병원에 도착해보니 설도영이 말한 ‘싸움’이 사실과 다르다는 걸 알아챘다. 이건 다툰 게 아니라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설도영에게 맞은 격이다.인상 속 설도영은 점잖은 중학생이라 전
방금 병실에 들어가 아이의 상황을 살펴보았는데 깁스를 한 모습이 마냥 처참할 따름이었다.송재이가 설도영을 데리고 와서 진심 어린 사과를 했음에도 상대방 부모는 대노하며 모진 욕설을 퍼부었다.처음 겪는 광경에 송재이도 당황스러워 얼굴이 빨개졌다.나중에 설도영이 듣다못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반박에 나섰다.“이봐요, 그러게 누가 댁 아드님 할 짓 없이 딴 여자애 나시 끈 잡아당겨서 망가뜨리래요? 본인이 더러운 행패를 부렸으니 얻어맞아도 싸요! 기왕 때리는 김에 확 죽여버릴 걸 그랬어요!!”사춘기 남자애들은 이성의 끈을 놓으면 걷잡을 수 없이 미쳐가는 법이다. 송재이는 설도영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어린놈의 자식이 뭘 이렇게 기고만장해? 우리 아들 털끝 하나 건드린 것까지 싹 다 돌려받을 거야!”상대가 펄쩍 뛰며 쏘아붙였다.“너 딱 기다려. 반드시 고소한다 내가!”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복도의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잘됐네요. 우리도 마침 법적 절차를 밟을 생각이었는데, 하실 말씀 있으시면 여기 있는 박 변호사님께 직접 얘기하세요.”순간 송재이는 심장이 철렁거렸다.설도영도 고개 돌려 큰소리로 외쳤다.“형!”송재이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문 쪽을 바라봤다.슈트 차림의 설영준은 창밖의 은은한 햇빛이 쏟아지자 조각 같은 얼굴이 유난히 더 빛났다.그의 준수한 외모는 뭇사람들 중에서 확연히 돋보이는 외모이고 송재이가 수년간 봐온 젊은 남자 중에 금욕의 매력을 내뿜는 아찔한 남자였다.고작 며칠을 못 봤을 뿐인데 지금 또다시 한없이 낯선 느낌이 든다.친형이 오자 설도영도 좀 전보다 목소리에 힘이 났다.설영준은 그를 힐긋 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설도영, 넌 돌아가서 얘기해!”이 한마디에 아이는 또다시 주눅이 들었다.설영준의 뒤에는 정장 차림의 키 큰 남자가 한 명 더 있었다.박윤찬은 여기서 송재이를 보니 살짝 의외라는 듯 그녀를 향해 머리를 끄덕였다.지금 급선무는 설도영의 일을 해결하는 것이다.박윤찬은 마른기침을 두어
병원을 나선 송재이는 속이 울렁거려 너무 괴로웠다.그녀는 나무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토하기 시작했다.다 토한 후 편의점에 들어가 생수 한 병 사서 길옆에 선 채로 한 모금씩 들이켰다.이때 누군가가 갑자기 어깨를 툭 내리쳤고 화들짝 놀란 송재이는 하마터면 생수병을 바닥에 떨어트릴 뻔했다. 다행히 설영준이 재빨리 생수병 밑굽을 받아들었는데 물이 튀기며 그의 옷소매를 다 적셨다.설영준은 눈썹을 찌푸리고 송재이를 쳐다봤다.“귀신 봤어?”송재이는 가슴 찔린 듯 입을 닦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길거리에 설영준과 단독으로 서 있으려니 그녀는 저절로 스트레스가 쌓였다.설영준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뭘 보는 거야?”“여기 카메라 있어? 누가 또 몰래 촬영하는 거 아니지?”“왜 이렇게 경계하는데?”설영준은 그녀의 잔뜩 긴장한 모습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언짢았다.송재이는 시선을 올리고 정색하며 그에게 말했다.“당신은 약혼녀 이외의 여자랑 엮이면 풍류가 넘친다는 말을 듣지만 난 아니야. 파렴치하게 내연녀 노릇이나 한다고 손가락질해.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결백함을 잃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영준 씨가 내 생각 좀 해서 거리를 유지해줬으면 좋겠어.”송재이는 뭐가 이렇게 급해서 다음 연애 상대를 만나려고 안달인 걸까? 설영준이 그녀의 앞길을 막기라도 할까 봐?설영준은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눈부신 햇살을 맞으며 서 있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과 고고한 기품은 늘 완벽 그 자체였다.길을 지나가던 젊은 여자들도 저도 몰래 뒤돌아보며 감탄을 연발했다.“우와, 너무 잘생겼어. 혹시 연예인 아님?”당장 뛰쳐 가서 포옹하고 싶은 충동이 생길 지경이었다.유독 송재이만 그를 멀리 피하고 싶어 한다.이 남자의 속을 알 수 없는 표정과 한없이 짙은 눈빛은 얼른 외면하고 싶었다.“너한테 덤터기 씌운 일은 이미 다 해결했잖아. 뭘 더 걱정하는 거야?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데?”말을 마친 설영준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송재이는 몸부림치고 싶었지만 액션
계속 비꼬려고 했지만 그녀의 빨개진 눈시울을 본 순간 목이 메었다.설영준은 여자를 다그치는 사람이 아닌데 오늘 설도영의 일로 짜증이 확 밀려온 듯싶다.그는 차 키를 만지작거리며 기분을 한결 가라앉힌 후 담담하게 말했다.“됐다.”곧이어 차에 시동을 걸었다.“바래다줄게.”무슨 남자가 기분 전환이 이렇게 빠르지?그래도 그 문제를 물고 늘어지지 않으니 한편으론 숨이 트였다.설영준과 함께한 3년 동안 사실 그녀는 이 차에 타본 적이 별로 없다. 둘의 데이트 장소는 설영준의 집이거나 그의 장하 별장 침대 위였다.잠자리를 가졌던 남녀는 그래도 어딘가 다르겠지.설영준에게 자신이 몇 번째 여자인지는 몰라도 그녀에게 설영준은 첫 남자였다.남자의 생리적 인식과 그런 방면의 체험은 전부 설영준한테서 얻었다.지금 그리 넓지 않은 차 안에 단둘이 있으니 송재이는 썩 편하지만은 않아 창밖으로 머리를 기울였다.이때 휴대폰이 울렸는데 설도영에게 걸려온 전화였다.송재이는 옆에서 운전하는 설영준을 힐긋 바라보다가 전화를 받았다.“선생님 말씀이 딱 맞아요. 우리 형이 모질게 굴 때면 진짜 소름이 끼친다니까요...”설도영은 생각할수록 울분이 차올라 끝내 송재이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했다.아이는 맨 마지막에 애원 조로 말했다.“쌤이 우리 형한테 사정하면 안 돼요? 나 진짜 사고 안 치고 열심히 학교 다닐게요. 그러니까 여름 방학에 여행 가게 해줘요, 네?”송재이가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이미 한발 늦었다. 설영준은 동생의 말을 한 글자도 빠짐없이 다 들었다.그녀가 내뱉었던 ‘모질게 군다’는 그 말까지...“너희 형이 어떤 사람인데 내 말을 들을 리가 있겠어?”송재이는 눈 딱 감고 용기 내어 반박했다.자신이 설영준에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란 걸 이 아이에게 알려야 한다. 설영준이 그녀를 소중한 존재로 여긴다는 건 설도영의 착각일 뿐이니까.또한 송재이는 옆에 있는 설영준에게도 알려야 한다. 자신은 본분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절대 불합리한 망상 따위 하지 않
한참 후 그녀가 생각했던 그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송재이는 눈을 감고 있어서 설영준이 얼마나 사람을 질식시켜버릴 것 같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봤는지 전혀 모른다.그는 송재이의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더니 ‘됐어’라는 말만 내뱉었다.그의 목소리를 들은 송재이는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송재이는 잠시 뒤에야 눈을 떴다.“얼굴에 속눈썹 묻어서.”설영준이 말했다.“떼어냈어.”그는 여전히 담담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마치 좀전의 야릇한 제스처와 그윽한 눈빛은 그녀만의 착각인 것처럼 만들어버렸다.송재이는 입술을 꼭 깨물고 화나서 얼굴이 또다시 빨개졌다!다만 그녀는 화를 낼 수가 없다.여기서 발끈하면 본인이 뭘 기대했는지, 얼마나 엉큼한 상상을 했는지 인정하는 셈이 되니까.그녀는 허리를 곧게 펴고 속으로 쉴 새 없이 되뇌었다.‘우린 이미 헤어졌어. 설영준은 지금 여자가 생겼다고. 한 인간으로서 딴 여자의 약혼자에게 망상을 품을 순 없어! 그건 너무 도덕에 어긋나는 일이야!’...송재이의 생각이 점점 더 골로 갔다.잠시 후 뒤에서 울리는 경적에 설영준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웃음기를 거두었다.방금 그녀를 놀리며 반응을 지켜보았는데 이렇게 깨고소할 수가 없다.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장난은 장난에 불과하다.설영준은 별안간 웃음기를 싹 거두고 아예 차 방향을 틀었다.송재이는 반응이 느려 잠시 넋 놓고 있다가 물었다.“어디 가?”그녀는 지금 일부러 설영준을 피하려고 하지만 설영준은 아예 그런 생각이 없는 듯싶다.송재이는 제발 좀 남자로서 책임감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주현아를 위해서라도 자꾸만 전 애인인 그녀와 엮이는 건 그릇된 일이라고 강조하고 싶었다.“어디 가는데? 나 안 가.”송재이의 반항은 그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설영준은 여전히 그녀의 집 반대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송재이는 이렇게 일방적인 설영준이 너무 싫다.이제 막 버럭 화내려 할 때 설영준이 입을 열었다.“나랑 같이 백화점 가서 선물 골라줘. 여자한테 줄 건데
너무 가까이 붙어 가면 몰래 사진 찍히거나 지인에게 들킬 수 있으니까...설영준은 자꾸만 움츠려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전에 함께 있을 땐 단 한 번도 단둘이 나와서 쇼핑한 적이 없었고 그 또한 송재이를 데리고 나올 생각조차 없었다!어느덧 헤어지고 나니 함께 백화점에 오게 될 줄이야.진열대 앞에 서서 송재이는 설영준에게 상대방의 취향이나 품위를 물으며 어떤 스타일의 쥬얼리를 맞춰줄지 고민했다.설영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딱 세 단어만 말했다.“겸손하고 소탈하고 단아한 거로 해.”매장 직원이 열성적으로 다가와 두 사람에게 몇 가지 매우 고급스러운 목걸이와 액세서리를 보여줬다.이탈리아 브랜드인 이 제품들은 디자인이나 퀄리티 모두 일품이었다.송재이가 하나 고르자 매장 직원이 꺼내서 그녀에게 착용해 주었는데 너무 잘 어울렸다.새하얀 피부가 광택이 나는 진주와 아주 잘 어울렸고 한결 청초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설영준은 거울 앞에 서서 실내의 밝은 조명을 받으며 묵묵히 그녀를 쳐다봤다.3억2천만 원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다!송재이도 그의 소비 수준을 잘 알고 있지만 여전히 고개 들어 한마디 물었다.“이건 어때?”설영준은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리더니 매장 직원에게 카드를 건넸다.매장 직원들은 이렇게 통쾌한 부자 고객들을 제일 좋아한다. 직원은 신나서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지금 바로 포장해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기다리는 동안 설영준의 시선은 여전히 진열대의 액세서리에 꽂혀 있었다.그는 무심코 송재이에게 말했다.“너도 하나 골라봐. 사줄게 내가.”자그마치 그의 곁에 3년이나 있었으니.진열대의 물건은 아무거나 대충 하나 골라도 몇천만 원대부터 몇억 원대에 달한다. 이 금액은 설영준에게 껌값에 불과하지만 송재이에겐 1, 2년 연봉 수준이다.그녀는 잠시 넋 놓고 있다가 웃으며 답했다.“그새 잊었네. 말했잖아, 난 전 남친 물건 같은 건 남기지 않아.”말을 마치니 또다시 가슴이 찔렸다.그에게 있어 송
식사를 이어가던 중 송재이가 아침에 설영준이 택배로 보내온 선물을 식탁에 올려놨다.“도영아, 이거 대신 너희 형한테 전해줘.”“이게 뭔데요?”“상관 말고 넌 그냥 전해주면 돼.”설도영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송재이는 의리 넘치게 바로 가주었다.지금 이건 고작 물건 하나 전해주라는 부탁이니 설도영도 흔쾌히 허락할 줄 알았는데 아이가 잠시 고민하더니 수저를 내려놓고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이거 혹시 쌤이 우리 형한테 돌려주는 이별 선물이에요? 그런 거라면 나 못 줘요. 괜히 나중에 나한테만 화풀이할 거라고요...”송재이는 가슴이 꽉 막혔다.요 녀석의 말투를 들으니 그녀와 설영준 사이를 진작 알아챈 듯싶다!어쩌면 사진 스캔들보다 더 빨리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한 송재이는 더 껄끄러워졌다!“너희 형 그렇게까지 시비 못 가리는 사람 아니야. 이 일로 너랑 화내지도 않을 거고, 그리고 또...”송재이는 설영준과 좋게 끝낸 사이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만약 좋게 끝낸 사이라면 설영준이 그녀를 차단할 필요가 있을까.차단당한 일만 떠올리면 울화가 저절로 치밀었다.“쌤은 우리 형에 대해 제법 잘 아시네요. 형이 어떤 성품인지도 잘 알고요.”설도영은 그녀의 말에서 흠을 잡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날렸다.송재이는 입술을 앙다물었다.역시 그 형에 그 동생이라니까. 아주 쌍으로 그녀를 속 썩이는 재주가 있다!“난 잘 몰라. 그 사람은 한때 나의 고용주였을 뿐이야.”그녀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담담하게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고용주면 쌤이 직접 주시지 뭣 하러 나보고 전해주래요? 거짓말하시는 거예요 아니면 마음 찔려서 감히 우리 형 못 만나는 거예요?”설도영이 맑은 두 눈을 깜빡이며 더없이 순수한 척했다.“...”송재이는 말을 잇지 못한 채 하마터면 사레들릴 뻔했다.인제 보니 설영준만 잘 알지 못한 게 아니라 설도영을 가르친 보람도 없었다.결국 그녀 스스로 마주해야 한다.헤어질 때 설도영이 문득
이 남자가 그녀에게 미련이 남아 있다면 그건 아마도 육체적인 욕구겠지.섹스는 할 수 있어도 미래는 줄 수 없는, 늘 그래왔던 남자니까.다만 송재이는 더는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그녀와 작별한 후 설도영도 차에 앉아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서 설도영은 방금 편의점에서 산 군것질거리를 먹으며 설영준에게 전화했다.“형, 나 금방이면 집 도착해요.”전화기 너머로 설영준의 시큰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몇 살인데 아직도 이런 걸 얘기해?”“방금 재이 쌤이랑 같이 저녁 먹었어요. 내가 지금 돈 없는 걸 알고 쌤이 사주셨어요.”설도영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잠시 후 설영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오늘 밤에 송재이 선생님이랑 같이 밥 먹었다고?”“네.”설도영은 일부러 3초간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재이 쌤 혹시 형 짝사랑해요?”순간 설영준은 미간을 구겼지만 동생의 말을 끊지는 않았다.설도영이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다름이 아니라 쌤 화장실 갈 때 일부러 보려고 한 건 아닌데 휴대폰이 식탁 위에 있길래 우연히 봤거든요. 휴대폰 잠금 화면이 글쎄 형 사진이더라고요. 뭐 물론 형이 워낙 잘생겼으니까 쌤이 짝사랑하는 것도 아주 당연한 일이죠...”“나중에 돌아오고 나서 왜 형 사진을 잠금 화면으로 해두었냐고 물었더니 쌤이 엄청 수줍어하면서 절대 형한테 말하지 말랬어요. 역시 짝사랑하는 여자들은 수줍음이 많다니까요. 형도 쌤 좋아하면 좀 먼저 나서봐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설영준이 전화를 툭 꺼버렸다.송재이는 설도영을 잘 몰라도 설영준은 제 동생을 너무 잘 안다.이 아이가 했던 말이 헛소리일 가능성이 매우 클지 몰라도 일단 그 점을 제쳐두고 동생의 말이 의외라고 느껴지진 않았다.3년 동안 송재이는 티 날 정도로 설영준을 줄곧 좋아했으니까.하지만 그녀처럼 어리고 단순한 여자는 설영준에게 육체적인 이끌림 이외에 다른 방면으론 딱히 매력이 없다.목걸이를 선물한 것도 그날 진열대에서 착용해봤을 때 꽤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대뜸 카드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