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에서 두 사람은 침묵에 잠겼다. 자동차 엔진 소리만 계속해서 들릴 뿐이었다.설영준은 가끔 고개를 돌려 송재이를 바라봤다. 그녀의 슬픔이 전해진 듯했다.“송재이.”설영준이 먼저 정적을 깨고 말했다.“너 지금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거 알아. 넌 그냥 알고 있으면 돼. 난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송재이는 고개를 돌려서 설영준을 바라봤다. 약간 놀란 눈빛으로 말이다.“대체 왜...”설영준이 말을 끊었다.“이유는 없어. 이건 내가 너한테 빚진 거야. 평생 갚지 못해.”송재이의 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일렁였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설영준이 한 말이 진심이라는 건 그녀도 알았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문제는 돈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설영준은 송재이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그는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떠나갔다. 마음은 아주 무거웠다. 송재이에게 보상할 다른 방법이 필요할 것 같았다.집 안에 들어간 송재이는 창가에 서서 점점 멀어지는 설영준의 차를 바라봤다. 마음속에는 약간 모순적인 감정이 들었다. 설영준의 도움을 받아도 될지, 그를 용서해야 하는 건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그녀는 욕실에 들어가 따듯한 물을 틀었다. 몸에 물이 닿자 하루 내 쌓인 피곤도 함께 씻겨 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물안개 속에서 그녀의 생각은 점점 또렷해졌다. 설영준의 의도가 무엇이든 그녀는 자신만의 힘과 방향이 필요했다.이때 핸드폰이 울렸다. 송재이는 수건을 두르고 밖에 나갔다. 핸드폰을 확인하자 설영준이 보낸 메시지가 보였다.메시지에서 설영준은 한번 만나자고 했다. 진지하게 얘기를 나눌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면서 말이다. 송재이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고백을 하려는 거라면 미리 거절할게요. 그럴 필요 없어요.]메시지를 보내고 난 송재이는 해방감이 느껴졌다. 동시에 약간 긴장되기도 했다.그녀는 침대 가에 앉아서 설영준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후 답장이 왔다.[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 나도 널 강요
설영준은 차 안에 앉아서 조용히 밤 풍경을 바라봤다. 거리의 가로등은 차창에 비쳐서 눈부신 느낌을 줬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밤만큼이나 고요했다.송재이의 말은 돌멩이처럼 그의 잔잔하던 마음의 호수에 던져졌다. 그는 이 정도의 무기력감을 처음 느꼈다.예전의 그는 두려울 게 없었다. 자신이 해결 못 하는 일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했다. 송재이의 일에 관해서도 똑같았다.하지만 현실은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쉽지 않았다. 송재이에게 준 상처는 간단한 보상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상한 감정도 그가 원해서 회복이 되는 건 아니었다.이튿날, 설영준은 일찍이 송재이가 일하는 학원으로 갔다. 그는 대문 앞에 서서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햇빛은 나뭇잎을 뚫고 그의 피부에 떨어졌다. 그러나 마음속에 낀 어둠은 거둬낼 수 없었다. 그가 오늘 직면하게 될 것은 송재이의 거절뿐만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의 아우성이기도 했다.잠시 후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이 삼삼오오 밖으로 나왔다. 설영준은 그 속에서 송재이를 찾았다.오늘 송재이는 간단하게 청바지에 셔츠를 입었다.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걸고 학생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설영준은 크게 숨을 내쉬고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안녕, 송재이.”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떨림이 있었다. 송재이는 인사를 듣고 몸을 돌렸다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영준 씨, 여긴 어떻게 왔어요?”“점심밥 사주고 싶어서. 시간 있어?”설영준은 웃으면서 물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거절당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송재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밖으로 나가 근처의 레스토랑으로 갔다.단아한 분위기의 레스토랑에 들어서서 두 사람은 창가 자리에 앉았다. 설영준은 주문하고 나서 하고 싶었던 말을 하기 시작했다.“우리 아무래도 터놓고 얘기할 오해가 있을 것 같아서 왔어.”설영준은 송재이의 눈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송재이는 이런 말을 듣게 될 줄 안 듯 싱긋 미소를 지었다.“오해는 없어요. 저희는 다 성장하
송재이는 레스토랑 문을 열었다. 방울 소리가 울리고 그녀는 익숙한 창가 자리를 골라 앉았다.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기 시작했다.음식이 오른 다음 그녀는 한 입만 먹고 미간을 찌푸렸다. 기억 속의 맛과 너무 달랐던 것이다. 그녀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직원을 불렀다.“여기 사장을 만나야겠어요.”직원은 어색한 표정으로 주방에 들어갔다. 잠시 후 한 사람이 안에서 나왔다. 설영준이었다.송재이는 흠칫 놀랐다. 여기서 설영준을 보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요리사의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얼굴에는 기대와 긴장이 뒤섞여 있었다.“사실 너한테 오른 음식 내가 직접 했어.”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송재이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왜요?”“뭐라도 하고 싶어서. 널 기쁘게 하고 싶었어.”설영준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돈으로만 용서 구하는 거 성의 없잖아. 그래서 방법을 바꿔봤어. 괜찮지 않아?”설영준의 성의는 잘 느껴졌다. 그녀를 기쁘게 하기 위해 한 노력도 함께 말이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요?”“널 좋아하니까.”설영준은 아주 힘 있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내가 전에 잘못한 거 알아. 나 때문에 네가 상처받았어. 너한테 준 상처는 어떻게든 보상하도록 노력할게.”송재이의 마음은 물씬 따듯해졌다. 설영준을 바라보면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그의 마음이 너무 잘 느껴졌던 것이다.그녀는 흐느끼면서 말했다.“고마워요, 영준 씨. 저 정말 기뻐요.”설영준은 그녀의 앞으로 가서 앉아 손을 맞잡았다.“나한테 기회를 줄 수 있을까? 다시 시작하는 기회.”설영준을 바라보며 송재이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다시 시작하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기회조차 안 주면 영원히 아물지 못하는 상처로 남을 것이다.송재이가 대답하기도 전에 설영준이 벌떡 일어나서 그녀의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움직임은 아주 단호했다. 눈빛에는 절절
설영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송재이의 조건은 과거를 보호하는 것이기도 하고, 미래를 시험하는 것이기도 했다.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알았어. 네 생각을 존중할게.”“고마워. 그럼 이제 다시 반말할게.”이튿날, 설영준은 여진을 보내 송재이의 이사를 도왔다.송재이의 짐은 별로 많지 않았다. 그래도 여진은 만반의 준비를 했다. 송재이의 짐이 무사히 설영준의 별장에 도착할 수 있도록 말이다.송재이와 설영준은 다시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설영준은 집에 자주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회사 일이 바빠 보였다. 어쩌면 송재이를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는 것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약간 미묘해졌다.송재이는 혼자 커다란 별장을 쓰는 게 아주 좋았다. 그녀는 방을 마음껏 꾸밀 수 있었다.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설영준이 계속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러면 오히려 더 자유롭게 지낼 수 있었다.비가 쏟아지는 어느 날, 송재이는 거실의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며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이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비를 쫄딱 맞은 설영준이 어두운 표정으로 들어와서 그녀를 바라봤다.송재이는 깜짝 놀랐다. 설영준이 이런 날씨에 돌아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면서 걱정했다.“왜 이 날씨에 돌아왔어? 춥지 않아? 감기 걸리겠다.”설영준은 말없이 조용히 송재이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빗물이 머리카락에서 떨어져 옷을 적시고 있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두 사람은 조용히 서로를 바라봤다. 공기 중에는 말로 이루 설명하지 못할 감정이 맴돌았다. 설영준의 마음은 너무나도 잘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송재이는 동정하는 기분이 들었다.설영준의 눈빛은 점점 더 깊어졌다. 수많은 말을 쏟아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눈빛에 홀려 잠시 바라보던 송재이는 커다란 압박을 느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돌려서 도망가려고 했다.하지만 설영준의 동
송재이는 무거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너무나도 불편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애써 가벼운 말투로 말을 꺼냈다.“너 밥은 먹었어?”설영준은 피곤한 기색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아니, 일이 너무 바빠서 아무것도 못 먹었어.”송재이는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했다.“내가 간단하게 면이라도 해줄게. 속이라도 든든하게.”설영준은 말리지 않았다. 송재이의 음식은 언제나 마음을 따듯하게 만들어줬기 때문이다. 빈속에 술까지 마신 그는 마침 속이 안 좋던 참이었다. 뭘 먹을 수 있으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주방에 들어간 송재이는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이 끓고 그녀는 소면을 넣었다. 그리고 달라붙지 않도록 젓가락으로 저어줬다. 그다음에는 야채와 계란을 준비해서 함께 넣었다.식탁에 앉은 설영준은 조용히 그녀의 분주한 모습을 바라봤다. 송재이의 마음은 벌써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기분도 훨씬 좋아졌다.두 사람 사이에는 아직 해결할 문제가 많았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서로에게 기댈 수 있지 않을까?얼마 지나지 않아 송재이는 뜨거운 그릇을 들고 다가왔다. 신선한 야채와 노릇한 계란 후라이가 먹음직스럽게 놓여 있었다.“식기 전에 먹어.”송재이는 설영준의 앞에 그릇을 내려놓고 젓가락까지 건네줬다. 설영준은 젓가락을 받아서 먹기 시작했다.뜨끈한 국물은 한 입 마시는 것만으로도 속을 시원하게 했다. 야채의 향이 배서 맛도 아주 좋았다.식탁 맞은쪽에 앉은 송재이는 그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봤다. 그의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자 이상하게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고마워, 재이야.”다 먹고 난 설영준은 진심 어린 인사를 했다.“너무 맛있었어. 속도 덕분에 편해졌어.”송재이는 생각이 약간 복잡했다. 1년 동안 거리를 두자는 조건은 그녀가 꺼낸 것이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하지만 기대하는 표정으로 나타났다가 실망한 설영준을 보자, 그녀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약간 의혹스러운 것도 있었다.‘내가 정말 기회를 줄 마음가짐을 하고
송재이는 핸들을 꽉 잡았다. 새 차는 언제나 새로운 느낌을 줬다.그녀는 설영준의 선물을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설영준의 설득 끝에 결국 타협하기로 했다.속으로는 이걸로 두 사람 사이가 바뀌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머리 아프게 고민하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다.차는 산길을 따라 서서히 움직였다. 송재이와 설영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 안에 맴도는 것은 정적뿐이었다.두 사람은 오래간만의 고요함을 즐겼다. 이 순간만큼은 모든 고민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이때 설영준의 핸드폰이 울리며 정적을 깼다. 전화를 받고 난 그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전화 온 사람은 문예슬의 가족이었다. 상대는 문예슬이 정신병원에서 도망쳤다고 알려줬다. 송재이를 찾으러 갔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말이다.전화를 끊은 설영준은 침묵에 잠겼다. 그는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송재이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한편, 만약 문예슬의 목적이 진짜 그녀라면 알 권리가 있을 것 같았다. 그래야 더 빨리 대응할 수 있으니 말이다.설영준의 변화를 눈치챈 송재이는 나지막하게 물었다.“왜 그래? 무슨 일 있어?”설영준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알리기로 했다.“문예슬 씨의 가족이 전화 왔어. 문예슬 씨가 정신병원에서 도망쳤는데, 너... 너를 찾으러 올 가능성이 높다고.”송재이는 핸들을 꽉 잡았다. 힘을 하도 줘서 손가락 마디가 다 창백해졌다.그녀는 분노 서린 표정을 지었다. 마음속에서 불타오르는 분노는 문예슬을 향한 것인지, 비극적인 과거를 향한 것인지 몰랐다.혜원은 그녀에게 빛과 같은 존재였다. 그런 아이가 문예슬 때문에 생을 다 하고 말았다.“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송재이는 떨리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진짜 만나게 된다면 꼭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설영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혜원이 그녀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는 그도 잘 알았다. 그는 그녀의 손을 쓰다듬으면서 위로하려고 했다.“일단 진정하자. 문예슬 씨가 어떤 상태에 있고 어떤 짓을 할지 모르
송재이와 설영준은 빠르게 집에 돌아갔다.송재이는 먼저 별장의 안전 시스템을 점검했다. 그리고 출입문과 창문이 전부 닫힌 걸 확인한 다음 CCTV까지 작동시켰다. 수시로 CCTV를 확인할 준비도 했다.반대로 설영준은 복잡한 기분으로 거실에 있었다. 그는 문예슬의 탈출이 송재이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문예슬의 존재가 그녀에게 얼마나 큰 위협인지도 알았다.그는 또다시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들이 이미 출발했음을 확인하려고 말이다.이때 송재이의 핸드폰이 울렸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말이다. 그녀는 설영준을 힐끗 보고 나서 전화를 받았다.“나야, 문예슬.”전화 건너편에서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송재이는 무거운 마음으로 핸드폰을 꽉 들고 한숨을 내쉬었다.“무슨 일이야?”문예슬은 잠깐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가 날 미워하는 거 알아. 나... 나도 그래. 오늘 전화한 건 나쁜 의도가 아니야. 너한테 알려주고 싶은 일이 있어.”예상치 못한 말에 송재이는 멈칫하다가 물었다.“아, 알려주고 싶은 일이라니?”“혜원의 죽음에 관해서 네가 모르는 게 있어.”문예슬은 잔뜩 피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내 정신 상태가 불안했던 건 사실이야. 나도 잘못하기는 했지. 근데 혜원이를 죽이지는 않았어.”송재이의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했다.“증거 있어? 네가 죽인 게 아니라면 혜원이가 왜 그렇게 됐는데?”전화 건너편에서 문예슬은 주저하는 듯했다. 호흡도 점점 가빠지고 있었다.“지, 지금은 알려줄 시간이 없어. 근데 힌트는 줄 수 있어. 누군가 의도적으로 나를 이용하고 있어. 내 정신 상태를 이용해서 죄를 뒤집어씌우는 거야.”송재이는 피식 웃었다. 문예슬의 터무니없는 변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터놓고 말하지 않고 질문만 계속했다.“그렇다면 왜 경찰서에 가서 말하지 않고 나한테 전화해?”“경찰은... 내 말을 믿지 않을 거야. 날 도와줄 사람은 너밖에 없어. 너
송재이와 설영준은 거실에 앉아 있었고, 방안에 긴장감이 감돌았다.그리고 경찰의 연락을 기다리는 동시에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송재이는 직감적으로 문예슬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지만 추측을 증명할 확실한 근거가 필요했다.이때, 설영준의 휴대폰이 문득 울렸다.발신자 번호를 확인하는 순간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다름 아닌 어머니 오서희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휴대폰 너머로 문예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영준 씨가 송재이랑 같이 있는 거 아니까 섣부른 행동은 삼가길 바랄게요.”그녀는 의기양양한 말투로 말했다.“지금 여사님이 옆에 계시니까 만약 경찰에 신고하거나 날 찾으려고 한다면 여사님의 안전은 책임질 수 없어요.”송재이와 설영준이 동시에 눈을 마주쳤고 마음속에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설영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대체 원하는 게 뭐지?”“간단해요. 영준 씨랑 송재이 단둘이서 날 만나러 오는 거.”문예슬의 말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곧 모든 궁금증을 해결해줄 테니까 그전까지 무조건 내 말에 따라야 해요.”송재이는 설영준의 손을 잡고 단호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영준 씨, 절대로 상대방의 목적을 이루게 해서는 안 돼. 사모님을 구하고 문예슬의 음모를 밝혀낼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설영준은 고개를 끄덕였고 본인의 무능력함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알아, 하지만 모험하기에는 너무 리스크가 커. 최대한 신중하게 움직여야 해.”송재이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을 이어갔다.“그럼 일단 문예슬의 요구에 응하기 전에 계획부터 세워. 아무런 준비 없이 만나러 가는 건 너무 위험하니까 우선 사모님의 안전부터 확보해야 해.”설영준도 송재이의 말에 동의하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송재이는 믿을 만한 사립 탐정한테 연락해서 문예슬의 은신처를 찾고 오서희부터 안전하게 구하기로 했다.한편, 설영준은 변호사에게 전화해 법적인 면에서 도움받기를 바랐다.비록 힘든 싸움이 될 거라는 걸 알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법이다.몇 시간 후 사립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