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이를 유산 시킨 후 지민건은 늘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며칠이 지나도 밤마다 꿈속에 송재이의 눈물 맺힌 눈동자가 보인다.처음엔 가여운 모습이었는데 갑자기 분노로 바뀌며 험상궂게 변해갔다.그는 송재이와 알고 지낸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그의 인간 됨됨이로 볼 때 이제 막 알고 지낸 여자에게 딱히 측은지심을 느낄 사람이 아니다.하지만 왜 송재이에게 자꾸 미안해지는 걸까? 지민건은 본인조차도 몰랐다.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하는 수밖에...이 사건은 확실히 지민건 때문에 벌어진 거니까!그는 어쩌면 밤에 제대로 된 잠을 자고 싶어 송재이에게 이런 보양식을 보내왔을지도 모른다.송재이는 물건을 받은 후 지민건에게 전화해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그가 미처 변명을 내두르기 전에 송재이는 쓰레기 같은 보양식을 상자째로 창밖에 내던졌다!다음날 지민건이 또다시 문자를 보내왔다.그는 송재이가 자신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모르는 듯싶다.‘X발, 빌어먹을 개자식이!’송재이는 지민건의 음성 메시지를 다 듣지도 않고 바로 그를 블랙리스트에 넣었다....연지수가 오케스트라의 수석이 되었다고 정식 발표한 날, 그녀는 거만을 떨며 오케스트라의 모든 이가 축하 파티에 참석해줘야 한다고 했다.뭇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그녀는 송재이의 앞으로 다가와 입이 귀에 걸릴 지경으로 활짝 웃으며 아주 정중하게 말했다.“재이 씨, 와주실 거죠?”서유리는 송재이가 참지 못하고 귀싸대기를 날릴까 봐 아래에서 힘껏 그녀를 제지했다.다만 송재이는 전혀 분노하지 않고 되레 웃으며 답했다.“물론이죠. 걱정 마세요. 꼭 갈 테니까!”연지수는 지금 오케스트라의 모든 이가 지켜보는 가운데 일부러 송재이를 난처하게 굴고 있다. 송재이가 그걸 모를 리 있을까.송재이는 절대 피하지 않을 것이다!갈 뿐만 아니라 쫙 빼입고 우아하게 참석할 것이다!...유은정과 송재이는 몸매가 비슷하다.연지수가 어느 부자의 후원을 받고 이번에 오케스트라의 수석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유은정은 울화가
한편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송재이도 추태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다른 사람들이 다가와 인사를 나눌 때 그녀도 곧장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송재이는 웃을 때 눈이 반달 모양이 되어 아주 달콤했다.마치 어린 소녀처럼 순수하면서도 성인 여자의 요염함도 지니고 있어 남자들의 혼을 쏙 빼놓는다. 이게 바로 그녀의 매력이다.설영준은 연지수의 허리에 손을 걸치고 무대 중앙으로 걸어갔다.뭇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그는 여유 넘치게 음악에 몸을 맡겼다.연지수는 그에게 곧 달라붙을 기세로 귓가에 대고 뭐라 말하며 즐겁게 웃었다.설영준은 늘 다정하면서도 무관심한 듯한 미소를 짓고 있어 아무도 그의 속내를 파헤칠 수 없었다.그는 송재이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듯싶었다.연지수를 안고 몸을 살짝 돌리자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송재이가 바로 보였다.그의 시선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고 심지어 송재이를 향해 예의상 머리를 끄덕이기도 했다.설영준과 연지수에게 모든 포커스가 맞춰졌다.다만 송재이도 소외된 것만은 아니었다....누군가가 다가와 그녀에게 함께 춤을 추자고 요청했고 이에 송재이는 설영준을 힐긋 쳐다봤다.이때 연지수가 발꿈치를 들고 그에게 무언가 속삭였다.줄곧 미소 짓던 설영준의 얼굴이 순간 굳어지고 싸늘한 한기가 감돌았다. 그 표정은 실로 섬뜩할 따름이었다.다만 이때 송재이의 시선은 더 이상 설영준에게 꽂혀있지 않았다.그녀는 돌아서서 다른 남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그 남자는 훤칠한 키에 어깨가 매우 넓었다.비록 설영준과 비할 바는 못 되지만 나름대로 안정감이 느껴졌다.송재이는 이곳에 왔을 때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설영준과 연지수가 함께 있는 걸 봐서 기분이 잡쳤던 걸까?그녀와 아무 연관이 없지만 기분 나쁜 건 어쩔 수가 없었다!한편 송재이와 춤을 추는 남자도 그녀가 텐션이 낮고 의기소침해하니 재미있게 해주려고 농담도 많이 건넸다.송재이는 이런 농담들이 전혀 안 웃겼다.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었고 그 남자도 바로 알아챘다.곧이어 남
송재이는 이 순간 머리가 백지장이 되었다.그를 따라 움직이던 몸짓도 한순간 굳어져 버렸다.그녀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온몸이 파르르 떨렸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어떻게 알았어?”마냥 차가운 이 남자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미처 몰랐다.그녀는 전혀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설영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한마디 물었다.“누구 애야?”이 한마디가 송재이의 심장을 다시 한번 지옥으로 떨어트렸다.그의 물음은 보이지 않는 칼이 되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붙였다!누구 애냐니?설마 이 기간에 그녀가 딴 남자랑 잤을 거라고 여긴 걸까?그는 송재이가 쉬운 여자라고 생각하는 걸까?문란하고 음탕한 여자라고 여긴 걸까?!설영준이 그녀를 쳐다보는 눈빛은 차가운 살기가 깃들어있을 뿐만 아니라 강압적으로 몰아붙이는 기세도 드러났다. 또한 천한 여자를 쳐다보는 듯한 경멸의 뜻도 담겨 있었다!이런 능멸의 눈빛에 송재이는 가녀린 마음이 벼랑 끝으로 툭 떨어지듯 거센 타격을 받았다.“그건... 나도 몰라!”송재이가 홧김에 쏘아붙였다.일촉즉발의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신경전이 감돌았다.송재이는 더 이상 이 지긋지긋한 관계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홀로 묵묵히 감수하는 것도 극에 달했다!그녀는 주현아와 지민건 이 두 악마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었다.그 두 인간이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식으로 그녀를 단숨에 이 불의의 재난을 감당하게 했다.그녀 스스로 이 두 사람을 상대할 순 없지만 설영준은 가능하다.그에게 이 수모를 하소연하고 싶었고 그를 향한 마음도 전달하고 싶었는데 누구 아이냐는 그 한 마디가 모든 걸 몰살했다!설영준은 아예 그녀를 믿지 않았다!그녀에게 감정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녀라는 사람 자체를 매우 경솔하게 보고 있다.이런 치욕감에 송재이의 마음이 재가 되었다.입원했던 그 며칠 동안 침울한 절망감에 빠져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 또다시 그때의 기분으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누구 애인지 모르겠어. 너랑
송재이는 연지수가 어떻게 자신이 유산한 일을 알게 됐는지 전혀 모른다.연지수 말고 또 누가 더 알고 있을까?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젠 다 아무 소용이 없다.그녀가 가장 숨기고 싶었던 사람이 알게 됐으니까.설영준이 알아버렸는데 온 세상이 안다고 해도 뭐가 달라질까?연지수는 거들먹거리며 웃다가 아무런 경계 없이 송재이에게 뺨을 맞았다.“야! 네가 감히 날 때려?”그녀는 못 믿겠다는 듯이 반쪽 얼굴을 가렸다.방금 송재이는 절대 가볍게 내리친 게 아니다.연지수는 머리가 헝클어지고 볼이 서서히 빨갛게 달아올랐다.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송재이를 가리키며 이를 악물고 경고했다.“넌 그냥 딴 남자에게 놀아난 걸레야. 유산까지 했으니 나중에 누가 너 만나주겠어? 오늘 이 뺨 맞은 거 나 꼭 기억할게. 돌아가서 영준 씨한테 알릴 거야. 나 이젠 영준 씨 사람이야. 과연 영준 씨가 널 가만 내버려 둘까? 송재이, 넌 이젠 끝장이야!”송재이는 경멸의 눈빛으로 그녀를 흘겨보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래, 기다릴게. 네 스폰서더러 얼른 나서라고 해!”스폰서라...설영준을 말하는 걸까?물론 이는 연지수의 일방적인 생각일 뿐이다.설영준 측에서는 인정한다는 말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하지만 송재이도 지금은 연지수와 설영준이 한패라고 생각하고 있다.그녀가 연지수를 때렸으니 설영준이 과연 어떻게 나올까?이판사판이 되니 더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어차피 설영준과도 사이가 완전히 틀어졌다.또 무슨 일이 발생하든 그녀는 전혀 신경 쓸 게 없었다.송재이는 이젠 아무것도 걱정할 게 없다!유산한 일을 연지수가 알게 되면 동네방네 떠들어댈 줄 알았다.하지만 다음날 오케스트라에 갔을 때 예전처럼 평범한 일상이었다.그저 연지수가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 분노가 좀 더 많이 섞여 있을 뿐이다.가끔 휴식실에서 마주쳐도 연지수는 일부러 문을 더 세게 닫고 나간다.그러다가 며칠 지나자 그녀는 다시 기분이 좋아진 듯싶었다.누군가는 연지수와 설영준이 함께 밥 먹는 걸
가끔 울화가 치밀 때 충동적인 말을 내뱉을 때가 있다.그러다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면 진실된 느낌과 판단력을 되찾게 된다.설영준은 송재이와 알고 지낸 지 3년이다. 결코 3일이 아니란 말이다.그녀가 딴 남자랑 쉽게 잠자리를 갖는 여자라고? 설영준은 절대 이를 믿을 리가 없다.하지만 송재이는 아무런 해명도 없었고 심지어 일부러 그를 약 올리는 말을 내뱉었다. 설영준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요 며칠 그는 줄곧 마음이 심란했다.전에는 아이에 관한 일을 생각해본 적이 없고 송재이와 아이를 낳을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처음부터 그녀가 임신한 걸 알게 됐다면 그는 과연 이 아이를 낳게 했을까?어쨌거나 설영준은 진짜 송재이와 결혼할 생각이 없었으니까.그렇다고 밖에 사생아가 있다는 건 설영준에게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다만 지금 그의 앞에 놓인 건 결과뿐이다.그런 고민과 갈등의 과정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기뻐해야 마땅한데, 그를 위해 수많은 고뇌를 덜어줬으니까!하지만 왜 기쁘지도 않을망정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한 걸까?가끔 설영준은 홀로 사무실에서 담배를 수없이 피우며 이를 악물고 차오르는 원망과 증오를 추스른다!그는 지금 송재이가 너무 얄밉다. 제멋대로 하는 그녀가 너무 얄밉다!...그날 설영준이 막 사무실에 돌아왔을 때 박경이라는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설영준을 꼭 한번 뵙고 싶다고 했다.설영준은 시답잖은 사람들을 일일이 상대할 기분이 아닌지라 여진 비서에게 분부하여 돌려보내라고 했다.10분 후 여진 비서가 다시 노크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박경 씨가 말하길... 대표님 아드님과 관련된 일이라고 합니다.”여진 비서는 내용을 전달하는 담당이니 박경의 말을 그대로 전하면서 갈피가 안 잡히긴 마찬가지였다.설영준은 결혼도 안 했는데 갑자기 아들이 웬 말일까?사무실 책상 앞에 마주한 남자는 한창 머리를 숙이고 글을 쓰는 중이었다.이 말을 들은 설영준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펜을 쥔 손에 살짝 힘을 주며 이를 악물었다.“들어
박경의 혼자 힘으로는 세력이 너무 약하다.하지만 지민건이 저지른 일만 생각하면 이가 갈리고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박경은 설영준이 누군가에게 쉽게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란 걸 잘 알기에 이 사건의 진실을 그에게 털어놓기로 했다.설영준이 그 아이에 대한 감정이 어느 정도인지, 또 혹은 두 범인을 상대할지 말지는 박경이 신경 쓸 부분이 아니다.그는 녹음본을 남긴 후 자리를 떠났다....설영준은 홀로 사무실에 앉아서 더할 나위 없이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는 녹음을 다시 틀었다.두 남녀의 대화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었다.지민건의 비겁한 인성은 딱히 놀랄 것도 없었다.하지만 주현아가 이런 사람일 줄은 전혀 상상치도 못했다.어쨌거나 수년간 알고 지낸 재벌가의 따님이었으니.전에 주승아와 약혼했을 때 주현아는 껌딱지처럼 그들 뒤를 따라다녔다.인상 속 주현아는 얌전하고 온순하며 착한 아이였는데 이 녹음이 폭로되면서 그녀에 대한 이미지가 산산조각이 났다.주현아의 언니 주승아는 몇 년 전에 사망했다.주씨 일가와 혼약을 맺는 건 이미 다 정해진 일이다.다만 요즘 설영준은 확실히 마음을 집중할 수가 없다.그는 무심코 사무실 서랍을 열었다.서류 더미 밑에서 반지가 하나 굴러 나왔다.이 반지는 전에 주현아가 끼고 다니던 반지였다. 그녀는 이 반지를 애지중지 아껴왔다.왜냐하면 이 반지는 그녀가 곧 ‘설영준의 아내’가 된다는 걸 증명해주니까.나중에 주현아가 잃어버렸는데 설영준이 얼떨결에 주웠다.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 반지를 주현아에게 돌려주고 싶지 않았다.설영준은 ‘아내’라는 신분에 딱히 큰 기대가 없다.늘 그렇듯 재벌가에서 조건이 비슷한 현모양처 신붓감을 골라서 결혼하면 그만이다.전에 설영준은 주현아가 이 조건에 매우 적합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이젠 다시 고려해봐야 할 듯싶다.감히 제멋대로 이런 짓을 벌이다니. 잔혹한 수법으로 그의 핏줄을 살해한 건 이미 그의 역린을 건드린 거나 다름없다!설영준은 주현아와의 혼약을 취소할 생각이었
설영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휴대폰이 주머니에서 떨어졌다.그는 허리 숙여 휴대폰을 줍다가 부주의로 갤러리를 눌렀다.그의 갤러리에는 대부분 비즈니스 계약서에 관한 사진들이었다.그중 한 장이 유난히 돋보였다.바로 며칠 전 송재이가 호텔 입구에 서서 가방을 뒤질 때 설영준이 차 안에서 찍었던 그녀의 사진이다.그땐 순전히 송재이의 몸매가 예뻐 보여서 사진을 찍었다.수없이 만져봤지만 여전히 그녀를 원했다.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축축하고 흐린 날, 그녀는 흰색 치마에 가는 허리띠를 걸치고 날씬한 몸매를 한껏 드러냈다.하늘거리는 그녀의 몸짓을 떠올리며 설영준은 무언가에 홀린 듯 사진을 확대하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3일 후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송재이는 한창 오케스트라에 있었다.휴식 시간, 그녀는 벤치에 앉아 물을 마셨다.휴대폰을 꺼내 보니 유은정의 부재중 전화가 몇 통이나 와 있었다.송재이는 바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재이야, 왜 인제 받아? 뉴스 봤어? 지민건 회사가 하루아침에 와장창 무너졌어. 전에 그 회사에 대출해줬던 빚쟁이들이 전부 찾아와서 빚 갚으라고 다그친대!”“그리고 걔 요즘 계약한 몇 개 프로젝트도 갑자기 상대측에서 줄줄이 계약을 해지했대. 지민건 혹시 무슨 큰 인물이라도 잘못 건드린 거 아니야?”유은정이 말을 더듬거렸다.“사실 우리 아빠도 걔네 회사에 100억 가까이 투자했는데 지금 전화해도 안 받는대. 어떡해? 그 돈 못 받아오면...”송재이는 화들짝 놀랐다.‘큰 인물을 잘못 건드리다니?’그녀의 머릿속에 문득 한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유은정과 오랜 시간 알고 지냈지만 지금처럼 당황해하는 그녀의 모습은 이번이 처음이다.그들 부녀는 도저히 도움을 청할 곳이 없어서 마지못해 송재이를 찾아온 듯싶다.“재이야, 너 전에 설영준 씨 만났었잖아. 알아, 지금은 헤어진 거. 그래도... 한때 연인이었던 정을 봐서라도 나 대신 설영준 씨한테 한번 도와달라고 부탁하면 안 될까?”설영준은 인맥도 넓고 수단이 잔혹해 그가 나섰
송재이는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절대 안 받는다.다만 이 사람도 집착이 꽤 심했다. 그녀가 안 받으니 계속 전화를 걸어왔다.결국 송재이는 마지못해 통화 버튼을 눌렀다.“재이 씨, 지금 시간 돼? 밥 사주고 싶은데.”전화기 너머로 익숙하면서도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송재이는 순간 핸드폰을 쥔 손이 움찔거렸다. 역시 양반은 못 된다고.상대는 바로 지민건이었다!전에 그녀는 지민건의 모든 연락처를 블랙리스트에 넣었다.지금 걸어온 이 번호는 다른 사람 휴대폰을 빌렸거나 혹은 새로 구한 전화번호거나 둘 중 하나이다.어찌 됐든 송재이는 이젠 지민건이란 사람에게 생리적 혐오감을 느낀다.목소리만 들어도 온몸이 불편해진다.제일 먼저 든 생각은 식사 장소에 나가기 싫다는 것이었다.지민건은 지금 여기저기 쫓겨 다니는 신세가 돼버렸다.한 무리의 빚쟁이들과 뿔뿔이 투자금을 빼가는 주주들 때문에 그는 이미 제 코가 석 자이다.그런 인간이 송재이에게 밥을 사줄 여유나 있을까?이중엔 분명 또 어떤 음모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게다가 그는 송재이의 아이까지 해친 장본인이다.송재이는 이런 경험도 적고 너그러운 아량도 못 돼 자신의 원수와 평화롭게 대면할 순 없다.다만 거절하려던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결국 삼키고 말았다.유중건이 연루되어 있으니까.송재이는 일단 설영준을 걸치지 않고 유중건의 돈을 돌려받으려고 했다.물론 그럴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걸 잘 알지만 그래도 한 번 시도는 해보고 싶었다.또한 지민건이 이런 처지가 된 게 진짜 그 사람 때문인지 확인하고 싶기도 했다! 어쩌면 그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럴만한 능력이 있을 것 같았다.몇 초 동안 침묵한 후 송재이는 끝내 그의 요구에 응했다.“그래, 좋아.”...한편 식사 장소는 송재이가 정했다.그곳은 오픈된 야외 식당이었다.송재이는 일부러 룸을 피했다. 지민건이 갑자기 과격한 행동을 보일까 봐서.그녀 눈에 이 사람은 일찌감치 이성을 놓은 사람이다.사면초가에 빠진 지금, 자포자기하는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