량천옥이 고은지의 어머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아버지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궁금해해 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량의가 ‘아버지’의 얘기를 꺼내니 고은지는 그대로 굳어버렸다.“제 아버지요?”“그래, 네 아버지.”“그 사람은 어디 있어요?”고은지가 설마 하면서 물었다.고은지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다.량의는 고은지를 보면서 얘기했다.“죽었어.”“...”량의의 속도 좋지는 않았다. 그런 일을 저질렀을 때까지만 해도 량의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다시 되돌아보니 그게 얼마나 나쁜 짓이고 얼마나 힘든 짓인지 알게 되었다.“다 내 잘못이야. 내가 잘못했어.”량의가 가볍게 얘기했다.“...”고은지는 싸늘한 시선으로 량의를 노려보았다.그리고 문득 생각이 들었다.이 사람이 바로 고은지의 외할머니라는 것이...고은지는 무서웠다. 눈앞의 외할머니라는 혈육이 이런 악마였다니...고은지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물었다.“어떻게 돌아가신 거예요?”고은지는 본인 아버지의 죽음이 량의와 어느 정도 상관이 있다고 생각했다.량의가 죽인 것일까?량의와 량천옥이 강성에서 무섭기로 소문났다는 것을 떠올리면... 그럴 만도 했다.량의는 량천옥을 위해 뭐든지 하는 사람이다.량천옥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량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량천옥의 요구를 만족시켜 준다.그래서 고은지는 자기 아버지의 죽음이 두 사람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량의는 고은지의 질문을 듣는 순간 표정이 약간 변했다. 고은지는 그 변화를 바로 캐치해냈다.결국 량의는 심호흡을 하더니 얘기했다.“그건 몰라도 돼.”“그럼 제가 알 수 있는 건 뭐가 있죠?”고은지가 차갑게 얘기했다.왜 고은지의 혈육들은 다 이런 악마일까.고은지는 자기한테서 그들과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네가 미워해야 하는 사람은 나라고, 네 엄마는 널 여전히 사랑한다고, 널 계속해서 찾아왔다는 것만 알면 돼.”“날 찾으면서 날 죽일
그러한 의심이 드는 순간 량의는 숨이 턱 막혔다.고은지가 차갑게 웃었다.“사랑... 하하... 제가 생각하는 사랑은 이런 것이 아니거든요.”“그럼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사랑은 나의 것을 주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걸 주는 게 아니에요.”“...?”“량천옥 씨를 그렇게 만들고 나서 우월감을 느끼셨죠.”“...”“량천옥 씨를 사랑하는 거예요, 아니면 량천옥 씨와 함께 누리는 삶을 살고 싶은 거예요.”강성에서 량천옥의 소문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사람들은 다 량천옥이 얼마나 잔인하고 독한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게다가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열심인지도 알고 있었다.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량천옥의 손에서 산산조각 났다.배항준도 배준우의 어머니에게서 빼앗아 온 것이 아니었는가.그리고 량천옥 뒤에서, 량의는 이 모든 것을 같이 누렸다.이게 바로 량의가 말한 사랑이었다.량의는 고은지의 말을 듣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창백해진 얼굴로 고은지를 쳐다보았다.“만약 정말 사랑했다면 모든 수를 써서라도 같이 행복한 삶을 살려고 했을 거예요. 그리고 같이 어려움을 극복하겠죠.”“...”“량천옥 씨가 아끼는 가족을 걸림돌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요.”“...”창백했던 얼굴이 고은지의 말을 듣고 더욱 창백해졌다.장애물이라는 단어가 량의의 가슴에 박혔다.그렇다면 량천옥을 향한 사랑은 정말 잘못된 걸까?의심이 량의의 가슴 속에 뿌리를 내리고 점점 커져만 갔다.량의는 멍하니 고은지를 보면서 물었다.“그래서... 내가 잘못했다는 거야?”“한번 물어봐요. 량천옥 씨는 나를 위한답시고 희주를 버리진 않을 거예요.”“...”희주를 버린다고?희주는 량의의 증손녀였다.량천옥은 고은지가 본인 딸이라는 것을 알고 고희주에게도 많은 신경을 썼다.“제 아이는 식물인간이니... 아마 또 걸림돌로 생각하시겠죠.”“아니야... 그게 아니야...”고은지의 질문에 량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고희주는 장애물이 아니었다.량의는 고희주가 얼른 낫
고은지는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지금 고은지는 귀를 막아서라도 량의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량의는 그런 고은지를 보면서 몸을 약간 떨었다.량의도 고은지의 분노와 증오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본인이 얼마나 잘못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가슴 쪽에서 고통이 퍼져나갔다.량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얘기했다.“먼저 가마. 몸 잘 챙기고. 난...”량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지금 이 순간만큼은 량천옥에게 미안한 것보다 고은지에게 미안한 마음이 더욱 컸다.고은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가운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고은지의 태도에 량의는 가슴이 먹먹했지만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미움받는 건 당연했다.여태껏 그래왔던 일이니까......량의가 떠난 후 병실에는 고은지 혼자 남았다. 고은지는 이불 끝자락을 움켜쥔 채 온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일부러 버린 것이라니.하.전에 비슷한 기사를 봤을 때 고은지는 믿지 않았다.어떻게 자기 자식을 버리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하지만 량의가 그런 사람일 줄은...량의는 그저 아름답고 젊은 딸을 이용해 더욱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은 사람일 뿐이었다.량의는 돈과 명예를 향한 욕심을 사랑이라 치부하며 살아왔던 것이다....다른 한편.량천옥은 이미 공항에 도착했다.량천옥은 고은영에게 전화를 걸어 고은지를 잘 보살펴달라고 했다.갑자기 량천옥이 해외로 나간다는 말을 들은 고은영은 의아해하면서 전화를 끊었다.그리고 배준우를 쳐다보았다.배준우는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량천옥 씨가 전화를 건 거야?”흘러나오는 목소리로 전화를 건 사람이 여자라는 건 알 수 있었다.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나한테 언니를 잘 보살펴달라고 했어요. 자기는 해외로 나가야 한다고요.”량천옥이 해외로 나간다는 것을 들은 고은영은 이상하게 등골이 서늘했다. 아마도 예전의 트라우마 때문일 것이다.두 사람은 량천옥이 해외에도 많은 사업을 키우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으니까 말이다.천의는 빙산 일각에 불
배준우는 고은영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짓했다. 고은영은 놀라서 얼른 손으로 입을 막아버렸다.그 귀여운 모습에 배준우는 입꼬리를 올렸다.“여보세요.”“대표님...”전화기 너머에서 기성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기성훈이 전화한 거라면... 아마도 고희주의 일 때문일 것이다.배준우는 고은영을 의식하며 시선을 돌렸다. 고은영은 이미 휴게실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기성훈이 뭐라고 더 얘기하자 배준우의 안색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두 눈은 얼음장같이 차가울 뿐이었다.돌아온 고은영은 차가운 기운을 뿜는 배준우를 보고 깜짝 놀랐다.결혼한 이후로 부드러운 배준우의 모습만 봤으니 지금 같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준우 씨...”고은영의 목소리에 배준우는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 시선에 고은영은 더욱 겁을 먹었다.“왜 그래요?”고은영이 얼른 배준우를 향해 걸어갔다.설마 량천옥이 해외로 떠난 것이 정말 배준우를 공격하기 위해서인가?이런 상황에도 배준우를 해치울 생각만 하다니.고은영은 량천옥이 충분히 그런 짓을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량천옥은 그만큼 독한 사람이니까 말이다.고은영은 저도 모르게 나태현이 고은지에게 저지른 일들을 떠올랐다.나태현의 모든 행동은 량천옥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다.만약 량천옥이 정말 나태현을 뒤엎을 결심을 한다면, 나태현은 1초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배준우 곁에 쪼그려 앉은 고은지가 따뜻한 작은 손을 배준우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량천옥 씨가 정말 준우 씨를 노리는 거예요?”이런 계모가 있다는 것도 저주라면 저주였다.량천옥이 배준우의 새엄마라는 것을 떠올린 고은영은 약간 흠칫했다.고은지는 량천옥의 친딸이자 고은영의 언니다. 량천옥은 또 배준우의 계모다.족보가...“아니야.”배준우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들은 고은영은 한숨을 돌렸다.만약 량천옥과 배준우가 정말 싸운다면 그건 힘든 전쟁이 될 것이다.“그럼 무슨 일이에요?”“희주가...”겨우 입을 연 배준우가 뜸을 들였다. 그리고 더욱 진
나태현이 해외로 나갔다.량천옥도 해외로 나갔다. 배준우는 저도 모르게 고은영을 쳐다보면서 표정을 굳혔다.“그래, 알겠어.”전화를 끊자마자 고은영이 달려들어 물었다.“나태현 씨도 해외로 나갔대요?”배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고은영의 낯빛이 파리하게 질려버렸다.량천옥은 고은영에게 고은지를 잘 부탁한다고 했다.그러니 아마 고은지는 아직 이 소식을 모를 것이다. 만약 고은지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같이 해외로 가려고 했을 것이다.고은영은 초조함에 두 손을 모으고 말했다.“희주에게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어요.”“...”배준우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무슨 상황인지 알아볼 수 있어요?”안개에 갇혀 제대로 볼 수 없는 기분은 공포심만 극대화할 뿐이다. “기성훈이 얘기하길, 경비가 너무 삼엄해서 들어갈 수 없대.”그러니 지금 이 상황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것은 바로 나태현일 것이다.아무리 량천옥이라고 해도 그저 외부에서 관찰하면서 내부의 상황을 짐작할 뿐, 다른 건 할 수 없었다.고은영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해 걱정하고 있었다.“희주가... 희주...”“일단 진정해. 그렇게 심각한 일이 아닐 수도 있잖아.”과연 그럴까.고은영은 지금 이 상황이 아주 심각하다고 생각했다.만약 고희주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다면 고은지는 나쁜 마음을 먹을 것이다.그리고 량천옥과 힘을 합체 나태현을 죽여버리려고 할 것이다.배준우는 기성훈에게 연락해 그곳의 상황을 최대한 많이 알아보게 했다.고은영은 량천옥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량천옥의 전화도 꺼진 상태였다.“병원에 다녀와야겠어요.”고은영은 고은지가 걱정되었다.“기사를 붙여줄게.”“네.”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고은영의 머릿속은 아주 복잡했다. 온통 고희주와 고은지와 연관된 일이었다.고은지의 말을 듣고 나태현에게 고희주를 넘긴 것도 후회되었다.나태현...고희주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은영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병원.고은지는 이성을 되찾았다
고은영은 빠르게 병원으로 달려왔다.엘리베이터에서 나올 때 너무 급하게 달린 나머지 한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은영을 부축해서 일으켜 준 후 바로 떠났다.남자에게 풍기는 향수가 너무 좋아서 고은영은 저도 모르게 남자의 뒷모습을 또 한 번 쳐다보았다.고고하고 차가운 모습의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고 있었다.고은영은 정신을 차리고 얼른 고은지의 병실로 왔다. 고은지는 멍해서 앉아있었다.병원장은 공경하게 얘기하면서 고은지의 요구를 다 들어주겠다고 했다.고은지는 그저 멍해서 그 말을 듣고 있었다.고은영을 본 병원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저는 먼저 물러나겠습니다.”“감사합니다.”고은지가 굳은 채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고은영은 그러한 고은지의 반응에 이상함을 느꼈다. 고은지는 이미 고희주의 일을 알고 있는 사람 같아 보였다.병원장은 그대로 떠났다.고은영은 너무 바삐 달려와 겨우 숨을 고르고 있었다.고은지의 모습을 보면서 고은영은 고은지가 고희주의 일에 대해 아는지 모르는지 잘 몰랐다.고은영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언니.”그 말에 고은지가 정신을 차렸다.“아, 은영아, 왔구나.”담담한 말투는 마치 고희주의 일을 모르는 사람 같았다.고은영은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고희주가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해외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량천옥과 나태현이 다 가볼 정도니...두 사람이 어떤 소식을 들고 돌아올지는 아무도 몰랐다.게다가 량천옥과 나태현이 만나서 싸우지 않을지 걱정되었다.고은영은 그런 걱정을 숨기면서 고은지의 옆에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물 마실래?”“아니, 아까 마셨어. 괜찮아.”고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뭐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머릿속은 온통 고희주를 향한 걱정으로 가득 차 다른 화제를 꺼낼 수 없었다.고은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은영아, 나 이상하게 계속 가슴 쪽이 먹먹하고 답답하게 아파.”“아파? 그러면 의
말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고은영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고은지는 미간을 약간 찌푸리고 물었다.“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아니야. 아까 량천옥 씨의 전화를 받았어. 요즘 해외로 나가야 해서 못 돌아온대. 그래서 나한테 언니를 부탁한다고 했어.”“해외? 어디로?”고은지가 물었다.고은지는 예민한 상태라 한가지 말만으로도 수많은 나쁜 상상을 이어나가고 있었다.“해외에 프로젝트가 있다고 했어. 알잖아, 사업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고은영은 대충 그럴듯한 이유를 얘기했다. 고은지는 고은영의 말을 듣고 입꼬리를 약간 올렸다. 그리고 비웃음을 흘렸다.“그렇지. 그건 바로 엄마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는 증거가 아니겠어?”모든 것을 버리고 돈과 명예를 좇아 얻은 것들이 아닌가.역시, 독한 사람이 잘살 수 있다.고은영은 고은지가 량의를 얘기하는 것을 보고 약간 심장이 철렁했다.“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응?”“오늘 량의가 날 찾아오셨어.”“...”그 말을 들은 고은영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고은영에게 있어서 량천옥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량천옥이 그렇게 된 건 량의 때문이었다.그래서 고은영은 량의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무슨 말을 했어?”고은영이 물었다.그들이 이미 사과했다고 하지만 고은영은 여전히 당한 것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아니, 잊을 수 없을 것이다.“나를 버린 건 본인이 딸을 너무 사랑해서라고 했어.”“그런 게 어디 있어!”고은영이 바로 반박했다.딸을 사랑해서 손녀를 버린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고은지는 피식 웃고 얘기했다.“그러게 말이야. 그런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어.”“...”“모든 게 다 본인 탓이니 량천옥 탓을 하지 말라고 했어.”“...”고은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량천옥의 딸로서, 고은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아야 할 것이다.하지만 량천옥이 고은영을 죽이려 했던 것을 떠올리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량천옥이 정말 마음을 먹는다면, 그녀는 어떠
고은영과 고은지는 평범하지 못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나마 나은 사람이 있다면 바로 안지영이었다.장선명의 보호 아래에서, 나태웅과 나씨 가문의 괴롭힘에서 피해 정상적인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다.물론 아버지의 일은 예외였지만...하여튼 안지영은 이제 나씨 가문에서 걸어오는 전화를 다 차단하고 관심도 하지 않았다. 오후. 나씨 가문에서 전화를 걸어 아직도 나태웅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안지영은 숨을 들이켜고 집사에게 얘기했다.“저기요, 전 장씨 가문 사모님인데요.”“...”안지영이 차갑게 말하자 집사는 어리둥절해졌다.“뭐, 뭐라고요?”“그렇게 부르기 싫은 거예요? 아무리 제가 장선명 씨와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다고 해도 이미 혼인신고는 했는데, 날 인정해주지 않는 거예요?”혼인신고를 했다는 얘기에 집사는 거친 숨을 내뱉었다.“안지영 씨, 저희 작은 도련님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나오실 겁니까?”“감정은...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저랑 나태웅은 서로를 싫어하는데 좋은 감정이 있을 리가 없죠.”안지영은 차갑고 날카로운 말들로 사실을 뱉어냈다. 그러자 전화기 너머의 집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난 이미 선명 씨랑 결혼한 사람이잖아.’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다고 해도 이미 혼인신고를 했으니 법적 부부였다.그리고 백번 양보해서 장선명과 안지영이 결혼하지 않았다고 해도 안지영은 나태웅을 거들떠보지 않을 것이다.“나태범 어르신께 전해주세요.”집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안지영이 얘기했다.집사는 그런 안지영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정신을 차렸다.“무슨 얘기를 하시려고 그러십니까.”“나태범 어르신이 저를 싫어한다는 건 알아요. 저도 나씨 가문에 시집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요. 저를 싫어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자기 아들은 자기가 알아서 교육해달라고 해주세요. 그러면 정말 감사할 거라고요.”“그...”그 말을 들은
고은영이 고개를 저었다.“여기에 같이 있을게.”“돌아가!”고은지가 한층 무거워진 말투로 강경하게 얘기했다.“...”“혼자 있고 싶어. 혼자 내버려 두라고.”“알았어. 그럼 언니는 혼자 있어. 난 옆 방에 있을게.”“제발 돌아가라니까!”고은지는 이미 인내심이 다 닳은 상태였다.고은영은 그런 고은지를 보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알았어. 갈게. 갈 테니까 진정해.”고은영은 고은지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이었다.이렇게 그냥 보내는 것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고은지에게는 정말 고희주가 전부였다. 그래서 고희주가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고희주는 안심할 수 없었다.그러니 지금은 혼자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그럼 먼저 갈게.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고은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숨을 쉰 고은영은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병실에서 나가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진호영이 보였다.진호영을 본 고은영은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하필 이 상황에...’진정훈은 고은영의 표정이 확 굳은 것을 보고 짜증이 났다.뭐라고 얘기하려 했지만 아까 고은영이 한 얘기를 떠올리고는 입을 꾹 닫았다.고은영에게 있어서 그동안의 시간은 몹시 아픈 시간이었을 것이다.고은영은 아마 진유경이 어떤 사람인지 진작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런데 피가 섞인 가족한테서 차별 대우를 받았으니, 얼마나 속상했을까.그래서 여태껏 진호영과 거리를 둔 것일지도 몰랐다.친여동생이 어린 시절을 힘들게 보내고 겨우 진짜 가족을 찾았는데, 친오빠인 본인은 진유경 걱정부터 했으니...진호영은 가슴 깊이 반성하고 있었다.게다가 진호영은 김영희가 진유경을 데리고 배준우를 찾아간 일도 알게 되었다.그는 김영희가 이런 일을 저지를 줄 전혀 몰랐다.아무리 고은영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고은영은 피가 섞인 친손녀인데...진유경을 데리고 배준우를 찾아가다니. 고은영의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 아닌가.진호영이 길을 막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고은영이 차갑게
진호영은 그 말을 들으면서 속이 씁쓸해졌다.하지만 진성택의 상황도 그리 좋지 못했다. 진호영이 우물쭈물하면서 겨우 입을 열었다.“하지만 아버지가...”“그렇다고 해서 은영이를 억지로 데려올 수는 없어.”“그럼 딱 한 번만 만나게 하면 되잖아.”진호영이 난감한 듯 얘기했다.진씨 가문에 많은 일이 있었지만 진호영은 그래도 아버지를 존경하고 열심히 모시려고 애썼다.진정훈은 그런 진호영을 보면서 또 화가 났다.“배준우 씨가 허락하지 않을 거다.”배준우는 고은영을 지키는 호위무사 같은 사람이었다.진호영은 배준우의 이름만 들어도 겁이 났다.하지만 지금은 아버지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었다.“얘기만 해볼게. 은영이가 허락하면 데려오고 허락하지 않으면 그만할게. 그러면 되지?”진호영은 적어도 아버지의 말을 전해주기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이 말을 전하지도 않는다면 평생 후회할 것만 같았다.그런 진호영을 보면서 진정훈은 머리가 약간 아팠다.“가지 마!”고은영을 향한 동정심이 더욱 컸기에 진정훈은 진호영이 고은영을 건드리러 가지 않았으면 했다.고희주의 일로도 충분히 힘든 사람이다.“못 들었어?”진호영이 대답하지 않자 진정훈이 더욱 엄숙한 말투로 얘기했다.무슨 일이 있든지 진호영은 고은영을 위해 움직일 것이다.“...”진정훈의 결연한 태도에 진호영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만은 아주 답답했다.그래서 결국 30분이 지난 후 진호영이 한눈을 판 사이에 몰래 고은영을 찾아갔다.고은지의 병실에는 이루어 말할 수 없는 무거운 분위기가 맴돌았다.배준우가 음식을 가져왔지만 두 사람은 밥을 먹을 기분이 없어 보였다.고은영이 고은지에게 얘기했다.“언니, 좀 먹어둬.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잖아.”배준우와 고은영의 대화를 들은 후부터 고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그대로 침대에 누운 채 공허한 두 눈으로 절망스럽게 하늘만 쳐다볼 뿐이었다.고희주는 고은지의 마지막 희망이자 삶의 원동력이었다,하지만 그런 고희주가 죽었다
배준우의 뜻은 명확했다.고은영이 지금 사건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어하고 있으니 진씨 가문 사람들이 진성택의 일로 고은영을 건드리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이다.진정훈은 배준우의 뜻을 잘 알기에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그렇게 하죠.”진정훈도 배준우처럼 바람을 쐬러 나온 것이었다.하지만 배준우한테서 고은영의 상황을 전해 듣더니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도 않고 다시 돌아갔다.그리고 올라가자 엘리베이터 앞에서 바로 진호영을 만날 수 있었다.진호영은 이제 진유경의 본모습을 알아보게 되었다.진유경이 진호영에게 같이 고은영을 찾아가자고 했을 때 진호영은 완강하게 거절했다.“아버지가 깨어나셨어. 은영이를 보고싶어 하셔.”진호영이 약간 쉰 목소리로 얘기했다.어쩌면 이게 진성택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기분이 들었다.“가지 마.”배준우의 말을 떠올린 진정훈이 바로 얘기했다.그 말에 진호영이 약간 불쾌한 듯 표정을 구겼다.“왜 가지 말라는 거야? 은영이의 친아버지잖아. 아버지가 깨어난 뒤로 계속 은영이를 찾고 계시는데 왜 말리는 거냐고!”진정훈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그리고 진호영 앞에서 멈춰섰다.진호영보다 키가 큰 진정훈이 진호영을 내려다보자 진호영은 저도 모르게 겁을 먹고 뒤로 약간 물러났다.그리고 아까보다 누그러진 말투로 얘기했다.“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단 말이야.”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진정훈은 한숨을 푹 내쉬고 얘기했다.“지금 은영이한테도 슬픈 일이 있어. 그러니 충격이 클 거야.”“무슨 일인데.”고은영도 충격이 클 거라는 말에 진호영이 깜짝 놀랐다.드라마도 아니고 이렇게 많은 일이 동시에 일어날 줄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진정훈은 또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아까 배준우가 한 말을 그대로 진호영에게 전해주었다.“...”고은지의 이름을 들은 진호영의 표정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러자 진정훈은 진호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 진호영의 어깨를 두드린 진정훈이 얘기했다.“고은지는
고은지는 고개를 끄덕이는 배준우를 보고 온몸에 힘이 풀린 듯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그러더니 이내 바닥에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희주의 소식을 들은 후부터 고은지는 자기가 다쳤다는 것을 자꾸만 까먹었다. 가끔은 상처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하지만 다친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고은영은 그 모습을 보고 얼른 앞으로 다가갔다.“언니, 언니!”고은지는 절망 속에 빠진 채 그대로 앉아있었다.간호사와 간호인이 와서 고은지를 부축해 침대로 데려갔다. 그리고 고은지에게 함부로 걸어 다니지 말라고 당부했다.“그 다리를 전혀 못 쓰잖아요. 그러니 그냥 가만히 침대에 있는 게 좋아요.”고은지는 그저 멍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그 모습은 마치 영혼이 빠져나가 껍데기만 남은 사람 같았다.고은영은 그런 고은지를 보면서 가슴이 너무 아팠다.간호사와 간호인이 모두 떠났다.고은영은 옆의 의자를 갖고 와 앉은 채 고은지의 손을 꽉 잡았다.그리고 그제야 고은지가 온몸을 덜덜 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두 사람은 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배준우는 미간을 찌푸리고 고은영의 뒷모습을 보더니 아무 말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이미 슬픔의 바다에 빠져버린 그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봤자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지금은 그저 이 슬픔을 온전히 느낄 시간이 필요했다.하지만 그 슬픔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병실에서 나온 배준우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숨을 돌리려고 했다.하지만 이내 병원 엘리베이터에서 진정훈을 만났다. 진정훈은 진성택의 일을 배준우에게 간단하게 알려주었다.지금 진성택은 적합한 신장을 찾는다고 해도 이식 수술을 하지 못할 만큼 쇠약해졌다. 원래 진씨 가문에서 진성택의 병을 알아차렸을 때, 한 달 밖에 시간이 남지 않았다.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돈의 힘이었다.배준우는 진성택이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으면서 담담하게 얘기했다.“진씨 가문 사람들이 은영이한테 연락하지
배준우와 나태현의 사이는 좋은 편이었지만 배준우는 지금 상황에서 고은지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아무리 깊은 원한이 있다고 해도 다른 여자를 이렇게 매정하게 대할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해외에 있는 사람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서 희주의 소식을 알려줬대요.”“...”“나도 원래 안 믿었는데 준우 씨 말을 들으니 아마...”거기까지 말한 고은영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그들에게 있어서 이 소식은 아주 가슴 아픈 소식이었다.배준우는 눈물을 흘리는 고은영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며 고은영의 눈물을 닦아주었다.고은영이 눈물을 흘리지 않게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위로도 소용없었다.차라리 슬픔에서 벗어날 때까지 펑펑 우는 것이 나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슬픔을 덜어낼 수 있다면 말이다.“지금부터 나씨 가문 사람들을 멀리해요. 나씨 가문 사람들은 다 더러운 사람들이니까.”그 말은 약간 유치하게 들리기도 했지만 배준우는 고개를 저으면서 얘기했다.“그래,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그러면 되지?”“네!”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여전히 속상함은 사라지지 않았다.“나씨 가문의 사람도 꼭 대가를 치러야 해요. 짜증 나는 사람들...”고은영은 그렇게 얘기하면서 또 눈물을 흘렸다.나태범이 고희주의 존재를 알았을 때 보여준 행동과 태도는 한 아이의 할아버지가 보여줄 수 있는 행동과 태도가 아니었다.그런 사람들은 대가 끊겨봐야 정신을 차릴 것이다.배준우가 고은영의 말을 듣다가 얘기했다.“걱정하지 마. 아무리 빌어도 이번에는 도망치지 못할 테니까 말이야. 피부를 확 벗겨서 밖에 내다 걸어버릴까?”“그건 너무 가벼운 벌이에요. 살과 뼈를 다 발라버려야죠!”“그렇게까지...?”“네!”배준우의 시선을 마주한 고은영은 더욱 목 놓아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배준우는 그런 고은영의 말을 듣고 작게 한숨을 내쉬고 고은영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그래, 알았어. 걱정하지 마. 그 자식들은 꼭 벌을 받게 될 거야.”
배준우의 말을 들은 고은영은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다 내 탓이에요... 내가 언니한테 제대로 사실을 알려주지 않아서... 내가...”“아니야, 네가 그때 알려줬었으면 지금 죽은 사람은 고은지가 됐을 거야.”배준우가 고은영의 말을 끊어버렸다.그때의 고은지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우울증 때문에 투신한 고희주에, 량천옥이 친엄마라는 소식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워할까.게다가 나태현의 공격까지.고은지는 그렇게 많은 사건 속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쓰러져버릴지도 몰랐다.고은영은 배준우의 옷을 꼭 잡고 얘기했다.“나태현 씨가 희주를 데려가게 내버려 두지 말았어야 했어요.”고희주가 고은지의 곁을 떠나지만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고은영은 지금 나태현을 원망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고희주가 과연 나태현의 손에서 무슨 짓을 당한 것인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고희주를 싫어하는 나태현이 과연...“이건 네 탓이 아니야. 네가 막으려 했어도 결국에 일어났을 거야.”“...”그래, 고은영이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나태현이 마음먹고 아이를 데려가려 한다면 고은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게다가 지금 해외 쪽에서 난리가 났으니... 량천옥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야.”고은영은 량천옥이 예전에 얼마나 악랄하고 무서운 수단을 쓰는 사람이었던지 떠올렸다.량천옥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심호흡과 함께 고은영의 두 볼에서 눈물이 떨어졌다.“나는 차라리 량천옥 씨가 나태현 씨를 죽였으면 좋겠어요.”고은영은 나태현이 죽을 만큼 미웠다. 아니, 죽일 만큼 미웠다.배준우는 다른 말을 더하지 않았다.그러다 고은영의 말을 들은 후 입을 열었다.“해외에서 두 사람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어.”목숨을 걸고 싸운다.그 소식으로부터 그들은 희주의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배준우 옆의 고은영은 항상 겁이 많은 착한 사람이었다.하지만 지금 고은영의 입에서는 차가운 말만 흘러나올 뿐이었다.“정말 량천옥 씨가
“나태현이 직접 얘기한 거야.”“...”나태현이 직접 얘기한 것이라니.그렇다면 아마 진실일 것이다.희주가 정말 죽었다는 것이다!고은영은 심장이 아팠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고은영의 심장을 꽉 조이는 것만 같았다.힘겹게 입을 연 고은영이 물었다.“직... 직접 자기 입으로 얘기한 거예요?”목소리는 점점 낮아져서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어떻게 해야지? 언니한테는 뭐라고 해야지?’고은지가 머리를 굴렸다.이렇게 어린 나이에... 고은지를 그렇게 잘 따르던 아이가 결국 어린 나이에 죽게 되었다.두 사람은 서로의 전부이고 세상이었다.하지만 결국 고희주는 고은지를 만나지 못하고 절망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배준영은 고은영의 울먹임을 듣고 한숨을 내쉬더니 얘기했다.“지금 데리러 갈게.”고은영이 핸드폰을 툭 떨어뜨렸다. 희주가 죽었다니...이제 어찌해야 하는가...심호흡을 여러 번 했지만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결국 벽에 기대어 쭈그리고 앉았다.간호인이 물을 떠 오다가 창백한 표정의 고은영을 보고 얼른 다가갔다.“사모님, 왜 그러세요? 어디 아프세요?”“쉿.”간호인이 뭐라고 더 얘기하려고 할 때 고은영이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했다.지금 이 순간에는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간호인은 그런 고은영을 보고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왜 그러세요? 의사를 부를까요?”고은영은 고개를 젓고 대답했다.“괜찮아요, 그냥 혼자 내버려 두면 나아질 거예요.”고은영은 그저 혼자 있고 싶었다.고은지에게 걸려온 전화는 장난 전화라고 생각했지만 배준우가 알아 온 정보도 같은 내용이니...고은영은 이제 희주가 죽었다는 사실을 정말 믿게 되었다.그 작고 어린아이가 죽다니...간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그러면 필요하실 때 부르세요. 전 먼저 물을 가져다드릴게요.”고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고희주로 가득했다.왜 그때 고은지에게 그렇게 많은 일들을 비밀로 했었을까.만약 고은지에게 바로 알려주었다면 고은
나태현의 태도에 집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불쾌한 어조로 말했다.“도련님, 왜 그렇게까지 하십니까?”나태현이 차갑게 되물었다.“그렇게까지?”“어르신이 그 아이를 안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고... 아시잖습니까.”하지만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키우는지에 대한 생각은 다를 것이다.집사의 그 한마디가 마치 나태현의 신경을 건드린 것 같았다.나태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집사는 들려오는 기계음 소리를 들으면서 굳은 표정으로 나태범을 쳐다보았다.“큰 도련님이 전화를 끊으셨습니다.”“아이는?”나태범이 조급해하면서 물었다.집사는 고개를 저었다.“희주 아가씨에 관한 얘기는 하지 않으셨습니다.”나태범은 너무 걱정되어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아이는 도대체 어떻게 되었고 량천옥은 대체 왜 갑자기 미친 것일까.량천옥은 지금 단단히 미쳐있었다.“다시 전화 걸어! 지금 당장 돌아오라고 해!”나태범이 조급해하면서 얘기했다.나태현을 해외에 두는 것이 마음 놓이지 않았다.량천옥은 그야말로 미친년이었다. 이성을 잃은 량천옥은 다 같이 죽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상대를 무조건 죽일 것이다.배항준이 계속 량천옥을 어르고 달랜 덕분에 량천옥은 요즘 잠잠하게 지냈다.하지만 량천옥의 본 모습은 그런 것이 아니다.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네.”이윽고 집사가 다시 나태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나태현은 받지 않았다.계속해서 전화를 걸어도 받는 사람은 없었다.“큰 도련님이 전화를 받지 않으십니다.”“그럼 그 주변 사람한테 전화해!”“네, 네!”집사는 나태현이 조급해한다는 것을 발견했다.당연한 일이었다.량천옥이 나태현을 정말 죽이려고 하고 있으니 말이다.나태현이 낙하산을 쓸 줄 몰랐다면 아마 정말 죽었을 것이다.량천옥과 한곳에 있는 것도 하나의 위험이었다.집사는 나태현 주변 사람에게 연락을 돌렸다. 하지만 나태범은 여전히 마음을 다잡을 수 없어서 거실에서 이리저리 오갔다....고은영은 고은지 옆을 계속 지키
고은영은 그런 고은지를 보면서 가슴이 답답했다.“언니...”“희주가 죽었대...”“아니, 희주는 살아있어! 날 믿어줘! 희주는 분명 살아있을 거야!”고은영이 계속해서 위로했다.하지만 고은영도 자기가 하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나태현과 량천옥이 동시에 해외로 나갔다는 건 좋지 않은 징조가 확실하니까 말이다....고은지의 세상은 완전히 무너져버렸다.그리고 나씨 가문도 마찬가지였다.나태웅은 아직도 나씨 가문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장선명과 안지영의 결혼 소식이 퍼져도, 안지영이 나태웅을 고소하겠다는 소식이 퍼져도 나태웅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그리고 이 시점에 나태현이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그 소식을 들은 나태범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나태현은 지금 어디 있어!”집사가 나태범을 부축해주었다.“도련님은 그저 가벼운 찰과상을 입었을 뿐입니다. 괜찮습니다.”괜찮다는 말을 들었지만 나태범은 걱정이 되었다.“대체 왜 그렇게 된 거야. 량천옥의 짓이야?”나태범은 량천옥의 등장을 썩 반기지 않았다.안 그래도 걱정하고 있었는데... 걱정하던 일이 하나둘 벌어지고 있었다.량천옥은 착한 사람이 아니다. 완전히 미친 사람이었다.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량천옥 씨가 한 겁니다.”나태범은 그 소식을 듣고 표정이 바로 굳어버렸다.“이 사람이... 점점 담이 커져서 미친 거 아니야?”나태범이 고함을 질렀다.이윽고 그는 무슨 생각을 떠올리고는 어두운 표정으로 집사를 쳐다보았다.집사는 나태범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저었다.“큰 도련님이 무슨 정보를 막아버려서 저희도 희주 아가씨의 소식을 모릅니다.”나태범은 미간을 팍 찌푸렸다.나태현이 아이를 해외로 빼돌린 후, 나태범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소식도 들은 것이 없었다.아무리 그래도 나태현의 자식이니 별일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그럼 대체 무슨 일이야. 설마 그 아이가...”거기까지 얘기한 나태범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