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사는 어두운 표정으로 나씨 가문에 돌아왔다. 나태범은 집사가 혼자 돌아오는 것을 보고는 표정이 바로 굳어버렸다.“안지영은?”“못 데려왔습니다.”집사가 고개를 푹 떨궜다.예상했던 일이지만 나태범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제가 도착했을 때 마침 장선명 씨도 도착했습니다.”“장선명과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 거야?”“네, 그런 것 같습니다. 아침 출근길도 함께 하고 퇴근길도 함께하니... 신혼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신혼은 무슨.”“...”안지영과 장선명은 출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정말 떨어지지 않았다.“아직도 나태웅을 찾지 못한 거야?”“네...”집사가 불안에 떨면서 얘기했다.나씨 가문 사람들은 나태웅의 실종 때문에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어제부터 지금까지. 그들은 아무리 찾아도 나태웅을 찾을 수 없었다.그 유서는 마치 경고장처럼 모든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했다.나태범은 머리가 아팠다.“이... 이 버르장머리 없는 것들!”그렇게 많은 사람을 보냈는데 아직도 나태웅의 정보를 찾지 못하다니.‘나태웅은 어디로 간 거야!’나태웅이 전에 벌인 짓을 생각하면 나태범은 나태웅이 또 사고를 칠까 봐 걱정되었다.눈을 꼭 감은 나태범이 이를 꽉 깨물고 물었다.“안지영은 이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거야?”“네. 알고 계십니다.”집사가 대답했다.어제부터 알고 있었다.하지만 안지영의 태도는 여전히 냉랭했다.게다가 나태웅이 유서를 남기고 사라졌다는 말을 듣고도 혼인 신고를 하고 왔으니, 나태범이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깊은 심호흡을 한 나태범이 차갑게 얘기했다.“그러면 어쩔 수 없지.”“어르신...”“시작해!”나태범이 차갑게 얘기했다.나태범의 말을 들은 집사는 저도 모르게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그는 나태범이 뭘 하려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안지영을 데리러 간 건 안지영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였다. 만약 오지 않는다면...집사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전화가 울렸다.“얘기해.”“집사님, 량천옥 씨가 오셨습니다.”
“뭐?”나태범이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스파이라니.천락그룹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집사는 원래 나태현이 이 사건을 빠르게 해결할 줄 알고 나태범에게 전하지 않으려고 했다.하지만 하필 지금 시점에 량천옥이 오다니. 집사는 이 일이 량천옥과 연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렇다면 나태범도 경계심을 세워야 했다.“지금 이사들이 난리입니다. 큰 도련님은 이 일 때문에 바쁘시고요.”“그 프로젝트, 누가 빼앗아 갔어!”“북성입니다. 유가그룹이요!”유가그룹?‘유가 그룹에서 왜... 북성에 있을 것이지 왜 강성까지 온 거지?’나태범은 미간을 찌푸리고 고민했다. 집사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얘기했다.“육씨 가문은 량천옥 씨와도 연관이 있습니다.”“그러니까 네 말은 이 일이 량천옥과 연관 있을 수 있다는 뜻이야?”“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아직까지는 진실이 무엇인지 몰랐다.하지만 나씨 가문은 알고 있었다. 량천옥이 얼마나 잔인하고 악독한 여자인지.자기 친딸도 버릴 수 있는 사람이니, 무엇인들 못 하겠는가.나태범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두 사람이 더 얘기하려는데 량천옥이 고용인을 따라 들어왔다.량천옥에게서는 여전히 명문가의 귀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배씨 가문을 떠났다고 해도 그녀에게서는 압도적인 아우라가 흘렀다.강성의 사람들은 량천옥이 배씨 가문에서 나오면서 모든 것을 잃었다고 했다.하지만 나태범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나태범은 량천옥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았다.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배씨 가문에 들어선 사람이니, 한곳에 모든 걸 걸 성격은 아니다.나태범은 소파에 앉은 량천옥을 보더니 한숨을 내쉬고 집사에게 얘기했다.“먼저 나가봐.”“네.”집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나태범이 손을 저어 자리에 있는 모든 고용인들을 내보냈다.나태범과 량천옥, 두 사람만이 남았을 때, 량천옥은 미소를 지으면서 나태범을 쳐다보았다.분명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나태범은 그 웃음 속에 칼이 있는 것만 같았다
나태범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량천옥이 배씨 가문에서 나온 후 이렇게 막 나갈 줄은 몰랐다.“그러니까 내 손녀가 어디에 있는지 빨리 알아보는 게 좋을 거야.”“...”“두 주일이면 되지? 두 주일 내로 정확한 정보를 주지 못하면 난 그해의 일을...”“너, 미쳤어?”량천옥의 말에 나태범이 노발대발했다.량천옥은 자리에서 일어나 차갑게 코웃음 쳤다.“누가 미쳤는지는 두고 보면 알 거야.”두 주일.그건 량천옥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인내심이었다.왜 두 주일이냐면...량천옥도 알고 있었다. 나씨 가문 사람들도 고희주가 어디로 간 건지 모른다는 걸.하지만 만약 나태범이 정말 마음먹고 찾아본다면 꼭 찾을 수 있을 것이다.말을 마친 량천옥은 더 머무르고 싶지 않아 바로 자리에서 떠나갔다.량천옥이 얼마 가지 않았는데 나태범이 량천옥을 불러세웠다.“그 프로젝트, 네가 꾸민 짓이야?”“...”그 말을 들은 량천옥은 우뚝 서서 나태범을 돌아보았다.나태범은 화를 억누르고 물었다.“참 대단하네. 나씨 가문에 복수하려고 그러는 거야?”량천옥은 그제야 나태범의 말을 알아차렸다.천락 그룹은 오늘 큰 사건이 터졌다. 바로 프로젝트 하나를 북성의 육씨 가문에게 빼앗긴 것이다.량천옥이 한 짓은 아니지만...이게 누가 한 짓인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량천옥은 일부러 더 크게 웃으면서 얘기했다.“네 아들이 내 딸한테 자기 약혼자를 간호하라고 했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 이건 너희한테 주는 작은 교훈일 뿐이야.”“인정하는 거야?”나태범의 호흡이 더욱 거칠어졌다. 량천옥이 승인하자 그는 이를 더욱 꽉 깨물었다.“인정할게. 그러니 우리의 악연을 끊으려면, 두 주일 동안 열심히 노력해야 할 거야.”두 주일 뒤 나태범이 고희주를 찾아낸다면 량천옥은 고희주와 고은지를 데리고 먼 곳에서 살 생각이었다.나씨 가문이 뭐가 대수인가?아무리 나태현이 고은지를 좋아한다고 해도 량천옥은 고은지가 나씨 가문에 시집오지 못하게 막을 것이다.량천옥은
나씨 가문에서 나온 량천옥은 고은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고은지는 받지 않았다.저절로 종료되는 전화를 보면서 량천옥은 한숨을 내쉬었다.핸드폰을 가방에 넣으려는데, 핸드폰이 다시 진동했다.고은지가 건 전화인 줄 알고 기뻐한 것도 잠시, 확인해 보니 량의가 걸어온 전화였다.량천옥은 약간 고민하다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천옥아, 오늘 집에 들어온 거지?”전화기 너머의 량의가 조심스레 물었다.예전의 량의는 량천옥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지금 량의는 량천옥 앞에서 한없이 작아졌다.량의에게 있어서 량천옥은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사람이었다.전에는 고은지를 향한 호감이나 사랑이 없었지만 지금 증조할머니가 되고 나니 그제야 예전에 저지른 일들이 후회되었다.문득, 본인이 어릴 적 했던 일들이 얼마나 우습고 어이없는지 알게 된 것이다.량천옥은 바로 거절했다.“은지 저녁 준비하러 가야 해요.”“네가 요리를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다고...”“모르면 배우면 되잖아요. 엄마가 되어서 자기 딸한테 밥도 못 해주겠어요?”량의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량천옥이 되받아쳤다.말투는 차가웠고 날카로웠다.그 차가운 말에 량의는 그대로 굳어버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량천옥은 한숨을 쉬면서 얘기했다.“며칠 떠난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래요, 네?”“아니, 난 그런 뜻이 아니라...”량천옥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더는 량의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량의가 보여준 반응은 거의 본능에 가까웠다.그녀는 량천옥이 손끝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기를 바랐다.량천옥은 두 눈을 감고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다.차에 탄 량천옥은 바로 운전해서 고은지의 집으로 갔다.차에서 내리기 전에 정록담이 전화를 걸었다.“사모님, 이미 다 준비했습니다.”그 말을 들은 량천옥은 차가운 눈빛으로 얘기했다. “그러면 진행해.”“네.”정록담이 고개를 끄덕였다.량천옥이 이어서 물었다.“그 프로젝트들은 어떻게 됐지?”“다 정리했습니다. 메일로 보
가정부?량천옥의 말에 고은지의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이윽고 고은지가 얘기했다.“강성에서 누가 당신을 가정부 취급하겠어요.”아무도 량천옥을 업신여길 수 없었다.량천옥이 얼마나 잔인하고 악독한지는 고은영을 지켜보면서 알 수 있었다.량천옥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사람을 처리해 버릴 수 있었다.그런 량천옥을 가정부로 생각하라니.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튿날 시체로 발견되었을 것이다.“네가 날 가정부 취급하면 되지.”그렇게 말하는 량천옥의 말투에는 다정함이 묻어났다.고은지는 그 다정한 말투를 들으면서 약간 멍해졌다.량천옥은 삶은 면을 짚어냈다.아무 건더기도 없는 면을 보면서 량천옥은 마음이 아팠다.아마도 고희주가 없으니 그냥 살기 위해 먹는 것 같았다.하지만 량천옥은 그걸 가만히 둘 수 없었다.냉장고에는 계란과 토마토뿐이었다. 량천옥은 바로 토마토와 계란을 볶아서 면 위에 올려놓아 주었다.어제 금방 이 집에 들어온 터라 량천옥은 아직 이 집에 대해서 잘 몰랐다. 량천옥은 내일 장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얼른 와서 먹어.”량천옥이 면을 들고 테이블로 갔다.고은지가 걸어왔다. 온종일 고된 일을 하고 집에 와서 남이 해준 밥을 먹는 느낌이 꽤 좋았다.고은지가 젓가락을 들자 량천옥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고은지를 쳐다보았다.고은지가 물었다.“안 드세요?”“너 먼저 먹어.”고은지는 량천옥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면을 1인분만 끓였다.고은지는 더 뭐라고 하지 않고 면을 불어 입에 넣었다. 고은지가 면을 삼키기도 전에 량천옥이 물었다.“어때?”“...”고은지는 미묘한 표정으로 량천옥을 쳐다보았다.량천옥은 긴장해서 고은지를 쳐다보았다.“요리... 잘 안 하죠?”맛있는 건 아니었다. 토마토는 채 익지 않았고 계란은 조금 짰다.그 말을 들은 량천옥은 표정이 굳어버렸다.“저기, 그게 내가...”“...”“다시 만들어줄게.”그렇게 말하면서 량천옥이 고은지의 그릇으로 손을 뻗었다.“됐어요. 먹을 순 있으
자기 전에 아침 다섯 시 사십 분의 알람을 맞춰놓았다.근처에서 장을 보기 위해서였다.고은지는 아침에 부스럭거리는 소리 때문에 깨어났다.시간을 확인해 보니 여섯 시 반이었다.정신을 차려보니 량천옥이 돌아온 것이었다.고은지는 량천옥이 잠자리가 익숙하지 않아 밖에서 자고 돌아온 것인 줄 알았다.량천옥은 잠이 덜 깬 고은지를 보더니 멍해서 물었다.“나 때문에 깨난 거야?”고은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멍한 표정으로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계속 잤다.고은지를 깨운 것에 대해 죄책감이 든 량천옥은 조심스레 주방으로 들어갔다.고은지가 다시 깨어났을 때 시간은 일곱 시 반이었다.천락 그룹은 아홉 시 출근이다. 지금 씻고 나가면 시간이 딱 될 것이다.방에서 나오던 고은지는 향긋한 냄새에 사로잡혔다.테이블에 음식이 가득했는데 량천옥은 죽을 들고 오고 있었다.멍하니 서 있는 고은지를 보면서 량천옥이 얘기했다.“얼른 씻고 밥 먹어. 그래야 출근을 하지.”고은지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고은지는 살면서 지금까지 이런 대접을 받아본 기억이 없었다.조보은은 매일 고은지보다 늦게 일어났다. 그래서 고은지는 게으른 조보은 대신 요리를 했었다.“뭐 해. 얼른 가서 씻고 와.”량천옥은 고은지가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재촉했다.물론 고은지가 출근하지 않겠다고 하면 량천옥은 더욱 기뻐할 것이다.고은지가 정신을 차리고 량천옥을 쳐다보았다.“혹시 차린 게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량천옥이 긴장해서 물었다.어젯밤 량천옥은 요리 레시피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고은지가 뭘 좋아하는지는 잘 몰랐다.묻고 싶었지만 이미 밤이 깊었던 터라 묻지 못했다.고은지는 약간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먼저 씻고 올게요.”말을 마친 고은지는 량천옥의 반응을 보지도 않고 바로 화장실로 들어갔다.량천옥은 그런 고은지를 보면서 또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주방에서 자기가 만든 음식들을 내갔다.이건 량천옥이 불과 몇 시간 전 핸드폰으로 배운 것이었다. 시간이 얼마
고은지와 량천옥의 사이는 그럭저럭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이 화목해졌다.오늘 아침은 고은지가 먹어본 아침 중에서 가장 따뜻한 아침이었다.조보은과 함께 살던 날을 떠올리면 더 할 말이 없었다.조용수와 같이 살던 때는 고은지가 매일 아침 일어나 아침을 만들었었다.가장 먼저 일어나는 건 항상 고은지였다. 그리고 가장 늦게 밥을 먹는 것도 고은지였다.조용수와 진여옥의 밥을 차려주고 나서야 고은지는 밥을 먹을 수 있었다. 후에는 아이가 생겨 희주를 돌봐야 했다.희주를 돌보느라 고은지는 밥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항상 다 식은 밥을 먹을 뿐이었다.진여옥은 고은지는 쓸데없는 사람이라고, 조용수 덕분에 집에서 먹고 살면서 아이를 봐주는 거라고 했다.그래서 주변의 이웃들은 다 고은지가 집에서 편히 먹고 자는 줄 알았다.하지만 처음으로 느껴보는 따뜻한 아침밥이... 량천옥이 만들어준 것이라니.천락그룹에 갔을 때 고은지의 상사는 고은지를 보고 한숨을 돌렸다.그리고 웃으면서 고은지더러 나태현에게 서류를 가져다주라고 했다.고은지는 별말 없이 서류를 들고 나태현을 찾아가려고 했다.그리고 나태현 사무실 입구에서 이지훈을 만났다.“여기는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고은지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왜요?”“지신혜 씨가 오셨어요.”이지훈이 얘기했다.지신혜가 왔다는 것을 들은 고은지의 눈빛은 약간 어두워졌다.고은지는 들고 온 서류를 이지훈에게 넘겨주었다.“그럼 이것 좀 부탁해요.”“네. 그럼 돌아가세요.”이지훈은 고은지를 옆에서 봐오면서 동정심을 품었다. 심지어 량천옥이 고은지 옆에 있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량천옥이 없었다면 고은지의 상황은 지금보다 더 나빴을 것이다.사무실 안.휠체어에 앉은 지신혜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나태현은 미간을 찌푸리고 얘기했다.“알겠어.”“우리 아버지는 아무 죄도 없어요.”나태현은 담배를 피우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젯밤, 지씨 가문에 문제가 생겼다.지신혜의 아
지신혜는 떠나고 싶지 않아 했다.지씨 가문에 생긴 일 때문에 어딜 가도 불안했다.그래서 나태현 곁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나태현이 강경하게 얘기했다.“먼저 돌아가.”그런 나태현을 보면서 지신혜는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려던 말을 겨우 목구멍으로 삼킨 지신혜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그럼 우리 아빠의 일... 부탁드려요.”지금 지신혜의 유일한 희망은 나태현이었다.이지훈은 지신혜의 휠체어를 밀면서 떠났다.나태현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있었다....고은지가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그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올라와.”수화기 너머로 나태현의 중저음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지는 전화기를 꽉 잡았다가 반박하지 않고 대답했다.“네.”전화는 이미 끊어졌다. 고은지는 다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자리에 앉은 나태현은 위험한 눈빛으로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확인해 보니 본가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 어젯밤부터 저택에 들어오라고 연락이 왔지만 나태현은 너무 바빠서 가지 못했다.그래서 또 전화가 온 모양이었다.나태현은 미간을 찌푸리고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나다.”전화기 너머에서 나태범의 피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차가운 기운이 흐르는 목소리를 들으며 나태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젠 내 말도 안 듣겠다는 거지? 어젯밤 왜 안 돌아온 거야.”“바쁩니다.”나태현이 차갑게 대답했다.그 태도에 나태범은 더욱 열이 받았다.“남풍 프로젝트 때문에?”“...”남풍 프로젝트 얘기를 들은 나태현의 눈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어젯밤부터 그 스파이를 찾아내려고 했지만 결국 찾아내지 못했다. 만만치 않은 상대인 것만은 확실했다.남풍의 프로젝트는 나태현에게 있어서도 골치 아픈 일이었다.천락그룹에 이런 일이 생긴 건 처음이었다. 이사회도 이번 일 때문에 발칵 뒤집혔다.나태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나태범이 한숨을 쉬면서 얘기했다.“알아보지 않아도 돼. 량천옥이 한 짓
전화를 끊은 진윤이 고은영을 보면서 물었다.“지금은 좀 속이 풀렸어?”“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이렇게 한 거예요?”“응.”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고은영은 약간 감동하긴 했지만 이루어 말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예전 같았으면 고은영의 곁에 무조건적인 자기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다른 일이었다면 도움을 거절할 것이었지만 이번 일에서는 물러설 수 없었다.“지금 해외에서 난리가 났어. 이 시점에 나태현의 집중력을 흩트리는 것도 좋지.”량천옥도 나쁜 사람이긴 하지만 량천옥이 나태현과 싸우고 있는 건 고은지 때문이었다.그러니 지금 진윤이나 배준우가 나태현의 시선을 자꾸만 국내로 돌리게 해서 집중력을 분산시키는 건 량천옥에게 좋은 일이다.“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진윤이 고은영에게 얘기해 주었다.고은영은 진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나태현은 해외에 있고, 나태웅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고 있다.그렇다면 이제는 나태범이 움직일 것이다. 나태범 세대가 싸운다면 젊은 세대들은 감히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고은영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푹 쉬었다.“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나씨 가문보다 더욱 위태로운 건 우리 언니니까요.”희주가 죽었다.그걸 떠올리면 고은영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고은지는 지금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수 있었다. 그러니 나씨 가문 사람들을 신경 쓸 새가 없었다.이제는 이 지긋지긋한 악연을 갈라내고 싶었다.진윤은 고은영 눈에 비친 슬픔을 보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아직 희주가 정말 죽었는지 아닌지도 확인하지 않았잖아. 그러니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눈으로 본 것도 거짓일 수 있는데, 귀로 들은 것은 오죽하겠냐는 말이었다.진윤은 제삼자로서 이 사건을 지켜보면서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을 딱 짚어 말할 수 없었기에 말을 아끼고 있었다.“그 소식이 가짜였으면 좋겠어요.”고은영은 고희주를 불쌍하게 여겼다. 조씨 가문 사람들은 희주가 조영수의 친딸이 아니라는 것
‘아까 왜 돈이 없다는 얘기를 해서는...’진윤은 고은영의 손을 잡고 쇼핑을 계속했다.점심쯤이 되자 진윤은 지친 고은영을 데리고 레스토랑으로 가서 식사했다.테이블 앞에 놓인 갖가지 음식을 보면서 고은영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두 사람이 먹기에는 너무 많지 않아요?”“안 많으니까 천천히 먹어.”진윤이 대답했다.진윤은 진정훈이 왜 그때 그렇게 심하게 날뛰었는지 이해가 갔다.진정훈은 고은영이 어릴 때 어떻게 살았는지 가장 먼저 조사한 사람이다.그래서 고은영의 아픔을 알고 그 상처를 치유해주기 위해 온 세상의 좋은 것들을 고은영에게 주려고 한 것이다.그러니 고은영의 몫이 진유경에게로 넘어간 걸 알고 미쳐버린 것이다.지금의 진윤도 마찬가지였다.“이거 먹어.”진윤은 양고기 스테이크를 썰어서 고은영의 그릇에 담아주었다.“고마워요, 오빠도 얼른 먹어요.”“우리 집에 자주 놀러와. 우리 아내가 또 요리를 잘하거든.”“그런데 지금 임신한 거 아니에요? 저까지 가면 민폐죠.”“그래도 요즘 매일 요리하고 있어.”“네?”고은영이 깜짝 놀랐다.“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고은영은 임신했을 때 만사가 귀찮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말린다고 말려지는 사람이 아니잖아. 원하는 건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하긴.게다가 임산부는 입맛이 까다로워서 다른 사람이 한 것을 잘 먹지 못할 때가 많았다.윤설이 본인이 먹고 싶은 걸 직접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쁜 건 아니었다.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그럼 최대한 덜 힘들게 옆에서 보살펴줘요.”진윤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그건 나태현이 건 전화였다.“나태현이야.”“계약 해지 때문에 전화한 거겠죠?”고은영이 물었다.아까 차에서 진윤은 여러 번 전화를 걸어 나씨 가문과 연관된 프로젝트를 모두 취소하기로 했다. 배준우도 마찬가지였다.그러니 나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진윤이 고개를 끄덕인 후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형, 지금
진호영이 사람들 앞에서 진유경, 김영희와 싸울 줄은 전혀 몰랐다.진유경과 김영희는 이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기에 속수무책으로 말려들고 있었다.그 시각.진윤은 고은영을 데리고 쇼핑하러 다니고 있었다.김영희와 진유경은 진정훈과 진윤이 장례식 준비도 돕지 않고 서로 재산을 빼앗느라 바쁘다고 했지만 사실 진윤은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중이었다.진성택이 진유경에게 남겨준 물건은 많지 않았다. 차라리 진윤이 지금 고은영에게 쓰는 돈이 더욱 많을 것이다.“오빠, 너무 많이 산 거 아니에요?”명품을 너무 많이 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기다란 영수증 위의 숫자를 본 고은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배준우와 결혼한 후 돈이 모자랐던 적은 없지만 돈을 이렇게 많이 쓴 적도 거의 없었다.진윤은 경호원을 데리고 왔다. 네 명의 경호원 손에는 쇼핑백이 가득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일부는 란완 리조트로 배송시켰다.“괜찮아. 많이 사. 우리 아내 것도 골라줘야지.”진윤이 아무렇지 않게 얘기했다.“오빠는 정말 좋은 남자 같아요.”자세히 생각해보니 배준우는 직접 무언가를 사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대부분은 다 다른 사람을 시켜서 란완 리조트로 가져오게 했던 것 같다.그리고 고은영은 쇼핑을 좋아하는 편이니 직접 사는 편이 많았다.하지만 진윤은 쇼핑하면서도 자기 아내를 생각한다.진윤이 웃으면서 얘기했다.“배준우도 좋은 남자야. 그 사람이 있어서 우리가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거야.”“그 사람이 전에 얼마나 나빴는지 몰라서 그래요.”진윤이 배준우를 좋은 남자라고 얘기하자 고은영이 입을 비죽거리면서 대답했다.배준우와 결혼하기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 좋은 남자라는 말이 쏙 들어갈 정도였다.그때의 배준우는 정말... 악랄한...고은영은 그때 유산하지 않은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그러다 고은영은 또 나태웅을 떠올렸다.나태웅도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나태웅과 배준우가 같이 고은영을 위협했으니까 말이다.고은영은 나태웅이 안지영을
결국 진호영이 다가가서 말했다.“할머니, 지금 이 장소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진윤과 진정훈이 오늘 오지 않은 것에 대해 약간 실망하긴 했지만 두 사람이 오지 않은 이유도 명백했다.진성택이 두 사람을 너무 크게 실망시켰기 때문이다.진유경은 진호영이 진윤과 진정훈의 편을 들어주는 것을 보면서 더욱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호영 오빠, 진윤 오빠랑 정훈 오빠한테 연락해주면 안 돼요? 적어도 아버지 보내드리는 길은 보고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은영이도요... 아버지는 은영이를 가장 예뻐했잖아요.”“그만 떠들어.”진유경이 말을 마치자마자 진호영이 싸늘하게 얘기했다.다른 건 몰라도 이 상황에서 고은영의 얘기를 꺼내다니.진호영은 진유경에게서 이례 없는 메스꺼움을 느꼈다.진유경은 진호영의 반응에 멍해졌다.하지만 사람들의 화제는 이미 고은영으로 넘어가 버렸다.다들 고은영을 불효녀라고, 은혜도 모르는 매정한 여자라고 욕했다.진호영은 그 말을 들으면서 진유경을 노려보며 얘기했다.“너 때문에 은영이는 집에 돌아오지도 못했어. 아버지가 은영이를 가장 예뻐했다고? 도대체 뭘 보고 그렇게 생각한 거야? 네 눈은 장식이야?”예뻐한 적이 있었나?한 번도 없었다.진성택이 고은영에게 조금이라도 잘해줬다면 고은영이 진씨 가문 문턱을 넘어보지 못하는 일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아니, 그게 아니라...”“아버지는 남은 주식을 모두 너한테 남겨줬어. 하지만 친딸인 은영이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잖아. 그런데 아버지가 은영이를 가장 예뻐하셨다고?”진호영이 모든 것을 까밝히자 진유경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호영 오빠,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진유경은 더욱 크게 울먹이면서 눈물을 흘렸다.진유경은 지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진호영은 진유경의 편이었는데 지금은 왜...‘이게 다 고은영 때문이야! 대체 무슨 수로 꼬드겼기에 오빠들이 다 고은영의 편을 들어주는 거냐고!’“왜 이러냐고? 우리 어머니가 은영이에게 남겨준
이윽고 고은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진호영이 전화를 건 것이었다.고은영이 진씨 가문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진 후 진호영과 고은영은 거의 연락을 하지 않았다.진호영은 보통 직접 찾아와서 문제를 얘기하는 편이기에 전화를 잘 걸지 않았다.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 진호영이 전화를 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고은영은 잘 알고 있었다.진윤에게 전화하자마자 또 고은영에게 전화하다니.고은영이 전화를 받기도 전에 진윤이 고은영의 전화를 빼앗아갔다.“오빠...”진윤은 바로 전화를 꺼버렸다.“꺼버리면 어떡해요. 혹시 언니가 전화라도 하면...”“걱정하지 마. 네 언니는 너한테 연락하지 않을 거야.”“...”그렇다고 해도 마음대로 핸드폰을 꺼버리는 건 좀...게다가 고은지가 정말 무슨 일이 생겨서 고은영을 찾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진윤은 자연스럽게 고은영의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넣으며 돌려주지 않았다.“오빠.”“오늘은 나한테 집중해.”그 말투는 아주 강압적이었다.“...”마치 그동안 진윤에게 신경 써주지 않아 삐진 것만 같았다.하지만 고은영도 어쩔 수 없었다.고희주와 고은지에게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으니까 말이다.사실 고은영도 알고 있었다. 고은지는 고은영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말이다.하지만 고희주의 일 때문에 고은지는 언제든지 화를 낼 수 있었다.“그래요.”“...”“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너한테 뭘 좀 사주려고.”“...”사준다고?고은영은 진윤의 목적을 알 수 없었다.진성택이 죽었다.장례식에 안 가는 건 이해가 되지만 굳이 고은영을 데리고 나와 쇼핑을 하는 목적은 뭘까.두 사람이 차에서 내렸다. 그때 윤설의 전화가 걸려왔다.진윤은 부드러운 목소리와 다정한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그런 진윤을 보면서 고은영은 진윤이 참 좋은 남자라고 생각했다.진윤과 비교하면 나태현은 정신병이 틀림없었다....진성택은 오늘 화장하게 된다.김영희, 진유경과 진호영은 검은색 상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진윤과 진정훈은 결국
숨을 깊게 내쉰 나태현이 얘기했다.“량천옥이 나씨 가문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서 지금...”“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죠.”배준우가 나태현의 말을 끊었다.그때 나씨 가문 내부는 부글부글 끓었었다. 게다가 량천옥을 죽이려는 사람도 있었다.나태현의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갔고 나태현의 어머니도 그 시기에 돌아갔다.그 모든 모순의 시작은 량천옥이었다.그래서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나씨 가문은 여전히 량천옥과 원한이 있었다.다들 그저 그 원함을 꾹 참고 있었는데 고은지가 나타났다.량천옥의 딸이면서 나태현의 딸 엄마인 고은지 때문에 나씨 가문과 량천옥의 전쟁이 다시금 시작되었다.“이번에는... 어쩔 수 없어요.”우정과 사랑 중에서 배준우는 당연히 사랑이었다.게다가 이번 일에는 나씨 가문에서 숨기는 것이 너무 많았다.또 나태현이 회사의 일에 신경 쓸 시간이 없다 보니 프로젝트가 위험했다.나태현은 화가 나서 바로 전화를 끊었다.“...”그 소리를 들은 배준우는 핸드폰을 소파에 툭 던졌다....다른 한편.고은영과 진윤은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진윤은 전화 통화를 하면서 나씨 가문과 엮인 프로젝트를 모두 엎어버리라고 명령했다.옆에 있는 고은영은 그 말을 들으면서 걱정했다. 진윤이 또 다른 사람에게 전화하려고 할 때 고은영이 진윤의 손을 잡았다.“오빠,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나씨 가문이 밉긴 하지만 진윤의 일에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았다.진윤이 계약을 많이 해지할수록 진윤에게 영향이 더 클 테니까 말이다.진윤은 본인을 걱정해주는 고은영을 보면서 마음이 누그러졌다.부드러운 고은영의 머리를 쓰다듬은 진윤이 얘기했다.“다 필요 없는 것들이야. 나태현은 지금 당장 귀국해야 해.”그 말을 들은 고은영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머릿속에는 병원에 있는 고은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고은지는 나태현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진윤은 그런 고은영의 생각을 눈치채고 얘기했다.“지금 나태현과 량천옥이 해외에서 서로 죽이고 난리가 났어. 만
화가 난 나태범을 보면서 집사는 안절부절못했다.“지금 상황이 조금 복잡합니다.”생각하던 집사가 말을 이었다.“게다가 진씨 가문 쪽도 걱정해야 합니다.”“진씨 가문? 거기는 왜.”나태현과 량천옥이 싸우는 것만으로도 나태범은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이러다가는 정말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았다.게다가 배씨 가문에서 계약까지 해지했지...이러다가는 그룹이 파산될지도 몰랐다.“배준우 씨 아내가 진윤 씨와 진정훈 씨의 친여동생입니다. 그러니 이 세 사람 다 그 고은지 씨의 동생을 위해 움직인다고 볼 수 있습니다.”“...”나태범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저 진씨 가문에서 친딸을 찾았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진성택이 친딸보다 양딸을 더욱 아낀다는 것까지 말이다.배준우가 고은영과 결혼할 때 강성의 사람들은 배준우가 많이 아깝다고 생각했다.일반적인 신분으로는 배준우의 옆에 설 수 없으니까 말이다.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고은영이 진짜 진씨 가문의 친딸이었다.나태범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이튿날 아침.고은영이 아침을 다 먹자마자 진윤이 도착했다.그리고 조카를 위한 선물도 가득 가져왔다.고용인들이 진윤이 가져온 물건을 보관해주었다.약간 붉어진 고은영의 눈가를 보면서, 진윤이 배준우한테 물었다.“어젯밤 계속 운 거예요?”배준우도 머리가 약간 아팠다.“제대로 자지 못했어요.”진윤이 다가가서 고은영을 마주 보더니 고은영이 입고 있는 귀여운 잠옷으로 눈을 돌렸다.배준우는 정말 딸을 키우는 것처럼 고은영을 보호해주는 것만 같았다.고은영은 원래도 키가 작은 편이어서 배준우와 함께 있을 때면 아주 작아보였다.“옷 갈아입고 나갈 준비 하자.”“정말 나가야 해요?”고은영이 올망졸망한 눈으로 진윤을 쳐다보았다.고은영은 병원에 가서 고은지를 보고 싶었다.고은지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되었다.진윤은 그런 고은영의 생각을 진작 알아차렸다는 듯이 얘기했다.“병원 쪽에는 내가 사람들을 깔아놨어. 무슨 일 없을 거야. 가자.”진윤의 말을 들은
하지만 진윤이 내일 고은영을 데리고 나가는 것의 목적을 떠올리면 고은영은 어쩔 수 없었다.“당연한 거 아닌가요?”진윤이 당당하게 얘기한 후 전화를 끊었다.배준우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더니 고은영을 쳐다보았다.“이미 다 들었지?”“네.”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진성택은 사망했다.진정훈은 고은영이 장례식에 올 것인지 안 올 것인지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하지만 진윤은 장례식에 가지 말고 나가서 쇼핑하자고 했다.그것도 웃으면서 말이다.“넌 어떻게 하고 싶어?”“안 가도 돼요?”고은영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웃으면서 쇼핑해야 한다니. 고은영에게 있어서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배준우도 짐작하고 있었다.고은영의 머리를 쓰다듬은 배준우가 얘기했다.“아마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 쇼핑이 최종 목적이 아닐 거야.”“위로하는 거예요?”진윤은 배준우더러 고은영을 잘 위로해주라고 했다.“위로하는 게 아니라 그저 네 큰형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하는 말이야. 단순하게 쇼핑하는 게 목적일 리 없어.”배준우가 확신하면서 얘기했다.그 말을 들은 고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배준우는 허락하는 고은영을 보면서 한숨을 돌렸다.그리고 고은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얘기했다.“걱정하지 마. 다 지나갈 거야.”“나씨 가문 쪽은...”거기까지 말한 고은영은 고개를 들고 배준우를 쳐다보았다.고희주의 일로 마음 아팠지만 배준우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배준우는 고은영이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고은영에게 짧게 키스한 배준우가 이어서 얘기했다.“나씨 가문과 협업하는 프로젝트 두 개가 있었는데 이미 계약을 해지했어.”“주주들이 뭐라고 하지 않을까요?”고은영이 걱정하면서 물었다.“그 두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겨서 다들 발을 빼는 분위기야. 아마도 량천옥 씨가 한 일 같은데.”그래서 배준우도 큰 문제 없이 계약을 해지할 수 있었다.지나간 일에 대해 배준우는 뭐라고 할 수 없
진정훈이 전화를 건 것은 진정훈에게도 계획이 있어서였다.“진유경을 조심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진유경에게 남긴 주식이 있는데 꼭 되찾아올 겁니다.”진유경이라...진정훈은 진유경이 왜 계속 고은영을 끌어내리려는지 깨달았다.그건 바로 진유경이 아직 자기 위치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러니 이제라도 제대로 알게 해줘야 했다.배준우는 진정훈의 말을 알아듣고 얘기했다.“네. 알겠습니다.”“장례식은 와도 되고 안 와도 괜찮다고 전해줘요.”“네.”진정훈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은영의 뜻을 존중해주었다.하지만 장례식에 고은영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수군거릴 것이 뻔했다.“장례식은 언제입니까.”“이틀 뒤입니다.”“알겠습니다.”이틀 뒤라니. 생각보다 장례를 서두르는 모습에 배준우는 약간 의아했다.진정훈은 그저 이 일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그래서 그동안 배준우가 고은영을 잘 지켜줄 수 있도록 전화를 건 것이다....진정훈과의 통화를 마치고 배준우가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는데 핸드폰이 또다시 울렸다.이번에는 진정훈이 아닌 진윤이 걸어온 전화였다.배준우는 고은영을 안고 소파에 앉았다. 영원히 고은영과 떨어지기 싫어하는 것처럼 고은영을 꼭 안고 있었다.“여보세요.”배준우는 진윤을 존경하는 편이었다.진윤은 정말 가문의 도움 없이 지금 그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이다.“은영이는요? 연락이 안 돼서.”“기분이 안 좋아요. 무슨 일이죠?”“왜 기분이 안 좋은 거죠?”“고은지 씨한테 일이 좀 생겨서... 컨디션이 좋지 않아요.”고은지의 상황을 전해 들은 진윤은 머리가 아팠다.지금 고은영에게는 모든 일이 설상가상이었다.“내일 오전 아홉 시에 내가 데리러 간다고 전해줘요.”“내일이요?”“네.”진윤이 대답했다.배준우는 진윤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진윤은 모든 사람들에게 진씨 가문이 얼마나 엉망인지 광고할 셈이었다.진윤이 진성택의 장례식에도 나서지 않고 친여동생인 고은영을 데리고 밖에서 돌아다닌다면...“어디로 갈 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