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훈도 이른 아침 연락을 받고 얼른 나태현의 사무실로 향해 가고 있었다.엘리베이터에서 이지훈은 고은지를 보고 미간을 약간 좁혔다.“오늘은 올라오지 마세요. 나 대표님이 기분이 좋지 않으니까요.”그 말을 들은 고은지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고은지의 말투는 평소와 같았다.전에 회사에 있을 때 고은지에게 부드러운 느낌이 있었다.하지만 지금 고은지에게 남은 건 차가운 한기뿐이었다.고은지는 본인 사무실에서 내렸다. 모든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고은지는 여유롭게 본인 위치로 갔다.“고은지 씨, 나랑 같이 사무실로 가야겠어.”팀장이 고은지를 보고 불러세웠다.“알겠습니다.”고은지는 펜과 노트북을 들고 사무실로 갔다.다른 부문 동료들이 속삭이고 있었다.“들어보니까 안에 스파이가 있는 것 같던데?”“스파이? 그럴 리가... 천락 그룹에 이런 적 한 번도 없었잖아.”“그렇게 큰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기다니. 스파이가 있는 게 분명해.”“헐... 그러면 지금 스파이를 찾으려는 거야?”“당연한 거 아니냐? 찾아내서 끝까지 추궁해야지.”회사 내부에 스파이가 있다니.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몇백억이나 되는 프로젝트를 잃을 위기에 처했으니 천락그룹에서는 두 눈에 불을 켜고 스파이를 찾아내려 할 것이다.고은지는 팀장의 사무실에 도착했다.“팀장님, 저 왔습니다.”“이 포캐스팅 PPT 다시 만들어와요. 한번 확인해 봐.”팀장이 자료를 넘겨주면서 얘기했다.고은지는 약간 어리둥절해하면서 팀장을 쳐다보았다.팀장이 이어서 얘기했다.“상부의 뜻은 이 프로젝트를 다시 가져와야 한다는 거야. 우리는 각 팀의 뜻을 종합해서 전달해야 하는 거고.”고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말을 마친 고은지가 서류를 들고 사무실에서 나갔다.지금 천락 그룹은 위기에 놓여있었다.나태현은 한 번도 밑지는 사업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나태현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고은지가 자리에 앉자마자 전화가 울렸다
고은지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담담하게 말했다.“그래요?”“그래요라는 말이 나와? 량천옥이 어떤 사람인지는 네가 잘 알잖아. 뭐 때문에 이런 짓을 한 건지는 네가 가장 잘 알 거야.”량천옥이 누구를 위해 이런 짓을 한 것인지는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강성의 사람들은 량천옥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잘 알았다. 그리고 량천옥이 얼마나 본인의 아이를 아끼는 사람인지도 잘 알았다.배윤이 학교에 다닐 때, 그 누구도 배윤을 건드릴 수 없었다.배윤의 엄마가 량천옥이니까 말이다.그리고 지금 나태현의 눈앞에 서 있는 고은지 또한 량천옥의 딸이다.고은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담담한 표정으로 나태현을 쳐다보았다.나태현은 그런 고은지를 보면서 화가 나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병원에 가서 지신혜를 간호해. 지신혜가 다 나을 때까지.”“네.”고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싫다는 기색 하나 내비치지 않고 담담하게 말이다.그런 고은지를 보면서 나태현은 더욱 화가 났다.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차갑게 대답했다.“나가.”고은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사무실의 문이 닫히는 순간 나태현은 화가 나서 재떨이를 바닥으로 내쳤다.그는 짜증이 몰려와 참을 수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이지훈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그리고 서류를 나태현 앞에 놓으면서 얘기했다.“대표님이 원하신 자료입니다.”“나태웅은 아직도 못 찾은 거야?”어제부터 지금까지 나태웅은 연락도 되지 않고 출근도 하지 않았다. 나씨 가문 사람들은 나태웅을 찾느라고 혈안이 되어있었다.이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못 찾았습니다.”“진이훈은?”“출근하지 않았습니다.”나태웅도 사라지고 진이훈도 사라졌다.회사가 위태로운 시기에 나태웅이 사라지다니. 나태현은 짜증이 나서 넥타이를 풀었다.“얼른 남풍 프로젝트를 흘린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봐.”“알아보고 있습니다.”이지훈이 대답했다. 어젯밤 문제가 생긴 후, 그들은 이 프로젝트를 손에 넣은 사람이 누구인지
이지훈은 사무실로 돌아와 고은지가 업무 인수인계하는 것을 지켜보았다.팀장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얘기했다.“나 대표님도 너무 하시는 거 아니야? 우리 팀한테 업무를 가득 줘놓고 은지 씨를 데려가다니.”“이만 가보겠습니다.”“그래, 가 봐.”팀장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상사의 뜻이니 기분이 좋지 않아도 어쩔 수 없었다.고은지가 떠나려는데 이지훈이 같이 엘리베이터에 탔다.고은지는 이지훈을 보면서 가볍게 인사했다.“원하지 않으면 돌아가서 며칠 휴식하고 오세요.”이지훈이 고은지를 향해 얘기했다.“이지훈 씨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이건 나태현이 직접 지시한 일이다. 고은지가 정말 가지 않는다면 나태현이 어떻게 할까?“그렇긴하죠.”“...”고은지는 웃음을 약간 흘렸다.이 회사에서 나태현의 뜻에 반기를 드는 사람이 있다니. 아니면... 나태현의 최측근도 나태현이 하는 짓에 동의할 수 없다는 뜻인가?그렇다면 이 회사에는 나태현에게 불만을 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바쁘시니 병원의 일에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이지훈이 말을 덧붙였다.오늘 나태현이 고은지를 부른 건 억눌러왔던 화를 터뜨릴 대상이 필요한 것뿐이었다.어젯밤 남풍의 프로젝트로 인해 손해를 보았으니 화가 잔뜩 쌓였으니 말이다.“전 괜찮아요.”고은지가 고개를 저었다.고은지는 이번 일에도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마치 고은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아무리 나태현이 지신혜를 간호해라고 해도 고은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이지훈은 한숨을 내쉬면서 어쩔 수 없어 했다.이지훈은 량찬옥과 같은 생각이었다.고은지가 나태현의 곁에 있는 게 고희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고희주는...이지훈은 고은지를 보면서 얘기했다.“고희주 양은 해외에 갔습니다. 그곳에는 고희주 양을 전담 케어하는 분들이 계시고요. 그분들이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는 잘 모르지만...”그 말에 고은지는 이지훈의 태도를 알 수 있었다.이지훈
그렇게 말하는 지신혜는 고희주가 무슨 더러운 바이러스인 것처럼 표정을 찡그렸다.병신이라는 단어에 고은지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감정을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 고은지는 아주 위험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병신?”“그래, 나는 새엄마가 되는 건 딱 질색이었거든. 근데 다행히도 그 병신은 아무 말도 못 하잖아.”잔인하고 차가운 말에 고은지는 심장에 비수가 박히는 것만 같았다.지신혜는 그런 고은지를 보면서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나태현과의 약혼식이 미뤄진 걸 생각하면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량천옥이 배씨 가문을 떠나고서도 이렇게 막 나올 줄은 몰랐다.“얼른 물 가져와. 여기 서서 뭐 해!”고은지가 움직이지 않자 지신혜는 가볍게 고은지를 흘겨보았다.고은지는 옆에 있는 보온병에서 물을 따랐다.보온병은 아침에 간호사가 가져온 것이었는데 금방 끓인 물을 넣은 터라 아주 뜨거웠다.고은지는 차가운 표정으로 뜨거운 물을 유리잔에 받고 있었다.그리고 지신혜 앞으로 와서 건네주면서 얘기했다.“마셔요.”지신혜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유리잔을 보면서 놀랐다.‘이렇게 멍청한 사람이었나? 뜨거운 물을 마시라고?’“너 바보야? 뜨거운 물은 옆에 놓고 식혀야지. 일단은 내 발톱부터 깎아줘.”지신혜가 어이없다는 듯 얘기했다.고은지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안 마시려고요?”“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뭐 하려는 거야!”지신혜는 위험한 기운을 느끼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고은지는 그저 차가운 표정으로 지신혜를 쳐다볼 뿐이었다.그 눈빛에서 지신혜는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제가 먹여드려요?”“너, 미쳤어?”지신혜는 고은지가 뭘 하려는 것인지 알아차렸다.일부러 화상을 입히려는 것이다.고은지의 차가운 눈빛을 보면서 지신혜가 소리 질렀다.“사람 살려요! 여기 미친... 으윽!”소리를 지르자마자 고은지가 지신혜의 머리카락을 잡고 유리잔을 지신혜의 입가에 갖다 댄 채 들이부었다.“우웁.”지
나씨 가문과 량천옥 사이가 원수지간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나태현이 이미 고희주를 데려간 후였다. 그걸 떠올리면 고은지는 가슴이 아팠다. 고은지가 무표정으로 지신혜에게 물었다.“뭘 해달라고 했었죠?”“...”지신혜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뜨거운 물에 데여서 입안은 보기 스치기만 해도 아플 정도였고 목도 마찬가지였다.그런데 지금 이 상황에서 고은지에게 뭘 더 시키다니.그럴 용기가 없었다.지신혜는 그저 고은지를 보면서 소리를 질렀다.“꺼져!”“지신혜 씨가 꺼지라고 한 겁니다.”말을 마친 고은지는 바로 병실을 떠나 나태현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리고 아주 담담한 말투로 얘기했다.“대표님 약혼녀께서 제 간호를 받고 싶지 않다고 하시네요.”전화기 너머의 숨소리는 차갑고도 위험하게 들렸다.고은지는 나태현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너머의 나태현은 끊겨버린 전화 소리를 들으면서 표정이 확 굳어버렸다.화가 난 나태현은 이를 꽉 깨물고 고은지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고은지가 받지 않자 화가 더욱 치밀어올라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리고 문자를 보냈다.[네 딸을 보고 싶다면 지금 당장 병원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그건 명백한 협박이었다.전화기 너머의 고은지는 그 문자를 확인했다.‘네 딸’이라는 문구를 보았을 때 고은지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그래, 고희주는 고은지의 딸이었다.고은지는 고희주를 데려간 것이 고희주의 아빠라고 생각했다.아빠인 나태현이 아무리 나쁘다고 해도 그저 고은지와 고희주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줄로만 알았는데...나태현의 입에서 나온 ‘네 딸’이라는 말이 비수처럼 고은지의 가슴에 박혔다.이건 나태현이 고희주를 반기지 않는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지신혜의 말처럼...나태현은 고희주를 좋아하지 않는다.왜? 고은지가 엄마라서? 아니면 그냥 나태현에게 부성애가 없어서?고은지는 하늘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고은지는 전화를 덮어놓았다.나태현은 더
최근 지신혜와 나태현의 약혼 소식이 퍼졌다. 그런데 나태현은 여전히 고은지를 곁에 두고 있었다.그래서 지신혜와 나태현의 결혼에서 유일한 변수가 바로 고은지였다.사람들은 나태현과 고은지의 사이가 어떤지 궁금하지 않았다.그저 지신혜가 나태현과 순조롭게 결혼할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지씨 가문에서도 지신혜에게 스트레스를 주었다.지씨 가문에서 당한 수모를 생각한 지신혜는 고은지가 한 말을 곱씹다가 화가 나서 고은지를 쏘아보았다.“저한테 나태현 씨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나태현 씨를 이용해서 날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말아요.”“...”“제가 나태현 씨 곁에 있으면 두 분이 결혼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너...!”그 말에 지신혜를 발칵 화를 냈다.나태현에 대한 고은지의 태도는 모르겠지만, 고은지의 엄마인 량천옥이 가장 큰 문제였다.지신혜는 고은지가 말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았다.“난 네 딸이 어디로 갔는지 몰라.”“알아보면 되죠. 지신혜 씨가...”거기까지 말한 고은지는 잠깐 멈칫하더니 지신혜의 눈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내가 뭘 어떻게.”“지신혜 씨가 정말 나태현 씨와 결혼하고 싶다면, 방법이 있겠죠.”“...”지신혜는 정말 나태현과 결혼하고 싶었다.하지만 고은지가 나태현 곁에 계속 있는다면 고은지의 엄마, 즉 량천옥이 문제를 만들 것이다.그렇게 생각한 지신혜가 이를 꽉 깨물었다.“알았어. 내가 알아보면 되잖아.”고은지는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미 원하는 답을 얻었기 때문이다.지신혜는 고은지를 보고 싶지 않아서 차갑게 얘기했다.“말 다 했어? 그럼 인제 그만 가.”“안 됩니다.”고은지가 얘기했다.“또 뭘 하려는 거야!”지신혜는 지금 고은지를 보기만 해도 화가 차올랐다. 지금 병실에 누워있는데 누구 탓인데...‘소문이 사실이 아닌가 봐.’소문으로 들은 고은지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지금 지신혜 눈앞의 고은지는 독버섯과도 같았다.지신혜는 이 일을 무조
10분 후, 고은지는 통화를 끝내고 병실로 돌아가려고 했다.하지만 이어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언니.”고은영이 고은지를 불러세웠다.고은지는 고은영이 들고 온 물건을 보면서 물었다.“병문안을 온 거야?”“선생님이 입원하셔서 보러 온 거야.”선생님이라는 말을 듣자 고은지는 고은영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정설호 어르신이다.생각해보니 고은영은 확실히 고은지보다 운이 좋았다.어릴 때 할머니가 계셔서 그래도 힘들지는 않았으니까 말이다.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고은영을 정설호 어르신께 맡겼으니...그 후로부터 고은영의 인생은 탄탄대로였다.“언니는 왜 여기 있어?”고은지가 물었다.“일이 있어서 그래. 먼저 가 봐.”말을 마치자마자 병실에서 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고은지는 표정이 굳어서 얼른 문을 열었다.지신혜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서 컵을 깨뜨리고 있었다.고은지를 본 지신혜는 더욱 화가 난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고은지는 아무렇지 않다는 것처럼 얘기했다.“뭘 원하는 거죠? 가져다드릴게요.”그 담담한 말투에 지신혜는 더욱 분노가 치밀었다.병실 문 입구에 서 있던 고은영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표정이 굳어버렸다.‘지금 언니가 지신혜를 간호하는 거야?’지신혜와 나태현이 약혼했다는 건 강성의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인데. 나태현이 대체 왜...?그 장면을 본 고은영은 나태현이 일부러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은영이 얼른 고은지의 옷깃을 잡아당기면서 얘기했다.“언니, 그게 무슨 뜻이야?”심증은 있지만 그래도 확인하고 싶었다. 고은영은 그렇게 물으면서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지신혜를 쳐다보았다.“넌 먼저 어르신을 뵈러 가.”“나태현 씨가 어떻게 언니한테 이럴 수가 있어? 왜 이러는 거야?”고은지가 담담하게 대답하자 고은영은 더욱 마음이 아팠다.고은지는 고희주의 엄마다.그리고 고희주는 나태현의 딸이기도 하다.그런데 나태현이 고은지더러 지신혜를 간호하라고 하다니.고은영은 순간 가슴
“응?”“넌 내가 누굴 미워해야 한다고 생각해?”고은영을 쳐다보는 고은지의 시선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건 고은영에게만 보여주는 부드러움이었다.“무슨 뜻이야?”고은지는 시선을 돌리고 고은영 손에 들린 선물을 보면서 얘기했다.“일단 어르신 뵈러 가.”“언니, 아니, 그게 무슨...”“은영아, 난 그 사람을 절대 떠나지 않을 거야.”고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고은지가 강경한 태도로 얘기했다.고은영은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선물을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나태현 씨는 지신혜 씨와 결혼할 거야. 언니가 곁에서 뭘 할 건데.”고은영은 알 수 없었다.나태현 같은 사람과는 상종도 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나?나태현과 지신혜가 결혼한다는 말을 들은 고은지는 차가운 눈으로 얘기했다.“그 사람이 뭘 하든지 나랑은 상관없어.”“상관없다고? 그럼 언니는 뭐가 상관있다고 생각하는데?”고은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은지를 바라보았다.설마...나태현이 고희주의 아빠라서, 어떻게든 나태현의 곁에 남겠다는 뜻인가?고은영은 얼른 고개를 저으면서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그저... 그 사람 때문에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생각하면...”“...”고은영은 고은지의 뜻을 알지 못한 채 의아한 표정으로 고은지를 쳐다보았다.“언니.”고은영이 겨우 입을 열고 고은지를 불러세웠다.그제야 고은지가 왜 나태현 곁에 머물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그건 바로 증오 때문이다.고은영의 걱정스러운 두 눈을 보면서 고은지는 담담하게 얘기했다.“이제 가야 해.”“먼저 따라와 봐.”고은영이 고은지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고은지는 뿌리치지 않고 고은영을 따라갔다.두 사람은 그대로 옥상까지 올라갔다.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치며 지나갔다.고은영은 고은지를 보면서 또박또박 얘기했다.“나태현이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 알아?”나씨 가문 사람들은 다 위험한 사람이다.나태웅과 안지영만 봐도 알 수 있다. 나씨 가문의 남자한테 한번 찍히
전화를 끊은 진윤이 고은영을 보면서 물었다.“지금은 좀 속이 풀렸어?”“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이렇게 한 거예요?”“응.”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고은영은 약간 감동하긴 했지만 이루어 말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예전 같았으면 고은영의 곁에 무조건적인 자기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다른 일이었다면 도움을 거절할 것이었지만 이번 일에서는 물러설 수 없었다.“지금 해외에서 난리가 났어. 이 시점에 나태현의 집중력을 흩트리는 것도 좋지.”량천옥도 나쁜 사람이긴 하지만 량천옥이 나태현과 싸우고 있는 건 고은지 때문이었다.그러니 지금 진윤이나 배준우가 나태현의 시선을 자꾸만 국내로 돌리게 해서 집중력을 분산시키는 건 량천옥에게 좋은 일이다.“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진윤이 고은영에게 얘기해 주었다.고은영은 진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나태현은 해외에 있고, 나태웅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고 있다.그렇다면 이제는 나태범이 움직일 것이다. 나태범 세대가 싸운다면 젊은 세대들은 감히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고은영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푹 쉬었다.“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나씨 가문보다 더욱 위태로운 건 우리 언니니까요.”희주가 죽었다.그걸 떠올리면 고은영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고은지는 지금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수 있었다. 그러니 나씨 가문 사람들을 신경 쓸 새가 없었다.이제는 이 지긋지긋한 악연을 갈라내고 싶었다.진윤은 고은영 눈에 비친 슬픔을 보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아직 희주가 정말 죽었는지 아닌지도 확인하지 않았잖아. 그러니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눈으로 본 것도 거짓일 수 있는데, 귀로 들은 것은 오죽하겠냐는 말이었다.진윤은 제삼자로서 이 사건을 지켜보면서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을 딱 짚어 말할 수 없었기에 말을 아끼고 있었다.“그 소식이 가짜였으면 좋겠어요.”고은영은 고희주를 불쌍하게 여겼다. 조씨 가문 사람들은 희주가 조영수의 친딸이 아니라는 것
‘아까 왜 돈이 없다는 얘기를 해서는...’진윤은 고은영의 손을 잡고 쇼핑을 계속했다.점심쯤이 되자 진윤은 지친 고은영을 데리고 레스토랑으로 가서 식사했다.테이블 앞에 놓인 갖가지 음식을 보면서 고은영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두 사람이 먹기에는 너무 많지 않아요?”“안 많으니까 천천히 먹어.”진윤이 대답했다.진윤은 진정훈이 왜 그때 그렇게 심하게 날뛰었는지 이해가 갔다.진정훈은 고은영이 어릴 때 어떻게 살았는지 가장 먼저 조사한 사람이다.그래서 고은영의 아픔을 알고 그 상처를 치유해주기 위해 온 세상의 좋은 것들을 고은영에게 주려고 한 것이다.그러니 고은영의 몫이 진유경에게로 넘어간 걸 알고 미쳐버린 것이다.지금의 진윤도 마찬가지였다.“이거 먹어.”진윤은 양고기 스테이크를 썰어서 고은영의 그릇에 담아주었다.“고마워요, 오빠도 얼른 먹어요.”“우리 집에 자주 놀러와. 우리 아내가 또 요리를 잘하거든.”“그런데 지금 임신한 거 아니에요? 저까지 가면 민폐죠.”“그래도 요즘 매일 요리하고 있어.”“네?”고은영이 깜짝 놀랐다.“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고은영은 임신했을 때 만사가 귀찮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말린다고 말려지는 사람이 아니잖아. 원하는 건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하긴.게다가 임산부는 입맛이 까다로워서 다른 사람이 한 것을 잘 먹지 못할 때가 많았다.윤설이 본인이 먹고 싶은 걸 직접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쁜 건 아니었다.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그럼 최대한 덜 힘들게 옆에서 보살펴줘요.”진윤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그건 나태현이 건 전화였다.“나태현이야.”“계약 해지 때문에 전화한 거겠죠?”고은영이 물었다.아까 차에서 진윤은 여러 번 전화를 걸어 나씨 가문과 연관된 프로젝트를 모두 취소하기로 했다. 배준우도 마찬가지였다.그러니 나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진윤이 고개를 끄덕인 후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형, 지금
진호영이 사람들 앞에서 진유경, 김영희와 싸울 줄은 전혀 몰랐다.진유경과 김영희는 이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기에 속수무책으로 말려들고 있었다.그 시각.진윤은 고은영을 데리고 쇼핑하러 다니고 있었다.김영희와 진유경은 진정훈과 진윤이 장례식 준비도 돕지 않고 서로 재산을 빼앗느라 바쁘다고 했지만 사실 진윤은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중이었다.진성택이 진유경에게 남겨준 물건은 많지 않았다. 차라리 진윤이 지금 고은영에게 쓰는 돈이 더욱 많을 것이다.“오빠, 너무 많이 산 거 아니에요?”명품을 너무 많이 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기다란 영수증 위의 숫자를 본 고은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배준우와 결혼한 후 돈이 모자랐던 적은 없지만 돈을 이렇게 많이 쓴 적도 거의 없었다.진윤은 경호원을 데리고 왔다. 네 명의 경호원 손에는 쇼핑백이 가득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일부는 란완 리조트로 배송시켰다.“괜찮아. 많이 사. 우리 아내 것도 골라줘야지.”진윤이 아무렇지 않게 얘기했다.“오빠는 정말 좋은 남자 같아요.”자세히 생각해보니 배준우는 직접 무언가를 사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대부분은 다 다른 사람을 시켜서 란완 리조트로 가져오게 했던 것 같다.그리고 고은영은 쇼핑을 좋아하는 편이니 직접 사는 편이 많았다.하지만 진윤은 쇼핑하면서도 자기 아내를 생각한다.진윤이 웃으면서 얘기했다.“배준우도 좋은 남자야. 그 사람이 있어서 우리가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거야.”“그 사람이 전에 얼마나 나빴는지 몰라서 그래요.”진윤이 배준우를 좋은 남자라고 얘기하자 고은영이 입을 비죽거리면서 대답했다.배준우와 결혼하기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 좋은 남자라는 말이 쏙 들어갈 정도였다.그때의 배준우는 정말... 악랄한...고은영은 그때 유산하지 않은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그러다 고은영은 또 나태웅을 떠올렸다.나태웅도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나태웅과 배준우가 같이 고은영을 위협했으니까 말이다.고은영은 나태웅이 안지영을
결국 진호영이 다가가서 말했다.“할머니, 지금 이 장소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진윤과 진정훈이 오늘 오지 않은 것에 대해 약간 실망하긴 했지만 두 사람이 오지 않은 이유도 명백했다.진성택이 두 사람을 너무 크게 실망시켰기 때문이다.진유경은 진호영이 진윤과 진정훈의 편을 들어주는 것을 보면서 더욱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호영 오빠, 진윤 오빠랑 정훈 오빠한테 연락해주면 안 돼요? 적어도 아버지 보내드리는 길은 보고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은영이도요... 아버지는 은영이를 가장 예뻐했잖아요.”“그만 떠들어.”진유경이 말을 마치자마자 진호영이 싸늘하게 얘기했다.다른 건 몰라도 이 상황에서 고은영의 얘기를 꺼내다니.진호영은 진유경에게서 이례 없는 메스꺼움을 느꼈다.진유경은 진호영의 반응에 멍해졌다.하지만 사람들의 화제는 이미 고은영으로 넘어가 버렸다.다들 고은영을 불효녀라고, 은혜도 모르는 매정한 여자라고 욕했다.진호영은 그 말을 들으면서 진유경을 노려보며 얘기했다.“너 때문에 은영이는 집에 돌아오지도 못했어. 아버지가 은영이를 가장 예뻐했다고? 도대체 뭘 보고 그렇게 생각한 거야? 네 눈은 장식이야?”예뻐한 적이 있었나?한 번도 없었다.진성택이 고은영에게 조금이라도 잘해줬다면 고은영이 진씨 가문 문턱을 넘어보지 못하는 일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아니, 그게 아니라...”“아버지는 남은 주식을 모두 너한테 남겨줬어. 하지만 친딸인 은영이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잖아. 그런데 아버지가 은영이를 가장 예뻐하셨다고?”진호영이 모든 것을 까밝히자 진유경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호영 오빠,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진유경은 더욱 크게 울먹이면서 눈물을 흘렸다.진유경은 지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진호영은 진유경의 편이었는데 지금은 왜...‘이게 다 고은영 때문이야! 대체 무슨 수로 꼬드겼기에 오빠들이 다 고은영의 편을 들어주는 거냐고!’“왜 이러냐고? 우리 어머니가 은영이에게 남겨준
이윽고 고은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진호영이 전화를 건 것이었다.고은영이 진씨 가문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진 후 진호영과 고은영은 거의 연락을 하지 않았다.진호영은 보통 직접 찾아와서 문제를 얘기하는 편이기에 전화를 잘 걸지 않았다.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 진호영이 전화를 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고은영은 잘 알고 있었다.진윤에게 전화하자마자 또 고은영에게 전화하다니.고은영이 전화를 받기도 전에 진윤이 고은영의 전화를 빼앗아갔다.“오빠...”진윤은 바로 전화를 꺼버렸다.“꺼버리면 어떡해요. 혹시 언니가 전화라도 하면...”“걱정하지 마. 네 언니는 너한테 연락하지 않을 거야.”“...”그렇다고 해도 마음대로 핸드폰을 꺼버리는 건 좀...게다가 고은지가 정말 무슨 일이 생겨서 고은영을 찾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진윤은 자연스럽게 고은영의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넣으며 돌려주지 않았다.“오빠.”“오늘은 나한테 집중해.”그 말투는 아주 강압적이었다.“...”마치 그동안 진윤에게 신경 써주지 않아 삐진 것만 같았다.하지만 고은영도 어쩔 수 없었다.고희주와 고은지에게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으니까 말이다.사실 고은영도 알고 있었다. 고은지는 고은영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말이다.하지만 고희주의 일 때문에 고은지는 언제든지 화를 낼 수 있었다.“그래요.”“...”“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너한테 뭘 좀 사주려고.”“...”사준다고?고은영은 진윤의 목적을 알 수 없었다.진성택이 죽었다.장례식에 안 가는 건 이해가 되지만 굳이 고은영을 데리고 나와 쇼핑을 하는 목적은 뭘까.두 사람이 차에서 내렸다. 그때 윤설의 전화가 걸려왔다.진윤은 부드러운 목소리와 다정한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그런 진윤을 보면서 고은영은 진윤이 참 좋은 남자라고 생각했다.진윤과 비교하면 나태현은 정신병이 틀림없었다....진성택은 오늘 화장하게 된다.김영희, 진유경과 진호영은 검은색 상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진윤과 진정훈은 결국
숨을 깊게 내쉰 나태현이 얘기했다.“량천옥이 나씨 가문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서 지금...”“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죠.”배준우가 나태현의 말을 끊었다.그때 나씨 가문 내부는 부글부글 끓었었다. 게다가 량천옥을 죽이려는 사람도 있었다.나태현의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갔고 나태현의 어머니도 그 시기에 돌아갔다.그 모든 모순의 시작은 량천옥이었다.그래서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나씨 가문은 여전히 량천옥과 원한이 있었다.다들 그저 그 원함을 꾹 참고 있었는데 고은지가 나타났다.량천옥의 딸이면서 나태현의 딸 엄마인 고은지 때문에 나씨 가문과 량천옥의 전쟁이 다시금 시작되었다.“이번에는... 어쩔 수 없어요.”우정과 사랑 중에서 배준우는 당연히 사랑이었다.게다가 이번 일에는 나씨 가문에서 숨기는 것이 너무 많았다.또 나태현이 회사의 일에 신경 쓸 시간이 없다 보니 프로젝트가 위험했다.나태현은 화가 나서 바로 전화를 끊었다.“...”그 소리를 들은 배준우는 핸드폰을 소파에 툭 던졌다....다른 한편.고은영과 진윤은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진윤은 전화 통화를 하면서 나씨 가문과 엮인 프로젝트를 모두 엎어버리라고 명령했다.옆에 있는 고은영은 그 말을 들으면서 걱정했다. 진윤이 또 다른 사람에게 전화하려고 할 때 고은영이 진윤의 손을 잡았다.“오빠,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나씨 가문이 밉긴 하지만 진윤의 일에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았다.진윤이 계약을 많이 해지할수록 진윤에게 영향이 더 클 테니까 말이다.진윤은 본인을 걱정해주는 고은영을 보면서 마음이 누그러졌다.부드러운 고은영의 머리를 쓰다듬은 진윤이 얘기했다.“다 필요 없는 것들이야. 나태현은 지금 당장 귀국해야 해.”그 말을 들은 고은영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머릿속에는 병원에 있는 고은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고은지는 나태현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진윤은 그런 고은영의 생각을 눈치채고 얘기했다.“지금 나태현과 량천옥이 해외에서 서로 죽이고 난리가 났어. 만
화가 난 나태범을 보면서 집사는 안절부절못했다.“지금 상황이 조금 복잡합니다.”생각하던 집사가 말을 이었다.“게다가 진씨 가문 쪽도 걱정해야 합니다.”“진씨 가문? 거기는 왜.”나태현과 량천옥이 싸우는 것만으로도 나태범은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이러다가는 정말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았다.게다가 배씨 가문에서 계약까지 해지했지...이러다가는 그룹이 파산될지도 몰랐다.“배준우 씨 아내가 진윤 씨와 진정훈 씨의 친여동생입니다. 그러니 이 세 사람 다 그 고은지 씨의 동생을 위해 움직인다고 볼 수 있습니다.”“...”나태범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저 진씨 가문에서 친딸을 찾았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진성택이 친딸보다 양딸을 더욱 아낀다는 것까지 말이다.배준우가 고은영과 결혼할 때 강성의 사람들은 배준우가 많이 아깝다고 생각했다.일반적인 신분으로는 배준우의 옆에 설 수 없으니까 말이다.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고은영이 진짜 진씨 가문의 친딸이었다.나태범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이튿날 아침.고은영이 아침을 다 먹자마자 진윤이 도착했다.그리고 조카를 위한 선물도 가득 가져왔다.고용인들이 진윤이 가져온 물건을 보관해주었다.약간 붉어진 고은영의 눈가를 보면서, 진윤이 배준우한테 물었다.“어젯밤 계속 운 거예요?”배준우도 머리가 약간 아팠다.“제대로 자지 못했어요.”진윤이 다가가서 고은영을 마주 보더니 고은영이 입고 있는 귀여운 잠옷으로 눈을 돌렸다.배준우는 정말 딸을 키우는 것처럼 고은영을 보호해주는 것만 같았다.고은영은 원래도 키가 작은 편이어서 배준우와 함께 있을 때면 아주 작아보였다.“옷 갈아입고 나갈 준비 하자.”“정말 나가야 해요?”고은영이 올망졸망한 눈으로 진윤을 쳐다보았다.고은영은 병원에 가서 고은지를 보고 싶었다.고은지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되었다.진윤은 그런 고은영의 생각을 진작 알아차렸다는 듯이 얘기했다.“병원 쪽에는 내가 사람들을 깔아놨어. 무슨 일 없을 거야. 가자.”진윤의 말을 들은
하지만 진윤이 내일 고은영을 데리고 나가는 것의 목적을 떠올리면 고은영은 어쩔 수 없었다.“당연한 거 아닌가요?”진윤이 당당하게 얘기한 후 전화를 끊었다.배준우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더니 고은영을 쳐다보았다.“이미 다 들었지?”“네.”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진성택은 사망했다.진정훈은 고은영이 장례식에 올 것인지 안 올 것인지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하지만 진윤은 장례식에 가지 말고 나가서 쇼핑하자고 했다.그것도 웃으면서 말이다.“넌 어떻게 하고 싶어?”“안 가도 돼요?”고은영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웃으면서 쇼핑해야 한다니. 고은영에게 있어서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배준우도 짐작하고 있었다.고은영의 머리를 쓰다듬은 배준우가 얘기했다.“아마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 쇼핑이 최종 목적이 아닐 거야.”“위로하는 거예요?”진윤은 배준우더러 고은영을 잘 위로해주라고 했다.“위로하는 게 아니라 그저 네 큰형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하는 말이야. 단순하게 쇼핑하는 게 목적일 리 없어.”배준우가 확신하면서 얘기했다.그 말을 들은 고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배준우는 허락하는 고은영을 보면서 한숨을 돌렸다.그리고 고은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얘기했다.“걱정하지 마. 다 지나갈 거야.”“나씨 가문 쪽은...”거기까지 말한 고은영은 고개를 들고 배준우를 쳐다보았다.고희주의 일로 마음 아팠지만 배준우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배준우는 고은영이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고은영에게 짧게 키스한 배준우가 이어서 얘기했다.“나씨 가문과 협업하는 프로젝트 두 개가 있었는데 이미 계약을 해지했어.”“주주들이 뭐라고 하지 않을까요?”고은영이 걱정하면서 물었다.“그 두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겨서 다들 발을 빼는 분위기야. 아마도 량천옥 씨가 한 일 같은데.”그래서 배준우도 큰 문제 없이 계약을 해지할 수 있었다.지나간 일에 대해 배준우는 뭐라고 할 수 없
진정훈이 전화를 건 것은 진정훈에게도 계획이 있어서였다.“진유경을 조심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진유경에게 남긴 주식이 있는데 꼭 되찾아올 겁니다.”진유경이라...진정훈은 진유경이 왜 계속 고은영을 끌어내리려는지 깨달았다.그건 바로 진유경이 아직 자기 위치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러니 이제라도 제대로 알게 해줘야 했다.배준우는 진정훈의 말을 알아듣고 얘기했다.“네. 알겠습니다.”“장례식은 와도 되고 안 와도 괜찮다고 전해줘요.”“네.”진정훈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은영의 뜻을 존중해주었다.하지만 장례식에 고은영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수군거릴 것이 뻔했다.“장례식은 언제입니까.”“이틀 뒤입니다.”“알겠습니다.”이틀 뒤라니. 생각보다 장례를 서두르는 모습에 배준우는 약간 의아했다.진정훈은 그저 이 일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그래서 그동안 배준우가 고은영을 잘 지켜줄 수 있도록 전화를 건 것이다....진정훈과의 통화를 마치고 배준우가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는데 핸드폰이 또다시 울렸다.이번에는 진정훈이 아닌 진윤이 걸어온 전화였다.배준우는 고은영을 안고 소파에 앉았다. 영원히 고은영과 떨어지기 싫어하는 것처럼 고은영을 꼭 안고 있었다.“여보세요.”배준우는 진윤을 존경하는 편이었다.진윤은 정말 가문의 도움 없이 지금 그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이다.“은영이는요? 연락이 안 돼서.”“기분이 안 좋아요. 무슨 일이죠?”“왜 기분이 안 좋은 거죠?”“고은지 씨한테 일이 좀 생겨서... 컨디션이 좋지 않아요.”고은지의 상황을 전해 들은 진윤은 머리가 아팠다.지금 고은영에게는 모든 일이 설상가상이었다.“내일 오전 아홉 시에 내가 데리러 간다고 전해줘요.”“내일이요?”“네.”진윤이 대답했다.배준우는 진윤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진윤은 모든 사람들에게 진씨 가문이 얼마나 엉망인지 광고할 셈이었다.진윤이 진성택의 장례식에도 나서지 않고 친여동생인 고은영을 데리고 밖에서 돌아다닌다면...“어디로 갈 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