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훈도 두 그림자를 보았다.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뒷좌석을 스윽 살피고는 전전긍긍하면서 물었다.“대표님, 돌아갈까요?”‘그러게 내가 오지 말자고 했잖아!’킹덤 타운에 찾아와봤자 창피만 당하고 쫓겨날 것이다.진이훈은 나태웅이 바로 별장으로 쳐들어갈까 봐 걱정되었다.이윽고 차량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이훈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나태웅은 먼저 차에서 내려버렸다.“...”진이훈은 머릿속이 백지장이 되었다. 이윽고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바로 차에서 내렸다.“대표님, 대표님!”진이훈은 나태웅을 꽉 잡았다.이곳은 킹덤 타운이다. 나태웅이 이곳에서 일을 벌여봤자 좋은 점은 하나도 없다.게다가 장선명의 성격이 어떤지는 강성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것이 아닌가.장선명은 위험하고 날카로운 사람이다.장선명을 건드린 사람에게는 좋은 결말이 없었다.다만 나태웅과 진이훈이 예상하지 못한 것은 장선명이 벌써 돌아왔다는 것이다.나태웅은 원래 안지영과 끝장을 보려고 이곳에 온 것이었건만, 신나나를 찾으러 간 장선명이 벌써 킹덤 타운에 돌아왔을 줄은 몰랐다.게다가 창에 비치는 그림자를 보아하니, 두 사람은 신나나 때문에 싸우지도 않고 있었다.두 사람의 그림자는 전형적인 부부의 모습이었다.“이거 놔!”나태웅의 명령에도 진이훈은 나태웅을 놓을 수 없었다. 오히려 더욱 꽉 잡았다.그리고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얘기했다.“대표님, 안지영 씨는 확실히 장선명 씨의 약혼녀입니다.”안지영과 장선명의 시작이 어찌 되었든, 애원이었는지, 거래였는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은 결국 정상적인 예비부부가 되었다.‘장선명 씨의 약혼녀’라는 말이 나태웅의 신경을 긁었다.진이훈이 아무리 말려도 나태웅은 결국 진이훈을 뿌리쳐냈다.“대표님, 대표님!”나태웅의 세상은 완전히 붕괴하였다. 나태웅은 지금 진이훈의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화가 잔뜩 난 채로 킹덤 타운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다.진이훈의 머릿속은 오직 한마디로 가득했다.‘오늘 이곳에
급한 일이기는 하지만 배준우는 일단 품속의 고은영부터 다독였다.이렇게 귀엽고 포근한 아내를 두고 집을 나서야 한다니.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나태웅은 다른 남자의 여자를 넘보고 있으니. 이런 기분을 모르겠지.’배준우는 나태웅이 안지영과의 사이를 제대로 처리 못 해서 이 사달이 난 것이라고 생각했다.이제 나태웅과 안지영의 사이는 더 이상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비틀어졌다. 그러니 이렇게 애를 써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배준우는 나태웅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몰랐다.“먼저 자. 난 늦게 돌아올 거니까.”“지영이 일 때문이에요?”고은영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응, 아마도 그런 것 같아. 나태웅이 킹덤 타운에 갔대. 안지영은 지금 킹덤 타운에서 장선명과 동거 중이거든.”배준우의 말을 들은 고은영은 사건의 자초지종을 대충 알 것 같았다.안지영을 향한 나태웅의 집착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이런 상황에 놓인 안지영을 떠올린 고은영이 얘기했다.“나도 같이 갈게요.”“그러지 마. 같이 가 봤자 싸우는 모습만 보고 올 텐데.”“...”고은영은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상상해 봤다.정말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장선명과 안지영은 다 성격이 좋은 편이 아니다.거기에 궁지에 몰린 나태웅까지 더해지면...“그래요. 그럼 난 안 갈게요.”고은영이 대답했다.고은영은 약간 맥이 빠졌다.고은지는 오늘 이미 천락 그룹에 출근했다. 고은영은 고은지가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 몰랐다.배준우가 킹덤 타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열두 시 반이었다.거실은 이미 난장판이 되어있었는데 이곳에서 싸움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나태현은 이미 도착해있었다.거실의 분위기는 북극보다도 춥고 무거웠다.장선명은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고 있었는데 입가에 피가 묻어있었다. 안지영은 그런 장선명 옆에 앉아 있었다.나태웅은 다른 의자에 앉아서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얼굴에도 피가 덕지덕지 묻어있었다.말하지 않아도 두 사람이 얼마나 격하게 싸웠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입사 2년 차 고은영은 동영그룹 비서실 직원으로서 매사에 신중하고 성실하게 일해왔다.그런데 어젯밤, 그녀는 거대한 사고를 치고 말았다.고은영은 떨리는 손으로 이불을 잡고 살짝 뒤집었다. 알몸 상태를 확인한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남자의 넥타이를 잡고 방탕한 여자처럼 유혹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아직 자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헉!”얕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그 장면이 꿈이 아니라니! 어떻게 직속 상사를 상대로 그런 미친 짓을 벌인 거지?배준우, 동영그룹 대표이자 그녀의 직속 상사였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너무도 큰 충격에 고은영은 자신도 순결을 잃었다는 사실도 망각한 채, 재빨리 일어나서 옷부터 입었다.그리고 배준우가 깨기 전에 이 끔찍한 범죄현장에서 도망쳤다.떨리는 다리로 겨우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애써 어젯밤 기억을 지우려고 노력했다.그런데 화장 중이던 안지영이 그녀를 보고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어제 대표님 방까지 모셔다드리고 온다고 하지 않았어? 전화해도 안 받던데 어떻게 된 거야?”고은영은 가슴이 철렁해서 말까지 더듬었다.“나? 바람 좀 쐬고 좀 늦게 돌아왔는데 너 자고 있길래 조용히 들어왔어. 아침에 대표님 호출이 있어서 나갔다 이제 들어온 거야!”조금 긴장했지만 군더더기가 없는 대답이었다.대표실 직속 비서로서 수시로 호출을 받는 일도 잦았고 지금은 출장 중이라 밤에 바람 좀 쐰다고 나갔다 와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안지영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화장에 집중했다.무사히 넘어갔다는 생각에 고은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화장실로 가서 씻고 출근준비를 했다.두 사람은 식당으로 가서 대충 아침을 먹고 회의실로 바로 직행했다.검은색 정장을 차려 입은 고은영은 평소의 진지하고 성실한 직원으로 돌아왔다.가방에서 핸드폰 진동음이 들리고 발신자에 찍힌 “대표님”이라는 글자를 확인했을 때, 그녀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지금 당
고은영은 어떤 마음으로 휴게실을 빠져 나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녀는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전시회장으로 돌아왔다.그녀를 본 안지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안색이 왜 그래? 어디 아파?”고은영은 중학교 때부터 자신과 함께한 친구를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그 모습을 본 안지영은 급히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다급히 그녀를 끌고 화장실로 가서 작은 소리로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 대표님한테 혼났어?”안에서 문을 잠그자 고은영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안지영은 다급히 다가가서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 대표님 너 이런 모습 보면 또 한바탕 난리가 날 텐데!”동영그룹 배준우 대표는 매사에 철저하고 냉철한 사람이었다.아무리 예쁜 여직원이라도 일하는 시간에 울거나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절대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과거에 어떤 여직원이 실연 당하고 회사에 와서 몰래 눈물을 흘린 적 있었는데 배 대표는 대차게 그 부서 전체에 징계를 내렸다.여자라서 절대 봐주는 법이 없는 배준우였다.고은영은 숨 넘어갈 듯이 흐느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영아, 나 이대로 퇴사할지도 몰라! 하지만 난 강성을 떠나기 싫어!”“아니, 도대체 무슨 사고를 쳤길래?”안지영은 앞뒤 잘라먹은 그녀의 말에 조바심이 났다.“내가… 어젯밤에 대표님을… 추행했어!”안지영은 순간 온몸이 굳었다.공기마저 무거워지고 화장실 안에는 고은영의 흐느끼는 소리만 들렸다.한참이 지난 뒤에야 안지영은 충격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다.“지금… 뭐라고 한 거야?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아?”도저히 생각해도 믿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어제 대표님 방에 밤새 있었다고!”고은영이 말했다.다시 정적이 찾아왔다.안지영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그러니까 네가, 대표님이랑 억지로 잠자리를 가졌다는 거야?”이게 사실이라면 커다란 재앙이었다.과거 배준우 한번 꼬셔보겠다고 그의 방에 숨어들었던 여자들은 그 결과가 전부 좋지 못했다.애를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크게 들릴만큼 고요했다. 고은영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있었지만 속은 어지러웠다.배준우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의 작은 얼굴을 힐끗 훑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런 것 같다라는 식의 대답 내가 싫어하는 거 알 텐데?”고은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확실하지 않은 대답을 가장 싫어하는 배준우였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어제 제가 대표님을 방까지 모신 뒤로 아무도 그 방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그녀는 아까보다 더 단호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고은영에게는 1분이 1년과 같은 고역의 시간이었다.하지만 이걸 이겨내야 했다.만약 배준우에게 거짓말을 들킨다면 그녀만 인생을 망치는 게 아니라 안지영에게까지 피해가 갈 수 있다.겨우 강성에서 자리를 잡고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나락으로 떨어질 수는 없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고은영의 등 뒤가 축축해질 때쯤 배준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어.”고은영은 스르륵 눈을 감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끝난 건가?“가서 해상그룹 입찰 방안 계획안 좀 가져와 봐.”배준우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고은영은 그제야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대표님!”그 뒤로 한달 간 긴 출장이 이어지는 동안 고은영은 최대한 배준우와 단독으로 접촉하는 상황을 피했다.한달 뒤, 긴 출장을 끝낸 그들은 강성으로 돌아왔다.관례대로 고은영에게는 이틀의 휴가가 주어졌다. 이날, 배준우는 긴급회의가 있어 회사로 향했다.회의를 마치고 나오자 문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태웅이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대표님.”나태웅을 본 배준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고 비서는?”“한달 간 출장을 다녀왔으니 당연히 휴가를 줬죠. 고 비서도 연애해야죠.”배준우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지만 이내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나태웅은 갑자기 싸늘해진 분위기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한편, 동영그룹 직원 기숙사.
수화기 너머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고은영은 멈칫하며 다시 발신자를 확인했다.대표님이라는 글자를 확인한 순간, 그녀는 벽에 머리를 박고 자살하고 싶었다!그녀는 바로 태도를 바꾸어 공손한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죄송합니다, 대표님. 다른 사람인 줄 착각했습니다.”“당장 회사로 와.”남자는 차가운 한마디를 끝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고은영은 꺼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입을 삐죽였다. 또 꿀 같은 휴식일에 불러내다니!그녀는 다급히 마트에 들러서 안지영에게 줄 라면 하나 사고 기숙사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바로 돌아온 그녀를 보자 안지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근처에 은행 새로 섰어?”고은영은 뛰어오느라 숨을 헐떡이며 대답했다.“대표님이 지금 바로 회사로 오래. 일단 라면이나 먹고 있어.”말을 마친 그녀는 바로 방으로 돌아가서 오피스룩으로 갈아입었다.배준우는 정말 깐깐한 상사였는데 직원들이 일하는 시간에 편한 복장으로 오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그녀가 다급히 현관으로 다시 나가는데 뒤에서 불만 섞인 안지영의 목소리가 들렸다.“대표님도 참, 한달이나 출장을 다녀왔는데 쉬는 날에 또 불러내? 그럴 줄 알았으면 너 마케팅부서에 추천할걸 그랬어.”“나 말을 잘 못해서 마케팅 부서는 어울리지 않아.”말을 마친 고은영은 바로 문을 열고 나갔다.기숙사에서 회사까지는 10분 거리였다.이런 지리적 우세 때문에 그녀는 자기 집을 두고 기숙사에서 출퇴근했다. 아침에 잠을 더 자고 교통비도 아낄 수 있다는 점이 큰 메리트로 작용했다.회사에 도착한 그녀는 바로 대표 사무실로 직행했다.안에 들어서자 창가에 서 있는 배준우의 뒷모습이 보였다. 햇살을 받으며 서 있는 그는 뒷모습만 봐도 귀티 나고 멋져 보였다.고은영은 공손히 다가가서 고개를 숙여 그에게 인사했다.“대표님, 저 왔어요.”배준우는 고개를 돌리고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고은영은 찔리는 게 있어서 그런지 대표가 저런 눈으로 볼 때면 괜히 긴장했다.다행히 배준우는 바로
나태웅이 업무적인 일로 사무실에 방문하면서 고은영은 그제야 그 숨막히는 사무실을 벗어날 수 있었다.배준우는 유리창을 통해 자신의 앞에서는 조신하게 행동하던 그녀가 밖에 나가서는 호들갑을 떠는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나태웅도 그의 시선을 따라 바깥을 내다보니 고은영이 무언가를 바쁘게 찾고 있었다.‘고 비서는 여전히 덜렁거리는군.’고개를 돌린 그는 봉투 하나를 배준우에게 건넸다.“대표님, 조사해 본 결과, 역시 그날 사모님이 술에 약을 탄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핸드폰 진동음이 울렸다.나태웅이 확인해 보니 캐릭터 모양의 핸드폰 케이스가 보였다. 당연히 배준우의 것은 아니었다.아까 사무실에 들어왔던 고은영이 부주의로 핸드폰을 두고 나간 것이다.한참 핸드폰을 찾아 헤매던 고은영은 다시 사무실로 발길을 돌렸다.문앞에 도착하자 배준우의 차가운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그 여자는 찾았어?”방 문을 노크하려던 고은영은 순간 그 자리에 얼어버렸다.아직도 그 여자를 찾고 있었나?곧이어 나태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마 사모님께서 대표님 결혼을 추진하려고 보낸 여자일 테니 사모님 측근임이 틀림없겠네요.”“측근이라! 웃기지도 않는군!”잔뜩 날이 선 배준우의 목소리도 들려왔다.“한달 안에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 찾아서 해결해.”“네, 대표님.”나태웅의 목소리마저 차가워졌다.고은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골칫거리가 생겼을 때 그들이 어떻게 처리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였다.만약 그날의 진실이 탄로난다면 자신이 어떤 처참한 처지가 될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밖으로 나온 나태웅이 고은영을 보고 아는체했다.“고 비서?”“나 실장님, 오랜만이네요.”고은영은 곧장 정신을 가다듬고 공손히 인사했다.하지만 속은 타들어가고 있었다.나태웅은 그녀의 안색을 잠깐 살피더니 걱정스럽게 물었다.“고 비서 어디 아파? 안색이 왜 이래?”“감기기운이 좀 있어서요.”고은영은 황급히 변명했다.나태웅은 고개를 끄
또다시 정적이 찾아왔다.배준우는 차갑게 식은 눈동자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마치 그 말의 진위 여부를 가늠하는 것 같았다.고은영은 불안한 눈빛으로 그의 표정을 살폈다. 손에서 땀이 났다.그녀는 미쳐버릴 것 같은 심정으로 안지영에게 더 이상의 문자를 보내지 말라고 속으로 기도했다.그녀가 온몸에 힘이 다 풀려서 거의 쓰러지기 직전에 배준우가 입을 열었다.“무슨 알바지?”“일러스트레이터요.”“그림?”배준우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네. 벽화 그리는 일이에요.”회사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일이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배준우의 눈치를 살폈다. 이대로 넘어가 주는 걸까?배준우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더니 차갑게 물었다.“월급이 마음에 안 들어?”“아… 아닙니다. 그냥 제가 좋아서 하는 거예요!”그녀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다.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에 행복했다.남자에게서 풍기는 냉기를 느낀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하지 말라고 하시면 그만둘게요.”입사할 때, 회사 인사부에서 명확히 안 된다고 했던 사항이었다.아마 산업 스파이나 경쟁 업체에서 의도적으로 직원들에게 접근하는 것을 우려해서였을 것이다.한바탕 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았던 배준우는 의외로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알았어, 나가 봐.”고은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남자는 이미 노트북에 시선을 돌리고 열심히 무언가를 타이핑하고 있었다.고은영은 도망치듯이 사무실을 빠져 나와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녀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정말이지, 큰일 날 뻔했다.배준우가 그날 밤 그녀의 알리바이를 꼬치꼬치 캐물었더라면 아마 그녀는 오늘 무사히 사무실을 빠져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고은영은 창백한 얼굴로 안지영을 찾아갔다.안지영은 그녀를 이끌고 길가에서 택시를 잡았다.“30분이면 끝난다며? 왜 문자했는데 답장을 안 해?”문자 이야기가 나오자 고은영은
급한 일이기는 하지만 배준우는 일단 품속의 고은영부터 다독였다.이렇게 귀엽고 포근한 아내를 두고 집을 나서야 한다니.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나태웅은 다른 남자의 여자를 넘보고 있으니. 이런 기분을 모르겠지.’배준우는 나태웅이 안지영과의 사이를 제대로 처리 못 해서 이 사달이 난 것이라고 생각했다.이제 나태웅과 안지영의 사이는 더 이상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비틀어졌다. 그러니 이렇게 애를 써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배준우는 나태웅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몰랐다.“먼저 자. 난 늦게 돌아올 거니까.”“지영이 일 때문이에요?”고은영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응, 아마도 그런 것 같아. 나태웅이 킹덤 타운에 갔대. 안지영은 지금 킹덤 타운에서 장선명과 동거 중이거든.”배준우의 말을 들은 고은영은 사건의 자초지종을 대충 알 것 같았다.안지영을 향한 나태웅의 집착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이런 상황에 놓인 안지영을 떠올린 고은영이 얘기했다.“나도 같이 갈게요.”“그러지 마. 같이 가 봤자 싸우는 모습만 보고 올 텐데.”“...”고은영은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상상해 봤다.정말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장선명과 안지영은 다 성격이 좋은 편이 아니다.거기에 궁지에 몰린 나태웅까지 더해지면...“그래요. 그럼 난 안 갈게요.”고은영이 대답했다.고은영은 약간 맥이 빠졌다.고은지는 오늘 이미 천락 그룹에 출근했다. 고은영은 고은지가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 몰랐다.배준우가 킹덤 타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열두 시 반이었다.거실은 이미 난장판이 되어있었는데 이곳에서 싸움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나태현은 이미 도착해있었다.거실의 분위기는 북극보다도 춥고 무거웠다.장선명은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고 있었는데 입가에 피가 묻어있었다. 안지영은 그런 장선명 옆에 앉아 있었다.나태웅은 다른 의자에 앉아서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얼굴에도 피가 덕지덕지 묻어있었다.말하지 않아도 두 사람이 얼마나 격하게 싸웠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진이훈도 두 그림자를 보았다.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뒷좌석을 스윽 살피고는 전전긍긍하면서 물었다.“대표님, 돌아갈까요?”‘그러게 내가 오지 말자고 했잖아!’킹덤 타운에 찾아와봤자 창피만 당하고 쫓겨날 것이다.진이훈은 나태웅이 바로 별장으로 쳐들어갈까 봐 걱정되었다.이윽고 차량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이훈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나태웅은 먼저 차에서 내려버렸다.“...”진이훈은 머릿속이 백지장이 되었다. 이윽고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바로 차에서 내렸다.“대표님, 대표님!”진이훈은 나태웅을 꽉 잡았다.이곳은 킹덤 타운이다. 나태웅이 이곳에서 일을 벌여봤자 좋은 점은 하나도 없다.게다가 장선명의 성격이 어떤지는 강성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것이 아닌가.장선명은 위험하고 날카로운 사람이다.장선명을 건드린 사람에게는 좋은 결말이 없었다.다만 나태웅과 진이훈이 예상하지 못한 것은 장선명이 벌써 돌아왔다는 것이다.나태웅은 원래 안지영과 끝장을 보려고 이곳에 온 것이었건만, 신나나를 찾으러 간 장선명이 벌써 킹덤 타운에 돌아왔을 줄은 몰랐다.게다가 창에 비치는 그림자를 보아하니, 두 사람은 신나나 때문에 싸우지도 않고 있었다.두 사람의 그림자는 전형적인 부부의 모습이었다.“이거 놔!”나태웅의 명령에도 진이훈은 나태웅을 놓을 수 없었다. 오히려 더욱 꽉 잡았다.그리고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얘기했다.“대표님, 안지영 씨는 확실히 장선명 씨의 약혼녀입니다.”안지영과 장선명의 시작이 어찌 되었든, 애원이었는지, 거래였는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은 결국 정상적인 예비부부가 되었다.‘장선명 씨의 약혼녀’라는 말이 나태웅의 신경을 긁었다.진이훈이 아무리 말려도 나태웅은 결국 진이훈을 뿌리쳐냈다.“대표님, 대표님!”나태웅의 세상은 완전히 붕괴하였다. 나태웅은 지금 진이훈의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화가 잔뜩 난 채로 킹덤 타운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다.진이훈의 머릿속은 오직 한마디로 가득했다.‘오늘 이곳에
진이훈은 자기 뺨을 후려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나태웅은 안지영을 찾아가 머릿속을 열어보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저 여자 머릿속에는 도대체 뭐가 들어있는 거야.’“너무 화내지 마십쇼. 안지영 씨는 나 대표님을 만나지 않을 겁니다.”“장선명 때문에?”“...”진이훈은 할 말을 잃었다.정확하게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나씨 가문은 장 씨 가문에게서 사과를 받아내야했디.하지만 나태웅의 충동적인 결정 때문에 그것마저도 거품으로 돌아갔다.진이훈은 정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나태웅은 화가 나면 그 감정에 휩쓸려 모든 것을 잊는 사람이었다.그 시각.안지영도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장선명은 저녁 열한 시에 들어왔다. 여덟 시에 나갔으니 총 세 시간 동안 밖에 있은 셈이었다.집에 돌아온 장선명은 화가 난 안지영을 보면서 물었다.“왜 화내고 있는 거야?”“나태웅 때문에요!”안지영이 이를 꽉 깨물고 대답했다.안지영의 화를 이만큼이나 돋울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나태웅이 유일할 것이다.이제야 회사 일 때문에 나태웅에게 제대로 복수도 하지 못했는데, 나태웅은 거의 매일 시비를 걸었다.게다가 가장 화가 나는 건, 나태웅 때문에 안지영의 아버지가 그런 일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나태웅은 사과 한마디 없었다는 것이다.안지영은 그런 나태웅을 무시하려고 했지만 나태웅이 매일 시비를 걸고 또 자기 아버지까지 끌어들였으니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신나나 씨는 어때요?”안지영은 나태웅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바로 화제를 돌렸다.나태웅 얘기를 듣던 장선명은 표정이 어두워졌다.신나나의 얘기를 꺼내자 장선명의 표정은 더욱 썩어들어갔다.“눈가를 3cm 정도 봉합했어. 지금은 병원에 있어.”“그렇게 심각한 일이었어요?”안지영은 아주 놀랐다.클럽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다.하지만 신나나는 매직 썬의 에이스로서 인기도 많고 돈벌이도 쏠쏠했다.기씨 가문은 요즘 들어 강성에서 상승세를 타고 있는 가문이었지만 장씨 가문과
안지영은 화가 나서 이마의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였다.전화기 너머의 나태웅은 계속해서 이어 얘기했다.“안지영, 장선명은 수많은 여자들을 만나본 남자야. 네가 그런 남자의 눈에 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아니면, 장선명이 정말 너랑 약혼할 거라고 생각해? 매하리에서 한번 은혜를 입었다고 정말 너를 데리고 일생을 살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지금도 봐, 장선명은 다른 여자를 위해 너를 버렸잖아!”안지영은 나태웅의 말투가 안지영의 불행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장선명에게 버려진 안지영을 보면서 축하 파티라도 열 사람 같았다.나태웅의 인성을 잘 아는 안지영은 나태웅의 생각도 쉽게 알 수 있었다.‘전에 동영 그룹에 있을 때는 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하, 그렇게 말하면 본인이 장선명 씨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아요? 그렇게 좋은 사람이라면 왜 나더러 하주원한테 가서 사과하라고 하는 거예요? 시비를 가리는 눈이 없나 봐요?”“그건 다른 일이잖아!”“뭐가 다른데요! 내로남불 같은 놈.”안지영이 중얼거리면서 말했다.지금의 안지영은 그저 나태웅을 욕할 기회만 있으면 서슴지 않고 욕설을 쏟아냈다.안지영은 전 세계의 욕설을 모아서 나태웅에게 쏟아버리고 싶은 심정도 들었다.나태웅은 그럴만한 사람이니까 말이다.“안지영, 좋은 말로 할 때 입에서 걸레 빼.”“너나 입에서 걸레 빼세요. 개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내가 아무리 힘든 상황이어도 당신만큼은 죽어도 찾아가지 않을 테니까. 왜 계속 내 눈앞에서 걸리적거리는 거예요! 관종이에요?”“...”나태웅은 안지영의 말을 듣고 확신했다.‘안지영,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선심을 써서 얘기해 주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욕설뿐이었다.하지만 안지영은 쉬지 않고 이어서 얘기했다.“그리고, 선명 씨가 신나나 씨 때문에 매직 썬에 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굳이 와서 귀띔해 줄 필요 없어요.”“...”‘장선명이 알려줬다고? 이건...’“나태웅 씨, 당신은 장선명이랑 비교하
‘지금 벌인 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정말 미친 거 아니야?’안지영은 심호흡을 하면서 끓어오르는 화를 식히려고 노력했다.“안지영, 제발 생각이라는 걸 좀 하고 살아.”나태웅은 화가 나서 이를 꽉 깨물고 소리를 질렀다.그러자 안지영도 더는 참지 못하고 같이 화를 냈다.“내가 생각을 안 하는 사람처럼 보여요? 나태웅, 당신은 도대체 뭐 하는 거예요?!”나태웅에게 괴롭힘당하는 요즘을 생각하면 안지영은 나태웅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강성의 사람들은 나태웅이 안지영 때문에 미치광이가 된 줄 안다.하지만 안지영은 나태웅의 정신병이 대대로 유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다.나태웅은 안지영을 강성에서 가장 잔인한 여자로 만들어 버렸다.그리고 이제는 안지영을 괴롭히는 데 그치지 않고 장선명까지 괴롭히려고 한다.나태웅은 안지영의 말을 듣고 숨이 턱턱 막혔다.“내가 뭐 하는 거냐고? 뭐 같아 보이는데?”“내가 당신 같은 사람의 속셈을 어떻게 알겠어요! 궁금하지도 않아요!”안지영은 짜증이 확 몰려왔다.안지영은 나태웅 때문에 화가 나서 이성을 잃은 채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안지영, 장선명이 오늘 밤 왜 나갔는지 정말 모르겠어?”“당신이 일을 벌이니까 나간 거잖아요!”안지영이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지금 당장이라도 나태웅을 죽이고 싶었다.“신나나 때문에 킹덤 타운을 떠난 거야.”“...”두 사람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분노로 과열되었던 분위기가 조금 진정되었다.안지영은 숨이 점점 가빠오는 것을 느꼈다. 화가 난 나머지 제 자리에 서서 몇 바퀴나 돌았다.나태웅에게 뭐라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너무 화가 나서 아무 말도 나가지 않았다.아무 대답도 못 하는 안지영을 보면서 나태웅은 말투를 약간 누그러뜨렸다.“너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장선명은 신나나를 구하러 매직 썬에 간 거야.”나태웅은 일부러 신나나의 이름을 강하게 읽으며 얘기했다.마치 안지영에게, 장선명은 이미 다른 여자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 같았다.
“...”요리 실력이 없다고 해도...“아무리 그래도 처음부터 요리를 잘하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장선명이 의아해하면서 얘기했다.“하지만 이건 재능이 필요한 영역이에요!”안지영은 무슨 일을 하든지 재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요리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똑같은 식재료와 똑같은 양념으로도 다른 맛이 나는 것은 재능의 문제가 아니겠는가.구이준은 그들에게로 다가오다가 안지영과 장선명이 요리 재능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것을 듣고 그대로 굳어버렸다.‘대표님이 언제부터 요리를 좋아하게 된 거지? 아니면 안지영 씨 때문에 그렇게 된 건가?’구이준을 본 장선명이 먼저 입을 열었다.“여기는 무슨 일로.”구이준이 앞으로 다가가서 얘기했다.“도련님, 매직 썬에 일이 생겨서 다녀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매직 썬.그 말을 들은 안지영은 저도 모르게 장선명을 쳐다보았다.안지영은 매직 썬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거기의 언니들이 예쁘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돈 많은 유부녀들이 자주 가는 곳인데, 그곳의 남자들이 잘생겨서였다.매직 썬에 일이 생겼다는 것을 들은 장선명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버렸다.안지영에게 보여줬던 부드러움과 온화함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차가운 기운만이 남아있었다.장선명이 중저음으로 물었다.“무슨 일이지?”“기씨 가문의 셋째 도련님이 꼭 나나 님을 데려가겠다고 하셔서요.”나나는 매직 썬에서 예쁘기로 소문난 사람이다. 안지영도 들어본 적이 있는 정도니까 말이다.그리고 기씨 가문의 셋째 도련님이라면... 양아치가 틀림없었다.대충 알 것 같았다.나나는 그래도 자존심이 있는 여자였다. 그런 나나에게 기씨 가문의 셋째 도련님은 양아치나 다름없는 사람일 것이다.그러니까 거기서 모순이 생긴 것이다.그 말을 들은 장선명은 안지영을 보면서 얘기했다.“다녀올게.”안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가요.”장선명은 몸을 일으킨 후 핸드폰을 챙겼다. 안지영 앞에 남은 피자 반 판을 보던 장선명이 말을 덧붙였다.“적당히 먹는 게 좋을 것 같아. 살
“먼저 돌아가.”“그럼 안지영이 날 때린 건...”거기까지 말한 하주원은 말을 멈추고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그리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숨을 고르며 눈물을 쏟았다.하주원은 본인을 가녀린 피해자로 만들어 놓았다.하주원이 안지영과의 사건을 꺼내자 나태웅의 표정이 또다시 어두워졌다.“네가 먼저 찾아가서 안지영을 때린 거잖아. 아니야?”“아니야. 난 그저 오빠가 마음에 들어 하는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보려고...”“...”“대화 좀 나누다가 안지영이 갑자기 나를 때린 거야!”하주원이 울면서 얘기했다.눈물을 흘리면서 하는 말은 거짓말 같지 않았다. 하주원의 모습을 본다면 모두가 그걸 진짜라고 믿을 것이다.나태웅이 미간을 찌푸렸다.“안지영이 먼저 때린 거야?”하주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안지영이 먼저 나를 때린 거야. 그렇지 않으면 나도 반격하지 않았을 거야.”나태웅은 속에 화가 부글부글 끓었다.안지영이 먼저 손을 올린 것이라면...안지영의 성질을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안지영은 조금이라도 심기가 불편하면 성질을 부리니까 말이다.전형적인 강약약강이 아닌가.전에는 배준우가 복수할까 봐 두려워하더니, 하주원한테는 함부로 대하다니. 나태웅에게 있어서 안지영은 충분히 그럴 사람이었다.참지 않는 것도, 참지 못하고 폭발하는 것도 다 안지영이다.“먼저 돌아가.”“이모가 있을 때는 이런 일을 겪을 거라고 생각도 못 했어. 이모가 보고 싶어. 엉엉...”하주원은 또 나태웅의 어머니를 언급하면서 눈물을 흘렸다.나태웅은 머리가 아파서 한숨을 푹 쉬고 이마를 매만졌다.“먼저 돌아가. 안지영이 곧 사과할 거야.”“정말? 정말이야?”하주원이 울면서 물었다.“그래.”다 성인이니 본인이 한 짓에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는가.특히 안지영은 제대로 혼내주지 않으면 앞으로도 더 막 나갈 것이다.나태웅의 대답을 들은 하주원은 만족했다.하주원은 아까 나태범과 나태웅의 대화를 다 엿들었다.하지만 그래도 하주원
밖에서 금방 돌아온 진이훈은 나태웅이 온 힘을 다해 핸드폰을 탁상 위로 던지는 것을 보았다. 핸드폰 액정은 마치 거미줄처럼 금이 가 있었다.진이훈은 속으로 핸드폰 수리점에 연락해야겠다고 생각했다.“하주원 씨가 오셨습니다. 만나보실 겁니까?”진이훈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하주원이라는 이름을 들은 나태웅은 그저 머리가 아팠다.미간을 누른 나태웅이 얘기했다.“들어오라고 해.”“네.”진이훈이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손잡이를 돌리려던 순간, 진이훈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물었다.“아까 어르신께서 꽃을 주문하라고 하셨습니다.”“무슨 꽃?”“장미꽃이요. 내일 대표님 이름으로 안지영 씨한테 보낼 예정입니다.“...”그 말을 들은 나태웅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그년한테 꽃을 보낸다고? 이게 무슨 수단이지?’안지영이 다른 여자와 다르다는 것을 떠올린 나태웅은 숨을 깊이 들이쉬더니 얘기했다.“다른 방법을 알아보라고 해. 그년은 꽃을 좋아하지 않으니까.”진이훈은 그 말을 듣고 입꼬리를 억누르려고 애썼다.‘이런 상황에서도 그년이라고 부르시니...’“네.”진이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원수 같은 두 사람을 보면서, 진이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지금은 나태범까지 끼어들었으니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진이훈이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하주원이 눈물을 닦으면서 들어왔다.표정이 좋지 않은 나태웅을 본 하주원이 억울한 듯 속삭였다.“태웅 오빠.”나태웅은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하주원을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눈빛을 마주한 하주원은 저도 모르게 겁을 먹었다.하지만 당당하게 얘기했다.“안지영과 헤어지면 안 돼? 안지영은 오빠한테 부족한 여자야.”“그럼 누가 나한테 어울리는데. 네가?”“태웅 오빠...”그 말을 들은 하주원은 얼굴을 붉혔다.그리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주원에게 있어서는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 대답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이모님이 얘기했었잖아
장선명은 바로 전화를 받아서 스피커폰으로 돌려놓았다.“나태웅, 설마 나한테 사과하라고 할 건 아니지?”장선명은 ‘사과’라는 두 글자에 힘을 주어 얘기했다.안지영은 그 두 글자를 듣고 표정이 굳어버렸다.나씨 가문은 사과를 받아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지 않나.나태웅이 요즘 안지영더러 계속해서 하주원에게 사과하라고 한 걸 떠올리니 안지영은 화가 치밀었다.전에는 나태웅이 이렇게 막무가내인 사람인 줄 몰랐지만 이제야 알게 되었다.정말 솔로인 것이 당연한 사람이다.“오늘 나씨 가문에서 일어난 일에 관해서 설명을 해줬으면 하는데.”안지영은 장선명 옆에 앉아 있다가 그 말을 듣고 하마터면 욕할 뻔했다.하지만 장선명은 그런 안지영을 품에 안고 따뜻한 손으로 안지영의 입을 막은 후 고개 숙여 웃으며 안지영을 바라보았다.안지영은 그런 장선명을 쳐다보면서도 나태웅을 향한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장선명은 가볍게 웃었다.“나태웅 씨가 원하는 게 어떤 걸까? 내 약혼녀랑 같이 너네 가문 경호원한테 가서 사과라도 해야하나?”“...”“...”장선명이 오늘 나씨 가문에서 사람을 때렸으니 사과를 해야하는 것은 당연하다.하지만 지금 장선명의 태도에서는 사과하려는 마음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장선명이 약혼녀를 데리고 나씨 가문의 경호원한테 사과하러 간다니.“장선명,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아니면 경호원은 사람으로 보지도 않는다는 건가?”“하.”장선명이 크게 웃었다.“반응은 빠르네. 여태까지 네가 바보인 줄 알았는데.”‘바보’라는 단어에 전화기 너머의 나태웅이 턱에 힘을 꽉 주었다.숨소리마저 기분 나빠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장선명, 선 넘지 마.”나태웅이 이를 꽉 깨물고 장선명을 찢어 죽일 것처럼 말했다.“왜, 이 뜻이 아니었나?”틀린 건 아니었다.하지만 나태웅이 장선명더러 경호원을 찾아와 사과하라고 할 수도 없는 짓이었다.나태웅은 원래 장선명이 이렇게 하도록 할 생각이 없었지만 장선명이 그렇게 얘기하자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