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씨 가문은 갑자기 떠들썩해졌고 양지원은 양혁수가 좀 더 일찍 오지 않은 것에 대해 투덜거렸다. 한편 노지혜와 변여름은 작은 태양 곁에 다가앉았다.“정말 귀여워요. 양시연 언니를 꼭 닮았어요.”변여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노지혜는 그 시선을 느끼고는 슬쩍 손을 거두며 억울한 듯 미소를 지었다.변여름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양혁수를 바라보며 물었다.“혁수 오빠, 태양이를 안아보지 않을 거예요?”그제야 양혁수는 태양을 향해 시선을 돌렸고 이를 본 양지원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어서 안아봐. 조카는 삼촌을 닮는다던데 태양이도 너처럼 잘생겼어.”양혁수는 피식 웃었다.그와 양시연의 관계에서 ‘조카’라는 표현이 어색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태양은 양시연의 아이였기에 그는 조용히 다가가 태양을 내려다보았다.태양은 작은 손을 뻗어 그의 손가락을 잡으려 했고 옹알거리며 반응했다.뜻밖의 감동이 밀려온 양혁수는 손을 내밀어 태양이 그의 손가락을 꼭 잡도록 했다.그 모습을 보던 양시연이 장난스럽게 말했다.“설마 삼촌이 빈손으로 조카를 보러 온 건 아니겠지?”양혁수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능청스럽게 답했다.“난 큰 선물을 준비했는데 연정훈 씨가 너무 깐깐해서 내가 준 걸 땅에 묻어버릴까 봐 걱정돼.”“삼촌이 준 건데 정훈 씨가 그런 짓을 하겠어?”양시연은 태양을 품에 안고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웃었다.“자 어서 삼촌께 감사 인사하고 선물 달라고 해볼까?”양혁수는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익숙한 듯 자유롭게 앉았다. 다만 예전보다 방탕한 기운은 사라지고 그의 눈빛에는 한층 부드러워진 분위기가 감돌았다. 조명의 따스한 빛 아래 행복한 여인을 바라보던 그는 시선을 돌려 변여름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여름아, 가서 내가 준비한 선물 좀 가져와.”“네. 알겠어요.”변여름은 발걸음을 재촉해 여러 개의 상자를 안고 돌아왔다. 그중에는 변씨 가문에서 정성스럽게 준비한 것도 섞여 있었다.양혁수가 건넨 선물을 보고 양시연은 웃음을
변백호 남매가 온 이유는 한편으로 백일잔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요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식사 후 태양은 양지원에게 맡기고 양시연과 다른 사람들은 서재에 모였다.변백호가 말했다.“양민아 씨는 100% 성형을 해서 얼굴을 바꿨어요. 당신들은 절대로 찾을 수 없을 겁니다.”양혁수는 책상 끝에 기대어 라이터를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었고 불꽃이 튀어 오르며 그의 얼굴을 비췄는데 그 표정은 조금 음침해 보였다.옆에서 연정훈과 양시연은 소파에 앉아 있었고 양시연은 생각에 잠겨 있었으며 연정훈은 조용히 차를 따라 양시연 앞에 있는 정교한 도자기 컵에 부었다.양시연은 정신을 차리고 뜨거운 연기 속에서 그를 한 번 쳐다보며 표정을 풀고는 차를 들었다.양혁수는 모일 것을 눈으로 살피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역시. 두 사람 부부 아니라고 할까 봐.’연정훈이 말했다.“양민아는 남지국에 있어. 아마 작은 도시 하나일 거야.”“어떻게 알았어요?”“양민아는 임신했어. 조재민 씨는 한편으로 양민아가 체포되어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 아이를 신경 쓰고 있어. 양민아를 보내는 경로는 네 구간으로 나뉘어져 있고 각각 독립적으로 정교하게 계획되어 있어. 얼마 전 임성원이 그 사람의 사람들을 통해서 정보를 얻었지.”“조재민 씨를 아직 두고 있어요?”양혁수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연정훈 씨에게 해를 끼치려면 어떻게 하려는 거죠? 당신 아버지가 이번에 이긴 것뿐이지 왕위에 오른 것도 아니고 당신을 주시하는 사람은 많아요. 당신이 혼자 자초해서 일이 생긴 거라면 상관없지만.”양혁수는 양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내 동생과 조카를 끌어들이지 마세요.”양시연은 잠시 말문을 열지 못했다.“…”그녀는 목을 가다듬고 연정훈을 대신해 설명했다.“정훈 씨는 이미 처리하려 했어요. 그런데 얼마 전 아빠가 찾아와서 사람을 다른 곳으로 옮겼어요. 우리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죠. 시간이 지나면 그 사람을 처리하거나 다시 우리에게 넘겨줘서
다음 날 태양의 백일잔치가 강남시티에서 열렸다. 규모는 컸지만 연씨와 양씨 두 집안의 신분을 고려해 양시연은 호텔에서 요란하게 진행하는 대신 집에서 열기로 했다.어차피 집이 아주 넓어 손님을 맞이하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었고 아침부터 축하 선물을 보내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태양은 할머니 품에 안겨 아래층에서 손님들을 맞이했는데 내내 얌전하게 있었고 한 번도 울지 않았다.가족 간의 복잡한 관계 외에도 양시연과 연정훈의 친구들까지 모두 참석해 집 안은 북적였다.반우희는 이른 아침부터 세 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특히 정성을 들여 동생들과 함께 백 개의 장수 만두를 빚었다.장수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긴 이 만두를 본 표세연은 더욱 흐뭇해하며 만나는 사람마다 내 딸이라며 자랑을 늘어놓았다.온 집안이 축제 분위기로 들뜬 가운데 오랜만에 부승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양시연은 그녀를 정말 오랜만에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부승희는 살짝 그은 피부를 하고 있었는데 요즘 햇볕을 많이 쬐었는지 얼굴에 건강한 윤기가 돌았다.높게 묶은 포니테일은 가느다란 세 갈래 땋기로 여러 가닥 나뉘어 있었고 작은 큐빅 장식이 박혀 있어 그녀는 한층 더 활기차 보였다.문을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태양부터 보겠다며 부산을 떨었고 양시연이 직접 안아 보여주자 부승희는 혀를 차며 말했다.“생각보다 영리하게 생겼어요. 연정훈 오빠의 장점은 물려받지 않은 것 같아요.”양시연은 그녀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이승우 등도 도착했다.연정훈은 태양을 안아 들고 자연스럽게 솔로인 친구들 무리에 들어가 그들에게”아들이라는 새로운 생물”을 소개했다.부승희는 양시연 옆에 앉아 한숨을 쉬며 말했다.“시연 씨가 이렇게 잘 사는 거 보니까 나도 결혼하고 싶어져요.”양시연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하면 되죠. 부승희 씨한테 결혼하자고 매달리는 사람도 있잖아요?”부승희는 눈을 굴리며 남자들 쪽을 힐끗 쳐다봤다. 그러다 이승우가 태양을 안고 있는 걸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며 말
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여기서 보면 안 돼요?”부승희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여름아, 이건 어른들이 하는 게임이야.”“알아요. 만약 키스하거나 더 과격한 행동을 한다면 저는 눈을 가릴게요.”부승희는 침묵했다.“...”‘됐어. 뭔가 이 아이는 귀엽고 장난기 있는 느낌이랄까.’부승희는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알았어. 그럼 여름이를 데리고 같이 놀자.”그녀는 가정부에게 시켜서 변여름에게 안대와 마스크를 가져다주었다. 변여름은 순순히 받아 들고 자세를 바르게 앉았다.게임에 참여한 사람은 이미 열 명이었고 부승희는 아직 참여할 사람이 적다고 느껴 더 많은 사람을 불러야 한다고 급히 말했다. 한우빈에게 여자를 데려오라고 했지만 한우빈은 여자가 어디 있겠냐며 아무 여자나 불러야 했다.“내가 부르는 거보다 우리 이 도련님이 부르면 얼마든지 올 수 있을 텐데.”“헛소리하지 마.”이승우가 한우빈의 말을 끊었다.“난 언제나 조용하고 정직한 사람이야.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을 부를 수 있겠어?”모두가 웃었고 부승희는 이승우를 째려보았다.양시연이 말했다.“사람도 많고 이제 시작해도 돼요.”부승희는 양시연에게 윙크를 하며 말했다.“시연 씨 되게 기대하는 눈치네요.”양시연은 손을 흔들며 말았다.“저는 그저 여러분이 나중에 과하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여름이도 있으니까요.”변여름은 현장에서 장비를 착용했다.양시연은 침묵했다.“...”부승희는 어깨를 으쓱했다.연정훈 부부와 부승원 외에는 모두 게임에 능숙한 사람들이었고 반우희는 예외였다. 그녀는 흥분한 생태였고 또한 모르는 사람은 죄가 없는 법이었다.예전에 양주 첫 번째 모임에서 그녀는 당당히 노래를 불렀고 그때부터 그녀의 뻔뻔한 정도가 얼마인지를 알 수 있다.게임이 시작되기 전에 부승희는 일부 벌칙을 준비시키라고 했다.“고마 주스, 고등어 국물, 불닭 과자, 감자.”반우희는 호기심에 가득 차 물었다.“감자도 벌칙이에요?”부승희는 말했다.“우희 씨, 세 번 연
반우희는 고민할 것도 없이 말했다.“임신이에요.”모두가 일제히 양시연을 바라보자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때 변여름이 차분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녀의 말투는 마치 백과사전을 읊는 듯했다.“인간의 임신과 동물의 출산 후 회복 기간은 많이 다르니까 그렇게 쉽게 임신할 수 없어요.”순간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침묵했다.“...”반우희는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모두가 알다시피 부승희는 술에 취한 척하면서도 속에 품은 의도가 뻔히 보였다. 그녀는 변여름에게 이어폰을 끼우게 하더니 다시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우린 당연히 시연 씨가 임신이 아니라는 걸 알죠. 사실 내가 물어보려던 건... 흠...”부승희는 턱을 괴고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 오빠, 벌써 100일이 지났는데... 두 사람 다시 관계를 가졌어?”양시연은 순간 멈칫했다.‘다시...관계를 가졌냐고?’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뭐라는 거예요.”부승희는 손뼉을 치며 웃었다.“이 정도 질문은 괜찮잖아?”양시연은 얼굴을 돌리며 투덜거렸다.“누가 그런 걸 알고 싶어 하겠어요.”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고 그저 웃을 뿐이었다.그런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승희는 다시 연정훈에게 시선을 돌렸다.“오빠, 말해 봐.”연정훈은 짧지만 단호하게 답했다.“없어.”양시연은 고개를 돌렸지만 얼굴은 점점 더 붉어졌다.주변 사람들은 다소 놀란 기색이었다. 그녀가 전에 큰 부상을 당했지만 이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이미 괜찮아졌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때 부승희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연정훈에게 다가가 물었다.“오빠 누구 문제인 거야?”연정훈은 여유롭게 대답했다.“이건 다음 벌칙에서 물어볼 질문이야.”부승희는 혀를 차더니 박수를 치며 말했다.“두고 보자고.”그러면서 다시 게임을 진행했고 반대편에서 한우빈이 불만스럽게 오늘에 게임이 재미없다며 중얼거렸다.“자리에 있는 여자는 제수씨 아니면 형수잖아요.”“괜찮아요. 남자
부승원은 체면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라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겠지만 만약 그가 공개된 자리에서 규칙을 어기라고 한다면, 그것 역시 따르지 않을 것이다.모두가 연정훈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하며 지켜보고 있었고 이승우는 계속해서 그를 압박했다.부승원이 조용히 술을 마시며 움직이지 않자 반우희는 손을 들었다.부승희가 물었다.“우희 씨, 무슨 일이에요?”반우희가 대답했다.“부승원 씨에게 강제로 입맞춤을 신청할게요.”모두가 침묵했다.“...”방 안은 웃음소리로 가득 찼고 부승원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정직한 표정이 잠시 억지로 유지되는 듯했다.‘순진하구나.’반우희는 한우빈에게 물었다.“한우빈 씨, 저 해도 될까요?”한우빈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안 돼요.”“네?”한우빈은 반우희를 놀리듯 말했다.“우희 씨, 규칙을 어기려고 하는 거죠? 내가 동의하려면 먼저 세 잔의 고마 주스를 마셔야 해요.”“너무 잔인하네요.”노지혜는 어깨를 떨며 그 기회를 틈타 변백호의 품에 파고들었다.변여름은 입술을 삐죽이며 생각했다.‘애교쟁이.’양혁수는 거의 잠이 들었지만 그녀의 행동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곧 눈을 가려야 할 거야.”결국 반우희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좋아요. 마실게요.”변여름은 그녀에게 고마 주스를 건넸고 반우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빨대 3개를 달라고 했다. 한 번에 다 마실 생각이었다.모두가 속으로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3 2...’반우희가 빨대를 입에 물려는 순간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갑자기 그녀를 끌어당겼다.그녀는 반응할 새도 없이 큰 손이 반우희의 얼굴을 돌려 따뜻한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반우희는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그 순간 부승원은 진심으로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입술을 반우희에게 완전히 맞췄다. 단순히 살짝 닿은 것이 아니라 진지하고 깊은 키스였다.연정훈은 잠시 양시연을 바라보았고 양시연은 그의 품에 기대어 평온을 가장했다.부승희와 이승우는 가까이 가서 구경하며 플래시가 계속
게임이 계속되는 동안 몇 차례 실패를 거듭하자 양혁수는 졸음이 싹 달아나더니 결국 포기한 듯 변백호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가만히 있어요. 내가 할게요.”변백호는 당황하며 욕설을 내뱉었다.“양혁수 씨, 대체 어디를 만지는 거예요?”“내가 어디를 만질 수 있겠어요?”양시연과 주변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렸고 남자들은 차마 그 장면을 직시할 수 없었다.우여곡절 끝에 탁구공을 배까지 운반하자 반우희가 가장 먼저 박수를 쳤다.“와 두 분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데요?”부승희도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두 분 다 훈훈하니까 보기 좋아요.”그 순간 부승원의 시선이 반우희에게 잠시 머물렀다.양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사실 나 예전부터 변백호 씨가 양혁수를 짝사랑하는 게 아닌지 의심했어요. 뭔 일만 있으면 도와주잖아요?”양혁수는 능글맞게 웃으며 변백호를 바라봤다.“방금 나랑 그렇게 오랫동안 붙어 있었는데 아주 좋았겠네요?”변백호는 질색하며 단호하게 말했다.“꺼져요.”‘진짜 뻔뻔하네.’양혁수와 변백호의 티격태격하는 모습에 방 안은 다시 웃음으로 가득 찼다.다음 라운드에서 양시연이 왕을 뽑았다. 혹시라도 자신이 걸릴까 봐 조마조마했던 그녀는 비교적 쉬운 벌칙을 정했다.“2번과 4번이 듀엣으로 러브송을 부르기!”뜻밖에도 2번과 4번은 변백호와 부승희였고 별로 어려운 미션도 아니라 두 사람은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나 노래를 골랐다.부승희는 편곡된 ‘사랑’이라는 곡을 선택했는데 뜻밖에도 변백호도 그 노래를 알고 있었다.“서로가 함께 잠이 들고 나비처럼 함께 날아가네. 온 정원에 봄빛 내려 우릴 감싸안았지. 가만히 스님에게 여인이 예쁜지 물어보았네.”두 사람의 목소리는 모두 듣기 좋았고 함께 부르니 더 매력적이었다.방 안에는 부드러운 분위기가 감돌았고 사람들은 노래를 들으며 조용히 대화를 나눴다.그중에서도 노지혜만이 턱을 괴고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변백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나쁜 놈. 지난번
양시연은 노지혜가 카드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부승희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주려 했지만 부승희가 너무 술을 마셔서 경계심이 떨어져 그녀의 눈빛을 놓쳤다.결국 마지막 판에서 부승희가 걸렸고 이승우가 카드를 던졌을 때 부승희는 순간 멍해졌다.노지혜는 왕으로서 웃으며 종이 한 장을 뽑더니 원래 3겹으로 되어 있던 종이를 풀어 얇은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 그들에게 종이로 입맞춤하라고 했지만 종이는 절대로 찢어지면 안 된다고 요구했다.그 종이는 나비의 날개처럼 얇아서 조금만 다쳐도 찢어질 정도였다.노지혜가 말했다.“입맞춤해서 종이가 찢어지면 그때는 두 번 입맞춤하고 종이가 찢어지지 않을 때까지 해야 해요.”그녀는 세 장의 나비 날개처럼 얇은 종이를 펼쳐 보이며 부승희에게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신뢰를 주려 했다.부승희는 침을 삼켰고 술기운이 확 사라졌다.모두가 그녀와 이승우를 주목했고 이승우는 무덤덤하게 술잔을 내려놓고 손으로 머리를 받치며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봤다.‘어떻게 해야 하지?’‘뭘 어떻게 하긴.’부승희는 그를 한 대 때리고 싶은 마음이었다.‘정말 재수 없네. 마지막 판에서 이렇게 걸리다니.’부승희가 말했다.“우리 진 거니까 고마 주스를 마시며 벌칙을 받을게요.”변여름은 이번엔 직접 주스를 주지 않고 게임 규칙을 읽기 시작했다.“언니, 게임 시작할 때 혁수 형이 말했잖아요. 결혼한 사람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은 벌칙을 자진해서 요청할 수 없다고.”부승희는 어이없었다.“...”‘뭐야. 양혁수는 너의 조상이라도 돼? 양혁수의 말을 다 기억하고 있네.’부승희는 입만 뻐끔거렸고 그때 노지혜가 말을 이었다.“언니, 혹시 게임을 할 엄두가 없는 거예요?”‘엄두가 없다고? 내 사전에는 그런 단어가 있을 리가 없어. 그건 불가능해.’부승희는 발이 묶인 듯한 상황에서 더 이상 빠져나갈 수 없었다. 그녀는 이승우와 불편한 상황이 되지 않으려 했고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친구인 변백호에게 눈길을 보냈다.변백호는 부승희와 노래를 부른 뒤 그녀
양혁수가 어제 에든베타에 가고 싶었던 건 순간적인 감정에 휩쓸린 탓이었고 실은 아직 그곳으로 향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어젯밤의 일을 떠올리자 지금 그냥 떠나는 것은 너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어쨌든 변여름은 아직 어린 소녀였고 그는 어른이었다. 그러니 책임을 져야 했다. 무엇보다 순간적인 충동에 휘말렸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변여름은 아침 일찍 나간 뒤 몇 시간째 돌아오지 않았다.떠나겠다고 해놓고도 한낮이 되도록 변씨 가문에 머물고 있는 자신이 양혁수는 조금 어색했다.점심시간이 되자 변씨 가문의 사람들은 그를 배웅하기 위해 모였다. 집을 비운 둘째 부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자리했다.한 상 가득 차려진 식사 자리였지만 변여름만 보이지 않았다.마크가 갑자기 양혁수의 왼쪽으로 다가와 그의 어깨를 잡아당기며 물었다.“왜 목까지 올라오는 셔츠를 입었어요?”함은화가 곧바로 타일렀다.“삼촌이라고 불러야지.”“삼촌, 왜 목까지 올라오는 셔츠를 입었어요?”마크는 즉시 호칭을 바꾸었다.양혁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침묵했다.“...”잠시 후 그는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추워서.”“집은 안 추운데요.”하니가 반대쪽에서 다가와 그를 유심히 살폈다.“땀까지 나는데 거짓말하지 마세요.”양혁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칼과 포크를 내려놓고 하니를 살짝 옆으로 밀어냈다. 더 이상 대꾸하지 않은 채 모두에게 ‘천천히 드세요.’라고 한 마디 남기고 찻잔을 들었다. 그러고는 말없이 거실 창가로 향했다.두 꼬맹이는 끈질기게 그에게 달라붙었다. 그러다 마크가 마침내 그의 목에 난 자국을 발견하고는 크게 외쳤다.“다쳤어요.”하니도 눈을 반짝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보라색이에요. 엄청 커요.”양혁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멀리서 변백호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누르며 엄격한 표정으로 두 아이를 불렀다.식탁에서 함은화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다행히 너희들 아버지께서 안 계셔서 속상해하지 않으시겠네.”변여름의 셋째 형수는 외
새벽 두 시를 넘긴 침실은 적막에 잠겨 있었다.양혁수의 셔츠는 변여름의 겉옷과 뒤엉킨 채 침대 옆 바닥에 나른히 놓여 있었다.거실의 시곗바늘이 똑똑 소리를 내며 양혁수의 심장과 신경을 조여 왔다.양혁수는 자신이 형편없는 놈이라며 N 번째로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그런데 그의 품에 안겨 있던 변여름이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순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다시 키스하려 다가왔다.양혁수는 약간 불편해서 변여름의 양 볼을 잡았다.“뭐 하려고 그래?”그는 깊은 만족 뒤에 밀려오는 나른함 속에서 약간 쉰 목소리로 물었다.변여름은 살짝 눈을 굴리더니 능숙하게 고개를 돌려 그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마치 뜨거운 물건을 만진 듯 무의식적으로 손을 뗐다.변여름은 이미 그럴 줄 알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도 자극으로는 그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그녀는 얌전히 그의 품에 안기며 조용히 속삭였다.“오빠, 나 졸려요.”양혁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몸을 돌려 이불을 끌어당겨 둘을 덮었다.“자.”지금 변여름을 돌려보낸다 한들 헛수고라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변여름은 그의 속내를 알아챈 듯 만족스럽게 미소 짓고는 양혁수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달콤하게 눈을 감았다.양혁수는 그녀의 조용한 숨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섬세한 얼굴 위로 연분홍빛이 감돌았고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그는 머리가 아파졌다. 몇 시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변여름을 방 안으로 들인 자신을 주저 없이 없애버리고 싶었다.지금 상황은 이미 벌어졌고 양혁수는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아무리 되짚어 봐도 도대체 어느 순간 문제가 생긴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확실한 건 이 모든 일이 결국 변여름의 계획대로 흘러갔다는 사실이었다.‘아니면 정말 변여름이 말한 대로 내가 경험이 부족해서 이렇게 쉽게 넘어간 걸까?’양혁수는 그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한강시에서만 몇 년을 지내며 수많은
변여름이 두 번째로 양혁수에게 키스하자 그는 여전히 피하려 했지만 마치 작은 마녀의 마법에 걸린 듯 저항은 미약했다.그녀는 투피스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언제 풀었는지 겉옷 단추가 풀려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끈 나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그는 잠시 눈길을 돌렸을 뿐인데 그녀의 가슴 라인이 스쳐 지나갔다. 오른쪽에 분홍색 만화 꽃이 그려져 있었고 그 모습이 그녀의 행동과 대조되어 양혁수는 더욱 죄책감을 느꼈다.“입술이 닫히자 변여름은 그의 목을 감싸며 손끝으로 뒷머리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돌려 무심한 듯 두 번 당겼다. 그 작은 통증이 오히려 자극되어 그의 감각을 더 예민하게 만들었다.이번에는 더 인내심을 갖고 천천히 양혁수의 입술을 따라갔다. 중간에 멈추어 그의 표정을 살펴보며 그가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는’모습을 보고는 살짝 미소 지으며 다시 그의 턱에 입맞춤을 했다. 그 후 더 애정을 담아 양혁수의 목젖에 부드럽게 입술을 옮겼다.양혁수는 자신이 미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대로 가만히 있으며 그녀가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게 두었다.심장 박동과 호흡이 서로 경쟁하는 듯했다. 그는 계속해서 아래로 눌러 내려가며 누가 먼저 참지 못할지 시험하려는 듯했다.그는 겉으로는 무심한 척했지만 등이 뻣뻣하게 굳어 있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 그녀가 그를 껴안고 무심하게 척추를 쓸어내리자 날카로운 전류가 온몸을 타고 내려가 배까지 흘러갔다.변여름이 양혁수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속삭이며 그의 옆얼굴에 가만히 입맞췄다.“오빠, 이런 거 좋아해요? 좋아하면 저한테도 이렇게 해도 돼요…아니면 오빠가 다른 걸 원해도 뭐든 저한테 해도 괜찮아요.”변여름의 태도는 바닥까지 내려앉아 마치 겸손해 보였지만 양혁수는 알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그들 같은 사람들이 가장 자주 쓰는 약탈 방식이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과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결과만이 전부였다.그가 조금만 방심하면 그녀의 덫에 걸려들어 단단히 붙잡힐 테고 다시는 벗
“바디워시에요.”“변여름.”변여름은 입을 꾹 다문 채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로 우유 향이 나는 바디워시에요.”양혁수는 방금 그 순간 특히 그녀의 눈과 마주쳤을 때 그리고 그녀가 그의 손을 핥던 단 몇 초 동안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다.‘말도 안 돼.’그는 분명 그녀의 향기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변여름이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녀의 은은한 향이 퍼지더니 이상하게도 양혁수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변여름이 키스하려 하자 그는 마치 폭발할 것 같았다.변여름은 그의 의심스러운 눈빛을 마주하며 미동도 없이 침착했다.“오빠, 어디 불편해요?”“네가 그 이유를 더 잘 알잖아.”“...?”변여름은 잠시 생각하다가 그의 가빠진 호흡과 붉어진 귀 끝을 보고는 눈을 깜빡였다.그 순간 그녀의 마음속 흥분 수치가 급격히 상승했다.“오빠, 제가 오빠한테 약이라도 먹였다고 생각해요?”양혁수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가슴이 요동쳤고 침묵이 곧 대답이 되었다.변여름은 살짝 시선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진짜 아니에요.”“오빠는 경험이 부족해서 딥 키스 한 번에 정신을 못 차리는 거예요.”양혁수는 순간 멍해졌다.???방금 키스 때조차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다.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이 굳었고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리려는 본능을 꾹 참으며 조용히 손을 빼려 했다.그러나 양혁수는 다시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며 무뚝뚝하게 말했다.“또 멋대로 움직이면?”변여름은 가늘게 신음하며 눈에 희미한 물기를 맺었다.“오빠, 아파요.”양혁수는 변여름이 꾀병을 부린다고 90% 확신했지만 그녀의 눈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모습을 보자 무의식적으로 손에 힘을 풀었다.그 틈을 놓치지 않고 변여름은 손을 빼냈다.양혁수는 얼굴에 서리가 낀 듯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경계했고 변여름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잠시 팽팽한 정적이 흐른 후 변여름은 애원하는 듯
양혁수는 그녀가 갑자기 대담해진 것에 깜짝 놀랐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변여름, 내려가.”변여름은 말을 듣지 않고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살며시 쓸어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그의 어깨를 감쌌다.그녀가 고집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양혁수는 어지러운 머리를 억지로 참고 그녀를 몸에서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그녀의 몸에 닿자 손바닥이 부드러운 감촉에 젖어들었다.그는 마치 번개에 맞은 듯 머리가 하얘졌다. 손에 힘이 빠졌다.‘젠장. 이 꼬맹이 속옷도 안 입었어.’양혁수는 변여름이 꽁꽁 싸맨 옷차림을 보고 적어도 선을 지킬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허세를 부린 것이었다.목을 감싼 변여름은 이미 그의 반응을 예상한 듯 조급해하지 않고 마치 요정처럼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양혁수는 변여름의 팔을 잡고 얼굴을 찡그리며 진짜 화가 난 척 말했다.“계속 선을 넘으면 나 진짜로 화 낼 거야.”그 말을 듣고 변여름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을 감싼 손이 약간 풀렸다.양혁수는 속으로 안도하며 변여름을 제압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그는 그녀의 팔을 떼어내고 그녀를 완전히 떼어내려고 했지만 변여름은 갑자기 그를 공격하며 손을 꽉 잡고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양혁수는 멍해졌다.마치 머리가 텅 빈 것처럼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 몸을 뒤로 짚으며 눈을 크게 떴다.변여름은 그에게 강제로 키스할 뿐만 아니라 양혁수의 입술에 닿는 순간 능숙하게 두 입술로 그의 아랫입술을 감싸 안았다. 양혁수가 놀란 틈을 타서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전례 없는 경험에 양혁수는 숨이 가빠지고 두피가 저릿저릿했다.변여름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기가 코를 찔렀고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정신이 몽롱해졌다. 온몸이 굳어 버렸지만 저항할 힘이 없었다.양혁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그녀의 키스를 피하면서 손에 힘을 주어 변여름을 밀어내려고 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자신에게 주먹을 쓰지 않을 것을
양혁수가 말했다.“네가 날 좋아하는 건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야. 그러면 나중에 더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도 좋아하게 될 거야.”양혁수는 마침내 변여름의 논리적 허점을 찾아내 정확하게 반박했다.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중에 노지혜 씨가 그러더라고요. 내가 오빠를 좋아하기 때문에 오빠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거라고요. 노지혜 씨는 오빠를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직 저의 오빠만 좋아하죠.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이 오빠보다 더 좋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저는 오빠만 바라보니까요.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제 눈에는 오빠밖에 안 보여요.”양혁수는 침묵했다.“...”‘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또다시 변여름의 고백 타임이 되어버렸네.’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일 무사히 떠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침묵 속에서 변여름이 그에게 물었다. “오빠, 오늘 오빠 옆에서 잠들어도 돼요? 내일이면 떠나잖아요. 오빠가 절 데려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요. 제가 또 붙잡으면 오빠가 화낼 테니까 그냥 조용히 옆에 있을게요. 내일 아침 꼭 웃으며 오빠를 보내드릴게요.”양혁수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말이 왠지 믿음직스럽지 않다고 느꼈다.변여름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지만 눈에는 실망이 스며들어 있었다.“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했는데도 오빠는 나를 단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것 같아요. 떠날 땐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겠죠. 전에 했던 건방진 말들은 모두 허세였어요. 나도 사람이에요. 아무리 기다려도 답을 받지 못하면 슬퍼질 수밖에 없어요. 오빠가 화내는 것도 정말 싫어하는 것도 다 싫어요. 그리고 이번엔 오빠를 붙잡을 자신이 없어요. 오빠, 에든베러로 가는 거죠? 거기에는 오빠와 양시연 언니의 추억이 있잖아요.”말을 마치자 그녀는 한순간에 기운이 빠진 듯 축 처졌고 머리 위에는 걷히지 않는 먹구름이 드리워진 듯했다.양혁수는 사랑을 얻지 못하는 아픔을 알았기에 그녀의 감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변여름은 항상 양혁수에게 변백호를 놀리는 농담을 했지만 사실 그 농담 속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단지 그녀가 처음 그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가 변백호에게 미친 영향 때문이라는 것을 양혁수는 알지 못했다.변백호는 그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고 그녀의 많은 행동은 변백호의 묵인 아래 이루어졌다.분명 전에는 모두 ‘비정상’이었는데 변백호가 한 번 외출하고 오더니 정상적인 사람을 만나고 나서 갑자기 그녀에게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변여름은 그걸 참을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씨 가문의 가풍에 싫증을 느꼈는지 다음 날 떠난 것을 변여름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아침 일찍 양혁수는 가방을 메고 혼자 외출했고 그 흰 고양이도 데려갔다.변여름이 맨발로 방에서 뛰쳐나왔을 때 복도는 희미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고 변백호는 혼자 창가에 서서 아래층을 깊게 응시하고 있었다.그녀는 변백호의 소매를 잡아당겼지만 변백호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변여름은 조용히 작은 발판을 옮겨 놓고 그 위에 올라섰다. 변백호를 안고 변백호처럼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그의 모습이 마당에서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 그녀는 봤다. 흰 고양이가 그의 어깨에 앉아 있었고 부드러웠다.그녀는 변백호에게 물었다.“다시 올 거예요?”그들의 모국어는 라틴어였고 평소 집에서 대화할 때도 라틴어를 썼다.변백호는 그녀에게 대답했지만 한국어로 말했다.“왜 돌아와? 네가 고양이를 괴롭히는 걸 보려고?”변여름은 의문스러웠다.???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녀는 변백호의 심정을 이해했다. 친구가 없던 기묘한 소년이 친구를 데려왔는데 결국 그 친구가 자기 가족이 모두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는 창피했을 것이다.다행히 양혁수는 나중에 변백호와 여전히 친하게 지냈다.추억에서 벗어나 변여름은 양혁수에게 물었다.“그 흰 고양이는 어떻게 됐어요?”양혁수는 말했다.“내가 집으로 데려가서 집사에게 맡겼어. 재작년에도 잘 지내고 있었어.”“다행이네요.”그녀가 안도하는 것을 듣고 양혁수는 그녀를 여
변여름은 잠깐만 있겠다고 했지만 결국 커다란 베개를 양혁수 옆에 두고 몸을 기대었다. 그녀는 얼굴을 베개에 살짝 묻은 채 마치 아기 고양이처럼 조용히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그녀가 곁에서 잠든 모습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양혁수는 이미 익숙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몸을 눕히고 눈을 감은 채 그녀의 말을 들었다.“오빠,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요?”양혁수는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응...”그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네가 여덟이나 아홉 살쯤 되었겠지.”“아니에요.”변여름은 그의 말을 부정했다.그는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아니라고? 내가 변백호랑 뉴성에 놀러 갔을 때 변백호가 널 데리고 왔잖아.”“저희 오빠랑 혁수 오빠가 처음 만나고 오빠를 집에 데려다줄 때 우리가 만났어요.”변여름이 바로잡았다.양혁수는 기억이 났다.놀란 표정으로 손을 베개 삼아 머리를 기대고 진지하게 되물었다.“그때 네... 네 살?”“거의 그렇죠.”‘정말 대단해. 그때 일을 다 기억하다니.’양혁수는 깊이 회상했다.그해 갓 성인이 된 그는 양지원과 함께 뉴성에서 열린 한국 상회의 파티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변백호와 불편한 일이 있었다.두 사람의 첫 만남은 서로를 싫어하는 사이였다.하지만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려던 순간 마당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밖으로 나가 확인했을 때 그는 피투성이가 된 변백호를 발견했고 변백호는 누군가의 습격을 받아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다.열여덟 살의 소년은 정의감이 넘쳐흘렀고 모른 척할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백호를 구한 뒤 그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변여름을 보았다.그는 변씨 가문에 머물렀고 변씨 가문의 사람들은 변백호를 구해준 것에 감사하며 귀빈으로 대접했다.해가 질 무렵 그는 뒷정원을 거닐다가 정교한 인형 같은 아이를 발견했다. 그는 변여름은 너무 귀여워서 마치 꿈속에서 그리던 여동생 같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그녀
집으로 돌아오니 저택은 조용했다.양혁수는 간단하게 샤워하고 내일 떠날 준비를 하려고 전화를 걸려 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그는 문을 열었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가래떡 베개였다. 하얀색 베개가 변여름의 품에 안겨 있었고 크기는 거의 그녀의 키와 같았다.변여름은 고개를 살짝 들어 먼저 눈을 보였다.“오빠.”그녀는 긴 원피스 잠옷을 입고 겉옷은 작은 재킷을 입어서 긴 소매로 몸을 꽁꽁 싸맸다.양혁수는 술을 마셔서 머리가 띵했지만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달콤한 향기를 맡자 오장육부가 맑아지는 듯했으며 꽤 기분이 좋았다.그는 이마를 눌렀고 물었다.“무슨 일이야?”“오빠랑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어요?”시간이 늦었고 양혁수는 그녀를 경계하며 입을 열어 거절하려 했지만 변여름이 말했다.“잠깐만요. 오빠는 내일 떠나잖아요. 오빠랑 얘기 좀 하고 싶어요.”그녀는 품에 안은 베개를 꽉 껴안았고 양혁수는 베개가 눌린 주름을 보며 그녀의 마음속 갈등을 느꼈다.그녀를 달래지 않으면 내일 그는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양혁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옆으로 돌려 변여름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그녀의 눈빛이 반짝였고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양혁수는 가정부에게 야식을 만들어 달라고 했고, 그녀에게 영화를 틀어주었다. 음식은 따로따로 들어왔고 그로 인해 오랫동안 단둘이 있는 시간이 끊어졌다.침대 끝 쪽 카펫에 앉아 그는 변여름과 나란히 앉았다. 앞에는 음식이 가득했고 맞은편에는 변여름이 선택한 추리 영화가 나왔다.처음에는 그는 변여름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 그는 계속 멕하든에 머물며 변여름과 함께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없었다.하지만 영화를 보기 위해 방 안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졸음이 쏟아졌다. 그는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잠시 졸았다.짧은 잠 동안 그는 꿈꾸었고 꿈속에는 피뿐이었다.한을 품고 죽은 사람처럼 한 쌍의 눈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양혁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혼란스러운 어둠 속에서 변여름의 연이은 부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