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검은색 벤틀리 뒷좌석에서.차 안의 어두운 불빛 때문에 남자의 허리춤을 휘감고 있는 여자의 희고 부드러운 다리가 어렴풋이 보였다.간지럽고 야릇한 신음소리가 울려 퍼졌다.안시연의 초점 잃은 눈동자는 젖어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문 채 허리를 튕기면서 눈앞의 사람이 빨리 끝내길 바랐다.남자가 그녀의 허리를 받쳐주곤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줬다.“읍!”안시연이 고통의 신음을 내뱉었고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탄 남자가 몸짓을 멈추었다.“처음이야?”안시연은 몸을 불태우던 열기가 조금 식은 것 같았다. 잇따라 허전한 기분이 들더니 그녀는 저도 모르게 두 다리를 더 단단히 감아 들었고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연정훈의 몸놀림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그는 여자의 눈가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긴장 풀어.”차 안의 온도가 급상승했다.정신은 흐릿했지만 이상하게 감각은 예민했다.안시연은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보더니 어금니를 깨물고는 애써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았다.그녀는 이 상황이 황당하게 느껴지기만 했다.두 달 전, 그녀는 주지혁의 팔짱을 끼고 성진대학교 동문 모임에 참석했었다. 연정훈은 성진대학교의 우수 졸업자 겸 학부 특임 교수로서 그 동문 모임에 참석했는데 두 사람에게 선남선녀라며 칭찬했던 적도 있었다.하지만 지금 주지혁은 바람을 피워 곧 명문 가문 아가씨와 결혼한다.그리고 그녀는 연정훈의 아래에 누워 그가 순결을 앗아가는 걸 지켜보고만 있었다.경인시에서의 연씨 가문은 권력이 대단했다.연정훈은 가문의 후계자가 아니었지만 몇 년 전에 갑자기 교수직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해 지금의 정인 그룹을 맡았다.그리고 지금의 그는 경인에서 가장 핫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사람들 앞에서는 번듯해 보이더니 이런 일을 할 때는 마치 사람이 바뀐 것처럼 안시연을 사정없이 괴롭혔다.안시연은 하마터면 그의 차에서 숨이 멎을 뻔해 그대로 죽는 줄 알았다.일이 끝난 후, 그녀는 옷을 꼭 껴안고는 힘이 풀린 채
안시연은 경찰서에 세 시간의 취조를 받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그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했는데, 이때 주지혁에게서 전화가 왔다.그녀는 어금니를 깨물다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지혁 씨, 우리는 이미 헤어졌어요. 굳이 내 인생을 망칠 생각인가요?”그 8억은 분명 그가 그녀에게 직접 전화해 빼내라고 한 것이다.주지혁은 그녀의 분노를 예상했는지 덤덤하게 말했다.“시연 씨, 나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면 안 되었어요.”“내가 헤어지자는 말을 안 꺼내면 당신이 어떻게 조이현 씨를 안을 수 있겠어요?”안시연이 비꼬며 말했다.주지혁은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이 뻔뻔스럽게 말했다.“나 다음 달에 이현이와 약혼해요. 하지만 난 이현이를 사랑하지 않아요. 시연 씨, 3년만 기다려요. 3년 뒤면 내가 이혼하고 꼭 시연 씨와 결혼할게요.”안시연은 헛웃음이 나왔다.“그럼 3년 동안 나는 어떡하라고요.”“외국으로 유학 보내줄게요.”뻔뻔스럽네!명문 가문 출신인 조이현과 결혼은 해야겠고, 또 그 돈으로 안시연을 ‘내연녀’로 만들게 하다니, 어떻게 이런 염치없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가?안시연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하지만 난 이미 다른 남자와 잤어요.”주지혁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그녀의 말이 믿기지 않는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농담은 하지 마요. 나 화나게 만들면 시연 씨에게 좋을 것 없어요.”안시연이 심호흡하고는 어금니를 깨물었다.“도대체 원하는 게 뭐예요?”“나 찾으러 와요. 내가 시연 씨 외국 보내줄게요.”“꿈 깨요!”주지혁이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시연 씨, 만약 내가 고소를 취하하지 않으면 시연 씨는 돈의 행방을 모두 찾아내는 것으로 결백을 증명해야죠.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인 줄 알아요? 나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8억이면 시연 씨 감옥에서 10년 갇히고도 더 남아요. 시연 씨가 감옥에 들어가면 누가 외할머니를 돌보겠어요?”안시연에게 힘이 남아돌았다면 진작 그에게 소리를 지르며 욕설을 퍼부었을 것이다.‘내가 정말
안시연은 그제야 연정훈 눈빛의 의미를 깨닫고는 얼굴을 붉혔다.그녀는 빠르게 거울 앞을 지나 옷을 벗고는 욕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다 씻고 나서야 갈아입을 옷이 없다는 걸 발견했다.욕실 안에는 남성 가운 하나밖에 없었다.안시연은 어젯밤 연정훈을 떠올렸는데 그가 여색을 밝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어쩌면 이미 떠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그녀는 가운을 입고 문을 열고는 조심스럽게 연정훈을 불러보았다.“연 교수님?”아무런 대답도 없었다.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빠르게 나가 데스크에 전화해 옷을 부탁하려고 했다.침대에 앉아 이제 막 전화하려고 했는데 그녀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정이슬이 그녀에게 보내준 스크린샷이었다.“시연아, 무슨 일이야? 전민준에게 부탁하러 간 거 아니었어? 왜 싸우게 된 거야? 그 새끼가 단톡방에서 너 꽃뱀이라며 욕하고 있어.”안시연이 단톡방을 확인하자 아니나 다를까, 정말 정이슬의 말대로 전민준은 그녀에게 온갖 욕설과 비난을 퍼붓고 있었다. ‘생동감 넘치는’ 거짓말에 사람들은 그에게 위로도 건넸다.[걸레 같은 년은 나도 싫어. 그 와중에 보답 없이 부탁하는 것 좀 봐. 퉤!]안시연은 이 보름 동안 불행의 시간을 보냈다.그녀에게 도움을 베푼 사람이 있기는커녕 지금 단톡방에서 또 이런 비난을 받고 있으니, 그녀는 분노가 끓어올랐고, 또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해 코끝이 찡했다.“옷은 이따가 누가 가져다줄 거야.”맑고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안시연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그제야 연정훈이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다는 걸 발견했다.‘뭐야? 왜 소리를 안 내?’안시연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안에 속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연정훈은 그런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느긋하게 말했다.“난 대답했는데 당신이 못 들은 거야.”그 말인즉 자기 탓이 아니라는 뜻이었다.안시연은 어이가 없었다.자리에서 일어섰지만 발목에서 고통이 몰려와 그녀는 작은 신음을 뱉고 다시 침대에 주저앉게 되었다.연정훈
안시연이 얼어붙었다.잠깐 생각하고서야 그의 뜻을 알아챘다.어제는 그녀의 첫날밤이었고 연정훈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러니 그의 뜻은 전에 남자친구와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는지 물어보는 것이었다.안시연의 얼굴이 점점 빨개졌는데 그녀는 결국 대답하지 못했다.그녀와 잠자리를 가져본 사람은 연정훈밖에 없었다.주지혁이 바람피우기 전 두 사람의 스킨십은 포옹과 키스에 그쳤고, 잠자리는 단 한 번도 가진 적이 없었다.그녀는 경험도 없어 이런 얘기가 꺼내질 때마다 어색한 마음이 들곤 했다.연정훈이 또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그녀는 겨우 대답했다.“습관 되지 않아서 결혼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어요.”사실이었다.연정훈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가 거짓말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너무나도 맑은 눈을 가진 그녀였기 때문이다.“넌 참 착한 여자야.”연정훈이 덤덤하게 뱉은 말에 안시연은 입술을 꽉 물었다.방금까지 단톡방에서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에 받은 불공평한 대우까지 떠오르니 그의 말에 그녀는 왠지 모르게 억울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분명 그녀는 잘못한 게 없는데 보는 사람마다 그녀를 비난하곤 했다.연정훈이 무심하게 말을 뱉고는 약을 다 바른 후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안시연이 서둘러 몸을 뒤로 뺐는데 허벅지 사이로 약간의 고통이 전해졌다.어젯밤의 부기가 아직 가시지 않았다.연정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다리를 모을 때 그녀의 부자연스러운 동작을 포착했다.“다리에도 상처가 있어?”그 얘기를 듣자, 안시연은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들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니요.”그녀의 눈가, 그리고 코끝이 빨개졌다. 손바닥만 한 작은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는데 마치 비바람 속에 피어난 장미꽃 한 송이 같았다.연정훈이 한 발짝 다가서자, 안시연은 몸을 더 뒤로 뺐다.“안시연.”연정훈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그녀는 긴장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뒤에 있는 침대 시트를 꽉 잡았다.연정
안시연은 테이블 위에 누워있었는데 마침 주인을 기다리는 정교한 선물 같았다.연정훈이 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 안고는 달콤한 입술을 맛보면서 다른 한 손으로 여자가 입고 있던 가운의 끈을 풀었다.뜨거운 손바닥이 그녀의 가는 허리에 달라붙어 이리저리 누비고 있었다.사실 아까 병풍을 사이 두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부터 그는 그녀의 가는 허리를 탐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때 안시연은 전민준에게 가식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연정훈은 목덜미를 물어뜯자, 안시연은 온몸에 전율이 퍼지는 것 같았다.점점 거칠어지는 남자의 숨소리와 손길, 그리고 자연스럽게 버클을 푸는 남자를 보며 안시연은 얼굴이 빨개져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어두운 불빛 아래 뭔가가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그녀는 젖은 눈을 크게 뜨고는 빛이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그것의 형체를 똑똑히 보려고 했다.연정훈 손에 낀 반지였다.그것도 약지에 끼어 있었다.순간 뜨겁게 달아오르던 안시연의 몸이 차갑게 식어버렸다.대충 세어보니 연정훈도 거의 서른 되는 나이였다.명문 가문의 후계자라면 이 나이에 진작 결혼했을 텐데 말이다.“집중해.”남자는 여자의 귓불을 깨물며 뜨거운 숨결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녀의 두 다리를 꽉 잡아 벌리려고 하자 안시연이 갑자기 몸을 뒤로 빼며 남자를 밀어냈다.“안 돼요!”연정훈의 새까만 눈동자는 욕망으로 타올랐다.그는 안시연이 그에게 도움을 부탁할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이 조건을 내세울 좋은 타이밍은 아니었다.그는 여자의 발목을 잡았다. 물론 상처 난 부위를 피해 잡았다.그리고 그녀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고는 힘으로 제압했다.안시연이 연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그의 입술을 피했다.연정훈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숨을 헐떡이고는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왜 그래?”“결혼하셨잖아요!”안시연이 당황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주지혁이 바람피워서 마음고생한 그녀는 누구보다도 ‘내연녀’라는 존재를 싫어했다. 그래서 절대 다른 사람의 결혼에 끼어들 생
호텔 로비에서.연정훈이 내려왔을 때는 이미 샤워를 마쳤고 다른 양복으로 갈아입은 후였다.김세연이 잡지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임유정이 앉아있었는데 그녀는 잡지 속의 주얼리를 가리키며 김세연과 얘기를 나눴다.연정훈이 걸어오자, 임유정은 바로 그를 발견했다.“정훈 씨.”그 말에 김세연도 고개를 들었다.그녀는 아들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바로 샤워한 사실을 알아차렸다.하지만 아들이 체면도 지켜줘야 했으니, 김세연은 굳이 까발리지 않았다.“왜 이제야 내려와? 나랑 유정이가 너 거의 한 시간째 기다리고 있어.”연정훈이 덤덤한 얼굴로 소파 위에 앉고는 말했다.“데스크에서 약혼녀가 왔다고 하던데요. 약혼녀와의 첫 만남이니까 제대로 꾸미고 내려와야죠.”김세연이 의아한 얼굴을 보이고는 임유정에게 고개를 돌려다.임유정의 얼굴에 홍조가 띠더니 그녀는 미간을 구기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약혼녀? 데스크가 그래? 난 그렇게 말한 적 없는데?”김세연은 그녀의 연기를 간파하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그녀는 시선을 거두고 연정훈을 보며 말했다.“데스크에서도 너랑 유정이가 선남선녀로 보여서 그렇게 생각했나 보다. 이런데도 기회 안 잡고 뭐 해?”임유정의 얼굴이 더 빨개지더니 그녀는 김세연의 팔을 끌어안고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어머님.”김세연이 그녀의 팔을 툭툭 치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 연정훈을 흘겨봤다.연정훈은 기분이 좋았는데도 임유정이 연기하는 꼴을 참을 수 없었다.그는 김세연을 보며 물었다.“무슨 일로 찾아오셨어요?”“너 집에 안 들어온 지 몇 달이나 됐잖아. 전화해도 계속 건성건성 대답하고. 유정이랑 밥 먹다가 네가 이곳에 묵고 있다는 걸 알았어. 아니면 엄마가 아들 얼굴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즘 바빠서요.”“핑계는.”김세연은 아들 얼굴 본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사적으로 할 얘기가 있어 임유정을 보며 말했다.“오늘 너도 피곤할 텐데 일찍 들어가서 쉬어. 대신 네 엄마에게 안부도 물어
안시연은 바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주지혁에게 준 집 열쇠를 아직 돌려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탁’ 소리와 함께 불이 켜졌다.멀지 않은 곳에 양복과 구두로 번듯하게 차려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다름 아닌 주지혁이었다.남자는 천생 배우라더니 주지혁도 다를 것 없었다.잘생긴 그는 평소 안시연에게 무척 따뜻하게 대해줬다. 하지만 지금 음침한 얼굴빛을 드러내 안시연은 등골이 서늘해졌다.안시연이 그를 쫓아내기도 전에 그가 먼저 물었다.“전민준 만나러 갔어요?”그는 분명 단톡방 내용을 봤을 것이다.안시연이 숨을 길게 내쉬고는 그와 더 얘기하지 않으려 했다.“누굴 만나든 당신과 상관없으니 이제 우리 집에서 나가죠? 열쇠는 여기 두고요.”불같이 화를 내는 안시연을 보더니 주지혁은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자기에게도 이렇게 모질게 구는데 전민준 같은 인간에게 자존심을 굽혔을 리가 있을까?“시연 씨 일이니까 당연히 신경 써야죠.”안시연은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바로 휴대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다.주지혁이 한발 앞서 그녀의 휴대폰을 빼앗아 한쪽을 버리고는 여세를 몰아 그녀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이거 놔요!”안시연이 소리를 질렀다.주지혁은 강세로 그녀를 밀어붙이며 소파에 눕혔다.“출국하는 거, 고민해 봤어요?”안시연이 발버둥 치더니 분노의 목소리로 말했다.“꿈도 꾸지 마요!”주지혁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는데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빨갛게 물든 그녀의 입술을 발견해 이내 안색이 어두워졌다.“다른 사람과 키스했어요?”안시연이 멈칫했다.곧이어 복수했다는 쾌감이 들어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인정했다.“네, 키스했을 뿐만 아니라 잠자리도 가졌죠.”주지혁은 이성의 끈을 놓을 뻔했다.하지만 고집스러운 안시연의 얼굴을 보며 그는 그럴 리가 없다며 자신을 설득했다.‘나의 시연 씨는 절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어.’자신의 추측에 힘을 실으려고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안시연에게 키스를 퍼부었다.안시연은
안시연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고 얼굴에는 잿빛이 감돌았다. 그렇게 하룻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후, 다음 날 다시 출근했다. 더 이상의 선택지가 없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셈이었다. 왜냐하면 외할머니의 수술을 더는 미룰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졸업하자마자 주지혁의 회사에 입사했던 안시연은 주지혁이 정한 ‘사내 연애 금지' 규정을 어기지 않기 위해 주지혁의 제안대로 비밀 연애를 승낙했다. 하지만 안시연은 오로지 자기 능력으로 재무팀 주임 자리를 꿰찼다.다시 회사에 돌아왔더니, 주지혁이 일부러 그녀를 재무팀 주임 자리에서 끌어내렸고 재무팀 보조직으로 발령 냈다.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동료들은 모두 그녀가 주지혁에게 미움을 샀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 때문에 주지혁이 대놓고 괴롭히지는 못하고 몰래 트집을 잡아 끌어내렸을 것이라고 짐작했다.사흘이 지나자, 안시연은 이미 피곤함에 찌들대로 찌들었다.업무에 시달리다가 이제 막 한숨 돌리려던 때, 사무실 입구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안시연은 고개를 들어 힐끔 보고는 이내 외면했다. 다름 아닌 조이현이 회사로 방문한 것이었다.안시연은 기회를 노리다가 화장실에 가는 척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조이현이 그녀를 불러세웠다.“저기요, 이리 좀 와보실래요?”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안시연은 밖에 있던 주지혁의 뒷모습을 한 번 더 확인하고 나서 감정을 억누르며 앞으로 나섰다.“네, 조이현 씨.”그러자 조이현이 다짜고짜 물었다.“혹시 그쪽이 안시연 씨인가요?”“네, 그렇습니다.”조이현은 안시연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짐 챙겨서 나오세요. 주 대표님과 저를 따라 외근 좀 다녀오셔야겠어요.”말을 마친 조이현은 안시연이 거절할 틈을 주지 않고 곧장 사무실을 나섰다.이 상황을 지켜보던 같은 사무실 동료들은 각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안시연은 어쩔 수 없이 따라 나갔다.클라이언트와 통화를 마치고 뒤돌아선 주지혁은 안시연이 조이현을 따라 나
양시연은 고개를 빼꼼 내밀어 연정훈을 쳐다봤다.연정훈의 시선은 자연스레 양시연의 얼굴로 향했다.잠시 짧은 침묵이 이어지고 양시연이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연정훈에게 손을 뻗어 안기며 애교를 부렸다.“빨리 안아줘요.”연정훈도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한숨을 내쉬더니 바로 휠체어에서 양시연을 안아 올렸다.양시연은 연정훈의 목에 팔을 걸고 로맨틱하게 꾸며진 식탁을 보며 연정훈에게 뽀뽀했다.“언제 이렇게 꾸밀 생각을 다 했어요? 너무 예뻐요.”“누가 어젯밤 아들만 보고 있을 때 꿈에서 계획한 거야.”양시연은 뾰로통해진 연정훈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양시연이 식탁 앞에 자리를 잡자 연정훈이 준비한 요리를 하나씩 설명했다. 그리고 그때 나비와 영준이가 고개를 뿅 하고 내밀었다.‘어머!’양시연은 알파카 두 녀석을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고 보기만 해도 마음이 녹는 기분이 들었다.“너희 둘은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아까부터 있었는데 네가 못 본 거야.”양시연은 턱을 괴고 연정훈을 향해 말했다.“정훈 씨만 보느라 알파카가 눈에 들어오겠어요?”그 말에 연정훈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양시연도 기분이 한껏 좋아졌고 연정훈이 건네 온 스테이크를 한입 먹으며 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심으로 리액션을 했다.‘너무 맛있어요.’양시연은 연정훈에게 뽀뽀로 답사하려 했다.그런데 스테이크를 먹게 좋게 썰어주고 이제 비빔밥을 비비던 연정훈이 낮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기분이 나빠서 뽀뽀 서비스는 거절할 거야.”양시연은 웃음이 자꾸 새어 나왔다.“왜 자꾸 아들한테 질투하고 그래요?”연정훈은 고개를 돌려 논리정연하게 말했다.“아들이 눈에서 멀어지면 불안해하고 그렇게 끔찍하게 아끼다가, 이제 커서 아내라도 찾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건 완전 손해잖아.”그 말에 양시연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아내 생기면 난 아예 뒷전일까요?”“그건 모르지.”“그러니까 정훈 씨 말 안 믿을래요.”“나도 아들 노릇 해봐서 아는데 적어도 너보단 잘 알지 않
퇴원 후 본인의 집으로 돌아간다는 의견에는 다들 반박할 수가 없었다.양홍두와 연호민은 불만이 있었지만 결국 팔짱을 척 끼고 고개를 돌렸다.양지원과 양석진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표세연이 가장 활짝 미소를 지었다. 표세연은 두 사람이 양씨 저택으로 갈지도 모른다며 반포기 상태였는데 강남 시티로 간다는 말에 기분이 퍽 좋아졌다. 양씨 저택보다는 강남 시티가 드나들기 더 편했기 때문이었다.‘좋았어.’양시연은 병실 침대에 누워서 지내다가 몸에 곰팡이라도 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쯤에 드디어 병원을 떠나 꿈에 그리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휠체어에 앉아 집 안으로 들어오며 양시연은 집안 공기를 실컷 들이마시었다.태양은 벌써 안방에 안전하게 이송했고 연정훈은 양시연은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했다.본인 침대에 누운 양시연은 몸을 돌려 까만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아이를 바라봤다. 작은 손으로 양시연의 손가락을 겨우 쥐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이상해졌다.“태양아, 여기가 우리 집이야. 기분이 어때?”“아빠가 너에게 엄청 푹신한 침대로 준비해 줬어.”양시연의 말을 알아듣는지는 몰라도 태양은 양시연의 손가락을 꼭 움켜쥔 채로 발을 버둥거렸다.양시연은 그 순간 이 세상 모든 엄마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아기가 뭘 해도 귀엽고, 착하고, 천재처럼 느껴졌다.그래서 고개를 숙여 아이의 이마에 짧게 뽀뽀했다.그때, 연정훈이 밖에서 양시연의 짐을 옮기며 말을 걸었다. 그러나 양시연은 아이에게 정신이 팔려 연정훈이 몇 번이고 질문을 해도 듣지 못했고 참다못한 연정훈이 불만을 담아 테이블을 똑똑 두드렸다.그러자 양시연이 고개를 돌려 연정훈을 바라봤다.연정훈은 잔뜩 삐져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양시연은 그제야 연정훈의 기분을 눈치채고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말했다.“많이 힘들죠? 자, 여기로 와서 좀 쉬어요.”“...”‘내가 여기 있다는 걸 잊지는 않았겠지?’연정훈은 말없이 몸을 돌려 물을 따랐고, 물을 반 컵이나 비우고 다시 짐을 옮겼다.묵묵히 일하
양시연과 연정훈이 너무 시끄럽게 군 건지 태양은 살짝 칭얼거렸고 연정훈의 품에 안겨 병실 안을 빙빙 돌고 나니 다시 얌전해졌다.양시연은 부자를 보며 점차 얼굴을 굳힌 채로 현재 상황에 관해 물었다.연정훈은 최대한 간략해 중점만 골라서 양시연에게 전했다.그리고 양민아라는 이름을 들은 양시연은 너무 화가 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양민아는 정말 뽑아도 뽑아도 자라나는 잡초처럼 끝이 없이 매달리고 들러붙었다.“우리 엄마가 그동안 얼마나 예쁘게 키워줬는데요. 얌전히 있었으면 우리 엄마가 절대 그 사람 섭섭하게 하지 않게 해줬을 거예요!”그해 양지원은 양민아 부모님과의 오랜 정을 보아 양민아의 목숨을 살려줬었다.그런데 양민아는 고마운 줄도 모르고 되려 복수를 하려 했다.“그런 사람한테 감정 낭비할 필요 없어. 이젠 정말 죽은 사람이 될 테니까.”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또 골치 아픈 문제가 떠올랐다.“양민아는 도망을 갔고 찾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탁승호 씨는 어떻게 할 거예요?”“살려주고 싶어?”연정훈의 질문에 양시연은 잠시 멈칫하다가 말했다.“죽어 마땅하지만 여 아주머니의 손자라 여 아주머니가 마음 아파할 가봐 걱정이에요.”연정훈은 양시연이 뭘 걱정하는지 잘 알았다.“도심 한복판에서 폭발 사고가 생겼어. 인명 피해는 없어도 사람들의 이목이 많이 집중된 사고야. 우리가 봐준다고 해도 높은 형벌을 피하지 못할 거야.”‘법대로 하려는 건가?’양시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꿀이 떨어지는 시선으로 태양을 바라보는 연정훈을 보며 점차 의문이 들었다.‘나도 탁승호를 죽이고 싶은 마음인데 정훈 씨는...’양시연은 입술을 매만지다가 하려던 말을 삼켰다.태양이 태어나고 모든 사랑을 태양에게 쏟느라 다른 사람한테는 남겨줄 여유가 없었다.아이한테로 관심이 돌려지고 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연정훈에게 말했다.“태양이가 아빠를 참 많이 좋아해요. 아빠 품에만 안겨 있으면 보채지도 않는 걸 봐요.”연정훈은 다시 아이를 안고 양시연의 옆으
큰비가 지나고 다시 해가 밝았다. 여름 햇볕이 쏟아지자 방안은 찜통이 되었다.조재민은 오전 내내 쉬다가 오후에 집 밖으로 나섰다.‘아직 판 끝난 거 아니야.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그러한 생각을 하며 조재민은 달리는 차 안에서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그런데 그때, 차량이 갑자기 급정거했다.몸은 크게 앞으로 쏠리다가 안전벨트에 의해 다시 돌아왔다.정신을 차리고 보니 갑자기 낯선 차량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조재민은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연정훈이 미치지 않고서 이렇게 밝은 대낮에 움직일 리가 없었다.그러나 누군가 강제로 차량 문을 열고 조재민을 밖으로 끌어냈다. 조재민이 입을 열기도 전에 입가에 가져다 댄 물수건에 의해 조재민은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다른 한편 병원에서.임성원이 직접 연정훈을 찾아왔고 연정훈은 아들을 품에 안은 채로 양시연의 옆 방으로 향했다. 금방 분유를 먹은 아이가 잠을 자지 않고 칭얼거리고 있어 잠든 양시연이 깰까 옆방으로 온 것이었다.임성원의 보고를 듣고 연정훈은 표정 변화 없이 쌀쌀맞게 말했다.“네가 알아서 해. 숨통만 붙어 있으면 되니까.”그 말에 임성원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양민아를 찾지 못했으니 연정훈은 남은 사람을 굴릴 만큼 굴리겠다는 의미였다. 사람을 아직 채 모으지 못했는데 벌써 죽일 수는 없었다.“일주일 내로 양민아 찾아내.”연정훈은 굳은 얼굴로 명령을 내렸다.임성원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지만 감히 토를 달지 못했다. 연정훈은 감정 기복이 큰 사람이 아니었으나 누군가를 죽이려고 마음먹으면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그러니 양민아는 멀지 않아 곧 죽게 될 것이다.임성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병실을 나섰다.연정훈은 아이를 품에 안고 소파에 앉았다. 커튼을 내렸지만 병실 안으로 따뜻한 햇살이 비쳤다.부자는 체격 차이가 컸으며 연정훈의 품에 안긴 아이가 새끼 고양이처럼 느껴질 정도로 작았다.연정훈은 이 아이가 양시연이 목숨을 걸고 낳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너무 마음이
탁호연은 눈앞의 탁승호를 찬찬히 살폈다.비록 멀쩡한 옷차림이었으나 금방 갈아입힌 흔적이 있었고 드러난 얼굴이나 다른 부위에는 상처가 가득했다.친동생이었으니 탁승호의 멍청함을 탓하다가도 마음이 아파졌다.“대체 왜 그렇게 멍청한 짓을 벌인 거야?”탁호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탁승호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 착하고 바르던 탁승호의 눈동자가 텅 비어 있었다.“이건 누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니까 상관하지 말고 돌아가.”탁호연은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다.“어떻게 그 말을 믿을 수 있어? 우리 가문 모든 사람이 양씨 가문에서 먹고 사는데 네가 그런 일을 벌인다면 우리 가족 모두가 망한다는 생각 안 해봤어?”탁승호는 주먹을 꽉 쥐었다.“할머니 때문에 널 보러 온 거야. 그러니까 제발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고 알고 있는 거 모두 말해! 다행히 아가씨 모자가 멀쩡하니 넌 잘하면 살 수 있을 거야!”양시연 모자가 평안하다는 말에 탁승호는 눈시울이 붉어졌다.“내가 제대로 해내지 못해 미안하네.”“멍청한 놈!”탁호연은 화가 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양민아가 시킨 거지? 맞지?”탁승호는 대답이 없었다.“대체 왜? 전에 양씨 가문에서 지낼 때 양민아가 너 한 번이라도 제대로 봐준 적 있어?”“누나는 몰라!”탁승호는 탁호연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더 이상 삶의 미련이 없다는 듯 천장의 불빛을 직시하며 말했다.“모두가 날 무시해도 그 사람은 달랐다고.”“우리 사이엔 아이가 있어. 이번에 복수만 제대로 해주면 다른 곳으로 이주해 다시 시작하기로 했어.”탁호연은 너무 화가 나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너 정말 제정신이니? 그 사람이 뭘 잘못 먹었다고 네 아이를 낳아줘?”그 말에 탁승호의 얼굴이 굳어졌다.“거봐, 누나도 날 무시하잖아.”“...”‘이렇게 멍청한 일만 골라서 하는데 누가 널 인정하겠어?’친동생만 아니었다면 탁호연은 바로 등을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동생을 살리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내려 노력했다.그
반우희는 세 동생과 함께 병실을 찾았다. 승주의 목에는 아직도 붕대가 감겨 있었고 일부러 다리를 절뚝거리는 모습이 꽤 우스꽝스러웠다.네 명이 병실 안으로 들어서자 병실안의 모든 사람이 시선을 돌렸다.양석진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이번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들었으니 다들 감격해했다.표세연은 직접 의자를 당겨와 양시연의 옆자리에 두며 네 명 더러 편히 앉게 했다.양석진은 지금껏 보배처럼 안고 있던 아이를 반우희에게 넘겨줬다.반우희는 숨도 크게 쉬지 못하며 말했다.“세상에...”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너무 작고 소중해요.”반우희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아이의 향기를 맡았고 또 고개를 들어 이렇게 말했다.“정말 아기 향이 느껴지는데요!”그 말에 사람들은 웃음이 터졌다.반우희의 뒤에 서 있던 부승원도 사차원다운 반우희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승주는 고개를 빼꼼 내밀고 아이를 보며 말했다.“아기 정말 대단해요. 머리카락 한 올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태어났잖아요.”그러자 동준이 바로 말을 이었다.“당연하지. 머리카락 몇 올 없으니까.”“...”양시연은 웃음이 터져버렸고 상처가 땅겨 바로 인상을 찌푸렸다.예민하게 발견한 연정훈이 허리를 숙여 양시연에게 물었다.“아파?”양시연은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너무 웃다가 상처가 땅겨서 그래요.”반우희는 바로 고개를 돌려 동준이를 교육했다.“말 함부로 하지마. 금방 태어난 아기는 머리카락이 적어도 곧 자랄 거야.”동준은 발꿈치를 쳐들고 반우희처럼 킁킁거렸다.“정말 아기 향이네요.”“...”아이의 천진난만함에 분위기는 한층 더 화기애애해졌다.기분이 한결 가벼워진 양시연이 반우희를 향해 말했다.“우리 아기가 머리카락 한 올 다치지 않고 태어날 수 있었던 건 모두 우희 씨랑 승주 덕분이에요. 아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먼저 좋은 이모를 알아봤어요.”반우희는 기분이 퍽 좋아져 가슴팍을 툭툭 내리치며 말했다.“이모 대단하지?”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또 승
10시를 넘기자 병실에는 따뜻한 햇살이 비춰왔다.양시연은 밖의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정훈도 눈을 떴다.“더 쉬어야 하지 않겠어요?”고작 몇 시간 눈 붙인 거로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그러나 연정훈은 세수를 마치고 한결 개운해진 얼굴로 양시연에게 다가가 이마에 키스했다.“오후에 시간 봐서 또 눈 붙일게. 아버님도 오셨는데 일단 얼굴 뵙는 게 좋겠어.”양시연의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했지만 연정훈의 말을 듣고 눈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리고 연정훈을 마음 아파하며 이렇게 말했다.“일단 좀 쉬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 시켜서 음식 주문해요. 정훈 씨도 밥 챙겨 먹고 아버님도 드셔야죠.”그 말에 연정훈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어머님이 지금껏 아버님을 굶겼을까 봐?”“정훈 씨 부모님은 생각도 안 해요?”그러자 연정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표세연은 아마도 손자에 정신이 팔려 연재혁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그래. 아들 노릇이나 하지 뭐.’“잠시 나갔다 올 테니 얌전히 기다려.”“그래요...”비록 병원에서 지냈지만 연정훈이 있어 병실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따뜻한 햇살이 느껴져 어제의 악몽 같은 시간은 차츰 잊혀갔다.어젠 정말 악몽 같은 하루였고 오늘은 이제 잠에서 깰 시간이었다.병실을 비웠다가 다시 찾은 연정훈은 양석진과 양지원, 그리고 표세연이 함께 있는 걸 발견했다. 아이는 양석진의 품에 안겨 있었고 연재혁은 보이지 않았다.부모님을 보고 양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조금 버거워 보였다.“움직이지 말고 편하게 누워 있어. 필요한 게 있으면 우리가 해줄게.”그 모습에 표세연이 서둘러 다가가 말했다.양시연은 기운이 없었지만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평소 무표정이던 양석진도 오늘만큼은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그리고 막 태어난 손자를 안고 있는 모습이 아주 조심스러웠다.“자, 시연이한테 보여줘야죠.”양지원이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가 말했다.그
반우희는 얼굴이 뜨거워져 몰래 손등으로 열기를 식혔다. 그리고 부승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반짝거렸다.“오늘따라 변호사님이 다르게 보여요.”“뭐가 다른데?”“칭찬을 너무...”그리고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었다.“솔직하게 하셔서 말이에요!”“...”부승원은 과거와는 달리 부드러운 얼굴로 반우희를 빤히 바라봤다.“우리 변호사는 증거 없이 허튼 말 하지 않아.”‘헤헤.’반우희는 기분이 퍽 좋아져 부승원의 품에서 나오지 않았다.“전에는 왜 그렇게 칭찬을 아꼈어요?”“네가 거만해질까 봐.”“그럼 오늘엔 걱정 안 돼요?”부승원은 잠시 뜸을 들이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두 사람이 이렇게 함께 있는 순간에도 부승원은 반우희의 연락이 끊기던 공포가 불시에 찾아왔고, 반우희가 불길이 가득한 차량에 있었다는 생각만으로 심장이 철렁했다.부승원은 폭탄이 터지는 순간을 직접 목격했고 불길이 한순간에 반우희를 집어삼키는 걸 봤었다.하마터면 소중한 사람을 잃을 뻔했다는 생각에 부승원은 다시 반우희에게 깐깐하게 대할 수 없었다.그리고 전에는 반우희가 마냥 어린 친구로 보여 더 빨리 성장하라고 채찍질을 한 것이었다.그런데 지금 보니 반우희는 이미 성숙하고 용감한 사람이라 자신이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았다.양시연을 구하던 반우희는 양시연이 뭘 걱정하는지 눈치채고 가장 빠르게 상황을 안정시켰다.양시연을 구한 뒤 언제 또 폭발이 생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기사를 포기하지 않고 본인이 직접 키우다시피 한 동생 승주와 함께 불길에 달려들었다.“변호사님.”부승원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반우희는 부승원의 볼을 콕콕 찔렀다.그러자 부승원은 반우희에게 이렇게 말했다.“앞으론 마음대로 거만해도 돼.”“네?”“거만하게 사는 게 뭐 흠도 아니잖아. 적어도 넌 독립적이고 강한 사람이라는 의미니까.”반우희는 이게 꿈속은 아닌지 의심이 되었다.평소의 부승원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을 법한 말이었다.하지만... 부승원의 이런 변화에 반우희는 너무
병원 1층에 있는 편의점에서 반우희는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간식을 먹고 있었다. 부승원은 또 한가득 간식을 들고 반우희에게 걸어갔다.“아까 그렇게 많이 먹고 또 들어가?”옆자리에 앉은 부승원은 반우희의 배에 걸신이라도 든 건 아닌지 의심하는 말투로 말했다.그러자 반우희는 팔짱을 척 끼며 이렇게 말했다.“간식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병실에는 동생들이 있으니까 제대로 대화도 할 수가 없어요.”부승원은 밤새 반우희의 옆을 지켰고 어디에 상처가 났는지 다 외울 지경이었지만 가까이에서 이마 상처를 보니 또 마음이 철렁했다.통화하다가 핸드폰 너머의 반우희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부승원은 정말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그래서 예전과는 달리 다정한 얼굴로 반우희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상처를 살폈다. 그리고 목이 메어 겨우 말을 짜냈다.“많이 아파?”반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이런 상처쯤이야 껌이죠.”방금까지 승주와 투닥거리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반우희는 영웅 놀이에 심취되어 있었다.“정말 바보 같아.”부승원이 고개를 숙여 반우희의 이마에 키스하며 말했다.“어떻게 아프지 않을 수 있겠어?”부승원이 가까이 다가오자 반우희는 깜짝 놀랐다. 그런데 부승원의 눈동자에 자신이 가득한 걸 보며 또 미소를 지었다. 이어 부승원의 품에 꼭 안기며 얼굴을 비볐다.“정말이에요. 하나도 안 아파요.”반우희는 고개를 번쩍 쳐들고 말했다.“뽀뽀 두 번만 더 해주면 정말 다 나을지도 몰라요.”“...”부승원은 고개를 슬쩍 돌리다가 다시 반우희를 바라보더니 정말 반우희의 말대로 이마에 연속 두 번 뽀뽀했다.정말 들어줄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반우희는 당황하다가 또 바보 같은 미소를 지었다.‘역시 불행 끝에 행복이 온다더니. 하나도 틀린 말 아니야.’부승원이 또 질문을 이어갔다.“안 무서웠어?”“무서웠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반우희가 오버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너무 마음이 급해서 시속 200까지 달렸는데 장애물을 요리조리 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