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이 끝났다는 건 더는 그와 만날 수 없다는 의미였다. 단이수는 두 손을 변호사석의 책상에 짚고, 사람들로 가득 찬 법정을 가로질러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지민을 바라보았다. 입술을 열어 저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에 대고 소리치고 싶었다. ‘지민아, 이번이 마지막이야. 마지막으로 인사라도 하자.’ 하지만 목소리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단이수는 결국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토록 사랑했던 법정에서 쓰러졌지만 후회는 없었다. 단 하나, 뼛속 깊이 사랑했던 그녀가 끝까지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는 것만이 유일한 아쉬움이었다.몸을 버텨내지 못한 단이수는 결국 병원에 입원했다. 온몸에 각종 관이 꽂혀 있었지만, 그는 제자들에게 절대 이지민에게 알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학생이 그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세요? 힘들잖아요.” 단이수는 창밖의 희미하게 흐린 하늘을 바라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내가 먼저 지민이를 밀어냈는데, 어떻게 지민이가 먼저 돌아보길 바랄 수 있겠어.”그러나 의사에게 삶이 단 3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통보를 받은 단이수는, 몸에 꽂힌 관을 모두 뽑아냈다. 무너져가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깨끗한 정장을 입고 면도를 했다. 그리고 학생에게 부탁해 차를 몰고 이지민의 작업실로 향했다.며칠 밤을 새워가며 디자인에 몰두하던 이지민은, 정교한 예술 작품을 완성했다. 하지만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너무 소진한 나머지 나무 책상에 엎드린 채 잠들어버렸다.단이수가 들어섰을 때, 작업실에 있던 다른 공예가들은 조용히 자리를 비웠다. 그들이 자리를 비운 건 단이수가 소송에서 승리한 것에 대한 감사와, 그와 이지민을 이어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그러나 그들 모두는 몰랐다. 단이수에겐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다는 것을.햇살이 창문을 통해 스며들어, 이지민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며 그녀를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반면, 그녀와 대비되는 단이수는 어두운 그늘에 서 있었다. 빛을 향해 살아가는 사람과, 어둠 속에 갇힌 사
어두워진 휴대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며, 단이수의 가슴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파왔다. 손을 떨며 입을 틀어막아 보았지만, 멈출 수 없는 피가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눈물도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온몸이 찢어질 듯 아팠다. 암의 고통이 심장을 억누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죽음이 코앞에 다가온 지금, 그가 느끼는 심장의 고통이 오히려 그를 더 무너뜨리고 있었다.의사는 그에게 3일이 남았다고 했다. 하지만 계속 꼽혀 있던 관을 뽑고 마지막으로 이지민을 보기 위해 몸을 무리하게 움직인 탓에, 그의 생명은 이제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그는 죽기 전에 이지민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지민이 자신을 보러 오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기에, 그에게 남은 건 아무런 기대도 없었다. 그래도 마지막 힘을 짜내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이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화면이 흐릿하게 보였지만, 이지민의 번호는 정확히 찾을 수 있었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세 글자를 천천히 눌렀다.[사랑해.]그는 메시지를 제대로 보냈는지도 모른다. 단지 가슴이 갑자기 막히는 듯한 느낌에 숨을 쉴 수 없었고, 목구멍 깊숙이부터 피가 역류해 올라왔다. 순간, 피가 쏟아져 화면을 적셨다.핏물이 번진 휴대폰을 바라보며 그는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의식을 잃은 채 소파에 기대어 쓰러졌다.눈이 흐려지는 마지막 순간, 단이수는 어린 시절의 이지민이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향해 달려오던 모습을 보았다.“이수 오빠, 졸업하고 나면 나랑 결혼해 줄 거지?”단이수는 ‘그래, 졸업하면 너와 결혼할게’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그는 단지 입술을 움직이며 속삭일 뿐이었다. ‘그래... 졸업하면... 널... 꼭...’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환영은 서서히 사라졌다. 환영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그는 허공을 향해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지민아... 이번 생엔 너랑 결혼하지 못했어. 다음 생에 해도...돼?”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텅
이지민은 고개를 숙이고, 숨결마저 사라진 그 야윈 얼굴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 눈물방울들은 미친 듯이 단이수의 얼굴 위로 떨어졌지만 더는 그 어떤 미동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는 죽었다. 이지민이 그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며 내뱉은 독한 말 속에서, 냉정하게 그를 거절하던 차가운 태도 속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그를 잊어버린 슬픔 속에서 죽어갔다. 이지민과의 결혼 약속을 이루지 못한 채, 평생의 후회 속에서 그는 그렇게 숨을 거두었다.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오열하던 이지민은 경찰에 의해 밀려났고, 흰 천이 다시 단이수의 몸 위로 덮였다. 시신이 운구차에 실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이지민은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아 차가워진 몸을 감싸안았다. 눈앞에서 점점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며 그녀는 깨달았다. 단이수는 이제 영원히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아무런 소리도 없이 떠나버린 그의 사랑은 이제 바이러스처럼 이지민의 기억 속을 휘몰아치며 그녀를 잠식해 갔다.“소송만 끝나면 너랑은 아무런 관계도 없을 거야.”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정말로 그녀를 놓아주려 했던 걸까? 아니었다. 그는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가 법정에 섰던 날, 이지민이 느낀 피비린내는 단순한 환기 부족이 아니라, 단이수가 흘린 피의 냄새였다. 그가 야위어갔던 것은 과로 때문이 아니라, 암으로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녀를 키스하며 흘렸던 눈물은 용서를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녀를 두고 떠나야 하는 것이 아쉬워서였다. 그리고 키스 후, 문밖에서 그녀를 기다리던 것도 우연을 가장한 만남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을 뿐이었다.단이수는 순수한 사랑을 간절히 원했던 사람이었다. 이지민은 순수한 사랑을 찾아 헤맸지만, 정작 뒤돌아보지 않았다. 단이수는 언제나 순수한 마음으로 그 자리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사랑해’라는 세 글자를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분명 그녀의 어머니였고, 억울한 사람은 분명 단이수였다. 보상해야 할 사람 역시 그녀였음에도, 과거에 얽매여 단이수에게 다시 기회를 주지 않았다.결국, 너무도 냉정했던 건 그녀 자신이었다.화장터 입구에 앉아 있던 이지민은 곧 후회로 미쳐버릴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를 평생토록 사랑해 준 그 남자는 이제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다시는 그녀를 품에 안고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지민아, 이건 그냥 악몽일 뿐이야. 눈을 뜨면 내가 곁에 있을 거야...’그 생각에 이지민은 가슴이 찢어질 듯 오열했고, 결국 미친 사람처럼 화장터 안에서 단이수의 이름을 부르며 그가 돌아오기를 외쳤다. 그러나 그녀의 외침에 응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단지 주룩주룩 내리는 빗소리만이, 모든 것이 끝났음을 그녀에게 속삭일 뿐이었다. 이지민은 결국 울다가 정신을 잃었고,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유나희의 걱정 어린 얼굴이었다.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단이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금 눈가가 붉어지며 그녀는 물었다.“엄마, 또 엄마가 이수 오빠를 떠나게 한 거죠? 그래서 오빠가 사라진 거죠?”유나희는 이지민의 부은 눈을 보며 함께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지민아, 단이수는... 이미 세상을 떠났어.”이지민은 순간 고개를 홱 돌려 창밖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엄마 때문이에요. 우리를 갈라놓은 것도, 오빠를 죽게 만든 것도...”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진짜 죄인은 어머니가 아니라 자신이라는 것을.유나희는 이미 그녀에게 돌아가라고 권했지만 끝까지 돌아서지 않은 건 그녀 자신이었고, 결국 그로 인해 단이수의 몸은 버텨내지 못했다.모든 책임은 그녀에게 있었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었던 그녀는 책임을 어머니에게 떠넘겼다. 유나희는 그런 그녀의 비난을 받아들이며 계속해서 말했다.“맞아, 내 잘못이야. 내가 그 아이를 죽인 거야. 하지만 지민아, 지금 이수에게 서명해 줄 사람이 없잖니. 정신
이하준은 원래 ‘꼬마 대장’ 같은 성격이었다. 남을 괴롭히는 것도 좋아했지만, 이승하에게 혼난 이후로 성격이 완전히 변해버렸다.그렇다고 이승하와 완전히 똑같아진 것은 아니었으나, 어린 나이에도 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또 말수가 적어서, 서유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묵묵히 듣기만 할 뿐, 대답도 하지 않고 반박도 하지 않았다.서유는 아이가 자라면서 점점 더 내성적으로 변할까 걱정되어 심리 상담사를 불렀다.“세 살 전에는 정말 활발했어요. 가끔 장난도 치고 그랬는데, 지금은 웃는 얼굴조차 볼 수가 없어요.”그녀는 혹시 2년 전 이승하가 아이를 혼낸 것이 심각한 심리적 상처를 준 게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하지만 이하준이 강자를 동경하는 성향을 보면, 심리적 트라우마를 가질 만한 아이는 아닌 듯했다. 그는 오직 강자를 존경하고 따르나, 약자에게는 비웃음만 보낸다. 아이의 기본 상황을 들은 심리 상담사 한은석은 서유에게 물었다.“평소에 아이가 관심을 보이는 것은 무엇입니까?”서유는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그림책이나 퍼즐, 암호 해제 장난감, 그리고 과학이나 의학 같은 것에 관심이 많아요. 하지만 자기가 궁금했던 걸 알게 되면 금세 흥미를 잃어요. 말하자면 ‘삼분 열정’ 정도랄까요.”한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한 듯 말했다.“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먼저 직접 만나보고 이야기 나눠보며, 그 아이가 단순히 지능이 뛰어난 건지, 아니면 심리적 문제가 있는 건지 판단해 보죠.”서유는 손을 들어 성을 가리키며 말했다.“보통 서재에 있어요. 카펫 위에 앉아 벽에 기대어 하루 종일 책을 읽곤 하죠.”한은석은 서유와 함께 성안으로 들어가며 살짝 놀란 듯 고개를 돌렸다.“다섯 살짜리 아이가 벌써 모든 글자를 읽을 수 있나요?”서유는 어렸을 때 언어 때문에 고생한 경험이 있어 아이의 언어 교육에 특히 신경을 썼다.“국제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가정교사를 불러서 글자를 가르쳤어요. 신기한 점은 책에 있는 글자를 한 번 보면
한은석은 자폐 아동을 많이 상담해 왔기에 그들이 대개 말을 잘 잇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하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말을 이어갔다.“네 어머니께서 네가 자폐가 아닐까 걱정해서 내게 너의 심리를 상담해 보라고 하셨어. 하지만 내가 보기엔 넌 자폐가 아니라, 오히려 지능이 너무 높아서 그런 것 같아. 얼마나 높은지는 테스트를 해봐야 알겠는데, 협조해 줄 수 있겠니?”한은석은 이하준을 완전히 어른 대하듯이 말했다. 그제야 이하준은 그녀를 한 번 쳐다보았다. ‘테스트라니, 어떻게 하는 걸까?’라는 듯이. 이하준의 눈에 담긴 갈망 어린 호기심을 본 한은석은 확신했다. 이 아이는 지능이 너무 뛰어난 나머지 강자에게 끌리는 심리가 생긴 것이다.이런 아이들은 스스로 학습 방법을 찾기 어려워 책이나 강자에게서 무작위로 배워나간다. 혼자만의 고립된 세계 속에서 몰입하며 자신을 성장시키는 것이다.한은석은 확신이 들자 스마트폰을 꺼내 IQ 테스트 문제를 열어 이하준 앞에 놓았다.“여기 꽤 어려운 문제들이 있어. 많은 어른들도 풀지 못하는 문제들인데, 너는 할 수 있을까?”이하준은 원래 별로 흥미가 없었다. 하지만 ‘어른들도 못 푸는 문제’라는 말에 눈길을 스마트폰으로 돌렸다.첫 번째 문제를 본 순간, 이하준은 참지 못하고 작은 손을 뻗어 한은석의 스마트폰을 가져갔다. 곧바로 고개를 숙인 채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한은석은 이하준을 방해하지 않고 아이의 맞은편에 앉아 서재에 놓인 책과 첨단 기술 모델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얼마나 지났을까? 한은석은 스마트폰이 자신의 팔에 톡톡 닿는 느낌을 받았다. 고개를 돌리자, 눈앞에는 고개를 치켜든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하준이 있었다.“테스트를 통과한 것 같네?”이하준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한은석은 개의치 않고 스마트폰을 받아들었다. 화면을 확인하니 이하준이 IQ 테스트를 통과한 것이 보였다. 정확한 결과를 확인하려면 전문 기관의 정밀 검사가 필요했지만, 이미 그의 지능이 범상치 않다는 것은 확실했
서유는 더 이상 남편을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마침 그때 정가혜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마침 대화 상대가 없던 서유는 그녀를 집으로 초대해 오후 차 한 잔을 함께하기로 했다.잠시 후, 정가혜가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그들은 바로 블루리도의 후정으로 향했고, 멀리서부터 서유가 파라솔 아래에 앉아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디자인 도면을 살피는 모습이 보였다.아이를 낳고도 서유는 여전히 날씬하고 우아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피부도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뒷모습만 보면 스무 살 아가씨와 다를 바 없었다.평생을 아름답게 살아온 서유를 본 정가혜는 마치 가을의 산들바람을 맞는 듯한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서유야, 우리 작은 천재는 어디 갔어? 얼른 나와서 우리 애들이 예배라도 드리게 해줘!”정가혜의 목소리를 듣고 서유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은 정가혜의 화사한 얼굴에서 두 아이로 옮겨갔다. 남자아이는 하얀 셔츠에 체크무늬 조끼를 입고, 뒤로 깔끔하게 넘긴 머리카락 아래 하얗고 깨끗한 얼굴이 드러나 있었다. 외모와 옷차림 모두가 마치 이연석의 어린 시절을 보는 듯했다.반면 여자아이는 블링블링한 공주 드레스에 머리를 동그랗게 묶고, 머리 위에 은빛 왕관까지 얹고 있었다. 마치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작은 공주 같아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늘 무표정인 자신의 아들과는 달리 정가혜의 아이들은 볼 때마다 사랑스러워서 서유는 설계 도면 따위는 내팽개치고 벌떡 일어나 두 팔을 활짝 벌렸다.“하율아, 서아야, 이리 와! 큰엄마가 안아줄게!” 두 아이는 큰엄마를 보자마자 정가혜의 손을 뿌리치고 다리 힘껏 달려왔다. 특히 이하율은 마치 풍화륜을 단 듯 쏜살같이 달려와 서유의 품에 뛰어들었다.“큰엄마!”이하율은 새로 받은 장난감 자동차를 서유에게 자랑하며 말했다.“이거 우리 아빠가 새로 사준 거예요! 누나도 없는 건데, 멋지죠?”서유는 아이를 꼭 안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네 아빠가 사준 거라면 당연히 멋지
서유의 하소연을 듣고, 정가혜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눈썹을 찡그렸다.“아주버님은 꽤 똑똑해 보이던데. 머리도 좋을 테니 그분이 아이를 이끌면 되잖아.”그 말에 서유는 어쩐지 쑥스러워 고개를 숙였다.“그이야 회의 끝나면 돌아와서 신경 쓰겠다고는 했지만, 몇 년째 마음을 아이에게 쏟은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아마 크게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아.”정가혜는 서유의 셔츠 아래로 드러난 목과 어깨에 남은 짙은 흔적들을 보고 굳이 묻지 않아도 이승하의 관심이 어디에 쏠려 있는지 알 수 있었다.“참 대단하다. 하루하루 어떻게 그렇게 정력이 넘치지?”정가혜가 최근 이연석과 시간을 많이 보내면서 이런 농담을 서슴없이 하게 된 덕에, 서유는 더더욱 얼굴이 붉어졌다.“나만 붙잡고 있는 건 아니야. 회사 일도 어느 정도 신경을 쓰고 있어.”정가혜는 그녀를 힐끔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결정이 어려운 일이나 재무 회의 같은 걸 제외하고는 거의 집에만 있던데?”서유는 얼굴의 절반을 손으로 가리며 말했다.“아 가혜야, 넌 나를 도우러 온 거야? 아니면 날 놀리러 온 거야? 제발 다른 이야기 좀 하자.”정가혜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난 너를 도울 방법이 없어. 내 머리로는 오뚝이와 깡순이를 간신히 상대할 정도지, 네 천재 아들은 도저히 감당이 안 돼.”정가혜가 숙모로서 이하준의 신임을 얻은 건 그가 어릴 적 그녀의 모유를 먹은 적이 있어서다. 그렇지 않았다면 성격 까칠한 이하준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그래도 걱정하지 마. 이 대표가 있잖아. 하준이가 잘못된 길로 갈 리 없을 거야.”사실 이승하가 아이에게 무심했던 건, 머릿속에 심어진 칩 때문에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래서 온 신경을 서유에게 쏟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서유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그이가 아이를 가르친다 해도 선생님 몇 명을 붙여서 공부만 시키고 끝나버려. 정작 아이와 소통은 전혀 하지 않아.”정가혜는 웃음을 터뜨
그가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입을 열었다.“난 죽는 게 두려운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데 당신을 만난 후부터 죽는 게 그렇게 겁이 나더라.”죽는 게 두려웠기 때문에 전 서계를 돌아다니며 의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원하는 결과는 끝내 얻지 못하였고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기만 했다. 겁이 난 서유는 그를 꼭 껴안았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당신한테는 내가 있고 우리 하준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절대 죽으면 안 돼요. 당신이 죽으면 우리는 어떡하라고요?”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미 5년을 버텨온 그는 점점 더 통증이 심해졌고 하느님이 조금씩 조금씩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통이 전해지는 횟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통증은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칩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것 같았다. 다만 떠나기 전에 모든 일을 다 마치고 가야 하는데...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품 안에 있는 여인이 가장 걱정되었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깊이 파고들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만큼 뜨겁고 짜릿한 느낌, 슬픈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은 뜨겁게 몸을 섞으며 하나가 되었다. 그녀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쯤, 두 사람의 아찔한 행위가 끝이 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소중한 물건을 끌어안듯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유람선 안으로 들어온 희미한 달빛을 빌려 그가 세월의 흔적도 없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다음 생에도 당신이 내 여자였으면 좋겠는데. 당신의 다음 생은 송사월한테 주기로 약속했었나?”아직 잠들지 않은 서유가 그의 가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번 생에 당신이 나보다 먼저 가면 나 절대 당신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다음 생에 당신 안 만날 거라고요.”그가 슬픈 표정을
그 당시 풋풋한 어린 소녀였던 연이는 심우주가 자신과 같은 학교에 간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교과서는 정말 내가 가져오지 않았어. 아마도 애들이 가져간 것 같은데 내일 학교에 가면 돌려주라고 할게.”연이도 하준이와 마찬가지로 학교에서는 짱이었다. 친구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지만 너무 인기가 많아서 여자아이들이 그녀를 짱으로 받들고 남자아이들도 하루 종일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꼬리를 흔들었다.반면, 심우주는 착실히 공부만 했고 가끔 연이의 괴롭힘에 그는 반격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였기 때문에 심우주는 그런 그녀가 얄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가 제멋대로 하는 걸 사랑스럽게 지켜보았았다. 다들 오냐오냐하니까 연이는 학교에서도 늘 제멋대로였다. 그러나 그 당시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던 심우주는 연이의 그런 모습에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다. 잠시 후, 어른들에게 차례로 작별 인사를 마친 이하준이 차에 올라탔다. 늘 차갑기만 하던 아이가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차에서 내려와 서유를 덥석 끌어안았다.“엄마, 몸 잘 챙겨요.”갑작스러운 아이의 행동에 서유는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하준아, 엄마 아빠는 집에서 우리 하준이 기다리고 있을게.”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손을 풀고 옆에 있던 이승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아빠, 제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아빠도 절 이길 수 없을 거예요.”입꼬리를 살짝 올리던 그가 손을 뻗어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남의 칼에 찔리기 쉬운 법이야. 자세를 낮추는 법을 배우거라.”아빠의 충고를 아이는 가슴 깊이 새겼다.“네, 그렇게 할게요.”이내 그가 허리춤에서 ‘S'라고 새겨진 금빛 칼을 꺼내 아이한테 건네주었다. “돌잡이 때 네가 잡은 칼이야. 이제는 네가 갖고 있어.”전에 소지섭한테서 아빠의 이야기를 들은
서유는 어쩔 수 없이 의사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문밖을 지키고 있던 소지섭은 의사가 떠나는 것을 보고 급히 물었다.“방금 연이랑 하준이가 와서 묻더라고요. 대표님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서유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이승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감기라고 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고개를 끄덕이던 소지섭은 자리를 떴고 그녀 혼자 덩그러니 문밖에 서 있었다. 그가 얼마나 더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을지...어느 순간 갑자기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가 옆에 있어도 그녀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하준이 유학길에 오른 그날, 이씨 가문과 상씨 가문 사람들이 그를 배웅하러 왔다. 마치 하준이의 돌잡이 때처럼 정원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어른들의 모습이 이미 많이 변했고 아이들도 훌쩍 자란 상태였다. 서유와 이승하의 우월한 유전자만 이어받은 이하준은 10살밖에 안 된 나이지만 정교한 이목구비에 곧은 몸매를 가지고 있어 보기만 해도 귀티가 철철 흘러넘쳤다. 게다가 180 가까이 되는 아이큐를 가지고 있어 누가 봐도 엄친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특히 이연석은 흰색 스웨터 차림에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한 손에 가방을 든 채로 계단을 내려오는 이하준의 모습을 보고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았다. 그는 옆에서 초등학생 교복을 입은 채 케이크를 뺏어 먹고 있는 오뚝이와 깡순이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똑같은 10살인데 이게 뭐냐? 누구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명문 학교에 입학하고 누구는 아직도 초등학교나 다니고 있으니.”그 말에 정가혜가 그를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는 거죠. 내가 몇 번을 말해요. 자꾸만 애들 다그치지 말라고 했죠.”이를 갈던 그가 두 아이 앞으로 다가가 케이크를 낚아채 입에 쑤셔 넣었다.“너희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로 일찍 진학 못 하면 아빠 진짜 가만 안 둬.”두 아이는
“승하 씨...”깜짝 놀란 그녀는 미친 듯이 핸드폰을 찾았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어떻게 의사를 찾아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애틋한 그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긴장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고 바닥을 짚고 있던 손에도 덩달아 힘이 풀렸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고 입술이 파르르 떨려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당신... 왜... 그래요?”지난 10년 동안, 이승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지내온 그녀는 거의 울어본 적이 없다. 잠깐 정신을 잃은 모습에도 이렇게 펑펑 우는 것을 보니 그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애써 두통을 참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던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녀를 품에 안고 소파에 쓰러지더니 세월조차 비껴간 잘생긴 얼굴을 살짝 치켜들었다.“깊게 잠이 든 것뿐이야. 왜 이렇게 겁을 먹어?”말을 하면서 손을 뻗어 눈물로 뒤덮인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부러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당신 요즘 살이 좀 오른 것 같은데.”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그녀는 눈물이 글썽한 두 눈을 들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도 그렇죠. 어떻게 사람이 깨우는데 아무 반응이 없어요?”맑고 깨끗한 그녀의 눈을 그는 차마 마주칠 수가 없었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떼어 그녀의 등을 눌러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얹었다. “바보,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야. 피곤할 때는 꿈을 꾸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거든.”그 말을 그녀는 당연히 믿지 못하였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왜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있었다.단단한 가슴 위에 얹혀있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미안해요. 당신 머릿속에 있는 칩을 꺼낼 의사를 찾아야 하는데...”겁이 났다. 이승하를 잃을까 봐 두려웠다. 자신을 목숨보다 더
지난주, 토론 대회에 나간다고 말하는 연이를 향해 이하준은 엄청 비꼬았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연이는 씩씩거리며 이하준과 내기를 했고 뜻밖에도 그녀가 이기게 될 줄은 몰랐다.눈꺼풀을 내리깔던 하준이가 손을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평소에 그렇게 재잘재잘하더니 실력 한번 제대로 발휘했네. 축하해.”진심으로 축하하는 것 같지 않고 그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아무튼 이번에는 네가 졌어. 그러니까 잊지 말고 돈 입금해.”이하준은 천천히 냅킨을 깔면서 담담하게 말했다.“밥 먹고 나서 줄게. 근데 누나...”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기세등등하게 연이를 쳐다보았다.“누나 올해 열일곱이지? 아직까지 고등학교에 다니고. 수시 자격도 따내지 못했으니 수능 봐서 어떤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지 정말 걱정이다.”그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 명문대에 합격했다고 잘난 척하지 마. 내년에 나도 그 학교에 합격할지 모르니까.”이하준은 칼과 포크를 집어 들고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었다.“그럼 내 후배가 되는 건가?”화가 난 연이가 반격할 겨를도 없이 그가 또 빈정거렸다.“내년에 학교에서 만나. 만나면 나한테 선배라고 부르는 거 잊지 말고.”“아악. 열받아 죽겠네.”연이가 가슴을 내리치더니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서유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댄 채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이모, 하준이 쟤 정말 얄미워죽겠어요. 빨리 학교에 보내버려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요.”서유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막상 가고 나면 또 보고 싶을걸?”“아니요.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입을 삐죽거리면서 시선은 이하준의 얼굴로 향해 있었다. 솔직히 이 녀석과 10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정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얄미운 동생인 건 사실이다.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웃음을 짓던 서유가 포크로 과일을 집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연이는 과일을 받아먹으면서 이하준을 향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회사에서 돌아온 서유는 정원에서 칼자루를 쥔 채 아이한테 칼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다가가 말을 건네려고 했지만 아름다운 광경에 발걸음을 멈추고는 문 옆에 살짝 기대어 잔디밭의 크고 작은 그림자를 멀리서 바라보았다. 아이한테 관심이 없었던 남자는 아이를 뛰어난 인재로 키우기 위해 온갖 정성을 쏟았다. 시간이 흘러 아이는 아빠를 존경했고 아빠를 많이 따랐다. 이승하는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빠였다. 그가 있었기 때문에 이 집이 따뜻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좋은 남자가 그녀와 아이의 옆에서 평생을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랐다. 잠시 후,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날카롭던 시선도 이젠 나이가 드니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세월마저 그의 얼굴을 그냥 스쳐 지나간 듯 그는 처음 봤을 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검은색 셔츠와 긴 바지 사이에 흰색 허리띠를 두르고 있는 그의 몸이 석양 아래에 우뚝 서 있었고 그가 양쪽 허리춤에 손을 얹고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머리 뒤로 잘 빗겨져 있었고 약간 고개를 돌리니 머리카락이 왼쪽으로 살짝 흔들렸다. 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서유한테 가까이 오라고 했다. 옅은 미소를 짓던 그녀는 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소지섭을 지나치다가 손에 있던 손수건을 챙겨 앞으로 다가갔다. “여보, 허리 숙여요.”그가 허리를 약간 숙이자 서유는 발끝은 세우고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주었다.“저녁에 뭐 먹고 싶어요?”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잡자 가녀린 그녀가 그의 품에 쏙 들어왔다. “우리 서 대표님이 직접 요리를 하실 건가?”그의 장난에도 그녀는 화를 내지 않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그렇게 좀 부르지 말아요.”지난 5년 동안 서유도 많이 바삐 보냈고 자신의 건축 사무소까지 차렸다. 그러나 프로젝트를 많이 맡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남편과 아이를 돌봤다. 하지만 이승하는
그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칼, 총, 레이싱카, 배, 비행기 이것들 중에서 뭐부터 배우고 싶어?”하준이가 초롱초롱한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아빠, 저한테 가르쳐주시려고요?”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던 남자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이론 지식은 이미 거의 다 배웠으니 이제부터는 호신술을 가르쳐 줄 생각이야. 나중에 날 대신해 네가 엄마를 지켜줘야 하니까.”아이는 머리를 살짝 기울인 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아빠가 옆에 있는데 왜 제가 엄마를 지켜줘야 해요?”벌써 두통 증상이 심해진 그는 머릿속에 있는 칩에 대해 아이한테 얘기하지 않았다.“당분간은 로봇 프로젝트 때문에 많이 바쁠 거야. 자주 자리를 비우게 될 테니까 내가 없는 동안에는 네가 엄마를 지켜줘야 해.”요즘 아빠가 로봇 개발 중인 걸 알고 있던 이하준은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열심히 배워서 엄마를 지켜줄 거예요.”아이의 약속을 듣고 이승하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일단 총 쏘는 법부터 가르쳐줄게.”하준이도 냉큼 그의 뒤를 따라 일어섰다.“세 살 때, 총을 가지고 놀다가 아빠한테 호되게 맞았던 적이 있었는데. 다시는 총을 못 잡게 할 줄 알았어요.”아이가 그 어릴 때의 일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는 네가 너무 어렸으니까 총을 가지고 놀지 못하게 한 거야.”“저 이제 겨우 10살인데요. 지금은 총 가지고 노는 거 안심하세요?”발걸음을 멈추던 그가 뒤돌아서 어느새 허리 높이까지 키가 훌쩍 큰 아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곧 공부하러 해외로 가잖아. 돌아와서 배우면 그땐 이미 늦었어.”천재가 맞는 건지 하준이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학교의 입학 통지서를 받게 되었고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이국땅에서 다른 천재 아이들과 함께 공부를 하게 되었다. 서재로 들어간 그는 10년 동안 사용하지 않은 총을 꺼내 하준이를 데리고 정원으로 향했다.한편, 이승하가 아이에게 사격을 가르치려 한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이연석은 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아닙니다. 그냥 기부하려던 거예요.”하지만 전문가는 그런 돈을 받을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의 고지식한 태도에 이연석은 화가 나서 책상을 치며 일어섰다.“그러니까 머리카락 한 올 없이 다 빠졌지! 다 선생님 고지식함이 다 빨아먹은 거예요!”전문가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같은 책상을 치며 맞섰다.“도련님, 제 지능을 모욕하는 건 참겠는데, 머리카락을 모욕하는 건 안 됩니다!”“그래요? 그럼 선생님 머리카락을 모욕하죠!”두 사람이 거의 싸울 뻔한 순간, 이하율 남매가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아빠, 우리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너무 배고파요...”이연석은 남매에게 화살을 돌리며 소리쳤다.“하루 종일 먹을 것만 찾고! 하준이처럼 간식 줄이고 책 좀 보란 말이야!”이하율 남매는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아빠, 우린 아직 글도 다 못 읽어요. 책 보는 것도 재미없어요. 우리에겐 간식이 제일 재미있어요.”옆에 있던 전문가는 그 말을 듣고 자신감이 생겼다.“보세요. 이 두 아이가 어디 130과 148의 IQ를 가진 것처럼 보이시나요?”이연석은 할 말을 잃었다. 화가 난 그는 두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이 고집불통 대머리야! 이런 허접한 기관은 확 망해버려!”전문가는 속으로 생각했다.‘지금까지 수많은 IQ 테스트를 해봤지만, 이런 사람은 처음이야. 이럴 수가!’A시로 돌아가기 전, 이연석은 테스트 결과를 컴퓨터로 수정하고 새로 출력한 뒤 두 아이를 데리고 이승하를 찾아갔다.“형, 봐봐. 우리 애들도 IQ가 엄청 높아! 특히 내 아들, 148이야! 나중에 mensa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그 말을 듣던 이승하는 고개도 들지 않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이하율에게 물었다.“오뚝아, 68 곱하기 42는 얼마야?”감자칩을 먹으며 손에 기름이 잔뜩 묻은 이하율은 손가락을 세며 계산하기 시작했다.3분 뒤, 그는 대답했다.“110!”순간 이연석은 참지 못하고 이하율을 향해 발길질을 하
흐트러진 커튼 너머로 달빛이 스며드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서유는 무의식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해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크게 외쳤다.“여보, 성재 씨의 보디가드가 그러던데 그 사람이 망원경으로 우리 집을 자주 훔쳐본대요. 제발 여기선 그러지 마요.”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던 이승하는 짙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는 맞은편 별장을 한 번 흘겨보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 리모컨을 집어 들고 불을 꺼버렸다.“걱정 마, 안 보여.”“하지만...”서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자 팔걸이에 손을 짚은 이승하가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리고 늑대처럼 그녀의 혀끝을 휘감아 그녀가 하려던 말을 그대로 삼켜버렸다.처음에는 저항하던 서유도 이승하가 한쪽 무릎을 꿇는 순간, 온몸이 떨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두 손톱으로 의자 등받이를 필사적으로 긁을 뿐이었다.예전에는 체력에만 의지하던 이승하가 오늘은 어쩐 일인지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가 꺼낸 물건들은 서유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제발 그런 거 쓰지 마요!”서유가 간절히 부탁했지만, 남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낮고 매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여보, 참지 말고 소리 내봐.”서유는 도저히 소리를 낼 수가 없어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런 그녀를 본 이승하는 도구와 체력을 총동원해 강도를 높였다.“난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만약 방음이 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커튼이 창문을 가리지 않았다면, 서유는 지금 부끄러움에 혀를 깨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더욱 끔찍한 것은 그녀가 꼼짝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저 이승하에게 온전히 ‘당하기’만 했다.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두 번, 세 번...기진맥진한 서유는 뒤돌아 닫혀 있는 방문을 바라보며 간절히 바랐다.‘제발, 하준이가 문을 두드리며 배가 아프다고, 병원에 같이 가달라고 했으면...’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이하준은 수많은 문제 속에 갇혀 있었다.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