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훈의 프러포즈는 온라인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소란스러운 동시에 또 다른 사건이 터졌다.돌아간 기자가 JM 건물 아래에서 찍은 영상을 전부 인터넷에 올렸고 동시에 주해찬으로부터 받은 진시연과의 채팅 기록과 진시연이 주해찬을 찾아와 손을 잡자고 제안하는 녹취록도 있었다.영상과 채팅 기록이 공개되자마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고 여자에게 약을 먹이는 나쁜 행위에 원래도 치를 떨던 네티즌들은 진씨 가문 양딸이 친딸에게 그러한 짓을 했다는 것에 분노했다.진시연은 머리 검은 짐승이라며 양심이 없다고 욕하는 댓글을 보며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대체 왜?대체 왜 강하리는 프러포즈로 화제가 되는데 그녀는 욕이나 먹고 있는 걸까.대체 왜!진시연의 눈가에 잘 숨겨져 있던 증오가 터져 나왔다.구승훈이 정말 강하리와 주해찬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리가 없었다....가을바람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고 리시안셔스도 바람과 함께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바스락거리는 단풍잎 사이로 한 남자가 꽃다발을 손에 들고 시선을 내린 채 길거리에 서 있었다.그가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려고 하는데 갑자기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고 여전히 가상 번호였다.구승훈의 얼굴에 가득했던 미소는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내용을 클릭하니 안에는 강하리가 주해찬에게 나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담긴 영상이 있었다.그 아래에는 한 마디가 덧붙여져 있었다.[이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오는 걸 원하지 않는다면 강하리와 결혼하지 마.]휴대폰을 쥔 구승훈의 손 마디가 하얗게 질렸고 짙고 검은 눈동자에는 무거운 분노와... 살기가 일렁거렸다.그는 나문빈에게 번호를 보낸 뒤 강하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일이 생겨서 혼인신고는 다음에 하자.]그렇게 말한 뒤 그는 포장된 꽃을 차에 던지고 시동을 걸어 진씨 가문을 향해 차를 몰았다.구승훈이 찾아오자 진시연의 눈에 놀랍고도 기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구승훈 씨, 무슨 일이에요?”구승훈은 굳은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와 목을 움켜쥐었다.“진시연,
진시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뭐라고요?”구승훈이 비웃었다.“진시연, 계속 그런 식으로 해. 빈털터리로 만들어 줄 테니까.”말을 마친 구승훈은 뒤돌아 떠났고 다시 JM 건물로 왔지만 휴대폰을 손에 쥔 채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휴대폰에는 강하리가 보낸 답장이 와 있었다.[알았어, 기다릴게.]구승훈은 피식 웃으며 갑자기 주먹으로 차를 내리쳤고 차의 경보음이 순식간에 도심 전체로 울려 퍼졌다.구승재는 정안 그룹 건물에서 황급히 내려와 구승훈의 곁에 다가간 뒤 그의 손에 주사를 건넸고 차에 돌아와 주사를 놓으며 구승훈은 미간을 꾹 눌렀다.“형수님이랑 혼인신고 하러 간다며? 왜 안 갔어?”구승훈은 묵묵부답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우선 영상을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낸 다음 마음 놓고 강하리와 혼인신고를 할 수 있었다.그 영상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았다.당시 강하리는 제정신이 아니었고 설령 그녀가 주해찬을 정말 사랑한다고 해도 그는 그녀를 곁에 두고 싶었다.하지만 강하리의 평판은 고려해야 했기에 남자의 눈이 섬뜩하게 번뜩였다.잠시 후 그는 나문빈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휴대폰 해킹 좀 해줘요.”강하리는 온라인에서 구승훈의 프러포즈를 본 순간부터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회사 직원들도 그녀를 보고 농담을 건네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구승훈이 보낸 메시지를 받고 나서야 입가에 번지던 미소가 조금 옅어졌다.강하리는 한참 동안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구승훈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기다리겠다고 했지만 문득 그를 기다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적어도 오늘은 아니었다.강하리는 휴대폰을 옆에 내려놓고 고개를 숙여 일을 처리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녀는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어 도대체 혼인신고보다 더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끝내 전화를 걸지는 못했다.아래층에 있는 남자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고 강하리는 씁쓸한 웃음을 터뜨리며 가슴이 답답했다.남자는 아래층에 있으면서 그녀
구승훈은 눈앞에 나타난 강하리를 바라보며 문득 웃음을 참지 못했다.그가 밤낮으로 결혼하길 고대하던 여자가 지금은 마치 그에게 최후통첩을 내리는 것 같았다.감히 거절하기만 하면 평생 후회하게 만들겠다는 듯이.강하리는 책상 뒤에 앉아 미소를 짓는 남자를 바라보면서 가슴이 아릿할 정도로 화가 나서 무심코 책상 위에 있던 물건을 집어 들어 구승훈에게 내리쳤다.구승훈은 깜짝 놀라 황급히 피했고 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강하리의 눈은 이미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날 이렇게 가지고 노는 게 재밌어?”구승훈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굳어지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미안해.”그가 손을 뻗어 강하리를 끌어당기려고 했지만 강하리는 한 발짝 물러섰다.자신과 구승훈 사이엔 너무도 많은 우여곡절과 아쉬움이 있었기에 하루빨리 그들 관계를 확정 짓고 남은 날들은 그저 아름답게만 보내고 싶었는데 늘 일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강하리가 피식 웃었다.“이젠 강요 안 해.”말을 마친 그녀가 돌아서서 문밖으로 걸어 나가자 구승훈은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며 서둘러 다가가 강하리의 손을 잡아끌었다.“가지 마, 내가 설명할게.” 남자는 무력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고 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아니에요. 강요하지 않을게요, 구 대표님. 억지로 가져봤자 좋을 것 없으니까.”구승훈의 입꼬리가 파들 떨리며 몸을 굽혀 그녀를 안고 사무실 의자에 앉힌 뒤 두 손으로 의자 손잡이를 잡아 품 안에 가두었다.“일부러 약속 어긴 건 아니야. 먼저 처리할 일이 있었어.”강하리는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고 구승훈은 약간 복잡한 표정이었다.“문자를 하나 받았어.”강하리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그래서?”구승훈은 곧장 강하리에게 휴대폰을 건넸고 영상이 눈앞에서 재생되자 휴대폰을 잡은 그녀의 손이 떨렸다.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영상에서 그녀가 주해찬에게 한 말은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강하리는 피식 웃음이 났다.그토록 애정이 담긴
개자식, 항상 중요한 것만 말하지 않는다.하지만 강하리도 더 묻지 않았다.구승훈이 뭘 하든 그녀를 해칠 일은 없다고 믿었으니까.강하리는 휴대폰 속 영상 아래 적힌 글을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난 후 이렇게 말했다.“구승훈, 난 두렵지 않아.”멈칫한 구승훈은 그 말의 의미를 너무 잘 이해했다.그녀는 두렵지 않다고 했다. 영상이 폭로되는 것도, 남들이 수군거리는 것도.그러니 진시연의 한 마디 협박 때문에 물러서지 말라는 뜻이었다.“우리는 당당하게 서로 사랑하는데 왜 그 여자를 무서워하겠어?”강하리는 구승훈을 바라보았고 그 아름다운 눈동자엔 온통 남자의 모습만 비치고 있었다.구승훈은 마음속이 타들어 가는 듯 뜨거운 고통을 느꼈다.분명 그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누구와 결혼했든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녀는 자신을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여기서 어떻게 물러서겠나.진시연이 앞으로 또 어떤 수작을 부리든 그저 강하리만 지키면 그만이었다.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구승훈이 무기력한 웃음을 내뱉었다.“그럼 지금 혼인신고 하러 갈까?”필요한 서류는 일찌감치 준비해 놓았다.사진을 찍고, 서류를 작성하며 10분 만에 두 사람은 혼인신고를 마쳤고 구청을 나오는 강하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강 대표님, 그렇게 행복해?”강하리가 그를 흘겨보았다.“앞으로 얌전히 살아. 유부남이라는 것 잊지 말고.”구승훈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네, 사모님.”문득 강하리의 가슴에 파문이 일었다.한때는 영원히 가질 수 없는 호칭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이제 진짜로 구승훈의 아내, 사모님이 되었다.두 사람이 차에 올라탔을 때 강하리의 휴대폰이 울렸고 전화기 너머 심준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리야, 오늘 집으로 와.”강하리는 막 집으로 돌아갈 참이었다. 연정이를 본 지 이틀이 지났기 때문에 정말 보고 싶었는데 심준호가 특별히 당부하자 문득 마음이 조금은 불안해졌다.“삼촌, 무슨 일 있어요?”심준호는 낮은 웃음을 내뱉었다.
심씨 가문에서 나왔을 때 하늘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강하리는 연정이를 안은 채 다소 넋이 나가 있었다.엄마가 살아 계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그녀가 결혼하는 모습을 엄마가 봤다면 얼마나 좋을까.강하리는 마음이 아팠다.심미현은 그토록 이 관계를 지켜주려 했지만 결실을 맺는 걸 보지 못했다.“무슨 생각해?” 구승훈이 갑자기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야.”이렇게 말하면서도 강하리는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고 구승훈은 황급히 차를 옆에 세웠다.그는 휴지를 꺼내 그녀의 눈물을 계속해서 닦아주면서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그저 울게 내버려뒀다.마침내 강하리는 구승훈의 품으로 뛰어들었다.연정이는 강하리가 우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작은 입을 삐쭉거리더니 덩달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한동안 어른과 아이의 울음소리가 차 안에 울려 퍼졌고 구승훈이 강하리의 눈물을 닦아주는 데만 집중하자 강하리가 알아서 휴지를 뽑았다.“연정이 좀 달래줘.”구승훈은 혀를 찼다.“얘 남편이 아니라 나보고 달래라고? 우리 아내가 질투할까 봐 무서운데.”“좀 진지할 수는 없어?”그래도 구승훈의 말 덕분에 무거웠던 마음이 가벼워졌고 그녀는 눈물을 닦은 후 연정이를 꼭 안았다.연정이도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지만 강하리에게 안기자 고사리 같은 손으로 강하리의 눈물을 집요하게 닦아주었다.강하리는 순간 마음이 시큰거렸다.울어선 안 된다.이젠 엄마가 없지만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엄마, 나에겐 가족이 생겼어.”엄마가 마음속으로 속삭이며 손을 들어 연정이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행복할 거다.손연지는 연정이를 보고 무척이나 반가워했고 연정이도 낯을 가리지도 않는지 그녀를 보며 뭐라고 옹알이를 했다.하얀 얼굴에 큰 눈이 환하게 빛나고 작은 코는 차 안에서 울어서인지 아직 약간 분홍빛을 띠며 말할 때는 입안의 작은 이빨 몇 개가 슬쩍 보였다.손연지는 사랑스러움에 녹아내릴 것 같았다.어떻게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있지?아이가 이렇게 예
좋아하지 않는다고 몇 번이고 말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였다.강하리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꼭 해야 하는 건 없어. 이미 했으면 후회하지 마.”손연지는 갑자기 눈물이 나 강하리를 껴안고 울었다.“그냥 그 아이한테 너무 미안해.”강하리는 손연지가 지금 어떤 마음인지 너무도 잘 알기에 부드럽게 토닥여주었다.뭐라 해도 그녀의 아이였다.자신이 어쩔 수 없이 첫 아이를 지웠을 때처럼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아이를 잊을 수 없었다.“앞으로 또 낳을 수 있어. 하지만 그러려면 적어도 지금은 감정을 추슬러야 해. 아니면 어른도 아이도 고통스러울 거야.”강하리가 조용히 한마디 하자 손연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닦았다.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갑자기 휴지가 그녀의 손에 건네졌고 연정이는 손연지를 잡고 일어서더니 휴지를 들고 얼굴에 마구 문질렀다.손연지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다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방으로 돌아온 강하리가 침대에 리시안셔스가 가득한 걸 보고 걸음을 멈칫했고 연정이는 침대의 꽃밭에 신나게 몸을 던졌다.구승훈이 문 앞에 서서 혀를 찼다.“밤새워 준비한 건데.”말은 그렇게 해도 목소리에 애정이 가득했고 말을 마친 그도 꽃밭에 뛰어들어 연정이와 장난을 쳤다.한동안 방 안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고 잠시 후 연정이는 마침내 지쳐서 졸기 시작했다.강하리가 아이를 씻겨주고 달래서 재우는데 잠든 연정이를 본 구승훈은 강하리를 안고 화장실로 향했고 강하리는 깜짝 놀랐다.“그만해! 연정이 깨겠어.”하지만 구승훈은 그녀를 문에 바짝 밀착시켰다.“사모님, 오늘이 우리 첫날밤인데.”남자의 숨결이 순식간에 그녀를 감쌌고 강하리의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그녀는 발끝으로 서서 구승훈의 입술에 키스를 했지만 그저 키스만 하고 바로 떠날 생각이었는데 구승훈은 그녀가 입술을 떼기도 전에 갑자기 큰 손으로 그녀의 목뒤 쪽을 잡고 격렬하게 키스를 퍼부었다.잠깐 욕실에는 거친 숨소리와 강하리의 귀에 요란하게 들리는 심장 박동 소리만 남
정안그룹 공식 계정에 한 장의 사진이 빠르게 올라왔다.사진 속 여자의 손가락은 섬세한 옥처럼 하얗고 늘씬했지만 남자의 마디가 분명한 손은 소나무처럼 단단했다.깍지 낀 손 뒤에는 사랑스럽게 잠든 꼬마 공주님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전에 프러포즈했을 때 한마디씩 하던 공식 계정에서 또다시 찾아와 댓글은 축복이 쏟아지고 있었다.강하리가 단잠에 빠져 있을 때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이 구승훈과 함께 인기 검색어에 올랐다.구승훈은 SNS의 열기를 보며 눈빛이 암울하게 번뜩이다가 강하리의 입술에 입맞춤하고는 휴대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밖으로 나온 그는 나문빈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부터 진시연의 움직임을 잘 지켜봐요.”나문빈은 혀를 찼다.“구승훈 씨, 첫날밤을 보내지는 않고 왜 자꾸 날 귀찮게...”“남미에서 돌아오고 싶어요?”나문빈은 순간 멈칫하며 마음속으로 악랄한 부부라고 욕하면서도 정작 입 밖으론 아부 섞인 말을 뱉었다.“구 대표님, 결혼 축하드려요. 더 시키실 일은 없으신가요?”“진시연이 정양철과 연락한 적은 없는지 다시 알아봐요.”나문빈은 군말 없이 대답을 마친 뒤 전화를 끊었고 구승훈은 창가에 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한참 후 그는 노민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두 번째 주사를 맞았어.]멀리 연성에 있던 노민준은 그의 메시지를 보고 가슴이 살짝 철렁했다.원래 계획대로라면 첫 번째 주사를 맞으면 최소 열흘은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겨우 며칠이나 지났지?노민준은 순간 메시지에 어떻게 답장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오늘은 그가 혼인신고를 한 날인데 왜 일이 좋은 쪽으로 흘러가지 않는 걸까.노민준은 휴대폰을 든 채 마음이 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축하 메시지를 보내려다 다 지워버리고 다시 글을 썼다.[괜찮아, 안정적이기만 하면 돼.]구승훈은 노민준이 보낸 메시지를 보고 피식 웃었지만 그의 눈에는 웃음기가 조금도 없었다.노민준에게 전화를 걸려고 할 때 갑자기 서재의 문이 열리며 서재의 밝은 빛이
강하리를 몇 번이고 건드린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다만 자신을 키워준 진태형이 얼마나 정직하고 의리가 있는 사람인지 너무 잘 알았다.그렇지 않았다면 심미현 때문에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결혼조차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그러니 자신이 한 일을 설사 그가 안다 해도 어쨌든 그가 키운 딸이기에 화를 낼 뿐이라는 걸 알았지만 이번엔 강하리를 위해 그녀조차 버릴 줄이야.진시연은 내내 기다리다가 깊은 밤이슬을 맞으며 돌아오는 진태형을 보았고 눈물을 흘리며 소파에 앉아 있는 진시연을 보고 진태형은 걸음을 멈췄다.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그의 표정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야?”진시연은 계속해서 바닥으로 눈물을 떨구었다.“아빠, 이젠 날 버리는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난 아빠 딸이라고 했잖아!”진태형은 눈물을 흘리는 진시연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손을 들어 휴지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몇 살인데 아직도 그렇게 울어?”진시연은 진태형의 마음이 약하다는 것을 알았다.“아빠, 난 그냥 무서워서...”“빨리 눈물 닦고 돌아가서 자.” 진태형이 그녀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덧붙이자 진시연은 충격에 빠졌다.“아빠, 나보고 어딜 가라는 거야? 여기가 내 집이잖아.”진태형은 깊은 분노가 담긴 눈으로 진시연을 바라보았다.“시연아, 내가 기회를 줬잖아. 하리랑 화해하고 잘 지낼 수 있는데 네가 그렇게 안 하고 계속 괴롭혔잖아. 내가 했던 경고를 귓등으로 들은 거야?”진시연은 울어서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이젠 눈물을 치고 멍하니 진태형을 바라보았다.“아빠, 차별이 심하네. 강하리만 아빠 딸이고 난 아니야? 뭐가 됐든 핏줄은 이길 수 없나 봐. 내가 아무리 잘해도 그건 봐주지 않는 거야?”진태형의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갑자기 손을 들어 진시연의 뺨을 내리쳤다.“무슨 짓을 했는지 네가 누구보다 잘 알잖아! 내가 하나하나 나열해 줄까? 이 진태형이 키운 딸이 그런 사람일 줄은 나도 몰랐다.”진
병원을 나오자마자, 강하리는 주차장 한편에서 오토바이에서 내린 천아름을 발견했다.천아름은 그녀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무슨 일이야? 괜찮아?”강하리는 짧은 숨을 들이쉬고 정신을 다잡으며 대답했다.“괜찮아. 그런데 넌 여긴 왜 왔어?”천아름은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쓸어넘기며 말했다.“손연지 데리고 드라이브 가려고. 산에 올라가서 야경 보면 예쁠 것 같아서. 같이 갈래?”강하리는 살짝 입술을 깨물다 웃으며 천아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아니야. 나 비행기 타러 가야 돼. 먼저 갈게. 너희끼리 재밌게 놀고, 나중에 보자.”그녀가 발걸음을 돌리려 하자 천아름이 손목을 붙잡았다.“힘든 일 있었어?”솔직히 너무 힘들었지만 티 내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천아름이 갑자기 환하게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너 돌아오면 내가 남자 소개해 줄게. 잘생긴 댕댕남이야.”바로 문을 열고 나오려던 구승훈이 발걸음을 멈췄고 천아름을 향해 분노의 눈빛을 던졌다.천아름은 그 시선을 느끼며 일부러 구승훈 옆에 선 임희주를 도발적인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아이고, 구 대표님, 이렇게 아무나 만나고 다니는 거예요?”임희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무슨 뜻이에요?”천아름은 입꼬리를 한쪽 올리고 강하리를 힐끔 보며 능청스럽게 덧붙였다.“봤지? 본인 얘기하는 건 아나 봐.”그녀는 장난스럽게 강하리의 턱을 살짝 잡아 들어 올렸다.“됐어. 가. 돌아와서 소개팅은 꼭 해.”강하리는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런 미련 없이 돌아섰다.구승훈은 강하리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그녀의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도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그 후에야, 천아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천아름 씨, 남 일에 참견하지 마세요.”천아름은 비웃음을 흘렸다.“구 대표님은 이렇게 여자 데리고 다니면서, 우리 하리는 왜 안 돼요?”그러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임희주를 훑어보며 말했다.
구승훈이 목을 움찔거리며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강하리의 뒤편에서 임희주가 다가왔다.“구 대표님 아내분도 계셨네요?”문 앞에 선 임희주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강하리에게 인사했다.하지만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이 성큼성큼 진료실 안으로 들어서더니, 구승훈 옆으로 바짝 다가가 친근한 목소리로 말했다.“다 끝났어요? 끝났으면 가요.”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짧게 대답했다.“곧 끝나니까 기다려요.”임희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멍든 복부에 손을 갖다 대더니 천연덕스럽게 눌러보았다.그 순간, 구승훈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고 임희주는 별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문 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하리는 피식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그러곤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와 임희주를 바라보며 말했다.“임 선생님, 잠시 밖에서 기다려 주시겠어요?”임희주가 입을 떼려는 순간, 강하리는 바로 준봉에게 시선을 돌렸다.“임 선생님 모시고 나가 주세요.”준봉은 즉시 대답하고는 임희주에게 공손히 말했다.“임 선생님, 가시죠.”임희주는 구승훈을 한 번 노려보았지만 그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코웃음을 치며 돌아섰다.간호사는 강하리와 구승훈을 번갈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강 대표님, 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이제 진료실에 남은 건 둘뿐이었다.강하리는 말 없이 구승훈의 배에 난 상처를 내려다보고는 옆에 놓인 소독 거즈를 집어 들고 임희주가 손을 댔던 자리부터 강하게 닦기 시작했다.그러자 구승훈이 강하리의 손목을 움켜잡았다.강하리는 몇 번 뿌리쳤지만 그는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강하리의 눈은 벌써 붉어져 있었고 창백한 얼굴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으며 눈빛은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구승훈은 피식 웃으며 낮게 말했다.“뭐 하자는 거지?”강하리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그 말을 해야 할 사람은 나인 것 같은데? 구승훈, 지금 뭐 하자는 거야?”구승훈은 강하리의 손을 놓아주고는 아무렇지
택시는 천천히 달렸다.강하리는 차에 앉아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불빛들을 바라보며 자기 행동에 의구심을 가졌다.구승훈은 확실하게 말했었다. 이제 강하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하지만 강하리는 그저 구승훈이 어떻게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를 잊기 위한 행동일 지도 모른다.퇴근 시간의 정체 속에서 차는 병원 앞에 도착했고 강하리는 차에서 내려 깊은숨을 들이쉬며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응급실은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구승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이미 떠난 걸까? 강하리는 응급실을 둘러보며 끝내 찾을 수 없게 되자 결국 심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심준호는 강하리가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자 피식 웃으며 말했다.“아마 방금 엑스레이 찍었을 거야. 에휴, 너는 그 녀석을...”심준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하리는 전화를 끊었다.심준호의 맞은편에서 이를 지켜보던 심예진이 눈을 깜빡이며 웃었다.“하리가 전화 끊어버렸어?”심준호는 휴대폰을 무심히 치우고 천천히 스테이크를 썰어 접시를 심예진 앞으로 옮겼다.“이번에 한국에 얼마나 있을 거야?”심예진은 포크를 입에 물고 잠시 생각했다.“설 지나고 갈게. 하리 일 때문에 아빠랑 할아버지가 요즘 기분이 안 좋으셔.”심준호는 짧게 대꾸했다.“그래. 그 사람과는 헤어져.”심예진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오빠, 무슨 소리야? 왜 그래?”심준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아빠와 할아버지가 우리 결혼 재촉하는 거 알잖아. 그래서 요즘 기분이 안 좋으셔.”심예진은 조급한 듯 말했다.“하지만 오빠, 우리는 그냥 연기하는 거라고 했잖아. 부모님 기분 맞춰드리려고 한 거라면서.”심준호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심예진을 보며 미소 지었다.“걱정하지 마. 결혼도 연기야. 네 사업에 영향 주지 않을 거야. 다만 네 남자 친구는...”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헤어지는 게 좋겠어. 안 그러면 부모님과 할아버지가 오해하실 수도 있으니까.”심예진은 입술을 꽉 깨물며 눈가에 눈물이
강하리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표면적인 평온함은 결국 깨져 버렸고 그녀는 심준호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삼촌, 구승훈에게 무슨 일이 있었어요? 삼촌은 알고 있죠?”심준호는 룸미러를 보며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오늘 승훈이가 내 사무실에 와서 유언장을 작성했어. 아마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확실해. 아니면, 누가 그 나이에 유언장을 쓰겠어?”강하리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고 손톱이 손바닥을 깊이 찔렀다.심준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어찌 됐든 너에게 숨긴 거잖아. 죽어도 싸. 안 그래?”강하리는 심준호를 묵묵히 바라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심준호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굳이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차가 JM 건물 앞에 멈추자 심준호는 강하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출근해. 쓸데없는 놈 때문에 괜히 신경 쓰지 말고. 나중에 삼촌이 좋은 사람 소개해 줄게.”하지만 강하리는 바로 회사로 향하지 않았고 뒤돌아 정안 빌딩을 바라보았다.“삼촌도 구승훈이 왜 그런 건지 모르는 거예요?”심준호는 부정하지 않았다.“어쨌든 나는 승훈이에겐 남이니까.”강하리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저도 마찬가지예요.”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JM 건물로 향했다.심준호는 강하리가 사라지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분명 서로 마음이 있는데 왜 이렇게 서로를 괴롭히는 걸까?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회의실로 들어갔다.기명 제약 인수 건은 이미 시작되었고 강하리는 신중하게 모든 단계를 꼼꼼히 살폈다. 이것은 결국 손연지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이었기에 어떠한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앞으로의 진행 과정을 결정하고 나니, 어느덧 저녁 시간이 되었다.강하리는 회의실에서 나와 안예서에게 말했다.“오늘 저녁 연성시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예약해 줘.”안예서는 대답하며 바로 예약을 진행했다.그 순간, 강하리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역시 심준호였다.[아, 맞다. 깜빡했네. 그 녀석, 다친 것 같
강하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눈앞에 있는 차는 그녀에게 익숙했다.얼마 전 심준호 생일에 그녀가 직접 선물했던 차였다.심준호는 차에서 내려 석연란과 심연청을 바라보았고 그 시선에 두 사람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특히 심연청은 더욱 그랬다.심씨 가문 사람 중에서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바로 그녀의 사촌 오빠, 심준호였다.“오빠...”심연청은 매우 낮은 목소리로 인사했고 조금 전까지의 거만함은 온데간데없었다.석연란도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준호야, 무슨 일로 왔어?”심준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제 조카 데리러 왔어요.”그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덧붙였다.“아, 방금 구승훈이 나를 찾아왔는데, 이혼하기 싫다고 징징거리더라. 그러니까 기다리지 마.”석연란과 심연청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굳어졌다.그들은 드디어 집안에서 한숨 돌릴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며 결혼식 날 강하리가 혼자 남겨진 모습을 보며 속으로 통쾌함을 느꼈던 그들이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구승훈이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니?“준호는 참 자기 사람한테 잘해준다니까. 하지만 이 결혼을 후회한 사람은 다름 아닌 구승훈 당사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심준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그래서 이제 와서 아무리 후회해도 받아줄 수 없다는 거죠.”석연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심준호는 이미 강하리를 데리고 차로 향하고 있었다.“삼촌이 그랬잖아. 이런 인간들 만나면 말로 싸울 필요가 없다고. 그냥 바로 한 대 갈기면 되는 일을 뭐 하러 목 아프게 말다툼해?”심준호는 말하면서 강하리를 차에 태운 후, 자신도 옆자리에 올라타고는 바로 자리를 떠났다.석연란은 심준호의 차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를 갈았다.“엄마, 오빠 말이 진짜야? 구승훈, 후회하는 거야?”석연란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말도 안 돼. 구승훈이 뭐가 아까워서 강하리 같은 여자한테 매달리겠어? 그냥 한때의 감정이지. 곧 다른 여자 찾을 거야. 두고 봐. 남자들은 원래 다 그렇잖아.”그녀의 눈빛이
만약 진짜로 아직 희망이 있었다면 이혼하고 나중에 일이 해결되면 다시 그녀를 되찾으면 되는 거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들의 유일한 연결고리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구승훈은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한참 후 쓴웃음을 지었다.그는 희망을 버린 것이 아니라 희망을 품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었다.여초연과의 문제는 해결책을 찾고는 있지만 해결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여초연은 차라리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행복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게다가, 그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고 있었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언젠가 갑작스레 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다.그래서 그는 유언장을 쓰고 싶었다.그가 줬던 것들을 강하리는 모두 되돌려줬다. 하지만 유언장에 적힌 것이라면 돌려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구승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심준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절차에 따라 유언장을 작성해 주었다.일을 마치고 나서야 심준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네 가족이야. 도움이 필요하면 혼자 감당하려 하지 마.”구승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 삼촌.”심준호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흥! 빨리 병원에 가서 치료나 받아. 피 냄새가 진동하네.”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심준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강하리 쪽은 내가 설득해 보겠지만, 하리 성격을 너도 알잖아. 만약 하리가 계속 이혼을 고집한다면 나도 굳이 강요하지 않을 거야.”구승훈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문손잡이를 꽉 쥐었다. 긴 침묵이 흐르고 그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알았어.”가정 법원 앞에서 강하리는 계단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그녀의 표정은 차분하고 침착한 모습에서 조용하고 쓸쓸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결국 구승훈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그녀는 실망해야 할지, 아니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몰랐다.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
심준호는 그 말을 듣고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어릴 적부터 구승훈과 함께 자랐고 그가 강하리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줬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구승훈 편에 서서 도왔지만 이번만큼은 너무 지나쳤다.“이혼하기 싫다고? 난 네가 이혼하고 싶지 않아 하는 모습이 전혀 안 보이는데?”심준호는 비웃는 표정을 짓고는 이내 휴게실로 가서 약상자를 가져와 책상 위에 던졌다.“알아서 약 찾아 발라.”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넥타이를 쓰레기통에 내던졌고 구승훈은 문에 기대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약은 괜찮아. 그렇게 몸 약한 사람 아니야.”심준호는 그를 무시한 채 책상에 앉았다.“오늘 가정 법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었어?”구승훈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소파에 앉았다.심준호는 그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 아무리 세게 때렸다고 해도 앉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다쳤을 리가 없었다.“다쳤어?”하지만 구승훈은 그 질문을 무시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강하리에게 전화해서 기다리지 말라고 해.”심준호는 전화를 걸지 않았고 그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다쳤으면 병원에 가.”구승훈은 테이블 위에 놓인 리시안셔스 꽃다발을 내려다보다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준호야.”이 망나니는 평소에는 뻔뻔하게 ‘삼촌’이라고 부르다가, 이럴 때는 다시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이혼할 마음을 먹은 것 같네.”구승훈은 손가락으로 꽃잎을 쓸며 말했다.“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심준호는 구승훈을 조용히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부탁인데?”구승훈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나, 유언장을 쓰고 싶어.”심준호는 깜짝 놀란 기색을 보이며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대체 무슨 일이야?”그는 구승훈이 강하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그가 강하리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구승훈이 이렇게 행동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심준호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분명히 구승훈에게 무슨 사정이
구승훈의 눈빛이 순간 가늘어졌다.바의 어둡고 밝은 조명 아래, 그의 얼굴은 전에 없이 깊게 가라앉았다.“최하영 씨에게 전화해서, 연성시에 있는 형수님을 잘 돌봐주라고 해. 필요하면 안현우에게 직접 손을 써도 돼. 문제 생기면 내가 책임질게.”구승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임희주 씨는 어떻게 할 거야?”구승훈은 비웃음을 띠며 눈을 내리깔았다.“임희주는 아직 시험하고 있어. 하지만 오래가진 않을 거야. 여초연이 임희주에게 그렇게 긴 시간을 주진 않을 거니까.”구승재는 잠시 형을 바라보다가 말을 잇지 못했다.“왜?”구승훈이 시선을 돌렸다.구승재는 잠시 침묵하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방금 형수님이 이혼 서류를 서산 퍼스트 빌리지로 보냈어.”구승훈은 술잔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입가에는 쓴웃음이 맴돌았다.“정말 빠르네.”그는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폭탄을 보내지 않은 걸 보면 봐주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무겁게 발걸음을 옮겼다.구승재는 그를 말리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결국 입을 다시 다물었다.서산 퍼스트 빌리지의 정원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구승훈은 이곳에 리시안셔스를 가득 심었던 그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이 정원에서 강하리와 함께 늙어갈 거라 믿었다.하지만 텅 빈 지금의 주택은 그의 마음처럼 공허했다.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이혼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의 약속을 상징하는 결혼반지도 그 위에 놓여 있었다.구승훈은 반지를 바라보며 속삭였다.“자기야, 나 이혼하고 싶지 않아. 괜찮을까?”그러나 텅 빈 주택에는 그의 말에 대답해 줄 사람이 없었다.다음 날, 드물게 햇살이 쨍쨍했다.강하리는 붉은색 긴 드레스를 입고 화려하면서도 은은한 화장을 했다.가정 법원에는 사람들이 북적였고 지나치는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도로 건너편에서 구승훈은 묵묵히 강하리를 바라보고 있었다.휴대폰은 계속 울렸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준봉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바는 여전히 활기 넘쳤지만 구승훈이 앉아 있는 바 카운터 앞에는 텅 빈 술잔이 열 개도 넘게 쌓여 있었다.천아름은 한 칸 떨어진 자리에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결혼식을 취소한 건 분명 구 대표님이면서 강하리보다 더 힘들어 보이네요.”구승훈은 담배를 깊이 들이마신 뒤 가볍게 웃으며 술잔을 다시 들어 올렸다.천아름은 바 카운터에서 술잔을 집어 들고 따라 마시며 말했다.“남자들에게 여자는 그저 부르면 오고 가라면 가는 존재인가 봐요?”구승훈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천아름은 휴대폰을 꺼내 사진첩을 열어 구승훈에게 내밀었다.“결혼식 날, 우리 하리 사진이에요.”구승훈의 시선이 사진으로 향했다.메이크업실에서 찍은 듯한 사진이었다.강하리는 흰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옆에는 천아름과 손연지 두 명의 친구가 있었다.사진 속 강하리는 이후에 닥칠 일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행복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구승훈은 가볍게 두 번 숨을 내쉬었다.“그날, 하리는...”천아름은 휴대폰 화면을 끄며 말했다.“그날 하리는 구 대표님을 찾으러 갔어요. 우리가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었죠.”구승훈은 이마를 짚으며 힘없이 몸을 기울였다.천아름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이유라고 물어봅시다. 구 대표님이 여태 사랑했던 여자는 강하리뿐이었잖아요. 분명 잘 지내다가 왜 갑자기 그런 선택을 한 거예요?”구승훈은 담배를 입에 문 채 깊게 빨아들인 후에야 대답했다.“아무 이유 없어요. 그냥 갑자기 재미없어져서, 결혼하기 싫어졌어요.”천아름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알겠어요. 지금이 재밌다면 계속 그렇게 살아요. 하지만 하리 같은 여자는 아이가 있어도 구혼자가 줄을 설 걸요? 구 대표님, 후회하지나 말아요.”그녀는 의자에 걸쳐 둔 헬멧을 들고 구승훈의 어깨를 툭 치며 돌아섰다.때마침 구승재가 구승훈의 전화를 받고 서둘러 도착했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헬멧을 안은 채 나오는 천아름과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