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원하면 해.”구승훈은 심장이 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자기야, 내일 침대에서 못 일어날까 봐 걱정되지 않아?”강하리가 웃었다.“할 거야?”숨이 멎은 구승훈이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았다.“아니, 우선은 강 대표님이 재워주는 걸 누리고 싶어.”말을 마친 그가 강하리를 안아 침대에 눕혔고 강하리는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잘 자, 구승훈.”구승훈은 웃었다.“잘 자, 자기야.”강하리는 구승훈의 품에 몸을 밀착했고 구승훈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녀를 꽉 안았다.바늘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한 침실에서 강하리의 귀에는 구승훈의 심장 박동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두 사람은 더 말하지 않았다.고요한 방 안에서 구승훈이 고개를 숙여 강하리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사랑해.”강하리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눈을 떠 구승훈의 시선을 마주했다.“나도 사랑해.”언제 잠이 들었는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구승훈은 곁에 없었고 연정이도 누군가 안고 간 뒤였다.강하리는 침대에 앉아 구승훈이 누웠던 곳을 바라봤다.다소 구겨진 이불을 만지던 그녀의 손가락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먼저 말할 때까지 기다릴게.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마, 구승훈.”구승훈은 바쁜지 강하리가 아래층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자리를 떠난 뒤였다.강하리도 굳이 묻지 않고 평소처럼 연정이에게 밥을 먹인 뒤 사무실로 갔다.회사에 도착했을 때 사무실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리시안셔스 꽃다발이 있었고 그녀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데 안예서가 뒤에서 은근하게 웃으며 말을 붙여왔다.“대표님, 곧 좋은 일 생길 것 같은데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굳어졌다. 구승훈은 그녀에게 프러포즈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그래도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오늘 일정은 뭐야?”안예서는 서둘러 강하리에게 하루 일정을 알렸고 고개를 끄덕인 강하리는 꽃을 옆으로 치웠다.안예서가 그녀를 따라 들어왔다.“대표님, 지난번에 제가 말씀드린 임명우 씨 기억하시죠?”강하리는
강하리는 구승훈을 여기서 볼 줄은 몰랐다.더군다나 맞은편에는 처음 보는 여자가 앉아 있자 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시선을 돌렸다.구승훈의 정상적인 사교 활동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다가가 묻지도, 방해하지도 않았다.그런데 정주현이 그녀의 표정이 이상함을 감지하고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다가 눈썹을 살짝 치켜들고 강하리를 돌아보았다.“바람피우는 현장 목격한 건가요?”강하리는 다시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아니요.”이런 면에서 강하리는 구승훈을 믿었다.다만 구승훈이 저 여성과 밥을 먹는 것이 그녀에게 숨기는 일과 관련이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을 뿐이었다.강하리는 사실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다른 사람들은 알아도 자신은 알면 안 되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연정이 사건 때도 구승훈은 노진우를 믿을지언정 그녀를 믿지는 않았다.강하리는 눈가의 상실감을 감추려 고개를 숙였고 정주현은 보기 드문 미소를 지었다.“여전히 저 사람에게 잘해주네요.”정주현의 말투에는 무의식적으로 약간의 서운함이 묻어났지만 그 역시 자신과 강하리 사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가지 않고 되물었다.“어떻게 지냈어요?”정주현의 얼굴에 번지던 미소가 갑자기 사라졌다.요즘 어떻게 지냈냐고? 굳이 한 단어로 설명하자면 엉망이다.사실 그동안 어떻게 버텼는지 그조차 모르겠다.정양철과 줄곧 사이가 돈독했던 그였고 정양철이 업무상 아무리 엄격하게 요구해도 그에겐 좋은 아버지였다.그래서 정양철이 그런 짓을 했다는 게 믿을 수가 없었지만 증거까지 나온 이상 믿을 수밖에 없었다.정주현은 애써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그냥 그렇죠. 산 사람은 계속 살아야 하니까. 그냥... 하리 씨 볼 면목이 없네요.”강하리는 잠시 정주현을 바라보다가 말했다.“그쪽이랑 상관없어요.”정주현이 웃었다.“그럼 뻔뻔하게 친구 해도 돼요?”강하리도 웃었다.“당연하죠.”정주현의 표정이 눈에 띄게 풀렸고 두 사람은 이
하지만 구승훈의 숨김과 솔직하지 못한 태도는 강하리의 마음을 조금 불편하게 만들었다.구승훈은 강하리가 화가 났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뒤 강하리를 품에 안고 입을 열었다.“제 아내, 강하리에요.”강하리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자 구승훈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나지막이 말했다.“내 체면 좀 살려주면 안 돼, 여보?”강하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여자의 시선이 반짝이더니 강하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안녕하세요, 사모님. 전 구승훈 씨 담당 정신과 의사, 여나경이라고 해요.”강하리는 멈칫하다가 구승훈의 불면증이 떠올라 그를 슬쩍 보고는 이렇게 물었다.“이 사람 상태 어때요?”구승훈의 눈동자가 살짝 어두워지고 여자는 눈치껏 웃으며 말했다.“복잡한 경우라 치료 과정도 번거로울 수 있지만 제가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사모님.”강하리는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여자가 먼저 웃으며 말했다.“죄송하지만 전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그러고는 이내 자리를 떴다.여자가 가고 구승훈은 힘껏 강하리의 허리를 꼬집었다.“정주현이랑 밥 맛있게 먹었어?”강하리는 곧장 그의 손을 떼어냈다.“다른 여자랑 밥 맛있게 먹었어?”구승훈이 웃었다.“그래도 강 대표님이랑 먹는 게 맛있지.”강하리는 능글맞게 웃는 남자를 보며 문득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어젯밤 혼자 발코니에 서 있을 때처럼 왠지 이 남자가 홀로 버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구승훈, 당신 몸...”구승훈은 속으로 흠칫하며 조용히 강하리를 품에 안고 만족스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강 대표님 걱정하는 눈빛을 보니 다 나은 것 같네.”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구승훈의 품에 기대어 안겼고 구승훈의 눈동자는 한층 어두워졌다.강하리가 걱정한다는 걸 잘 안다.예전 같았으면 걱정해 주는 그녀의 모습에 날 듯이 기뻐했을 텐데 지금 상황에서는 강하리가 알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지금은 감히 프러포즈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그 약은 그에게 시한폭탄과
강하리의 입꼬리가 움찔했다.건너편 사옥에 새로 회사가 들어왔다는 건 아는데 에비뉴와 정안 그룹일 줄은 몰랐다.하지만 생각해 보니 이해가 됐다.그렇지 않고서야 구승훈이 왜 회사 근처 식당에 나타났겠는가.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연성으로 안 돌아가?”구승훈의 눈동자는 온통 그녀로 가득 찼다.“너랑 아이가 어디 있으면 나도 함께 할 거야.”강하리가 구승훈의 시선을 마주했다.“나도 꼭 B시에 있을 필요는 없어. JM의 업무는 어디서든 할 수 있으니까.”어쨌든 연성은 구씨 가문의 영역이었고 연성에 깊게 뿌리 박은 구씨 가문은 B시에서 그다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구승훈이 시선을 내려 그녀를 바라보았다.“하지만 네가 다시는 가족과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난 네가 연인이든 가족이든 둘 다 가졌으면 좋겠어, 자기야.”두 사람 중에 적어도 한쪽은 가족의 사랑을 받아야 하니까.강하리의 코끝이 갑자기 시큰해지며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예물도 도착했는데 그러면 결혼할래, 구승훈?”멈칫한 구승훈은 씁쓸함이 가슴에 밀려왔지만 그래도 얼굴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강 대표님, 그렇게 급한가?”강하리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나랑 결혼할 거야?”구승훈의 눈에 머금었던 미소가 점점 사라지더니 손가락이 강하리의 눈가에 닿았다.“자기야, 준비할 시간 좀 줘.” 강하리는 쓴웃음을 내뱉었다.“알았어, 기다릴게.”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곧장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구승훈은 복잡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회사 앞에 서서 얼굴을 찡그렸다.그가 돌아서서 길 건너편으로 걸어가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 모른다.구승재는 진작 위에서 구승훈과 강하리가 함께 서 있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두 사람이 화해했는지 확인하려고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왔다.하지만 아래에 내려오자 형이 찌푸린 얼굴로 걸어올 줄이야.‘쯧... 아직 화해 못 했네.’“형, 하리 씨가 아직 용서 안 해준대?”구승훈은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눈가에 억눌린 짜증을 내비
“언제 왔어?” 강하리가 구승훈을 바라보며 그의 빨갛게 충혈된 눈동자에 시선이 향했다.지난 며칠 동안 구승훈은 이곳에 머물지 않았다.회사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요 며칠 구승훈은 많이 바빴고 모임이 끊이질 않아 근처에 미리 준비해 둔 별장으로 갔다.강하리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봤다.“지난 며칠 동안 잠은 잤어?”구승훈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품에 안았다.“잠을 못 자. 강 대표님이 와서 재워주면 안 돼?”강하리가 웃었다.“그래, 오늘 짐 챙겨서 그쪽으로 갈게.”구승훈은 멈칫하다가 이내 입꼬리를 피식 올렸다.쉽게 승낙하니 다소 허탈한 느낌이 들었다.원래 상처들은 거의 다 나았지만 그가 요즘 매일 복싱장으로 가서 속에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풀었기에 몸에 새로운 상처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강하리가 정말 오면 그는 괴롭기만 할 거다.아내가 옆에 있는 데도 안지 못하는 그 기분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정말 올 거야?”강하리가 웃었다.“왜, 내가 가는 게 싫어? 아니면 다른 여자가 있는 거야?”구승훈은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그럴 배짱이 있는 것 같아?”강하리는 그의 넥타이를 잡고 끌어당겨 허리를 굽히게 한 뒤 시선을 마주 보았다.“그러면 방 청소나 하고 나랑 연정이가 갈 테니까 기다려.”말을 마친 그녀는 구승훈의 넥타이를 놓아주고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구승훈은 문에 기댄 채 웃음을 터뜨리며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강하리를 거절할 수가 없다는 걸 인정했다.잠시 후 드레스룸에서 나온 강하리는 심플한 드레스를 입었는데도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다.하지만 구승훈은 그녀가 나오는 순간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보낸 드레스는 어딨어?”강하리는 머리를 뒤로 넘기며 무심하게 대꾸했다.“너무 더워서 시원한 걸로 바꿨어.”구승훈은 강하리의 등 뒤로 훤히 뚫린 구멍을 바라봤다.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위로 끌어올리자 뒤쪽의 아름다운 나비 모양의 뼈가 드러났다.허리까지 훤히 뚫린 디자인의 옷을 바라보는 구승훈의 눈빛이 어두
강하리는 결국 구승훈이 보내준 드레스를 입었다.파란 드레스에 네크라인과 치맛단에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혀있어 여성스러우면서도 고상하고 품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오픈 숄더는 쇄골을 모두 드러냈고 새하얀 쇄골에는 투명한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달려 있었다.강하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진태형의 딸, 심씨 가문의 손녀라는 대단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 B시에 몇이나 되겠나.게다가...허리를 굽혀 강하리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리는 구승훈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구씨 가문이 어떤 배경을 가졌는지 모두가 안다.비록 구승훈이 구씨 가문을 처참히 무너뜨렸지만 그의 손에는 구씨 가문의 재산 90%와 B시 문씨 가문의 모든 재산이 있으니 기존 구씨 가문보다 그 세력이 더 대단했다.모두의 시선이 여기로 쏠렸지만 구승훈의 눈에는 눈앞에 있는 여자만 보였다.몸을 살짝 굽혀 강하리에게 손을 내밀자 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에 자기 손을 얹었다.심준호가 선물한 드레스를 아무 말 없이 찢어버린 구승훈에게 조금 화가 났지만 개자식의 소유욕이 발동한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다.오히려 그런 그의 반응에 다시 예전 구승훈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그동안 그녀의 마음을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옅어지는 느낌이었다.구승훈의 눈가에 미소가 번지며 강하리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팔을 뻗었다.강하리는 그의 팔짱을 낀 채 사람들의 시선 아래 진씨 가문 저택으로 따라 들어갔다.“이게 우리 결혼식이면 얼마나 좋을까. 왠지 정말 결혼식 같지 않아?”구승훈이 강하리의 귀에 속삭이자 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았다.“나도 이게 우리 결혼식이었으면 좋겠어.”구승훈이 걸음을 멈칫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서두르지 마, 결혼식 할 거니까.”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진태형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강하리를 보자 눈을 반짝이며 이쪽으로 걸어왔다.“아빠.”강하리가 낮은 소리로 부르고 곧이어 구승훈도 그를
그런데 갑자기 진태형에게 친딸이 하나 더 생기고 그게 심씨 가문의 손녀일 줄 누가 알았겠나.이제 진시연의 처지가 어색해진 건 당연했고 사람들은 진시연을 보고 웃으며 인사를 나눈 뒤 곧바로 흩어졌다.진시연은 짙은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샴페인 잔을 손에 들고 있었다.그녀는 사람들의 의미심장한 시선을 못 본 척 걸음을 옮겨 구승훈에게 다가갔다.“구승훈 씨, 오랜만이네요.”구승훈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무심하게 와인 잔을 들고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대답하지도 않았고 그녀와 대화를 나눌 생각도 없어 보이자 진시연은 그의 옆에 서서 우울한 표정으로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구승훈 씨, 내가 F 대륙에서 야생동물에게 공격당했을 때 날 구해주고 밤새 업고 병원으로 가 치료받게 해준 거 기억나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그땐 개나 소나 다 구해줬을 겁니다.”진시연의 얼굴이 다소 일그러졌다.그녀는 오랜 세월 기억하고 있던 것이 구승훈의 입에서 개나 소나가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우울한 눈빛을 감춘 채 말을 이어갔다.“그래도 저한텐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에요. 구승훈 씨, 우리 앞으로 잘 지내봐요, 네? 전 정말 그쪽이랑 잘 지내고 싶어요.”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진시연 씨, 진심으로 살려줘서 고마우면 나한테서 멀리 떨어져요. 내 아내가 날 오해하는 건 싫으니까.”진시연은 당황했다.“아내요? 두 사람 결혼해요?”구승훈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진시연 씨, 멀리하라고요. 못 알아들어요?”구승훈이 그렇게 말한 뒤 걸음을 옮겨 강하리에게 다가가는데 진시연이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그의 뒤에서 소리쳤다.“구승훈 씨, 강하리가 정말 좋은 여자라고 생각해요? 그쪽 잡고 놓아주지 않으면서 주해찬이랑 알콩달콩 지내는데 정말 하나도 신경 안 쓰여요?”구승훈은 걸음을 멈추고 얼음같이 싸늘한 얼굴로 돌아보았다.“진시연 씨, 멀쩡히 진씨 가문에 남고 싶으면 얌전히 있어요. 아니면 심씨 가문도, 나도 그쪽 무사히 B시에 남겨두지 않을 테니까.”진시연의 얼
화장실 문 앞에 도착한 구승훈은 강하리가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옆 벽에 기대어 기다렸다.하지만 10분이 지나도 강하리가 인기척을 보이지 않자 심장이 철렁하며 휴대폰을 꺼내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상대의 휴대폰이 꺼졌다는 음성에 남자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지며 곧장 발을 뻗어 화장실 문을 발로 차서 열었다.안에선 강하리의 모습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강하리는 머릿속이 어지럽고 몸에서 주체할 수 없이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누군가 자신을 안는 느낌이 들었지만 뿌리칠 수 없었고 곧바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힘겹게 눈을 뜨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구승훈의 얼굴이 보였다.“구승훈...”강하리가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만지려 했지만 갑자기 눈물로 인해 시야가 흐려졌다.“왜 나랑 결혼하지 않는 거야? 나랑 결혼한다고 했잖아, 연정이한테 온전한 가정을 만들어 준다고 했잖아. 구승훈, 한 달의 시간을 줄게. 나랑 결혼해 줘, 알았지?”그녀의 첫마디를 듣자마자 주해찬의 눈이 번쩍 뜨였지만 강하리의 입에서 구승훈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는 차가운 얼음 동굴에 빠진 것 같았다.그랬구나.진시연은 강하리가 기꺼이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게 할 방법이 있다고 했다.그게 그를 구승훈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일 줄이야.그는 쓴웃음을 내뱉으며 휠체어 팔걸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하리야, 넌 내가 그렇게 싫어?”강하리는 눈가에 눈물을 머금었지만 입가엔 웃음이 흘러나왔다.“내가 충분히 보여주지 않았어? 구승훈, 얼마나 좋아해야 날 전적으로 믿어줄 거야?”웃는 그녀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난 사실 당신이 항상 날 믿지 않는 게 무척 괴로워.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 둘이 같이 짊어지고 싶은데 항상 날 빼놓잖아. 구승훈, 어떻게 해야 나한테 온전히 마음을 열어줄 건데?”주해찬의 손가락이 살짝 떨리며 앞으로 다가가 강하리의 손을 잡았다.“하리야, 구승훈 사랑하지 마, 응?”강하리는 웃으며 그를 밀쳐냈다.그녀도 더 이상 구승훈을 사랑하고 싶지
임명우가 강하리와 약속한 장소는 펠리스 빌딩 꼭대기 층에 있는 레스토랑이었다.강하리는 임명우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려던 순간, 닫히려던 문이 다시 열렸다.“잠깐만요! 구승훈 씨, 빨리요!”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강하리는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버렸다.바로 그때, 임희주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강하리를 예상하지 못했던 듯,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강 대표님, 우연이네요.”강하리는 차가운 눈빛을 던지며 가볍게 웃었다.“결혼 증명서 받기 전까지는 저, 아직 구 대표님 아내예요.”짧은 한마디에 임희주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이내 구승훈도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강하리의 굳은 표정과 달리 구승훈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자연스러웠다.구승훈은 강하리를 힐끗 보고는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엘리베이터 문은 좁은 공간은 순식간에 무겁고 숨 막히는 공기로 가득 찼다.임희주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가볍게 웃었다.“구 대표님, 아내분께 인사 안 하세요?”강하리가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구승훈이 입을 열었다.“필요 없어.”단 네 글자. 그 짧은 말이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이미 상처 난 마음을 다시 한번 깊숙이 베어냈다.강하리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결혼식도 제멋대로 취소하고 오지 않은 사람이 인사조차 하지 않는 건 대수로울 것도 없었다.엘리베이터 안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1층에서 68층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2분 남짓이었지만 강하리에게는 두 시간처럼 길고도 고통스러웠다.마침내 도착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강하리는 주저 없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임명우는 미소를 머금고 구승훈을 힐끗 바라보고는 이내 강하리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우리도 나가요.”임희주는 구승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구승훈의 표정은 아무 변화도 없었고 시선은 여전히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한참 후에야 짧게 입을 열었다.“가요.”임희주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구 대표님, 정말 병
구승훈은 여전히 아파트 건물 아래에 서 있었다.연성시의 겨울은 눈조차 내리지 않았지만 매서운 바람이 온몸을 얼어붙게 했다.그는 잔뜩 움츠린 채 목을 움직이며 대답했다.“알았어. 최대한 빨리 간다고 전해줘.”짧게 말을 마친 그는 전화를 끊었다.준봉은 끊긴 휴대폰 화면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창가에 앉아 있는 강하리에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강하리 씨.”강하리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멍하니 있는 건지, 깊은 생각에 잠긴 건지 알 수 없었다.방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적막했다. 한참 뒤, 강하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준봉을 바라보았다.“부탁드려요. 주식 양도는 이미 공증을 마쳤고 그가 줬던 옷과 장신구도 모두 정리해서 보냈어요. 구씨 가문 할아버지가 주신 재산도 돌려드릴 거예요. 그리고 연정이 양육권은 제가 가질 겁니다.”마치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다는 듯, 강하리는 짧게 말을 끝맺고 방을 나섰다.준봉은 그녀를 불러 세우려 했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방을 나선 강하리는 문 앞에서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뒤돌아서 주택을 한동안 바라보았다.구승훈의 목소리가 방 안에서 들려오는 듯했다.또한, 연정이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달려오는 모습이 아련하게 떠올랐다.강하리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애써 참았다.강하리가 결혼 증명서를 바꾸자고 했을 때, 적어도 잠시라도 망설일 줄 알았다.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하고 냉정했다. 이성적인 태도 뒤에 감춰진 무심함이 오히려 그녀를 조롱하는 듯했다.강하리는 시들어버린 정원을 바라보았다.강하리는 결국 포기할 수 없었다.이렇게 오랜 시간 노력하며 그녀가 원했던 건 단지 구성훈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다.그러나 그 단순한 바람조차 아무런 설명도, 아무런 미안함도 없이 이뤄지지 않는 꿈이 되어 버렸다.크게 숨을 들이쉰 그녀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차고 쪽에서 연정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심준호는 연정이를 안고 땅에 떨어진 참
강하리는 자신이 어떻게 호텔을 빠져나왔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모두의 만류를 뿌리치고 차를 몰고 나온 순간부터 도로를 질주하는 동안까지, 모든 것이 흐릿했다.그저 추웠다.차 안의 에어컨을 최대로 올렸지만 차가운 공기는 심장 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다.창밖에는 녹지 않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고 휴대폰 화면은 여전히 ‘통화 중’ 상태를 반복하고 있었다.그러다 문득, 강하리는 핸들을 틀어 차를 길가에 세웠다.그 순간, 애써 참았던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렸다.현실을 부정하려고 애썼지만 이제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구승훈은 포기했다.그에게 어떤 이유와 사정이 있었든, 결국 그는 그런 선택을 한 것이다.그동안 자신이 쏟아부었던 모든 노력이 한낱 웃음거리로 전락했음을 깨닫고 강하리는 눈물을 머금은 채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뒤따라오던 심준호와 손연지도 급히 차를 세우고 달려왔다. 그리고 그들이 본 것은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맨발로 차에서 내리는 강하리였다.운전하려고 하이힐을 벗어 던진 듯했지만 차가운 눈밭 위에서도 그녀는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그녀의 모습은 마치 시들어 버린 꽃잎처럼 초라하고 쓸쓸해 보였다.더 이상 가고 싶지 않았다.구승훈을 찾아가고 싶지도 않았다.이제 그녀도 포기했다.그토록 오랫동안 얽매였던 남자를, 이제는 놓아주기로 했다.너무 지쳤고 더는 버틸 힘이 남아 있지 않았으며 그가 어떤 이유에서 그녀를 떠난 건지 이제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어차피 아무리 노력해도 남는 건 결국 상처뿐이었다.심준호는 다급히 코트를 벗어 강하리의 어깨에 덮어주었다.“걱정하지 마. 삼촌이 너를 위해 꼭 복수해 줄게.”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올린 강하리의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삼촌, 너무 힘들어.”심준호는 말없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괜찮아. 삼촌이 있잖아. 울고 싶으면 울어.”하지만 강하리는 더 이상 울지 않았고 그저 심준호의 품에 기대어 쓰러질 듯 몸을 맡겼다.“하리야!”의식을 잃기 전, 그녀가 들
구승훈은 천천히 정신을 가다듬고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승재는 초조한 얼굴로 다급하게 외쳤다.“형, 왜 옷을 안 갈아입었어?”그러나 구승훈은 대답 대신 담배에 불을 붙이고 창밖의 정원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꽃이 다 시들었네. 그렇지?”구승재의 가슴에 순간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형, 오늘...”그러나 말을 끝맺기도 전에, 구승훈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그는 씁쓸한 미소를 띠며 나직이 말했다.“오늘 내가 어떻다는 건데?”그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담배를 깊게 들이마셨다. 희뿌연 연기 속에서 드러난 눈빛에는 깊은 허무함이 서려 있었다.구승재는 불안한 기색으로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형! 결혼 안 할 거야?”그 순간, 구승훈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잠시 침묵이 흘렀다.“결혼해서 뭐 해?”그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언제 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하리와 아이를 다치게 할지 모르는데.”구승재는 입술을 깨물었다.“하지만 형이 얼마나 힘들게 다시 강하리 씨를 만났는데, 형...”구승훈은 뻑뻑해진 눈가를 문질렀고 한참 후에야 마침내 짧게 입을 열었다.“내가 미안하지.”그 한마디에 구승재는 그동안 참고 있던 감정을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었다.“형, 그러지 마. 제발...”곁에서 지켜보던 노민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일단 검사부터 해 봐. 그 후에 이야기하자.”그는 캐리어를 내려놓고 가방에서 검사 장비를 꺼내며 말했다.“준봉 씨랑 노진우 씨는 어때? 이쪽으로 데려와서 검사받게 해.”구승훈은 시선을 거두며 대답했다.“병원으로 보냈어.”두 사람은 구승훈보다 더 심하게 다쳤다.그 순간, 구승훈은 문득 헛웃음을 지었다.오늘 아침, 방 안에 남겨진 피 묻은 흔적과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던 준봉을 발견했을 때, 구승훈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어제 곁에 있었던 사람이 강하리와 연정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활기로 가득했던 바 안에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하리야, 괜찮아?”손연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하리는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저었다.“괜찮아.”방금 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손연지는 그녀의 얼굴빛이 좋지 않자 조용히 일어나 따뜻한 물을 가져왔다.“몸이 안 좋아?”강하리는 물컵을 받았지만 입을 대지 않고 바닥에 깨진 술잔을 내려다보았다.한참 뒤, 강하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잠깐 전화 좀 해도 될까?”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말리지 않았고 강하리는 휴대폰을 들고 방을 나와 조용한 곳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신호가 몇 번 울린 뒤, 전화가 연결되었다.여전히 느긋한 구승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배경음악은 시끄러웠지만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벌써 파티 끝났어?”강하리는 아마도 과거의 경험 때문에 자신이 너무 예민한 건 아닐까 싶었다.모든 것이 순조롭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지곤 했었다.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최대한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직이야. 그냥... 너무 늦지 말라고.”“걱정 마. 늦지 않을게.”구승훈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고 다정했다.전화를 끊은 강하리는 다시 심씨 가문에 전화를 걸어 연정이의 안부를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더 이상 파티에 있을 기분은 아니었다.그녀의 분위기가 달라진 걸 눈치챈 친구들은 자연스레 자리를 정리했다.강하리가 심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는 밤 11시에 가까웠다.집 안은 여전히 분주했고 거실에는 장식들로 가득했다. 심지어 대문에도 큼직한 축하 문구가 붙어 있었다.하얀 눈밭 위에서 더욱 선명하게 빛나는 문구가 묘하게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즐거운 웃음소리 속에서 그녀의 마음도 차츰 차분해졌다.백아영이 그녀를 보자마자 다가와 말했다.“빨리 씻고 쉬어.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잖아.”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침실로 향했다.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휴대폰에 메시지가 와 있었다.[자기야,
구승훈은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고 누구도 감히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그는 축 처진 채 소파에 기대어 손에 든 술잔을 느릿하게 굴렸다.그때, 문이 열리며 몇 명의 여성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구승재는 그녀들의 의도를 알고 있었지만 내켜 하지 않으면서도 별다른 제지는 하지 않았다.그때 누군가가 구승훈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구승훈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자 그의 서늘한 시선에 겁먹은 여자가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설마, 이제 와서 몸 깨끗이 지키겠다는 거야?”구승훈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넘기며 대꾸했다.“집에서 아내가 엄하게 관리하거든.”그 말이 끝나자마자 방 안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구석에 앉아 있던 안현우가 구승훈 앞에 서 있는 여자에게 슬쩍 눈짓을 보냈다.그녀는 눈치 빠르게 술잔을 들고 다시 구승훈에게 다가갔다.그러더니 휘청거리며 일부러 손에 들고 있던 술을 그의 옷 위로 쏟았다.순간 얼어붙은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구 대표님, 죄송해요. 정말 실수였어요.”구승훈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짧게 내뱉었다.“꺼져.”그 말 한마디에 여자는 눈물을 글썽이며 황급히 방을 뛰쳐나갔다.구승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안현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안현우는 피하지 않고 오히려 도발적인 시선으로 맞섰다.“화장실 가서 닦아.”그러나 구승훈은 그 말을 무시한 채 옆에 놓인 외투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다들 즐겁게 놀아. 오늘은 내가 계산할게.”그가 나가려 하자 구승재는 안현우를 매섭게 흘겨보더니 이내 형을 따라갔다.“형, 화내지 마. 그런 놈들 때문에 기분 망칠 필요 없어. 오늘은 형이랑 형수님의 좋은 날이잖아. 즐겁게 보내야지.”그 말에 걸음을 멈춘 구승훈은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방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가식 떠는 꼴 좀 봐. 마치 여자 안 만나는 사람처럼. 그리고 그 강하리,
천아름이 정한 장소는 바로 바였다.구승훈은 차를 세우며 강하리를 바라보며 말했다.“너무 많이 마시지 마. 천아름이랑 엉뚱한 짓 하지 말고.”강하리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당신도 마찬가지야. 결혼식에 지장 생기기만 해, 어떻게 혼낼지 두고 봐.”그녀는 가볍게 구승훈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차에서 내렸다.강하리는 눈 속에서 멀어지는 구승훈의 차를 한동안 지켜보다가 바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하지만 그녀가 바에 들어서려는 순간, 문득 구승훈의 차를 바싹 따라붙는 차 한 대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지만, 차는 금세 사라지고 없었다.왠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했으며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하여 눈꺼풀이 떨렸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휴대전화를 꺼내 구승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조심히 가.]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응. 파티 끝나면 준봉이에게 전화해. 준봉이가 데려다줄 거야.][알았어.]강하리는 메시지를 확인한 후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고 룸 안으로 들어갔다.룸 안에 들어서자 그녀는 깜짝 놀랐다.손연지와 천아름만 있을 줄 알았는데, 안예서와 회사 직원 몇 명, 그리고 연성시에서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까지 모두 와 있었다.모두 그녀를 보자마자 달려와 환호성을 질렀고 그 순간 그녀의 휴대전화는 순식간에 압수당했다.“오늘 밤, 남자랑 연락하는 사람은 없어!”강하리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그들의 장난을 가만히 지켜보았다.한편, 구승훈이 클럽에 도착하자마자 한 남자가 그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방 안은 담배 연기와 술 냄새로 가득했고 사람들은 저마다 술을 마시거나 카드 게임을 하며 떠들고 있었다.몇몇은 옆에 여성을 두고 있었고 분위기는 자유로웠다.구승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형!”구승재가 반갑게 눈을 반짝이며 다가왔다.구승재의 목소리에 방 안의 시선이 일제히 구승훈에게로 향했다.그리고 바로 그때, 방구석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구승훈, 정말 오랜만이네. 강하리와 결혼하다니, 놀랍군
구승훈은 강하리와 나란히 걸으며 인수 건에 관해 이야기했다.두 사람은 다정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었고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친밀해 보였다.멀리 차 안에서 임희주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두 사람을 응시했다. 핸들을 꽉 잡은 그녀의 손은 손끝까지 피가 가시지 않은 듯 창백했다.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휴대전화 화면에 뜬 전화번호를 본 임희주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질렸다.무의식적으로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망설이던 손가락이 움찔거리더니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반대편에서 여초연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됐어?”임희주는 긴장된 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답했다.“구승훈 씨가 그 방법을 받아들이려 하다가 강하리가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계획이 틀어졌어요.”한동안 저쪽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자 침묵 속에서 임희주의 손가락이 떨렸다.“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에는 반드시...”여초연은 가볍게 웃으며 말을 끊었다.“그랬으면 좋겠네. 임희주,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그러고는 전화를 끊었다....결혼식 전에 인수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싶었던 강하리는 철저한 계획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신혼여행을 떠나더라도 인수 과정이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그녀는 업무에 매달리고 있었다.눈 깜짝할 사이에 결혼식 전날이 되었다.회의실에서 서둘러 나와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려던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손연지였다.“손연지?”“오늘 저녁에 뭐 할 거야?”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천아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하리는 웃으며 답했다.“아무 계획 없어.”“좋아! 우리 싱글 파티하자. 결혼 전날에는 예비부부가 만나면 안 된다는 말 들어봤지? 혹시 구승훈이랑 붙어 있으려고 했던 건 아니지? 그럼 너무 재미없잖아.”천아름이 말을 마치자 손연지도 옆에서 거들었다.강하리는 거절하기 어려워 구승훈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곧바로 답장이 왔다.그가 보낸 것은 대화 캡처 화면이었는데 구승훈 역시 친구들에게 싱글 파티에 끌려가고
강하리는 임희주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구승훈을 돌아보며 말했다.“화장실 좀 다녀올게.”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임희주의 얼굴은 핏기가 가실 정도로 창백해졌다. 그녀는 구승훈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구 대표님, 사모님이 하신 일들 다 알고 계세요?”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대답했다.“알아요.”임희주는 순간 멍해졌다.어제 구승훈이 그녀를 찾아와 약효를 최대한 발휘하는 방법에 대해 다시 한번 물었을 때, 그녀는 그가 그 방법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늘 직접 강하리를 찾아온 것이었다.하지만 그의 반응은 예상과 완전히 달랐다.“그럼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건가요? 지금 제 진료소는 폐쇄됐고 면허증까지 압수당했어요. 더 이상 치료를 받고 싶지 않으세요?”구승훈은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임 선생님, 선생님의 방법이 효과적이라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심리 상담사는 많아도 제 아내는 하나뿐이에요.”임희주는 창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썼다.“구 대표님, 저는 제 본분을 다했을 뿐이에요. 그게 잘못된 건가요?”구승훈은 여전히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는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임 선생님, 만약 선생님이 제 아내에게 찾아가지 않았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복잡해지지는 않았을 거예요.”“저는 단지 대표님의 건강을 위해 사모님께 설명을 해드렸을 뿐이에요!”“하지만 전 분명히 말했어요. 아내에게 가지 말라고.”구승훈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어졌다.임희주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그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강하리가 화장실에서 돌아왔을 때는 임희주가 이미 자리를 떠난 뒤였다.강하리는 무심한 듯 구승훈을 흘끗 바라보며 테이블 위의 서류를 챙겼다.이때, 구승훈은 갑자기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아직도 화났어?”강하리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당